존 웨슬리의 족보와 생애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8세기 영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이고 통전적 신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교회 행정가이었다. 그는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바판하므로 거기서 파면되었고 부득이 감리교회를 창설하여 미국 선교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가 1885년 아펜젤라 목사에 의하여 한국에 선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존 웨슬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웨슬리가 자기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친 조상들에게 찬사를 드리는 간접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이 그에게 맡기신 선교사업을 위한 준비가 그가 이 세상에 오기전에 이미 그의 조상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예레미아처럼 하느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어떤 뜻을 두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아 1:5). M. 에드워즈는 웨슬리의 단절 없는 선교적 열정의 근원은 그의 혈통에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스스로 자기의 족보나 사회계층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회심 이후 선교에 열정을 쏟으면서 하느님이 자기를 선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조상들을 통해 준비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리뎀은 웨슬리의 조상의 탁월한 전통을 요약하기를 "청교도사상(Puritanism)의 지적, 문화적 및 종교적 절정"이라고 하였다.

웨슬리의 족보는 증조부에게 까지 올라간다. 증조부의 이름은 바돌로미우 웨스틀리(Westley)이다. 성에 붙은 "t"는 그의 아버지가 옥스포드대학에 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증조부는 1640년경부터 교구장으로 지냈는데 1662년에 청교도란 명분 때문에 알링톤 교구에서 추방당한 저명한 지도자이었다. 추방당한 후 그는 그 지역에서 박해를 당하는 비국교도(청교도)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의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옥스포드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교구에서 추방당하여 어려울 때 의학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671년에 서거하였다.

웨슬리의 조부는 존 웨스틀리이다. 그는 "용감하고 재치가 넘치며 학자적이고 순회 전도자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에게서 그의 손자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 하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부총장인 청교도 목사 존 오웬의 제자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대학 동기들 가운데는 유능한 청교도 지도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특수 교회"와 관계를 갖고 지역 교회에서 설교, 부두 선교, 순회 전도 등을 통해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그는 감독에게 사제 안수를 받지 아니하고 청고도에 속한 고시관에게 목사 인준을 받았다. 그는 감독제도를 반대하였고 예전 사용을 거부하였으며 투옥까지 되었다가 1662년에 해직되었다.


웨스틀리는 그의 부친조다 조금 먼저 불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텔포드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순회 목회, 어부들에 대한 그의 관심, 자기의 원칙에 대한 철저함, 영혼 구원에 성공 및 단조로운 경건 생활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유명한 손자에게서 재현되었다." 웨슬리가 조부의 일기를 읽고 매우 귀중하게 여겨서 자기 일기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조부의 이러한 목회와 사상이 그가 근대의 위대한 다원 선교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존 웨슬리의 외조부는 사무엘 애니슬리(Samuel Annesley)이다. 그는 청교도적 비국교인 중 가장 저명한 사람으로 청교도들의 대감독으로 인정 받았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독자로서 옥스포드 퀸스 대학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하였고 1648년에 법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는 1644년 안수받고 해군 군목으로 봉직한 후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가 목회한 세인트 가일스 교회는 존 폭스와 존 밀턴 같은 유명 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역사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설교집은 "청교도의 양심의 신학과 양심에 의한 생활에 관련된 문헌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니슬리 박사는 1662년 영국 국교에서 추방된 후에도 계속 청교도들을 위해서 설교하였고 그가 교우들과 함께 마련한 리틀 세인트 헬렌스에 있는 집회장소는 비국교도들의 거점이 되었다. 그는 30년 이상을 런던 지역에서 청교도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대추방(Great Ejection) 후에는 비국교 성직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적인 안수를 집례하였다. 애니슬리는 성만찬 예식을 올릴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의 좌우명이었고 또한 존 웨슬리의 것이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혈통 속에는 외조부의 청교도 정신이 깊이 수며든 것이다.

웨슬리가 조상으로 부터 위대한 청교도적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유산은 부모의 영국 교회에 대한 헌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부모는 영국교회와 강한 유대를 가졌지만 자기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웨슬리가 태어난 "엡워드(Epworth)의 목사관은 고교회적 분위기를 지녔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청교도 가정이었다"(A. W. 해리슨). 따라서 웨슬리의 인격형성에는 청교도적인 것과 성공회적인 것이 융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게는 "성공회의 제도 및 권위와 청교도의 철저한 창의성과 금욕주의가 결합된 것이다"(카드만).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청교도들이 겪는 궁핍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14세까지 무료 학교에 다녔고 그 다음에는 청교도 자선가들의 도움으로 스텝니에 있는 청교도 학교와 스톡 뉴잉턴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그 대학의 학장인 찰스 모턴은 추후에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그의 학우 중에는 "로빈손 크루소"의 저자인 다니엘 데포가 있다.


사무엘은 대학을 마치면서 비국교도들을 위해 목회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교육과 연계하여 비국교도의 성공회에 대한 비방을 연구하고 논박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심도있게 연구한 결과 성공회의 입장이 합법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가정의 청교도적 전통과 성공회의 입장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열정적인 비국교도에서 감독 제도의 철저한 지지자로 선회한다. 그 후 삼우엘 만큼 헌신적인 일꾼이 영국 교회에는 없었다고 한다.


사무엘은 성공회의 강한 지지자가 되므로서 그에게 옥스포드 대학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실습 준비로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웨슬리 연구가로 유명한 슈미트 교수의 말과 같이 사무엘의 유별난 생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첫째로 그는 청교도가 강조하는 바 참회, 회심 및 신생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였고, 둘째로 그는 계몽주의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1690년에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제도 교회의 지지자가 되었지만 실상 그의 관심사는 교리적이거나 또는 목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교권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몸은 성공회 안에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는 임종시에 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내적 증거, 내적 증거, 이것이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은 전형적인 청교도적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순수한 복음을 설교한 족상들의 계보 속에 포함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웨슬리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일등 공신은 그의 어머니 스잔나 웨슬리이다. 그녀는 1688년에 사무엘과 결혼하였는데 애니슬리 박사의 가정에서 진귀한 전통을 가지고 왔다. R. 몽크의 말과 같이 "애니슬리 가정은 교육적인 표준과 엄격한 종교적 및 도덕적 교육을 병행하는 청교도 가정의 탁월한 본보기였다. 더욱이 이 가정은 비국교의 주심이었기 때문에 자녀들은 격렬한 신학 토론에 접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목회 초기에 교리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때 마다 어머니의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수잔나도 자기 남편과 같이 비국교도의 길을 떠나 평생을 성공회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기의 청교도적 유산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혈맥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녀들에게 준 인격적 헌신과 교육, 이 두 가지는 주로 청교도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성공회와 가톨릭 서적을 폭넓게 읽었으나 영혼의 양식은 청교도 고전에서 찾았다. "그녀의 주밀하고 짜임새있는 시간표, 그녀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명상과 자기 성찰을 위해 정한 규칙적인 시간, 신앙 일지의 기록, 엄격한 청교도 안식일의 준수 -- 이것들은, 존 웨슬리가 활동하기 오래 전에 통용되던 청교도의 중요한 낱말을 사용한다면, 그녀의 삶의 "법칙" (method) 전체이었다"(존 A. 뉴턴).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삶의 철저한 법칙이 곧 감리교(Methodist Church)를 낳는 원천이 되었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이렇듯 성공회와 청교도의 혼합된 유산이 존 웨슬리에게 미친 결과는 분명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강한 규범 의식과 내부로부터 혁신하려는 의욕이 넘치는 영국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예전(litergy)을 좋아하였고 신조와 교훈은 복음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선교적 활동에 있어서는 비국교적 조상들의 정신을 더 많이 활용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혼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교회의 기존 질서가 그의 길을 가로막을 때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제거하였다. 그의 피 속에 숨겨져 있는 반항자가 뛰쳐나오곤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존 웨슬리의 족보를 통해 조상의 신앙적 유산이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보았다. 신앙적 유산이나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대 가정의 풍토 속에서 웨슬리의 족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스케빙턴 우드의 웨슬러의 선교적 사명  이 계 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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