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repentance / metanoia / epistrephe


I. 이 말은 다양한 관념들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단어들을 번역한 용어이다. 

 그 관념들의 예를 들자면,

A. 마음의 변화,

B. 후회 또는 가책의 감정,

C. 윤리-종교적(ethico-religious) 의미의 회개로서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등이 있다. 


이 마지막 세번째가 성경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강조점을 부정하는 측면에 두면 죄,불순종, 반역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긍정적인 측면에 강조점을 두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로운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1. 용어:  구약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은 shub(돌아오다, 렘 8:4, 겔 33:19)이다. 

이 말은 예언서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보다 덜 자주 쓰이는 말은 naham(후회하고 뉘우치다, 출 13:17, 시 106:45)이다. 

십인 역은 shub를 epistrephon(돌아서다)과 apostrepho(돌아오다)로 번역하였다. 

또는 그것은 naham을 metamelomai(마음을 바꾸다)와 metanoeo(회개하다)로번역하였다. 

신약은 칠십인 역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shub의 사상 내용을 표현하는데 metanoeo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히브리 성서의 다른 희랍어역이나 헬레니즘적 유대교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신약에서 metanoeo(회개하다)라는 동사는 32번 나온다(마 3:2, 4:17, 11:20 등). 

그리고 metanoia(회개)라는 명사는 22번 나온다(마 3:18, 막 1:4, 눅3:3 등). 

 metamelomai(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는 6번 나온다. 

epistrepho라는 동사는 '돌아오다, 회심하다'라는 의미로서 16번 사용된다(마 13:15, 눅 22:32, 행 15:19, 벧전 2:25). 

epistrephe(돌아옴, 회심)란 명사는 행 15:3에서나타난다.


2.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고,

그 복종을 수행치 않을 때에 심판 아래 처해지며,

죄를 끊고 그에게로 돌아옴으로써만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다. 


전쟁에 지거나 흉년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것으로서 이해되며, 그것은 곧 회개해야 하는 때이다.

느 9장에서 기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전국적인 회개의 날들이 있다. 


또한 개인은 심판을 경험한 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수도 있다.  마치 아합이 엘리야의비난을 들은 뒤 행한 것처럼 말이다(왕상 21장). 

옷을 찢는 것, 금식하는 것,삼베 옷을 입는 것, 재 위에 앉는 것 등 회개의 의식이 있으며 회개의 전례들도 있다. 


이것의 주목할 만한 실례들로서는, 사 63:7-64:12, 단 9:4-19, 호 6,1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개인적인 것이며 죄는 하나님과의잘못된 관계에 근거해 있다고 강조한다. 


회개 역시 개인적인 것이다.  그것은전인격의 방향을 새로 잡는 것이고 여호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순종,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모든 우상들의 거부, 인간적 도움에 대한 의지의 거부 등에 이른다. 


죄와 회개에 대한 개인적 이해의 성장과 함께 종교적 형식주의의 비판이 수반하게 된다(호 6:6, 암 5:21-24). 

회개는 삶의 갱신이며, 그것은 새로운 마음과 영을 요구한다(겔 18:31).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다(사 44:22, 렘 31:33, 겔11:19, 36:26).



3. 신약에서:  세례 요한은 예언자적인 회개의 요구를 계속한다. 

"회개에합당한 열매를 맺고...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8,10). 


새로운 발전은 그가 회개를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죄의 용서를 주는 세례에 관련시킨 것이다.

예수의 설교는 세례 요한의 것과 비슷하다.  회개는 하나님의 왕권적 지배하에서의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막 1:15, 눅 13:1-3).  그것은 전인격을 포함한다.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참조. 막 7:15).  그는 죄의내면성의 해석을 통해 예언자적 요구를 심화시킨다


(마 5:28).  이것은 십리를동행하라든가(마 5:41), 원수를 사랑하라든가(44절) 하는 그의 주장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의 철저한 거부(마 5:29, 6:19,7:13, 막 3:31-35, 10:21) 등에서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회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천국에들어가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자, 영접하는 자, 작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이다.


그는 세리들 및 죄인들과 교유함으로써,

그리고 특히 그의 행동을 신학적으로정당화 시킴으로써-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바리새인들을 성나게 한다.

회개에 대한 예수의 설교에서 새로운 요소는 이 점에서 나타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틀림없이 새로운 마음과 영을 줄 것을 알고 있다. 

장 깊은 의미에서의 회개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로부터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를 기대하고 있다(겔 37장). 

예수는 그 때가 이미 왔다고 선포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이제 더 이상 요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가능성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기 때문이다(막 10:27).  회개는 신앙에 의해 완성된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은 이제 율법에의 응답이 더 이상 아니며, 그것은한 인격에의 응답이다. 

즉 그것은 제자직(descipleship)이다.  예수는 권위있는 확신을 가지고 율법과 예언자들의 완성이 곧 자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개와 신앙은 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나사렛 예수가 말씀한 하나님의 약속을받아들이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사도시대 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회개는 기본적인 것이다(행 3:19, 5:31,8:22, 고후 7:9, 히 6:1, 계 2:21).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시초인 세례와 관련을 갖고 있다(행 2:38, 13:24, 19:4). 

그것은 신앙과 관계되어 있고(행 20:21, 26:18,


히 6:1), 또한 용서와 관계되어 있다(눅 24:47, 행 3:19, 8:22).  그것은 악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고(행 3:26, 8:22, 고후 12:21, 히 6:1,계 2:22, 9:20),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행 20:21, 26:20, 벧전 2:25,계 16:9),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있다(행 3:19, 5:31, 17:30). 

회개는 사람의 책임인 동시에(행 2:38, 3:19, 8:22, 17:30, 26:20), 성령을 통한(행 10:45, 11:15)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3:26, 5:31, 11:18, 롬 2:4, 고후 7:9, 딤후2:25, 계 2:21).

'회개'란 말이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그리 자주 나오지 않으며, 요한복음이나 요한의 서신들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회개의 위치가 저하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새로움의 요소를 강조하는 특별한 신학적 용어들이 발전된것임을 시사한다. 


바울에게 있어서나 요한에게 있어서 회개는 신앙에 포함된다. 

바울은 신앙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옛 성품의 죽음, 새로운 인간성을 입음, 삶의 새로움으로의 부활, 새로운 창조 등으로서 말한다. 


요한의 문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재탄생, 죽음으로부터 삶으로의 움직임,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움직임,

또는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 등으로서 묘사한다.



II. 1. 구약에서의 회개


이웃 종교들에 비해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의식들이 본래적으로 두드러지게 더 유효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희생제사의 용서의 신조에서 뒷받침된다. 


그 필요한 의식은 제사장이 수행하지만 그 원하는 목표인 용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해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 4:26외 여러 곳에 있음).


더욱이 속죄(contrition)와 고백은 모든 용서의 의식들에서 뺄 수 없는 요소이다. 

그 의식들이 속죄제이든(레 5:5-6) 또는 금식을 위한 연도(litanies)이든(욜 2:12-14, 삼상 7:5-9) 말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개입-양심에 있어서든 행위에 있어서든-이 불가피하다. 

즉 용서를 희망하거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로부터 떠날것을 결심해야 한다

(예. 삼하 12:13 이하의 다윗; 왕상 21:27-29의 아합). 


편은 용서를 위한 모든 기도에 있어서 참회(penitence)와 고백이 필수적 요소임을 보여주는 매우 많은 증거를 제공한다(시 32:5, 38:18, 41:4, 렘 3:40-42).
속죄의 많은 동의어들을 고찰해보면, 하나님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회복하려는인간의 노력에 있어서 속죄가 우선적으로
요구됨이 입증된다. 


그 예를 들자면,하나님께 간구함(삼하 12:16, 21:1), 하나님을 찾음(암 5:4),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춤(레 26:41),

하나님에게 마음을 향함(삼상 7:3) 등이 있다. 


울부짖는것, 금식하는 것, 옷을 찢는 것, 삼베 옷을 입고 재를 뿌리는 것 등의 참회의식들에 있어서 만일 마음이 수반되어 있지 않다면,

예언자들은 이 의식들을 철저히 비난한다(사 1:10 이하, 29:13, 호 7:14, 욜 2:12-13).


그와 동시에, 내면적인 속죄는 반드시 외면적인 행위들로 나타나야만 한다. 

후회는 행동으로서 변화되어야만 한다. 


이 과정에는 두가지의 부차적 단계가 필요하다. 

첫째는, 악한 행동을 멈추는 부정적인 단계이고(사 33:15, 사15편),

둘째는 선을 행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단계이다(사 1:17, 렘 26:13,암 5:14-15). 


또한 이 과정에서의 사람의 적극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말들을 고찰해보면, 속죄가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이 입증된다. 

그 예를 들자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함(수 24:23), 마음을 새롭게 함(겔 18:31), 마음을할례함(렘 4:4), 마음을 씻음(렘 4:14), 묵은 땅을 기경함(호 10:12)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성경의 참회에 관한 글을 지배하는 하나의동사 shub(돌리다, 돌아가다) 속에 포함되고 요약된다. 

이 어근은 자신 안에서회개의 두가지 요구-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향하는 것-모두를 결합시킨다. 


돌아선다는 말이 내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죄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올바른 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돌아서려는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사람에게 주어지고 죄인은 그의 운명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있다는 것이다.


예언자로서 집필한 최초의 사람인 아모스가 회개라는 말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사용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암 4:6-11), 

회개라는 용어가 예언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고대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회개의 개념은(비록 shub란 말이 그대로 쓰이지는 않았어도) 바로에 관한 고대의 설화들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출 7:3-4, 10:1, 11:10),

엘리의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삼상 2:25). 


이러한 이야기들에 따르면하나님이 고의적으로 그들의 회개하려는 마음을 막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회개의 주제는 다윗(삼하 12:13-14, 24:10-14), 아합(왕상 21:27-29), 요시야(왕하 22:18-20)와 같은 초기의 영웅들의 이야기들에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초기 설화들의 회개는 예언자들이 가르치는 것과동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 설화들에서 회개는 무력하다. 

기껏해야 그것은 응보(retribution)를 경감시키거나(다윗) 그것을 연기하는 것 뿐이다(아합, 요시야).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전혀 소용이 없다(예를 들면, 신 3:23-26에서의 모세 자신의 경우). 

제사 문서와 신명기 문서의훈계들에서 회개가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레 26:40-42, 신 4:29-31, 30:1-10),

여기서는 예언자들에게서와는 반대로 회개가 단지 벌을 중단시킬 수만 있지 그것의 시작을 막을 수 없다. 

이들 이야기들에서 볼 수 있는 회개에 대한제한된 시야는,

니느웨 백성들이 그들의 심판을 피하는데 성공한 것과 대조해보면 가장 잘 비교가 된다(욘 3:1-10).


둘째, 초기 설화들에서는 회개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인간의 덕으로서표현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하도록 요구하거나 그의 예언자로 하여금 그를 회개하도록 깨우치게 하지 않는다. 


모세의 역할은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진노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다(출 32:11-13,31-34, 34:9, 민 12:11-13, 14:13-19, 신 9:16-29). 

그러나 그는 한번도 그의 백성을 회개케 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도록 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아브라함(창 18:23-33), 사무엘(삼상 7:5-9, 12:19-25), 엘리야(왕상 17:17-23), 엘리사(왕하 4:33, 6:15-20), 욥(욥 42:7-9) 등와 같은 다른 중재자들도 초기

설화들에 등장한다. 


이들 의로운 지도자들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향해 용서를 구하나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촉구하지는 않았다.

제사법전이 이 개념을 쇄신시켰다는 견해는 이러한 배경에 들어맞지 않는다. 


hitbadah(고백하다, 레 5:5, 민 5:7)이나 yasham(죄의식을 느끼다) 등의단어들에서 시사되는 바와 같이, 속죄제의 과정 속에는 회개의 개념이 내포되어있다. 

하지만 '회개하다'를 의미하는 shub란 말은 제사문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은 사경(Tetrateuch)과 초기 설화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문헌에서 shub가 네 구절에서 나오기는 하나 그것은 정반대의 의미로(배교의 의미로서) 사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뜻한다(민 14:43, 32:15, 수 22:16,18,23,29, 삼상 15:11).  초기의 자료들이기 때문에 이는 예상할수 있는 바이며,

이스라엘이 배교의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회개하다'의 의미를 가진 shub는 구약에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다. 

8세기의 예언자들인 아모스.호세아.이사야의 글들에 23번, 예레미야.에스겔서에50번, 포로 후기의 9권의 책들에 28번 등. 

반대로 '회개하다'와 비슷한 의미를가진 yasham(죄의식을 느끼다)은 단지 제사법전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제사문서는 shub가 회개를 가리키는 표준 용어가 되기 이전에 한 때 참회의 용어로서 yasham를 사용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shub란 어근이 다른 유사한 모든 단어들을 압도해 버렸다. 


회개에 대한 제사법전의 교리가 포로 시기 이전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부가적인 고찰을 통해 뒷받침된다. 

제사문서에 있어서 회개의 힘은고의적인 죄도 비의도적인 죄로 경감시킬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문서는 죄를 완전히 지우기 위해서는 속죄제(kapar)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회개 자체로써 죄를 없애기에 충분하다는 예언자적인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

예언자 자신들 사이에서도 회개의 기능에 대하여, 특히 그들의 종말론적예언에 있어서 서로 이면을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이사야는 그의 활동 초기에회개의 촉구를 철회한다(1:16-20과 6:9-13의 비교). 

하나님이 깨끗게 한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회개의 대열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어

그들만이 새로운 시온에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32:1-8,15-17, 33:5-6 등). 

질적으로 그는 그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이러한 내용이 담긴 말로써 부르기까지한다. 


"남은 자(만)이 돌아 오리라"(사 7:3).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의 가르침에서 회개의 촉구는 포기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사람이 자기 갱신을 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에 절망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어 죄를 이기게 하고 영원한 용서를 받게 하리라고 주장한다(31:33, 신 30:6,겔 36:26-27).


2. 신약에서의 회개:  '회개'라는 말은 희랍어의 명사 metanoia를 신약에서 번역하여 쓰는 말이며,

동사 '회개하다'는metanoeo를 번역할 말이다. 


칠십인 역에서 metanoeo와 이 동의어인 metamelomai는 주로 히브리어 단어인 naham번역한 것이다. 

naham은 사람이 이전의 결정이나 행동을 후회하여 유감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렘 8:6).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meta-noia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Plato, Euthydemus 279C; 잠 14:15, LXX).


그런데 종종 이 말은 과거의 결정에 대한 불만족, 즉 '후회한다'는 뜻을 또한내포하기도 하였다(마 27:3). 

하지만 신구약중간기 문학에서 metanoeo는 epis-trepho와 동의어가 되었다. 


epistrepho는 '하나님께로 돌아섬(또는 돌아감)',

즉 종교적 및 도덕적 의미의 전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naham을 번역하여 사용된 희랍어 용어였다(스불른의 유언 9:7).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섬 또는 돌아감은 종종 금식과 같은 어떤 공식적 행위를 수반하였다.


(시므온의유언 3:4, 르우벤의 유언 1:9, 산헤드린 25b, 눅 19:8, 행 26:20). 

유대교에서의 이러한 발전을 생각해 볼 때, 불가타역에서 신약의 용어 metanoeo가 'poeni-entiam agite'(참회하다, 행 2:38, 위클리프역 성서)로

번역되게 된 것은 결코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1) 예수아 세례 요한의 말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서의 회개에 대한 유대교의 이해는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기본적인 선포,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막 1:15; 참조. 마 4:17)로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초대교회는 회개의 촉구를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라"는 의무로서 이해하였다(마 18:3). 

탕자의 비유와 같은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의 이러한'돌아감'을 묘사해 주었다. 


회개의 촉구를 동반하는 종말론적 말씀들이 히개의급박성을 강조했던 반면(왜냐하면 주님은 밤에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마 24:42-44, 눅 12:39-40; 참조. 살전 5:4, 계 3:3), 예수의 사역의 전체적인기능은 회개가 일어나도록 시간을 허용하는 것(지연의 의도)이었다(눅 13:6-9).


예수의 가장 혹독한 책망은 이러한 지연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거나또는 지연이 주어졌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위에 내려졌다(마 11:20-24,12:38-42, 24:48-51, 25:1-13, 눅 10:13-15, 11:29-32).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설교를하였다(마 3:2). 

그러나 그는 여기에 첨가하여 죄들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마 3:11, 막 1:4, 눅 3:3, 행 13:24, 19:4). 


그에 의하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로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눅 3:8, 마 3:8). 

사람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의 연결은 이미 신구약중간기의 유대교에서 나타났었다(므낫세의기도 7; 갓의 유언 7:5). 


그러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는 그 전에어느 때에 있어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쿰란 공동체의 정결(lustration)은 회개와 청결을 수반하였으나(1QS 3.4,9; 4.21; 5. 13-14), 그 씻는 것은 세례도 종말론적 행위도 아니었다. 

세례의 기원이 어떻게 되었든, 신약에서 그말이 무관사로(희랍어에서 정관사가 없음) 쓰인 것이나 또는 초대교회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된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이 참회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2) 회개와 개종

당시의 헬레니즘과 헬레니즘적 유대교에 있어서 '돌아서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충성과 철학적인 견해의 전환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Epictetus, Discourses I.iv.18; 잇사갈의 유언 6:3).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에서 새로운 종교로의 개종을 가리키는 말은 epistrepho였다. 

살전 1:9에서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왔는가"를 설명하는 데 이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이전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갈'까봐걱정하였다(갈 4:9; 참조. 1:6). 

따라서 바울이 '회개'란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개종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태도의 변화(고후 7:9-10) 또는 도덕적 변화(고후 12:21, 롬 2:4)를 의미하였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개종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돌아선다'는 똑같은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9:35, 11:21, 14:15, 15:3,19, 26:18). 

단 이제는 metanoeo가 동의어로서 첨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감, 3:19, 26:20). 

헬레니즘에 있어서나기독교에 있어서나 회개라는 말이 점차로 돌아선다는 말을 대신하게 되었다

(Poimandres I, 28; Apocry Jn II.9,20-22; 13:23-14:2). 

신약에서 회개의 의미는 종말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철저히 돌아간다는 뜻으로부터 이교도적인 삶을뉘우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벧후 3:9).  회개의 세례가 그토록 중요하게 된 것은 이러한 개종의 성격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행 2:38).


(3) 교회의 갱신과 개인의 재위탁(personal recommitment)

요한계시록의저자는 회개를 이교도적 생활방식들로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전환하는 것으로서생각하는 초대교회의 관념을 갖고 있었다(9:20-21, 16:9-11). 


그러나 그는 또한 그것을 신앙의 재확인으로서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곱 교회들에게보내는 편지들에서 호개, 즉 기독교적 위탁(Christian commitment)의 갱신을 호소하였다(2:5,16,21-22, 3:3,19). 

디모데후서의 저자도 회중들 가운데서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에 관해 이와 유사한 관심사를 갖고 있다(2:25). 

그러나 그맥락으로 볼 때 그들의 문제는 신앙에 대한 냉담함보다도 교회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에 있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및 히브리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궁극적 현현을 보았다. 

회개(개종)는 궁극적인 진리의 수용이기때문에, 신앙의 변절은 그 진리를 소유하지 않거나 소유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요한일서의 저자는 믿음을 떠난 사람들은 그 진리의일부분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2:19).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더 이상 회개의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였다(6:4-6; 참조. 12:17).

사도시대 이후의 저자들도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고하였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 냉담함으로부터의 회개를 계속하여 촉구하였다(I Clem. 7).
그러나 회개는 잘못된 자들이 교회의 연합(unity of the church)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주로 의미하게 되었다

(Ign. Phila. 3:2).  이그나티우스는 이 연합을신학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서술하였다(Ign. Phila. 8:1; Ign. Smyr. 9:


1).  일부 선생들 또는 교회지도자들은 히 6:4-6을 철학적인 의미로서보다도 율법적인 의미로 분명히 해석하여,

'두번째 회개'의 방종의 위험성을 비난하였다(Herm. Mand. IV. 3.1). 

헤르마스의 목자서의 저자는 보다 목회적인 입장에서 서술하였는데,

그는 개종이 완전해야 한다는 그들의 의도에 동의하면서도,

그는또한 기독교인이 실패할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였다(Herm. Mand.IV.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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