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福音)     


복음이란 복된 소식(Good News)을 말합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소식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아주 좋은 정보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단순히 생활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의 좋은 정보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들의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주장하시는 우주와 인생의 창조주시며, 또한 통치자이신 신(神)으로부터 오는 아주 중대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을 알게 되면 인생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고, 이 세상이 왜 죄악으로 얼룩졌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불행의 삶을 사는지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그 해결책도 알게 됩니다.


[1] 신의 계시

‘계시’란 베일에 쌓인 것을 공개하는 것을 뜻합니다.

천지만물과 인생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는 처음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부모 자식과 같은 관계로 수시로 만나며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을 무시하고 죄를 범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까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실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보존하시고, 영생의 상태로 인도하시는 분인데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서 죄와 불행과 죽음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구원해주시려고 열심히 자신과 복음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준 이들을 가리켜 ‘선지자’라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 아들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의와 영생과 행복의 복음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목수 일을 하던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으나 사람들은 그 내면에 은밀히 숨겨진 정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목수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엄청난 일들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삼 년이나 동거하며 그의 신성을 직접 겪어본 12명의 제자들은 그의 생애와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핵심은 다음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것들입니다.


[2]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이들의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상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인식되기 어려운 존재지만 실제로 존재하시는 영적 존재입니다(요4:24). 영적 존재는 사람의 육적 기능으로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육체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부분이 열려질 때에는 영적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소위 ‘선지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영적 기능을 일깨워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책으로 기록하였으며, 그 중 일부가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전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66권으로 된 성경입니다.


오늘날 어떤 종교인들도 영적 존재들을 경험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영적 존재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천사, 혹은 귀신(타락한 천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이거나 죽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혹은 신령한 믿음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로서 경험하는 영적 존재들은 대부분 귀신의 영혼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원할 때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성령 충만의 상태 혹은 은사를 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3]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보이는 우주 만물의 물질세계를 지으셨으며(창 1:1), 또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도 창조하셨습니다(골 1:16). 구약 성경 첫째 책인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빛과 궁창, 바다와 육지 그리고 식물, 해와 달과 별, 조류 및 어류와 육지 생물들,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신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인 천사들의 세계도 창조하셨는데, 물질세계보다 먼저 지으셨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천사들 중에 하나님께 범죄하고 반역하는 이들을 가리켜 ‘귀신’ 또는 ‘마귀’라 하며, 이들의 우두머리를 사탄이라 합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 세상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친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주와 자연 만물을 보존하실 뿐 아니라 세계와 나라, 또한 개인의 삶까지도 통치하십니다. 창세기부터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기록들은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사람들의 삶 속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를 이루어주시려고 처음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중대한 삶의 기준을 설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여 잘 지킬 때는 생명과 행복이 영원히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생명도 행복도 깨어질 수밖에 없음도 경고하십니다.


[4]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은 창조하신 사람들이 에덴동산이란 곳에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해 정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여 주셨으며, 이 날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음을 조건으로 영생하도록 하는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으며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정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죽게 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물론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겠지만 육체는 일정한 연한을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과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금이 가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영생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며, 그 말씀 순종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적 결단에 의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사람을 죄와 죽음과 불행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차 경고하신 대로 사람들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습니다. 수명이 되거나 혹 병들거나, 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고 그 행위를 따라 천국 혹은 영적 세계의 감옥인 지옥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최초의 종교적 형태인 제사를 명하셨습니다. 어린 양을 하나님께 불에 태워드리는 형태의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일부 사람들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겼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사를 소홀히 여기거나 아예 무시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져갔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은 죄와 불행입니다.


‘죄’의 특징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죄를 범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며,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사람들의 삶에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살인과 음행과 온갖 악행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슬픔과 불행입니다.


[5] 사람들을 불러 구원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결코 사람들의 죄와 불행을 방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죄와 불행에 바진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처음엔 아주 순한 동물인 양의 희생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림으로서 그 죄를 사해주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수 있는 길이 연결되도록 정하여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자 하나님은 자기의 분신과 같은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를 통해 상징되었던 어린 양이었습니다. 어린 양 제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죄가 사함받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졌듯이 십자가 위에서 친히 희생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복 받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섬기는 종교는 이 구원과 관계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요,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신 그 조건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살 때에 오는 것입니다.


[6]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길

하나님은 약속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결혼 서약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부부로 맺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어김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신 영생과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전하신 모든 가르침(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온 세상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고 이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닮아 죄 없이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천국)을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또한 미래나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위해 주신 조건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노라면 결국 불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함으로서 저가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받아 죄사함 받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며, 또한 영원한 복을 받도록 조처하신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구원의 조건을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고치면 이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엄중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가 없어도 저를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는 선행이 필요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선행을 조건으로 할 경우, 그 누구도 그 선행으로서 구원에 합당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 영원토록 행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 끄덕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인격적 대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믿음을 위하여 언약을 맺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언약을 맺고, 이로서 세례를 받는 이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믿음 즉 언약으로 이루어진 믿음을 가질 때 죄사함, 영생, 영원한 천국의 행복을 누리도록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믿음의 약속으로 영생의 길로 나오시지 않겠습니까?


[7] 예수님께서 세우신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 교회

교회는 예수님께서 복음 전도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양육하시기 위해 십자가 희생과 복음을 통하여 친히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시고, 믿는 이들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시어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주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를 통하여 탄생하고 또한 양육을 받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마지막 날에 들어갈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직 성화되지 못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불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속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실망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교회를 통해서 전해지고, 또 이러한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이들을 잘 양육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사람들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 주변에는 바르지 못한 길로 인도하는 영적 사기꾼들도 있습니다. 보통은 이런 단체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선택하실 때는 이단이 아닌지를 살피신 후에 교회를 선택하시어 바른 믿음으로 확실한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8]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종말

사람들에겐 두 가지 종류의 종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주어진 생명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당해야 할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 역사의 마지막입니다.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 죽음과 죄와 불행이 가득한 세상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잠시 살다가 갈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후에 영혼으로서 잠시 천국(낙원)에 머물러 지내다가 마지막 종말의 날을 당하면 죽지 않을 몸 즉 부활의 몸으로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지 않고 죄에 머물기를 작정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지옥 형벌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종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종말이 이르기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게 돕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들도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전12:7).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모든 영혼들은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이 지으신 세계, 즉 죄가 전혀 없고, 영원한 생명, 완전한 행복이 보장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된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준비해주신 속죄의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으며, 지은 죄에 대하여 댓가를 치르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계속하여 우리가 보는 이런 세상이 계속되고, 또한 죽은 이들은 천국(낙원)과 지옥의 상태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역사적 종말의 날, 즉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어 믿는 이들은 구원하시고, 믿지 않고 끝까지를 죄를 고집하며 사는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때, 이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말의 때를 결정하셨습니다. 이때는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복음에 대하여 결단을 마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을 수용하는 이들을 구원하시어 죄와 사망과 불행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로 들어가 살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믿고 순종하느냐 믿지 않고 불순종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영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중대한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부디 하나님의 믿음으로의

초청에 응하시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준비해주신 영생과 영원한 행복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福音)이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복음이란 말의 뜻
Ⅲ.  복음의 내용
Ⅳ.  복음의 효능
Ⅴ.  맺는 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롬1:16-17 )


1. 이끄는 말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福音)이란 말처럼 흔하게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때로는 복음이라는 말이 기독교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복음에 대해 저마다 각각 다르게 이해하는 데서 문제가 되고 있다.

   단순하게는 “예수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말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 부요와 건강을 얻어 잘 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조금은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들 중에는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셨으니까 율법(律法)은 필요가 없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율법의 반대 개념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율법의 일부분은 아직도 그 기능이 남아 있어서 구원 받은 성도의 생활 규범(規範)이 되고 있어 복음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어떤 극단론자(極端論者)들 중에는 모든 제도나 형식을 무시하고 지상교회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복음적인 것처럼 주장하는가 하면, 혹자들은 사회 정의 구현(具現)이나 복지 증진을 위한 노력이 복음적인 행위로 알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서로 복음적이라고는 하지만 주장하는 내용은 모두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복음에 대한 견해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라서 이로 인한 교파 분열이나 사이비종파 속출은 물론, 기독교 신앙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기독교가 풀어야 할 당면 과제이다.

   현대 기독교가 안고 있는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이해의 접근 방법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기존의 방법대로 각 개인이나 교파들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리(敎理)에 기초해서 복음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복음에 대한 견해 차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각 교파의 주장이나 교리를 초월해서 성경을 기초로 복음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문제 해결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 교파가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리는 완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거나 오해에서 나온 결과일 수도 있다. 교리는 어디까지나 진보 아니면 퇴보적이고 가변적(可變的)인 것이다.

각 교파에서 현재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리들은 오랜 역사와 함께 여러 차례 수정 또는 보완(補完)을 통해 많은 진보 내지는 퇴보된 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많은 수정과 보완을 통해 진보 아니면 퇴보될 가변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교리를 기초로 복음에 대해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견해차는 더욱 극심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성경은 교리의 근본 원천으로서 불변적(不變的)이고 절대적이다. 따라서 수정이나 보완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진보나 퇴보를 허락하지 않는 보수적(保守的) 성향(性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복음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면 문제 해결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과연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전 포괄적인 절대적인 성경적 해답은 무엇인가?


Ⅱ. 복음이란 말의 뜻 

  구약성경에서 ‘복음’이란 용어와 동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동사에 ‘빠솰’(  )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proclaim good news)’,
또는 ‘승리의 소식을 가져 오다(to bring news of victory)’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래적인 언급과 함께 ‘약속하다’(promise)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시편 40편 9절이나 이사야 52장 7절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분사로는 ‘메바쉘’(  )이라는 용어인데 ‘하나님의 승리를 전하는 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 역시 이사야 52장 7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하라

사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신약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어는 ‘유앙겔리온’(  )이라는 용어인데 ‘기쁜 소식’(good news) 또는 ‘복음’(gospel)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헬라어 명사는 신약성경 가운데 바울 서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롬1:1-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 외에도 ‘유앙겔리제스다이’(  )라는 헬라어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to announce good news)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유앙겔리테스’(  )라는 헬라어는 ‘복음 전하는 사람’(preacher of the gospel) 또는 ‘전도자’(evangelist)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헬라어 어군들은 70인 역본에서 히브리어 ‘빠솰’(  )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사용한 용어들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복음(福音)을 “반가운 소식”(good news) 또는 “구세주(救世主)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 아니면 “복된 소식” 등으로 알고 있다.

  성서 대백과에서는 복음을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라고 인간을 부르시는 초청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에 의해 알려지는 한 사실(事實)의 선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이라는 용어에 대한 뜻이 여러가지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 모든 내용들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전해지는 복된 소식”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Ⅲ. 복음의 내용  

  앞에서 복음이라는 말의 뜻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복음이라는 말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신ㆍ구약성경은 복음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에는 복음이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들은 신약성경은 복음이고 구약은 율법이라고 이해하고 있고, 어떤 자들은 신약성경에서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같은 4복음서만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4복음서로 국한 되거나 신약성경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ㆍ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섭리 내용으로 그 범위가 넓어진다.
신ㆍ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섭리 내용에 나타나는 복음의 내용은 크게 세 구분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의 작정섭리이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 3:3∼6)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 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 3:7-11)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 안에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실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 하늘과 땅의 크기나 구조, 만물의 종류와 모양, 또는 우주의 운행과 질서, 역사의 진행과 결과, 또는 인간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예정 등 온갖 만사 만물이 모두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섭리 안에 포함(包含)이 된다.

(사14:24-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페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섭리는 복음의 내용의 영원한 기초이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으로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을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秘密)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엡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골4:3-4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하나님의 비밀은 아직 계시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복음의 내용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하나님의 비밀이 그 근본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복음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면서도 그 근본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일부러 회피(回避)하는 경향이 많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섭리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성숙된 교회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예정섭리에 대하여 심도(深度) 깊게 강조하여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의 근본 기초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섭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를 심어서 가꾸려는 자와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의 내용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예정을 포함하는)섭리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불가분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내용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섭리가 포함이 되어야 하며, 이를 근거로 나머지 복음의 내용 설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롬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섭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1∼2)

    인간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言約)은 하나님의 작정섭리를 근거로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을 따라서 인간에게 언약을 세우신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을 계시하시기 위한 언약섭리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으신 후, ① 생육 번성, ② 땅 정복, ③ 만물 통치의 3대 언약으로서의 복을 그들에게 처음으로 언약하셨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언약은 창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신 언약이다. 아담은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아담과의 언약은 장차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해 주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언약이었다.

(롬5:12-14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룻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와 같은 아담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곧 복음의 내용이며 복을 언약하는 복된 소식임이 틀림없다.

   아담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살아남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언약하셨다.

(창9:1-2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그 후, 노아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다시 복을 언약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의 내용은

① 자손이 생육하고 번창할 것,
② 온 땅을 정복하고 살 것,
③ 모든 것을 다스리고 살 것

등이다. 이 언약된 복의 내용은 일찍이 타락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세우신 언약의 내용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은 타락 전 아담과 세우신 언약이, 아담 타락 이후에도 유효(有效)하다는 증거로서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아담과 언약하신 복은 아담 타락과 무관하게 반드시 성취해 주신다는 확증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같은 내용의 복을 언약하시고 그대로 현세적(現世的)이고 모형과 그림자적인 것으로 성취해 주시는 섭리 내용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 섭리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출애굽기로부터 에스더까지의 내용에는 창세기에서 언약하신 복의 내용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성취되어지는 섭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는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첫번째 언약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섭리 내용이다.
    
여호수아와 사사기는 땅을 정복하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두번째 언약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섭리 내용이다.

룻기에서 에스더까지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세번째 언약이 성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욥기로부터 아가서에 이르는 시서에는 복을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양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는 언약대로 이루시려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교훈하며 예언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박용기,  진리의말씀사.  의미분석 셩경개론  1994년   pp.94-383)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복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 것은 첫 아담과 타락 전에 세우신 언약이 유효해서 둘째 아담 예수를 보내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언약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섭리는 복음의 본론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성취섭리이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제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4∼48)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섭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한 사역이시다. 하나님께서 첫 아담과 언약하신 복을 이루시기 위해서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는 언약의 자손으로 오셨다.

(갈3:15-16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이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사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예수의 잉태나 출생과 성장과정은 모두가 구약의 예언된 언약대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公生涯)의 모든 사역도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언약의 말씀들을 이루어진 것이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사역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셨다는 것을 밝혀준 바 있다.

(고전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의 내용에 예수의 잉태와 출생 그리고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등의 내용이 포함이 되는 것은 예수가 구약에서 언약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언약된 복이 이루어진 예수의 사건은 복음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창세 전에 언약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백성들도 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은 메시야 되시는 예수의 지체들이다.
이것이 바로 지상의 교회 즉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며 천국인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를 가리켜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친 것이다.

(마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죄와 저주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택한 백성에게는 죄와 저주가 없는 영원한 천국의 내림(來臨)소식은 복음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신약성경 4복음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4복음서는 예수는 구약에서 언약한 언약의 자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예수 자신의 증거사역에 대한 기록이다.

(박용기,  의미분석 성경개론, 진리의 말씀사.   1994년  pp.384-434)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제자 즉 사도들이 예수의 약속하신 바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유다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내용과 사역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Ibid, pp.436-449)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는 사도들의 서신인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증거 내용이 서신(書信)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 서신들은 신앙의 초보자에 해당하는 내용과 조금 장성한 자에 해당하는 내용, 그리고 성숙해서 이단과 싸워야 할 만큼 장성한 자들에게 해당하는 내용들로 구분이 가능하다.

(Ibid,  pp.449-514)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최종(最終) 승리를 약속하는 언약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Ibid, pp.514-528)

   결국, 이들 신약 내용들은 모두가 구약에서 언약한 복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이루어질 언약성취 내용으로서 복음의 결론적인 내용이다.


Ⅳ. 복음의 효능  

  하나님의 작정섭리와 언약섭리 및 성취섭리 내용으로 이루어진 복음은 어떠한 효능을 가지고 있을까?  복음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려면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능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은 참으로 많은 효능을 가지고 있다. 복음의 효능이 인간계를 비롯한 피조계(被造界)에 다양하게 미치는 효능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것은 복음의 효능이 인간계에 미치면, 그 여파(餘波)가 피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피조계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모든 피조계도 함께 따라서 타락하게 되고 인간이 믿어 구속이 되어 회복이 되면 따라서 모든 피조계도 회복이 된다.

(롬8:19-23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른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복음의 효능이 인간계에 특히 선택된 백성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미치게 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복음은 믿고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결과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밝혀 준 바가 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믿음에 이르도록 섭리하셔서 거저 은혜의 선물로 얻어지게 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복음의 내용은 그 진리성(眞理性)이 너무도 분명하고 정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영접한 자는 믿음에 이르게 될 수 밖에 없다.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 복음의 효능인 것이다.

  믿음은 막연한 것을 억지로 신임(信任)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맹신(盲信)과는 전연 그 질을 달리한다. 모르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자기 최면에 의한 광신(狂信)과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복음의 내용이 되는 성경을 잘 깨달아 아는데서부터 얻어지는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딤후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내용의 범위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웅장함이나 치밀함은 물론, 논리성과 합리성에 의해 믿어지게 하는 설득력(說得力)은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듣는 자에게 믿음에 이르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복음의 또 하나의 효능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3:6)고 하였다.
즉 복음의 능력으로 이방인이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 복음의 능력에 의한 선물이라면 구원 역시 인간 공로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살후3:1-3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인간 자신의 선한 공로의 대가나 노력과 열심에 의한 산물이 아니다. 인간편에서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목표하고 달려간다고 해서 붙잡아지는 것도 아니다.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힘을 모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야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적(憺的)인 사역이시다.
인간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관계 없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예정섭리에 따라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은 것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구원도 모세를 통해 전해진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일방적(一方的)인 사역에 의한 결과였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력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셋째는 성도를 견고케 한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롬16:25∼27)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효능은 복음을 믿고 구원에 이른 성도로 하여금 견고(堅固)케 하여 흔들림 없이 굳게 세워주는 것이다.  성도의 견고함은 확신에서 오는 결과이다. 확신은 진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인 복음의 내용에서 얻어진다. 복음을 인하여 견고하게 된 성도는 의심이나 낙심(落心)같은 것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바울같이 복음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평안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능 때문인 것이다.
구약의 수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어도 조금도 약해지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같은 경우인 것이다.

(히11:33-38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무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에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성도의 견고함이란 믿음의 성숙도(成熟度)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도가 견고하다는 것은 믿음이 장부처럼 자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 지는 말이다. 성도의 믿음의 성숙은 삶의 현장에서 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성숙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효능을 그 자체안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이 성도의 신앙을 견고케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며 놀라우리 만큼 웅장함에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깨달은 자는 그 신앙이 견고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견고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도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능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이다. 즉 복음의 능력이 성도의 신앙을 자라게 하고 견고케 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Ⅴ. 맺는 말  

   앞에서 복음이란 말의 뜻과 함께 복음의 내용과 효능에 대하여 설명했다. 결국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작정하신 것을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성취해 주신 것으로서 택자들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견고케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된다.

   지금까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왜곡되고 가리워진 복음에 대한 생각은 이제 정리가 되어야 한다. 소극적이고 부분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복음에 대한 이해는 많은 갈등과 분쟁 또는 신학의 좌경(左傾) 내지는 이단의 속출 등의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으로 순수하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저마다 만져보고 서로가 자기 설명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듯이, 복음에 대한 지엽적인 이해의 결과는 기독교를 자기 교파의 교리만을 고집하는 현대판 장님들의 토론광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 복음에 대한 이해를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교리나 신학서적에서 찾으려고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헛수고를 멈추고 올바른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개혁파 정신은 교리수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한 교리 수정과 보완에 있는 것이다. 마땅히 성경에 의하여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교리를 복음진리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몇 개의 나뭇잎이나 꽃잎을 열매의 뿌리로 삼는 격이나 다름 없다.

열매의 근원은 나무의 뿌리이듯이 복음진리의 원천은 성경이다.
개혁파 교회는 교리에 대한 관심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고 그 복음이 가지고 있는 효능을 발견하고 경험해야 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복음’이란 무엇인가?


글: 이진오 목사/greatc@hanmail.net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는 것 같은데 막상 누구에게 설명하려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예수”가 누구고, “믿는다”는 것은 뭐고, “구원받는다”은 무엇인가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 나름대로 복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특별히 비신자에게, 또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성경 본문을 통한 설명만이 아니라 최대한 일반적인 언어와 내용으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1. 복음의 단어적인 의미


먼저 단어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복음’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이라고 합니다. “앙겔로스”는 소식, 천사 등의 뜻입니다. “유”는 기쁘다, 좋다, 선하다 등의 뜻으로 그런 의미로 “유럽”(좋은 연합), “유로”(좋은 돈) 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자로 “복된 소식”이란 의미로 ‘福音’이라 번역하였는데 결국 ‘유앙겔리온’은 우리말로는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선한소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ood News’라고도 하고 ‘Gospel’이라고도 합니다. 'Gospel' 은 앵글로색슨어 “god-spell”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은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이야기”를 뜻하는 라틴어 “evangelium”과 헬라어 'euangelion'을 번역한 것입니다.



2. 복음은 지속적, 영구적, 반복적인 것


그렇다면 무엇이 기쁘고, 좋고, 선한소식일까요?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즐겁게 노는 것, 자녀가 기특한 일을 한 것,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고,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된 것,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지는 것 등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단회적이고 상황적입니다. 어떤 때 기쁘고, 좋고, 선하다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다시 반복될 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맛있는 것이 누구와 먹느냐 언제 먹느냐에 따라 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취, 소유 등도 마찬가지고, 공평과 정의도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진짜 기쁘고, 좋고, 선한 것은 영구적이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영구적, 지속적, 반복적으로 좋은 것일까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단회적이고 상황적이라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이 무언가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은 우리가 얽매여 있는 것들로부터의 자유!


첫째는 “자아”, 즉 자신에게 얽매여 있습니다. “자아실현”을 교육의 가장 큰 가치와 목표로 설정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결부된 끝없는 자기중심, 자기사랑은 결국 아무런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자기파멸과 타인에 대한 억압 등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자아”라는 것에 얽매여 있습니다.


둘째는 “죄”에 얽매여 있습니다. 죄는 자기 자신에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국가와 사회적으로, 나아가 국가 대 국가적으로 악영향을 미쳐 기쁘고, 좋고, 선한 것을 단회적, 상황적이게 만듭니다. 여기서 “죄”가 무엇인가? 의문이듭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는 “죽음”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뛰어넘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할 때 인간은 모든 기쁘고, 좋고, 선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죽음도 육체적인 죽음과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죽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자아”, “죄”, “죽음”의 근저에 “사단”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사단의 다른 이름들이며 사망, 멸망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사단은 이를 통해 인간을 속이고, 지배하고, 얽어맵니다.


그래서 영구적, 지속적, 반복적인 기쁘고, 좋고, 선한 소식은 이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 죄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사단으로부터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없는 것이고, 진정한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4.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비극


그렇다면 자기, 죄, 죽음, 사단이 무엇이기에 이것들로부터 자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려면 성경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소위 ‘선악과’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 안에 남자와 여자 즉,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동식물, 자연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열매를 먹으라 하셨는데 유독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 하십니다. 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말하십니다.


우리는 대개 이 이야기를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이 불순종해서 타락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의문이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불순종할 것을 몰랐을까? 왜 하필 그 나무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고 “생명나무”일까? 그 외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분, 즉 무소부재 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불순종할 것을 몰랐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함정을 파놓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해 놓고 엄마 올 때까지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자기 딴에는 표 안 나게 한다고 나름 엄청 잔머리를 써서 한두 개 먹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오면 영락없이 들키고 야단을 맞습니다. 아들이 내가 먹을 줄 알면서 두었으니 엄마 때문이라고 항변합니다. 뭐 일리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안 먹기를 기대했고, 또 실제로 모두가 다 먹는 것도 아닙니다.


먹을 것에 대한 유혹과 엄마에 대한 사랑과 신뢰 중 아이는 선택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집 아이가 그랬다면 매 몇 대 맞는 정도가 아니라 경찰서에 가야 할 것입니다. 아들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인격적이란 것은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존재의 독자적인 가치가 부여됩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제약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할 수 있는 범위와 내용 안에서 자신이 주인,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제약 받는 범위와 내용 안에서 다른 주인, 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가지라도 제약을 받는다면 진정한 주인, 왕이 아니라 속한 존재, 대리자, 권한을 위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을 주인삼고, 왕삼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제약을 주셨습니다. 사실 이는 제약이 아니라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살게 되면 온전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벌어진 일들로 증명이 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믿고 살아갈 때 그곳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지옥이 되었습니다.



5. 선악의 기준이 된 인간


그러면 왜 하필 이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였을까요? 사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바로 선악의 기준이고 생명의 근원이며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죠. 누가 선악의 기준입니까? 예전에는 왕이 곧 법이었습니다. 왕의 말이 선악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선악의 기준 삼으면 하나님이 왕이 되는 것이고, 왕을 선악의 기준 삼으면 왕이 하나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 생명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이전에 계셨고, 만물이 끝난 이후에도 존재하시는 그야말로 만유의 근원 곧 생명의 근원이며 끝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구원을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등등 내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따라 피조물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 자기 자신을 기준감고 사는 순간, 각자가 기준이니 기준과 기준이 부딪혀 뺏고 빼앗고, 죽고 죽이는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


하나님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된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타락하고 쫓겨난 자들로서 생명(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주신 것입니다.



6. 죄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는 왜 인간이 자아, 죄, 사망, 사단으로부터 자유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복음인가? 에 대해 생

각해 보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주인 삼고, 왕 삼은 곳으로 피조물인 인간은 그런 한계 속에서 가장 행복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함으로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됨을 통해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왕과 백성 관계가 단절되어 인간 스스로가 주인 되고 백성 삼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결과는 지옥입니다.


인간이 자아로부터 자유해 진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선악의 기준인 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자아실현은 자기의 권리, 자기 기준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해 자신이 기준이 되면서 인간에게 들어온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적인 죄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인 죄가 드러나는 현상적인 죄입니다. 본질적인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자기가 기준이 된 것으로 이를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의 철학적 용어는 ‘자기 애’입니다. 자기 사랑 즉, 자기 의지, 자기주장, 자기중심 등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리고 이 원죄가 드러나는 죄의 결과가 바로 현상적인 죄로 ‘고범죄’ 또는 ‘자범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인간이 선악의 기준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죄인데 이를 현상적인 죄라고 하고 이는 3가지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첫째는 생각 영역입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증오하고, 시기하고, 분내는 등 정신적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둘째는 말의 영역에서 나타나는데 욕하고, 상처주고, 거짓말 하는 등입니다. 셋째는 행동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폭력, 도둑질, 법과 규칙에 대한 어김 등입니다.


이런 현상적인 죄가 원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이 “죽음” 즉, 사망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영생이신 하나님과 같이 죽지 않는 존재였지만 죄의 결과로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영적인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어, 죄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로 자신과 함께 멸망으로 갈 자들을 속여 함께 하기 위해 인간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7. 죄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럼이 지금부터는 인간이 타락해 즉,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죄를 갖게 되고 죄를 짓게 된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 곧 사망이라고 했는데 사실 육체적 죽음, 영원한 죽음에 이르기 전에 사실 우리는 이미 죄의 결과로 인해 죽음을 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게 됩니다.


죄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준 삼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결과 인간은 참 행복과 만족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핍이 발생하는데 이 결핍이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불안입니다. 불안은 정신병 등, 정신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안전에 대한 불안, 관계에 대한 불안 등 여러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이 결핍과 불안은 사람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순간 모든 것이 풍성한 즉 자원의 풍성함에서 자원의 결핍을 겪게 됩니다. 이제는 인간으로 인해 타락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채워야 하는데 한정된 자원에 대한 불안은 서로의 것을 빼앗고, 죽이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정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핍이 사회적, 국가적으로 확대되면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단지 소위 영적인 차원에서의 타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우리 삶에 실제적인 결핍과 폭력, 죄악으로 나타나고 곧 죽음을 살아가며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배후에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자아, 죄, 죽음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단에게 속아 선악의 기준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자신이 기준이 되어 원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원죄로 인해 현상적 죄악들이 나타나 개인, 이웃, 국가 사회적으로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자아중심의 죄악된 삶이 이미 죽음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참 자유이며 참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시 본래적 관계로 상황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래적 관계는 하나님이 주인이었고 왕이었고 기준이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통치하심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천국) 새창조, 새에덴(에덴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리는 한 가지 전제를 기정사실로 하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사실 이 물음에 먼저 답을 해야 합니다. 성경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하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히11:6)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믿지도 않는데 어찌 회복될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어떤 경우는 숨어계시다는 것입니다.(사45:15)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도 그렇지만 인간의 인격적 결정과 독립적 선택을 존중하십니니다. 그래서 찾고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십니다.(렘29:11~13)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자신이 창조한 자연과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숨겨두셨습니다. 인간은 이를 더듬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행17:27)


이를 “종교심”(행17:22)이라고도 하고 “종교의 씨앗”(칼뱅)이라고도 합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그의 책에서 고대와 현재, 문명적 국가나 비문명적 국가, 동서고금을 돌아볼 때 법과 제도, 왕, 문명은 없는 곳이 있어도 신이 없는 곳, 그런 역사는 단 1곳도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는 죽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함께 살 것 같은 가족의 죽음 앞에 또 영원히 살고픈 자신이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 속에서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의문을 갖게 되고, 이런 의문은 결국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의문으로 확산되어 궁극적 존재, 신적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9. 철학자들의 신 존재 증명


그래서 철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으로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신”이란 용어를 직접 쓰지는 않습니다. 철학자들의 용어는 “제1원인, 제1자, 이데아, 무동자의 동자” 등으로 철학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 존재 증명”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 가장 뛰어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 4가지 있다고 합니다. 이를 “4원인”이라고 합니다. 질료원인, 형상원인, 운동원인, 목적원인입니다. 질료원인은 세상에 물질이 있는 것을 보니 그 물질이 있게 하는 근원적인 물질 즉, 질료가 있는데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존재라 말합니다. 형상원인도 비슷합니다. 세상에 여러 형상들이 있는 것은 그 형상이 있도록 한 원인되는 물질이나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원인은 재미있습니다. 무엇이 운동하는 것은 즉,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도록 힘을 가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구도, 우주도, 모든 물체도 사실 눈에 안보이지만 움직입니다. 그럼으로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근원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목적원인은 모든 물질은 쓰임에 목적이 있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만든 누군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리스토델레스 뿐 아니라 다양한 철학자들이 신 존재 증명을 했는데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정리해보면


첫째 본체론적 논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 완전한 것 같지만 어딘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완전한 것이 어딘가에 있을 것인데 그것이 곳 완전한 본체 즉, 완전한 누군가 혹은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주론적 논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과론적 논증이라고도 하는데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있는 것을 보니 그것을 있게 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목적론적 논증입니다.

아리스토델레스의 목적원인과 같은 내용입니다.

모든 사물은 목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목적을 가지고 만든 누군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역사론적 논증입니다.

토인비의 이야기처럼 역사상 신이 없던 적이 없다는 것에서 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도덕론적 논증입니다.

본체론적 논증과 비슷합니다. 인간은 도덕적인데 그 도덕이라는 것이 불완전합니다.

그러니 완전한 도덕의 기준이 있을 것이고, 그 완전한 도덕을 제정한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의 계시, 성경!


어떻습니까? 이렇게 설명을 듣고 나니 아하 신이 계시구나 동의가 됩니까? 어떤 분은 동의가 되고 어떤 분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어려운 것은 그 신이 우리가 믿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 ‘하나님’이냐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자연만물을 통해 더듬어 알 수는 있지만(행17:27) 완전히 알 수도 만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행17:22,23)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을 하나님 알 수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고, 만나주셨다고.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는 열어서 알려주었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서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계시는 자연만물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하신 것이고, 특별한 계시는 성경에 자신이 누구인지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성경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인가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선한 소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영구적, 반본적, 지속적인 기쁜 소식인데 자아와 죄와 죽음으로부터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이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참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아와 죄와 죽음에 얽매이게 된 원인이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스스로 주인 되고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타락한 존재이고 그래서 자아와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해서 먼저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를 통해 다른 민족까지 모두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11. 복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율법(계명과 규례)을 주시고 이를 지키도록 했지만 인간은 번번이 약속을 파기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약속 이행을 위해 보낸 자들 즉, 사사, 선지자들 거부하고 핍박했으며 인간을 왕삼아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죄를 사해주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인간 모습의 현현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인간은 그 대신적 죽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임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로써 원죄에서 벗어나고, 모든 현상적 죄에서 벗어나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막1:1)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아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복음이고 그렇게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막1: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믿음으로(롬1:16), 복음으로 인해 주어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참자유, 참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내 영혼과 내 삶의 자리가 창조의 완성 참 자유와 참 평화의 땅 에덴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 위 내용은 인천 더함공동체교회 교육과정인 '더불어 함께사는 삶을 위한 제자도'

첫 번째 과정으로 새가족/기초교육 과정 "복음, 구원, 하나님의 나라, 교회"에 대한 공부 중 첫 강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내용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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