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도 '대한민국 30년' 연호 써" "臨政, 환국 직전 '건국' 다짐"


[대한민국 건국 論爭이것이 궁금하다] [1]
- 1919년 건국 vs 1948년 건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사실상 국가.. 제헌헌법에 '독립국가 재건' 밝혀"
"제도 아닌 臨政 정신 계승 의미.. 헌법·국호도 새로 제정 절차 밟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라고 밝히면서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됐다. '건국 논쟁'은 1948년에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평가와도 깊숙이 관련을 맺고 있다.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1919년 건국론'과 '1948년 건국론'의 논거와 쟁점, 해법을 분석 기사와 전문가 연속 인터뷰를 통해 짚어본다.


'1919년 건국'은 주로 독립운동사 연구자들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지지한다. 1919년 4월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임시 헌법을 통해 국민·주권·영토 등 국가의 3요소를 규정했으므로 국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3·1 독립 선언을 통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그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밑거름이 된 독립운동 선열(先烈)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고(故)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생전에 "29년 동안 피로 물든 태극기를 가지고 와 정부를 세웠는데 마치 먼지도 안 묻은 태극기를 들고 정부를 세운 것처럼 역사를 기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출범을 축하하는 행사. ‘1919년 건국론’은 이 국민축하식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플래카드를 내건 점을 들어 당시 정부도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정은 국가로서 필수적인 구성 요소들을 갖추지 못했고 다른 국가들로부터 승인받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거세다. 주로 사회과학자들이 이런 논리를 편다. 양승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임정은 국민 대표성, 통치권, 국제법적 승인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1919년 건국'론의 부정은 '1948년 건국'론으로 이어진다. 명실상부한 주권을 되찾고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건국이라는 것이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상주하는 인구, 명확한 영토, 정부, 주권 등 국가 구성의 필수 요소를 완비한 날이 건국일"이라고 주장한다.


◇임정은 스스로 건국했다고 생각했나


대한민국 건국 시점과 관련해 두 주장이 충돌하는 첫 번째 쟁점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스스로 건국했다고 생각했는가라는 것이다. '1948년 건국'론자들은 ▷임정이 1941년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한 것 ▷임정 요인들이 환국 직전 '건국'을 다짐한 것 ▷김구 주석이 환국 후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한 것 등은 임정이 건국을 미래 과제로 인식했다는 점을 말해준다고 본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임정 문건들은 임정 수립 후 광복까지의 시기를 건국이 아니라 독립운동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임정은 건국을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으로 인식했다"며 "건국강령은 망명지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했지만 머지않아 국토를 되찾아 돌아갈 것을 내다보면서 완성된 국가상을 담아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9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출범 1주년 기념행사. ‘1948년 건국론’은 이 행사에 ‘대한민국 독립 1주년’ ‘민국 수립’ 플래카드가 걸린 것은 정부가 한 해전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생각했음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도서출판 백년동안
         

◇이승만 대통령과 제헌 국회는 어땠나


두 번째 쟁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과 제헌 국회가 임정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것이다. '1919년 건국'론자들은 이 대통령이 시종일관 임정의 계승·재건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그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전문(前文)에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이란 부분을 넣도록 주문했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제헌 국회 개회사와 대통령 취임 선서에서 '대한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사용했고, 대한민국 관보(官報) 제1호(1948년 9월 1일)도 발행연도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했다. 한시준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발언한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948년 건국'론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다르게 해석한다. 양동안 명예교수는 "민주독립국가 '재건'이나 '부활'은 3·1운동 때 이루려다 실패한 민국 건립을 다시 실행하게 됐다는 뜻이지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대한민국 연호 사용도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8월 15일 경축사에서 '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 ▷1950년 8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사에서 '민국 독립 제2회 기념일'이라고 한 것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헌법·국호에 대해 '개정'이 아니라 '제정' 절차를 밟은 것 ▷서상일 제헌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이 제헌 헌법 제1독회에서 "임시정부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이지 임시정부의 헌장이라든지 임시정부의 모든 제도를 계승한다는 말은 아니다"고 한 것은 제헌 국회가 대한민국을 임정의 연속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세 번째 쟁점은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것이다. '1919년 건국'론자들은 당일 중앙청에서 열린 국민 축하식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플래카드를 내건 점을 들어 당시 대한민국 정부도 '건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은 총선거, 국회 구성, 헌법 제정, 정부 수립의 순서로 진행됐으며 8월 15일 국민 축하식은 이 중 마지막 단계인 정부 수립을 경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9년 8월 15일 같은 중앙청에서 열린 경축 행사가 '대한민국 독립 1주년' '민국 수립' 플래카드를 내건 것은 정부가 '1948년 건국'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1956년 '대한민국 건국 10년지(誌)' 간행을 후원했고, 1958년에는 '건국 10주년 기념식'을 정부 행사로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건국' 인식은 당대가 아니라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1948년 건국' 표현이 강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7.08.24. 03:01 수정 2017.08.24.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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