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일 논쟁 언제까지··· 대한민국은 어쩌다 생일도 모르는 국가가 되었나?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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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과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 거행되고 있다./조선DB


근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몰 역사적이고 비생산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건국일’에 관한 논쟁일 것이다.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대한민국 건국일이 논쟁거리로 부각한 것은 2008년 건국 60주년 행사를 앞두고서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좌파적 시민단체와 학회, 야당인 민주당 국회의원 등이 대한민국은 1948년이 아니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선열들과 민족혼을 능멸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이명박 정부에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여론전을 펼쳤다. 이후 해마다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건국일’ 혹은 ‘건국절’ 논란이 되풀이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기 전 페이스북에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립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는 글을 올려 1919년 건국설에 동조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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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백년동안)
이런 가운데 양동안 한국학 중앙 연구원 명예교수가 이 문제에 대한 국민과 정부·학계의 인식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작년 6월경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백년동안)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양 교수는 책에서 “조국의 건국일을 제대로 아는 국민이 2할밖에 안 되는 나라가 이 지구 상에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라며 “건국 67년이 넘도록 건국일이 언제인지를 국민에게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국가”라며 한탄하고 있다.
 
전남 순천 출신인 양동안 교수는 공산주의 전략 ·전술, 정치이데올로기와 혁명이론, 사상사 연구의 거두로 통한다. 양 교수는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지 불과 4개월 후 <현대공론>이란 잡지에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을 발표, 좌익혁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좌익 정권이 등장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아래 양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의 내용 중 ‘건국일’ 논쟁에 관한 부분을 요약 소개한다.

왜 건국일이 논란이 되었나?
 
시정의 보통사람이라도 자기의 생일을 모른다면, ‘근본을 알 수 없는 초라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하물며 국가에서야 더 말할 것이 없다.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건국일이 없는 ‘생일 없는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1949년 8월 15일 정부는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으며, 모든 정당과 신문들은 독립 1주년 기념 성명을 발표하고 기념 기사를 보도했다. 이후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좌익운동권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선전투쟁의 일환으로 해방전후사 및 한국현대사를 대한민국 부정적 관점에서 서술한 도서를 대량으로 쏟아내면서 대한민국의 국가성 및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독립이나 건국이란 용어의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좌익운동권이 이런 투쟁에 점차 비좌익 한국사 연구자들도 동조하게 되었다.
 
그런 경향은 해가 갈수록 강화되어 건국 60주년이 되던 해인 2008년 광복회와 한국사학회 및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합세하여 이명박 정부에 대해 건국 60주년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에 굴복했고, 이후 행정부 관리들은 ‘건국’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회피했으며, 언론매체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건국일을 잃어버렸고, 오늘날 ‘생일 없는 인간’과 같은 초라한 국가로 전락했다.
 
선포되지 않았어도 건국일은 건국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을 객관적인 사실들이 입증하고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부류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만 기념·선포되었을 뿐, 대한민국 건국 또는 독립이 기념·선포되지 않았으므로, 그날 대한민국 정부만 수립되었고 건국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부류는 1991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는 먼저 1948년에 건국되지 않았다는 주장의 오류를 살펴본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건은 그것이 발생하는 날 반드시 기념되거나 선포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도 기념하거나 선포하지 않은 사건들이 너무도 많다. 아기의 출생도 공지(선포)되기도 하고 공지되지 않기도 한다. 아기의 출생이 공지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 아기의 생일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출산일이 아닌 다른 날로 되어야 하는가? 필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졸업했다는 사실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필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는가? 졸업식에 불참하고, 졸업을 선포하지 않았지만, 졸업을 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건국도 마찬가지다. 건국 사실을 선포하지 않았더라도 객관적으로 건국에 필요한 요소들을 다 갖추었으면 그것이 바로 건국이요 그날이 바로 건국일인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건국을 기념하지 않고, 정부수립만을 기념한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핵심사항은 정부의 수립이었다. 영토와 국민이 이미 확보되었고, 주권도 정부 수립일에 인수하기로 미국과 사전에 양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 행정부는 정부가 수립되면 주권을 인수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정부수립이 너무 어렵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부수립을 기념·선포하고 건국 독립을 기념·선포하지 않았던 것이다.
 
면밀히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지도 기념되지도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국가의 독립과 건국은 실천적 내용이 동일하다. 독립은 인구 영토 정부 주권을 갖추는 것이고, 건국도 인구 영토 정부 주권을 갖추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49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독립 1주년이 되었다 함은 꼭 그 1년 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독립=건국되었음을 선포하고 기념하는 행위를 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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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3일 하지 중장이 보내준 군용기 편으로 귀국한 상해임정요인 제1진이 경교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은 곧바로 건국을 위한 준비 활동에 들어갔다.

1919년 건국설 비판,
대한민국은 정치·법률적으로 새로 건국되고, 이념적으로는 부활한 것
 
1919년 대한민국 건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건국헌법 전문의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구절과 이승만 박사가 1919년부터 기산하는 ‘민국 OO 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행위를 들고 있다.
 
건국헌법 전문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해석은 사료의 의미를 파악함에 있어서 맥락을 모르고 자의적(字義的) 의미만 생각하는 잘못된 해석이고, 이승만의 민국 연호 사용을 대한민국의 건국연도에 대한 이승만의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전인수적 곡해이다.
 
이 박사는 헌법 전문의 문제 구절의 최초 버전을 1948년 5월 31일 국회의장 취임연설에서 제시했다. 또한 건국헌법 공포 1개월 후에 있었던 정부수립기념식에서 발표된 기념연설과 1949년 3·1운동 기념사에서 건국헌법의 문제 구절에 대해 상세한 견해를 발표했다. 건국헌법 제정 전에 발표된 이 박사의 국회의장 취임사의 건국관련 내용과 건국헌법 제정 후에 발표된 건국관련 발언, 3·1 운동 기념사에 들어 있는 내용에 비추어서 맥락에 부합하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⓵ 1948년 8월 15일 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국가가 없었다.
⓶ 대한민국은 정치적 법률적으로 1948년 8월 15일에 새로 건국되었다.
⓷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념 및 염원의 면에서 3·1운동에서 선포했으나, 임시정부만 수립하고 실패했던 대한민국 건국의 부활이다.
 
따라서 건국헌법 전문 문제 구절의 ‘재건’은 존재했었던 국가의 복원도 아니며, 더구나 존재하고 있는 국가의 보완건축은 더욱 아니다. 문제 구절의 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부활이요 재탄생이다. 건국헌법 전문의 문제 구절의 ‘재건’은 1919년부터 1945년 11월까지 중국에 존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건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이 1948년이 아닌 1919년에 이루어졌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승만 박사의 민국 연호 사용 취지의 왜곡
 
이 대통령이 민국 연호를 사용한 취지는 두 개의 담화에 들어 있다. 하나는 이 박사가 1948년 5월 국회의장에 당선된 직후 발표한 국회의장 취임사이고, 다른 하나는 1948년 9월 국회가 이 대통령의 주장을 꺾고 단기 연호를 사용하기로 한 연호법을 통과시키자, 그 연호법을 수용하여 공포하면서 발표한 이 대통령의 담화이다. 담화의 내용을 보면, 이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민주주의를 자주적으로 채택했음을 과시하고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더 영광스러운’ 3·1 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을 함의하는 담화나 조치들을 수없이 발표했다. 1919년 건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대통령의 그런 담화나 조치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이 박사의 주장에 따라 이루어진 건국헌법 전문의 문제 구절과 이 박사의 민국 연호 사용만을 자기들의 논거로 선택했고, 그것들을 맥락을 무시한 채 자의만으로 왜곡해석했다.
 
신뢰도 높은 사료의 외면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자들은 신뢰도 높은 사료와 신뢰도가 빈약한 사료의 내용이 경합할 때는 신뢰도가 높은 사료의 내용을 채택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반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많은 신뢰도 높은 사료들을 외면하고, 그러한 판단을 하는데 근거로 삼기에는 신뢰도가 낮은 건국헌법 전문의 한 구절과 이 박사의 민국 연호 사용이라는 사료를 논거로 삼은 것은 신뢰도 높은 사료와 빈약한 사료의 내용이 경합할 때는 신뢰도 높은 사료의 내용을 채택해야 한다는 역사 연구·서술의 기본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 시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뢰도 높은 자료들을 매우 많이 생산했다. 우선 임시정부의 임시헌법만 해도 제6차 헌법까지 있다.
 
이 헌법들은 모두 임시헌법·임시헌장·임시약헌으로 호칭되었다. ‘임시’ 헌법이라는 명칭 자체가 임시 정부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려면, 헌법부터가 ‘정식’헌법이어야지 ‘임시’ 헌법이어서는 안 된다. 지구 위의 어느 입헌국가도 임시 헌법에 근거하여 건국된 국가는 없다. ‘임시’ 헌법에 근거하여 건립된 결사는 ‘임시정부’일 뿐이다.
 
또한 임시정부의 임시헌법들은 임시헌법 및 임시정부의 효력이 조국 광복 후 1년 내에 끝난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임시정부는 국가가 아니고 새로운 국가가 건국될 때까지만 활동하는 한시적인 건국 준비 조직임을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가 제작한 사료들 가운데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국가의 건국인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데 신뢰도가 가장 높은 사료는 건국강령이다. 이 문서는 임시정부가 건국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접 다룬 문서이기 때문에 임시정부 수립이 국가의 건국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신뢰도가 가장 높은 사료이다.
 
건국강령의 설명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당시의 독립운동 단계는 복국 제1기에 해당하고, 건국은 미래의 과제이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건국된 국가가 아니라’ 건국의 전 단계인 복국 단계에서 활동하는 복국운동결사인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 아니며 임시정부가 국가가 아니라는 점은 임시정부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승인 요청을 한 기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임시정부는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자기들을 임시정부로 승인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동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임시정부로 승인해 주지 않았다.
 
국제법 상 임시정부로 승인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법상 임시정부로도 승인받지 못한 결사를 결성한 것을 국가건립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억지라도 보통 심한 억지가 아니다.
 
건국에 관한 임정의 입장과 임정의 성격이 이러했기 때문에 임정 지도자들도 귀국 후 전개한 자신들의 활동을 ‘건국’ 활동으로 표현했다. 임정의 주석 김구도 1947년 서울 원효로에 국가 건립 활동에 참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건립했다. 이 명칭은 김구 주석이 건국을 1947년 현재 실천 중인 사업(상해임정 수립이 건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그런데도 1919년 건국론자들은 신뢰도 높은 사료들이나, 그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임정 지도자들의 언동을 전부 깔아뭉개고, 그들이 비난하고 경멸하는 이 대통령이 주도하여 삽입된 건국헌법 전문의 문제 구절과 이 대통령의 민국 연호 사용이라는 신뢰도가 극히 낮은 사료에만 의존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건국연도 조작 사기극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기원이라 인정하더라도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만든 창당준비위원회 구성을 정당의 창당이라고 우겨대는 것과 같은 억지고, 건물의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그 건물의 건립이라고 우겨대는 것과 같은 억지다.
 
세계만방이 지켜보는 가운데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는데, 또한 그렇게 건국된 사실을 유엔총회가 승인까지 했는데 그런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이러저러한 국제법적 이익을 노려서 건국연도를 1919년으로 자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백 보를 양보해서 조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훗날 그런 조작된 건국일이 국제법정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국제사회는 우리 마음대로 조작한 가짜 건국연도를 진정한 건국연도로 인정해줄 바보들의 집합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국제사회가 바보들의 집합이어서 우리가 조작한 것을 인정해준다고 치더라도 대한민국이 어떤 이익을 노려서 국가 차원에서 그런 사기행위를 자행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등록일 : 2017-08-1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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