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란 무엇인가 ?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현대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헨리 나우웬이나 리차드 포스터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영성을 가꾸려고 노력하며, 신학 교육에서도 영성 신학이 등장하고 신학도들의 영성 형성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도날드 카슨의 말대로,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은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의 영성, 저항의 영성으로부터 여성운동의 영성, 동성애의 영성, 켈트 영성, 심지어 종교다원적 영성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무분별한 운동들이 영성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란된 영성의 시대에 올바른 영성과 그릇된 영성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참된 영성의 형성과 성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  


초대교회가 오랜 핍박을 받는 동안 사막이나 동굴, 혹은 오지에 칩거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수도원적 영성운동에 이어, 중세에는 신비적 영성운동이 만발하였다. 이에 대해 생활 속의 영성을 강조하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 모방운동(Devotio Moderna)이 새롭게 일어나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회에서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영성 운동이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17세기 개신교회가 이성과 교리 중심적인 정통주의에 치우치자 반동적으로 발생한 경건주의 운동으로, 성경에 대한 묵상과 기도를 강조하는 경건생활을 추구하였는데, 후에 존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회를 창시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도 각성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두 번째는 19세기 자유주의가 개발한 영성으로 슐라이에르막허의 보편적 종교성의 신학에 기초하여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영성을 추구하였는데, 윌리암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1902)에서 심리학과 신경과학을 이용하여 신비한 종교적 경험들을 설명하였다.


세 번째는 20세기 초에 발생한 오순절운동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하며 신비적 영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논의되는 영성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1960년대부터 갑자기 발생하였는데, 이는 세속화신학과 사신신학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시기는 제2차 바티칸회의가 열리고 개신교회와의 교류가 시작되는 때이며, 동시에 제2차 프랑스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반문화운동이 과격하게 확산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는 때이고, 또한 미국에서는 반전운동과 히피운동이 발생하면서 힌두교의 구루들을 중심으로 뉴 에이지운동이 출범하던 때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영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로마 카톨릭의 영성 신학에 대한 소개가 시작된 후 개신교에서는 엄두섭의 수도적 관심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자 김경재가 1985년 [영성신학 서설]로부터 92년 [종교다원시대의 기독교 영성]까지 여러 권의 영성에 대한 저서를 출간함으로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현대적 관심은 신자유주의에서 출발하여 점차 복음주의 계열로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발단과 전개과정이 그 문제점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종교적 영성  


그러면, 우리는 현대의 혼란된 영성에 대해 어떤 분별력이 필요한가? 그릇된 영성의 첫 번째 유형은 자연종교적 영성이다. 이것은 참된 영성을 찾기 위해 기독교를 넘어 타종교로 떠나는 종교편력의 영성이다. 현대 카톨릭의 선구적 영성운동가인 토마스 머튼은 기독교의 영성을 추구하다가 보다 더 고차원의 영성을 위하여 동양종교로 향하였으며,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불교나 힌두교에서 영성을 추구한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복음적인 영성 논의에서도 타종교, 특히 선불교에 대한 탐구가 흔히 발견된다. 또한, 카톨릭을 교리적으로 정죄하고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개신교인들도 영성에 있어서는 무비판적으로 토마스 머튼이나 헨리 나우웬을 열독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쓰가 지적하는 대로, 기독교 안에 풍요한 영성의 전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매한 영성을 다른데서 찾고 빌려오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인지 모른다. 더욱이, 영성을 찾아 타종교로 떠나는 영적 방황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종교성은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타종교에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기초적이고 저급한 영성일 뿐이며, 참된 영성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을 때만 가능한데 고급한 영성을 위해 저급한 종교로 나아가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극도의 고행이나 수련을 통과한 사람에게서 우러나는 초연한 인간성이나 난해한 경전과 선문답 같은 문구가 풍기는 오묘한 도리가 아무리 외적으로 고매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적대관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의 위장된 교만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에 의존하는 구원을 거부하는 영적 반항의 연장일 뿐이다. 물론, 일반은총적 차원에서는 그들의 종교성이나 인간성이 어떤 측면에서는 많은 기독교인보다도 더 개발될 수 있으며 따라서 존경심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러한 영성은 모두 특별은총적 차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승격되고 승화되어야 할 영성들이다.

 


신비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두 번째 유형은 신비적 영성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신통력을 흠모하고 추구하는 영성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영적 성숙이나 수평적 차원은 무시된 채 신적 존재와의 수직적 교통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수행하고 엑스타시적 종교체험을 추구한다. 카톨릭의 신비적 영성이 하나님과의 약혼과 결혼으로 나아가는 영성의 7단계를 제시한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이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였다면, 오순절운동으로 야기된 개신교의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한다.

 
한국교회 영성의 독특한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결국 현상적으로 보자면 한국 기독교의 영성은 불교, 유교, 도교와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는 김정훈의 진단이나, 샤마니즘을 비롯한 전통종교의 영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결국 이교화를 결과한다는 김성태의 지적은 주로 신비적 영성을 우려한 것이다.


마술적 신유를 위해 이교의 방법을 도입하여 성령수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비적 치유를 현혹하는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비성경적 예언들까지도 용납하여 결국 시한부 종말론의 수치를 초래한 신비주의적 신앙행태는 참된 복음보다 신비현상 자체를 추구하는 다른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윌리암 제임스는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도 동시에 신비현상을 긍정하였으며,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의 신비현상들을 수집하여 심리학과 신경의학으로 설명하였고, 신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심령과학도 단순한 테크닉으로서 신비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적 영성은 세계의 모든 신과 모든 영과 모든 신비 현상을 이용하여 신비체험과 초능력을 소유하려는 뉴 에이지 영성과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낭만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세 번째 유형은 낭만적 영성이다. 이것은 영성을 경건한 감정의 고양으로 이해하는 감상적 영성이다. 영성가들의 영적 편력을 탐독하며 문학적 영성을 형성하고 영적 무드를 즐기며, 큐티를 통하여 경건한 감정을 향유하지만, 만일 그것이 거룩한 감정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기서 그치고 실천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가롭고 낭만적인 감상일 뿐 고난이나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는 현대의 지성적이며 사치스러운 영성이 아닐 수 없다.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슐라이에르막허는 기독교의 본질을 종교적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감성적 종교를 추구하다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로버트 로버츠는 [영성과 인간의 감정]에서 “기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감정들의 세트(a set of emotions)”라고 정의하며 영성을 감정 중심으로 이해하였지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심적 명령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을 흠모하는 하나의 종교적 감상으로 끝날 것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가서 느끼는 거룩한 감정이나 위대한 종교시를 읽으며 일어나는 숭고한 열정이 참된 영성의 본질이 아니며, 기독교의 영성은 느낌 이상의 실재적 삶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참된 경건생활이란 문학적인 경건서적을 즐기고 분위기 좋은 찬송을 부르며 고요한 명상과 시적인 기도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  


실로, 영성이란 일시적 감상이나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희열과 같이 존재론적 실체가 없는 일시적 경험도 아니며,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와 구별되는 인간의 제4성도 아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영혼의 성품, 성질, 혹은 성향을 가리킨다. 기독교 인간론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즉, 프뉴마 혹은 프쉬케라고 부르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구별되어 모든 정신적 실체와 기능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질적 실체로서 정신 혹은 마음이라고도 불리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체와 불가분리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나 죽을 때에는 육체와 분리되어 내세로 가게 된다.


비물질적인 영혼에는 여러 기관과 기능들이 존재하는데, 지능이나 감정이나 의지 등이 포함된다. 영혼은 오로지 순수하고 완전한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homo spiritualis)로서 영성을 소유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각자 그 기관들이 다르게 개발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지능이 가지는 성품이나 성질을 가리켜 그의 지성이라고 하고 감정이 개발된 성품과 성향을 그의 감성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영혼 전체의 성품을 가리키는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그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어떻게 개발되었고 무엇을 경험하였으며 어떻게 통합되었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 연구와 독서 등 지적 노력에 집중함으로서 지성이 고도로 발전하여 훌륭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감성이 메마르고 의지가 박약하여 종합적인 영성에 있어서는 편향적이고 미성숙한 영성을 가질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그와 반대로 감성만 발달한 경우나 의지만 발달한 경우도 있어서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영성에서는 저급한 사람들도 있다.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사랑의 감성이나 의지는 결여한 채 교리적 지성에 치우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근본적 교리도 부정한 채 사회운동만을 추구하는 행동적 의지에 치우치고 신비주의자들은 윤리나 교리보다도 신비적 감성에 치우친다. 노영상이 ꡔ영성과 윤리ꡕ를 연결한 것도 도덕성은 개발되지 못한 채 편파적 영성을 추구하는 문제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영혼이라는 실체에 근거하지 않는 영성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기반을 상실한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영성의 시작과 완성  


영성이 영혼의 성품이기 때문에, 영성은 영혼의 개발과 발달과정을 반영한다. 인간은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죽은 사람에게만 영혼이 없다(약 2.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범죄로 인해 죽었고 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비록 생물학적인 영혼은 존재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즉 영혼의 정상적인 기능의 관점에서는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란 영적 사망의 상태에서도 기본적으로 살아 기능하고 있으므로 불신자에게도 기본적인 영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기반인 하나님과 단절되고 대립된 인간의 영성은 고갈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교제를 통해 풍요한 교류가 시작되는 중생의 시점에서 참된 영성이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죄악으로 인해 수많은 집단들로 분리되어 서로 차별하고 대립하는 인간들과의 화해와 사랑, 그리고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 회복도 결과한다. 따라서 타종교나 불신자들의 인간성이 어떤 면에서 심오하게 개발될 수도 있으나, 전인적인 영혼의 품격과 성향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창조자인 하나님과의 거부와 대립과 반항 상태에서 건전한 영성의 개발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중생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의 영성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성숙하고 발전되어야 하며, 이것을 구원론적으로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성화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 영혼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악적 요소를 정화하며 자기의 독자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진하여 마침내 내 속에 그리스도만이 살게 되는 상태에 이르는 긴 과정으로서 천상에서야 완성된다.


우리의 신앙은 지성(notitia)과 감성(assensus)과 의지(fiducia)에 상응하는 전인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신앙의 성장은 세 기능의 종합적 발전과 강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그리스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본 받고 대치할 때 완성되며, 그런 노력과 참여를 통하여 우리의 영성이 개발되고 성숙해진다.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기독교는 동일한 본질을 소유한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을 믿는 삼위일체 신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성부교나 성령교라고 부르지 않고 성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통해서만 올바른 하나님 이해와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영성은 오로지 그리스도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였다. 영성의 길은 곧 그리스도의 길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성부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그릇된 영성을 결과하였다. 일부 오순절파는 성령을 중심으로 영성을 발전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동등한 신이지만 자기 중심성을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도록 돕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성부도 성령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관계할 수 있다.

 
오늘날 뉴 에이지나 요가, 선, 단, 기 훈련 등의 방법으로 종교는 거부하면서 영성은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로버트 풀러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 아닌 사람들(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는 책에서 이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 약 20퍼센트가 이 그룹에 해당한다. 이들은 영성을 무엇이든지 신비적인 교감이나 능력으로 생각하며, 수많은 악령들과 영적인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 없이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그릇된 영성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존 도슨이 지적한 대로, 이러한 자유방림적 영성은 개인주의적으로 인격적인 교제와 훈련을 요구하는 공동체를 거부하고 책임과 평가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의 훈련과 교제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독자적 욕심과 야망을 포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개성화된 영성

 
그러므로, 영성의 개발은 매 순간 성령에의 절대적 순종을 통한 성령의 열매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한 우리의 끊임없는 헌신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초대교회로부터 영성 개발은 수도원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오늘날에도 상당한 영성훈련 프로그램들이 수도원적이다. 한편, 개신교회도 현대 산업사회의 도시화와 개인주의적 경향에 대응하여 제자훈련, 가정교회, 소그룹, 셀그룹 등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였다. 퀘이커 교도인 리차드 포스터는 묵상, 기도, 금식, 학습의 내적 훈련, 단순, 고독, 복종, 섬김의 외적 훈련, 고백, 예배, 인도, 축제의 집단적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멘토이기도 한 달라스 윌라드는 이와 같은 영성 개발 혹은 훈련 프로그램들이 “새로운 율법주의(new legalism)”로 부상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획일화된 프로그램이 모두에게 획일적인 훈련을 강요하여 획일적인 영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기 독특한 소명과 독특한 개성과 독특한 경험을 가지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은 모든 개인에게 독특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비록 참된 영성이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전인적이어야 하지만, 각자 개성 있는 영성들이 개발되어 신앙공동체로 모일 때 교회는 조화롭고 풍성한 공동체가 되고 다양한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전인적 몸이 되며,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이 전면적으로 풍요하게 실현될 것이다.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었던 책입니다. 

믿음이란 말로 하기는 쉬우나 순종으로 그 믿음을 행하려고 어려워집니다. 예수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입으로 고백하기는 쉬우나 그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려면 어려워집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져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어느날 저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머리로 알고 입으로 시인하고 있으나 그 능력을 행하지 않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단순한 깨달음. 그 후 작은 일에도 '나사렛 예수 이름'의 능력에 힘입기를 구하는데 힘썼습니다. 저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힘쓴다는 것은 제 노력으로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내 힘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성령님께 간구하는데 힘쓰라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읻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참된 영성이란?
우리의 삶은 육적인 삶, 혼적인 삶, 영적인 삶으로 나누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육적인 삶과 혼적인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영적인 삶에 있다.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다. 즉 참된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살고 계신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노라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키셔서 예수님처럼 닮게 만들어 주신다. 이것이 참된 영성이요, 믿는 사람의 최고의 소망이다. 


완전하고 참된 영성은 영적으로 건강하고 성숙한 상태가 잘 균형을 이루는 때에 가능하다.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하게 닮아가서 그의 말과 삶과 인격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다.


 

샬롬 평안
원래의 의미는 '완전하다 모자라는 것이 다 채워졌다'라는 의미다. 즉, '치유', '보충'의 뜻이다. 어떤 영양소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했을 경우 필요한 영양분을 채워주는 것, 어떤 문제로 속상해하는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배고픈 사람이 빵 한 조각을 먹어 배고품을 해결하는 것이 살롬이다. 몸도 건강하고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예수님을 알지 못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살롬이다.

 


영적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영적 건강이 필요하다.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인격적으로 친밀해지는 것)에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
셩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주님이 점점 상승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참된 영성이다.

1. 버려야 할 것 들을 버릴 때
   모든 악독과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을 버리는 것이다.

   악독은 마음의 쓴 뿌리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 상처를 받아 쓰라린 속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을 통해
3. 인생의 여러가지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때
4. 고통을 통해
   인간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주님을 부르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이다.

   그 전까지는 '나의 충만'에 불과하다.
5. 하나님 앞에 올바른 중심을 갖고 있을 때
   신앙은 순간순간 사는 것이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질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안이 있고,

   우리의 영은 건강하여 사는 보람과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영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
1. 말씀을 잘 먹어야 한다.
2. 영적인 활동 즉 주님을 위한 봉사를 해야 한다. 
3. 멈추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4. 교제를 해야 한다.


어떻게 교제할 것인가?
1. 만나기를 힘써라. 내성적이라면 기도하고 노력해서 자신을 계발해 나가야 한다.
2. 만남을 기뻐하라. 기쁨을 표현해라.
3. 나누어 갖기를 힘쓰라. 음식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어라. 정보, 찬양, 간증 등도 나누어라. 고민도 나누어라.
4. 듣는 자세를 계발하라.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여 듣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반응을 보이며 몸으로 듣는다.

   ​'그렇습니까', '아, 안됐네요.', '그래요' 등 적절한 대꾸와 질문하면서 입으로 듣는다.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머리로 듣는다.
   상대방의 감정을 공감해 주기 위해 가슴으로 듣는다. 
5. 상대방을 이용하려 하지 말라.
6. 늘 도우려는 사람이 되라.
7. 예수를 중심으로 울타리를 크게 치라.
8. 격려해 주라.
9. 상대의 가치를 인정해 주라.
10. 언제나 미소를 띠고 대해 주라. 


영성 계발을 위한 필수요건들
1. '성령 안에서'
2. 말씀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3. 나와 하나님 사이에 개인적으로 갖는 경건의 시간


신경쇠악에 걸린 시계 이야기
시계가 자기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일초에 두번 똑 딱 하는데 그것이 한 시간이면, 한달이면, 일년이면 엄청난 숫자로 똑딱거려야 되겠더라는 것이다.

일년분을 생각하니까 기가 막히고 도저히 그 엄청난 횟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

일초에 한번 똑 딱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될 것을 미리 일년분을 몰아서 걱정하는 시계가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경건의 시간을 위한 기도의 훈련
주님과 갖는 조용한 경건의 시간의 핵심은 이것이 주님과의 교제와 대화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 대화를 한다. 그러므로 경건의 시간에 있어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기도의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다.


1. 찬양과 감사
찬양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해당하고, 감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이다.


2. 자성과 죄의 고백
 내 안에 잘못한 것뿐 아니라 고민, 분노, 지혜의 부족함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 


3. 간구
 오늘 필요한 모든 쓸 것을 구하라. 인생은 결국 오늘의 연속이다.


4. 중보기도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모든 일을 하시니까 나는 성령 안에서 바로 쉼을 누리는 삶이다.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항상 깨끗하게 살며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하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자기 자녀를 아시는 하나님게서는 구하는 것을 주시며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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