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님과 동역자인가 동업자인가     

 

목회>를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도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어떤 일이나 그렇지만, 특히 목회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목사가 영력이 충만하고 능력있는 설교를 한들,

들을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같은 말씀이 쏟아진들 소용없는 일이다.


목회의 중요 사역이 설교이기에 비유적으로 한 이야기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 음향 담당자의 실수로 기기가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대표 기도나 찬양에 영감이 떨어진다면 목회자의 답답함이 크다.


안내하는 이들의 표정이 굳어있거나, 봉사하는 분들이 교인의 필요가 아니라,

자신의 편리대로 일한다면 목회가 행복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목회자는 무엇보다 동역자를 잘 만나야 한다.


<동역자>라면 흔히, 부목사님들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성도들 모두가 동역자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위대한 전도자로 세움을 입은 것은 좋은 동역자를 만난 것이다.


처음 사역의 동역자였던 바나바를 비롯해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

함께 투옥되었던 실라,

처음 만난 다음 일생을 같이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자주장사 루디아,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 뵈뵈같은 이들이 도처에 포진했던 그의 동역자들이다.


지금도 성공적인 목회사역을 하는 분들의 특징은 좋은 동역자가 많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이름 없는 동역자들이야 말로 소중한 보배이다.


동역자라는 헬라 말은 <쉬네르가테스>이다,

문자적 의미는 <같이 일하는 자>이다.


즉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동역자는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이다.

서로 잘 감당하려는 것이요, 더 많이 감당하려는 것이다.

 

비슷한 말 중에 <동업자>라는 말이 있다

사업을 함께 하는 이다.

같이 투자하고 같이 이익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동업에 실패한다.

심지어 형제나 친구와의 동업에서도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익의 분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동업자는 가져갈 <몫>에 관심한다.

 

그래서

분쟁하는 것이다.

자신의 투자금이 더 많은 것 같고, 자신의 노하우가 더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은 열심이고 상대는 게을러 보인다.


동역자는 어떻게 하든 내가 짐을 더 지려 하고,

동업자는 어떻게든 덜 지려 하는 것이다.

동역자는 고난에 관심하는 사람이고,

동업자는 영광에 관심하는 사람이다.

동역자는 일을 많이 하려 하고,

동업자는 이익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동역자는 고난을 나누려 하고

동업자는 이익을 나누려고 한다.

동역자는 상대방의 수고에 관심하고,

동업자는 자기의 수입에 관심하다.

 

그러므로

동역자는 고난에 끝까지 함께 하고,

동업자는 이익의 빛이 사라으면 가차없이 떠난다.

 

그래서

사람은 많은데 쓸모 있는 사람이 없고, 사람은 많은데 믿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고난에 동참하고, 수고의 멍에를 메고 끝까지 함께 갈 동역자가 그리운 세상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 진정한 동역자가 사라지고 있다.

동역자보다 동업자들의 무리가 큰 것 같다.


동역자들은 위축되어 있고,

동업자들은 기가 살아있는 듯하다.

 

고생한 사람들은 숨을 못 쉬고,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은 활개를 친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함께 땀 흘리며 고생하는 즐거움으로 사는 이들이 동역자들이다.

섬기는 행복과 협력하는 기쁨으로 사는 이들이 동역자이다.

 

그렇게 살기보다 영광을 원하고

대가를 요구하는 이들이 이 땅에 그득한 것은 왜일까?

 

지금 주님이 오시면

동역자를 찾으실까?

동업자를 찾으실까?

지금 주님이 오시면 누구를 안아주실까?

말없이 주님의 일에 헌신한 동역자일까?

아니면, 계산에 밝고 이해관계가 분명한 동업자일까?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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