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인생 이정표
(창세기 28, 30, 35)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은 일생 동안에 네 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것은 야곱의 일생의 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념비 속에는 야곱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헤브론으로 가는 길, 벧엘, 베들레헴 길, 에델 망대 이렇게 해서 네 번의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다.
첫 번째로 라반이 쫓아올 때 길르앗에서 세운 기둥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첫 번째 단계다.
하나님은 인생을 돌보신다, 내 인생을 돌보고 계시는구나, 그것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을 느끼는 첫 번째 단계다.
야곱이 장자권을 탈취할 때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속았다.
만일 이삭이 눈이 어둡지 않았더라면 속지 않았을 것이고 눈이 어두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일 발각되었더라면 축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이 축복을 받을 때 이삭은 한편으로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 야곱을 축복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떤 배열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야곱은 자기에게 정해진 하나님의 길을 가는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결함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짐으로서 야곱 인생의 출발이 비록 그것이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이었지만 장차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되었다.
두 번째 아람에 내려갔을 때 라반은 간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야곱을 할 수 있는 대로 이용한 그런 사람이었다.
라헬을 놓고 십 사 년 동안을 부려먹었고 그 다음에도 품삯을 열 번이나 변개하였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정말 수건에서 물 짜듯이 야곱을 쥐어 짠 사람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야곱을 이용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하나님은 야곱을 더욱 창대하게 해서 결국 야곱의 양떼가 많아지게 했다.
그러나 그때 야곱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자기가 재주가 있으니까 된다, 내가 머리가 좋고 성실하니까 양 때가 많아졌다.
생각했지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지 못했다.
장자권을 탈취할 때도 자기의 교묘한 수단에 아버지가 넘어갔다 이렇게 생각했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렇게 배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또 아람에서 이십 년을 살면서 라반이 쥐어짜는 환경 속에 있었지만 그러나 항상 자기가 성실하고 자기가 진실하고 자기가 부지런하니까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야곱은 마침내 견디다 못해 도망치게 되었다.
만일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고 있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실 텐데 비겁하게 도망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밤에 몰래 도주한 것을 보면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든지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발버둥친 사람이 야곱이다.
지혜를 다 해서 몰래 도망을 쳤다. 사흘 길을 떴으니까 어지간하면 추격을 못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라반은 결국 쫓아왔다. 사흘을 좁혀서 추격을 해 왔다.
야곱은 양떼를 거느리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가는 형편이고 라반은 바로 쫓아오니까 아무리 앞서 갔다 하더라도 금방 쫓을 수가 있다.
그래서 결국은 붙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라반에게 하나님이 현몽하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했다.
그래서 라반은 하나님이 돌보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내가 너를 얼마든지 잡아갈 수 있지만 어제 밤에 하나님이 현몽해서 내가 너를 잡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야곱은 오히려 당당하게 라반을 꾸짖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경외하는 자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삼촌께서 나를 공수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 하셨습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게 되었다.
만일 라반이 현몽을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할 것인데
그 말을 해 주니까 자기는 당당하게 책망할 수 있는 근거를 찾게 되었다.
라반은 어쩔 수 없이 이리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서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으리라 하고 약조를 하게 된다.
그때 라반은 돌무더기를 쌓고 약조를 하려고 했고 야곱은 기둥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이 야곱이 세운 기둥은 하나님은 나를 돌보고 계셨구나,
나는 내 능력과 내 지혜로 잘 살아 나온 줄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지금까지 돌보아주셨구나! 알게 된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비로소 자기 일생의 지난날이 모두 조명되면서 하나님이 돌보고 계셨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이런 경험을 가지게 된다.
처음에는 모르다가 어느 날 가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고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그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돌보심에 대한 첫 번째 간증이다.
이것이 야곱이 길르앗 길에서 세운 기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구나, 그 동안에 나를 보호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두 번째 기둥이 벧엘의 기둥이다. 벧엘에서는 두 번 기둥을 세웠다.
밧단아람으로 가는 노중에 돌베개를 하고 자다가 꿈을 꾸고 거기에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을 했다.
내가 객지 길에서 무사히 아비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기둥을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고 내가 하나님만을,
당신만을 하나님으로 섬길 것이고 내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면에서 서원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꿈에서 본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현실이 아니었다.
서원을 하기는 했지만 아람에서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이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다 잊어먹고 있었다.
이십 년이 지난 후 아주 곤고한 자리에 있었을 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거하며
내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단을 쌓아라! 하는 말씀이 들려오게 되었다.
야곱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있었다.
오직 자기 힘으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었지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벧엘의 이상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십 년 후에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도 숙곳에 와서 자신을 위한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한 우릿간을 지었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벧엘로 간다고 올라가다가도 중간에 좋은 것이 있으니까 거기 정착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집을 지었다는 것은 정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목민들이니까 천막을 치고 사는 것이 원칙인데 숙곳은 목축하기가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자기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지었다는 것이다.
세겜에 옮겨서 자기를 위해서 또 장막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땅을 사서 장막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금방 여행을 떠날 사람이 땅을 사겠는가?
그 사람은 벧엘로 올라간다고 해 놓고 중간에 가서 머물려고 한 그런 사람이니까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꿈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이상을 생각한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결국 벧엘로 돌아와서 여기서 단을 쌓고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간증이다.
평안히 내 아비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그렇게 선원 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아람에서의 이십 년 생활은 집이 없는 생활이었다.
건물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아비집이 없는 생활이다.
가정이 없는 생활, 가족이 없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이라는 개념의 범위가 넓다.
자기가 안식하고 살 수 있는 어떤 공동체, 그런 족속, 그런 가족, 이런 개념이 집이라는 개념이다.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했던 그 아비집이 결국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하나님의 집이다.
사람이 고향을 찾는 경우도 있고 가족을 찾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찾는 집의 궁극적인 실재는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 때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참 집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집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전까지는 어떤 집을 가져도 늘 또 다른 집이 필요하다.
태어나면 가족이라는 집이 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절대적인 집이다.
그런데 크고 난 다음에는 그 집만 가지고는 완전한 집이 안 된다.
그래서 결혼을 한다. 그것이 또 집이 된다. 그런데 거기서 안식하고 싶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또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또 나간다. 사회에 나가서 살면 될 줄 아는데 그것도 역시 완전한 집이 안 된다.
결국 최종적인 집은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마지막 우리의 집,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동산에 두었다.
동산은 최초의 집이었다.
그리고 또 영원한 집이었다.
우리가 돌아갈 집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동산인데
지금 하나님의 집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로 살아가는 생활이 최종적인 사회생활이다.
혈연적인 사회생활, 이해 관계적인 사회생활에서 인격적인 사회생활로 바꿔지게 된다.
어려서는 혈연적인 사회에서, 성장한 다음에는 이해 관계적인 사회에서 살지만 거기서 안식이 없기 때문에 존재적인 사회,
인격적인 사회 안으로 들어갈 때만 우리는 비로소 사람으로서의 안식을 누리게 된다.
벧엘에서의 체험,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집에 대한 체험이다.
영원한 집이 어디인가? 안식처가 어딘가? 어디서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뼈저린 경험이었다.
이십 년 동안 집에 살기는 살았는데 집이 아니었다.
아내들이 있고 자식들이 있고 다 있었다.
그런데 야곱은 집이 없는 사람이었다.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고 네 명의 아내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 양떼들도 있고 있을 것이 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지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기 집이 없는 생활이었다.
이제 벧엘로 돌아왔을 때 나는 집이 필요하구나, 안식할 집이 필요하구나,
영원한 집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에 대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벧엘이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우리도 맨 처음에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는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꿈을 꿨던 것처럼 어떤 이상, 어떤 영광, 어떤 평안함,
만족함 이런 것에 대한 빛 비췸이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빛 비췸이기 때문에 그 뒤로는 또 잊어버릴 수가 있다.
그런데 한참 지난 다음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체험을 하게 된다.
순서상 우리는 벧엘의 꿈이 먼저 있어서,
창세기28장의 꿈이 먼저고 다음에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간증과 체험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집에 대한 체험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원한 사회가 있구나, 내가 거해야 될, 인간이 거해야 될 영원한 사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는 인간이 살아야 될 영원한 집이다.
사람이 살아야 될 영원한 집이고 사람으로서 살아야 될 영원한 집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념으로 돌비를 세우게 되었다.
두 번 돌비를 세우게 되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노중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하면 베냐민을 얻고 라헬을 잃고 이런 일이 있었고 거기서 라헬의 묘비를 세웠다.
이것도 역시 돌비였다.
이것은 얻음과 잃음, 잃고 얻는 것에 대한 간증이다.
라헬을 잃고 베냐민을 얻었다 여기에 대한 간증이다.
라헬이냐 베냐민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기를 살리려면 어미가 죽어야 되고 어미를 살리려면 아기가 죽어야 되는 그것이 해산기의 위태로운 일이다.
요즘 같으면 수술을 해서 아기가 죽더라도 어미를 살려야 된다.
이런 원칙이 나오겠지만 옛날에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선택은 선택이지만 야곱으로서는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그러한 선택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야 하는 것은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는 베냐민을 취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라헬을 취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왜 요셉이라고 했는가 하면,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한다 하는 뜻으로 요셉이라고 이름 지었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더한다는 뜻이다.
아들을 더 낳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다른 아들을 또 하나 얻기 위해서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을 하나 더 얻을 것이라 이 생각만 하게 되었다.
야곱은 베냐민을 낳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산파가 와서 하는 말이 지금 곧 아기를 낳고 있습니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야곱은 과연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주시리라 했던 라헬의 소원대로 또 아들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산모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또 듣게 되었다. 베냐민을 얻고 라헬을 잃게 된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는 둘이 다 갈 수 없다.
이 길은 베냐민을 낳아야 되는 그런 자리다.
베냐민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슬픔의 아들로, 또 오른 손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명백한 예표가 되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이 표현되었는데 “창세기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너는 수고하고 고통을 크게 받고 아기를 낳을 것이다 했던 해산의 고통이 라헬에게 와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으로 실감이 난다.
“마태복음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라헬의 슬픈 곡소리가 들린다 하는 구약의 말씀을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상황에 적용시켰다.
라헬이 아기를 낳다가 죽은 일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슬프고도 슬픈 일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창세기 3장 16절에 있는 말씀을 실재적으로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라헬이었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
해산의 슬픔 그것을 라헬의 곡하는 소리로 묘사되었고 아기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라헬의 슬픔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그렇게 묘사를 하고 있다.
결국 베냐민을 얻기 위해서는 라헬이 죽었다.
그러니까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이 사탄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이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에 가면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기 위해서 구로하고 있다,
해산의 고통을 하고 있다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서 이런 고난이 따른다 하는 것에 대한 간증이다.
야곱은 자기 마음의 선택,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대한 선택이 죽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기호와 자기의 모든 생각과 자기의 선택이 죽었다는 표시가 바로 라헬의 묘지다.
라헬의 묘비는 잃고 얻었다 하는 묘비가 된 것이다.
그 묘비는 베냐민을 얻기 위해서 라헬이 죽었다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까
누구든지 이 묘비를 보면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는 끝나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암시 받을 수 있다.
또 사내아이, 승리자를 낳기 위해서 우리 자신은 죽는다.
이런 것에 대한 암시가 되게 되고,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암시가 되고 이 묘비의 의미가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 묘비를 보면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리스도를 낳고
나는 죽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인생도 사실은
그리스도를 낳고 죽는 것이다.
내가 계속 사는 것이 아니다.
죽기는 다 죽는데
그리스도를 낳고 죽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낳지 못하고 죽느냐 이 차이다.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낳지 못하고 다 자연사 했다.
그러나 라헬은 그리스도를 낳고 죽었다.
우리 인생도 그리스도를 낳고
죽기 위한 그런 존재라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 묘비가 서 있는 자리에 후대에 베냐민 족속이 거하게 되었다.
이것도 기이한 일이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곳이 이런 곳이다 하는 것을 라헬의 묘비는 우리에게 영원히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야곱이 몇 번의 기둥을 세우면서 자기 인생의 분명한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도 역시 이와 같은, 물론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묘비가 있다. 이와 같은 돌비가 모두 있다. 그것이 기념비가 되어 있다. 이 기념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알게 되고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간증이 된다.
우리 일생을 내가 모르는 자리에서도 돌보시고 이끄시고 섭리하시는 것이 감사하다. 나는 내 생각과 내 뜻을 따라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과 당신의 계획을 따라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돌비를 세우게 하고 기념비를 세우게 해서 우리 인생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간증하도록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 감사하다. 우리가 영원히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낳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간증을 갖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에델 망대(안일의 함정) 창세기35:21-22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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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일생에 네 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들은 세 곳에 세워졌다.
벧엘에 세워진 기둥이 두 개, 그 다음에 길르앗에 세워진 기둥이 하나, 마지막에 에델 망대 이렇게 해서 네 개의 기둥이 세 곳에 세워지게 된다.
이 기둥들은 모두 야곱의 일생의 큰 이정표가 되는 기둥들이다.
인생은 누구나 다 자기 인생을 걸어가는 동안에 이정표가 있게 마련이다.
가다가 돌아가고 가다가 돌아가게 하는 이정표들이 있다.
이정표마다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이다.
처음에 낳아서 다 평탄한 길을 가다가 어렸을 때부터 길이 갈라지기 시작해서 좋지 않은 방향의 이정표가 세워지는 그런 인생도 있고,
또 가다가 좋은 방향으로 이정표가 세워져서 좋은 인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정표에 따라서 사람은 가는 길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야곱의 일생에 이정표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이정표다.
이 이정표들이 결국 야곱을 헤브론에 이르게 하는 그런 이정표가 되었다.
서울로 가려면 서울로 가는 이정표가 필요하고 부산으로 가려면 부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필요하듯이 하나님과 관계되는 이정표는 모두 다 헤브론으로 가는 이정표다.
그러나 사탄과 관계되는 이정표는 세상으로 가고 선악의 지옥으로 가고 가게 되는 것이다.
야곱이 처음에 꿈속에서 하나님의 집을 체험하고 서원을 했던 이정표가 있었고 그 다음에 밧단아람에서 이십 년 동안을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길르앗에서 세웠던 이정표가 하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는 그런 이정표였고 그 다음에 다시 벧엘에 와서 돌을 세웠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실재적인 체험이었다.
그런 후에 그는 다시 발행해서 헤브론을 향해서 가는데 헤브론에 가는 길에 라헬의 묘비가 있다. 이것은 슬픈 묘비였다. 베냐민을 얻은 것은 기쁨이었지만 라헬을 잃은 것은 슬픔이었다. 그래서 슬픔의 아들과 오른손의 아들에 대한 이정표였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그런 예표로서 이정표가 되었다.
거기서 다시 발행해서 에델 망대에 이르렀다 한다. 에델은 양떼란 뜻이다. 그러니까 양떼를 지키는 망대다. 미가서 4장 8절에 같은 단어를 양떼라고 번역을 했다. 여기에서 더럽고 수치스럽고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야곱의 일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다른 일들은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일이었지만 이 문제만은 완전히 야곱을 망신시킨 일이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야곱의 첩과 통간을 했으니까 결국 자기의 서모와 통간하는 그런 일이다. 장자라는 뜻은 힘이고 능력이고 자랑이고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야곱의 모든 자랑과 힘과 능력이 수치를 당했다 이런 의미가 된다.
이것이 왜 일어났느냐? 이런 사건이 왜 일어났느냐? 에델 망대를 지나서 장막을 쳤다고 했다. 바로 헤브론으로 가지 않고 거기서 또 장막을 쳤다는 것은 거기서 또 머뭇거렸다는 것이다. 왜 머뭇거렸는가? 양떼를 지키는 망대가 있는 곳이니까 아주 안일하고 평화로운 목가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야곱은 양떼가 많았고 그 양떼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환경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 오니까 양떼를 치기가 좋은 곳이었다.
장막을 치고 머무르려고 할 때 항상 어떤 사건이 생기는 것을 본다. 그러니까 바로 진행해서 갔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숙곳에 왔을 때 자기를 위해서 집을 짓고 양무리를 위해서 우릿간을 지었다. 그리고 세겜으로 옮겨서 장막을 쳤다. 땅을 사서 장막을 쳤다. 거기서 살 생각을 했던 것이다. 벧엘로 가겠다는 약속을 또 잊어버리고 다시 거기서 머물러 살려고 할 때 디나가 밖에 나가서 세겜 하몰의 족속에게 강간을 당함으로서 야곱 일생에 또 한 번의 수치와 분노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건을 만들었고 이 사건을 인해서 레위와 시므온이 칼을 들고 앞장을 서서 하몰의 족속들을 궤계로 몰아넣어서 모두 죽였기 때문에 야곱은 거기서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그때 비로소 마지막 결단을 하고 벧엘로 올라가는 기회가 되었다.
에델 망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머뭇거리다가 이런 일이 발생했다. 항상 생활이 안일할 때 거기 머무르려고 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잘 풀리면 거기서 살고 싶고 안일한 곳에 눌러 있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본성들을 야곱이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생활의 안일함을 암시하고 있다.
장막을 쳤다, 에델 망대가 있다, 양무리를 위해서 우리를 지었다, 자기를 위해서 토담집을 지었다, 이 모든 것은 다 안정된 생활을 의미한다. 헤브론으로 가는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대신에 안일한 곳에 머뭇거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의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언제든지 안일한 생활과 관계가 있다. 특별히 음행이나 간음이나 이런 것들은 이런 안일한 생활, 부요한 생활, 이런 곳에서 발생하지 옹색하고 다급하고 위급한 이런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결국 안일하면 이런 곳에 빠지게 된다. 지금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고 있어 사람들이 살기가 좋아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가 있고 물질적으로는 풍요가 있다. 또 문명의 모든 이기가 전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향락에 빠지기가 아주 쉬운 것이다. 자본주의는 결국 사랑이 상실 된 향락으로 빠져들어 간다. 사랑이 상실된 사람들이 빠지는 것이 향락이다. 사랑으로 행복할 수 없으면 향락이 그 사랑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생을 즐겁게 편리하게 잘사는 것이 목적이 이기 때문에 사랑이 상실 되어서 사랑을 대치하기 위한 온갖 향락이 다 나온다. 자기의 필요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래서 각종 마약이 나오게 되었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넘쳐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멸망은 어디서 올 것인가? 경제가 실패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실패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성이 사랑이 상실 된 향락에 빠져서 망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면 인격을 얻을 수 없고 인격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악의 없는 인격 안에서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격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랑도 상실하게 되어서 잘 먹고 잘 살사는 것을 지향하게 되었고 물질의 부요는 결국 향락으로 이끌고 가게 된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한 생명 안에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을 하게 되면 향락이나 다른 것으로 인생을 채우려고 하지 않을 텐데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한 아담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 치게 되고 물질의 풍요는 향락을 만들어낼 뿐이다. 앞으론 마약 때문에 생기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서 고난 받는 것보다 안일이 더 위험한 것이고 핍박보다는 동조를 받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성경의 교훈 통해서 배우게 되고 삶에서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교회가 고난을 받을 때는 깨끗했다. 그리고 핍박을 받을 때도 순수했다. 그런데 교회가 부유해지면서 타락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1세기 이후로 핍박을 받을 때는 아주 순수했었다. 그런데 3-4세기에 오면서 부유해지고 국교가 되면서 점점 세상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핍박보다도 동조가 더 위험하다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거가 된다.
황제가 옹호하고 제후들이 옹호하고 그러니까 얼마나 좋겠는가? 옛날 숨어서 지하 카타콤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했던 그때에 비하면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결국 기독교는 점점 본질을 잃어가게 되었다.
생명은 고난 속에서 더 완전하게 자란다. 인삼과 산삼을 비교하면 왜 산삼이 더 낫는가 하면 산삼은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래서 빨리 자라지 못하고 빨리 살이 찌지 못한다. 고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덕분에 오래 산다. 오래 살다가 보니까 살은 없지만 그 안에 약효가 있는 성분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인삼은 좋은 흙에 키운다. 그러니까 6년을 넘기기가 어렵다. 대부분 4년에 캐야지 그렇지 않으면 썩는다. 6년까지 가는 인삼이 별로 없다. 인삼은 외형은 큰데 오래 살지 못하고 약효가 떨어진다. 생명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더욱 더 강해지고 강하게 자란다 하는 것을 자연 속에서도 볼 수가 있다.
야곱은 안일한 것을 원했다. 누구든지 우리 인생은 안일하기를 원한다. 왜 일하는가? 편안하게 살려고 그렇다. 왜 노력하는가? 편안하게 살려고 그렇다. 젊어서 일을 해야 늙어서 편안하다 이런 식으로 다 편안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 편함 속에 큰 함정이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편함과 안일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산출하는 교회로 살지 못하면 안일을 추구하게 되고 편안함과 잘사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서 엄청난 일이 발생했는데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이동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르우벤에서 요셉으로 장자권이 이동되게 된다. “대상 5: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분명하게 르우벤의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족보상에는 그렇다고 요셉부터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르우벤부터 기록한 것이다 이런 뜻이다.
르우벤은 더럽힘으로 인해서 결국 장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 사건을 인해서 장자권은 셋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왕권과 제사장권과 토지권 이 세 가지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아브라함이 가장이면 가장이 왕도 되고 제사장도 되고 소유권자도 되고 이렇게 되었다.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랬는데 르우벤 이후로부터 이것이 갈라지게 되었다.
유다는 형제들을 돌보고 아버지를 향한 관심이 깊었기 때문에 왕권을 가지게 되었다.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책임을 지고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책임감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왕권을 받게 되었다.
레위는 하몰의 자손들을 죽일 때 잔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의 장자권을 얻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을 때 밑에서 아론과 그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때 모세가 내려와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선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그래서 친족이든지 가족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우상에게 동조하는 자는 다 죽이라 고 했을 때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레위 족속이 나왔다. 그래서 이 레위 족속은 제사장 족속이 되었다. 레위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결국 다시 구원을 받아서 제사장의 장자권을 받게 되었다.
요셉은 비록 애굽사람의 집무를 맡은 집사였지만 그의 재물을 온전하게 잘 관리했고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순전함을 지켜냄으로 땅의 두 몫을 받게 되었다. 요셉은 두 배의 분깃을 받게 된다. 다른 사람이 다 한 몫씩 받을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 요셉의 두 아들들을 내 세워서 두 몫의 땅을 주게 된다. 요셉은 두 몫의 땅을 가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결국 장자권에 속하는 문제였는데 왕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권세 통치권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권세다. 그리고 장자의 명분은 두 배의 땅을 가진다. 땅을 무엇인가? 모든 것의 기반, 근본이 땅이다. 사람은 땅에서 흙을 취해서 만들었다, 가나안도 땅이다, 이것은 전부 다 어떤 존재를 말한다.
왕권도 그리스도 제사장도 그리스도 땅도 그리스도인데 이 셋 중에서 땅은 존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왕권이나 제사장 권은 일에 속하지만 땅은 존재에 관계된다. 땅에서 콩도 나고 팥도 난다. 콩이나 팥은 땅이라는 존재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왕권이나 제사장 권은 땅이라는 존재에서 생산된다.
셋으로 나뉜 장자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통합된다. 예수 한 사람 속에 유다의 왕권과 레위의 제사장 권과 그리고 요셉의 두 몫의 명분, 그것이 한 생명 안에 통합된다. 비로소 회복된 셈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 때 하나였던 것이 르우벤으로 말미암아 갈라졌었는데 그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되어서 생명 안에서 통합이 된 셈이다.
순결은 존재와 관계된다. 일과 관계되지 않고 존재와 관계된다. 그러니까 이 존재 안에서 권세나 섬김이나 이런 것이 나오는 것이지 존재가 없는데 권세가 나올 수 없다. 사자의 권세는 사자의 존재에서 나온다. 원숭이의 재주는 원숭이의 존재에서 나온다.
이 세 주권 가운데 장자의 명분이라는 이 명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야곱은 죽으면서 요셉을 축복할 때 두 배의 땅을 축복한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요셉에 대해서 장자의 명분을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른 것도 다 장자의 명분이지만 이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존재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왕권이 더 큰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은 증거하기를 왕권보다 장자의 명분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 명분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에 관계된 것이다. 요셉이라는 이 존재 안에서 유다와 레위가 나오게 되고 유다와 레위는 다시 장자권이 된다. 그런 의미와 마찬가지다.
세상은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밖으로 나타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생명 안에서는 존재가 더 앞선다. 요셉이 앞서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 안에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들어있다. 존재의 어떠함 때문에 이런 일도 나오고 저런 일도 나온다. 이 존재는 결국 인격적인 것이다.
순결은 인격적인 것과 관계가 된다. 이것이 파괴된다는 것은 인격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인격이 파괴되고 나서 그 인격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 없다. 파괴된 인격에서 파괴된 것밖에 더 나오겠는가?
생명이 썩으면 냄새가 난다. 살아있을 때는 향기가 났는데 죽어 썩어지면 냄새가 난다. 그 존재가 썩으면 존재에서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만 그 여러 가지 면들은 그의 존재의 산물이지 결코 일부러 나타내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만일 사랑이 있었다면 그 사랑은 존재의 산물이고 그에게 겸손이 있었다고 해도 그 겸손은 존재의 산물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을 때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고 이런 말이 나온다. 그것을 사람들은 그냥 사랑이라는 어떤 행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 사랑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생명에 있다.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행동이 어찌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 말은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존재적인 생명, 그리스도의 인격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고 이런 말이다.
앵무새가 연습해서 사람의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앵무새일 뿐이지 아무런 유익이 없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해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나타내는 행동만이 그 사람에게 영원한 것이니까 요셉의 장자의 명분은 인격적인 명분이고 존재적인 명분이다.
이 인격과 존재적인 명분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순결에 있다는 것이다. 순수성에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수하고 사람과의 관계에도 순수하다. 그래서 인격이 온전할 때 온전한 행실이 나오게 되지 온전하지 않은 인격에서 나온 행실은 일시적으로는 혹시 놀라운 것이 나올 수도 있고 훌륭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가면 금방 변질되고 만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좋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그것이 아니다.
회칠한 무덤이요 라고 책망을 했을 때 그들의 행위는 굉장히 세련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회칠한 무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가장 증오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할 때도 그렇고 회칠한 무덤이요 할 때도 그렇고 그렇게 신랄하게 사람을 책망한 일이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서만 아주 신랄하게 책망한 사실이 있다. 이것은 존재는 더러운데 행위만 깨끗한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속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밖에 나온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취하니까 속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볼 때는 생명 안에서 보니까 그 생명을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외식이 아주 가증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에델 망대의 사건에서 사람이 안일할 때, 부유할 때, 편안할 때 우리는 더럽혀질 수 있고 그럴 때 사람은 향락에 빠지게 되고 그럴 때 인격은 파괴되고 수치스러워지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대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계속 발전하게 되면 인격 파괴가 생기게 된다. 향락 때문에 인격이 파괴되고 만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어져 간다. 어떻게 하면 향락을 즐기느냐, 어떻게 하면 내 마음대로 사느냐, 이런 것에 집착하고 있다. 사회는 또 어떤 사람을 요구하는가 하면 기능을 요구한다. 어떤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요구한다.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필요는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능에 있다. 기술자를 요구한다. 사람의 존재는 엉망이 되더라도 기술만 있으면 되고 능력만 있으면 되고 이렇게 사회가 요구를 한다. 그러니까 결국 타락한다.
여기에 편승해서 교회들도 이런 경향을 띄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하나의 경영이 되어서 회사처럼 그렇게 움직여 나가고 있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어떤 능력을 요구한다. 목사를 청빈할 때 어떤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인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능력을 요구한다. 경영 능력을 요구한다. 그 사람이 전의 교회에 있을 때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가? 그래서 교인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고 늘릴 수 있는가 이것을 생각한다. 완전히 미국식이다.
경영자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와서 신자가 떨어진다면 장로들이 가만 두지 않고 내어보낸다. 당장 경영이 안 되니까 그렇다. 회사실적에 따라 사장이 바뀌는 것처럼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성공, 확장 이런 것에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교회가 내용이 없다. 방법만 꽉 차 있게 마련이다. 성공하는 방법을 논하는 세미나가 있다 그러면 벌떼처럼 사람이 모인다.
하나님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존재에 있다. 그래서 요셉의 명분을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여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는 형제들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부터 났을지라도, 다윗도 유다 족속이다. 그럴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상은 모두 능력을 보고 기능을 보고 외형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존재를 보고 존재를 위하시고 존재를 사랑하시고 존재를 정결케 하시는 것이 감사하다. 유다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왕권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이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고 하는 이 말씀 속에 오늘 우리 이정표가 확실하게 보이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셔서 감사하다. 요셉이 그의 순결을 통해서 이 명분을 얻고 이 명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하신 것이 감사하고 오늘 우리 인생 속에서 영원토록 그리스도가 산출되는 삶이되기를 원한다.
(받은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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