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의 교회 비전)


김동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요체는 무엇인가?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지금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교회는 획기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가? 현실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최근 위와 같은 질문을 자주 하고 또 듣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다른 이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한다. 이러한 질문과 외침 속에서 결국,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건강한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 알려면 우리는 마땅히 성서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구약에도 예배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교회라는 개념이 나오지만 교회라는 용어와 그 개념을 직접적으로 기술한 것은 신약 성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해답을 우선적으로 신약성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교회가 마땅히 교회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신약성서가 획일적으로 일치를 이루는 관점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신약 각 책의 저자는 자신의 신학에 입각하여 당시의 상황에 따라 이에 대한 적절한 처방으로서 교회론을 내 놓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을 때 공관복음 저자들과 바울은 교회를 새 이스라엘이요, 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소개했다(롬 9-11장 참조). 교회 구성원 간의 은사와 역할 문제에 대해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각의 신자는 그 지체로서 상호 은사로서 섬기는 관계라는 설명을 했다(고전 12:4-27; 롬 12:3-8; 엡 4:11-12). 


  본 소고에서 우리는 요한이 복음서를 쓸 때 나름대로 생각한 교회에 대한 비전이 무엇이었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요한이 생각한 교회의 비전과 얼마나 부합한가 혹은 이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찾아내고,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어떻게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요한의 교회 비전

요한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교회에 관한 비전을 밝혀내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마주치는 난점은 요한은 여기에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새) 하나님의 백성이나 새 이스라엘과 같은 교회에 관한 익숙한 개념도 여기에서 쉽게 찾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해서만 기술했지 복음서에서 교회에 관한 비전은 제시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은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마태는 예외) 나름대로의 용어와 방법으로 교회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한편으로 교회를 목자와 양(10:1-18) 혹은 포도나무와 가지(15:1-17)로 그리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 무리를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1:12; 11:52), 보혜사의 이끌림을 받는 공동체(14:15-17),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룬 공동체(17:20-23)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본문을 면밀히 고찰하여 교회에 관한 요한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교회는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구속사의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어떤 신학자(A. Loisy)는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나님 나라였는데 생겨난 것은 교회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최소한 요한복음에 관계해서는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교회의 설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교회 설립은 예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서 구체화되고 예언되었던 것이다. 교회 설립을 위해 예수는 제자들을 선택하고(15:16; 17:6-8), 이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보호했으며(17:11), 이들을 파송하여 선교가 이루어져 또 다른 제자 무리가 이루어지고(17: 17-19) 자기가 지상을 떠난 다음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이로 하여금 제자 무리를 계속 이끌 것을 말한다(요 14:15-17).


또 이러한 무리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일치’를 이루게 되기를 기도하는데(요 17:20-23) 이것이 바로 교회다. 이 교회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할 것이며(10:16), 예수의 직접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메시지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이들까지 포괄하는 모임이 될 것이다(17:20-23).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의 구속사역의 결과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설립되었다면 교회는 당연히 신적 기관이고 교회는 신성한 것이다.



2. 교회의 원형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다.

요한의 교회 비전 중에서 독특한 것이 있다면 교회의 원형을 사도들의 모임으로 보지 않고 예수 자신으로 보는 것이다.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열 두 사도는 구약의 열 두 지파를 이어 받은 새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바울도 바로 사도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한다(엡 2:20).


이들이 새 이스라엘의 원형을 구성하고 그 터 위에서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마 16:18-19 참조). 하지만 요한은 불완전한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에게서 교회의 원형을 찾는다. 예를 들어 구약과 공관복음에서 양 무리는 하나님 백성을 가리키는 주요 이미지였다(창 49:24; 시 23; 호 4:16; 마 10:16; 막 6:34; 눅 12:32).


즉 양 무리가 신약에 와서는 새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양무리가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유일한 선한 목자”(10:14)라고 말한다. 즉 예수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 백성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돌보는 포도원도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는데(호 10:1; 렘 2:21; 사 5:1-2) 이제 신자 무리가 포도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이들을 대체하는 “참 포도나무”(15:1)가 된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주요 거룩성의 상징을 예수로 대치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주요 신학적 모티브 중 하나이다(cf. 요 2:21-22; 4:20-24).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 백성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의 원형이라는 것은 교회론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우리는 흔히 원형적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교회는 사도의 무리도 아니요, 성령강림으로 생겨난 초대 교회도 아니요, 새 이스라엘로서의 예수 자신이다. 교회 원형의 회복은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3. 교회가 원형은 신자와 예수의 생명적 결합을 통해서만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그 원형을 잘 간직하는 가에 달려있다. 요한복음에서 교회가 그 원형을 지속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예수가 교회의 원형이기 때문에 각 교회 구성원은 교회의 원형인 예수와 생명적 결합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목자와 양 상호 간의 ‘앎’의 관계로(10:1-18), 포도나무와 가지의 생명적 상호 ‘거함’의 관계로 묘사한다(15:1-17).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서로 음성으로 알아보면서 양과 목자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 앎의 관계처럼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다(10:14-15).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교회 구성의 요체라는 것은 포도나무 강화(15:1-17)에서 더욱 분명하다. 어떤 가지든지 포도나무와 생명적 결합 관계에 있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도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생명적 연합이 없이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생명적 결합이 없다면 사교와 봉사모임인 라이온스 클럽화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여, 교회와 그리스도가 몸 안의 결합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하지만 바울의 초점은 몸 안의 지체들의 상호 관계에 있다. 각 지체는 모두 머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상호 섬기는 관계라는 것이 바울 몸 교회론의 초점이다. 요한도 신자를 포도나무 가지라고 표현하고 이어서 이들 간의 서로 사랑을 말한다는 면에서(요 15:9-17)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의 수평적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요한의 초점은 각 가지가 포도나무에 얼마나 잘 결합하여 계속해서 ‘거하여’ 있는가에 있다. 즉 교회의 요체와 본질은 신자가 교회 자체이신 예수와 얼마나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관계로 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4. 교회 시대에 예수와 신자의 생명적 결합을 이끄는 분은 보혜사 성령이다.    

요한복음에 제시된 교회의 본질과 요체는 신자가 교회의 원형인 예수와 얼마나 생명적 연합과 교제를 현재, 실제로 누리고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예수가 지상에 없는 상황에서 신자는 어떻게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양인 신자는 목자인 예수의 음성을 어떻게 지금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가? 포도나무 가지인 신자는 어떻게 포도나무인 예수로부터 자양분을 매일 받으면서 풍성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 바울과 마찬가지로(롬 8:9) 요한도 교회 시대에 신자가 예수와 생명적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라고 한다(요 14:15-17, 25-26; 15:26-27; 16:7-15).


모든 신자는 성령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성령의 인도하심의 경험을 통해(요 3:3-8; cf. 요일 2:20, 26-27) 예수와 실제적이고 생명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성령을 보혜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신약에서 유일하고, 이 성령이 바로 교회의 영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교회 이해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보혜사는 교회 시대 제자들의 인도자요 보호자이다. 보혜사는 제자 공동체에 거하면서(14:17),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깨닫게 하며(14:26),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고(15:26),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죄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고(16:7-11),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16:13),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며(16:14), 예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려준다(16:15).


결국, 교회 시대에 교회가 얼마나 교회의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신자가 이 보혜사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 없는 곳에 교회가 존재할 수 없듯이, 보혜사 성령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5. 예수가 교회의 원형인 교회에서는 신자 상호 간에는 어떤 계급이 있을 수 없다.  

교회시대에 교회의 요체인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내주는 성령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성령의 체험은 교회의 대표가 하는 것이 아니고 각 신자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령을 체험하는데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남성이나 사도 등 어떤 특권도 없다.


요한은 신자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데 있어 어떤 계급이나 특권 계층이나 중보자를 설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처럼 옛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연결하는 새 이스라엘의 상징인 사도 무리가 요한복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요한은 열 두 제자는 언급하지만 이들을 사도로 부르지도 않고 또 이들의 명단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이들의 하나의 제자일 뿐이다. 또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는데 있어서는 남녀의 구별도 없다. 여성도 모범 제자로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도 하고(막달라 마리아, 20:18), 표준적인 신앙고백을 하기도 한다(마르다, 11:27).


요한복음에서는 모델 제자도 실명이 아닌 익명으로 “예수의 사람 받는 그 제자”라고 하여 어떤 제자도 바로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종류라도 제 이급의 신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신자는 계급적이라고 보다는 평등적 관계를 내포하는 형제(20:17), 친구(15:13-15), 혹은 하나님의 자녀(1:12; 11:52)로 불리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도직을 비롯한 어떤 교직이 아니라 예수와의 교제를 통한 제자도인데 이것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 기록 이후 세대에 발달한 교리에 의하면 교회의 대표인 감독과 교회가 일치되는 경향성을 보이는데 반해(Ignatius, Smyrnaeans 8:1; Letter to the Trallians 3:1)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경향성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성령을 통해 예수와 교제하는데 있어서 평등성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요한복음에 따른 교회이해의 또 다른 특징이다.



6. 교회는 이 땅에서 신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요청된다.

예수는 고별 설교의 마지막에서 신자들이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한다(17:20-23). 이 일치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신적인 일치요 독특한 종류의 일치이다.


그 동안 이 일치에 대해서 대중적으로는 인간 상호 간에 이해에 의해서 갈등이 일어날 때 상호 일정 부분 양보로서 이루어지는 “에큐메니컬 일치” 혹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한다는 “획일적 일치”라는 제안에서부터 “신비주의적 일치” 혹은 교회가 계급구조적으로 바로 서야한다는 “기구적 일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일치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일치다. 일치의 근본 모델이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히 조화된 관계다(21절). 이 일치는 “나[예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기독론적 일치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 기원하여 신자는 예수와 또 신자 상호 간에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치’는 교회 구성원들 간의 사랑 속에서 보여 지는 교회의 일치이기도 하다(17:26; 13:34-35; 요일 4:7-12). 이러한 수직적이면서 동시에 수평적인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요한이 꿈꾸었던 교회이다.


교회는 보통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올바로 살까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기보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모여 수직적으로는 삼위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서로 교제하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1:1-4).


그래서 교회라는 발음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교회는 敎會(가르치는 모임)가 아니라 交會(교제하는 모임)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교제하는 모임이라고 이해할 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직적 교제 없이 수평적 교제만 있는 모임은 자유 시민의 모임을 될 수 있어도 교회는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평적 교제가 없이 수직적 교제만 있다면 그것도 교회는 아닌 것이다. 수직적 교제만 있는 모임은 신비주의가 되고, 수평적 교제만 있는 모임은 인본주의가 된다. 비록 수직적 교제에 그 강조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수직적 교제와 수평적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요한이 꿈꾼 교회이다.



7. 교회의 원형을 잃어버려 인본주의화된 교회는 회복과 갱신이 필요하다.

요한의 교회 비전에 따르면 신자가 예수와 생명적 교제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세례, 성만찬)을 반대한 것 같지는 않지만 성만찬 제정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우연히 아니다.

성례전도 예수와 생명적 교제를 이끄는 한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장소를 예수와 직접 만나는 것 자체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요한복음에 따르면 인본주의적인 것이다(4:20-23). 교회 안에 예수와 각 신자가 직접 교제할 수 없고 중재하는 어떤 교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에서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원형인 그리스도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인본주의화 되었다면 어떻게 교회가 갱신될 수 있는가?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올바른 교회의 모습으로 모델로서의 한 제자를 소개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가장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는 인물로서 인본주의의 대척자로 그려진 인물은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이하 애제자)이다. 애제자는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로서(13:23), 예수의 고난(18:15)과 십자가(19:25-27, 35)와 빈 무덤(20:1-10)과 부활(20:19-23)의 증인이었다.


애제자의 특징은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수가 누구인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다.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났을 때도 제자 무리 중에서 오직 애제자만이 예수를 알아본다(21:7). 요한복음은 인본주의화된 교회에게 애제자와 같이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뜻을 깨닫는 교회가 되기를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 갱신
 
신약 각 책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비전은 저자의 신학과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에 그대로 주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약 각 책의 교회에 대한 핵심 비전에 따라 우리 교회를 비추어 보는 것은 가능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요한이 제시한 교회의 비전에 따라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어떻게 갱신되어야 할 것은 위에서 제시된 요한의 교회 비전 안에 내포되어 있다. 다만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요한이 제시한 교회 비전에 따라 우리 교회의 현 주소를 확인하고 교회 갱신의 이론적 토대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 우리 교회는 얼마나 그리스도 중심적인가?

신약에서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임을 일컫는다. 여기에 신자 상호 간의 관계도 있지만 관계의 핵심은 신자 각자와 예수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이다.


주께 속한 것이란 뜻의 영어(church)와 독일어(Kirche)의 교회라는 말도 헬라어 ‘큐리아콘’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것은 신약 성경 교회론의 핵심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교회의 핵심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인 것이다.


히 요한의 비전에 따르면 교회의 기원과 본질에 있어 어떤 인본주의적 요소도 배격한다. 교회는 구속사의 계획 속에 설립된 것이며, 예수 자신이 교회의 원형이다. 이러한 비전에 비추어 볼 때 한국 교회는 과연 얼마나 이 비전에 부합한가?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교회를 통해서 사적 이익을 얻는 것은 교회가 교직자의 사유물화 된 것은 아닌가? 교회의 원형이 예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교직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2. 우리의 교직 이해는 과연 성서적인가?

신약 각 책에 기록된 교직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한 책에 나오는 교직 이해가 이후 모든 교회 교직의 원형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요한이 이해한 교회 직제가 민주적이고, 비 계급적이라고 해서 이것이 하나의 규정(norm)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 성서의 다른 책, 예를 들어 목회 서신에 보면 감독과 집사가 어느 정도 계급화된 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딤전 3장 참조). 하지만 요한의 교직론을 통해서 우리 한국 교회 교직 이해의 방향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유교의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아 우리 한국 교회는 교직을 흔히 본래적 위계질서로 이해해 왔다.


목사와 장로와 평신도가 위계로 서로 관계해 왔다. 하지만 보다 민주화되고 양성이 평등화된 현 사회에서 우리의 교직에 대한 이해가 이에 머무른다면 시대에도 뒤떨어질 뿐 아니라 이러한 목회자와 평신도를 기능적이 아니라 본래적, 절대적 위계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적인 것도 아니다.


목회서신의 교직 이해도 기본적으로는 기능적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다. 우리가 같은 성령을 통해, 같은 예수와 각자가 교제하기 때문에 모두가 형제요 친구로서 만난다는 요한의 교회 비전을 우리 교회에 적용한다면 우리 교회는 모든 이가 같이 행복한 교회가 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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