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Zwingli, Ulrich)


종교 개혁가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루터와 칼빈일 것이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로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반성을 통해 기독교 전체의 부흥을 가져옴으로써, 유럽 종교사에 그들의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획을 그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들만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울리히 쯔빙글리(Zwingli, Ulrich)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칼빈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실패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빙글리의 실패는 칼빈을 스위스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했다. 또한 쯔빙글리가 닦아놓은 개혁의 기반들이 없었다면 칼빈 역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칼빈의 개혁은 쯔빙글리의 개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로서의 쯔빙글리가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두 사람만큼 많이 언급되거나 연구되지 못하는 이유는 물론 그가 내전 중 전사함으로써 개혁에 실패하였다는 점 (끝까지 개혁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것이 곧 실패를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이 가장 크겠지만, 그의 급진적이고 융통성 부족한 개혁들이 후세 사가의 미움을 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종교개혁에서 쯔빙글리가 미치는 영향력은 적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스위스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여기에서는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인 신학과 그가 이끌었던 개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쯔빙글리의 출생


울리히 쯔빙글리는 스위스 동부에 토겐부르그의 빌트화우스에서 1484년 1월 1일 태어났다. 그는 바젤과 비엔나의 대학들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성직을 임명받고 글라루스에 목사로 임명받아 목회를 시작했다. 글라루스에서의 10년 동안 그는 계속해서 인문주의적 탐구를 했으며 그의 우상인 에라스무스와 더불어 관계를 가졌다.


 1518년 후반 쯔빙글리는 취리히 대성당의 시민사제직에 선택되었는데 그의 신학적 능력과 에라스무스적인 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 되었다. 1591년 1월 1일부터 쯔빙글리는 마태복음 강해했는데 이것은 특정 주일의 복음서 일과표에 기초하여 설교하던 당시의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사도행전, 디모데전서 등을 강해했다.


1520년 이후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적 사상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쯔빙글리 자신의 신학적 틀을 보여주는 새로운 개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루터가 쯔빙글리의 "개혁에로의 전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과 대조적으로 루터의 신학은 쯔빙글리의 발달에 있어서 단지 주변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와 함께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종교개혁시대에는 인문주의적 이념들로부터 이탈하는 데 어거스틴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


 1520년 말에 그는 교황수당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용병으로의 봉사를 장려하였던 그의 이전 친구요 후원자인 추기경 쉬너를 공격함으로 그의 결별은 1521년 표면화 되었다. 쯔빙글리는 설교를 통해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였고, 1522년 이후 그것을 도입해 들였다. 그리하여 그의 종교개혁은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배경에는 그의 사상적 배경이 많이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쯔빙글리의 신학


1) 신관
쯔빙글리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출발점은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절대적인 구별이다. 1523년 7월 쯔빙글리는 67개 조항 해설에서 피조물보다는 창조주를 택했다. 쯔빙글리의 경우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로부터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의 운동이었다. 인간의 존재는 우리가 피조물인 한 오직 하나님의 재량으로 그리고 그 분의 선의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의하여 모든 만물을 있게 하고 다스리는 제1동인이요, 절대적 원인으로서 루터와 같이 창조와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의 거대한 사견들만이 아니라 생활의 사소한 일에도 역시 관련되어있는데 하나님의 섭리는 삶의 선하고 즐거운 측면들만 아니라 역시 어둠과 고통스러운 부분도 다스린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쯔빙글리의 가장 자세한 서술은 1529년 10월에 열렸다. 발부르그회의에서 설교를 통해 나타났고 그것은 그 후에 철학적인 논문인 "섭리론"속에 개정되었다. 여기서 그는 신적인 섭리와 인간 구원의 문제를 가장 밀접한 방식으로 조화시켰다.


이와 같이 쯔빙글리 사상적 체계의 핵심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였고, 그의 사상적 체계 전체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또한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로마교회의 이교적인 성해(聖骸)숭배와 성상숭배에 대한 환멸로 인하여 이러한 입장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반발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그의 모든 사상의 중심으로 삼게 만들었던 것이다.


2) 성경관
성경은 쯔빙글리 종교개혁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 사실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있었던 네 가지 중대한 계기에서 발견되는데, 첫째는 성경원리에 대한 자신의 결정적 회심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깨달음이며, 둘째는 1519년 1월 1일 취리히 대성당 강단에 들어갔을 때 시작한 급격한 새 형태의 설교였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설교했고 성경이 직접 그 회중에게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셋째는 도시 당국자들에 의한 성경 권위의 수용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1523년 1월에 열린 1차 취리히 논쟁에서 확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언의 모임에서 성경연구의 진전이었다. 취리히에 있는 모든 목사들과 대학생들이 성경의 강도 높은 주석과 해석을 한 시간 동안 하기 위해 대성당에 모였을 때 이 모임은 훗날 개혁주의 아카데미와 신학교를 위한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에 대해 간파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하신 의지의 계시였다. 이것은 루터의 개념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3) 성례관 
 쯔빙글리의 성례관은 에라스무스를 모방하여 성례의 교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어거스틴을 논박하며 요6:53-56의 말씀들은 영적인 먹고 마심이라고 정의했다. 1522년 발견된 주교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미사의 집전이 죄에 대한 형벌을 소멸시킨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즉 예수의 유일회적 십자가상의 죽음 이후 어떤 희생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 후 1524년 쯔빙글리는 성 만찬이해에 본질적인 통찰을 획득했다. 그는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루터의 실재설과는 다른 영적 성격을 확신했다. 그는 또한 성례가 구원의 수단이라는 견해를 배척했다. 성례전은 공식적 선서에 의한 단합과 충만의 표시이다. 즉, 그것은 내적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나타내는 외적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쯔빙글리는 다음 몇 가지에 비추어 루터의 "실재적 임재"의 교리를 거부하였다. 첫째, 성서의 선언에 의하면 육은 무익한 것이다. 둘째, 그의 세계관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 사이에 어떠한 밀접한 결합은 인정할 수 없었다. 셋째, 그의 기독론에 의하면 예수의 인성은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성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세례에 있어서도 쯔빙글리의 경우 물세례보다는 성령세례가 개인들의 신적인 구원의 궤도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수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례는 사람들이 어떤 직책이나 직분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공식적으로 얽매이는 입회하는 의식이나 서약으로 정의했다.


4) 교회관
"그리스도의 몸이요 믿는 자들의 단체인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예정된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선택된 자들의 교회는 홀로 하나님께만 알려져 있다. 신앙은 선택된 자로 하여금 자기가 이러한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다른 권속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로 구성된 '보이는 교회'와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포함한 '보이지 않는 교회'가 그것이라며 루터는 교회의 가시적인 면과 불가시적인면을 강조한 반면 쯔빙글리는 이러한 두 교회 사이에 어떠한 밀접한 관련도 확립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선택교리와 철학적 세계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쯔빙글리의 개혁


에라스무스의 기독교인문주의에서 개혁자 진영으로 쯔빙글리를 인도한 발전의 열매들은 1522년에 명백히 나타난다. 그 해 초 취리히 성직자 쯔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소세지를 먹은 인쇄업자 프로샤유어를 변호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첫 번째 저작「음식물의 선택과 자유에 대하여」에서 금식과 관계된 교회법의 불법적 성격을 확신하게 되며 교회의 독신제도가 성경적 기초를 갖지 않음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하여 1522년 은밀하게 과부와 결혼하고, 콘스탄스 주교인 호헤란덴베르크에게 11명의 동료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보내 사제들의 결혼 자유권을 요구했다. 결국 1522년 여름「 처음과 나중을 옹호함」을 출판 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취리히 참사회를 시켜 "무질서"를 막아내기 위해 자신을 부른 주교의 교서를 거부하고, 오직 유일한 권위인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다. 같은 해 11월 쯔빙글리는 취리히 대성당의 사제직을 사임하였다.


1523년 1월 29일 6백 명의 청중들 앞에서 최초의 공개적인 카톡릭 교회 논박이 행하여졌는데 이 논쟁에 대비해서 그는 토론의 기초로 사용하게 될 67개 논제를 작성했다. 여기에서 쯔빙글리는 그의 종교개혁 프로그램 및 그 신학적 전제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서 형성될 실제적 결과들을 제시하였다. 한편 쯔빙글리는 65개 결의를 발표한지 몇 달 뒤에 광범위한 「결의들 또는 신조들의 주석 및 증명」을 출판했다. 또한 시의회도 합세하여 67개 결의를 위반할 경우 혹심한 처벌을 내린다는 경고를 내리고 모든 성직자가 성서에 일치하여 쯔빙글리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고 명령했다.


1523년 가을 대성당 소속 수도회는 종교개혁에 착수했고 10월 26-28일에는 제2차 토론에서 화상들과 미사를 폐지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1524년 가울 취리히 수도원들이 해산되었고 1525년 5월에는 결혼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추진은 독일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것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 그는 다수의 설교자들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도입된 이후 쯔빙글리는 정부를 장악하게 되었고, 반면에 적대자들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이러한 개혁운동은 제네바의 칼빈 통치를 위한 길을 예비해 주었고 이런 식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최후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쯔빙글리는 루터와 칼빈과는 다른 종말을 맞게 된다. 그는 민족주의자로 모든 스위스 백성이 로마 천주교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소원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과 같은 이들은 스위스에서 취리히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루쩨른과 힘을 합하여 스위스의 숙적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그가의 페르디난드 공작과 동맹을 맺고 취리히에 대항하였다.


이에 쯔빙글리는 1529년 6월 로마 천주교적인 주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카펠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만난 양측은 전쟁에 대하여 소극적이어서 페르디난드와 맺은 조약을 취소하고 개혁운동에 대한 박해를 종식하여 종교선택의 자유를 허용하며 제 1차 카펠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스위스 연맹회의에서 혼란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이에 츠빙글리는 개혁자들 사이의 내부 결속을 위해 로마 카톨릭 주들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세워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을 산지와 거래하는 것을 금하는 경제 봉쇄령과 베른과 취리히로 하여금 산지의 주들을 봉쇄할 수 있는 정책을 세웠다. 이에 격분한 산지의 주들은 1531년 8000여명을 이끌고 카펠에 몰려왔다. 쯔빙글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15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그는 군대를 고무하기 위해 전장의 중심부로 들어가다 목에 치명상을 입음으로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로인해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론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쯔빙글리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과제를 싣고 앞으로 굴러가고 있는 수레를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 전체로 하여금 복음의 정신에 기초한 윤리적인 공동체가 되려고 노력했던 쯔빙글리의 개혁정신이 칼빈의 개혁의지와 하나가 되어 나중에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결실을 맺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실패는 하였지만 그는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서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보다 훨씬 강하여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데서 인정을 받았다.


비록 그가 다른 개혁가들과는 다른 방법을 사사용 하였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종교가 얼마나 많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며 이러한 이면에는 그의 사상적 배경이 많이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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