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성령은 삼위 하나님 중 성경에서 언급이 많이 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오해도 가장 많다.

삼위일체에서 먼저 살펴보았지만 성령 하나님이 분명 인격과 의지를 가지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격을 무시하고 하나의 능력으로만 보고 노래하는 곡도 많다.

성령론에 있어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관한 내용이다.


세례란 동일화, 동질화(identification), 연합 한다는 뜻이다.

세례 요한의 물 세례는 원래 우리 인간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 물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과 함께되기 위하신 것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에 동참한 자가 된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과 불세례를 주시는데 타버릴 것들을 불로 태워 없이하고 성령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로서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 세례가 되었든 성령 세례가 되었든 세례는 반복될 수 없으며 단회적인 사건이다.


성령 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 전통적 칼빈주의에서부터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각자의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단회적

단회적

반복적

반복적

오순절 일부

회심

성령세례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화

토레이

회심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화

로이드 존스

회심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화

박영선

성령에 의한 성령세례

그리스도에 의한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화)

존 스토트

회심=성령세례

성령충만

성화


각 학자의 다른점을 말하자면 많은 논란이 야기되나, 공통되는 부분을 찾는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심을 잡을 수 있다.

공통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6:16)’라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심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졌음은 명확하다.


이 고백을 했다 하더라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7:38)’과 같은 체험적인 성령세례 또는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는 약속을 믿고 성령을 구할 책임이 있다. 물론 성령은 그 스스로 의지를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역사는 그 주권이 성령께 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며 성령께서 싫어하는 것들을 제하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의지임을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이 안수하면 성령이 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이다.

성령 세례 또는 성령 충만의 증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적으로는,

첫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인식과 경외감이 생기고, 자신의 비천함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둘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환희와 벅찬 눈물이 나타난다. 이런 환희는 확신과 감사, 열심으로 이어진다.

셋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 그리스도를 전파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넷째,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과 영혼에 대하여 밝은 깨우침과 비범한 이해력이 생긴다.


외적으로는 성령의 임하심을 보고 들을 수도 있고(2:33,11:15), 얼굴(표정)이 달라질 수도 있고, 말이 달라질 수도 있다.

여기서 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 능력 있게 된다는 것이지 성화된 말로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세례는 우리가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분명히 하고 확실하게 하지만,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성화와는 구별된다. 이 세례는 성화의 시작점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인격과 지식의 범위 안에서 성령께서 유기적인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 세례 또는 충만을 받은 사람이 갑자기 성경의 특별한 진리 또는 하늘의 말씀을 깨달아 전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이 세례를 받고 심지어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화와는 거리가 먼 언행을 하는 것도 성령 세례와 성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가를 아는 것이지 은사 즉 어떤 능력을 받는다는 차원이 아니다.


성령 충만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5:18)’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받은 사람도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술 취하지 말라와 대비되는 삶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박영선은 술 취함의 대표적 현상을 탕자의 허비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밖에서 허비하고 사는 삶에서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다.


마지막 성화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은혜를 주입하시어 신자로 하여금 그 은혜롤 인하여 옳게 하시는것을 말한다. 즉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하는 삶을 말한다. 이것은 이 땅 가운데서 완성될 수는 없으나 끝까지 따라가야 할 신자의 거룩한 삶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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