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에 관한 논쟁


 

1. 서 론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과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필연적이다.

성령의 사역과 은사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성령 운동과 신앙 체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오늘날 성령의 사역과 은사에 대한 혼란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함으로 교회 성장과 성장 부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성령에 대한 이해와 체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본 연구는 예수가 약속하고 보내신 성령은 인격적인 분임을 강조하고 한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성경의 주변적인 주제가 아니라 중심적인 주제라는 사실을 조명하여 성령의 바른 이해를 얻는 데 목적이 있다.


본 글은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성령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시도한다. 둘째는 성령론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론에 관한 중요한 4대 논쟁점을 중심으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성령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초대 교회의 송영, 찬미 시에 성령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론 논쟁, 특히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는 동안 성령에 관한 관심은 되외시되었다. 갑바도기아의 세 명의 신학자들을 거쳐 어거스틴(Augustinus)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령이 삼위 가운데 일 위로서 확고한 교리가 되었다. 당시의 성령론은 성령의 사역이나 역할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로 삼위일체의 틀 안에서 논의된 경향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시릴(Cyril)은 성령을 ‘성경의 영감자와 신자들의 성화 임무를 맡은 분’으로 가르쳤으나, 아리우스주의자들(Aetius)의 압력을 받아 성령을 성자의 피조물이라고 했다. 오리겐(Origen)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보다는 더 열등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우를 범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주의 성신을 성령(사 63:14)으로 해석하여 천사나 피조물이 아닌 삼위 하나님으로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동일한 동일 본질”1)(homoousios)로 보았다. 성령의 위격에 관한 논쟁은 결국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위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하나님이라는 기본적 진리가 확정되었다.


중세시대의 성령론의 중요한 논쟁점은 성령의 출원 문제(필리오케, filioque)였다. 서방 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ex patre filioque)고 주장한 반면 동방 교회는 ‘성령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주장했다.성령의 발원문제에 대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견해의 차이는 결국 두 교회가 나뉘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성령론은 성령을 성경의 저자로서 이해하는 것과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톨릭은 속죄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가 성례전을 통하여 주입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교리적이고 형식적인 교회의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 아래 성경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며 성령론은 성경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발전한다.


루터(M. Luther)는 “하나님은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그 결과 인간은 그것을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받아들여 믿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2)라고 말했으며 칼빈(J. Calvin)은 “성경은 자증한다”는 자명성의 원리와 성령의 ‘내적 조명’을 주축으로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설명했다.3)이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의 성령론은 말씀을 도외시한 채 개인의 주관주의적 성령 체험만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 성령론을 배격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인 계시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견신례를 통하여 성령이 임재하신다고 하며 예전 중심으로 흘러버린 가톨릭의 화석화(化石化)된 성령론을 수정하고자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성령론은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그래서 결국 오늘과 같은 성령의 역동적인 은사들, 즉 방언, 신유, 축사 등을 부인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지주의적 성령론을 그대로 답습한 오늘날의 개혁주의 신학의 성령론은 교조화(敎條化) 내지 화석화되어갔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영원한 이중 예정과 칙령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령의 은사와 사역에 대해서 소홀히 하게 되었다. 한편 경건주의 성령론은 성령의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사역을 중시하여 세계 선교의 그리스도의 명령을 독려하는 ‘선교의 영’으로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했으나 신학적인 문제와 그 결과에는 관심이 취약했다.


비록 신학에서는 성령론이 소홀히 취급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성경을 그대로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령은 역동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운동이다.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운동으로 기독신학의 주변적인 주제로 취급되었던 성령론을 신학의 중심주제로 부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최근에는 기존 보수주의 신학과 성령 운동 그룹의 신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2. 성령론에 대한 성경적 고찰

1) 구약시대의 성령
구약시대의 성령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으시고 선택된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했다. 예를 들어 광야의 성막 건축을 위해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고(출 31:3), 왕이 될 다윗에게 성령이 임했다(삼상 16:13). 성경을 기록한 예언자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역사했다(벧전 1:10, 11, 겔 2:2).


성령은 한시적으로 임하며 떠날 수도 있었다. 삼손은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감동한 때부터(삿 13:25) 성령을 그에게서 거두어 갈 때까지(삿 16:20) 성령의 지배를 받았다. 성령이 에스겔에게 임한(겔 2:2) 후에 또다시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겔 3:24).


이와 같이 구약의 성령은 사람에게 완전히 내주하지 않았다는 실례들이 이를 증거한다. 구약 아래에서의 성령은 바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화하여 그들을 인도하셨다. 성령은 하나님의 종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의 원수들도 주권적으로 사용하신다.


요엘서에서는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예언되었으며(겔 39:29, 욜 2:28, 29, 사 44:3), 예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성령께서는 믿는 자의 마음을 그의 전으로 삼아 거할 것을 보여준다(고전 3:16). 성령이 메시아 곧 새 언약의 중보자에게 임할 것이 예언되었다. 바울은 성령을 ‘새 언약의 성령’이라고 말한다(고후 3:6).


결론적으로 구약의 성령은 그의 고유한 사역을 위하여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시기에 감화하셔서 그의 일을 주권적으로 일하셨다.

2) 신약시대의 성령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의 출생은 신약의 성령 이해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성령은 예수의 본성에 흠 없는 성결을 부여하였고 인간의 정욕이 없는 잉태였다. 예수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나 성령이 계속 예수의 삶 위에 역사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메시아 직분 수행을 위한 사역의 기름부음이었다. 이 침례는 예수에게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사명을 부여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공생애 사역의 취임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성령에 의한 침례는 직무 수행을 위한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그를 광야로 인도했다. 이 광야의 시험에 승리하게 된 동인(動因)은 성령이셨다. 이후로 성령은 예수의 사역을 주도적으로 인도하신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여 성령이 저들과 함께 역사하셨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목적은 그들을 중생시키거나 구원하기 위하여 임하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능력을 받기 위함이며 권능을 받아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함이다. 또한 교회를 태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교회에 능력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3. 성령론에 관한 4대 논쟁점 고찰

1) 중생과 성령에 의한 침례는 동일한가
이 주장은 중생과 성령에 의한 침례를 동일하게 보는 견해다(고전 12:13). 따라서 이들은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부인하고 심지어 이단시한다. 이들은 주로 고린도서를 근거로 주장한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미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로 나타난다(고전 1:6, 7, 행 2:38).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성령의 마심’은 곧 ‘성령의 충만’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이 본문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이 다 성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는 이미 다 성령을 받았다고 본다.


하지만 만일 중생과 성령에 의한 침례를 동일시한다면 오순절에 와서야 성령에 의한 침례를 받은 예수의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는 모두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 된다. 즉 제자들은 오순절 날 이전에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오순절 날 성령의 침례를 받기 전에 이미 예수의 제자들이 중생했음을 말하고 있다(요 14:16, 17; 15:3; 17:9, 25; 20:2, 마 16:16).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죽은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강도는 이미 믿음으로 낙원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며 성령이 함께 역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음 전도를 위해서 오순절에 성령에 의한 침례를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행 1:4, 6; 2:1∼4). 이것은 예수의 약속의 성취이며 그 결과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생과 성령에 의한 침례를 동일시할 수 없다. 중생과 성령에 의한 침례가 동시에 일어날 수는 있지만(행 10: 43∼47), 양자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함이 성경적이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도 중생과 성령에 의한 침례의 구별이 입증된다. 빌립의 전도로 이미 예수 믿고 침례 받은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로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행 8:14∼17). 또한 바울의 에베소교회 행적에서도 확인된다. 성령에 의한 침례는 중생과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나며 성령에 의한 침례의 목적은 이것을 통해서 중생한 신자들에게 능력이 부여됨으로 능력있는 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다.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인 중생한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복음 전도를 위한 성령 충만과 권능으로 나타났다.


성령에 의한 침례를 주는 주체는 영광을 받은 예수 자신이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그리스도가 보내신다(행 1:4, 5; 2:1, 요 16:7).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믿게 될 때 성령에 의한 침례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엡 1:13,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너희(신자)가 믿은 후에(after that ye believe(KJV)).


성령에 의한 침례 혹은 인침은 이미 신자들이요, 중생한 자들에게 주어진다. 중생은 예수를 통하여 새 생명를 얻게 하는 성령의 최초의 역사다. 중생은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변화시키는 본질적인 사역이지만 성령에 의한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성령의 부어줌이다. 중생의 경우는 비체험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으나, 성령에 의한 침례는 분명히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현상적 임재다(눅 11:9∼13).


모든 신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중생할 수 있지만 성령에 의한 침례는 다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중생은 성령의 주관적 사역으로 무의식적이며 비(非) 체험적일 수 있으나, 성령에 의한 침례는 그리스도가 주권을 가지고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체험적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게 된다. 성령을 받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자격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 기록된 대로 오직 예수이름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곧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다. 그리고 침례를 통해서 예수의 공로를 시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이렇게 중생한 자에게 성령에 의한 침례를 통해서 신자들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임’을 강력하게 선포하게 된다. 결국 성령에 의한 침례는 중생한 자에게 부어지는 은사임을 알 수 있다.

2)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인가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을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사건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생을 성령에 의한 침례과 동일시하는 신학 체계에 속해 있다. 이는 주로 개혁주의신학자들이 지지하며 이들이 한국교회의 성령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의 단회성을 알기 쉽게 설명한 사람은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수도 시설의 예화를 들었다. 동일한 수원지에서 수도관을 통해 공급된 물이 옛 도시에서 새로운 도시로 유출되는 것과 같이 오순절에 단 한 번 교회에 임한 성령도 처음에는 교회의 이스라엘 부분만 공급되었으나 결국 그 성령의 흐름이 교회의 다른 부분인 이방인 세계에도 쏟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교회 전체가 마시게 되었다4)고 한다. 이것을 카이퍼의 유출설(流出說)5)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에 의한 침례를 지금도 다시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모하고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강림이 오순절의 교회와 더불어 우리 가운데 반복되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 누구든지 그것을 위해 기도하면 이는 결국 오순절 이적을 부인하는 것으로는 “대개 이미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또 다시 우리에게 오실 수 없다”6)고 주장한다. 환언하면 이미 성령은 오순절 날 교회에 임했기 때문에 다시 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역사적인 유일한 사건이며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이나 120명의 문도가 성령을 받은 사건이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는 ‘대표의 원리’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7) 이는 오순절 이후에 일어난 사마리아 교회(행 8장), 고넬료 가정(행 10장) 및 에베소 교회(행 19장)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성을 잘 반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교회에서도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 성령은 수직적으로 내려오셨고 성령 강림으로 방언을 말하여 하나님을 높였다. 만약 카이퍼의 주장처럼 이미 성령이 교회에 임한 것이라면 사마리아 교회, 고넬료 가정, 에베소 교회에 임한 성령은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요컨대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 구속을 위한 반복 불가능한 사건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순절 강림은 역사적, 언약 신학적, 교회론적, 기독론적, 성령론 차원에서는 단회적이다. 그러나 사역론적 차원에서 볼 때 선지자들과 많은 성경 인물들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충만을 체험하였다. 신약 성경에도 이러한 성령의 능력적 강림이 예언되었으며(눅 24:49) 약속되었다(행 1:8). 이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사역이 계속되는 곳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도 계속됨을 볼 수 있다(행 4:8, 31).8) 그러므로 이런 사역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목적론적 차원에서 볼 때도 오순절 성령 강림은 계속적, 반복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성령 강림의 목적은 전도요, 선교다(행 1:8). 전도와 증거의 사역이 있을 때마다 성령은 능력으로 임재하였는데, 이 증거 사역이 끝날 때까지 성령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에 따라 임재하실 것이다. “단회성 주장은 오늘날 사역 현장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배치된다.”9)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생명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수없이 나타났으며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비록 어느 교파나 신학이 오순절 성령의 단회성만을 주장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오늘 현장에서 나타나는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 주장은 기도 생활을 약화시켜 교회의 침체를 가져오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령의 신령한 역사는 오늘도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교리가 있음은 성령 강림의 영속성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성령의 영원한 발출’(procession of the Spirit)은 오순절에 임할 보혜사 성령에 관한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다(요 15:26). 요한복음은 15장 26절의 “나오시는”(에크포류에타이,)이란 말은 현재형으로 계속 나오심을 강조한다.10)


3) 성령의 은사는 종료되었는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과 기사’에 대해 취하고 있는 견해는 대개 다음과 같다. 첫째, 표적과 기사는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종식되었다는 견해다. 둘째, 표적과 기사는 초대 교회에만 속하였다는 견해다. 이 주장은 표적과 기사가 종식된 시기는 대략 신약성경의 정경화가 이루어진 A. D. 397년의 카르타고 회의로 본다. 셋째, 제도화된 교회 지도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가 소멸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넷째, 표적과 기사는 종식될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도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는 은사, 직임, 역사라는 세 가지 말이 나온다. ‘역사’(에네르케마, )라는 말은 ‘활동’이라는 뜻으로 복음 증거의 활동을 가리킨다. ‘직임’(디아코니아, )은 ‘선물’이란 의미로 ‘역사와 직임을 효과적으로 능력있게 수행하기 위한 권능의 수단과 도구로 주신 성령의 선물’을 뜻한다. 마치 큰집을 짓는 역사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직임들이 임명되듯이, 직임은 공사를 하는데 그 집을 잘 짓기 위해 필요한 훌륭한 도구와 같다.


물론 넓은 의미로 ‘은사’라고 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것이 은사지만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라고 할 때는 보통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항목들을 말한다. 그래서 선천적인 재능과 성령의 9가지 열매, 그리스도의 임무 등을 성령의 은사로 분류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은 대략 20가지 이상이 된다(고전 12:7∼11, 롬 12:6∼8, 엡 4:11).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대회는 ‘성령의 모든 은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은사는 사라지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말은 결코 없다.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주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가 존재하는 한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은사들을 인정하고 잘 활용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성령의 은사들이 복음사역을 돕는 보조 사역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세기의 져스틴 마터(Jistine Martyr)와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은사가 교회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은 은사의 현재성을 시인했다. 그는 스스로 몬타니즘(Montanism)으로 전향했다. 4세기의 힐러리(Hilary)와 크리소스톰(Chrysostom)도 터툴리안(Tertullian)과 동일하게 은사의 현재성을 인정했다. 어거스틴(Augustinus)의 경우 처음에는 은사의 계속성을 반대했으나 나중에는 은사의 정당성을 가르쳤고 몇몇 이적들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교회 안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거스틴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는 견해는 희박하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인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ohn Calvin)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무관심했으며 은사들이 주로 사도시대에만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영국의 오웬(John Owen)은 종교개혁 시대와 20세기 사이에 성령의 역사를 가장 광범위하게 다룬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일반은사와 특수은사(방언, 기적, 치유, 사도, 예언, 전도사 등 6가지)로 구별했으며, 후에 이 구별이 개혁신학에서 보편화되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필요에 따라 은사들을 다루기는 했으나 체계적인 주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메릴 F. 엉거, J. 월부어드, 존 맥아더, 데이비드 호킹 등은 사도시대 이후 대부분 은사들의 기능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렐슬린 B. 플린, 언더우드, 도날드 G. 킹혼, 찰스 험멜, 로드만 윌리암스 등은 처음에는 워필드의 은사 종료설을 따랐으나 후에는 변경했다.


우리는 선천적인 재능과 성령의 은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은사는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현상을 말하며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내적인 것을 지칭한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직임을 효과 있고 능력 있게 시행하기 위한 권능의 수단이다.


신자는 중생하여 교회의 지체가 됨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으며 그 받은 은사는 일생 동안 지속된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의 ‘더욱 큰 은사’에 대하여 혹자는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사랑은 ‘은사를 활용하는 제일 좋은 길’로써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성령에 의한 침례의 첫째 목적은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전 14:4, 12). 성령에 의한 침례를 받거나 인침을 받을 때 성령의 은사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에 의한 침례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능력 충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가 받은 직무를 능력 있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에 의한 침례가 필수적이다. 특히 복음 증거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에 의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체험만 관심을 두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짓된 체험을 가진 자들은 그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환상, 환각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육체적이고 현상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참된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또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롬 5:5). 성령충만은 임재하는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나의 지, 정, 의가 그의 감화와 감동 아래 있는 상태나 조건을 의미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가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영향을 받은 상태다.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한다(갈 5:17). 성령이 신자의 생각 속에서 깨닫게 하시고 그의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거부한다면 성령의 은사는 소멸된다(살전 5:19∼22). 신자는 성령의 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과의 교제를 갈망하고 간절히 사모해야 하며 성령의 지시에 극히 유의해야 한다(빌 2:12, 13). 성령충만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를 신자의 생활에 맺게 한다(갈 5:22, 23).


성령의 은사는 임무 수행을 위해 특별히 주어진 성령충만이다. 이것은 오순절 후에는 성령에 의한 침례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령충만이다. 오순절 이전의 실례로는 성막 제작자인 블살렐(출 31:1, 2), 침례 요한(눅 1:15, 16), 엘리사벳(눅 1:41∼43), 사가랴(눅 1:67∼77) 등이 임무수행을 위해 성령충만을 받은 사실이 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에 의한 침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있었고(행 4:8),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복음 전도 목적을 위해서 재충만 받았다(행 4:8). 이미 침례 받고 성령충만하게 된 사람들이 다시 성령충만을 받기도 하며(행 4:31). 바울이 회심하고 성령에 의한 침례 받아 충만하게 된 후, 다시 충만하여 박수 엘루마를 혹독하게 책망하고 저주한 사실이 있다(행 13:9).


이상의 모든 경우는 복음 증거와 선교를 위해 보혜사 성령으로 주어진 성령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있으며 성령충만은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4)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사역은 동일한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화하여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오해로 말미암아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복음주의 학자 중 에릭슨(Millard Erickson)은 그의 저서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에서 “구약은 이처럼 성령께서 내주하거나 사람 속에 거룩과 선함의 도덕적 영적 성질들을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주목해야 할 내용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는 성령의 내적 역사가 계속되고 있으나, 또 다른 경우들에서는 사사기의 내용처럼 그의 임재는 간헐적이고 수행되어야 할 어느 특정한 행위나 사역에 관계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11)라고 했다.


전(前) 고신대의 안영복 교수는 “성령의 재창조 사역에 있어서 성령은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활동하고 구약의 성도들에게 내주했으며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에게도 함께 계셨다”12)(요 14:14)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근거로 그는 이사야 59장 21절, 63장 11절, 학개 2장 5절 등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본문을 살펴보면 성령이 개인 속에 내주하지 않고 모두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거나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성령의 사역은 시간적인 면에서도 제한적이다. 하나님의 신의 임재가 영원하지 못하고 일시적이었으며 대상 면에서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또한 신의 임재는 보편적이지 못하고 특수했다(민 11:16∼29, 시 51:11, 대상 12:18; 28:12, 사 32:15).


한편 신약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은 매우 일반적이며 보편적이어서, 시간과 대상에 있어서 보편성을 갖는다. 구원받고 사모하는 모든 사람, 이방인까지도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오순절 이후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었다(행 2:38, 39).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은 자는 누구나 성령이 임하신다.


성령충만은 외부에서 체험할 수도 있고 내부에서 올 수도 있다. 만일 구약 사람들도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영광을 아직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았다’(요 7:39)는 말씀을 비롯하여 성령에 대해 약속하신 예수의 말씀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사실, 성령에 의한 침례에 관한 논쟁들은 모두가 이 부분에 걸려 있다. 성령의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을 동일시하게 되고, ‘성령은 중생하게 하는 영이며, 믿을 때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제한적으로 특정한 사람에게만 역사했으나 신약에서의 성령은 믿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임한다. 성령의 외적 사역과 내적 역사의 구별은 성령이 안에서 통치하는가 밖에서 통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성령께서 안에서 통치하시면 ‘성령의 내재’이며 밖에서 역사하는 것이라면 ‘은사적인 것’이다. 환상, 예언, 신유, 능력 행함 등의 은사들은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내주하지 않고서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은사들이다.


이와 같이 구약의 충만은 사역을 위한 충만이지 보혜사적인 수준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부어준 성령충만이 보혜사적인 수준으로서 성도와 영원히 함께 하며 예수를 증거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은사는 소멸될지라도 인격인 보혜사는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성령을 받은 자는 결코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신약에 임한 보혜사는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임재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침이란 말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은 역사하였고 신약에 이르러서는 성도 안에 내주하셔서 역사하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에도 성령과 함께 하였고, 말씀이 잉태되고 죽고 부활에 이르는 일에도 성령이 함께 하셨다. 또 성경이 기록된 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1).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었는가 하면 침례 요한의 부모들도 그러했다(눅 1:15, 41, 67).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신자가 되었다.


교회 안에는 분명히 두 가지 차원의 신자, 즉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있다. 또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불신자가 아니라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 자다. 다만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구약의 성령의 역사는 외부적인 것이고 신약의 성령의 역사는 주로 내부적인 것이지만 외부적인 역사도 함께 있다. 구약 성도들이 짐승의 피를 드리면서 메시아가 장차 오셔서 대속할 것을 시인하는 일이나, 신약시대 사람들이 성령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성령의 외적인 사역이지 내적인 사역은 아니다.


다윗은 성령의 내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감동으로 한 것이다. 이때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던 때다(요 7:39). 다윗은 경건하고 회개에 철저한 왕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그는 원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였다. 즉 영혼의 죄가 아직 예수의 피로 속함 받지 못했으므로 성령의 내주를 경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내주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Ⅲ. 결 론

성령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분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령이 성경의 말씀으로 잘 조명되고 이해되어 있지 않을 때 많은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는 양면성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객관적 원리와 주관적 원리다. 객관에 치우치게 되면 감정이 메마르게 되어 이지적 지성주의(理智的 知性主義)에 빠지게 되고, 주관에 치우치게 되면 사색적 지성주의(思索的 知性主義) 혹은 신비주의(神秘主義)로 빠져 신학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객관적 원리는 계시인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계시가 완전하고 충족함을 믿는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는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계시는 종결되었으나, 계시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원리의 기초를 성경에 두어야 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생활에 전개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주관적 원리는 신앙이다. 특히 신앙에 있어 성령의 사역은 내적 원리가 있다. 그러므로 현대 성령 운동이 주관적 경험에 치중하는 데서 벗어나 성경 중심의 운동, 그리고 성령이 주관하는 운동이 될 때, 건전한 신앙운동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령 운동은 성령에 의한 침례, 충만, 은사에 치중한 바 없지 않다. 이러한 체험이 개인적으로 주어짐에 따라 자연히 신앙도 개인주의적 신앙화 경향을 띠게되었다. 그리고 은사에 치중하다 보니 열매 맺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하였고 일부에서는 이로 인한 윤리성의 결여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성령의 인격이 항상 성령의 사역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개인 구원에 중점을 두고 시작된 이 운동이 이를 기초로 하여 사회에 관심을 갖고 사회구원으로 파급되어갈 때 그 미치는 영향이 크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 말씀과 성령이 하나된 신앙이 될 때 한국적인 신비주의 신앙과 기복신앙은 자연적으로 해결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신학 정립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성경공부 운동, 성경 생활화 운동이 계속 뒤따라야 할 것이다.


주)

1) 김영재, “성령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神學正論』, 제28집 (1997), pp. 48-50.
2) 폴 알트하우스, 『루터의 신학』 이형기·차종순 공역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국, 1998), p. 52.
3)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The Westminter Press, n.d.), p. 80.
4) 아브라함 카이퍼, 『성령론』 김해연 역 (서울: 세종문화사, 1992), pp. 218-220.
5) 차영배, 『성령론』(서울: 경향문화사, 1987), pp. 33-36.
6) Ibid.
7) 차영배,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적 사역과 그 본질적 사역의 계속성”, 『神學指南』 제50권 3집(1985), pp. 9-11.
8) 정원태, 『열정 칼빈주의』(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pp. 9-11, 47-51.
9) 멜 테리,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서울: 도서출판임마누엘, 1986), pp. 24-26.
10) 정원태, op. cit., pp. 50-51.
11) 밀라드 J. 에릭슨, 『구원론』 김광열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pp. 54-66.
12) 안영복, 『성령론 어떻게 연구할까?』(서울: 성광문화사, 1996), pp.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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