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봉헌)

 

 

1. 헌금(봉헌)이란 무엇인가?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들어가며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 헌금을 한다. 미리 준비한 까칠까칠한 돈을 가지런하게 챙겨 봉투에 넣어 헌금 주머니나 헌금함에 넣는다. 액수가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다. 예배 중간에 헌금하는 교회도 있고 교회당 입구에 헌금함을 놓고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넣도록 하기도 한다. 헌금종류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추수감사헌금, 맥추헌금, 건축헌금 등. 어떤 사람이 여러 교회에서 찾아본 헌금 종류는 무려 71개나 된다고 한다. 많은 헌금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십일조 헌금을 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가난하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산물이니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대체 헌금이란 무엇인가? ‘헌금’은 무엇이고 ‘연보’는 무엇인가? 헌금은 목사 생활비와 교회 경영(?)을 위해 주는 ‘기부금’인가? 헌금의 원리는 무엇이며, 헌금의 목적, 헌금의 방법, 한금의 자세, 헌금의 양, 헌금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다. 이런저런 실제적인 질문은 ‘헌금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헌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성경은 헌금에 대한 정의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헌금에 관한 수많은 책이 있지만, 속 시원하게 ‘헌금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글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헌금은 이런저런 종류가 있고, 구약과 신약에 이렇게 사용되었는데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는 식의 실용적인 책들이 대부분이다. 헌금이 주로 예배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배학 책을 뒤져보지만 이상하게도 헌금에 관해 언급하는 책은 거의 없다. 가장 가까이 접하고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헌금! ‘헌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은 ‘헌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볼 것이다.

 


1. 용어의 문제

 

헌금?

성경에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에 몇 군데 나타난다(31:50; 대하 34:9, 14;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21:1)에서 ‘헌금’은 ‘선물’ 혹은 ‘바치는 것’(gifts & offerings)을 의미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헌금이라는 단어도 같다. ‘헌금’은 돈일 수도 있고(대하 34:9) 물건(패물,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고리, 목걸이)일 수도 있다(31:50). 자세히 보면 ‘헌금’이라는 단어는 주로 신약교회가 아니라,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나 ‘물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실제로 ‘헌금’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서에만 언급될 뿐 신약의 역사서와 서신서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헌금’(獻金)이라는 말의 뜻은 ‘바치는 돈’이다. ‘헌금’은 구약과 복음서에 나오는 ‘선물’이나 ‘바치는 물건’이라는 의미보다 좁다. ‘헌금’은 돈으로 축소되고 ‘헌물’(23:38; 5:15 )의 의미는 빠져 있다. 한국 교회와 한국어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 교회가 예배 가운데 물건이 아니라 대부분 ‘돈을 바치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니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선물’과 ‘바치는 것’의 현대적 적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헌금’이라는 용어는 성경적 본래 의미를 부족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적 적용의 용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헌금’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분명히 빈약한 번역이니, 다른 좋은 번역을 찾아본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헌금’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다.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헌금’(7:10), ‘헌물’(7:10), ‘제물’(20:28)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헌’(1:3)라고 번역되었다. 민수기 710절에는 ‘고르반’이라는 단어에서 ‘헌물’과 ‘봉헌’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한 단어에 대한 서 너 가지 번역 가운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번역을 찾으라고 한다면 ‘봉헌’을 선택하고 싶다. ‘봉헌’(奉獻)은 ‘(사물을 어떤 분에게)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봉헌’이라는 단어는 ‘제물’, ()(), ()물건’을 모두 포함한다.

 

연보?

 

신약성경에는 ‘봉헌’이나 ‘헌물’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연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연보’라는 단어도 번역의 문제가 없지 않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주로 등장하는 ‘연보’라는 단어는 한 단어의 번역이 아니라, 다양한 헬라어 단어의 번역이다(15:26; 고전 16:1-2; 고후 8:2, 20; 9:5, 11, 13). 우선 ‘연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교제’(koinonia, 15:26; 고후 9:13), ‘관대함’(generosity, 고후 8:2), ‘복’(eulogia, 고후 9:5), ‘기부’(collection, 고전 16:1) 등이다. 간접적으로 ‘연보’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섬김’(diakonia, 11:29 “부조”로 번역; 고후 8:4; 9:1, 12, 13. “성도 섬기는 일”)이라는 단어도 있다. ‘부조’(扶助, help)는 ‘기부’(寄附, contribution)와 동의어로 쓰인다.

 

‘연보’(捐補)는 ‘자기 재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다’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연보’의 의미는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가 돈을 모아 도운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연보’는 성도와 교회 상호간에 ‘교제’하고 ‘관대함’으로 대하며 ‘기부’하고 ‘섬기는 행위’였다. 이렇게 ‘연보’하는 것은 결국 연보하는 자에게나 연보를 받는 자에게 ‘복’이다.

 

특별히 ‘연보’의 의미는 고린도전서 161절에 나오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의 ‘연보’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더 분명해진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기에 사용된 ‘연보’라는 단어가 ‘로게이아’(logeia)인데 ‘돈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단어의 라틴어 번역이 ‘콜렉타’(collecta, <colligere> ‘모으다’)인데 여기에서 ‘헌금’ 혹은 ‘연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컬렉션’(collection)이 유래했다. 이 ‘컬렉션’의 한국어 번역이 ‘헌금 혹은 ‘연보’이다. ‘연보’(捐補)의 뜻은 ‘자기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다’이니 본문의 정황을 고려한 좋은 번역인 셈이다.

 

종합해 보면 신약교회에서 ‘연보’는 ‘가난한 교회나 성도를 돕기 위해 모으는 돈 혹은 물건’(collection)이라고 보면 된다.

 

봉헌!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헌금’, ‘연보’와 ‘봉헌’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적절한 용어는 ‘봉헌’이라고 하겠다. ‘연보’라는 개념은 인간이 인간을 돕는 수평적인 것을 잘 표현한다고 하겠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수직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수직적 드림과 수평적 나눔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용어로는 무엇이 적당할까? 당연히 ‘봉헌’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인가 들고 나아가 바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 ‘봉헌’(offering)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헌상’(獻上)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기도 한다. ‘헌상’은 ‘임금에게 물건을 받들어 올리다’는 뜻이다. 왕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하니 좋은 용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치다’(offering)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는 ‘봉헌’(offering)이 있으니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봉헌’은 구약의 제사에서 나타난 의미와 신약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2. 봉헌(헌금)의 원리

 

은혜의 원리


‘봉헌’(offering)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제물이나 선물을 제공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73:28).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셨다(4, 10, 12, 18, 21, 25). 미소 짓는 하나님! 활짝 웃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작품을 완성하시고는 특별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라고 했다. 모든 피조물이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영광이고 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극한 기쁨 자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인간은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기쁨이고 행복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이 인간에게도 좋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봉헌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이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관계가 끊어지자 인간은 죽었다. 죽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모두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봉헌’은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 없는 멋진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쓴다. 인간이 관리하고 있는 모든 돈과 재물과 건강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봉헌’하지 않고 자신이나 우상에게 ‘봉헌’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봉헌’, ‘고르반’, ‘가까이 다가가다’, to offer) 수 없다. 은혜의 법이 아니고는 ‘봉헌’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이교에도 ‘봉헌’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봉헌’의 의미가 이교들의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교에서는 신에게 뭔가를 얻기 위해 뭔가를 바친다. ‘봉헌’을 통해 신과 하나가되거나 신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스스로 나아가 뭔가 드리고 복을 얻을 수 없다. 구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인간이 드리는 ‘봉헌’은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없이는 인간이 ‘봉헌’할 수 없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려 하지만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다. ‘봉헌’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피의 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7:11). 제사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속죄제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봉헌’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여 응답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속죄제사에서 우리가 뭔가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봉헌’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주신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물이 바로 ‘봉헌’(gift & offering)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하나님으로 온 것이고, 우리는 그 ‘봉헌’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지 우리 쪽에서 뭔가를 준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속제제사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자. ‘봉헌자’가 자신의 두 손을 짐승의 머리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함으로 ‘봉헌자’와 짐승이 하나가 되어 ‘봉헌자’ 자신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짐승은 봉헌자의 ‘대리자’가 된다. 피를 흘린 제물을 제단 위에 완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길을 열어 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목하기 원할 때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봉헌’에 순종하면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절대로 제단에 불을 끄지 않도록 관리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렇게 ‘피의 속죄제사’조차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봉헌은 은혜의 법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길(방법)에 순종함으로 따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었다. 제사에서 순종이 빠진다면 헛될 뿐이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은 구약의 ‘제사’와 ‘봉헌’의 완전한 성취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신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다. 인간이 바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제물을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물로서 아버지의 택한 백성을 위해 대신 피 흘려 죽으셨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은혜로운 ‘봉헌’의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 곧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봉헌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혀 주셨다(2:4-6). 우리는 이제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봉헌) 수 있다. 죄인의 신분에 있을 때에는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기에 드릴 것(봉헌)이 있다. 이 은혜의 원리에 봉헌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돈으로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헌금’이라고 부르지만, ‘봉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은혜의 법에 따른 ‘봉헌’의 원리 때문이다. 주일 예배에서 순서를 정해 ‘헌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 혹은 ‘봉헌한다’는 뜻이다.

 

청지기의 원리


‘봉헌’의 의미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것을 맡기셨다는 청지기의 원리에서 ‘봉헌’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과 권세와 명예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50:9-12).

 

인간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관리할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50:14). 이 청지기의 감사에 봉헌의 원리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소유를 인간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신다.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를 맡아 관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파괴하고 생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스리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학대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방식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죄와 비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경영(1:9, 3:1; 딤전 1:4)은 계속된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3:9). ‘경륜’(經綸)은 계획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경륜’은 ‘경영’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바로 이 ‘경영’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영어 ‘이코노미’(economy)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영’(management)은 창세부터 말세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경영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인간은 ‘청지기’라고 불린다. ‘청직(淸職)이’, 곧 ‘청지기’란 ‘오이코노모스’(oikonomos)인데 한 집안을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다스리는 ‘집사’(steward)와 같은 자이다. ‘청지기’(oikonomos)는 주인의 ‘경영’(oikonomia) 철학에 따라 모든 재산을 맡아 관리해야 한다. 청지기의 관리(to administer)와 경영(to manage)의 기준은 철저하게 주인의 뜻이어야 한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재산의 관리자(administrator) 혹은 경영자(manager)일 뿐이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의 모든 것을 잘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만한 그 어떤 소유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재물, 명예,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단지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임을 지속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성경 역사 가운데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봉헌’(offering)이라는 부른다. 인간이 맡아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봉헌’이다. 만약 ‘봉헌’이라는 모습이 없다면 인간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봉헌’이라는 방법,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부, 지극히 작은 것을 드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모여 예배한다. 그 때 자신이 가진 일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주일 예배의 ‘봉헌’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이다.

 

3. 봉헌의 목적

 

구약교회에 보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봉헌했다(레위기의 제사제도). 하나님의 백성은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물질을 하나님께 드렸다(29:36-42; 30:36; 24:9).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봉헌했다(21-24; 18:1-5). 셋째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봉헌했다(14:28-29; 15:11; 16:11; 24:19).

 

신약교회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예배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금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예배하는데 필요한 장소와 시설 유지를 위한 경비를 봉헌했다. 둘째, 교회에서 사역하는 교역자의 생활비를 위해 봉헌했다. 교역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넉넉한 생활비가 필요하다. 방문자들을 접대하는 일과 자녀의 교육비를 고려해야 한다. 셋째는 구제를 위해 봉헌했다(6; 고후 8-9; 2:15; 13:16; 6:10). 이것은 교회 내에서 상호 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 상호간의 구제도 포함한다. 고린도후서 8-9장에 보면 ‘연보’라는 말로 풍성한 구제가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 넷째는 복음전파를 위해 봉헌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했고 복음의 전파의 시초부터 사도가 하는 일에 참여했다(1:5; 4:15).

 

4. 봉헌의 양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봉헌의 양은 구약시대의 규례를 보면 다양했다. 첫째, 땅의 소산(곡식과 열매)과 짐승의 1/10을 바쳐야 했다(27:30-32; 18:21-32).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 첫 번째 십일조는 먼저 하나님의 성소를 위해 일하도록 구별된 레위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 원리는 신약교회의 교역자를 위한 생활비를 지급하는 원리적 근거가 된다(10:9-10; 10:7; 고전 9:13; 딤전 5:18). 두 번째 십일조는 매년 성소를 방문하는 비용을 위해 사용했다(12:4-19). 이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고아와 객과 과부와 노비, 그리고 레위인도 포함된다(16:11; 14:22-29). 세 번째 십일조는 매 삼년 마지막에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되었다(14:28-29; 26:12-15). 이 모든 십일조를 다 합치면 십일조가 소득의 23.3%나 된다. 그 외에도 첫 새끼와 처음 익은 열매와 처음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22:30).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대신 레위인을 구별하여 드렸다. 첫 소산은 아론과 제사장에게 돌렸다(18:12).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원예물(7:16), 감사희생(7:13, 15), 칠칠절에 드리는 자원하는 예물(16:10) 등이 있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옛 언약의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와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십일조 규례나 첫 소산을 바칠 필요는 없다. 대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봉헌한다. 이 점에서는 구약의 봉헌과 신약의 봉헌은 차이가 없다.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신약에 나오는 봉헌의 액수는 일관된 규칙이 없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11:29) 봉헌자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드렸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봉헌자의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가 봉헌 액수를 결정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봉헌자는 자신의 힘을 다해 봉헌할 것이지만 때로는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봉헌한다. 바리새인은 수입의 십일조(18:12)를 했고, 삭개오는 모든 소유의 절반을 봉헌했고(19:8), 가난한 과부와 바나바는 그들의 소유 전부를 바쳤다(21:4; 4:37). 이 모든 예들을 살펴볼 때 봉헌의 양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지만, 봉헌의 특징은 구약이나 신약교회가 다르지 않다.

 

물론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양과 액수가 정해져 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십일조의 개념은 구약의 십일조의 개념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1/10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만약 구약의 십일조와 같은 원리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자기 수입의 23.3%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헌의 양으로서의 십일조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바쳐야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신학적 의미의 십일조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성도는 적어도 십일조 이상의 봉헌을 하는 것이 옳다.

 

봉헌의 액수는 은혜를 받은 대로 신앙 양심에 따를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는 봉헌을 많이 할 수 없다. 또 많이 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은 신자는 많은 봉헌을 하게 될 것이다. 영적 부요함의 정도에 따라 물질적 봉헌의 액수도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다. 신약교회에서는 헌금 액수를 강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봉헌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5. 봉헌의 자세


봉헌의 자세는 ‘인색함’으로나 ‘억지’가 아니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새 언약의 시대의 봉헌은 성령의 법 아래 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지만 성령님을 속일 수는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님을 속이려고 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팔아 봉헌했다고 속였다. 봉헌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좋지 못한 자세로 봉헌하다가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다. 성령님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헌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봉헌을 하나님과 흥정하듯 해서도 안 된다. 무엇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봉헌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대학 입학을 위한 헌금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에 유행하는 수많은 제목의 헌금목록에는 이런 것들이 즐비하다. 봉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리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더 이하도 더 이상도 아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라고 했다. 봉헌을 하는 구체적인 행위에는 우리의 마음이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평가하신 것을 볼 때 잘 드러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가지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21:2-4). 봉헌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마음이 중요하니 굳이 돈을 봉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가난하지만 그 은혜에 대한 마음을 표시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바치기도 했다. 헌금의 기준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봉헌자의 마음과 자세가 결정한다. 그러나 대체로 재산이 많은 자가 교회에서 많은 금액을 봉헌하는 것이 옳다. 많은 받았으니 많이 바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지를 위해,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많이 봉헌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아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했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것이 복이다.

 

6. 봉헌의 장소와 때


개신교회는 봉헌을 예배 가운데 포함시켰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의 신앙을 따르는 교회들도 예배 전 혹은 후에 헌금함에 봉헌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다. 예배가 언약의 갱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배 전후 드나들면서 예배당 입구에 놓인 헌금함에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배 가운데 넣는 것은 예배의 의미와도 맞다. 예배는 언약의 갱신 예식으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시고 우리가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헌금 시간이 예배 시간 안에 배치되는 것은 옳다.

  

예배 가운데 봉헌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를 할 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고 했다. ‘매주 첫날’(안식 후 첫 날)은 주일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07절이나 요한계시록 110절에 보면 매주 첫 날에 모였는데 예배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는 모임을 바로 예배이다. 이 예배에서 구제를 위한 연보를 한 것은 봉헌이 예배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봉헌하며, 또 우리에게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사역을 생각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표로서의 봉헌은 주일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7. 봉헌의 삶


예배 가운데 드리는 ‘봉헌’은 끝이 아니다. ‘봉헌’은 모든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봉헌’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청지기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삶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은 단순히 돈 몇 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예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배’는 ‘섬김’(service)의 다른 번역이다. 곧 ‘연보’ 혹은 ‘봉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돈과 재물, 그리고 명예와 지위를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를 위해 써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 예배 가운데 진심으로 봉헌하는 그리스도인은 돈과 재물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데 불신자와 다르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경영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것 같다.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단절로 인해 삶으로 봉헌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다. 가정과 회사와 기관의 관리와 경영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부의 관리자가 되면 하나님의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 애써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의 ‘봉헌’은 삶에서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봉헌’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다.

 

8. 봉헌의 관리와 집행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에서 ‘봉헌’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교회 재정의 관리와 집행이 투명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많은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봉헌’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봉헌’된 돈과 재물을 잘 관리하고 집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원칙과 원리를 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적 교회 재정과 집행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상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사회단체나 회사에서 하는 형식을 원용하는 경우도 있다. 좀 더 원시적인 경우는 목사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재정의 관리와 관련해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집사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장로교회는 집사회가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재정위원회가 교회 일반 재정을 관리하고 구제는 집사회에서 책임진다.

 

특별히 성경은 집사가 구제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도행전 일곱 집사는 구제를 위해 구별된 자들이 분명하지만, 단순히 구제만을 하지는 않았다. 스데반과 빌립 집사는 복음 전파하는 일에 오히려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교회가 세워져 가면서 집사의 역할이 재정의 관리와 집행과 밀접한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종교 개혁가들이 오늘의 집사제도를 성경에 기초해 정착시켰다.

 

각 교회는 교회재정 원칙을 성경적 기초 위에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앞으로 성경적 재정 관리와 집행에 대한

신학적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2. 교회재정 운영의 주체는 누구인가?  


황대우 목사(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 이 글은 필자 황대우 목사가 SFC 동문회에서 발행하는 『개혁신앙』 제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교회 직분의 다른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자신을 장로로 지칭한다(벧전 5:1)는 사실을 통해 사도 역시 교회에서 장로와 감독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로 즉 감독의 직분은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담당한다. 반면에 집사는 자비와 자선의 업무를 담당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를 항존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항존직이란 ‘한번 장로는 죽을 때까지 장로’라는 의미의 종신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모든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에 필수적인 직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섬기는 자’, 즉 ‘봉사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디아코노스’(diakonos)는 신약성경에서 “집사”(딤전 3:8-13)로도 번역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꾼’(고후 6:4)과 교회의 ‘일꾼’(16:1)으로도 번역되는데, 이런 점에서 그 용어는 오늘날 교회의 ‘집사’라는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이러한 집사 직분이 직접적으로는 신약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집사직과 관련하여 사용된 최초의 명사 형태는 행 6:1에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이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diakonia)가 “구제”로 번역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129절에서는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헌금한 “부조”로 번역되기도 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와 접대(6:2)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는 일곱의 봉사자들을 선출했는데, 교회 역사는 이들을 ‘일곱 집사’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집사는 이웃 사랑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간주된다.

 

사도행전 6장에 ‘집사’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을 집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교회 직분의 역사적 발전을 고려할 때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사도행전 6장은 예루살렘교회가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구제”를 전담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선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초대교회 최초의 직분적 역할 분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제와 접대를 위한 집사의 역할을 하도록 선출된 7명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에 설교와 전도가 배제되지 않았음을 사도행전은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16세기 이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서 규정하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적 분화가 사도행전에서는 아직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우선적인 주요 임무는 말씀과 기도인 반면에 구제와 접대는 사도들을 대신하여 전담할 자들을 세움으로써 사도들에게 부차적인 역할이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혁교회는 빈자와 병자를 돌보기 위해 집사직무를 교회의 직제로 세웠는데, 집사의 직무를 이중적인 것, 즉 구제와 심방으로 이해했다. 이런 집사직 이해는 집사의 주요 기능을 두 가지, 즉 빈자와 병자를 구제하기 위해 재정을 모금하고 관리하는 재무담당 집사와 빈자와 병자를 실질적이고 물질적으로 직접 돌보는 간호담당 집사로 구분한 칼빈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집사를 칼빈은 로마서 128절을 근거로 구제하는 자(재무담당)와 긍휼을 베푸는 자(간호담당)로 이해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16세기 제네바 도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도시민 모두가 기독교인인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환경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제네바 주민은 곧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었고, 반대로 모든 교인은 곧 도시의 주민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의 빈자와 병자를 돌보는 일은 단지 교회만의 업무가 아닌 정부의 업무이기도 했기 때문에 정부가 ‘집사직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을 두어 도시의 빈자와 병자를 돌보도록 했다.

 

루터의 비텐베르크나 츠빙글리의 취리히에도 이러한 집사에 해당하는 공무원이 있어서 도시의 빈자와 병자를 돌보는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제네바에는 정부의 제도적 집사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다른 도시들에는 없는 비제도적인 집사도 존재했다. 이런 비제도적 집사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었지만 교회의 통제 아래 있었다. 교회의 비정부적 집사는 빈자와 병자를 지원하기 위해 재정을 관리하고 그들을 직접 보살피는 개혁교회 전통의 집사 직무를 담당했다. 물론 교회는 시정부의 구호담당 관리들을 이러한 교회의 집사로 인정하기도 했지만, 이럴 경우 그들의 우선적인 지위는 교회 사역자로서의 집사였다. 그리고 교회의 집사들은 반드시 정부의 복지담당 관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초기 장로교회들은 실제로 집사직분 없이 조직되는 경우가 많았다. 개혁교회 전통의 청교도들의 교회들도 장로직제와 집사직제 둘 중 하나를 유지하긴 했지만, 둘 다를 교회직제로 가진 교회는 없었다. 특히 개혁신학 전통의 회중교회들은 장로직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장로들의 임무를 집사들에게 부여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집사의 직분이 종종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 전통의 미국 교회들에서 집사직무에 대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재정위원회의 등장과 발전이었다. 이 재정위원회가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특히 목사들의 생활비와 교회의 유지관리비에 관항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미국 북부지역의 많은 장로교회들은 준-교회재정위원들(semi-ecclesiastical trustees)을 두고 이들에게 교회의 재정 관리를 맡겼던 반면에, 남부의 장로교회들은 장로들이 그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다면 교회의 재산 관리와 재정 출납을 담당하는 재무에 관한 직무는 집사들만의 고유하고 독립적인 권한인가, 아니면 장로와 감독의 권한과도 상관이 있는 것인가? 칼빈에 따르면 교회 재산과 재정의 관리는 집사와 장로의 공동 직무에 속한다. 즉 재정 업무의 실무자는 집사이지만 반드시 장로의 감독 아래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안디옥 교인들인 모은 부조 즉 구제금을 “장로들에게 보내니라”는 사도행전 1130절 말씀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칼빈은 집사와 장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들은[집사들은] 식탁을 위한 직무를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로들에게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장로들의] 권위로부터 [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CO 48, 266).

 

이처럼 교회의 재산과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업무를 ‘집사의 집행’과 ‘장로의 감독’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늘날 개혁교회도 비슷하다. 네덜란드 기독교개혁교단의 교회들에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와 집사들로만 구성된 ‘집사회’가 존재한다. 당회는 교회의 모든 것을 감독하는 기관이고 집사회는 교회의 재무와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당회는 매주 정기적으로 모인다. 반면에 집사회는 매주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에만 모이는 부정기적인 모임이다. 물론 집사회가 교회에 따라 1년에 몇 번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모일 수도 있다. 또한 목사와 장로만 모이는 정기당회 외에 집사도 참석하는 확대당회라는 것이 있다. 확대당회 역시 대부분 필요할 경우 회집되는 부정기적 모임인데, 매주 모이는 정기당회 가운데 한 주 모임이 확대당회로 대체될 수도 있다. 확대당회에서 주로 취급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재정업무와 관련된 것이다.

 

하지(J.A. Hodge)의 『교회정치문답조례』에서는 “집사가 맡는 재정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구제비이며, 이것은 모금할 수 있다. 성례일의 헌금은 구제비로 쓰여야 하며, 구제비를 제외한 특별한금에 대해서는 관리할 책임이 없다. 구제 받을 사람은 교인이거나 교인이 아니어도 괜찮다. 미국 남장로회는 집사의 직무에 당회의 지도 아래 신앙적인 목적을 위해 헌금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을 포함했다.” 여기서도 미국의 남장로교회들은 집사의 직무를 “당회의 지도”를 받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장로교회들은 교회의 모든 재무관리의 문제를 재정위원들(trustees)로 구성된 재정위원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8-19세기 미국장로교회에서 구제를 위한 재정 집행이라는 집사직무는 제정위원회가 대신 담당하거나 당회의 감독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속한 고신의 『헌법』은 교회정치 제77조에서 “집사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집사는 당회의 지도 아래 교회의 봉사와 교회의 서무, 회계와 구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 그리고 교회정치 제121조 “당회의 직무” 10항에서는 “각종 헌금의 실시와 재정 감독”, 14항에서는 “교회의 기본재산 관리”라고 각각 명시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신 『헌법』은 재정과 구제에 관한 집사의 직무가 당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재정에 관한 모든 감독과 관리의 권한이 당회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의 『헌법』은 당회의 재정적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개체 교회의 예산과 결산 사항”과 “개체 교회 기본재산의 취득과 처분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동의회를 통하여 처리하도록 명기했고, “공동의회에서 의결한 예산집행 사항”과 “예산 추가경정 사항”, 그리고 “보통재산과 특별헌금 관리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제직회를 통하여 처리하도록 명기했다.

 

집사가 교회 재정의 관리자이면서 집행자인 반면에,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는 교회 재정의 관리자이면서 감독자라는 것이 위의 세 가지 예, 16세기 칼빈의 가르침과 18-19세기 미국 장로교회와, 그리고 오늘날 한국장로교 고신교회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즉 재정을 독자적으로 관리하고 집행할 권리가 집사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또한 장로가 재정의 전권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 역시 어불성설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관리와 집행은 집사에게 맡기되 교회의 모든 재무에 관한 감독권은 당회에 속한 것이므로, 중대한 사안일수록 목사와 장로와 장립집사[와 권사]로 구성된 제직회나, 모든 세례교인으로 구성된 공동의회를 통해 상호 협력하여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이 좋다.

 

재정 운영과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한 사람 혹은 극소수의 ‘전횡’과 ‘비밀스러운 집행’일 것이다. 세상에서처럼 교회에서도 재정을 맡은 자가 ‘실세’라는 인식은 안타깝다 못해 절망스럽다. 더 안타깝고 절망스러운 것은 그 실세가 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단, 비양심적이고 비신앙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상대를 헐뜯고 비방하면서 싸우는 것이다. 어디 이런 싸움뿐인가? 돈에 눈이 멀어 횡령하는 사건이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이 모든 것은 전횡의 결과요, 비밀스러운 재무 집행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돈을 권력으로 삼고 재정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재정 사용에 대한 문제로 장립집사들이 장립집사회를 만들어 당회를 대항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초심으로 돌아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이 어떤 것이든 그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질서 있게 세워 가시기 위해 은사에 따라 나누어주시는 선물이요, 교회건설을 위해 우리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으시는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헌금 사용의 실태와 바람직한 용도 


황원하 목사(산성교회 담임목사, 고신총회 인재풀운영위원회 전문위원 서기)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헌금을 정성스럽게 드리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성스럽게 드려진 헌금을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헌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종종 헌금사용에 대한 지침이 제시되곤 하지만 개체교회들이 그러한 제안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이는 개체교회들이 처해 있는 실정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헌금 사용의 실태와 더불어 헌금의 바람직한 용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1. 헌금 사용의 실태


필자가 경험한 헌금 사용의 일반적인 실태는 다음과 같다. 우선 목회자들과 직원들의 임금(생활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일반 사업체에서도 직원들의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건물 유지비, 교육기관 지원비 등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해외선교비, 국내전도비, 물품구입비, 대출금 상환비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이런 일반적인 경우에는 교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재정을 운용한다.

 

조금 특별한 교회는 선교비(전도비)나 구제비 등 대외적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중요하게 여긴다. 한때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교회 재정의 50% 이상을 교회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적용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어떤 교회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지만, 이런 경우에 목회자들과 직원들의 임금이 낮을 수밖에 없으며 다른 용처에 재정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직접 개척을 했거나, 예배당을 짓는 과정에서 목사의 개인 재산이 많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목사에게 지급되는 돈이 교회 재정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경우 목사는 교회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기도 한다. 필자가 최근에 듣기로 어떤 교회는 목사가 교회를 사유화하여 독단적으로 재정을 사용하고 제직회나 공동의회를 거치지 않고 교회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기도 하였다.

 

요즘 매우 문제시되는 경우는 예배당을 지나치게 크게 지으면서 과도한 부채를 져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교회는 장년 출석교인이 200명 정도 되는데 예배당을 지으면서 2,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규모로 지었다. 그 교회는 현재 부채가 60억 원 정도라고 한다. 그 교회는 담임목사의 생활비를 대폭 삭감하였고 부교역자들을 모두 사임하게 하였으며 선교지원금은 물론이고 교육기관 지원금도 끊어버렸다. 하지만 교인들이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어서 위기가 커져가고 있다. 이런 경우 잘못하면 부도처리가 되어서 예배당이 경매에 넘어가는 수도 있다.

 

2. 헌금의 바람직한 용도


그렇다면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여기에 명확한 성경적인 지침은 없다. 다만 일반적인 상식과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개체교회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목회자들과 직원들의 생활비(인건비)

필자는 교회가 목회자들과 직원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생활비를 드리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리고 목회자들과 직원들은 욕심을 내지 말고 회중들이 결정한 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이 좋겠다. 목회자의 생활비의 규모에 대한 문제는 교회마다 형편이 다르기에 딱히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가 상식과 합리성을 가지고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필자는 교회가 목회자와 직원의 이른바 ‘산업재해’를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근무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실제로 중요하다. 당장 상대적으로 저렴한 운전자 보험이라도 들어주어야 한다.

 

2) 봉사자들의 사례금

어떤 교회는 찬양대 지휘자와 반주자 등에게 사례를 지급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지휘자와 반주자의 봉사는 헌신적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의 수고는 금전적인 사례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임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례금을 지급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분적으로 봉사한다면 사례금 지급을 재고해야 한다. 그들의 수고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분명히 교회의 재정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들의 봉사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사례금을 받지도 주지도 않아야 한다.

 

3) 대외적인 재정 

선교비, 전도비, 미자립교회 후원금, 구제금, 장학금 등 교회 바깥으로 내보내는 재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교회의 형편을 도외시한 채 아무런 기준이나 근거도 없이 무작정 많이 내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의 전반적인 재정상태를 충분히 고려하고 교인들의 정서를 헤아리면서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이때 교회는 재정이 바르게 사용되는지를 충분히 살펴야 하는데, 예를 들어, 후원하는 선교사가 과연 제대로 선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가짜들이 의외로 많다.

 

4) 무리한 예배당 건축

어떤 교회는 예배당을 너무 무리하게 지어서 과도한 부채를 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단히 지혜롭지 못한 처사이다. 교회가 빚을 내어서 건물을 지으면 향후 상당한 기간을 빚 갚는 일로 보내야 한다. 게다가 유지비용이 만만하지 않다. 실제로 예전에는 예배당을 웅장하게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금방 부채를 해결한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작은 건물에서 소박하게 북적거리는 것이 훨씬 좋을 수도 있다. 건축을 하면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맺는 말

헌금은 하나님의 돈이다. 그리고 헌금은 교인들의 피와 땀이다. 따라서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헌금이 바르게 사용되면 교인들은 보람과 자긍심을 가질 것이다. 헌금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되면 그들은 바치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당부 드리는 것은 헌금 사용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이 정성스럽게 바친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일부 직분자들 마음대로 헌금이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헌금은 하나님의 돈이기 때문이다.


 

 

4. 한국 교회의 각종 헌금, 얼마나 정당한가 


최재호 성도(실로암교회 교인)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십일조 안하면 구원이 없다. 십일조 안하면 암에 걸린다.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서 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나온 이야기다. 또 다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출신의 한 목사는 “솔로몬이 일천 번 예물을 드려 하늘을 놀라게 하고 하나님의 관심을 끌었기에 응답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여러분도 그렇게(예물로 하나님을 놀라게) 하면 자식이 잘되고 건강해진다”고 설교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한국교회에는 연보(헌금)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이해들이 난무한다. 알고도 짐짓 그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강단에 선 상당수 목사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해도 너무하다 싶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들은 거의 연보와 관련된 ‘돈 문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화려하고 거대한 예배당 건물, 고액연봉을 받는 대형교회 목사들, 투명하지도 올바르지도 않게 쓰이는 교회재정, 빈부 차별 문제, 의도적으로 왜곡된 설교, 직분을 사고파는 문제, 권징의 편향된 시행 등. 한마디로 돈 문제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영역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

 

따라서 어그러지고 왜곡된 연보의 원래 의미를 짚어보고 바로 잡는 것은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 있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오늘날 잃어버린 연보(捐補)의 의미

예전에 한국교회는 ‘연보’란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연보’란 말을 ‘헌금(獻金)’이나 ‘예물()’이란 용어로 바꾸어 사용한다. 주지하듯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이) 고백적인 의미로 자기 재물을 내어 형제와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다. 헌금이나 예물이라는 용어에 비해 수평적 의미가 강하다. 이웃사랑 혹은 교회 안에서 공평하게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교회를 공평하게 한다는 고백적 의미의 연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재물이라는 수직적 의미가 강한 용어로 변한 것이다.

 

연보를 드리던 믿음의 선배들은, 일이 잘되고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복이 없이는 우리에게 불행과 재난밖에 올 것이 없음을 고백했다. 동시에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탐하거나, 우리의 능력이나 부지런함을 믿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식을 가졌다. 또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 요행을 기대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께서 베푸시는 것에 자족하겠다는 고백을 담아 연보를 드렸다. 그리고 그 의미에 잘 참여하는 가운데 이를 분배하였다.

 

칼빈 선생은 『기독교강요』에서 연보에 대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위탁물이므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교회 공통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대교회에서는 성찬을 앞에 두고 서가로 입을 맞추며 구제물을 내어놓는 행위를 통해 서로간의 사랑을 선포했다. 의미상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윤리 혹은 박애적 차원에서 구제물을 내놓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수직적 사랑을 알고, 그래서 그것을  받아 거듭난 사람에 의해서 드려진다. 즉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이 자신의 고백을 담아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드린 것이 수평적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연보는 자원하여 드림과 은밀하게 드림의 성격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입은 내게 맡겨진 것들을 감사와 자족의 고백을 담아 드리는 것이며, 또 내게 맡기신 것을 필요한(원래 소유해야 할)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일이므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것을 내놓는 것이라면 자랑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달하는데 드러내고 자랑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2. 왜 연보의 의미가 퇴색됐는가?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과연 몇 가지의 헌금이 있을까.

어떤 이는 50여 종, 심지어 90여 종의 헌금이 있다고도 한다. 그 많고 다양한 헌금 명칭을 살펴보자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땅 한평 봉헌헌금’, ‘일천번제 작정헌금’, ‘채우시는 축복헌금’, ‘사모님 용돈헌금’ 등. 어쩌다 오늘날 연보 항목이 이렇게 다양하고 세분화되기에 이르렀을까.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 시대 교회들이 그릇된 물량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맘몬”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화와 풍성과 번영, 다수(多數)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거룩함과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입증해줄 가시적 근거(물질과 숫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조사된 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교회 연보는 주로 교회의 운영과 유지(54.8%), 구제 및 사회봉사(18.8%), 선교 및 전도(16.8%), 교육(9.6%) 순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한목협, 2013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 주목해서 볼 것은 다른 항목에 비해 교회를 운영하고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금액이 눈에 띄게 높다는 점이다. 교회운영 및 유지에 사용되는 금액에서 목회자 생활비(16.9%)를 제외한다고 해도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예배당 건물의 유지비용(혹은 부채상환비용)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많은 한국교회가 빚을 얻어서라도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짓고 연보의 상당액을 건물유지비와 대출금 상환에 쏟아 붇고 있다. 인구가 감소하니 당연히 기독교인 수도 줄어들었는데 예배당 건물은 더 크고 화려하게 짓고 있는 추세다. 사람들이 편리한 시설,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충족시켜줄 화려한 기물,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해낼 수 있는 웅장한 건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려면 빚을 얻어야 하고, 매달 돌아오는 막대한 금융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연보를 낼 더 많은 교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이웃교회 교인을 수평 이동시켜서라도 교세를 늘리려 안간힘을 쓴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이같은 노력은 다르지 않다. 연보를 예물과 헌금으로 바꾸어 교묘하게 ‘축복’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사람에게 쓴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바치고 드려진다고 하면 더 효과가 높았다. 연보의 종류도 90여 개의 항목으로 쪼개고 나누어 더 많은 액수를 내놓도록 하며, 주보에 헌금자 이름을 게시하고 예배시간에 ‘주의 종’이 긴 시간을 할애해 소리 높여 호명(呼名), 광고하고 축복기도까지 해 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연보를 하기 않는다는 핑계로 자원함과 은밀함이란 원래의 의미를 지워버렸다.

 

때로는 교묘하게 교인들 간에 충성경쟁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교회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 시설을 확충할 때 직분자 선출이나 임직식을 넣어 필요경비를 각출하게 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에는 이미 ‘장로 되는데 얼마, 권사나 안수집사 되는데 얼마 하는’ 식의 직분 사고팔기는 공공연한 이야기가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직분자의 자격은 뒷전이고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얼마인가, 그가 교회재정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가 먼저 고려된다.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교회의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가 진리 위에 서있을 때에는 교회가 소유한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이라 여겼다. 그래서 감독들은 교회의 재산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거나 낭비하게 되면 피를 범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다. 집사들은 교회의 소유를 마치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것처럼 신중하고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잘못된 목적을 가진 교회의 요구 앞에 나를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내 것을 교회 앞에 기부하기 때문에 청지기 정신이나 공평케 함이라는 연보의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다. 사역자의 생활과 교회의 유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연보가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당 건축과 화려한 예식이 거행되는 시설의 치장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3.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연보의 회복도 복합적인 교회의 문제이며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어 해법이 쉽지 않다. 하지만 해답은 당연히 원리에서 찾아내야 한다.

 

근본은 성경이 계시하는 바른 신학의 회복이다. 연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이가 무슨 고백을 담아 드리는지에 대한 의미를 서로가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이 바르게 세워져 교회적 섬김의 사역이 있어야 한다.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은혜를 바르게 알고 거듭난 자를 교회의 회원으로 받는 절차를 엄격히 해야 한다. 말씀의 기준에서 어긋난 자에게는 합당한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바른 원리를 가르치고 전하여 교회가 복음의 원리와 교회의 어떠해야 함을 잘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연보의 회복을 위해 특히 목사들은 사도교회와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검소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당시에는 교회가 사역자들의 생활을 책임지는데 있어, 오늘날처럼 화려함과 사치로 재물을 허비할 정도가 아닌 ‘필요한 것을 채우는 정도로만’ 소유하도록 적절히 지원하였다. 만일 이에 지나쳐 목사가 사치나 과소비를 하면 동료들로부터 책벌이 뒤따랐고 정도가 심할 경우 그 직분을 빼앗기도 했다.

 

오늘날 대형교회 목사들의 생활비(아니, 연봉)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더하여 각종 편법을 통해 은밀히 주어지는 엄청난 특혜는 그들을 하나의 특권층으로 만들었고 값비싼 집과 차량에 신처럼 떠받드는 교인들의 존재는 실상 서로를 지속적으로 타락시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 로마교회의 타락상은 전 범위에 걸쳐 일어났지만 특히 교리적 타락, 교권주의자들의 탐욕과 사치, 교회의 화려한 건축과 치장,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잘 알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당시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렵게 받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 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막기 위해 교회의 재산을 적절하게 분배하며 구제품을 나누어주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공공자금을 맡은 청지기로서 집사 직분을 교회 안에 세워주셨다. 집사들은 교회의 수입을 원리를 따라 성직자, 가난한 자들, 교회의 건물 수리, 해외와 국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잘 분배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타락을 막기 위해 집사들은 지나치게 교회당 건물을 거대하고 웅장하게 짓거나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목사에 대해 지나치게 많거나 적은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공교회적 관심과 지원, 살핌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겠다.

 

개혁교회에서 직분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동등하게 세워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충실히 사역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교회는 바르게 세워지고 든든히 서갈 수 있다. 다른 인위적인 제도개혁이나 구호로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바르게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 다음 글은 고려신학대학원의 20029월 있었던 예장 고신 제52회 총회에서 동대구노회와 경남노회가 “주일 성수와 십일조”에 관해 질의했던 내용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연구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연구보고서는 고려신학대학원 홈페이지 커뮤니티 자료실의 “십일조 연구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kts.ac.kr/www/bbs/board.knf?boid=cdata&wid=115)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 크게 3가지 주장이 있다.

1) 십일조는 구약에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불필요하다.

 

2) 신약에는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게 보이지만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주장은 없는만큼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히 해야 한다.

 

3)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라는 문자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을 통해 십일조의 유례와 실례를 살피고 이를 기초로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를 밝히고 신약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율법의 유효성 문제와 함께 다루어볼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성경적 헌금관을 제시할 것이다.

 

1.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유례

 

(1)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

1) 족장들의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18-20, 아브라함이 전쟁 승리 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린 내용이다.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①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원한 것 ②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일조는 이후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의 서원에서 다시 등장한다. 야곱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 자발적인 것,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십일조의 중요한 원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이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이다.

 

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는 3가지 종류다. 첫째, 레위기 27:30-33이다. 땅의 소산과 소나 양의 십분 일을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한다. 둘째, 민수기 18:20-32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 사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으셨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 자손에게 주어 그들의 생활을 도우셨다. 그리고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얻은 것 중 다시 십일조를 거제로 드려서 제사장 가족들을 공궤했다. 셋째, 신명기 14:22-29이다. 여기에는 매 삼년(안식년 후 제3년과 제6)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는 데 사용하라는 내용이 있다. 모세의 율법에는 십일조가 하나님과 사람 간의 수직적 원리, 레위 지파를 위해 사용되는 수평적 원리로 나타나 있다. 이는 두 가지로 다시 말할 수 있다. 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②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경비, 즉 예배와 구제를 위해 드린 것이었다.

 

3)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십일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십일조 생활도 소홀하게 되었다. 사사시대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배회하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한 가정의 제사장이 되기도 했다(17:7-10, 18:18-20). 이것은 그들의 사명의식이 흐려진 것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사무엘상 8:15 이하의 십일조는 헌금이라기보다는 세금의 성격을 말한다. 다윗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역대상 29:14에는 그의 헌금의 원칙이 나온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그중에서 일부를 주께 드리는 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면서 겉모양만 남은 십일조를 지적한다(4:4). 히스기야가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하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을 위한 십일조를 시행하게 한 사실이 역대하 31장에 나타나 있다.

 

4) 포로시대와 예루살렘 귀환 후의 십일조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기에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시 중요하게 등장할 때는 느헤미야와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주도하고 이후 예배의식을 회복한다. 그리고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한다(10:38, 12:44). 하지만 주전 430년경,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전적 헌신의 표시로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나타나는 원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는 필수적이며 십일조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을 때 종교는 타락한다는 것이다.

 

(2) 신약에서 본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

1)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바가 없다. 다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간접적으로 언급하셨다(23:23, 14:42). 여기서 나타나는 원리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와 인과 신, 곧 사람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호의적인 사람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을 합당하게 보신다(10:9-15). 또한 헌금의 원리에 대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해 말씀하신다(21:1-4). 주님은 액수보다는 최선을 다해 드리는 마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2) 초대교회의 헌금 행태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 생활에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신의 제물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았다(4:32). 바울은 연보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하고,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고후 9:7). 여기서 나타나는 원리는 구약의 십일조의 원리와 동일하다. ① 우리의 수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② 연보는 규칙적으로 준비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 ③ 연보는 자원해서 하는 것이고 힘에 지나도록 하는 연보는 인정받을 일이다. ④ 하나님은 기쁨으로 헌금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바치는 자에게 축복해 주신다.

 

2.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땅의 전체,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신다. 대표의 원리를 적용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십일조와 더불어 첫 열매를 바치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것을 요구하셨다. 헌금의 원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거두신 것은(어떤 해에는 십분의 삼 가까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십일조’라는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스라엘 종교체제를 위해 헌금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인 십일조를 요구한 것이다. 필요가 없는데도 십일조라는 규정에 매여 무조건 내도록 법제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필요가 있으면 십일조 이상도 요구하신다.

  

구약의 원리는 신약에 어떻게 적용하는가?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다르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율법의 실제 적용이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보론: 새언약 시대의 율법 문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율법이 폐하여진 것처럼 말한다(3:19; 1:6-12; 2:16-21; 3:1-14 ).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이루러(완성하러) 오셨지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을 폐한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6:1-3). 바울이 율법에 반하는 말을 한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바리새인의 사상을 꾸짖기 위한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한다(3:31). 결국 구원 받은 자는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바울은 성령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고 한다(8:4). 고린도후서 8:4에서도 법이 성령에 의해 마음판에 새겨졌다고 말한다. 율법의 내면화인 것이다. 성령의 역할과 율법의 내면화는 이미 구약의 새언약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31:33, 11:19-20; 36:26-27).

 

결국 율법의 원리는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구약에서 율법은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신약에서도 율법은 결코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순종해야 할 지침이 된다. 신약에서의 율법은 영적이며 내면적이다. 외형적인 그 문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원리가 중요하며,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으로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다.

 

3. 신약시대의 십일조 원리와 적용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며 완성이다. 구약의 원리와 명령은 신약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고 그 의미가 내면화되고 더 완성적이어야 한다. 구약의 헌금의 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바쳐야 한다. 그 원리가 바로 십일조였다.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불가피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우 외에는 최소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십의 삼조까지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주의해야 할 것은 성도들의 헌금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십일조를 구약의 조건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필요할 때에 내도록 하신 것이다. 교회는 복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만 헌금을 사용할 책임이 있다. 교회 안의 잡다한 행사를 위해 부당하게 사용하거나 특별한 명분 없이 저축하거나 땅이나 주식에 투자해서도 안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십분의 일을 특별히 요구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최소한 소득의 십일조, 나아가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옳다. 이것은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신앙생활의 증진과 건덕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6. 헌금과 예배 


안재경 목사(온생명교회 담임목사)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예배는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만남이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심으로 예배가 시작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받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회중은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회중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회중이 예배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다는 말이다. 성전이 사라졌고 제사가 사라졌지만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고 새로운 제사를 드려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새로운 성전이 선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새로운 제사가 드려진다. 예배 전체를 제사라고 부를 수도 있다. 로마서 121절에서 말씀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신약교회는 죽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몸으로 산 채로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한다.

 

 

예배 때 회중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표명함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 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역대상 29장 말씀에 보면 헌금할 때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다윗 왕은 자신이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쓸 예물을 많이 준비한다.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에게 광고해서 성전건축에 쓸 예물을 드리도록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기회를 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원해서 예물을 드리자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한다.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 이런 언급을 했을까?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족을 채워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족을 채운다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윗이 기도한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하나님의 회중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따름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 것이 자랑이 될 수 있겠는가? 물건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돌려 주었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흥미로운 것이 헌금을 라틴어로 콜렉타(Collecta)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원래 ‘모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예배에 모인 회중이 개인적으로 조용히 기도한 후에 사제 주위로 모인다. 신자들이 예배하기 위해 사제 주위로 모이는 것이 바로 콜렉타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용어는 헌금 순서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특화된다. 이 단어의 영어번역이 컬렉션(Collection)이다. 우리 주위에서 이 단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지 않는가? 보석 컬렉션, 화장품 컬렉션, 향수 컬렉션 등의 말들을 쓰지 않는가? 그 제품들을 수집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좋은 제품을 모아 놓았으니 와서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헌금은 예배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예배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헌신은 어느 한 순서로 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 전체가 하나님의 컬렉션이요, 하나님을 위한 컬렉션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생각을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드린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먼저이지만 우리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집사직은 연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직분임

 

예전에는 우리가 ‘연보’라는 말을 종종 썼다. 이 연보라는 말을 풀어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둔 기부금이라는 뜻이다. 헌금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이 연보라는 말이다. 연보라는 말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집중적으로 언급된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한 계획을 실행하라는 말 속에 등장한다. 이방교회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기부한 돈이 연보였다. 그런데 그 곳에 보면 이 연보를 ‘은혜의 일, ‘성도 섬기는 일’, 봉사의 직무’라는 다양한 표현들로 바꾸어 가면서 쓰고 있다.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하는 연보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요, 다른 성도를 섬기는 일이요, 봉사의 직무라는 사실이다.

 

이 연보와 관련된 직분이 집사직분이다. 집사직분은 연보위원과 재정관리 담당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집사직은 가장 광범위한 봉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 집사라는 말이 봉사라는 말 자체에서 왔다. 집사직은 가장 광범위한 봉사직이면서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봉사직이다. 식탁봉사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집사직이 나왔듯이 물질적인 필요까지 채우는 것이 집사직이다. 개혁한 교회는 집사를 ‘자비의 봉사자’라고 불렀다. 목사는 말씀의 봉사자라고 부르고, 장로는 다스림의 봉사자라고 부르고, 집사는 자비의 봉사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사제의 종이었던 집사직을 성경대로 회복하여 자비의 봉사자가 되도록 했다.

 

집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아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를 위해 일곱 명의 사람을 택하여 세웠는데 이것이 이후의 집사직의 기원이라고 본다. 집사는 교회를 돌아보아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는 이들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더 나아가 집사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노예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중세에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유럽의 인구 1/3 이상이 죽어나갈 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목숨도 돌아보지 않고 봉사했다. 중세를 지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는 집사직이 회복되어 자비와 긍휼의 사역이 더욱 더 힘있게 진행된다. 요즘의 복지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기독교인들이 감당했다. 집사는 목사, 장로와 더불어 예배를 섬기는 직분자이며 성도를 섬기고 이끄는 직분자이다.

  

헌금은 봉헌과 헌신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확증하는 것이다. 교회가 구제를 잘 하지 않으니까 십일조마저 교회에 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직접 구제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신자는 개인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통해 가난한 자들이 필요한 도움과 더불어 복음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박애정신 때문에 연보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금한다. 하나님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것이다. 헌금순서를 통해 집사를 포함한 신자 모두는 교회와 온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푸는 사명을 실행한다. 내 먹기에도 부족한 듯 보이지만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렸을 때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남았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늘도 계속해서 일어난다.

 



헌금의 방법: 헌금바구니, 헌금함, 은행송금?



이성호 목사(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성경은 헌금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교훈을 제공하지만 헌금의 방식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지 않다. 그래서 헌금을 거두는 방식은 교회마다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봉헌시간에 헌금채를 돌렸다. 아직도 헌금채를 돌리는 곳도 있으나 요즘에는 헌금함을 비치하여 예배시간 전에 성도들이 헌금을 하도록 유도하는 교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형교회의 경우에는 헌금을 위한 전용 은행계좌를 개설하여 성도들이 예배시간 외에도 언제든지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제도는 특별히 본 교회를 장시간 멀리 떠난 성도들이 헌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헌금을 드리기 위해서 꼭 교회에 올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스마트폰의 발달은 앞으로 헌금 방식에도 변화를 줄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헌금 시간에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송금하는 모습이 조만간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예배드릴 때 아주 생소한 광경을 보았다. 헌금 시간에 모두가 개인수표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닌가! 오직 지폐만을 헌금으로 생각하여서 새 돈이나 깨끗한 지폐만을 골라서 정성스럽게 드렸던 나에게 그들이 너무 성의 없이 헌금을 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년 쯤 지났을 때 나 역시 수표로 헌금을 드렸다. 수표가 일상적인 삶이었을 뿐 아니라 현금을 찾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은행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금 방식에 대해서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이 없으니 교회가 각자가 알아서 헌금방식을 정하면 될까? 방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이 정해지면 그것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헌금함 제도는 성도들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헌금하는 행위가 예배 시간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물론 헌금함을 강대상 앞에 비치하여서 예배시간에 성도들이 앞에 나와서 헌금을 드리도록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전도사 시절에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사용한 방식이다.

 

예배가 교회 공동체적 행위라면 헌금 역시 공동체적 행위가 강조되어야 한다. 예배시간 전에 각자가 알아서 헌금을 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금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헌금함을 비치할 필요 없이 헌금을 할 마음이 진정으로 생겼을 때 은행계좌로 송금하게 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헌금의 방식은 예배시간 안에 모두가 다같이 하는 것이 좋다. 즉 헌금이 예배의 한 부분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헌금채 제도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부담은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무조건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기도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듯이 헌금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볼 때 헌금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자발성은 헌금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일 뿐이다. 따라서 헌금 시간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어떤 이들은 헌금채의 사용은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누가 헌금을 드릴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 누가 예배드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헌금을 합당하게 드릴 수 있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헌금을 드릴 수 없다. 헌금에 참여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예배는 신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불신자들 때문에 예배의 형식을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에는 교회를 소개하는 란에 교회에 처음 오시는 분들은 헌금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물론 굳이 헌금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말리지는 않는다. 어떤 목사는 아예 주보의 예배 순서란에 새신자들은 헌금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지하기도 한다고 한다.

 

요약하면, 헌금은 예배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헌금은 예배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또한 예배는 공동체적이기 때문에 모든 회원들이 한 마음으로 다같이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헌금바구니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고 헌금을 거두기 위해서 수고하는 헌금위원은 당연히 (안수) 집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집사는 헌금을 거두는 것뿐만 아니라 관리까지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직분자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이 예배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기독교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연대기  (0) 2017.05.17
예수님 당시의 화폐 단위 간단 정리   (0) 2017.05.17
안수 이해  (0) 2017.05.15
구약성경과 고대근동   (0) 2017.05.15
다윗의 성전 설계도  (0) 2017.05.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