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의 비교


최근 대두되는 종말론의 비교 / 장두만 교수

(장두만교수님은 지금은 천국에 계십니다.)

1897년 가을 펜실 베니아주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제임스 오르(James Orr)는 기독교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발전해 왔으며 또 각 시대마다 강조점이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2세기의 교회는 이방 종교와 갈등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데 주안 점을 두었고, 3세기 및, 4세기의 교회는 신론, 특히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일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고 5세기의 교회는 인죄론에 초점을 맞추었고, 5세기 ~7세기는 기독론이 주된논의의 대상이었다.

 
그후 11세기~15세기는 구원론 특히 속죄 교리가 교회의 주된 관심사였고, 16세기에는 구원론 가운데 특히 칭의 교리가 논쟁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은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렇게 발달된 교리는 아니였다.2


물론 19세기에도 종말론에 관한 연구가 영국의 다비(John N. Darby, 1800~1882)같은 학자에 의해서, 또 미국에서 주로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의 논쟁과 연관하여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었지만,3 아무래도 종말론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결론일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지금까지 갇혀있던 봇물이 터지기나 하듯이 여러 형태의 종말 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상당한 한문적인 뒷받침을 받아 가면서 전개되는 종말 론이 있는가하면, 종말론에 관한 글을 쓰는데 필요한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글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여 독자들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교통이 혼잡할 때에는 교통 정리하는 교통경찰이 필요하고, 길을 잃고 방황할 때에는 길 안내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를 생각하여 필자는 먼저 여러 종류의 종말론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쓰면서 적절한 비판을 가한다음 필자의 결론을 보여주고자 한다.



Ⅰ. 천년왕국설
전통적으로 천년왕국에 관하여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는 후천년설에 관해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후천 년설을신봉하는 신학자인 찰스 하지(Charles Hodge)도 후천년설은 사도적 교리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크로밍가(D. H. Kromminga)에 따르면 12세기 가톨릭 승려인 플로리스의 요아킴 (Joachim of floris)이 최초의 후천년설주의자라고 한다.5 그러나 체제화된 후천년설을 가장 먼저 주장한 학자는 18세기 영국의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 1638~1762)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신학 의역 및 주석 (Paraphrase and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1703)을 효시로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찰스 하지, A. A. 하지, B. B. 워 필드, A. H. 스트롱, 제임스 스노우던(James Snowden), 로레인 뵈트너 등이 후천년설을 주장했다. 최근에는 칼케돈파라고 부르는 라쉬 두니(R. T. Rushdoony), 그레그 반선(Greg Bahnsen), 게리 노스(Gary North)등이 후천년설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후천년설이란 무엇인가 현재 생존하고 있는 후천년설주의자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인 뵈트너는 이렇게 정의한다. 후천년설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 전파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현재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세계는 결국 기독교화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긴 시기 즉 천년왕국 말기에 있을 것이라고 보는 종말론적 견해이다.


그러면 후천년설은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주장 하는가 그들 이 제시하는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의 세계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암울했다. 노예제도, 일부다처제, 여자와 어린이의 학대, 정치적 억압, 무지, 빈곤, 의료시설의 낙후 등이 보편적이었으나 예수님이 오신 다음 이런 것들은 이미 개선되었다.7 뿐만 아니라 성경은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고, 대중집회나 방송선교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많은 신학교를 통해 신학생들이 배출되고 있다. 또한 지난 100년 동안의 기독교의 성장은 그 이전의 약 1,800년 동안에 이루어진 성장보다 더 큰 것 등이 증거이다.8


둘째,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범세계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시편 47편 2절 97편 5절, 스가랴 9장 10절, 계시록 7장 9절에서 10절 등이 온 세계가복음화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28:18~20)은 세계 복음화를 보장한다.10


그러나 후천년설의 입장은 너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에 따르면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는 더 악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마24:9~14).

        예수님의 초림 후 얼마동안은 세계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개선되었지만, 그 개선이 정점(頂点)에 이른 다음에는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둘째, 인용된 선경 구절은 해석이 잘못되어 있다.

        복음이 널리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은 보여 주지만, 그것이 온세계의 복음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 니다.


셋째, 주님의 지상명령은 온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지 온세계가 복음화 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무천년설(Amillennialism)


무천년설은 희랍에서 시작된 우화적 해석이 필로(Philo)와 오리겐(Origen)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교회에 들어온 다음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가 이를 받아 들인 후 체계화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무천년설을 신봉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벌콥(L. Berkhof), 윌리 암 헨드릭슨, 아브라함 카이퍼, 렌스키, 해밀턴(F. E. Hamilton), 간하배(Harvie Conn), 피터스(Albertus Pieters), 영(E. J. Young), 보스(Geerhardus Vos) 등이 있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무천년설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며, 한국에서도 여러 교파의 신학교에 퍼져 있고, 또 국내에서 발간된 주석성경은 대개 무천년설 입장을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편이다.


그러면 무천년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천년설주의자들은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지상의 천년왕국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까지의 긴 기간, 즉 교회시대가 바로 천년왕국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무천년설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천년왕국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부인하는 것이지, 영적인 천년왕국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제이 아담스(Jay. E. Adams)같은 학자는 무천년 설이란 용어를 실현된 천년왕국(realized millennium)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 그 근거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무천년설주의자들은 대개 그들이 무엇을 믿는가는 많은 경우 밝히고 있지만 왜 믿는가 하는 것을 체계화시켜 놓은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계시록 20장 1절부터 10절에 나오는 천년을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상징적인 숫자로,

        즉 완전(perfection) 또는 완성 (completeness)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둘째, 계시록 20장의 사탄의 결박(계20:1~3)을 사탄의 능력의 제한으로 이해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성취된 것으로 해석한다.
셋째, 계시록 20장 4절의 부활(첫째부활)을 영적인 부활로 해석한다.15 그리고 5절 의 부활은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넷째, 장차 전 세계에 임할 문자적인 7년 대환란은 없다. 크리스챤의 삶에서 환란 은 늘 있는 것이지 특별한 미래의 대환난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섯째, 휴거는 현재 성도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뜻하든지 아니 면 예수 그리스도 재림 때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섯째, 구약 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은 모두 교회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성취되고 있다.


위 같은 무천년설주의자들이 주장은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 글에서 그 모든 문제를 깊이 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 몇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문제는 성경 해석의 원리이다.

성경 해석의 원리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예언서의 해석 문제만 하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도 다 설명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우리가 일반 문헌이나 성경을 해석할 때 취할 원리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화적 해석은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올바른 해석의 원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우화적 해석을 배격하고 있고, 심지어는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조차도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무천년설주의자들은 우화적 해석을 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예언서는 우 화적으로, 그밖의 문헌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서를 우화적 으로 해석한다는 일반적 원칙조차 일관성있게 적용하지 않는다.


래드(G. E, Ladd)가 참으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예언서를 일관성 있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조차도 문자적인 재림이 아니고 영적인 재림 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23 무천년설주의자인 해밀턴(Floyd Hamilton)도 인정했듯이,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전천년설이 맞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에 무천년설주의자들의 해석은 문자적 해석이 전천년설을 뒷받 침하는 결론이 되면 그 부분은우화적으로 해석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만 문자적 해석을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은 흔히 주장하기를 전천년설주의자들도 성경을 일관성 있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파인 버그(Johh S. Feinberg)가 적절하게 주장했듯이, 상징적 언어(figurative language)와 상징적 해석(interpreting figuratively)은 근본적으로 다르 다.25 상징적 언어(예; 용, 열뿔 가진 짐승, 다니엘서 2장의 우상 등)나 수사적 표현(예; 나는 문이다, 나는떡이다 등)은 원래 문자적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수사법의 원칙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수사법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상징적(또는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단어 자체로 볼 때에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분명히 문자적 의미인데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은 우화적 해석이다.
예언서에 상징적 언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문자적인 언어까지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문헌은 일단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문자적 해석을 하면 뜻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만 다른 벙법으로 해석해야 된다. 그렇게 해석하면 천년은 천년을 의미하지 다른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둘째, 계시록 20장의 사탄의 매임에 관한 무천년설 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사탄의 능력이 제한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시록 20장 3절의 표현은 능력의 제한이 아니라 완전히 활동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이 결말은 계시록 19장의 재상재림 이후에 있는 것이므로 사탄의 결말이 초림때 성취되었다는 주장은 받아 들일 수 없다.


셋째, 계시록 20장 4절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로 보는 것은 석의적(釋義的)으로 볼 때온당치 못하다.

4절의 살다나 5절의 살다가 모두 헬라어로 '에제산'인데, 5절의 부활이 육체적 부활이라면-이 면은 무천년설 주의자도 동의한다- 4절의 부활도 육체적 부활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26


넷째, 성도들의 삶에 늘 환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적인 환란 과 대환란은 분명히 구별된다.

종말론적 상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24장 21절 이나 29절은 분명히 일상적인 환란과 다른 미래의 환란이 있음을 말한다.


다섯째, 휴거를 성도들이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라든지 그리스도 재림 때의 부 활로 보는 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예를 들면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18절의 말씀은 죽은 성도는 물론 살아 있는 성도 (우리 살아 남은 자)도 포함하고 있다.


여섯째, 구약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이 모두 교회에 의해 성취된다면 이스라엘에게 미래에 성취될 예언을 전혀 없다는 결론이 되는데, 그러면 로마서 9장~11장, 특히 11장에서 언급된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 야 하는가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무천년설도 성경적으로 타당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3.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전천년설은 교회시대의 마지막에 지상에 범세계적인 7년 대환란이 있으며 그후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가시적으로 재림하셔서 땅 위에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건설해 직접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 한국에 알려진 사람만도 무수히 많다. 왈 부드(J. F. Walvoord), 라이리(Charles Ryrie), 래드(G. E. Ladd), 스코필드(C. I, Scofield),사우어(Erich Sauer), 헨리 디이슨(Hanry Thiessen), 아처(GleasonArcher), 핼 린지(Hal Lindsey), 테니 (Merrill Tenney), 젠센(Irving Jensen), 파쉬(Rene Pache)등이 있고, 설교자들 가 운데도 스윈돌(Charles Swindoll), 맥아더 (John MacArthur), 크리스웰(W. A. Criswell), 폴웰 (Jerry Falwell), 디한(M. R. DeHaan), 위어스비(Warren Wiersbe)등이 있다. 한국 학자들 가운데도 박윤선, 박형룡, 이상근, 김응조 박사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면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주장하는가
몇가지 중요한 이유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해석적인 이유에서다.
모든 문헌을 해석의 일반원칙-일단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문자적 의미가 뜻이 통하지 않을 때에는 문자적 의미 이외의 의미를 받아들인다-에 따라 해석하면 지상의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계시록 20장 4절에서 6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전천년설이 맞다는 결론이 된다.28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5장 20절~28절을 바로 이해하면 예수 그리 스도의 재림과 그후의 마지막 때(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들 아버지께 바칠 때)사이에 천년왕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29


둘째, 초대교회의 신앙이 전천년설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우화주의자신 클레멘트나 오리겐의 해석 방법이 교회에 침투해 오기전에 교회는 전천년설을 믿었다. 파피아스, 바나바, 이레니우스, 순교자 저 스틴, 터툴리안 등이 모두 전천년설을 믿었다. 그러므로 증간에서(3, 4세기경) 왜곡된 무천년설이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셋째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여러가지 언약 때문이다.
성경에 언급된 많은 언약 가운데 종말론과 연관이 있는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창15), 다윗과의 언약(삼하7:12~16; 시89)및 새언약(렘31:31~34)이 있다.
지면 관계로 이모든 연약의 종말론적 의의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나,30 다윗과의 언약(DavidicCovenant) 하나만을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사무엘하 7장 12절, 시편 89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여러 가지이다.


다윗에게 자손이 있어 그 왕위를 차지하겠고, 또 비록 그의 후손이 불순종하더 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폐기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을 강조하신다.


지금 이 시대에는 불순종으로 인해 그 약속으로 말미암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 지만,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걷히고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참고 롬 11:26),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영적인 통 치가 아니라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통치로 이해하고 있음을 사무엘 하서 7 장 18절 이하에 나타난 다윗의 반응이나 역대하 6장 14절로 16절에 나타난 솔로 몬의 이해를 보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5장 31절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신 이후에 왕의 보좌와 왕국이 있을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교 회 시대에 있는 영적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천년왕국에 관한 여러 가지 학설 가운데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결해라고 생각한다.


Ⅱ. 휴거와 환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에도 휴거의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똑같지 않다.

또 근래에는 학문적 배경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이비 학자들이

휴거의 시기를 단정함으로 성경 및 신학 지식이 별로 없는 평신도와 일부 목회자들 까지도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면 휴거는 언제 있게 될 것인가 ?
휴거의 시기에 관해서는 4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부분 휴거설(Partial rapture theory)


이 설은 랭(G. H. Lang)이나 워치만니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때에 모든 성도들이 휴거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깨어 있고, 준비된 성도들이 7년 대환란 기간 중 여러 차레에 걸쳐서 휴거된다 는 것이다.
이 설에 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몇가지 문제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거듭난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었기 때문에 운명을 같 이한다.
둘째, 휴거와 관련된 성경 구절(살전4:13~18; 고전15:51)에 보면 그리스도인 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두고 있지않다. 만일 살아있는 성도들 사이에 그런 구별이 있다면 죽은 성도들에게도 그런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인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따르면 모든 죽은 성도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2. 중간 휴거설(또는 환란 중 휴거설midtribulational rapture theory)


이 설은 노만 해리슨(Norman B. Harrison), 올리버 버즈웰 (Oliver Buswell), 글리슨 아처(Gleason Archer)등이 주장하고 있다.
이 설에 따르면 교회는 7년 대환란 기간때에 전반부 3년 6개월은 통과하고 그 후에(7년 대환란의 중간 지점에) 휴거된다는 것이다.
이 설에 대한 중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에서 3년 6개월(=42개월=1,260일)에 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때 정말 무서운 환란의 순간은 후 3년 반이기 때문에 여기서 구출되는 것 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다.


둘째,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번째 나팔은 고린도전서 15장 51절 및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의 마지막 나팔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휴거는 7년 대 환란의 중간 기점에 일어난다는 것이다.33 그러나 최근에 글리슨 아처는 휴거를 계시록 14장 14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성경에서 3년 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휴거와 연결 된다는 증거가 없다.


둘째, 계시록 11장의 나팔과 고린도 전서 15장 51절 및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절의 나팔을 동일시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계시록 11장의 7번째 나팔은 땅위에 심판을 가져오기 위한 나팔이고 고린도전서 15장 및 데살로니가 전서 4장의 나팔 은 성도의 부활 및휴거와 연관된 나팔이기 때문에 이들은 똑같지 않다.



3. 환란후 휴거설


환란 통과설(Posttribulational rapture theory)이 설은 조지 래드(G. E. Ladd), 로버트 간드리(Robert Gundry), 더글라스 무(Douglas Moo)등 이 주장하며,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 설에 따르면 교회는 7년 대환란의 무서운 고통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통과하고 7년 대환란의 마지막,

즉 예수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휴거되어 그리스 도와 함께 지상에 돌아온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에 관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환란 중에도 지상에 성도들이 있는 것을 볼 때 환란 후 휴거설이 맞 다.
둘째, 성경에는 교회가 항상 환란 당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셋째, 진노()는 불신자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 나님의보호를 받으면서 대환란을 통과한다.


그밖에도 여러 성경 구절에 관한 해석을 둘러싼 주장도 있지만 여기서 일일이 취급하기 에는 너무 전문적이어서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환란 후 휴거설은 몇가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이 설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만일 환란 후 휴거설이 맞다면 천년 왕국에거주할 주민이 없다는 것이다.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분명히 일상적인 활 동이 있고(사65:17~25) 또 악이 존재하고 있는데 (계20:7~11)이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모든 성도들은 휴거와 동시에 영체로 변화되어 곧 바로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 인데 이들이 어떻게 죄를 지으며, 일상적인 활동(농사 짓고, 집 짓고)을 한 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환란 후 휴거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간드리 (Gundry)나 무(D. Moo)36는 천년왕국에 불신자들이

육체를 가지고 들어갈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 32절 이하에, 특히 41절과 46절 에 따르면 재림 후 민족들의 심판 때 불신자는 모두 영원한 불에 들어감을 보이 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은 성경의 근거가 없다.


둘째, 7년 대환란 기간 때에 지상에 성도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환란 후 휴거설 을 증명하지 못한다. 성도는 항상 있겠지만, 7년 대환란 때에 지상에 있는 성도 는 교회의 휴거 후에 구원받은 성도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참고, 계 7:9~14)


셋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대환란을 통과한다는 주장은 계 시록 13장 7절, 15절 등에서 성도들이 순교당하는 것을 볼 때 설득력이 없다.


넷째, 교회는 항상 환란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7년 대환란도 당할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대환란은 일반 환란과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진노의 시기이 기 때문에(참고 계6:12~17) 교회는 이 시기와 상관이 없다.



4. 환란전 휴거설(Pretribulational rupture theory)


환란 전 휴거설은 왈부드(J.F. Walvoord) 라이리(Charles Ryrie), 파인버그 (Paul Feinberg), 디이슨(Henry Thiessen), 스윈돌(Charles Swindoll), 맥아더 (John MacArthur),크리스웰(W.A. Criswell)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고, 한국 교계에도 상당히널리 퍼져있다. 필자도 환란 전 휴거설이 가장 성경적 인 견해라고 주장한다.
이 설은 교회가 7년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휴거되어 7년 대환란을 통과하지 않으며, 7년 대환란이 끝난 후 지상에 내려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가 그리스도의통치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이 설에 관한 중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계시록 6장 17절에는 7년 대환란이 하나님의 진노의 때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 5장 9절에는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 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계시록 3장 10절에는 교회(빌라델비아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는 장차 온 세계에 임할 환란의 때에서 면제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셋째, 데살 로니가후서 2장 1~12절에 따르면 막는 자, 즉 성령이 옮겨지면서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7년 대환란이 시작할 것을 보여준다.

39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면, 성령이 떠나가심으로 교회시대가 끝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따라서 환란 전 휴거설이 타당한 결론이다.


넷째, 환란 전 휴거설은 천년왕국에 거주할 자에 관해서 자연스런 이해를 제공 한다.

교회가 휴거되고 난 후에도 무수히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되고(계 7:9~14),

그들 가운데 7년 대환란 기간 중에 순교당하지 않은 성도들이 천년 왕 국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거주민이 될 것이다.


Ⅲ. 그밖의 종말론


지금까지 논의한 종말론 이외에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을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철저적 종말론 (consistent eschatology)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가 제시한 예수의 사역에 관한 종말론적 이해 를 알버트 슈바이처는 이른바 철저적 종말론으로 발전시켰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라고 믿고 자신의 생애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극적으로 도래할 것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왕국의 도래를 가져오기 위해 십자가에 죽었지만 여전히 왕국은 도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소망을 만들 어 내었지만 여전히 그의 재림은 없었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 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중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다고 하는 반면에 다드(C. H. Dodd)는 초월자가 이 세상에 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 것으로 본다. 예수의여러 가지 가르침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언젠가는 종말이 올 것이 라는 생각-을 시정하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구약에 예언된 여호와의 날은 미래 이지만, 신약에서는 그 날이 이미 도래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슈바이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만한 것이 거의 없지만, 다드의 주장은 옳은 면도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은 면이 지만, 미래적인 면을 도외시한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소망의 신탁(theology of hope)
1960년대에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이 창안한 소망의 신학은 종말론을 조직신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신학 전체의 주제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에 대한 시작이고 약속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희망이고, 교회는 이 미래를 현실화시키는 도구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적극적으로 오게 해야 한다. 그래서 소망의 신학은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Ⅳ. 마무리


이제까지 필자는 여러 가지 종말론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미 위에서 밝혔듯이 필자는 전천년설과 환란전 휴거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 또는 환란 통과설이나 환란중 휴거설 등도 이단적 견해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견해가 차이난다고 해서 이단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종말론은 성경의 영감과 무모성,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 삼위일체, 천국과 지옥의 실재(實在), 이신득의(以信得義) 등과 같이 핵심적인 교리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분명히 거듭나고, 거듭난 후에 제자로 서의 삶을 바로 살고 있다면 세상의 마지막이 언제 오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주님께서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순간마다 영적으로 깨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다.


주(註)
1. James Orr, The Progress of Dogma(London:Hodder and Stoughton, 1901), pp.24-27.
2. Orr, pp.28-29.
3. Timothy P.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American Premillennialism 18751982(Grand Rapids, MI:Zondervan, 1983)을 참고할 것.
4. Charles Hodge, Systematic Thelogy Grand Rapids, MI:Eerdmans, 1979(reprint),3:861.
5. D.H. Kromminga, The Millennium in the Church(Grand Rapids, MI:Eerdmans, 1948),p.20.
6. Loraine Boettner, The Milliennium(Philadelphia: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7), p.4;Greg Bahsen, The Prima Facie Acceptability of Postmillennialism, Journal of Christian Reconstruction 3(winter 1976-77); 63.
7. Loraine Boettner, Postmillennialism, in The Meaning of Millennium:Four Views, ed. By Robert G.Clouse(Downers Grove, IL:Intervarsity Press, 1977), pp.125-26.
8. Boettner, pp.127-28.
9. Boettner, p.123.
10. Boettner, p.118.
11. Jay E.Adams, The Time Is at Hand(Philadelphia: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0), pp.7-11.
12. 무천년설에 관해서는 William E.Cox, Amillennialism Today(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7)와 Anthony A. Hoekema, Amillennialism, in The Meaningof Millennium:Four Views, ed. By Robert G.Clouse, pp.155-187을 참고할 것.
13. Hoekema, p.161; Cox, p.70.
14. Hoekema, pp.162-163; Cox,pp.58-65.
15. Hoekema, p.168.
16. Cox,pp.99-109.
17. Cox,pp.71-75.
18. Cox,pp.109-111.
19. Cox,pp.34-56.
20. 무천년설의 문제점에 관하여는 Millard J.Erickson, Contemporary Options in Eschatology(Grand Rapids, MI:Baker Book House, 1977), pp.86-89와 J.F.Walvoord, The Millennial Kingdom(Grand Rapids, MI:Zondervan, 1959), pp.37-112을 참조할 것.
21. 예를 들면, Walter C.Kaiser, Back Toward the Future:Hints for Interpreting Biblical Prophecy(Grand Rapids, MI:Baker, 1989), Paul L.Tan, The Interpretation of Prophecy

(Ann Arbor, MI. Cushing-Malloy, 1974)등이 전 천년설의 관점에서 기술된 예언의 해석학이다.
22. 예를 들면, Louis Berkhof, 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Baker, 1950),pp.16, 19-20; C.K. Lehman, The Fulfillment of Prophecy(Scottdale, PA:Mennonite Publishing House, 1950), p.8 등이 그러하다.
23. George E.Ladd,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Eerdmans, 1952), p.138.
24. F.E.Hamilton, The Basis of Millennial Faith(Eerdmans, 1942), p.38.
25. John S.Feinberg, Salvation in the Old Testament in Tradition and Testament, ed. By John S. and Paul D. Feinberg(Moody Press, 1981), p.47.
26. Henry Alford, Alfords Greek Testament Baker, 1980(reprint), 4:7 32-33.
27. 물론 전천년설에도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구별이 있고, 또 전천년설주의자 가운데서 휴거의 시기에 관해서 견해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 상의 문자적 천년왕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공통적이다.
28. 요한계시록 20장 4절-6절에 관한 전천년설 입장의 중요 논문으로는 Jack S.Deere, Premillennialism in Revelation 20:4-6, Bibliotheca Sacra 135(1978):58-73을 참고하고, 이 부분에 관한 무천년설 입장의 중요 논문으로는 James A.Hughes, Revelation 20:4-6 and The Question of The Millennium,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35(1973); 281-302를 참고할 것.
29. Wilber B.Wallis, The Problem of an Intermediate Kingdom in I Cor 15:20-28,Journal of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18(1975):2 29-42; G.E.Ladd, HistoricPremillennialism, in The Meaning of Millennium, ed.
By R.G.Clouse, pp.38-39.
30. Charles C.Ryrie, The Basis of the Premillennial Faith(Neptune, N.J.:Loizeaux Brothers, 1953)을 참조할 것(본서는 보이스사에서 전천년설 신앙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음).
31. 전천년설에 대한 반론 및 그에 대한 해답으로는 J. Dwight Pentecost,Things to come(Zondervan, 1958), J. F. Walvoord, The Millennial kingdom(Zondervan, 1959)등을 참고할 것.
32. Gleason Archer, the Case for Midseventiethweek Rapture Position, inRapture:Pre, Mid, or PostTribulational? By Gleason Archer et al(Zondervan, 1984), pp, 139-42.
33. Norman B. Harrison, The End(Minneapolis:Minnesota:Harrison Service, 1941), p.75.
34. Archer, pp. 14-243
35. 환란후 휴거설에 관해서는 G. E. Ladd, The Blessed Hope(Eerdmans, 1956), RobertGundry, The Church and Tribulation(Zondervan, 1973), Douglas Moo, The case forthe Posttribulation Rapture Position, in Rapture:Pre, Mid, Posttribulational? Pp. 171-211등을 참조할 것.
36. Gundry, pp. 81-83, 134-139, 163-71; Moo, Response, in Repture, pp. 161-64.
37. 자세한 주장을 연구하려면, Paul Feinberg, The case for Pretribulation Rapture Position, in Rapture , pp.45-86; J. F. Walvoord, The Rapture Question(Zondervan, 1979); Charles Ryrie, What You Should know about Rapture(Moody Press, 1981)등을 참고할 것.
38. 계3:10에 관한 자세한 논문으로는 Jeffery Townsend, The Rapture in Rev.
3:10, Bibliotheca Sacra 137(1980), 252-66을 참고할 것.
39. 막는자가 누구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부분하지만 환란후 휴거설을 주장하 는 간드리도 성령으로 인정하고 있다(Gundry,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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