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웨 신앙과 성(性) 이해


글 / 방석종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구약학) 

 


서설과 문제 제기

 

오랫동안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는 경제 번영의 물결 속에서 "정신성"보다는 "물질성"을 추구하는 생활이 보편화되었고, 기존 전통과 가치 체계가 새로운 변화 속에서 그에 대한 비판 척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잇다. 설득과 공인(公認)의 위력은 대중 매체의 영상과 지면이 휘어잡고 있어, 종교적인 설교는 몸의 건강과 정신 수양을 위한 프로그램 역할에 불과하다.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원시적인 충동과 욕구를 좇는 파우스트적인 방황에서 인간들은 "성"과 "여성"을 노래하고 있다. 감각적인 성이 인간의 양심과 존엄성을 조롱하고 있다. 교회는 하던 버릇대로 울상을 지으면서 "금욕"이 미덕이라고 설교를 계속한다. "성애"는 매우 부덕한 것이라고 핀잔을 준다.


인간의 평등과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운운하면서 여전히 남녀의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 남아선호 경향이 그를 말해 주고 있다. 여성 해방을 말하면서 매춘 관광을 공식화 내지 방치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 따라 이혼과 피임, 그리고 혼전성교 반대를 하면서도 남녀의 성생활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에는 관심 밖이다. 각자가 삼류 소설을 읽고 알아서 "철"들라는 식이다.


그래서 주인이 기르는 개에게 "밥"은 주면서, "새끼"는 밖에서 얻으라는 격이라 할 수 있겠다. 사고와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생활은 자유분방하다는 이율배반적인 모순 속에 있다. 현대판 영지주의와 도케티즘적인 정황에서 무책임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서의 문명과 사상의 조화라는 이름 아래서 자기 편한대로 "성"(Sex)을 즐기면서 험담하는 바리새적인 위선을 성찰하고, 구약의 성 이해를 "성, 사랑, 결혼"이라는 삼중성의 구조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자연 종교와 다신적인 상황에서 풍요와 신성시된 "성"에게 유혹당하지 않고, 윤리적인 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신 야웨가 성애(에로티시즘)로 결합된 결혼을 축복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했다. 이집트는 왕가의 근친혼을, 가나안은 성전 매음 제도를, 그리고 보편적인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던 문화 속에서 이스라엘만큼은 근친혼을 멀리 했고, 결혼을 전제하는 성교를 허용했다. 그리고 금욕도 관능도 아닌 남녀 상호의 성애를 통한 일부일처제를 제도화하여 그의 윤리성을 강조했다. 이런 건전한 에로티시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 관계를 가능케 한 구체적인 예가 된다. 즉 남녀의 에로티시즘은 하나님과 인간의 아가페(사랑)의 모형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성"을 "성행위" 또는 남성과 여성의 "성차별"로 보지 않고, 야웨와 인간 관계 속에서 "거룩성(아가페), 사랑의 친화성(에로스), 그리고 육체의 성성(성행위, 성교)"의 삼중성의 통일체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창조 때 피조된 인간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런 삼중성의 원형질을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그런 본질은 상황에 따라 "경향적" 또는 "통제적(조화적)"인 성격을 띠어 "파괴적(비윤리적)"이거나 "생산적(윤리적)"이 된다. 요약하자면, 남녀의 성애(에로티시즘)가 "야웨 종교와 성 이해"의 핵심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가겠다.

 

 

야웨 하나님과 다른 신들


이스라엘인은 가나안 신, 엘 신, 바알 신 제단에서 오랜 세월 동안 야웨와 가나안 신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야웨가 자기 하나님인지, 바알이 자기 하나님인지 분간을 못하고 포도주에 취해서 축제만 즐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오경서와 예언서는 야웨 하나님을 자연 종교의 신들과 구별짓고 야웨의 특징들을 잘 규정하여 정리해 놓았다.


a. 우선 야웨는 삼중성의 통일체를 지닌다: "존재", "끊임없는 생성", 그리고 "역사"하는 분이다. 언제나 동일한 분이요 그 분의 이름은 존재 동사 "하야"(   )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이방민족들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과 그들의 생활을 간섭했으나, 나중에는 자연과 창조에 관련을 맺는다.


b. 야웨는 단독신(Einzelgott)이다. 그는 만신전에 소속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부인도, 아들도, 딸도 없다. 그는 지역이나 지방의 신이 아니다. 그는 그에게 결속된 인간 부류와 동행하는 신이다. 그는 언제나 인간 모습으로 소개되며, 인간 성격을 가진다. 때로 그는 남성으로 표시되지만, 그는 성(性)에 제한되지 않는다. 성을 창조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c. 야웨는 인간 성격을 가지고 현현하신다. 사랑과 미움, 기쁨과 염려, 용서와 복수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희랍의 신들처럼 인간의 약점이나 실수는 없는 분이다. 조롱 당하는 신이 아니다. 그는 때로 격정적이고 격노한다. 인간은 이런 행위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평가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침묵으로 이해할 뿐이다.


d. 이런 가운데서 야웨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윤리적인 의지이다. 그는 무조건적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는 분이다. 야웨는 법과 공의, 윤리와 도덕성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명령은 인간과 그 자신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생활과의 관계를 맺게 한다.

 


다른 신들과 야웨의 관계


R. Patai, The Goddess Aschera, JNES 24(1965), 37- 52에 보면 야웨 옆에 제단의 모신(母神) 아세라가 나무 기둥 형태로 있음을 본다. 아스타르트는 바벨론 여신 이쉬타르와도 일치한다. 그것은 성적인 제단을 가진 풍요의 여신이었다. 나중에 이쉬타르의 전쟁행위는 후퇴되었다. 여신의 조각들은 성의 표시를 나타낸다. 이런 여신은 시돈 여신 아스다롯,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과 일치한다. 역사적으로 야웨와 가나안의 만신전이 이집트 나일강 섬 엘레판틴에서 예배되었다고 한다(주전 525년 벧엘 아나트, 벧엘 아쉼). 그러나 야웨 신앙에서 그것은 이방적인 것이 되었으며,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상을 종합 요약하면: 야웨 종교는 항상 활동적인 하나님, 단독자, 특정지역과 민족이 아닌 인류에게 다가오는 인간 모습의 하나님, 성을 창조하는 창조자,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동형론적인 다양성, 윤리적인 의지를 가지고 인간에게 명령하는 분, 즉 자기에게만 아니라, 이웃과 인간 공동체 생활과의 교제를 요구하는 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은 가족을 거느린 신, 성적인 제단과 풍요를 기원하는 물질적인 신, 윤리성이 희박한 욕구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신들이다.

 

  

성서에 나타난 성(性)

 

인간 창조와 성의 삼중성

태초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어주셨지만, 그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만나는 가운데서 인간이 생산되었다(창 1,26-27; 2,7; 2,21-23; 욥 10,10-12). 그런데 위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방법이 다양하다: 1) 하나님은 재료 없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창 1,26-27). 2) 하나님은 흙과 생기(영)를 결합시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2,7). 3) 하나님이 인체의 부분을 가지고 여자를 지으셨다(창 2,22). 그 다음 마지막으로 4) 하나님은 인간의 정액을 여인의 몸 안에 넣어 인간(유아)을 출산시켰다(욥 10,10-11).


이런 하나님의 인간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지으셨다(창 1,26-27). 그런 창조는 창2,7에도 나온다. 그런데 인간들 가운데서 인간으로서 "남편과 아내"로 만나는 이야기는 친화의 형식과 결혼 축문의 형식으로 서술되는 것도 있다(창 2,22). 이런 남편과 아내는 생리적인 수단을 통해서, 즉 성행위를 가진 후 아이를 출산한다(욥 10,11). 남녀의 동등한 인간됨, 하나님의 형상과 영을 받음, 남편과 아내의 에로스적인 결합과 단 둘만의 사랑의 환희(기쁨), 그리고 성행위 속에서 신비한 기적이 나타나는 생명의 선물 등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성행위는 삼중성을 형성시킨다. 1) 거룩성, 2) 사랑의 친화성, 3) 육체의 성성(性性)이다.


태초부터 피조된 인간은 이런 삼중성의 조화된 복합체이다. 따라서 인간 생명체는 이런 3 요소가 유전인자로 구비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성성을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거나 어느 부분으로 치우치게 하면 분열 현상이 일어나며, 파괴 상태를 초래한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와 바울, 중세기 교부, 종교개혁자들도 성성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성성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가르치고 있다. 

 

 

구약과 신약에서 성 이해


인간의 성성(sexuality)은 3가지 주의(主義)와 경향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금욕주의", 둘째는 "성적인 쾌락주의(관능주의)" 그리고 마지막은 "건전한 에로티시즘"이다.

이런 성행위에 대한 각각 다른 입장들을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성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성적인 욕구에 대해서 긍정적인 해결점을 찾는 분들은 예수와 초대교회의 바울,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와 칼빈을 말할 수 있다. 즉 성생활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해서는 안 되며, 평등한 상태에서 남녀가 성생활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성은 고상한 행위로서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성을 죄의식과 연결시켰으며, 이런 생각은 금욕주의, 육신 경멸, 여성 억압으로 확대되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성행위는 출산을 목적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는 피임 반대, 혼전성교 반대, 이혼 반대의 원칙을 내놓았고, 이것은 로마 천주교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또한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관계에 대해서 논한다면 창1,27; 2,8에서는 인간(일반 사람)과 그리고 남성(   )과 여성(   )의 창조를 서술하는데, 창2,18.23에서는 여자가 조력자로서 남자와 일치하는 상대편 인간이 됨을 말하고, 남편과 함께 하는 아내로서 서술되고 있다. 남자와 일치하는 협조자는 성적인 존재로서 여인이 아니다(어거스틴 반대). 농사일을 도와주는 노동력으로서 여인도 아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공동체(Personale Gemeinschaft)를 말한다. 즉 육체적-정신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노동할 때는 남편과 아내는 상호적인 도움이 된다. 상호적인 이해, 서로 함께 하는 기쁨, 휴식을 취하는 공동체 관계이다. 창2,23은 아내를 환대하는 남편의 기쁨과 친화의 표현 공식이 나온다. 이것은 여인에 대한 성애(Erothik)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서로 함께 하는 인간 배필 창조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인간됨(Menschsein)을 위해서는 여자의 중요성이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 토고(Togo)의 Ewe 부족들의 원시적인 창조 신화도 이와 비슷하다. 루터는 창2,23과 아가서의 사랑과 일치하는 결혼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루터의 여인에 대한 것은 모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간음과 유기 사유를 제외하고는 이혼도, 재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 시대 호세아는 간음한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불러다가 그녀를 데리고 살았다(호2,7; 3,1;3,3;4,14 참조). 이런 상황은 사회적으로 성해방(Sex liberation)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성행위의 테크닉(Technik), 사랑 만들기(Making love), 성행위 하기(Having Sex), 혼전 성행위 등 여러 가지 성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상호이해와 묵인 하에서 이런 일들이 반복될 수도 있고, 그리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성해방"을 "죄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해방" 뒤에 따르는 징벌이 없다 해도 누구나 이런 성해방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할 고뇌가 있다. 양심의 가책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인 상습적인 행동은 호세아 말대로 창기적인 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호 4,14).

 

 

사랑과 결혼

 

히브리인의 사랑 이해

히브리인의 성적인 사랑은 "아하브"(   ) 동사로 표현된다. 아하브는 순수한 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갈망하는 차원이 더 강하다. 이삭은 리브가를 구(求)했다(창 24,67), 야곱은 라헬을 (창 29,18.20.30), 삼손은 블레셋 여인(삿 14,16; 16,4.15)을 구했다. 특히 아가서는 사랑의 병(아 2,5)을 말하며,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했다(아 5,8).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아 2,7; 3,5; 8,4). 이런 집착적인 행동은 성적인 것이 아니다. 에로틱한 것, 즉 성애(Sinnliches Erleben)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사랑은 상호성을 가진다. 그래서 이스라엘 젊은 처녀는 그가 고른 남자를 속으로 뜨겁게 사랑한다(아 1,3). 그는 남자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아 1,7)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아 3,1). 길에서 혹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두리번거린다(아 3,2). 자기 어머니 집으로 인도해서 데리고 들어간다(아 3,4). 이스라엘인들은 사랑을 느끼면 적극적이고 행동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a. 외모의 아름다움

미는 이성에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다. 미에 대한 단어는 "야파"(   )이다. 신체적인 아름다움은 대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교만으로 빠질수도 있다(겔 27,3이하; 28; 사 3,16-24).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움은 공식적인 표현 문구로 증명된다: 너는 얼마나 예쁘냐(아 1,15이하)! 너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예쁘다(아 1,8; 5,9; 6,1). 너는 미인이다(아 2,10.13).

그러나 예언서에서는 아름다움은 음행의 죄를 짓고 징벌을 받을 수 있는 모티브로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운 아이였지만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여 명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는 아름다움을 믿고 음행을 하여 징벌을 받는다(겔 16,13-15; 렘 4,30 참고). 창6,2에 보면 거인족들이 아름다움을 보고 여인들을 고른다; 창세기 족장들도 하나같이 예쁜 여인들을 택해서 편애를 하고 있다(창 12,11.14; 24,16);  여인의 아름다움은 남성의 눈을 흐리게 하며, 그릇된 결단을 하게 오도한다(창 6,1-4). 때로는 남자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한다(창 12,11-14).

 

b. 완전한 인간

구약에서는 아름다움과 재능을 갖춘 남자들이 나온다. 요셉, 다윗, 압살롬과 다니엘 등이 있다. 아름다운 남자들은 혈색이 좋고 곡선미가 있다(요셉의 경우). 창 39,6을 보면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다" 다윗(주전 10세기의 인간)은 혈색이 붉고, 눈이 특출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삼상 16,12; 17,42). 그는 악기 하아프를 타고 호기와 용기가 남다르고 무예에 능했다. 그리고 구변이 유창했다(삼상 16,18). 압살롬은(삼하 14,25) 온몸에 흠이 없었다. 맑은 몸매이며, 숱이 많은 머리카락으로 유명했다(연[年] 23kg의 머리카락). 다니엘은(주전 3-2세기) 흠이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천부적인 재능, 총명을 갖추었고, 이해력이 빠른 충성스런 청년이었다.


아가서에 나타난 아름다움(아 6,10-15)을 살펴보면, 남성의 아름다움은 검은 머리털, 젖같이 흰 눈빛, 금같은 얼굴 빛, 신장이 크고 곡선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힘과 부드러움(감미로움)이 조화된 모습을 갖춘다. 여인의 아름다움은(아 7,2-6; 6,5-7) 머리털이 양털처럼 기름지고 숱이 많은 곱슬머리, 유방이 풍부하며 석류처럼 붉고 윤이 나는 얼굴, 풍만한 육체, 남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처녀의 콧대 높은 태도를 취한 상이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은 이차적이다. 애교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잠 11,22; 31,30). 무엇보다 현명한 여인이 칭찬을 얻는다(잠 31,30).


이스라엘에서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은 건강하고 다듬어진 체격, 영양공급이 잘된 육체,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 세상을 꿰뚫고 적응하는 센스가 있는 지혜로움에 있다. 이런 남녀가 에로틱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보여진다.

 

 

구약에서의 결혼제도


인간이 성인이 되면, 짝을 찾아 동반자를 찾는 것은 남녀가 서로 원하기 때문이다(창 3,16). 바울은 결혼을 "남녀의 성적인 욕구"로까지 보고 있으나(고전 7,1-2),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긴박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일부일처제의 결혼을 보장한다(마 19,4). 구약에서 결혼은 부모가 맺어 주는 중매 결혼이 우선적이다. 이것은 법에 근거한 계약이요, 결혼의 신실성을 지켜야하는 의무이다. 따라서 이런 계약은 일부일처제를 말한다(전 9,9; 잠 5,18). 히브리인의 결혼은 일부일처제가 지배적이나, 동시에 일부다처제 형태의 결혼도 병존했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개별적으로 다루겠다.

 

 베트 아브(      시댁, 시집)

히브리어로 결혼은 하툰나(    ),    (결혼하다)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하탄은 "사위" 또는 "신랑"의 뜻도 있다. 이는 약혼 남자로도 불린다. 그는 특별한 기쁨을 가진 유형의 인간이다(사 62,5 비교). 히브리인 가정에는 장수하는 증조부까지 쳐서 4대가 함께 살았다. 남편은 장인에게 신부값을 지불한다(출 22,16; 신 22,29: 50 세겔). 남편은 보상금으로써 아내 될 약혼녀를 법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얻는다(   ). 야웨는 결혼 계약의 증인이 된다(겔 16,8; 말 2,14; 아 3,11). 결혼 절차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다(신 20,7;28,30). 그 다음 그는 아내를 취한다(출 21,10;레 21,7;호 1,2;창 4,19).

 

 축첩 제도(출 21,7-11)

이스라엘인들은 본처 이외 다른 새 여자를 들여 사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일을 제도적으로 설정했다. 결혼 절차를 밟아야만 여인과 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살다가 싫어져서, 상관하지 않을지라도, 생활비는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여자 아버지에게 주었던 보상금은 받지 못하고, 그 여자를 해방시켜야 한다(출 21,7이하). 축첩 제도는 법적으로 공식적이었으며 일면 인도적인 측면도 있다. 현재 이른바 사적인 원조교제보다는 매우 공식적인 제도인 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축첩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는 일부다처와는 다른 것 같다. 여인이 성교를 위해 남자에게 팔리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여인이 사회적으로 "여 성 성"이라는 조건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불평등함이 문제로 대두되는 사례이다.

 

 일부다처제

창세기에서 족장들은 여러 부인들을 거느렸고, 혈연적으로 사촌 또는 외사촌 누이들과 결혼했다. 일부일처제와 근친 결혼 금기를 위반한 사례이다. 족장들은 한편으로 정치적인 군주로서(예: 기드온 사사의 아들 70명[삿 8,30]; 다윗의 첩들[삼하 5,13]; 솔로몬은 공식적인 아내 700명과 첩 300명[왕상 11,3]을 두었다고 한다) 여러 부인을 두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족장들은 근친결혼을 통해 족장 지도 체제를 이었다.


근친혼은 레위기 18장으로서 보다는 이집트 왕가의 왕권적인 배경에서 풀어야 할 사례로 보인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 모습과 대립되는 왕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하겠다. 고대 이집트(주전 16세기)에서 아모제는 자기 누이 노프레타리와 결혼했다. 또 아모제와 노프레타리의 부모는 서로 남매간이었다. 왕의 아내들은 "신의 아내"로서 왕(오빠)과 혼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근친혼은 중단되었다가 주전 330-30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팔레스틴 지역을 장악했던 히브리인의 군주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은 정치적으로 이집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재난 때마다 이집트로 가서 원조를 구하려고 했던 일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족장 시대 때 지도층의 결혼이 이집트의 왕권(왕실)의 근친혼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창세기 족장들의 근친혼과 일부다처제는 그 시대의 특수성으로 제한시켜 보게 된다. 아무튼 처첩의 수는 왕의 신분과 걸맞는 품위의 과시였다.


그러나 왕조 시대 평민들은 처첩이 많지 않았다(삼상 1,2참조). 축첩과 다처제는 한 남편과 여러 여자의 관계라는 등식 속에서 남녀의 평등과 동등함을 깨뜨리는 결과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1) 자녀들의 고통 문제, 2) 여성들끼리 자녀들에 대한 질투 문제, 3) 자녀들의 상속 문제, 4) 두 여인이 한 남편으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문제를 안고 있다.

 

 시형제 결혼 제도

이는 창세기부터 예수 시대까지 계속되었던 것같다. 신 25,5-10에 시형제 결혼 제도가 나온다. 법적으로 과부와 결혼해서 사는 것이나, 이는 대가족에서 형제의 혈연, 즉 장자의 후손을 이으려는 결혼 제도이다. 레 18,6-25, 특히 16절에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는 규정이 있다. 시형제 결혼은 "과부된 형제의 아내와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다. 장자의 후손을 존속시키는 목적이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결혼은 선택의 여지도 있었다("신 벗긴 자의 집": 신 25,8-9 참조). 창 38,1-11에 최초의 동서결혼(Schwagerehe)이 언급되고 있다.

 

 근친결혼

위에서 족장들의 결혼(창 24,7-67: 리브가는 아브라함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딸, 이삭은 작은 어머니의 아들의 딸과 결혼; 창 29,16-18.20: 라헬은 야곱의 외사촌 누이가 됨)은 이집트의 왕가처럼 친형제와는 다른 사촌형제이상의 형제들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고로 족장들의 근친결혼은 레 18장의 가족 공동체의 성윤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삼하 13,1-15는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한 것은 다말의 입을 통해서 "추행"으로 거절되었었다(삼하 13,12). 이는 레 18,11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이니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법을 어긴 것이다.

 

문제점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이복누이라고 하면서 바로 왕으로부터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했을 때, 사라가 정말로 아브라함의 누이였는가라는 문제는 E. 리취와 함께 좀더 상세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다시 암논으로 돌아가서 보면, 암논은 이중적으로 죄를 지었다: 1) 이복누이를 애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2) 여인과 상호 사랑보다는 일방적으로 육체적인 욕망으로 다말을 대한 점이다(이는 삼하 11장에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결혼 문제

 

성의 신학적인 해석


성성과 성: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남녀의 성교행위를 의미한다. 우가릿 문서에서 바알이 아나트를 알았고, 아나트가 임신했다. 여기서 앎과 알고 있음은 사랑을 의미한다. 창 4,1.17.25; 38,26; 삿10,25 등에 야다(   ) 동사가 성행위로 쓰인다. 결혼 첫날 밤 동침(Beischlaf)할 때, 면사포를 벗긴다는 표현은 "강제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는 성행위의 완곡한 어법이다.


이런 성행위는 욥 10,10에 잘 서술되고 있다. 이런 행위는 남편(아버지)과 아내(어머니)의 성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와 일치하고 있다. 아버지의 정액과 어머니의 수태에서 아기가 일인칭 "나"로 고백한다. 이것은 "히에로스 가모스(바알의 신성혼)"을 비신화화 시킨 증언이다. 성을 신성시하되 하나님의 피조체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은혜로 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권면을 받고, 생명은 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욥 10,12).


성애의 분비물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생명과 영의 유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창조의 기적에 대해서 신비함과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시 139,13-16). 이런 고백은 창 1,26-27의 하나님의 형상을 알고 있는 것이다(창 2,7 과도 일치됨). 창 2,23의 남녀의 사랑의 결합을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부모의 성행위는 성적인 쾌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의 삼중성, 하나님의 형상과의 일치, 일부일처적인 사랑의 행위 그리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의 모습을 준비하는 신성한 만남이다. 그래서 가나안의 바알 종교도 신들의 결합을 "야다"(   , 알다)라는 성행위 동사를 쓰고 있지 않았던가!

 

 

공동체에서의 성


야웨는 자신의 뜻을 인간의 마음으로 전달하고, 윤리적인 의지와 함께 인류/인간 공동체를 지도하는 분이다. 그는 인간에게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이웃과 인간 공동체와의 관계를 요구한다. 이런 하나님은 자기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따라서 인간은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창 1,26). 그와 동시에 친화 형식에서 창조된 남편과 아내는 사랑(성애)의 결합으로 인한 창조를 가르치며, 남녀의 평등성과 여인의 귀중함을 서술한다. 히브리인의 결혼 제도는 가족 공동체와 연대 의식을 가진다. 성적인 즐거움을 위해 여인을 취하더라도, 꼭 결혼 절차를 밟아 보상과 책임을 진다. 어떤 경우에도, 남자가 인도적인 배려를 하도록 법으로 제정한 것이 돋보인다(출 21,7이하). 아가서에는 남녀의 에로틱한 사랑(성애)과 결혼을 희곡적으로 화려하게 서술하고 있다.특히 남녀의 교제는 전능한 힘에 의해 친밀하고도, 관능적으로 나타나며, 서로의 그리움, 서로가 쏟아 붓는 열정과 헌신, 그리고 서로의 결합에 대한 기쁨을 찬미한다(G. 포오러, 구약성서개론, 하권, 100). 남녀의 사랑은 서로가 자유롭게 원하는 자유연애로 볼 수 있다. 결혼식에서 보여주는 신랑과 신부는 때로는 뇌쇄적이고, 때로는 선망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아 3,6-11; 4,8.9-11; 4,12-5,1): 남녀는 상대방의 사랑을 자극하기 위해 몸단장을 한다. 향료를 바르고, 매력적인 몸매를 가꾼다. 믿음직한 거동, 접근하고 넘볼 수 없는 위엄, 잘 준비한 결혼 예물과 절차들이 나온다. 예수 이후 바울과 고대 교부들이 "성과 성애"를 금욕적으로 제약하여 죄악시했고, 이방 종교가 "성과 성행위"를 신화화하여 비윤리적인 쾌락주의로 떨어뜨렸어도, 구약 특히 아가서는 "성과 성애"를 긍정적으로 보며, 에로티시즘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켰다. 이런 에로티시즘의 모티프(Motiv)는 구약 예언자들 호세아, 예레미야에게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적 결혼 관계로 취해졌으며, 신약에서 바울은 하나님(예수)을 남편으로, 교회를 신부로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에로티시즘의 경험 없이는 아가페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며, 하나님 자신도 에덴 동산에서 에로스의 성취는 목격했으면서, 그가 바라는 아가페는 이루지 못했던 역사를 후회하셨다고 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가페의 열쇠로 에로스를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향하도록 자유를 허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서 남녀의 에로틱한 사랑이 사건의 중심이 되는 예가 허다하기 때문이다(예: 룻과 보아스의 결혼, 다위과 밧세바의 결혼, 족장들과 족장부인의 아리따움).

 


공동체 파괴 행위로서 성(Sex)

 

남녀의 아름다움과 성적인 매력은 서로간의 사랑에서는 건전하고 지속적이지만, 일방적인 사랑에서 행하여질 때에는 폭력이 된다. 서로간의 신뢰가 깨지고 자유방임하게 되면, 간음과 불륜의 행위가 반복된다. 공동체의 의식과 책임을 망각하면, 수치와 망신을 사게 된다. 즉각적인 심판과 형벌이 내리지 않는다고, 그런 행위들이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악마적인 행위에 끌리는 자신의 생활과 판단이 서서히 후회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삼하 13,1-15에서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한 것은 가족 공동체의 파괴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호 2,4-15; 4,13이하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은 제사장과 이방인을 찾아 성행위를 하여 아이를 잉태하고 상습적인 간음행위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출 5,2-5). "서로 함께 사는 인생" 없이 결합된 성행위는 악마적이기 때문이다(출 21,7 비교; K. Barth, Dogmatik III/4, 148). 이런 행위는 가나안 자연 종교에서는 성전매음 제사 행위로 제도화되었다. 그 외에 가족 공동체 안의 여인들과의 성행위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어머니와 성행위(레 18,8), 누이들(레 18,9), 손녀와 외손녀(레 18,10), 고모(레 18,12), 이모(레 18,13), 형수/제수(레 18,14), 며느리(레 18,15), 여 조카(레 18,17), 처제(레 18,22), 이웃 아내들(레 18,20)와의 성행위, 동성애(레 18,22), 짐승과 수간(레 18,23) 행위는 금지된 것들이요,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서 행해졌던 일들이다. 이혼한 여인이 재혼하면, 그 아내와 동침할 수 없고, 전 남편에게 다시 올 수도 없다(신 24,1-4). 

 

 

결론

 

야웨는 가나안 신들이나 이집트 신들과는 다르게 단독자이다. 그는 성을 창조하는 창조주로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과 공동체와의 열린 교제를 명령한다. 그는 윤리적인 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삼중적인 통일체로 창조했다: 1) 아가페적인 거룩성, 2) 에롯적인 친화성, 3) 아름다운 육체의 성성(Sexualitaet)이다. 필자는 인간창조에 관한 성서구절을 통전론적인 방법(holistische Methode, Holism)으로 모아서 연결시켜서 해석했다. 이를테면 창 1,26-27; 2,7,2,22-23; 욥 10,10-12에서 인간의 다양한 창조들을 고찰했다. 인간의 성성이 성 이해의 기초가 될 경우, 인간은 성성에 대해서는 금욕적, 쾌락적 그리고 성애적(에로틱)인 경향을 가질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성을 죄악시했던 초대교회의 바울, 고대교부들의 견해를 보았고, 사랑과 일치하는 결혼을 긍정했던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도 살폈다. 그리고 남녀의 공동 책임성과 성해방에 대해서 관대했던 예언자 호세아의 사상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성해방을 죄에서의 해방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히브리인의 사랑은 죽음과 비교될 만큼 강했다. 사랑을 위해 서로 그리워하며, 열정적-헌신적이고, 서로의 결합을 기뻐했다. 외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도, 아름다움의 음행의 죄를 경고한다. 완전한 아름다움은 건강미, 가꾸어진 몸매와 체격, 영양 공급이 잘 된 육체, 사랑을 자극하는 매력, 부드러운 품성과 지혜와 충성심에서 나타난다.


남녀의 성행위는 결혼이 전제된 것이며, 남녀의 상호의 기쁨을 중시한다. 결혼한 여자는 가족과 연대의식을 갖는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를 표준화했다. 근친혼은 배척되었다. 축첩제도에서 남자는 여자의 생활을 보장했고, 책임 의식과 인도적인 배려가 강했다. 성교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결혼절차를 밟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성교행위는 신성시하나, 인간 출생은 비신화화되었고, 인간은 뭐라해도 하나님의 피조체이다(욥 10,10-12). 성애는 하나님과 인간 교제의 모티프로 적용되었으며, 이런 에로티시즘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무관심했던 성의 성서적인 의미를 포괄적으로 살피면서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중시해야 하겠다: 1) 인간은 창조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 사랑을 부여받은 거룩성이 있다; 2) 남녀는 서로 사랑의 힘으로 끌리는 그리움, 열정과 헌신 그리고 결합하는 기쁨으로 인해 일부일처제의 결혼을 최상으로 인정한다; 3) 서로가 기뻐하는 성애에서 남녀의 평등을  인식하게 되어 있다고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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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Barth, Dogmatik II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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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기, "기독교의 성 이해; 기독교 성 윤리의 정립을 향하여", 기독교사상 (1996, 8월), 10-25.

방석종, "유다 지파의 계보 형성 연구", 신학과 세계(1992, 가을), 9-38.

질의 응답

 


질문1 : 이번에 성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어 관심있게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성서에 나타난 성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성의 삼중성, 즉 거룩성과 성의 친화성, 육체의 성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궁금한 부분은 III장 1.에 있습니다. "인간이 성성을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거나 어느 부분으로 치우치게 하면 균열 현상이 일어나며 파괴 상태를 초래한다." 이것은 결국 에로스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삼중성은, 창 2-3장의 창조 기사에 적용한다면 인간이 창조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형상, 사랑의 친화성은 남자로부터 갈비뼈를 취하는 과정, 육체의 성성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라는 사랑의 찬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삼중성은 하나의 과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에로스가 파괴된다고 하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합니까?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만 일단 적용을 한다면 에로스의 파괴는 아름답게 창조된 여자를 보고 찬미를 하지만 불순종에 의해서 결국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에로스의 파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 에로스는 남녀의 평등성 속에서 서로 즐거움을 찾는 행위인데, 이것을 죄악시하여 부정하면서 어떤 거룩성만 강조하게 되면 금욕을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향해 가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것도 남녀의 평등한 결합 속에서 경험이 지속적으로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데, 그것을 희생시키면서 하나님의 것만 강조하게 되면 중세기의 금욕적인 형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양방향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어느 한 사람이 사랑이 없이 일방적으로 자꾸 강요를 한다면 이러한 것은 섹스 추구이지 사랑이나 거룩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관능적 사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에로틱한 것은 남녀의 평등과 상호 기쁨과 행복을 유지하면서 거룩성 쪽으로 향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무시할 경우, 에로스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성서에 이런 것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전체를 통해 암시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질문2 : 교수님의 논문에서 가장 강조하시는 것은 상호간의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남성의 폭력적인 행위를 제외한 모든 성행위를 사랑으로 간주하게 되지는 않습니까? 과연 사랑으로 인한 평등성의 상호 관계가 구약에서 강조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결론 앞에서 완전한 인간을 규정하실 때 남성의 완전한 인간성과 여성의 완전한 인간성을 제시해 주셨고, 그 중 여성의 완전한 인간상으로서 잠 30장의 현명한 여인에 대한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 본문조차도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들이 원하는 스타일의 여성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때 구약에서 과연 평등한 성행위가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여자가 자신이 사랑을 해서 남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제서야 그 평등함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히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여자가 거기에 응했을 때, 그리고 살다보니 정이 드는 것을 평등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야웨 종교와 성 이해"라는 전체 주제 속에서 상호간의 사랑이 구약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 성서에서 여자가 "즐겁다"라고 표현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대개 남자의 입장에서 표현이 되고 여자는 수긍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여자가 이야기한 것은 제게는 발견이 안 되었습니다.

 


질문2 : (이어서) 오히려 성으로 인한 폭력적인 사례들이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다윗의 경우, 정치적인 목적으로 많은 여성들을 이용해 왔고,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거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면서 야웨 종교 속에서 나타난 사랑의 평등성이라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됩니다.

 

답변 : 다윗에게 있어서 사랑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건전한 에로스 경우도 있지만, 성 폭력자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솔직한 인간의 모습인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평등한 사랑을 한다고 해서 일생 동안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평등한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모델로 제시가 되는 것이지 그것이 현실 자체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방향성과 이론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상적인 사랑만 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할 것 같습니다.

 


질문3 : 제 생각으로는 성서에서는 성에 대해서 굉장히 폭력적이고, 여성이 희생을 당하는 본문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은 창세기에서 이미 에로스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답변 : 창세기에서 에로스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원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과 통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에 구원받는 것처럼 파괴된 에로스 사랑을 회복할 때에 거기에서 인간의 거룩성이 회복된다고 생각됩니다. 성과 거룩성을 따로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조화된 통체성에서 볼 때에 그것이 일치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성서를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4 : (한정선 교수) 구약 성서에 나오는 그 모습을 사실대로 기술해 주신 너무나 좋은 논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텍스트를 오늘날의 맥락에서 묻는 도전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기록한 성서를 또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것은 아니냐는 도전을 저도 감히 하고 싶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오늘날의 여성 신학의 도전을 받았을 때 과연 방 박사님이 어떤 의미 있는 대답을 해 주실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차별받는 여성의 문제, 여성 해방의 문제에 대해서 여성신학자들이 도전하는 물음들에 대한 답이 이 글에는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III.1.에서 "에로스의 경험 없이 아가페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서의 실례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논리적 정당성은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에로스의 경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로서는 그 에로스가 아가페에로의 불가피한 통로이어야 하는 지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답변 :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 관계, 남편과 아내 관계로, 유비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적으로 에로스적인 사랑과 체험을 한 사람만이 이 말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를 개념적으로 설명하라는 질문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개념이 동원이 될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계약 관계를 결혼 관계로 비유적으로 취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경험은 알 수 없지만, 인간간의 관계로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들에게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러해야 되지 않겠냐 하는 식으로 비유적으로 한 얘기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제한된 시간에 이런 정도로만 제시를 하려고 합니다. 아가페와 에로스를 논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저로서는 우선 성 이해에 주제를 두었기 때문에 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여러 가지 이해를 시도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여성 신학자가 가부장적인 틀에서 벗어나서 이런 사랑 문제를 내놓는다면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보셨는데, 예를 든다면 어떤 질문을 들 수 있을까요?

 


질문4 : (이어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방 박사님께서는 성의 삼중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 일부일처제를 구약이 확립시켰다, 아름다운 육체의 모습', 이 세 가지를 골자로 이야기를 전개하셨습니다. 제가 여성 신학자의 입장에서 질문을 한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남녀를 창조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겨우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2장에서는 갈비뼈, 그리고 1장에서는 재료 없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했다고 하는 정도인데, 그게 무엇인가? 좀더 내용을 구체적으로 일러 달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답변 : 천상적인 창조인데, 제가 성과 지혜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선한 마음과 지혜로운 행동, 그것으로써 해석이 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여성과 남성으로 분리가 될 지라도 평등하게 태어날 때부터 선한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할 수 있다', 이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형태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 품질, 즉 속성 등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가부장적, 혹은 여성적인 것의 구별은 없다고 보입니다. 인간의 품질에 관한 얘기니까요.

 


질문4 : (이어서)한 가지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야웨 하나님은 남성신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성 신학자들은 '우리는 이제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너무 진절머리가 난다. 가부장적인 차별을 많이 당했는데, 우리는 이제 어머니 하나님을 찾겠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 속에서 진정으로 여성의 모습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성서의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성서 속에서 그런 모습을 찾고 싶다는 도전을 합니다. '어머니 하나님을 찾겠다', 아니면 최소한 '어머니 아버지 하나님을 찾겠다'라고 말입니다.

 

답변 :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성의 제약을 받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인간 속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온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을 성으로 억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성에 제약되는 분은 아니시거든요. 성은 피조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남성으로 표현되더라도 그것은 이방적이거나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신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질문4 : (이어서)오히려 여신과 남신을 모두를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다신교들, 그런 문화가 오히려 남녀 평등적일 수도 있죠. 물론, 타락한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 자체 속에, 우리가 가장 경배하고자 하는 그 존재 속에, 우리의 모든 사회 생활적인 규범을 이끌어야 하는 그 본질 속에, 여성의 이야기가 50%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답변 : 모계 사회와 부계 사회로서 고대에도 그런 신화 영역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은 성의 제한 속에 헤게모니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서에서 남성으로 표현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여성 신학자들이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표현된 것이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거든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든 창조주이지,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는 성의 표현으로 되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 폰 라트 등에 의해 말해집니다.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데, 여성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자꾸 모계권과 부계권을 의식해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싸움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성의 옷을 입혀서는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여성신학을 제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질문5 : 교수님 강의 감사드립니다. 논문의 전체 내용을 제 말로 요약한다면, 성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동안 육체에 대해서 부정하고 거룩성만 강조했던 것에 반해서 성을 긍정적으로 말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또 육체에 대해서 긍정하게 하면서도 육체의 타락으로 이어지지 않는 거룩성을 말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의 입장에 서 있는 성의 개념을 말씀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께서는, '구약 성서에서 인간이 간음이나 어떤 성행위에 대한 잘못을 했을 때 심판이 내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죄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죄의식은 남아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이 죄 의식이 구약 성서적인 관점에서 원죄적인 죄의식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도덕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죄의식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답변 : 양자가 다 해당이 됩니다.

창조 질서에서 보면 일부일처제적인 사랑의 고백이 아담과 이브의 관계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창조 질서와 연결이 됩니다. 또 결혼 제도를 통해서 어떤 성행위가 밖에서 행해질 때 이것은 결혼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즉, 남녀의 신뢰 관계를 저버리고, 자기네들이 계약을 맺은 것을 소홀히 다루면서 다른 사람과의 성행위가 맺어질 때 그것은 결혼 제도 상에서 죄로 심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하면서 부인과 사랑 행위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이 된 창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부일처제가 암시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결혼 제도가 형성이 된 거죠. 거기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형태는 간음죄라든지 불신실한 행동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위적인 인간의 결혼 제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 질서에서 출발된 것이기 때문이죠.

 


질문6 : "야웨 종교와 성 이해"가 제목이었는데, 만약에 제목이 "야웨와 성 이해"였다면 내용이 어떻게 정리될까요?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내용은 성, 사랑, 결혼인데, 그래서 결혼이 전제된 사랑, 사랑이 전제된 성, 이렇게 해서 서로 조건을 단다면 가장 이상적인 성에 대한 표현은 결혼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만약에 하나님의 성이 하나님이 남성이다, 여성이다 구분을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음양이 나누어지기 이전에 태극의 모양은 음양을 함께 가지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은 음양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양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음양이 합일되는 모습이 결혼이라고 본다면 그 결혼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거기에 처음에 태극으로 모양을 갖추기 위한 것은 그리스도와 세상의 모든 성도들, 즉 신부, 이런 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양성의 하나님을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라고 하는데 편의상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대표성이지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신학자들이 왜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없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이 아니고 코멘트였습니다.

 


질문7 : 저는 지금 말씀하신 분과, 그리고 교수님의 의견과는 좀 다른 의견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성신학자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누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인간은 상징을 내세우고, 상징에 의해서 영향을 받거든요. 그 동안에 텍스트 자체가 남성적인 상징을 사용하고 남성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전해 내려오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여성신학자들이 밝히려고 한 것이지, 너희들이 그 동안 '아버지'를 사용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어머니'를 사용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구체적인 것을 묻고 싶은 면이 있습니다. V. 2.을 보면 "성적인 즐거움을 위해 . . . 돋보인다" 그 밑에 "신약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교회를 신부로 말하면서 . . .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에로티시즘의 경험 없이는 아가페의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약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남편으로, 교회를 신부로 말함으로써, 주종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점입니다. 교수님의 시도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성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드러냈다기보다는 그 중에서 좋은 점만을 골라 이론에 맞게 사용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성적인 즐거움을 위해 여인을 취하더라도 꼭 결혼 절차를 밟아 보상과 책임을 진다. 이것이 참 돋보인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부분에서 반대합니다. 어떤 남성이 자신의 성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남성을 취해놓고 결혼만 해 주면 다 된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남성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쓰게 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 :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다. 노예나 자유자나 다 평등하다."라고 하였는데, 다른 부분에서는 "노예들은 상전에게 충성해라"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모순성이죠. 원칙적으로 볼 때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데, 또 그 시대에 제약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천상적이고 무한한 생각을 이상적으로 하지만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은 문화적 상황과 관습적 테두리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좁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 좁은 영역에서 생긴 것들을 이렇게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생각했던 점은 동양 남성들과 성서에서 말하는 결혼 제도를 비교해 본 것입니다. 동양은 이렇지 않습니다. 어떤 남녀의 성행위를 꼭 결혼을 통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법적인 것도, 책임도 느끼지도 않고 자위로 합니다. 성행위는 하나의 계약이어야 합니다. 여성을 약자로, 불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하여 이런 처지에서 그런 일을 서로 협의, 협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날 수 있을 때에는 뒤에 손해 혹은 피해가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결혼적인 제도와 법으로 모든 걸 책임을 지는, 그걸 해 놓은 것이 우리보다는 한 걸음 앞섰던 배려입니다. 우리 동양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양의 남녀의 성관계가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법이라고 해서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명문화, 성문화되어서 제시가 되고 있다는 것에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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