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은 누구에게 하는가?   


글 / 조 기 연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예배학)


우리는 많은 찬송을 알고 있다. 500여 곡이 찬송가책에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음송이 수도 없이 많고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새 복음송이 작곡되어 나오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찬송은 다 좋은가 하는 질문이다. 찬송을 무분별하게 부를 것이 아니라 어떤 찬송이 좋은 찬송인지

구분하는 안목, 상황에 따라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찬송은 가사와 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노랫말과 음악이다. 음악 부분은 전문가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노랫말에 관한 부분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노랫말의 관점에서는 두 가지가 초점이 된다. 첫째는 가사의 내용이며, 둘째는 이 찬송은 누구 들으라고 부르는 찬송인가 하는 소위 찬송의 ‘대상’이다. 


이 두 가지 초점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찬송은 분명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에게 향하는 찬송이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찬송이란, 예배학적 정의에 비추어

볼 때에, 개인이 받은 은혜체험 신앙경험을 노래한 것이나 작사자 개인의 시적 감수성이 두드러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 그리고 인류구원을 위해 그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 훨씬 좋은 찬송이다. 초대교회가 불렀던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나 시므온의 찬가(Nunc Dimittis) 등의 찬송들은 모두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마그니피카트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세주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주님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진정 이제부터 천추만대에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강하신 분께서 제게 큰 일을 행하셨으니 그분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분의 팔로 위력을 나타내시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세도부리는 자들을 그 지위에서 내치시고 마음이 빈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굶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들의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사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위의 가사에서 보듯이, 이 찬송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신 일을 노래하되 하나님을 대면하여 고백적으로 드리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예배찬송의 올바른 모델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칭송하는 찬송의 또 다른 예는 다음과 같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여
거룩하고 전능하신 이여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거룩하신 하나님이여
거룩하고 전능하신 이여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찬송은 성경본문으로부터 가사를 직접 따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속성을 칭송하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칭송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찬송들이 불리어질 때에 그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이 뚜렷하게 강조되며 하나님 경외가 잘 드러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의 찬송들이 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노래의 성격이 짙다. 하나님 경배보다는 사람에게 신앙과 봉사와 전도와 헌신 등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317장이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이 찬송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서 빨리 주께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찬송의 대상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배에서 버젓이 이 찬송을 부르고 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182장) 하는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찬송하는 주옥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쉽게도 그 대상이 사람에게 가 있으므로 좋은 찬송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찬송합시다’라고 하는 부분 때문이다. 그 대신에 ‘찬송합니다’라고 고치면 이 찬송은 아주 훌륭한 찬송이 된다. 


이러한 찬송의 대상문제는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이러한 찬송을 예배에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예배 중에 새 신자를 환영하면서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믿음 뿌리 내리고 주의 뜻대로 주의 뜻대로 항상 사세요”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새 신자를 찬양(?)하는 노래임이 분명하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하는 노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노래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이 하신 일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노래들로서, 하나같이 예배를 하나님 경배가 아닌 인간을 향한 권면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찬송은 분명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노래이다. 그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넣어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모두 찬송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찬송은 분명 그 내용과 대상에 있어서 그 구성요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노래들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장소와 상황을 가려가며 부르라는 것이다. 이들 찬송들은 친교모임이나 헌신모임, 교육적 모임이나 전도성회 등 그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예배찬송으로는 부적합하다. 지금처럼 이들 찬송들이 무분별하게 예배에서 불려질 경우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경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교모임이나 회심 봉사 등을 촉구하는 신앙경진성회쯤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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