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이후 유대인 방랑사

Jewish Diaspora History After Christ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전주대학교 출판부 Publisher: Jeonju University Press (Jeonju, Korea)

초판일:1998년 5월 1일  


머리글   


1991년 2월 페르시아만에서 전쟁(걸프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 유학 중이던 나는 잠시 귀국하여 「유대인 예수」(1991년: 도서출판 대장간 간행)라고 하는 조그만 책자를 집필하였다. 예수의 민족 유대인과 그들이 말하는 바 이방인 곧 비(非)유대인이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와의 갈등과 오해를 풀어헤치며, 유대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제까지 「유대인 예수」에 대한 독자의 호응이 내 나름대로 좋았다고 판단해보면서, 이 책을 읽어주신 모든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속편(續編)으로서 지난 2000년 동안의 유대인 역사에 손을 대고 싶었다. 하지만 때가 이르기까지 나는 먼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1996년 봄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에 온 이후로 대학출판부에서는 내게 두 권의 책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나는 「유대인의 보고(寶庫)」요, 다른 하나는 「사본들을 통해보는 성경」이다. 이 둘중 특별히 「유대인의 보고」를 집필하면서, 나는 언젠가 이 책에 대한 속편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중 고맙게도 전주대학교 당국의 배려로 나는 본격적으로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후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진행과정에서 관심을 가져주시고 일을 성사시키시고 애써주신 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 방랑사」를 집필하면서 나는 이제까지 원했던 바, 「유대인 예수」와 「유대인의 보고(寶庫)」 이들 두 권의 책에 대한 속편 내지는 보완 서적을 쓰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이 책을 엮어 나가는데 지난 10년 동안의 이스라엘 생활과 배움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했다. 특별히 주님께 지혜를 달라며 기도하는 동시에, 아내와 아이들에까지 기도 지원을 부탁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지난겨울 방학중에는 휴가도 오락도 잊은 채 거의 전적으로 이 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나는 역사가로 학문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감히 유대인의 역사에 손을 대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성경학자로서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신앙적 사관(史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대부분의 자료는 다른 저술가들, 특히 유대인 역사가들의 도움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자료를 단순히 짜깁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내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 속에 숨어있는 절대자 하나님의 손길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역사, 특별히 유대인 역사 이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요 섭리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관점은 이미 「유대인 예수」와 최근에 출판된「내 백성을 위로하라」(1998년 1월: 도서출판 대장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학자들 중에는 신앙적인 관점을 편견 내지는 그릇된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나 자신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생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고백하는 신앙을 무시하거나 또는 그것과 모순된 학문을 할 바에야 차라리 학문과 신앙 둘 중의 하나를 떠나겠다고 결심하고 사는 사람이다. 물론 신앙을 핑계로 억지 학문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학문의 주체가 되는 인간 이성(理性)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겸손한 이성'으로써 학문 활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적 입장 내지 고백을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모호하게 표현한 경우는 이 책에서 찾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 예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면서, 이 책을 읽을 모든 이들과 함께 이 책으로 인한 자그마한 보람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면서 머리글을 맺고자 한다.  


1998년 봄 전주에서.
 

목차  


머리글  

제1부. 제국의 소용돌이 속에 선 유대인

제1장. 이방인의 때와 유대인 디아스포라

제2장. 로마세계의 유대인

제3장. 헤롯왕가의 몰락

제4장. 로마에 대한 항쟁과 좌절

제5장. 랍비유대교의 탄생과 발전

제6장. 비잔틴세계의 유대인  

제2부. 지구 끝까지 흩어지는 유대인

제1장. 바벨론 디아스포라

제2장. 스페인 디아스포라

제3장. 서유럽 디아스포라

제4장. 동유럽 디아스포라

제5장. 아메리카 대륙 디아스포라

제6장. 아프리카와 아시아 디아스포라  

제3부. 메시야와 유대인

제1장. 주인 없는 땅의 임시 통치자들

제2장. 기독교와 이슬람과 유대인

제3장.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유래와 역사

제4장.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  

맺는 글  

참고 문헌  

용어 해설  



제1부. 제국의 소용돌이 속에 선 유대인  


"이스라엘에 관한 야웨의 말씀의 경고라. 야웨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스가랴 12:1-3). 
 

제1장. 이방인의 때와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역사와 기독교


기독교 신학자나 목회자, 심지어 평범한 기독교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친숙하다고 간주되거나 또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구약 성경의 거의 대부분 내용이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세계 여러 나라들의 수도나 아프리카 나라들의 이름은 잘 모를지라도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브엘세바와 같은 이스라엘 도시들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성경, 특히 구약성경 시대의 역사로 국한된다. 신약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 및 사도들의 활동과 편지들을 담는 것으로 국한되어 있으나, 미흡하나마 주후 1세기 이스라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신약 이후의 기독교 역사로서는 '교회사'라는 이름으로 그 주제를 다루는데, 그것은 이방인이 주축이 되는 '이방인의 역사'일뿐이지, 결코 유대인 역사가 될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 이후, 또는 주후 1세기 이후의 유대인 역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의 관심밖에 있거나 또는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의 역사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례없이 독특한 역사가 있으며, 전 세계 역사에 미쳐왔고 또 지금도 미치고 있는 영향이 지대한 고로,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라면 한 번 쯤 충분한 시간을 두고 들어보고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쓰여지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성경 시대의 역사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성경 이후의 시대에 들어오면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 역사서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집필된 것들이다.


지난 2000년간의 유대인 역사를 다루는 저술가들 중, 유대인 비유대인 할 것 없이, 유대인 예수에 대하여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역사를 서술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은 예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는 증오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주후 1세기 이후를 다루는 유대인의 역사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대교 또는 유대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기독교, 특별히 유럽의 기독교에 대한 농도 깊은 반감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주후 4세기 이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자타가 기독교 문화권임을 인정하는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멸시감과 적대감을 키워 왔던 것이 사실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비유대인) 사이의 이러한 부조화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것이기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쌍방은 오해와 상호 질시(疾視)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자연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도 진화한다고 믿었던 근세기의 많은 이성론자들을 부끄럽게 했던 나치의 600만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신(神)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허용할 수 있는가?" 신에 대한 신앙도 불신앙도 아닌 그들의 절규에 가까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유대인이 민족적으로 당한 끔찍한 고난은 20세기에 들어와 히틀러에 의하여 처음으로 점화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이와 비슷하거나 또는 정도에 있어서 결코 그에 못지 않은 고난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무수히도 겪어야만 했다.


나치 정권의 패망과 아울러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유대인은 아마 주후 1세기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범민족적으로 위풍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과거와 주변 상황을 관조(觀照)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많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과거 유대민족의 고난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전 세계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민족적 차원에서의 공헌' 운운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게 하였다. 오늘날 많은 유대인 사가들의 저술에서 자민족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다루는 많은 교회사가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의 역사는 변두리 얘기에도 끼지 못하는 거의 무가치한 주제로 남아 있다. 기껏해봤자, 기독교 초창기 교부들과 유대인 랍비들과의 신학적 논쟁, 초대교회 일부 유대인 신자들의 이단적인 성향, 중세교회의 유대인에 대한 개종 노력과 박해 등이 그나마 몇몇 관심 있는 조그만 주제들일뿐이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회의 이러한 무관심 내지 무지 때문에 심지어 예수의 첫 제자들인 유대인 사도들에 대하여도 '유대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을 주어, 마치 다른 일반 유대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람들인 양 착각하게끔 오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그릇된 개념 설정은 대부분 유대인 사이에도 팽배해 있다. 유대인 역사가가 기록한 책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기독교'는 주후 4세기 (아니, 심지어는 주후 1세기) 이후 오늘까지 마치 서방 또는 유럽 세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종교 내지는 문화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그들은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해 온 것으로 보고 유럽 사회 또는 문화와 기독교를 동일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유럽인'이라는 뜻으로 무리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문화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유럽인은 곧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그들의 크게 잘못된 통념인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반대하고 심지어 증오하는 랍비 유대교가 전체 유대인의 종교 내지는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유대인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개념을 혈통뿐만 아니라 다수가 공유하는 종교, 문화 배경 등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도 그들의 '기독교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잘못된 사용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개념 설정은 상당히 모호하고 잘못되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유럽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유대교(오늘날은 유대인의 모든 종교 사상을 특별히 '랍비 유대교'라는 이름 하에 취합할 수 있음)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결코 서로 대립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은 혈통이나 문화가 아닌 순수한 종교의 범주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에 반하여 '유대인'이라는 개념은 본래 혈통, 다시 말해서 민족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겠지만, 일단 일반 유대인들의 이해를 받아들여 혈통, 문화, 종교, 사상의 혼합체라는 범주에서 받아들인다 해도 지난 2000년간 그들의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별다른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다.   


이방인의 때와 디아스포라


성경에 '이방인의 때'라는 표현이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누가복음 21:24)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의 때'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속한 유대인의 운명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로마서 11:25)고 하였다. 정해진 기간동안에 이방인중에서 많은 수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요, 그 사이에 유대인중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할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하여 달리 표현해 보기로 하자. '이방인의 때'라는 표현은 이방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산되어 갈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란 용어는 이스라엘 자손 또는 오늘날의 유대인과 상반된 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이방인의 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잠시 소홀히 대접받는 때'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지난 2000년 간 유대인은 가는 곳마다 푸대접과 학대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나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늘 생존권의 위협이 그들 뒤를 따랐었다. 과거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학대와 침입을 받았던 몇몇 소수 민족의 예를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진작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그 이름 넉 자만이 낡은 역사책 속에 남아 있을 법도 하지만,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은 아직도 역사책 속에서만 아니라, 지상 역사의 현장 안에서도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본서는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 방랑사'라는 제목 그대로, 주후 1세기 이후 유대인들의 방랑 또는 분산의 역사를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유대인의 이런 상황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디아스포라'이다.


디아스포라란 헬라어로 '분산' 또는 '이산(離散)'이라는 뜻인데,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땅에 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사는 경우, 이러한 상황 내지 이들 유대인이 사는 그곳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과반수 이상이 디아스포라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편의상 이 책은 대략 주후 18세기 말엽의 프랑스 혁명에서 19세기의 시온주의 태동에 이르는 기간 직전을 그 종점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유인즉,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은 사회 전반적으로 새 시대를 예고해 주었으며, 시온주의는 이스라엘의 건국, 즉 유대인 국가의 회생(回生)이라는 엄청난 전환점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모태(母胎)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대인 역사를 얘기할 때 으레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유대인의 최초 조상 격인 아브라함이 바로 그 이름이다. 구약 성경의 맨 앞에 나오는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에 살던 사람으로서, 야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 갈곳을 알지 못하고 방랑하는 것으로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방랑의 삶은 그의 후손인 유대인에게도 판박이처럼 재현되어,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은 고향 떠나 오랜 세월 동안 지구 구석구석을 방랑하는 역사적 현실을 체험해왔고 또 아직도 다수가 이를 체험중인 운명을 안고 있다.


일반적으로 방랑의 역사가 오랜 기간 지속되는 운명을 안고 있는 민족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민족 또는 종족 단위로서는 그 명맥은 유지하되 힘없는 소수민족으로 남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 점에 있어서 전혀 다른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후 4000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민족 정체성(正體性)을 뚜렷하게 지켜왔을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인류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또 계속 그리하고 있다. 

 

유대인의 영향력은 무력을 통한 것이 아니다. 유대 민족은 이제까지 결코 강대한 제국이 되어 본적이 없다. 그들의 영향력은 한 마디로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야웨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 관계란 야웨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일뿐만 아니라, 야웨에 대한 유대 민족의 순종, 거역, 고집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운명을 가리킨다. 유대인의 독특성과 영향력은 어찌 보면 야웨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철저히 간섭하시고 관리하신다는 믿음에 대한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민족의 역사를 기술할 때 일반적으로 그 민족이 지속적으로 살아온 한 땅에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살아온 역사를 다루게 된다.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역사는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일본의 역사를 말하며, 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식민지와 미합중국의 역사가 그 주류를 이룬다.


주후 70년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 역사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민족의 역사는 그들이 살아온 땅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후 70년 이후로 상황은 바뀌었다.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이스라엘 땅, 곧 팔레스타인은 잠시동안 대부분 유대인들을 위한 삶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유대인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면서 디아스포라 땅에서 일어나는 동안에, 팔레스타인 땅은 하나의 꿈 또는 이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00년간 유대인의 역사를 기술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논해야 할 유대인의 역사는 대부분이 그들이 조상 대대로 살았던 영토와 분리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시공간적으로 산만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대략 2000년 전에 유대인의 나라가 패망하고 대다수 유대인이 각기 다른 디아스포라의 전혀 다른 환경 가운데 생존해 왔지만, 유대인은 공통적인 유대감(紐帶感)을 상실하지 않고 여전히 인류 역사 속에 하나의 뚜렷한 민족 단위로 살아있다. 이처럼 독특한 유대인의 역사를 논할 때, 특정한 지역만을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따라가는 것은 그리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필요한 경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유대인의 역사를 얘기할 것이다.   


유대인 역사와 예수


유대인들은 지난 2000년간의 자민족 역사를 논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적대 감정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것은 역으로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단적으로 입증해주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중요한 존재 이상이다. 그는 사실상 유대인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유일한 열쇠이자 종착점이 된다. 

 

신약 성경중 처음 네 권의 책(사복음서)은 주후 30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및 승천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사도행전이나 사도들의 서신들은 그리스도 복음의 확장과 진리에 관하여만 언급할 뿐, 유대인의 일반 역사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어찌 보면 '유대인의 왕'으로서 (마태복음 2:1-2; 요한복음 19:19) 유대인중의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팔레스타인 땅만이 아닌 전세계를 향하여 그의 왕국을 설립해 가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메시야 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데에는 추호의 의심이 없으나, 그를 하나의 '자칭 메시야'로 규정할 뿐 (요한복음 19:21 참조) 결코 그를 참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 사가들은 아직도 예수를 훌륭한 랍비, 교사 등으로 칭찬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의 신성(神性)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의 생애를 십자가 죽음에서 끝낼 뿐 결코 부활이나 승천으로 연장시키지는 않는다.


여기 예수와 유대인 역사의 관계에 대한 유대인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유대인 사가의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여호수아(필자주: 예수의 히브리어 이름 음역)의 비극은 이제 끝났고, 예수(필자주: 비유대인들이 부르는 이름)의 영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유대 민족의 비극은 계속되었고, 그의 이름 안에서 그 격렬함이 더해지게 되어 있었다." 

 

비록 유대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를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주도권을 잡은 가운데 디아스포라에 살아왔지만,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메시야로서 받아들이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믿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그것은 도대체 야웨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을 동일하거나 유사한 종교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배척하여야 하는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일부 유대인에게도 혼동 현상이 있다. 어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아류 종교로 본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비록 예수를 메시야로 착각한 잘못은 있으나 어쨌든 야웨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류 유대인' 정도로 밉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섞여 사는 사회에서 얼마나 다양한 오해와 혼동과 상호 질시(疾視)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사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서로 서로에게 불편과 불안을 끼쳐왔고, 심지어는 온갖 박해와 피흘림으로까지 발전한 것이 역사적인 현실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유대인이 이슬람권에서 살거나 또는 이교도나 무신론자, 합리주의자들 사이에서 살 경우에도 정도만 다를 뿐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또 지난 역사는 실제로 그런 현상이 다발(多發)하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유대인의 민족적 고립성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부조화 현상을 논할 때 어느 한쪽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태도로 접근해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유대인의 독특한 민족적 임무 내지 운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4000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유대인의 독특한 운명이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및 유대인의 운명을 '민족적 고립성'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볼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고립 내지 격리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실중의 하나이다. 일찍이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그가 태어나 자랐던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라고 명하신 일은 달리 보면 아브라함을 그의 혈연 및 지연적 뿌리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순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뿌리를 끊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새로운 삶의 과정에 들어간다.


이스라엘 자손이 처음으로 민족다운 형태를 이룬 것은 그들이 모세의 영도 하에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민족과 접촉하여 충돌(전쟁)하기 전에, 그들을 별도로 고립된 장소에 모아서 특별한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있어서 40년 광야 생활은 그들이 하나의 선민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필연적인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의 민족적 고립성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 역사 가운데서도 잘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구 위 어디를 가든지 현지에 사는 족속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겉으로는 어느 사회에든지 잘 적응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도 오르고 웬만한 경제력도 갖추는 것 같지만, 내면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철저히 타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종교 전통과 문화 유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며 사는 것이 유대인의 특성이라고 하겠다.


소수 민족으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절대 다수 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할 때 간혹 생기는 불행한 일이 바로 미움과 질시와 더 나아가서는 핍박 및 민족의 집단 학살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처럼 이러한 비극을 강도 깊게 경험한 다른 민족이 없다는 사실은 바로 이웃에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영위해나가는 그들의 근성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대인의 고립성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0년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지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자신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통하여 주위 민족들에게 색다른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좋건 나쁘건 간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대인은 지상 어느 민족보다 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소유하며, 타민족의 구설수나 미움의 대상으로서 쉽게 오르내림을 보게 된다. 오죽하면 일찍부터 '반유대인 감정'이라는 표현이 서구 사회에 퍼졌겠는가.  


유대인 역사의 독특성은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며,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공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정한 사실임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까지 '열방 중의 하나로 간주되지 아니하고 홀로 처하는' (민수기 23:9 참조) 민족으로 남을 것이다. 유대인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격리시킨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기에 그들의 독특성이나 모남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기분 나쁜 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앞으로 있을 예수와 그의 동족 유대인 사이의 관계 개선에 대하여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 


 

제2장. 로마세계의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활동한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이다.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로마시대'라고 불려지는 시기는 주전 63년 시리아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에 시작되어 주후 7세기에 무슬림(이슬람교도)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주후 4세기부터는 비잔틴 (기독교화된 로마) 시대로 따로 분류하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편의상 콘스탄틴 대제 이전까지 만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의 방랑 역사 이야기는 먼저 그 첫 시대 배경이 되는 로마 세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당시 유대인 역사의 중심이 되었던 팔레스타인이 비록 로마제국의 총본산인 로마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비롯 전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정책과 로마 제국내 함께 사는 이방인들의 분위기 여하에 따라서 상당히 큰 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먼저 주후 1세기를 전후하여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로마 세계 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의 인구 분포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로마제국내 유대인 인구


주후 1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인 역사가 스트라보(Strabo)는 말하기를, '모든 나라로 유대인이 스며들어, 지상에 유대인이 없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주후 1세기를 전후한 유대인 인구에 대한 오늘날 학자들의 추정은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주후 66-73년의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쟁 직전 전세계 유대인 인구는 대략 800만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 로마 통치밖에 있었던 파르티아 왕국(바벨론) 내에는 100만 가량이 살았으며, 나머지 700만은 로마 제국내의 유대인으로서 이는 로마 제국내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이 700만 중에서 다시 250만 명 가량이 팔레스타인에 살았고, 나머지 450만 가량은 이집트 (100만), 소아시아와 시리아 (100만), 이탈리아 반도(10만) 등에 흩어져 살았다. 디아스포라 세계 중에서 특별히 이집트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시 전체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북아프리카의 또다른 지중해 연안 도시인 키레나이카(오늘날의 트리폴리)에도 10만 가량이 살았고, 그리고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 시만 해도 대략 5만 가량이 살고 있었다. 

 

이상의 통계로 볼 때에 주후 1세기 유대 민족은 로마제국 안에서 결코 작거나 하찮은 소수민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은 비록 작은 땅에 불과했으나, 그곳은 널리 퍼진 신봉자들을 가진 종교의 중심지였다. 유대는 로마제국의 일개 속주였긴 하지만, 그곳의 제도들과 전통들은 이미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대인 인구 수치가 이처럼 크게 불어나도록 공헌한 수많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와 생활방식은 이미 헬라 시대부터 이방인들의 호감을 사서 수많은 자발적 개종자들을 유대인 인구로 흡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로마 시대 직전에 100년 동안 누렸던 국가적 독립 시기에 통치권자였던 하스모니아 왕가는 이두매인을 비롯 자국내 및 주변 국가의 많은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킨 바도 있었다.


따라서 주후 1세기 로마 제국 내에서 유대교를 표방하고 있는 700만 중에 4백만이 가계로 보아 진정한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개종한 이교도 또는 그들의 후손이라는 견해는 결코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이교도 신앙을 버리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는 달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방인들이 있다 (사도행전 16:14; 18:7 등 참조). 이들은, 특히 여자가 많았는데, 유대인의 일부 의식은 준수하지만 결정적으로 유대 민족과 동일시하지는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본인은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때로 자녀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실 역시 로마 제국내 유대인 인구 증가에 일조를 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이 조국 이스라엘 땅(=팔레스타인)보다 디아스포라에 더 많이 살았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주전 723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이어서 주전 588년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이후로 많은 이스라엘 자손이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처로 강제 이주당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 이주하기도 했는데, 그들중 상당수가 이방 세계에 동화되었지만 일부는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디아스포라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유대인에게 있어서 헬라 시대에 해당하는 주전 4-1세기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잠시의 소요기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안정된 정치 상황을 틈타서 지속적인 인구증가를 보였다. 그 좁은 땅 덩어리에서 주로 농업을 생업으로 하여 살던 당시에 팔레스타인은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서서히 팔레스타인을 떠나 헬라 및 로마 세계로 이주해 나가 곳곳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혹자는 지배국 군대에 동원되어, 혹자는 보다 나은 생활을 추구하여 이민가게 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원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쩔 수 없어서 이민 갔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로마제국내 유대인의 생활형태


로마 제국 내에서 생활방식으로 보나 수적으로 보나 괄목할 만한 유대인의 존재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사상적인 차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유대교와 이교도 사이에는 정신적인 갈등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별히 유대인의 엄격한 식생활 규례와 할례 의식 등은 상호간에 용납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을 구축해 놓을 정도였다.


유대인에 대한 이교도의 또다른 분노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전 세계가 헬라·로마 생활 방식을 모방하려 했지만 대다수 유대인들은 그들을 경멸하였다. 헬라·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가진 이러한 우월성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이러한 분노는 유대인들이 지배 민족의 다수 인종들과 통혼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독특한 생활방식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 곳에 무리 지어 살았다. 그들은 가울과 스페인,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대, 그리스 도처와 그리스의 섬들, 그리고 로마를 비롯 이탈리아 등지에 무리 지어 정착하였다.


로마 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중심지를 셋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 로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순 육체노동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는 유대인 거지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점쟁이나 해몽가로 일한 유대인도 있었다. 헬라 시대에는 상당수 유대인들이 군인으로 활약했으나 로마시대에는 이 업종에서 감소하는 추세였다.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를 인정, 그들에게 여신 '로마' 숭배와 황제 숭배를 면제해주는 혜택을 베풀었다. 이것은 헬라 사람들이나 이집트 사람들, 또는 제국내 기타 인종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되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내려진 또 다른 중요한 혜택은 자체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가시적인 신들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까다로운 식생활 규례를 준수하려면 어디에 가든지 부득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야만 했다. 따라서 대부분 도시에서는 유대인 구역이 별도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특혜로 비유대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비록 팔레스타인보다 디아스포라에 더 많은 유대인이 살긴 하였지만, 주후 1-2세기 동안에 로마 제국내 모든 유대인들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은 팔레스타인, 그 안에서도 특별히 예루살렘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일대의 인구는 거의 100만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명절이 되면 일시적으로나마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로 증가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로마 통치하에 각종 무거운 세금 아래 시달리며 살았지만, 로마에 대한 항쟁이건 향후 2000년 가까이 전 세계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가 될 랍비 유대교를 태동시키는 일이건, 다방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여러 민족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후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들의 유대인 정책


이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부터 콘스탄틴 직전까지 로마제국을 다스린 황제들의 대략적인 연대표를 제시한 후, 유대인과 관련하여 로마 황제들이 취한 정책들과 몇몇 중요한 사건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로마 황제 연대표>


주전 44년.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 살해

주전 27년-주후 14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

주후 14-37년. 티베리우스(Tiberius)

37-41년. 칼리굴라(Caligula)

41-54년. 클라우디우스(Claudius)

54-68년. 네로(Nero)

69년.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

69-79년. 베스파시안(Vespasian)

79-81년. 티투스(Titus)

81-96년. 도미티안(Domitian)

96-98년. 네르바(Nerva)

98-117년. 트라얀(Trajan)

117-138년. 하드리안(Hadrian)

138-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161-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93-211년. 굜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211-217년. 카라칼라(Caracalla)

222-235년.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284-305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로마 세력이 시리아-팔레스타인에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주전 65년의 일이다. 주전 63년 하스모니아 왕가의 내분을 기회로 예루살렘까지 점령하게 된 폼페이(Pompey)는 동방에 로마 식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이미 철저히 쇠퇴해있던 셀류시드 왕국을 쓸어버릴 준비를 하였다. 폼페이에 의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은 완전히 재편되고 본격적인 로마 통치시기를 맞게 된다. 

 

케사르(Julius Caesar)는 유대인이 로마 세계 안에서 응집력 있는 요소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면제 조건을 두어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런 면제 조건은 대부분 로마 황제들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확인되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주전 27년-주후 14년)는 케사르 때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호혜 정책을 계속하였다. 그의 때에 로마시의 유대인 인구는 불어났다. 

 

티베리우스(주후 14-37년)가 통치하던 주후 19년 로마의 실력자인 세야누스(Sejanus) 장관은 로마에 살던 4000명의 유대인 청년을 사르디니아(이탈리아 반도 서쪽에 위치한 큰 섬)로 추방시켜 산적단과 싸우게 했다. 그 결과 그들중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는 한 로마인 귀족부인을 사취하려 했던 유대인들을 벌주기 위한 것이었다. 원로원은 자기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유대인은 이탈리아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종교 용품은 모두 압류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칙령은 실시되지 않았고, 세야누스가 죽고 주후 31년에 케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보호적인 칙령이 재확인되었다. 

 

신으로 예배 받기를 원했던 칼리굴라(주후 37-41년) 황제 때 그의 상(像)을 유대인 회당과 성전 안에 세우게 하자,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땅에서는 소요가 발생하였다. 이 위험은 필로를 단장으로 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사절단의 노력과 유대인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 푸블리우스(Petronius Publius)에 의하여 잠재울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주후 41-54년)는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관용의 칙령을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 로마 제국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로마의 일반 유대인과 기독교 사이에 분열의 골이 점점 깊어지면서 공공 질서와 안녕에 위협을 가하자,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두 부류를 모두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주후 49-50년). 하지만 소수의 몇몇 사람만 추방되는데 그쳤을 뿐, 이 칙령은 단명하고 말았다. 

 

주후 66년 네로(주후 54-68년)의 통치 때 팔레스타인에서의 소요는 전면전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성과 성전의 파괴 이후 무수한 유대인 포로가 학살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후기 사료에 의하면 로마 시로만 1500명이, 그리고 아풀리아(Apulia)로는 5,000명의 유대인 포로가 끌려갔다고 한다. 머잖아서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그중 많은 수가 이탈리아에 정착하였다. 

 

베스파시안(주후 69-79년)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관례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보내던 반세겔의 성전세를 '유대인 인두세'(Fiscus Judaicus)라는 명목으로 바꾸고 로마의 국고에 넣게 하였다. 도미티안(주후 81-96년) 통치기에 이르러 유대인에 대한 세금 착취는 더욱 강화되었다. 유대인 인두세는 그의 후계자 네르바(주후 96-98년) 때에 좀 완화되었으나, 두 세기가 더 지나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트라얀(주후 98-117년)은 팔레스타인, 이집트, 키레나이카(Cyrenaica)에서의 유대인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하드리안(주후 117-138년) 통치 때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있었다. 이 봉기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헬라 도시로 바꾸고 성전을 주피터 신전으로 바꾸려고 한 하드리안의 결정이 이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한다. 스파르티아누스(Spartianus)에 의하면 이 봉기는 할례를 금지한 일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드라쉬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의 압력을 받아 하드리안이 성전 재건 약속을 깨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후 4세기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이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대인에게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반 유대인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소요는 할례 금지 조항의 철폐 등 화해적인 태도를 취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주후 138-161년)의 통치 때에도 지속되었다. 굜티무스 세베루스는 주후 204년에 유대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다. 카라칼라(주후 211-217년)는 주후 212년에 제국내의 모든 자유인에게까지 로마 시민권을 확대 적용하는 칙령을 내렸다. 여기서 유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주후 222-235년)는 유대인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로마의 한 회당은 그의 이름을 따라 불렸으며,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회당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디오클레티안(주후 284-305년)은 기독교인, 마니교도, 사마리아인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탈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에 대하여는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로마 황제들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어 유대 땅을 다스린 로마 총독(행정장관)들과 및 제국내 유대인들과 나란히 사는 이방인들의 경우 때때로 집권자들의 의지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곤 하였다. 유대 속주를 다스린 로마 총독들은 대개 유대인의 독특한 종교와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무시하고는 자기 멋대로 철권을 휘두르며 통치하기가 일쑤였다. 사실 행정장관에 의한 로마의 지배는 대부분 조악(粗惡)한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동쪽에는 과거에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왕국의 일부로 구성된 새로운 왕국 파르티아가 인도에서부터 유대의 국경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다. 로마군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계속 승승장구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을 패퇴시키지는 못했다.


파르티아는 동쪽 경계선에서 항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파르티아에게 유대는 로마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통로였다. 로마는 유대를 강력하게 요새화 하면서 철의 통치를 하면 적을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파르티아에 대한 두려움으로 로마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보다 강압정치의 정도가 지나치게 되었다. 이 강압정치로 유대인들이 저항하게 되고 반대로 로마는 더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유대인 공동체의 성격


이제 이러한 로마의 통치 가운데 이루어진 유대인의 자치권과 한계점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로마 시대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일상 생활에 실질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산헤드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 도시들의 소규모 공회가 23인으로 구성된 데 반하여 예루살렘의 산헤드린(대공회)은 의장인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1인으로 구성되었다.


성전이 건재한 동안 산헤드린의 모임은 성전 한 쪽에 있는 커다란 방에서 열렸다. 구성원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임명하거나, 공회원 자신들이 공백을 메워 나갔다. 본래 산헤드린은 최고법원의 역할을 하였으나, 헤롯과 로마 시대에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사안은 대공회의 권한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산헤드린은 민사 및 종교적 사안들만 처리하게 되었다.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의장이지만, 실제로 대제사장은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아브 벧딘('법정의 아버지'라는 뜻)이 그를 대신하였다. 로마 시대에 들어와 대제사장은 집권자에 의하여 빈번히 교체되곤 하였다.


주전 150-37년의 113년 동안에 8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던데 반하여, 헤롯이 집권하기 시작한 주전 37년 이후 성전이 파괴되던 주후 70년에 이르기까지 107년 동안에 자그마치 28명이나 되는 수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평생직이여야만 하는 대제사장이 평균적으로 4년도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고 만 것이다. 

 

예루살렘에 위치한 성전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종교 및 정치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할 것 없이 모든 유대인은 성전세로 매년 반세겔 씩을 즐거이 납부하였다. 그리고 그 돈은 유대인이 흩어져 살고 있던 전세계에서 모아져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들어와 성전 유지를 비롯 전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정신적 자부심을 높여주는 일에 쓰여졌다.


그러나 성전이 아직도 전세계 유대인들을 위한 자랑거리와 연대(連帶)의 원천으로 서 있는 동안, 유대인 사회는 하나의 변화과정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은 성전을 두 번째 자리로 밀어내고 앞으로 1000여년이 넘도록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 없이 존속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회당이라는 제도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예배당(교회 건물) 사이의 뚜렷한 의미 차이를 무시한 채 '교회'라는 개념을 마구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당'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약간의 혼선이 있는 것 같다. 오늘날 '회당'이라고 하면 언뜻 유대인의 예배처소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물론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 회당이라는 것은 하나의 건물이나 처소로서보다는 제도로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 있는 동안에 유대인들은 이 성전 외에는 어떠한 예배 처소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회당 건물의 기원을 주전 588년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훼파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살던 시기로 잡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처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유일한 예배처소였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안고 있었을 유대인들이 성전을 대치할만한 처소를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는 발언이 아니다.


최초의 회당은 '성전 대치'용으로서의 하나의 예배(또는, 기도)처소가 아니라, 나라 잃고 중앙성전을 잃은 채 조국에서 쫓겨나 타지에 사는 유대인 공동체의 자연스런 모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디아스포라의 회당이란 기도처소라기 보다는 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를 관리하는 하나의 종교 및 사회적 조직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회당은 서서히 기도처소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는데, 먼저 디아스포라에서 시작하여 주후 1세기경에는 이미 팔레스타인 안에도 기도처소로서의 회당이 곳곳에 산재했던 것 같다. 오늘날까지 유적으로 남아있는 맛사다, 헤로디움, 가믈라의 회당은 주후 1세기에 건립되었던 회당 건물들이다. 

 

주후 70년경에는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곳곳에 회당이 산재하였다. 아마도 로마는 유대인들의 두 차례에 걸친 반역적인 봉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에서 많은 회당 건물들을 파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당은 건물보다 토라 낭독과 청취, 기도 낭송, 전승 준수, 사회적 모임 등 회당내의 활동이 더 중요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적 활동은 유대인으로서의 유대감을 형성해 주었다. 이처럼 회당이 제도로서 자리 매김을 시작하고, 또 예배의 방편으로서 기도가 희생(犧牲)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성전파괴 이후 유대교가 가야 할 길이 서서히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산헤드린, 대제사장, 성전, 회당 등이 로마 시대에 유대인의 삶에 영향을 끼친 제도적 요소들인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사상과 교육을 통하여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큰 몫을 한 사상적 요소를 제공해 주었다.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 고수했던 두 가지 근본 원칙이 있다.


첫째, '각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원칙이요,

둘째, '지식은 경건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원칙이다.


이 두 번째 원칙에 근거하여, 그들은 토라를 꾸준히 읽으면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뒤따른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좋은 행위와 생각이 반복되어 습관을 이루고, 좋은 습관은 좋은 성품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따라서 에스라 이후 유대인의 모임에 있어서 토라 읽기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직접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고로 차선책으로서 기도문이나 시편을 낭송할 수 있었다.


이런 일로 주후 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미 회당 예배가 공식화되었었다. 이리하여 유대인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회당이 서게 되었다. 심지어는 성전 주변뿐만 아니라 성전 안에도 회당이 하나 있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기도만큼이나 중시하였다. 지식에 대한 유대인의 열정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신명기 6:7)는 토라의 명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모든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칠 능력이 있거나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거의 모든 회당마다 학교를 운영하였다.


주후 60년 대제사장 여호수아 벤 가말라는 모든 지역사회는 크기에 관계없이 반드시 초등학교를 가져야 한다고 정하였다. 배움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는 성인들도 뒤지지 않았다. 무지는 멸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배움에 열중하였다. 

 

로마 통치권 밖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중 유일하게 실제로 중요한 공동체는 파르티아 제국 내에 살았던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바벨론 디아스포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역사는 주전 723년, 588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들은 비록 로마 제국의 영향권밖에 살았지만, 유대와 특별히 예루살렘에 대한 귀속 감정을 가졌다. 따라서 때때로 그들은 대규모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의 길을 행하기도 하였다.  


주후 1세기를 전후하여 전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 제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10%를 차지했던 유대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로마 황제조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제국내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결코 제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국가적 독립을 잃었을지라도 민족적 자긍심과 자율권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독특한 집단이었다. 로마 황제가 유대인을 포함 세계를 통치하던 때에 유대 민족 가운데 한 별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장차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밝혀줄 '인류의 희망' 예수 그리스도였다. 

 

제3장. 헤롯왕가의 몰락  


본래 이두매(에돔) 사람의 후손으로서 유대교로 개종되어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인 나라의 왕위까지 차지하게 된 헤롯 가문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부터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멀리 동방에서부터 찾아온 박사들이 만난 이는 아기 예수였지만, 그는 바로 박사들이 말한 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었다 (마태복음 2:1-2). 이제 이후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백성을 다스릴 그분의 등장은 미미한 헤롯 왕가를 서서히 퇴색시키고 있었다.


그럼 먼저 헤롯의 대략적인 가계보를 소개하고 이 왕가의 몰락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안티파테르 1세의 손자요, 안티파테르 2세의 아들인 헤롯 대제의 여러 아내들 중 이두매 사람 도리스, 하스모니아 왕가의 미리얌(미리얌1), 대제사장의 딸 미리얌(미리얌2), 사마리아 여자 말타케,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를 통하여 얻은 자손은 다음과 같다.  


<헤롯왕가 가계보>


도리스 - 안티파테르 3세

미리얌1 - 알렉산더

|- 칼키스의 헤롯

|- 아그립바 2세

- 아리스토불루스 - |- 아그립바 1세 - |- (딸) 베레니케

|- (딸) 드루실라

|- (딸) 헤로디아

- (딸) 살람프시오

- (딸) 키프로스

미리얌2 - 헤롯 필립 - 살로메

말타케 - 헤롯 아켈라우스

- 헤롯 안티파스

클레오파트라 - 필립  


헤롯 대제와 아켈라우스


헤롯 대제가 로마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은 주전 37년의 일이었다. 그는 주전 4년까지 통치하였는데, 그가 죽기 직전인 주전 6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중병에 걸려 주전 4년 여리고에서 생의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헤롯 대제 사후, 유대인들은 차라리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토 내의 권력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사마리아 여자 말타케의 소생인 아켈라우스에게는 봉신왕(封臣王, ethnarch)이라는 직함과 함께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가 주어졌다.


그의 동복동생 안티파스는 분봉왕(分封王, tetrarch)이 되어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받았고, 클레오파트라 소생의 필립 또한 분봉왕으로서 트라코니티스, 바타네아, 아루라니티스와 요르단 골짜기 상류의 일부를 받았다. 한편 헤롯의 누이 살로메에게는 남부 해안평야 지대에 있는 아스돗과 야브네, 아스켈론의 왕궁과 요르단 골짜기에 헤롯이 새로 건설한 파사엘리스가 주어졌다. 

 

아켈라우스는 가혹한 폭정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고, 결국 주후 6년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폐위되고 가울(Gaul) 지방의 비엔느로 추방되었다. 주후 6년에 로마는 헤롯 대제의 아들 아켈라우스를 파직시키고, 이스라엘 땅을 '유대'(Judaea)라는 이름의 하나의 속주(屬州)로 삼고, 주후 66년에 이르기까지 총독(또는, 행정장관)을 파견하여 통치한다 (총독 정치는 주후 41-44년에 일시 중단되었음).


유대 속주에 주둔한 수비대는 겨우 보충병력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대 총독은 시리아 총독의 군단에 의존해야 했고, 자연히 시리아 총독은 유대 총독의 상급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유대 총독은 지중해변의 가이사랴에서 속주를 관할하였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재직한 기간 중에 (주후 26-36년)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주후 30년). 후에 빌라도는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의식을 특별히 존중하여 다루었던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의 건의로 해임되었다.   


헤롯 안티파스와 필립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오랜 기간동안 (주전 4년-주후 39년)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다. 그는 헬레니즘에 물든 사람으로서 헬라 도시를 본뜬 도시를 건설하고 헬라풍의 생활방식과 태도를 자기 영토 안에 소개했다. 그가 다스린 나라의 수도는 갈릴리의 세포리스(찌포리)였다. 주후 20년 그는 갈릴리 호수 서편에 티베리아를 건설하였다. 안티파스는 처음에 나바테아 왕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그녀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와 하스모니아 왕가의 미리얌 사이에 태어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로서, 본래 안티파스의 이복형제요 대제사장의 딸 미리얌에게서 태어난 헤롯 필립과 결혼하였었다. 그녀는 안티파스와 결혼함으로써 더 큰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안티파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헤로디아와 그녀의 전 남편 헤롯 필립 사이에 태어난 딸이 바로 세례 요한을 참수하는데 한 몫한 살로메이다.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켜 '여우'라고 부른 적이 있다.


안티파스는 본 부인을 버린 결과로 나바테아인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패배하고 만다 (주후 36년).

티베리우스 황제는 나바테아를 치러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를 보내야 했다. 끊임없이 야심에 불타는 헤로디아는 안티파스를 설득하여 당시의 황제 칼리굴라에게 왕의 직함을 달라고 청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도리어 안티파스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 일로 안티파스는 헤롯 아그립바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헤롯 아그립바는 안티파스를 황제에게 고발하였다. 주후 39년 칼리굴라는 안티파스를 해임시키고 가울 지방의 루그두눔(Lugdunum)으로 추방하였다. 

 

주전 4년 요르단 북동편 지역을 영토로 받은 분봉왕 필립(Philippus, 클레오파트라의 소생)은 주전 2-1년 사이에 요르단 강의 발원지중의 하나인 헤르몬산 남서쪽 기슭에 가이사랴 빌립보(케사르 필립)를 건설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를 두지 못하고 주후 34년에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영토는 시리아 속주에 병합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대제가 다스리던 거의 전 영토를 이제 헤롯 왕가의 한 사람이 짧은 기간이나마 또다시 다스릴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 대제와 미리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자 헤로디아의 친오빠인 아리스토불루스에게 헤롯 아그립바(1세)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그립바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배려하에 칼리굴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치스럽고 허황된 생활을 누리며 살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로마에 사는 동안에 이미 황제 칼리굴라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는 아그립바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기 위하여 후에 총독(행정장관) 제도를 폐지하였다. 

 

주후 37년 칼리굴라는 아그립바에게 3년전 시리아 속주에 병합되었던 필립의 영지를 주면서 왕이라는 직함을 수여하였다. 또한 칼리굴라는 이제까지 필립의 영지 북쪽에 인접한 별개의 분봉왕 영지였던 아빌레네(Abilene)도 그에게 주었다. 유대인들은 이 임명으로 인하여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아그립바는 자기가 받은 왕국을 취하러 로마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에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존경의 표시로 그의 임명을 경축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축하 행사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국민 왕을 갖지 못한 알렉산드리아의 이방인 폭도들은 이를 조롱거리로 이용하였다. 유대인들의 경축 행사가 끝난 다음날 폭도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그 도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바보에게 유대인 왕처럼 옷을 입혀 절을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유대인들과 아그립바 왕을 우롱하였다. 

 

한편 한동안 로마에 머물러 있던 아그립바가 주후 38년에 팔레스타인에 왕으로 부임해오자, 헤로디아는 남편 안티파스를 설득하여 그에게도 왕의 직함을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하게 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안티파스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 영지, 곧 갈릴리와 베뢰아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주후 39년). 주후 40년에는 로마에 온 아그립바에게 이두매를 포함한 유대와 사마리아도 주어졌다. 

 

아그립바에게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위임한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상(像)을 두려하자 이스라엘 땅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일년 동안이나 술렁댔다. 이 소요 사태는 간질을 앓고 있던 칼리굴라 황제가 근친상간을 범하고 살해되기까지 (주후 41년 1월) 계속되었다. 

 

주후 41년에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황제 자리에 올랐다. 아그립바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도 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헤롯 대제가 통치하던 지역 전체를 묶어서 아그립바의 통치 아래 두었다.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한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때 아그립바의 나이는 오십쯤 되었다. 아그립바는 파란만장하고 천박한 삶을 영위해 왔었고,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음모가 난무하는 투기(鬪技)에 해박하였으며 스스로 행하기도 하였었다. 그는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경건한 사람처럼 행세하여 겉으로 엄격한 바리새인들의 규례를 지키는 체 하였고, 칼리굴라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황금 사슬을 성전 금고에 바친 것을 비롯해 성전에 많은 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마치 유대교의 옹호자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가이사랴에서 투기 시합을 개최하기도 하고, 자신의 영토 밖에서는 부유한 헬레니즘적인 군주 같이 행세하여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아그립바는 왕국내 모든 계층과 분파에 경청할 줄 아는 군주로서 조부인 헤롯 대제보다는 백성의 복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유대인들도 아그립바를 본래 쓸모 없는 난봉꾼으로 알았으나, 그가 왕위에 올라 겉으로나마 유대인 전통과 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이자 그를 지지하는 추세로 발전하였다.


그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 땅은 몇 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확장하고 다시 요새화 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 북쪽 지역에 여러 망대들을 갖춘 아주 튼튼한 새 성벽을 쌓아 성을 더 넓혀 놓았다. 이것이 이른바 제3성벽이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성되지 못하였다. 왕의 치세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시리아 총독 비비우스 마르수스(Vibius Marsus)에게 이 공사를 중단시키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잠시간의 평화도 아그립바의 갑작스런 죽음과 더불어 끝을 맺게 된다. 가이사랴에서 로마 황제를 기리는 축제 행사에 아그립바는 은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제왕의 격식과 위엄을 갖추어 공중 앞에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아그립바는 인간이 아니요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신이라는 아첨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아그립바는 이런 불경스런 아첨을 듣고서도 군중을 꾸짖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때 갑자기 아그립바는 격렬한 통증이 일어나 왕궁으로 실려갔으며, 수 일 후에 죽고 말았다 (주후 44년, 사도행전 12:21-23 참조).


이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의 유족으로는 아그립바(2세)라고 불린 열 일곱 살 난 아들 하나와 세 명의 딸(베레니케, 미리얌, 드루실라)이 있었다. 아그립바가 채 7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죽자 (주후 38-44년), 로마는 다른 민족주의적 성향의 유대인 왕이 아그립바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할까봐 유대를 다시 총독령으로 돌려놓았다 (주후 44-66년). 아그립바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는 팔레스타인 북쪽의 작은 영토를 왕국으로 주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다.  


아그립바 2세


아그립바 2세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로마에 살았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신하들과 친구들의 자문에 따라,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그에게 아버지의 왕국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 좋은 인맥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러한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주후 50년에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선왕의 형제인 헤롯이 죽은 후에 그가 장악하고 있던 칼키스라는 작은 왕국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한동안 더 로마에 머물렀다. 얼마 안 있어서 그는 레바논의 베카에 위치한 이 작은 영토 대신에 요르단 동편의 최북쪽 지역에 있던 필립의 이전 영지와 다메섹 북서쪽에 있는 아빌레네를 포괄하는 더 큰 왕국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칼키스 왕국과 아울러 예루살렘 성전을 감독하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을 임명할 권한을 수여 받았다. 그는 이러한 권한을 주후 66년 봉기가 발발할 때까지 행사하였다. 아그립바 2세는 삼촌인 칼키스의 헤롯의 미망인인 자기 누이 베레니케와 살았기 때문에 (사도행전 25:13) 심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그립바 2세는 한때 가난한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하고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예루살렘 도로 포장 공사를 진행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사업이 모든 유대인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주후 66-73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1차 봉기 때, 아그립바 2세는 내내 로마 편에 서서 유대인 반란 진압에 일조 하였다. 대략 주후 93년 (또는, 100년) 이전에 아그립바 2세의 죽음으로 100여년 동안 지속된 헤롯 왕가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이두매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헤롯 가문은 유대인의 하스모니아 왕가가 내분에 의하여 기울 무렵, 당시 이미 이스라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로마를 등에 업고 마침내 유대인의 나라를 차지하고 말았다. 헤롯 대제와 그의 자손들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간섭 또는 직접적인 통치와 어울러 일반적으로 유대인들 사이에 깊은 반감과 혐오감을 심어 주었다. 게다가 헤롯 왕가 사람들 사이에 만연했던 부도덕성과 권력에 대한 탐욕은 헤롯 왕가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헤롯 대제가 유대인의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주전 6년).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그의 왕국은 헤롯의 왕국이 기울면서 서서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후 로마 세계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헤롯 왕가의 몰락은 곧 팔레스타인에서의 로마 통치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세계적인 확산이라는 새로운 전환점을 말해주고 있다.  


제4장. 로마에 대한 항쟁과 좌절  


이스라엘 백성 또는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 사는 동안에 당한 수모 중에서 최대의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전 723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이나 주전 588년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 아니요, 주후 70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된 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전 2세기에 유대인들은 시리아 헬라인들의 종교 및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여 결국은 100년간에 달하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후 66-73년에 걸쳐 일어난 유대인들의 대(對)로마 항쟁은 유대인의 자유나 독립이 아니요, 유대인 국가의 패망과 성전 파괴라는 악운을 가져왔을 뿐이다.


주후 132-135년에 팔레스타인에서 있었던 두 번째의 대(對)로마 항쟁은 앞서 있었던 봉기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다시 확인해주는 역할만 하였다. 이 두 차례에 걸친 봉기의 실패로 인하여 엄청난 수의 유대인이 살육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민족적 존립의 불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꺼지는 듯 하였다. 

 

이제 주후 1-2세기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대(對)로마 항쟁에 관하여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주후 1세기에 유대 땅을 다스렸던 로마 총독(행정장관)들의 명단과 그 연대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유대 총독 연대표>


주후 6-9년 코포니우스(Coponius)

9-12년 마르쿠스 암비불루스(Marcus Ambibulus)

12-15년 루푸스 티네우스(Rufus Tineus)

15-26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26-36년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36-37년 마루룰스(Marullus)

37-41년 마르켈루스(Marcellus)

41-46년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

46-48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Julius Alexander)

48-52년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52-60년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60-62년 포르키우스 페스투스(Porcius Festus)

62-64년 알비누스(Albinus)

64-66년 게씨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  


전쟁의 불씨들


주후 6년 헤롯 아켈라우스가 죽자 유대인들이 몇 차례 요구했던대로, 이제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로마의 통치는 헤롯 왕가의 통치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문제는 유대인들은 로마인을 이해하지 못했었고, 로마인 역시 유대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양자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주후 6년(아켈라우스가 제거된 해)부터 주후 41년(헤롯 가문의 아그립바 1세가 다시 유대의 권좌에 오른 해)에 이르기까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린 총독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삼류 정치가이거나 대부분 갓 진급한 군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외교수완이나 사회적 예의도 몰랐다

 

유대의 초기 총독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안건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와의 관련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빌라도(주후 26-36년)의 부임 이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분쟁의 불씨를 들자면, 1) 유대인들의 종교적 요구에 대한 로마인의 몰지각, 2) 과다한 세금, 3) 예루살렘에 로마군 주둔, 4)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야 대망 사상 증대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주후 37-41년) 때 문제는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후 37년 칼리굴라가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그는 친구 아그립바(1세)를 팔레스타인 북부 지방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아그립바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방인 폭도들로부터 받은 수모에 관하여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대인 감정을 부추긴 최대의 선동가는 아피온(Apion)이라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도들은 황제의 친구인 아그립바를 우롱한 일로 인해 황제의 진노를 살까봐 두려워서, 위선적으로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의 로마 총독 아빌리우스 플라쿠스(Avilius Flaccus)에게 가서 요구하기를, 유대인 회당에 칼리굴라 황제상을 두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충성스런 로마인임을 보이게 해달라고 하였다. 플라쿠스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종교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익히 알면서도, 정치적인 두려움과 야망 때문에 폭도의 요구에 응하는 편을 택하였다.


플라쿠스가 폭도가 요구한 바대로 명령을 내리자, 유대인들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플라쿠스는 유대인을 외국인이라 하면서 유대인 최고 공회원 몇 명을 공공연히 채찍질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해진 폭도들은 유대인 구역밖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을 400명이나 약탈하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호소하기로 결정,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3명의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이교도들 역시 아피온(Apion)을 포함 3명의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칼리굴라 황제는 아피온의 아첨에 놀아나 필로의 말에 경청하지 않았다. 

 

한편 팔레스타인에서도 신으로 예배 받기를 원했던 칼리굴라가 자신의 상을 성전 안에 세우게 하자, 소요가 발생하였다. 주후 39년에는 야브네의 이방인 주민들이 황제를 위한 제단을 세웠는데, 이 단을 유대인들이 부숴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자신의 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명령을 집행할 의무는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Petronius Publius)에게 부과되었다. 이 위험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필사적인 반대, 로마에 있던 아그립바 1세의 청원, 그리고 유대인의 종교에 동정적이었던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 의하여 잠재울 수 있었다. 

 

칼리굴라는 자신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은 시리아 총독에게 분개하여 자결을 명하였으나, 칼리굴라 자신이 살해되는 바람에 (주후 41년 1월) 페트로니우스 총독은 위기를 모면하였다. 칼리굴라가 살해되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기회가 왔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모으고 시리아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궐기하였다.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유혈극을 멈추라고 쌍방에 명령하였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종교적 특권을 허용하였으나, 공직을 얻으려는 유대인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 주후 46-48년) 총독은 그나마 가장 무해한 총독이었으나, 유대인으로서 이교도로 개종한 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최고 행정장관으로서 가문의 명성과 부와 덕망을 갖춘 유력한 인물이었다. 파두스와 알렉산더 총독 때 유대는 무서운 기근 피해를 입었다. 이때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후는 거액의 돈을 들여 이집트에서 곡식을 사다가 유대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벤티디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주후 48-52년) 총독 때에 매우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종교적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무렵이면, 로마군은 대규모 병력을 성전 회랑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곤 하였었다.


한 번은 유월절의 제4일째 되는 날 한 로마 병사가 바지를 내리고 군중 앞에서 하체의 은밀한 부분을 내보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은 그런 불경스런 행동이 유대인들을 모욕한 행동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모독한 행동이라고 노발대발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쿠마누스 총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병사를 처벌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쿠마누스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몹시 상하긴 하였지만 우선 그들을 달래고자 하였다. 하지만 말로써 유대인들을 진정시킬 수 없자 쿠마누스는 로마군 전 병력을 무장시켜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안토니아 요새로 집결시켰다. 이를 본 유대인들은 겁에 질려 성급하게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길은 비좁은데다가 로마 군인들이 뒤쫓아오는 줄 알고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압사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국 이 소란 때문에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런 비극이 채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토라 두루마리와 관련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자들 중 일부가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던 중 벧호론 길에서 로마 황제의 종을 만나 그를 습격하고 강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쿠마누스는 즉시 병사들을 보내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인근 마을들을 약탈하고 그 마을들의 유지들을 붙잡아 오라고 지시하였다.


총독의 지시에 따라 약탈 나갔던 로마 병사들중 하나가 모세의 토라 두루마리를 발견하고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온갖 욕설을 내뱉으면서 그것을 갈기갈기 찢고 불에 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수많은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로 가서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쿠마누스 총독은 행여 폭동이 일어날까 봐 결국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고는 토라를 모욕한 로마 병사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러 온 한 무리의 갈릴리 순례자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도중에 사마리아인들에게 습격을 받아 피살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총독은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무리의 열심당원들이 사마리아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하여 잔혹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총독은 이 열심당원들에 대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였다. 우연히 당시 로마에 가 있던 아그립바 2세가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설득하여 사마리아인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총독 쿠마누스를 직위 해제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는 진정될 수 있었다. 

 

후임자는 황제의 총신(寵臣)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주후 52-60년, 사도행전 23:24 이하 참조)였다. 그는 얼마 안되어 곧 백성들의 미움을 샀다. 그의 사생활은 지저분하였다. 그는 세 번 결혼하였다. 그의 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드루실라(Drusilla, 사도행전 24:24 참조)는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으로서 원래 유부녀였는데, 그가 빼앗다시피 하여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직위를 남용하여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따라서 반로마 감정은 그의 치하에서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 무렵에는 이미 항상 단검(시카)을 품고 다닌다고 하여 시카리 당이라고 하는 집단이 결성되어, 팔레스타인 땅은 살인이 횡행하였다. 주후 50년대 말기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면서,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분쟁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포르키우스 페스투스(Porcius Festus, 주후 60-62년)는 공정하고 이로운 사람이었지만 (사도행전 24:27 이하 참조) 그의 짧은 재임 기간에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 후임자로 온 뻔뻔스럽고 악독한 알비누스(Albinus, 주후 62-64년) 치하에서 유대 땅에서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한편 총독 통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은 은밀히 반역의 싹을 틔우며 언젠가는 폭발할 기세로 무르익어 갔다.   


제1차 봉기의 발단


로마의 마지막 유대 총독 게씨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 주후 64-66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이 땅을 아주 노골적이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강도 짓이든 무엇이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대투쟁의 서막은 주후 66년에 가이사랴에서 올랐다. 헤롯 대제가 건설하였고, 로마 총독이 거주하는 가이사랴에서는 이방인 주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항상 알력이 있었다.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사이에 다시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플로루스는 분쟁을 해결하기는커녕, 유대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서도 도리어 도움을 요청하는 유대인 대표자들을 감금하고 추궁하였다. 이는 모두가 플로루스의 탐욕 때문이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플로루스는 로마 황제의 뜻이라고 하면서 성전 금고에서 황금 17달란트를 강탈해 갔다. 분개한 유대인 군중은 바구니를 돌리며 "불쌍한 플로루스"를 위하여 적선하라면서 그를 조롱하였다. 이러한 모욕을 이 로마인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는 군대를 풀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살육하였다. 총독은 백성이 사과하지 않을 경우 그보다 더한 일을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상 살펴본 대로 유대 땅에서 다스린 로마의 총독들은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이와 더불어 민족적 자긍심과 온전한 자유독립의 이념 아래 마카비 반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외부 세력에 대한 투쟁 정신과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이 대로마 항쟁을 가열시키는 중요한 요인들이 되었다.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조롱 당하여 크게 격분한 플로루스는 군사들을 시켜 이 성의 일부를 마음대로 약탈하도록 시켰고,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베레니케(아그립바 2세의 누이)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대는 아주 잔혹하게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후 플로루스는 이 도성의 주민들에게 가이사랴에서 그 성으로 입성하는 로마의 2개 보병대를 환영하는 행사를 베풀라고 명령하였다. 

 

예루살렘의 평온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있던 대제사장은 백성들에게 그 명령을 따르라고 설득하였다. 백성들은 이 굴욕적인 명령을 받아들였으나, 플로루스의 지시를 따라 로마 군인들이 백성들의 환영 인사에 답례를 하지 않자, 백성들은 총독을 욕하며 불만을 터뜨렸고, 로마군은 무력을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격분한 예루살렘 주민들은 성전 구역을 점령하고 성전 구역과 안토니아 요새 사이에 있던 연결 통로인 주랑(柱廊)을 헐어버렸다. 

 

이때에 플로루스는 반도(叛徒)들을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가이사랴로 물러갔고 예루살렘에는 1개 보병대대만 남겨두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그립바 2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대중 연설을 통하여 백성에게 저항을 포기하고 플로루스에게 복종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그립바 2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성을 떠났다. 사실인즉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 베레니케는 폭도의 분노의 위험을 피하여 성에서 도망쳐 나와야했다. 이때부터 아그립바 2세는 봉기 내내 로마편에 섰다.


이제까지의 투쟁은 로마 총독 플로루스에 대한 것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로마에 대한 투쟁으로 바뀌었다. 예루살렘은 반도들 세상이 되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전직 대제사장 하난의 아들 엘르아살이었다. 그는 성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반도들은 멀리 사해 서안에 있는 맛사다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예루살렘에서는 엘르아살의 선동으로 황제를 위해 날마다 드리던 희생제사를 중단하고 이방인을 위한 그 어떤 희생제사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평화주의자들과 귀족들은 그의 행동에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나, 그는 젊은 제사장들과 혁명가들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한편 대제사장은 다수의 제사장들 및 바리새파 지도자들중 화친파 인사들과 함께 무력으로 반도들을 진압하고자, 플로루스와 아그립바에게 각각 사신들을 보내어 혁명당원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플로루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인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에 사신들에게 아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그립바 2세는 로마군과 유대인들 쌍방에게 용서해주고 자제할 것을 간청하는 한편, 이들의 요청에 따라 3000명의 기병을 보냈다. 아그립바 2세의 기병대는 이미 성안에 있던 로마군에 합류하여 성전을 제외한 성 전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성내 화친파와 아그립바의 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군에 밀려나고 만다. 예루살렘 성내 반도들의 우두머리 자리에는, 맛사다로 가서 헤롯왕의 무기고를 열고 무기를 탈취하여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메나헴이 서 있었다.


성전 구역에는 조그만 단검을 차고 다닌다고 하여 시카리라고 불리는 가장 급진적인 무리가 진을 치고 있었다. 예루살렘 무리의 대부분은 혁명당원 편에 서서 싸웠는데, 그들은 빚문서가 보관된 문서보관소를 닥치는 대로 불태웠다. 부유한 귀족들의 집들도 불에 탔으며, 도망치지 못한 귀족은 살해되었다. 반도들은 심지어 안토니아 요새까지 점령하였다. 이어서 로마 보병대의 대다수가 살육되었고, 대제사장도 살해되었고, 헤롯궁의 일부는 불에 탔다. 이제 반도들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메나헴과 그의 무리가 야만스러울 정도로 난폭하고 잔인하게 굴자, 하난의 아들 엘르아살과 그의 추종자들을 결국 메나헴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의 대(對)로마 봉기의 발발로 로마제국내 여러 도시들의 이방인 인구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가이사랴에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한 시간도 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무려 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하였다. 이런 일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섞여 사는 다른 도시들에서도 속출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무리를 지어 팔레스타인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방 마을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위험에 처한 유대인들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학살극은 팔레스타인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최악의 사건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발하였다. 거기 폭도들은 이집트 총독으로서 유대교를 떠난 티베리우스 알렉산더가 보내준 군대의 지원을 받아 성내 유대인 구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무시무시한 학살극으로 인하여 무려 5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반란 토벌군의 대거 출동


총독 플로루스는 더 이상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주후 66년 가을에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로마군 제12군단 전체와 나머지 각 군단에서 2000명씩 차출한 병력과 6개 보병대와 4개 기병대와 그밖에 속국의 왕들이 보낸 원군들을 총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안디옥으로부터 진격해 왔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케스티우스의 군대는 지중해변의 항구도시 욥바를 비롯 많은 유대인 마을을 점거하고 파괴하였다. 북쪽의 갈릴리 지역은 제12군단의 지휘관인 갈루스(Gallus)에게 충분한 병력을 딸려보내어 유대인 반군들을 진압하게 했다.


케스티우스의 대군이 예루살렘 앞에 도착한 것은 초막절 때였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유대인 순례객으로 가득하였다. 예루살렘 성 북쪽의 전망산에 진을 치고 성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던 그는 자신의 군대로는 이 도성을 점령하기에 역부족임을 깨닫고는 퇴각하였다.


그의 군대는 벧호론의 옛 길에 있는 산지를 내려오던 중에 반도들에 의해 사방에서 기습을 받아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고 군수물자와 무기는 거의 다 빼앗기고 겨우 일부 병력만 이끌고는 운 좋게 피신하여 안디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도들은 이 날의 승리로 이 땅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반란 지도자들은 예상되는 반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이 땅 전역에 걸쳐 전열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제까지 어느 편에도 서려고 하지 않았던 중산계층의 평화주의자들은 이제 자기들 백성의 운명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도 지도부에 든 사람이 있었는데, 요셉 벤 고리온, 하난이라고 하는 전직 대제사장, 힐렐의 후손인 시몬 벤 가말리엘 등이다. 전국은 여러 지구로 나뉘어졌고, 각 지구에는 한 명의 사령관이 배치되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못지 않게 중요한 전장(戰場)이었다.


 마타티아의 아들 요셉이 갈릴리의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후대에 유대인 역사가로 알려지게 될 요세푸스였다. 요세푸스는 온건파여서 사태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적당한 선에서 로마 세력과 타협할 것을 바랐다. 그래서 그는 상부 갈릴리의 구쉬 할라브에 거점을 두고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이라는 인물이 이끌고 있었던 열심당원들의 반대를 받았다. 이 요하난은 요세푸스를 반역자로 낙인찍고, 그를 제거하고자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요세푸스는 겨우 살해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분은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네로 황제(주후 54-68년)는 시리아 총독이 참패를 당하고 우연인지는 모르나 곧 죽게 된 것을 보고 백전노장 중의 한 사람인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Flavius Vespasianus)에게 반란 진압의 임무를 맡겼다. 베스파시안은 주후 66-67년 겨울에 전쟁 준비를 하였다.


로마군 제15군단과 몇몇 기병대 파견단이 그에게 배속되고, 안디옥에서는 로마에 복속한 시리아 왕들로부터 추가 병력 지원을 받았고, 아그립바 역시 수천 명의 병력을 지원하였다. 그는 자기 아들 티투스(Titus)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어 거기서 로마군 제5군단과 제10군단을 이끌고 오도록 하였다.


이 연합군은 프톨레마이스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베스파시안은 주후 67년 봄에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갈릴리의 세포리스로부터 로마 병력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중요한 하부 갈릴리 지역을 곧장 점령할 수 있었다. 갈릴리 지역의 수도 세포리스는 헤롯 안티파스가 건설한 도시로서, 주로 비유대인계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다. 

 

티투스가 프톨레마이스에 도착함으로써 이제 베스파시안의 휘하에는 총 6만 명 이상의 잘 훈련되고 훌륭한 군수를 갖춘 대군이 집결되었다. 베스파시안은 로마의 세 군단(제5, 10, 15군단)과 지원부대를 이끌고 프톨레마이스로부터 먼저 갈릴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갈릴리의 요새들은 로마대군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내렸다. 주후 67년 7월 요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에게 투항하였다.


그후 요세푸스는 로마 장군의 참모진에 배속되어 유대인 반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요세푸스의 투항으로 갈릴리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가용한 유대인 반군은 티베리아로 집결하였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 가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강력한 로마의 대군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유대인들중 겨우 살아남은 자는 유대 지방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갈릴리 방어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주후 67-68년 겨울에 로마군은 갈릴리 전투를 마치고, 겨울 막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제5군단과 15군단은 가이사랴에, 제10군단은 스키토폴리스(=벧산)에 겨울 막사를 정하였다. 이제 예루살렘에서의 결전이 점점 다가왔다.


갈릴리 방어선이 쉽게 무너지자 이 봉기에 동조하려 했던 주변의 모든 세력은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다. 다만 한 세대 전에 유대교로 개종한 바 있던 아디아베네(Adiabene)의 왕가만이 인원과 양식을 보내왔다. 파르티아뿐만 아니라 로마 세계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역시 이 실패에 임박한 봉기를 돕고자 일어날 리가 없었다.  


유대인 반란군의 내분


예루살렘에서는 몰지각한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갈릴리 전투의 패배로 이제까지 봉기를 주도해왔던 지도부의 위치는 약화되고 급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요세푸스를 갈릴리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한 지도부는 비난을 받았다. 이들 역시 배반자라고 하여 결국은 열심당원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갈릴리에서 티투스로부터 도망쳐 나온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와서 산헤드린을 비판하였다.


열심당원들은 성전 구역을 점령하였으나, 이미 반대자들을 많이 숙청한 바 있던 이 광분한 자들에게 자신을 맡기기를 원치 않았던 성내 주민들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열심당원들은 이두매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그들을 도우러 진군해온 이두매인들 덕분에 예루살렘의 반대파들을 압도하고 그들 중 많은 수를 죽이고 성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거짓된 구실로 동원되었던 이두매인들은 이런 결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다시 물러갔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대체로 열심당원들이 온건파를 누르고 세력을 장악하였다. 초기의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가 예루살렘을 떠나 봉기의 영향권밖에 있었던 요르단 강 건너편 펠라로 간 것은 바로 이 때쯤이었을 것이다. 

 

베스파시안은 반군이 예루살렘에서의 내분으로 약화되어 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주후 68년 봄에 그는 예루살렘 근방의 반란 지역들을 복속시켰다. 마케루스 요새를 제외한 베뢰아 전 지역도 점령되었다. 해안 평야지대와 슈펠라와 이두매의 반란 지역들과 여리고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 전투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가 이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고 있을 때, 네로 황제가 죽었다는 (주후 68년 6월 9일) 소식이 가이사랴에 있던 그에게 들려왔다. 네로 자신의 어리석은 짓으로 인하여 로마에서는 혁명과 짤막한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에 네로는 자살하였던 것이다.


베스파시안은 로마에서 진행되는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고 유대인 반란군에 대한 전투를 일단 중단시켰다. 반도들은 몰지각한 동족상잔의 내분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더욱 소진시켜 가고 있었다. 시몬 바르 기오라라는 도적 두목이 로마군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지역들을 휩쓸고 다니면서 약탈을 자행하였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이 성에 있던 열심당원들을 공격하였다.


예루살렘은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의 폭정에 넌더리가 나 있었기 때문에 시몬 바르 기오라를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이 이끄는 열심당원들은 성전 구역으로 물러갔고, 시몬 바르 기오라는 이 도성의 나머지 지역을 다스렸다 (주후 69년 봄). 예루살렘 내 유대인 반군은 이처럼 통일된 조직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 세력들을 정리하면,

1) 전쟁 전에 옷속에 단검을 가지고 다니면서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살해하곤 했던 시카리당,

2) 시몬 바르 기오라의 추종자들 (이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를 메시야로 간주하고, 그의 이름 아래 로마인이나 다른 무리의 반란군에 대하여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음),

3) 로마가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통치한 이래 계속하여 투쟁해온 세력인 열성당원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봉기가 실패한 이유중의 하나는 반군의 여러 세력이 서로 협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설사 연합했더라도 로마대군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과 맛사다 함락


주후 69년 6월에 베스파시안은 로마의 상황이 일단락 되었다고 보고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다시 준비하였다. 로마에서는 네로가 죽자 갈바(Galba)가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주후 69년 1월 15일에 살해되었다. 이제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던 오토(Otho)가 황제가 되었다.


이러한 로마의 사태에 따라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은 다시 연기되었다. 게르만 군단들은 하부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비텔리우스(Vitellius)를 경쟁적으로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이 동방으로 전해지자, 동방에 주둔해있던 군단들도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주후 69년 7월 1일에 베스파시안을 이집트의 황제로 선포하였고, 곧 이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황제로 선포하였으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로마 제국의 동쪽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주후 69년 12월 20일에 비텔리우스가 로마에서 살해된 후 최종적으로 로마에서도 승리를 거둔 베스파시안은 주후 70년 여름에 로마로 가서 황제 자리를 둘러싼 문제에 몰두하였다. 따라서 주후 69년은 아무 일없이 지나갔다. 팔레스타인의 반도를 진압하는 임무를 이어받아 완료할 책임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맡겨졌다.


티투스는 주후 70년 봄에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에게는 4개 군단과 수많은 지원부대들이 있었다. 로마군 총병력은 80,000명, 곧 70,000명의 보병과 10,000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고, 당시 예루살렘은 23,400명의 유대인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티투스는 자기 아버지의 세 군단, 즉 제5, 10, 15 군단 외에도, 전에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의 지휘 아래 유대인들에게 패한 적이 있었던 제12군단을 휘하에 두었다. 제5군단은 엠마오에서 제10군단은 여리고에서 출정하였다. 그 자신은 제12군단과 제15군단을 이끌고 가이사랴에서 올라와 북쪽으로부터 접근하여 유월절 직전에 성밖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예루살렘 북쪽 전망산에 진을 쳤다. 

 

앞서 말했듯이 로마군이 진격해오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에서는 유월절 기간에 여러 당파들간에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벌어졌었다. 온건파와 열심당원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대중 가운데 지지기반이 넓은 온건파가 우위를 점하고, 열심당원은 성전 구역으로 내몰렸다. 열심당원은 이두매 파견대를 불러들여 한밤중에 온건파를 덮쳤다. 예루살렘 거리는 유대인의 피가 가득 차게 되었고, 열심당원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내분의 끝이 아니었다.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열심당원들 사이에 경쟁이 있었다. 요세푸스와 원수지간으로서 요타파타 함락 때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나온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 엘르아살 벤 시몬, 시몬 바르 기오라가 서로 다른 세 무리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주후 70년 이른 봄 로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모든 당파들은 힘을 합쳐 성을 방어하기로 결정하였다. 북서쪽 지역은 시몬 바르 기오라가, 성전과 안토니아 요새 근처인 북동쪽 지역은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이 맡았다. 굶주림과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성내의 지도자들은 항복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티투스는 도성을 탄탄한 공성용 누벽(攻城用 壘壁)으로 둘러쳐서 성과 외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하였다. 그는 성에서 탈출하여 나온 사람들을 성에서 잘 보이는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티투스는 몇 차례 요세푸스로 하여금 성안에 대고 항복하라고 설득하는 연설을 하게 했으나, 성안에서는 이 반역자에 대하여 돌덩이와 더불어 욕지거리만이 날라 올뿐이었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마침내 주후 70년 7월에 안토니아 요새가 점령되었다.


 성안에서는 전쟁과 기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는 희생제물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평상시대로 지속되었다. 타무스월 17일에 희생제사가 멈췄다. 같은 해 8월에는 (아브월 9일) 성전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제2성전 수축에 대한 헤롯 대제의 원대한 계획은 불과 몇 해 전인 주후 64년에 완결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이 영광을 단지 몇 년만 누리는데 그치고 만 것이다. 서쪽 언덕의 윗성에 있는 헤롯궁으로 퇴각한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이 이끄는 열심당원들의 마지막 저항도 주후 70년 9월에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함락된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무차별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생포된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과 시몬 바르 기오라는 한 무리의 선별된 포로들과 함께 개선 행진을 위하여 로마로 끌려갔다. 이듬해에 대장군 티투스는 개선 행진을 통하여 로마인들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혁혁한 승리를 과시하였다.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의 개선문은 아직도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 개선문을 보면 그가 전리품으로서 금으로 만든 상(床), 레위인들이 사용하던 악기들, 메노라(등대) 등 성전 기명들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베스파시안은 '유대 카프타'(Judaea Capta="유대 점령되다")라고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여 이 승전을 기념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점령으로 전쟁은 일단락 되었으나 유대인의 봉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헤로디움, 맛사다, 마케루스, 이들 세 곳의 요새가 아직도 유대인 반군의 수중에 있었다. 티투스는 제10군단을 수비대로 주둔시키고 유대 총독에게 그 처리를 맡겼다.


예루살렘 전투 동안에 총독 베툴레누스 케리알레스(Vettulenus Cerialis)는 제5군단의 지휘관이었다. 예루살렘 함락후 그의 후임으로 바수스(Lucilius Bassus)가 부임하였다. 헤로디움은 쉽게 그의 수중에 들어오고, 베뢰아 남쪽 지역,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 요새는 한동안의 포위 후에 저항군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후퇴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맛사다 뿐이었다. 

 

맛사다는 주후 66년 메나헴의 친척인 야리우스의 아들 엘르아살이라고 하는 갈릴리인의 지휘 아래 한 무리의 시카리들이 점령하였었다. 루킬리우스 바수스는 이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고 주후 72년에 죽었다. 이 임무는 후임 총독인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에게 넘겨졌다. 로마군은 누벽을 쌓고, 공성추를 옮기기 위하여 거대한 보(堡)까지 쌓았다. 주후 72년 여름 마침내 맛사다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의 도움을 받아 공성추를 성벽 가까이까지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주후 73년 봄의 일이었다.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불이 붙자, 맛사다 요새내 모든 저항군에 대한 살육은 초를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패배를 인지한 반군은 요새내 궁전에 방화하고 모두 자결하였다. 오직 두 명의 부녀자와 다섯 명의 어린아이들만이 피신하여 이 소름끼치는 비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1차 반란 실패의 대가


이상 주후 66-73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대로마 항쟁을 가리켜 제1차 반란(또는, 봉기)이라고 부른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Tacitus)의 진술에 따르면, 이 대반란은 6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인구의 1/4 가량이 죽은 셈이 된다. 타키투스는 "로마는 폐허로 만들어놓고 이것을 평화라고 불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로마는 유대인에 대하여 승리를 쟁취했지만 이 승리는 위대한 용맹과 전술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수적인 우세에 의한 것이었다.


이 승리가 속빈 강정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로마는 엄청난 개선 행렬을 벌렸고, 이 전쟁을 기념하는 의미로 특별 화폐까지 주조했을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만큼의 가능성이 없던 거대한 국가의 정복을 기념하는 양 거대한 티투스 개선문을 세우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봉기가 진압된 후 수천 명의 유대인이 노예로 팔리거나 강제 노동을 위하여 광산으로 보내졌다. 티투스는 포로 중에서 700명의 준수한 젊은이들을 뽑아 로마에서의 개선 행군에 참가시키고, 이어서 검투사로 등록시켰다. 구쉬 할라브의 요하난은 아마도 병약하여 개선행군에 적합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종신형에 처해졌고, 시몬 바르 기오라는 개선행군에 참가시킨 후 곧바로 처형하였다.


제1차 봉기 이후 로마는 유대 속주를 시리아 속주에서 독립시키고 원로원에서 책임지는 상위 직급의 로마 총독을 임명하여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로마는 이스라엘 땅 안에 1개 군단 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하에 북쪽의 시리아에 4개 군단을 두는 반면 이스라엘 땅에는 단순히 보조부대(auxila) 정도로 만족해 왔었다. 그러나 이 반란을 계기로 로마는 유대 속주에 제10군단을 영구 주둔시킨다. 여기에 이후 바르 코크바의 반란(주후 132-135년)을 계기로 제5군단이 가세된다. 

 

제1차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팔레스타인 땅은 황폐해졌고 경작할 사람도 사라졌다. 전쟁중 로마군은 과실나무들을 자르곤 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에 로마군은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나무를 망쳐놓음으로써 거의 황무지와 같이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Pliny)는 감나무들이 뽑히는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그 흔치 않은 나무가 로마군의 손에 들어가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농토는 주후 1세기 말엽 내지 2세기 초엽까지는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누려오던 정치적 자율권도 완전히 빼앗기고, 산헤드린도 없어졌다. 게다가 전세계 유대인의 종교 및 정치적 결집점이었던 예루살렘과 성전을 상실한 일은 곧 유대인의 자부심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베스파시안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관례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보내던 반세겔의 성전세를 '유대인 인두세'(Fiscus Judaicus)라는 명목으로 바꾸고 로마의 국고에 넣게 하였다.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할 것 없이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세를 보내는 대신 로마의 카피톨리네(Capitoline) 언덕 위에 있는 주피터 신전으로 '유대인 인두세'를 보내야 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인두세 외에도 토지세까지 물어야 했다.


더욱이 이들의 반역적인 기질 때문에 로마는 이들에게 주변국보다 더욱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켰다고 한다. 여기에 유대 속주에 영주하게 된 로마 10군단의 재정적인 부담도 걸머지게 되었으니 팔레스타인내 유대인의 재정적 고충이야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봉기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 멸망의 수치를 함께 나누는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제1차 봉기 실패 후 유대 땅에서 도망쳐 나온 시카리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이집트에서 잠깐 미미한 소요가 있었으나 바로 진압되었다. 그 벌로서 헬리오폴리스에 서 있던 유대인들의 오니아스 성전이 폐쇄되었다.


트라얀 황제는 주후 110년경 로마제국의 경쟁자인 동방의 파르티아로 군사원정할 계획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서 유대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유대 땅이 국경 지대에 있었고, 또 파르티아 서부 지역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얀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성전 재건을 약속한 듯하다. 마침내 트라얀의 파르티아 원정은 시작되었다. 초반에 그의 원정은 결실을 맺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진하는 그의 군대 뒤에 있는 이제 막 점령한 속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파르티아의 전사들은 트라얀의 퇴각로를 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중에는 파르티아의 유대인들도 로마에 대항하여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이로써 트라얀은 파르티아 원정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파르티아 침공은 유대인들에게 또 다시 반란의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트라얀(주후 98-117년) 통치 때인 주후 115-117년 사이에 디아스포라 곳곳에서 유대인들의 대로마 항쟁이 번졌다. 이집트, 키프로스, 키레나이카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기간에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파르티아의 통치자들과 함께 그 나라에 침범한 로마에 항거하여 전쟁을 벌였다.


유대인들은 로마군대가 파르티아 원정에 참가한 틈을 노려 로마 제국내 위의 세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그동안 당한 패배와 수모를 보복하기 시작하였다. 트라얀은 투르보(Turbo) 장군을 보내었다. 투르보의 군대는 소요 지역 내 이방인까지 받아들여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키프로스 섬에서는 수천에 이르는 유대인 인구 전체가 살육되었다. 그리고 이 섬에 결코 유대인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이때부터 결정적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주후 115-117년의 봉기는 로마 점령지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이집트 유대인들의 대량 학살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 전쟁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힌 주된 소요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정치적 긴장과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이러한 소요를 일으키는데 늘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트라얀은 이러한 소요를 진압하고 반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그는 유대 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대인 반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마우레타니아인 장군 루시우스 키에투스(Lusius Quietus)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주후 115-117년의 봉기는 이 무어인 장군의 이름을 따라 '키토스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


주후 117년 유대는 로마의 집정관(consul)이 통치하는 속주가 되었다. 이 해에 하드리안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로마 황제 하드리안(Hadrian, 주후 117-138년) 때의 봉기에 대한 자료는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LXIX, 12-14)와 유세비우스(Hist. eccl. LV, 6)에 나오는 짤막한 말들과 그밖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자료들뿐이다. 이 봉기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사료마다 다르다.


하드리안은 헬라 문화에 심취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헬라어를 완벽히 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헬라 고전을 즐겨 읽었고 헬라 문화의 부흥에 온갖 힘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 대학을 쇄신하고, 웅대한 도서관을 세웠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제우스 신전을 완공시켰다. 하드리안은 통치 초기때 본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생각을 하였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실망하였다.


곧 이어 하드리안은 예루살렘에 눈을 돌려, 예루살렘이란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성으로서 앨리아 카피톨리나라고 새로 명명하는 한편, 예전 유대인의 성전이 섰던 자리에 주피터를 위한 신전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어서 하드리안은 전 로마 제국에서 할례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로마 황제의 이러한 정책이 유대인의 반항을 피할 리가 만무했다. 이리하여 번진 사건이 유대인의 제2차 대반란이다. 이 반란은 주후 132-135년 사이에 계속되었으며, 바르 코크바라는 장군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봉기는 하드리안이 동방을 떠난 주후 132년에 발발하였다. 로마인은 처음에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반군은 처음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시몬 바르 코크바를 수장으로 독립을 획득하였다. 예루살렘은 해방되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전국을 통치하였다. 무엇보다 혁명화폐가 이를 입증해준다. "시몬, 이스라엘의 왕",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해방" 등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문(銘文)이 새겨진 특별한 주화들이 주조되었다.


그러면 유대인 제2차 반란의 주모자 바르 코크바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코크바'는 히브리어로 '별'이라는 뜻이다. '바르'는 아람어로서 히브리어의 '벤'에 해당하며 '아들'이란 뜻이다. '벤'이나 '바르' 뒤에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그 사람의 아들이나 자손이란 뜻이다 (히브리어나 아람어나 다같이 한 단어로써 아들과 자손을 표현한다). 그리고 '벤'이나 '바르' 다음에 다른 명사가 뒤따르면 그 명사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나 존재를 뜻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바르 코크바'는 직역하면 '별의 아들'이 되지만, '별 같은 존재' 또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거성'(巨星)의 뜻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바르 코크바는 거성 같은 존재였다. 사해 근처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많은 고고학 자료들과 학자들의 연구 덕택에 오늘날 바르 코크바는 이스라엘에서 삼척동자라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을 성취하려 했던 민족적 영웅이었다. 그의 투쟁은 약 2년 반 가량은 아주 성공적인 것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의 절대 지지와 더불어 메시야적 기대감마저도 북돋아주었다.


바르 코크바는 아주 엄한 지휘관이었다.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자료들에 의하면 (심지어 바르 코크바가 직접 쓴 편지들도 발견되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르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처형하곤 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반대 발언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독재적 영웅상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유대인에게는 그와 같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어쨌든 그는 여러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민족혼과 투쟁 정신은 유대인들에게 새 힘을 불어넣었다.


당대의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랍비 중의 랍비라고 불릴 정도로 유대교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당시 바르 코크바가 정치적 영웅이었다면 랍비 아키바는 종교적 영웅이었다.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와 그의 승리를 통하여 예언의 성취를 보는 듯하였다. 유대인 나라의 구속을 위하여 열 지파가 다시 이 땅에 돌아오는 것이나 엘리야의 출현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소위 '주의 날'에 관한 예언의 실현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랍비 아키바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구절을 (민수기 24:17) 당대의 영웅 바르 코크바에게 적용시켰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적 예언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당시 다른 랍비들의 반발에 부딪친다. 탈무드에서는 바르 코크바가 불경스럽다고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가 한번은 "하나님이시여, 도움도 필요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위해 일을 그르치지만 말아주십시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란군의 투쟁도 맹렬하였지만 로마군의 진압 또한 처참할 정도로 잔인한 것이었다.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유대 땅의 총독은 티네이우스 루푸스(Tineius Rufus)였다. 그는 봉기를 진압할 수 없었다. 반군은 로마군대와의 공개적인 접전을 피했다. 그들은 여러 요새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에 웅거하여 게릴라전을 펼침으로써 적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시리아 속주 총독 푸블리우스 마르켈루스(Publius Marcellus)가 봉기의 진압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로마군은 여전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결국 하드리안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에서 이미 자신의 진가를 입증한 바 있던 브리타니아 총독 율리우스 세베루스(Julius Severus) 장군에게 유대인과의 전쟁을 수행할 것을 명하였다.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세베루스는 당시 켈트족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하여 영국 전선에 파견되어 있었다. 하드리안은 영국을 집압하는데는 그보다 못한 장군과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로마제국의 수호에 대한 위협보다는 유대인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세베루스는 35,000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로마군단들과 지원부대를 이끌고 바르 코크바의 군대와 싸웠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군대는 초전에 불명예스러운 참패를 하게 되었다. 세베루스는 정면대결로는 유대인에게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초토화 작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반군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고려하여 전면전을 택하지 않고, 반군의 수많은 거점들을 포위하여 그들이 굶주려서 스스로 항복하기까지 기다리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희생이 적은 전술을 택하였다.


마침내 그는 이 봉기를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대반란은 주후 135년 여름 마지막 요새인 예루살렘 남서쪽 베타르가 함락되고 시몬 바르 코크바가 죽음으로써 3년 반만에 끝을 맺는다. 타나임의 전승에 따르면 베타르가 로마군의 수중에 떨어진 날 역시 제1,2차 성전이 파괴된 아브월 9일이었다고 한다. 

 

완강하고 끈질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팔레스타인 땅은 초토화 되었다. 유대 거민들의 상당수는 목숨을 잃었다. 자그마치 58만 명의 인명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하드리안은 원로원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이 시대의 상투적인 형식이었던 "나와 군대는 편안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생포된 반군들은 마므레에 있는 아브라함의 상수리나무 옆 시장이나 가사의 노예 시장에서 팔려가거나 이집트로 강제 이주되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러한 포로의 수는 엄청났기 때문에 그들은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진압된 후 팔레스타인 땅에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하드리안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위에 앨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의 이교 도시를 재건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 정복기까지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 출입과 접근을 금지 당하였다. 오직 일년에 하루, 아브월 9일에만 성전이 파괴된 날을 애도하도록 방문을 허용하였다. 하드리안 황제는 또한 유대라는 속주 이름을 '시리아-팔레스티나'(Palestina) 곧 팔레스타인으로 바꿨다.


이는 이스라엘 땅과 유대 국가 사이의 연관성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명백한 시도였다. 하드리안은 또한 유대인의 할례 행위, 절기 결정에 필요한 책력(冊曆)의 제정, 안식일과 유대 명절의 준수 및 토라 두루마리의 소유와 교육 등을 완전히 금하였다. 토라를 소지하고 있는 자는 발견되는 대로 사형에 처해졌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듯이, 유대 백성은 토라 밖에서 살 수 없다"고 가르쳤던 랍비 아키바는 이 금령들을 거부함으로써 아흔의 늙은 나이에 순교의 길을 걸었고, 유대교의 대표 기관인 '벧딘'(법정)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들은 학살되거나 아니면 추방 또는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은 쫓겨나고, 하드리안의 계획대로 이방신 주피터가 당당하게 거기 자리를 잡고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유대교의 중심은 전쟁 피해를 덜 입은 북쪽의 갈릴리로 옮겨졌다. 주후 212년 카라칼라(Caracalla) 황제는 로마 제국내의 모든 자유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주었다. 이때 유대인에게도 처음으로 동등한 지위가 부여되었다.   


주후 66-73년과 132-135년 두 차례에 걸친 유대인의 대로마 항쟁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기 보다는 좌절과 파멸로 향하는 무모한 몸부림과도 같았다. 무수한 인명을 앗아가고 성읍들과 땅을 초토화시킨 이들 항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칼로는 자유와 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 칼은 오직 또 다른 칼을 불러들여 피를 흘리게 할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이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누가복음 12:49)고 하였다. 그는 칼이 아닌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불로써 인간의 죄성을 태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주고자 온 것이다. 

 

제5장. 랍비 유대교의 탄생과 발전  


주후 66-73년에 걸쳐 발발하였던 유대인의 대로마 1차 반란의 실패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무수한 유대인이 학살된 일은 마치 유대 민족의 존속 자체에 종지부를 찍는 듯 하였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역사적 맥락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고 꾸준히 무한한 생명력을 발산해 내었는데, 그것은 그들 국가의 정치적 독립이나 자치를 통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특정한 민족 공동체적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불굴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야브네로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다시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그 안의 유대인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던 주후 68년으로 돌아간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이다. 랍비 요하난은 평화주의자였다. 당시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라반 시몬 벤 가말리엘과는 달리, 요하난은 봉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광적인 유대인 폭도들을 경고하면서 자제해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주후 68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두 해 전 대세를 짐작한 랍비 요하난은 무사히 예루살렘을 빠져 나온다. 그의 예루살렘 탈출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서 많은 사람의 귀에 쟁쟁할 것이다.


그의 예루살렘 탈출기는 이와 같이 전해진다. 요하난의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다고 공포한 다음에 그의 시신을 성밖에 묻으려 하니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성안에는 의심으로 가득찬 유대인 열성당원이, 그리고 성밖에는 잔인한 로마 군대가 있었다. 요하난을 실은 관이 성 밖 안전한 곳까지 무사히 빠져나오자 랍비 요하난은 관 밖으로 나와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토벌군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안에게 찾아간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야브네라는 곳에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 살면서 유대인들에게 토라를 가르치고자 하니 그곳만은 로마군의 화를 면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로마 황제의 자리를 내다보고 있던 베스파시안으로서는 이러한 중도파 유대인 지도자를 살려둘뿐 아니라 그의 청원을 들어주는 것이 로마 제국의 안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계산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요하난은 곧바로 야브네로 갔다. 무모한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생명을 부지하여 동족의 장래를 위하여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갈릴리와 유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요하난의 일이 시작되었다. 그는 야브네에 예쉬바(토라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만이 회복으로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핵심이 되는 성전이나 산헤드린이 없이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느냐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바벨론 디아스포라 출신인 힐렐의 해석 방법과 행위 규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힐렐의 가르침이 성전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디아스포라라는 상황 가운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인에게는 매우 적절했던 것이다. 

 

이제 산헤드린은 더 이상 모일 수 없었다. 요하난은 71인의 학자를 모았다. 그리고 산헤드린과 비슷한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야브네에는 제사장들이 중심 되었던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신 '벧딘'('법정'이라는 뜻이 있음)이 서게 되고, 이곳에서 랍비 요하난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 달력을 확립하고, 유대 명절의 정확한 일자를 설정하는가 하면, 정결과 부정함의 문제를 논의하는 등, 랍비 유대교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하난 벤 자카이와 그의 동료들은 토라 연구를 중시하였다. 유대인들 가운데 지도층은 랍비라고 불렸는데, 이는 '위대한 이' 또는 '상급자(上級者)'라는 뜻이다. 랍비는 후에 '나의 스승'이라는 뜻의 호칭으로 발전한다. 벧딘 구성원은 랍비의 지위를 가져야 했다. 벧딘의 대표 또는 나씨는 라반이란 별도 호칭을 사용하였다.


주후 70년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유대인의 법과 실천이라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성전 중심의 많은 의식이 가정 또는 회당으로 전이되었음을 보게 된다. 요하난은 성전에서만 거행되었던 몇 가지 예배 의식을 회당 안에 도입하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였다.


예를 들자면, 제사장의 축복, 나팔절에 쇼팔(양뿔 나팔)을 부는 것, 초막절에 룰라브를 흔들며 행진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성전 파괴와 더불어 충분히 예측된 일들이었다. 사실 성전 없이 종교 의식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성전 파괴 이전에도 디아스포라와 심지어는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자기 고향에서 절기를 지킨 많은 유대인들에게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런 이들의 종교적 경험은 성전 파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후 70년경에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곳곳에 회당이 산재하였었다. 아마도 로마는 반역적인 팔레스타인에서 많은 회당 건물들을 파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당은 건물보다 기도 낭송, 전승 준수, 사회적 모임과 같은 회당내의 활동이 더 중요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적 활동은 성전 파괴 이후에도 유대인으로서의 유대감을 형성해 주었다. 본래 디아스포라와 심지어는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공동체를 관리하는 조직체였던 회당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하나의 기도처소로서 급속한 자리 매김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로마 제1,2차 봉기의 실패로 좌절을 맛본 유대인들은 이제 서서히 요하난 벤 자카이의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군인의 칼을 내려놓고 보다 지속적인 학자의 펜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주후 70-200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보다 의미 있는 역사 과정이었다. 대로마 항쟁의 실패로 유대인들 사이에는 인간적 메시야보다는 초자연적인 메시야, 다시 말해서 신적인 구원자, 다윗의 왕국을 회복시키는 이, 우주적인 공의와 세계적인 정의를 가져올 이를 원하기 시작하였다.


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개파는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잃게 되고, 주후 68년 공동체의 중심지인 쿰란이 로마군의 공격으로 파괴되면서 엣센파도 자취를 감췄고, 혁명당원 역시 두 차례에 걸친 항쟁 과정에서 그 인력과 정신마저 멸절되었으나, 오직 바리새파의 사상만이 랍비 요하난과 같은 학자들을 통하여 유대 민족에게 생존의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로 남게 되었다.



이들 바리새파 랍비들은 봉기 중에도 비교적 다치지 않고 남게 되었다.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랍비 시몬 벤 가말리엘(1세)도 살아남았던 것 같다. 당시 바리새파 랍비들이 민족적 독립을 원했는지, 아니면 종교의 자유를 원했는지에 관하여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상이 일반 백성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하난 벤 자카이 이후 주후 80년에 시몬 벤 가말리엘의 아들 라반 가말리엘 2세가 야브네에서 지도권을 얻게 되면서 힐렐파는 명실공히 랍비 유대교 발전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요하난은 남쪽의 브로르 하일로 내려가 그곳 예쉬바의 랍비로서 말년을 보냈다. 라반 가말리엘 2세는 랍비 요하난 보다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에서 훨씬 더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다. 야브네에서 랍비들은 라반 가말리엘의 지휘 아래 전승을 표준화하고 기록하고 모으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종교적인 사업 외에 가말리엘은 로마의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내 유대인들을 위한 자치 기구를 정립하는데 힘썼던 것 같다.   


랍비 유대교의 태동


유대력으로 다섯째 달이 되는 아브월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의 7, 8월 사이에 해당함) 9일, 이날은 모든 유대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주전 588년 솔로몬 성전이라고도 불리는 제1성전이 바벨론 군사에 의하여 불에 탔고, 주후 70년 헤롯 성전 곧 제2성전이 로마군에 의하여 파멸된 것으로 전해지는 날이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많은 유대인들이 금식을 하며 기도한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전 파괴는 이들 유대인들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신앙에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으로만 제한되었고, 모든 남자는 반드시 한 해에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참배하여야 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직 제도나 그들 밑에서 시중을 드는 레위직 제도가 모두 성전에 근거를 둔 것이다. 주전 4세기 이후 헬라 문화의 영향과 외부 세력의 압력 및 자체내의 부패 등으로 성전 예배에 있어서 상당한 혼란기를 겪은 것이 사실이긴 하나, 성전은 예루살렘에 존속한 한 여전히 유대인 신앙과 생활의 구심점 노릇을 하였다.


이런 엄청난 중요성 때문에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교는 커다란 철퇴를 맞기나 한 듯이 휘청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제사장이 아닌 랍비, 다시 말해서 율법 선생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부터 이미 성전이 아닌 율법의 준수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었다. 성전을 끼고 온갖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던 귀족적 제사장 계급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바리새파가 성전의 확고한 지위를 부인하거나 그 존재 가치를 격감시켰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성전 예배보다 율법 곧 토라의 준수에 역점을 두는 전통은 이미 제1성전이 파괴되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도 전에 이미 사무엘은 사울왕을 견책하며 말하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였다(사무엘상 15:22). 솔로몬 성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때 선지자들은 타락한 백성의 성전 예배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목소리를 높이어 경고하였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12-14).


제1성전이 불에 탄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성전 없이, 그리고 제 나라 땅과 특별히 예루살렘을 떠나서 이방 세계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성전 대신 회당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고, 회당을 중심으로 제사 대신 토라의 연구에 치중하였다. 이 회당과 토라 연구의 전통은 제2성전이 선 후에도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바로 바리새파에게 영향을 주어 성전 예배보다는 토라의 연구와 준수에 역점을 두게 하였을 것이다.


주후 70년의 사건은 유대교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서, 성전 예배(곧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는 사라지고 오직 토라의 연구와 준수만을 문제삼는 소위 말하는 '랍비 유대교'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해 오게 되었다. 이러한 중대 변화를 우리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이 바로 랍비 유대교의 태동(胎動)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주후 70년의 대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되찾고자 랍비 유대교의 길을 택하였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연구와 준수라는 인간적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결코 성전의 파멸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영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한다고 믿는다.

랍비 유대교는 구약 성경을 토대로 하여 방대한 문헌을 남긴다. 이들의 문헌 편찬 작업은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의 랍비들에 의하여 주후 2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전개된다. 이 기간 동안에 형성된 랍비 유대교의 문헌을 보통 '랍비 문헌'(Rabbinic Literature)이라고 부른다. 유대인 랍비들은 랍비 문헌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기록된 토라'(=성문成文 율법)와 '입에 의한 토라'(=구전口傳 율법)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전자는 구약 성경을, 후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을 가리키는데, 둘다 시내산에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에게 하달되었다는 것이 랍비 유대교에서의 주장이다. 이러한 개념은 아마도 주전 1세기-주후 1세기 사이에 발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야브네의 지도층 랍비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자 그러한 개념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 받은 옛 전승들이 있었다고 한다. 편의상 바리새인을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타나임과 구분할 경우, 후자는 대략 주전 50년에서 주후 200년까지 주로 지도적인 몇몇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데 반하여, 전자는 대략 주전 150년에서 주후 70년 사이에 대중적인 기반을 두고 특정한 지도자 없이 활동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 위 세대로부터 전수 받은 옛 전승들은 예전의 관습법들과 제2성전 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한 성경주석적 요소들과 더불어 후에 타나임이 '구전율법'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기본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이제 랍비 유대교의 주축이 되어 온 랍비 문헌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기 전에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 서 있던 유대인 족장(나씨)들의 계보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 사용된 모든 연대는 대략적인 것들이다.  


<유대인 나씨 계보>


주전 20년 - 주후 20년. 힐렐

주후 20-50년. 가말리엘 1세

70년. 시몬 벤 가말리엘 1세

96-115년. 가말리엘 2세

140-170년. 시몬 벤 가말리엘 2세

170-220년. 랍비 예후다 하나씨

220-230년. 가말리엘 3세

230-270년. 예후다 하나씨 2세

270-290년. 가말리엘 4세

290-320년. 예후다 3세

320-365년. 힐렐 2세

365-385년. 가말리엘 5세

385-400년. 예후다 4세

400-425년. 가말리엘 6세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나씨의 직책은 단 한 번 끊긴 것 말고는 300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이 직책은 스스로 다윗 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힐렐의 후손들이 차지하였다. 다윗 왕과의 연관성은 지도권에 대한 범민족적인 충성의 분위기를 쉽게 자아낼 수 있었다. 대략 주후 429년 비잔틴 제국은 나씨 제도를 폐지시키는데, 법정(벧딘)은 그 후에도 존속하여 이슬람 시기가 시작되기까지 (주후 70-640년) 계속되었다. 

 

주후 70년 이후 대략 5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역시 팔레스타인의 법정과 나씨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서 주후 358년 유대인 역법이 확정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다른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매 달 첫 날과 매 해 첫 날의 결정을 이스라엘 땅에 있는 법정과 나씨에 의존하여야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인구가 감소하면서 법정과 나씨의 지도력과 유대 민족에 대한 영향력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미슈나의 형성


랍비 문헌의 구전 지식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앞서 말하였거니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구전 율법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구전 율법의 기원에 대하여는 바벨론 포로기 (주전 6세기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기는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끌려가 사는 동안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격려하도록 하신다 (예레미야 29장).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 중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야웨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야웨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29:12-14).


특별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이라는 말씀은 바벨론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하여 더욱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에스라와 같은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이전 바벨론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에스라 7:6), 예루살렘에 와서는 '야웨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에스라 7:10). 에스라는 학사 겸 제사장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에스라 7:6, 11; 느헤미야 8:1, 4, 13; 12:26, 36 참조). 

 

바벨론에서 사는 기간에 주변 환경과 생활 양식의 변화로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규례들이 요구되었을 것이고, 또한 포로기를 거쳐 유대 땅에 다시 돌아와 살게되었을 때에도 이들 유대인들은 당시 시대 상황에 맞는 새로운 규범과 조례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를 낳게 되는데, 에스라와 다른 지도자들에 의하여 율법은 포로 이후 시대 상황에 맞는 형태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시대 상황에 적절하게 해석한 서기관 에스라의 활동은 그 이후 많은 서기관들의 본보기가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에스라는 모세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 기록으로 (성문 율법) 남기기 시작한 사람인데 반하여, 에스라는 그 율법을 연구함으로써 그에 대한 해석, 곧 구전 율법의 체계를 세워 나가기 시작한 최초의 서기관이기 때문이다

 

서기관은 토라에 대한 합법적 해설자로서 점차 토라에 대한 해석을 쌓아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과 토라로부터 추출해낸 법적인 진술들은, 때로는 출처를 밝히고 또 때로는 출처에 대한 언급이 없이, 산발적으로 모아져서 후에 미슈나를 편찬하는 자료가 되었다.


미슈나 자료중 극히 일부만이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주전 63년 이전시기에 해당한다. 이때부터 대로마 제1차 반란(주후 66-73년) 때까지는 주로 힐렐과 샤마이 두 학파와 관련된 자료들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던 주후 70년을 기준으로 하여 미슈나 자료는 그 이전과 그 이후에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성전 파괴 이후 타나임의 활동이 야브네, 우샤, 벧쉐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 등지로 이전되면서 미슈나 자료의 전승 방법이 크게 달라졌다. 이 기간 동안 랍비들은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함께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기억하기 쉽게 특정한 형태를 갖춘 표현들도 유행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런 '구전 지식'은 처음부터 모두 기록으로 옮겨진 것은 아니다. 주후 70년 이후로 다양한 자료들이 서서히 주제별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미슈나 자료들을 세데르와 마세앛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은 일반적으로 주후 80-132년 사이에 야브네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랍비 아키바의 공로로 돌린다. 어쨌든 제1차 반란(주후 66-73년)과 제2차 반란인 바르 코크바 반란(주후 132-135년) 사이에 대부분 미슈나 자료의 주제별 분류가 형성된 것은 틀림없다.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미슈나 편찬 활동은 가속화되어 마침내 주후 200년경 예후다 하나씨에 의하여 그 열매를 보게 된다. 

 

미슈나의 편집자로 알려진 예후다 하나씨는 (주후 135년 출생) 가말리엘 1세의 증손자이다. 예후다 하나씨의 가문은 특별히 당시 로마 제국을 다스리던 세베루스 왕조(주후 193-235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베루스 가문이 본래 동방 출신인데다 종교에 있어서 혼합주의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유대인들의 지도부는 사법, 세무, 행정 등 다방면에서 폭넓은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예후다 하나씨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제국내 많은 땅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세베루스 왕가의 통치기에 팔레스타인은 경제적 부흥을 누렸고, 그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세계로부터 많은 유대인의 유입이 있게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유있고 평화로운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미슈나의 최종적인 편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예후다 하나씨의 미슈나는 할라카 자료를 집대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요, 마이모니데스가 지적하듯이, 권위 있는 규범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슈나는 점점 불어서 오늘의 분량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후다의 미슈나는 다른 모든 성문화된 것들을 뒤로 제치고, 마침내 아모라임 시대에는 그 권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토세프타와 타나임 시대의 미드라쉬


주후 3세기 후반, 특히 230-260년 사이에 로마 제국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팔레스타인 역시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많은 농부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골이 점점 깊어만 갔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의 랍비들은 유대교를 발전시키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토세프타'는 문자 그대로는 '보충, 첨가'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미슈나와 밀접히 관련된 타나임들의 진술과 전통을 모은 것이다.


토세프타는 주후 300년경 문서화 작업이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전적으로 미슈나에 의존하여 형성된 문헌으로서, 미슈나의 체계를 그대로 따라서 6권과 부, 장으로 나뉜다. 그리고 내용면에 있어서는 먼저 미슈나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 있고, 그 다음에는 미슈나 본문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미슈나 본문과 관련하여 미슈나의 의미를 보충해주는 진술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미슈나의 형식만을 따르는 독자적인 진술도 있다. 토세프타의 이와 같은 성격상 일반적으로 미슈나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토세프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토세프타는 전체적으로 주후 200년경 미슈나의 편찬 작업이 끝나고 나서, 주후 400년경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형성되기 이전에 문헌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토세프타의 편찬 시기는 대략 주후 200-300년 사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탈무드를 미슈나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통한 체계적인 주석서라고 한다면, 토세프타야 말로 주후 400년경의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주후 600년경 이전의 바벨론 탈무드에 앞선 최초의 탈무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탈무드 모두 토세프타를 통하여 미슈나 본문을 읽고 있으므로, 토세프타는 탈무드와 미슈나의 다리 역할을 한 셈이 된다.


이제 토세프타와 비슷한 시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형성된 타나임 시대의 미드라쉬에 대하여 말해보기로 하자. 앞서 밝힌대로, '타나임'은 '타나'의 복수형으로서, 미슈나에 언급되거나 또는 미슈나 시대에 속하는 랍비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시기적으로 대략 주후 10년에서 시작하여 주후 220년경까지 활동한 랍비들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그 이후 탈무드 시대의 랍비들을 가리켜 말하는 '아모라임'과 시기적으로 구분된다.


메킬타, 시프라, 시프레 등은 모두 타나임 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의 미드라쉬이다. 이들 미드라쉬들은 비록 그 대부분이 아모라임 시대에 편찬되긴 하였지만, 타나임 시대의 전승을 반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타나임 시대의 미드라쉬'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들 고대 유대인 주석서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할라카에 관심을 보인다. 따라서 타나임 시대의 미드라쉬는 할라카적 미드라쉬라고 불리기도 한다. 타나임 시대의 미드라쉬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학파들, 특별히 랍비 아키바 학파와 랍비 이스마엘 학파의 자료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문헌이기도 하다.  


탈무드의 형성 

 

앞서 설명한 것처럼, 탈무드는 미슈나에 대한 일종의 체계적인 주석서로서, 토세프타를 그 전신으로 두고 있다. 탈무드에는 두 가지가 전해 내려오는데,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주후 400년경에 완성되었고, 바벨론 탈무드는 주후 600년경 이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탈무드를 보다 넓은 의미로 말할 경우, 주후 300년경에 완성된 토세프타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다.


쉽게 말하여, 구전 율법인 미슈나의 내용을 두고 랍비들이 벌인 토론 내용을 종합하여 편집한 것이 탈무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탈무드는 대개 대화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그리고 탈무드의 본문은 미슈나가 되겠고, 주석 부분은 특별히 '그마라'라고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그마라'는 탈무드의 둘째 구성 요소로서, 곧 아모라임이 미슈나에 관하여 논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라고도 불리는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로마 제국의 세베루스 왕조(주후 193-235년)가 끝나는 때부터 유대인 나씨 제도가 폐지된 주후 429년 사이에 팔레스타인 땅, 특별히 갈릴리의 티베리아에서 그 대부분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일부는 갈릴리의 세포리스와 남쪽의 룻다(로드)와 지중해변의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대에 활동한 유대인 학자들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아모라임인 셈이다. 이들은 타나임의 전승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주후 5세기 초엽 나씨 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랍비들의 연구 활동은 결국 팔레스타인 탈무드만을 세상에 내놓은 채 서서히 사양길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벨론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보다 약간 늦게 형성되었다. 주후 3세기 초반에 유대인 학자 라브와 사무엘이 바벨론에 등장함으로써 바벨론은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바벨론 아모라임이 활동했던 주요 도시들은 네하르데아, 수라, 품베디타, 나호사, 나레쉬 등지이다.


사무엘은 네하르데아에서, 그리고 라브는 수라에서 활동을 하였다. 주후 259년에 사무엘이 죽은 이후 네하르데아는 팔미르의 도적떼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그러나 대신 품베디타 등 다른 지역에서 연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한편 수라에서는 라브가 죽은 이후 라브후나와 같은 인물의 활동이 돋보였다. 이처럼 바벨론에서 한 번 점화된 탈무드 연구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확산되어 갔다. 이들 바벨론 아모라임의 활동 결과가 바로 바벨론 탈무드이다. 

 

중세의 의견에 따르면 바벨론 탈무드는 라비나 1세(주후 420년경 사망)와 라브아쉬(주후 427년 사망)에 의하여 편집되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 탈무드의 편찬 작업이 주후 6세기까지 진행된 것으로 본다.   


아모라임 시대의 미드라쉬


주후 5-7세기 경 유대인에 대한 비잔틴 왕국의 박해가 도를 더해가면서 랍비들은 서서히 '하가다'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일은 유스티니안(주후 527-565년) 황제가 할라카의 집합체인 미슈나를 금서로 지목한 이후로 가속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모라임의 미드라쉬가 형성되게 된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미드라쉬'라는 용어는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우선, 성경 연구 작업 자체를 가리키며, 둘째, 성경 연구의 결과, 곧 성경을 해석한 문구를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해석들로 이루어진 저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물론 마지막 의미의 미드라쉬이다. 이들 미드라쉬의 기록에 대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바벨론 탈무드가 완성되는 주후 6세기 무렵까지는 그 활동이 이미 끝난 듯하며, 그후로 주후 11세기에 이르기까지 미드라쉬들을 모으고 편집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아모라임 시대 미드라쉬는 내용 내지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한 성격을 보인다. 

 

아모라임 시대의 미드라쉬는 주석적 미드라쉬와 설교적 미드라쉬로 구분된다. 전자는 성경 본문의 순서를 따라 그 본문을 해석하거나 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설화, 비유 등을 본문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미드라쉬요, 후자는 대체로 토라(=모세 오경) 중에서 매 주간 나눠 읽도록 지정된 특정 본문들만을 다룬다. 과거 유대인 회당에서는 먼저 구약 성경이 읽혀지고, 그 다음에 회중이 익히 알고 있는 아람어로 번역되었고, 마지막으로 온 회중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를 통하여 해석되어졌다. 이러한 설교들을 수집하여 문자화한 것이 바로 '설교 미드라쉬'인 것이다.   


주후 70년의 대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되찾고자 랍비 유대교의 길을 택하였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연구와 준수라는 인간적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결코 성전의 파멸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영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한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유대인인 예수의 그 거창한 발언에 나의 삶을 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의 처음 제자들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후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고, 제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예수를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필자에게는 적어도 저 유식한 랍비들의 지적 토론과 훈계보다는 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의 대담한 외침이 더 호소력이 있다. 

 

제6장. 비잔틴세계의 유대인  


주후 313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로마 세계 안의 유대인에게는 관용의 시대가 끝나고 종속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땅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기독교화된 로마의 통치를 받은 시기를 가리켜 유대인 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비잔틴 시대라고 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공통의 기원과 종교적 신념에 있어서의 어느 정도의 유사성 때문에 유대교를 뿌리째 탄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기독교는 유대인을 외형적으로만 보존하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옛 진리에 대한 유령적 증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후 4세기 이후로 기독교 교부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정치적 권한을 제한하여 그들을 사회 및 경제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새 법률들을 확보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를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곤 하였다.


이제 콘스탄틴부터 이슬람 시대 직전까지 전(全) 로마제국과 동로마 제국, 곧 비잔틴 왕국을 다스린 필요한 황제들의 연대표를 제시한 후, 유대인과 관련하여 이들 비잔틴 황제들이 취한 정책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비잔틴 황제 연대표>


주후 306-337년. 콘스탄틴(Constantine I)

337-361년.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us II)

361-363년. 율리안(Julian the Apostate)

364-378년. 발렌스(Valens)

379-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408-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527-565년. 유스티니안 1세(Justinian I)  


콘스탄틴 대제와 콘스탄티누스 2세


앞서 말했듯이, 카라칼라(주후 211-217년) 황제 때인 주후 212년에 유대인을 포함, 로마 제국내의 모든 자유인에게까지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었다. 주후 193-235년에 걸쳐 로마 제국을 다스린 세베루스 왕조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사법, 세무, 행정 등 다방면에서 폭넓은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통치기에 팔레스타인은 경제적 부흥을 누렸고, 그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세계로부터 많은 유대인의 유입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안(주후 284-305년)은 기독교인, 마니교도, 사마리아인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유대인에 대하여는 호의적이었다는 점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주후 324년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 제국 전체의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이제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에서 동시에 기독교 황제의 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주후 3세기에 유대인들이 누렸던 법적인 지위가 모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죽인 '옛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이스라엘 땅을 성지로 간주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화된 로마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레스타인 안에서 이미 소수로 줄어든 유대인들은 서서히 기독교화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주후 329년 유대인의 종교가 해롭다고 생각한 콘스탄틴 대제는 유대교로의 개종을 금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하는 것도 금하였다. 그는 모친 헬레나(Helena)와 더불어 이스라엘 땅을 기독교화하는 운동을 부채질하였다. 동로마를 관장한 갈루스(Gallus)의 도움을 받아 (주후 351년부터) 부친의 전(全) 제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us II, 주후 337-361년)는 이 금지령을 이교도 노예로까지 확장하였고, 유대인과 기독교도 사이의 혼인도 금하였다. 이런 혼인은 사형을 받았다.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은 대중이 모이는 광장으로 나가서 공공연히 반(反)유대인 설교를 하면서 무리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예배장소를 파괴하도록 선동하였다. 이론적으로 회당 파괴 행위는 범죄로 간주되었으나, 그에 대한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후 315년 로마의 감독인 실베스터(Sylvester)는 공적인 반유대인 토론을 후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후 306년 엘비라(Elvira)와 주후 431년 라오디케아(Laodicea)에서 열렸던 교회회의들에서 정한 조례들이 팔레스타인 땅의 법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야됨을 부인하는 대가로 차등 대우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눈을 돌려 주후 358년에 유대력이 확정된 일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의 절기 질서를 방해하고 또 기독교인들이 유월절 첫 날에 부활절을 지키는 것을 막고자, 로마제국 당국은 유대인 랍비들이 모여서 새 달과 윤달을 정하고 그들이 결정한 것을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공동체들로 보내는 일에 제동을 걸었다. 아마도 이런 어려움 때문에 주후 320-365년 사이에 다스린 나씨 힐렐 2세는 오랜 천문학적 관찰과 수학적 계산을 이용하여 유대력을 제정하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의 역법은 육안 관측에 의존해 왔었다. 유대력의 확립으로 이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절기 준수나 기타 필요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있는 랍비들의 결정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종교적 논쟁이 점차 늘어났으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간헐적으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무거운 과세 부담도 유대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데 일조를 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반란의 싹이 서서히 트고 있었다.


주후 350-351년 사이에 로마는 서쪽에서의 갖가지 반역적인 소요와 아울러 동쪽으로부터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가의 왕 샤푸르 2세의 지속적인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마침내 주후 351년에 유대인들은 콘스탄티누스 2세 아래서 동로마의 부황제(副皇帝) 노릇을 하던 갈루스에 맞서서 난을 일으켰다.


그것은 기독교인이나 교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갈루스의 부패정치 때문이었다. 파트리키우스라는 유대인을 우두머리로 삼은 이 반란의 불길은 세포리스에서 점화되어 갈릴리의 주요 도시들과 골란 고원의 유대인 마을들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많은 랍비들과 상류층 유대인들은 이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갈루스는 우르스키누스(Urscinnus) 장군을 보내어 신속히 이 소요를 진압하였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팔레스타인은 10년 동안 우르스키누스 장군의 군사 통치를 맞게 된다. 갈루스는 주후 354년에 처형되었다. 반란 후에 로마가 유대인들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잘못 다루면 소요만 촉진시킬 뿐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유대인들의 지도부와 로마 행정부는 평화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불발로 그치고 만 이 반란은 유대인 경제의 하락을 부채질하였다.  


배교자 율리안


주후 355-360년 사이에 갈루스의 형제인 율리안(Julian)이 서서히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주후 361년에 그는 황제가 되었다. 그의 기독교도 전임자들과는 달리 보통 '배교자'로 불리는 율리안은 제국의 기독교화를 반전시키려 했다.


이교도의 신전 재건과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의 부흥을 독려한 율리안은 제국내 비기독교적 요소들을 자기의 동지로 간주하였다. 물론 유대인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페르시아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던 율리안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지리적인 면에서 볼 때 반드시 필요한 협력자이기도 하였다. 

 

율리안(주후 361-363년) 때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고 반유대적인 법령들이 철폐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일시나마 종교적 자유가 회복되었다. 주후 362년 여름 율리안은 안디옥에 머물고 있을 때, 예루살렘을 유대인들에게 돌려주고 성전을 재건하며 희생 제사 제도를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를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아예 이주해 들어와서는 성안의 일부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성전 지역 근처에 임시 회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유대인 지도부는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달리 율리안의 계획을 반대할 입장도 못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후 363년 율리안이 페르시아로 침공했을 때, 성전 공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율리안은 자기 신복중의 하나인 안디옥의 알리피우스(Aliphius)를 건설 책임자로 임명하는 한편 황실 금고에서 충분한 재정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건축 자재들이 준비되었으며, 일찍이 하드리안이 세웠던 이방 신전의 잔해를 치우는 정지(整地) 작업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건설 현장에 갑작스런 화재가 발생하여 일꾼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주후 363년 6월 10일에는 율리안이 동쪽 전선에서 살해됨으로써, 성전 재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다시 기독교도 황제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율리안 사후 테오도티우스 1세가 황제의 위에 오르던 주후 379년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로마 제국의 내부적 갈등으로 인하여 덕을 보게 되었다. 이 기간중 반유대적 법령의 제정도 없었고, 유대인 지도부(나씨)의 법적 지위는 강화되었다. 특히 발렌스(Valens) 황제(주후 364-378년)는 '유명한 나씨'에 속한 유대인 공동체의 관리들을 시의회에 대한 봉사의무에서 빼주었고, 회당에 군대가 숙영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테오도티우스 1, 2세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잠시잠간이었을뿐, 곧 유대인들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주후 363-4년에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마을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 있었으나, 곧 가라앉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내 기독교인들의 증가로 유대인들은 점점 더 반유대인 감정의 압력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주후 379-395년)와 그의 아들들은 열렬한 기독교도들이었다. 이 무렵 제국내 기독교의 영향이 커져서 반유대 법령들이 강화되었다.


주후 388년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브레스키아(Brescia)의 감독 필라스터(Philaster)는 로마 시민들을 격려하여 유대인 회당에 불을 지르게 한 적이 있다. 그곳 총독은 감히 방화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이 일을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보고하였다. 황제는 그 총독을 질책하면서 당장 문제의 감독에게 새 회당을 세워주라고 지시를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밀란(Milan)의 감독 암브로스(Ambrose)는 이 명령을 공적으로 취하하도록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주후 395년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면서부터,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가속화되었다. 주후 383, 392, 404년에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종시키는 것과 공직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련의 반유대적 법들이 제정되었다. 한편 주후 399년에 호노리우스(Honorius)는 서로마 제국내의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이의 유대 관계를 끊으려고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주후 415년에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소송인 경우 황제의 법정만 사용할 수 있다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황제 테오도티우스 2세(Theodosius II)는 새 회당의 건립을 금지하고, 정 심하게 퇴락한 경우에만 확장 없이 수리할 것을 허용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의 국가 공직 채용을 막았다. 테오도티우스 2세(주후 438년)와 후에 유스티니안(Justinian, 주후 529-34년)의 이름을 담고 있는 법령들은 (이들은 여러 기독교도 황제들의 유대인에 관한 법령을 모았다) 유대인을 열등한 시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나 이단자보다 더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특별 임무가 주어졌으나, 공직과 몇몇 직업에서는 제외되었다. 

 

여기서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유대인의 지도부 역할을 해 왔던 나씨 제도의 폐지에 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주후 5세기 초엽에 당대의 나씨였던 랍비 가말리엘(6세)은 회당을 세우고 기독교인 노예에게 할례를 베풀고 기독교인들이 연관된 소송을 관장함으로써 황제의 칙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런 죄목으로 인하여 가말리엘은 주후 415년의 칙령에 의하여 신분상의 강등을 당하였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를 당했다.


가말리엘과 그의 어린 아들들이 죽고, 유대인의 법정도 둘로 갈라지자, 로마 제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새 나씨에 대한 비준을 취하하고 주후 429년(또는 아마도, 425년)에 나씨 제도를 영원히 폐지시켜 버렸다. 이후 이슬람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기(주후 638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교회와 수도원 건축, 기독교 수도자와 순례자들의 유입 등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의 기독교화가 가속화되었다. 마침내 주후 5세기에 들어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제치고 팔레스타인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후 5세기 후반기부터 유스티니안(주후 527-565년)이 즉위하기까지 유대인들은, 특별히 기독교 내의 종교 및 정치적 분규 덕택에,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기를 맞이하였고, 팔레스타인내 유대인들의 지위도 다소 개선되었다. 이 무렵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인구의 비율은 대략 10% 정도였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기회를 이용하여 팔레스타인 북부의 벧알파, 하맛, 게델과 중남부의 여리고, 나아란, 아스켈론, 가사 등지에 회당을 건설, 확장, 개축하는데 힘썼다.   


비잔틴 시대 말기


유스티니안(주후 527-565년)은 즉위와 즉시 반유대적인 법령들을 갱신하고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재위시 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토라를 히브리어로만 읽기를 원하는 유대인들과 헬라어 번역도 사용하기를 원한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황제에게까지 올려졌고, 유스티니안은 판결에서 헬라어 번역도 사용하기를 원하는 유대인들 편을 들어준 것뿐 아니라, 이를 기회로 유대인의 미슈나를 금서로 지목하였다.


주후 484년에 봉기하였던 사마리아인들이 다시 주후 529년 유스티니안 치하에서 봉기하였을 때, 유대인들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이들 봉기들은 모두 실패하였고, 이후 사마리아인들은 인구로도 경제적으로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주후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을 때, 유대인들은 곧 메시야 시대가 열릴 거라고 기대하면서 기뻐하였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팔레스타인 침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마침내 주후 614년 5월에 예루살렘이 페르시아 군대의 손에 함락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예루살렘을 유대인 정착민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을 내쫓고 교회들을 제거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통치는 3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주후 617년에 이르러 페르시아인들은 정책을 180도 바꾸어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새로운 입장에 반대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살육하기에 이르렀다. 

 

주후 622년 봄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페르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엑바타나(Ecbatana)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한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인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전에 그들이 정복했던 영토를 돌려받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후 629년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 주후 629년 3월 21일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무덤 교회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다시 빼앗은 '성 십자가' 유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서둘러 그에게 용서와 화해를 신청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용서를 약속한 황제는 처음에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으나, 기독교 사제들의 반발에 부딪쳐 결국은 박해의 칼을 들게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파괴한 일로 정죄당하여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종교도 권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권력과 관계없이 고난의 길을 묵묵히 그러나 힘차게 걸어가는 동안에, 로마는 이런 사람들의 종교를 권력을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택하였다. 그리하여 권력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제는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의 이름 아래에도 모여들게 되었고, 이 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든 힘없는 이들에게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종교가 권력을 탐하고 권력의 방향에 따라 움직일 때, 이미 그 종교는 순수성과 진실성을 잃게 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비잔틴 시대는 권력과 종교의 야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경험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물며 그 종교가 사랑과 용서와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기독교라는데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이방인들이 그의 분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동족을 박해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비뚤어진 역사 때문에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넘어 그들의 메시야 예수마저도 더욱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진리가 진리되게 하려면 진리편에 선 사람들이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제2부. 지구 끝까지 흩어지는 유대인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레위기 26:34-39). 
 

제1장. 바벨론 디아스포라  


주후 200년경 미슈나의 편집을 통하여 유대인 역사상 굵직한 선을 그었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는 비잔틴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그 영향력을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 바통을 이어받아 유대 민족의 활력을 제공할 사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 곧 바벨론 디아스포라로 넘어가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열국의 세력 다툼을 힘없이 지켜보면서 생존하는 것으로만 만족해 왔던 바벨론 디아스포라가 이제 잠에서 깬 것이다. 그리하여 바벨론 디아스포라는 대략 주후 3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800년 동안 유대 민족 정신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초기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환경


고대의 바벨론 성과 바벨론 왕국이 사라진지 오랜 후에도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바벨론'을 사용하였다. 유대인의 바벨론 디아스포라 역사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한 주전 723년과 남왕국 유다가 패망한 주전 5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들 두 나라가 차례로 망하면서 많은 인구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여 그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주전 551년 페르시아 왕 코레쉬(고레스)가 유대인의 귀국을 허용하는 혜택을 베풀었지만, 일부만이 돌아갔을 뿐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그대로 남았다.


주전 331년에 바벨론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의 죽음과 더불어 이 지역에는 헬레니즘 왕국인 셀루시드 왕조가 다스리게 되었다.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형제들과 더불어 셀루시드 왕조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이전 페르시아 통치 때 누렸던 혜택과 자유를 누렸다. 주전 120년부터 주후 226년까지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아르싸키드(Arsacid) 왕조 파르티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파르티아 통치 아래서도 계속하여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주후 4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아디아베네(Adiabene)라는 조그만 나라의 왕가 전체가 유대교로 개종한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후와 그의 가족은 유대교의 법들을 준수하려고 노력하였다. 헬레나는 주후 46년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마침 기근에 허덕이는 유대인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주후 66-70년에 있었던 대로마 제1차 항쟁에서 아디아베네 왕은 유대인들에게 인력과 물품을 보냄으로써 항쟁에 동참하였다. 아디아베네에서는 주후 2세기 말엽까지 유대교가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 후에 아디아베네는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후 66-73년과 132-135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대로마 제1,2차 반란 때 바벨론 유대인들의 일부는 유대인 반군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하면 극히 일부는 직접 참전하여 로마와 싸우기도 하였다. 주후 114-117년 로마 황제 트라얀이 파르티아에 침공하였을 때,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저항군 편에 서서 열심히 싸웠다. 바르 코크바의 봉기 이후 팔레스타인의 몇몇 랍비들은 바벨론으로 도망하여 그곳에 교육기관을 개설하였다. 주후 2세기 중엽에는 이미 바벨론 유대인들을 관장하기 위한 중심기구가 가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쉬 갈루타'(디아스포라 장관)라고 하는 칭호는 후나 1세(주후 170-210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 장관은 과거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다윗의 후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쉽게 바벨론 유대인들의 존경심을 유발시킬 수 있었다. 디아스포라 장관은 유대인들의 민사 행정과 사법적 업무와 방위 등을 관할하였으며, 파르티아 왕국 내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파르티아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무거운 세금은 디아스포라 장관의 중재를 통하여 징수되었다. 파르티아 통치기에 디아스포라 장관들은 아들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어 공부시켰고,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교육받은 학자들을 참모들로 기용하였다. 그러나 후에 미슈나와 탈무드를 배우고 가르치는 기관인 예쉬바의 활동이 강화되고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디아스포라 장관의 기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주후 70년경 바벨론의 유대인 인구는 대략 100만 명 가량이었다. 이후 바벨론내에서의 자연 증가와 팔레스타인으로부터의 이주로 말미암아 주후 200-500년 사이에는 절정을 이루어 약 200만 가량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벨론 유대인들의 통용어는 아람어였으며, 그들은 디아스포라 장관 아래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바벨론의 각 유대인 공동체에는 한 사람의 우두머리와 일곱 명의 고문으로 구성된 공동체 공회가 있었다. 이 공회는 공동체의 구제비 모금과 분배와 같은 민간 활동, 회당과 다른 공공 재산, 학교 등을 감독하였다. 그리고 관리를 임명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케 하고 도량형을 감독케 하는 것도 공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치권도 제국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권자의 정책에 따라서 때때로 위협을 받곤 하였다. 

 

주후 224-226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르싸키드 왕조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사싼 왕조의 통치가 문을 열었다. 사싼 왕조는 국가 정책으로서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일종인 마즈다 종교의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젠드-아베스타(Zend Avesta)가 장려되었으며, '마기'라고 불리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 용납할 수 없는 몇몇 종교적 관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이나 명절 때 촛불을 밝히는 것, 정한 짐승을 죽이는 방법, 장례법 등에서 그리하였다. 아르다쉬르 1세(주후 224-241년)의 통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어려운 시기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활동하였던 학자들로는, 수라에서 가르친 라브와 네하르데아의 학교에서 가르친 사무엘을 꼽을 수 있다. 사무엘은 토라뿐 아니라 의학과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수라의 라브가 종교법 전문가였다고 한다면, 사무엘은 민사법 전문가였다. 

 

유대인에 대한 페르시아 사싼 왕조의 박해가 계속되었더라면 바벨론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멸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후 242년 샤푸르 1세(주후 241-271)의 등극과 더불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든 종교에게 관용과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런 유화정책을 통하여 그는 제국내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로마 제국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주후 258년에는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처음에는 로마가 패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로마는 새로 생긴 팔미라(Palmyra) 왕국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후 262-263년에 팔미라 왕은 바벨론에 침공하여 몇몇 유대인 정착 마을을 짓밟았다. 특별히 유대인의 예쉬바가 서 있던 네하르데아도 이때 팔미라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샤푸르 1세는 즉시 질서를 회복하였지만 네하르데아는 복구되지 못하고 대신 품베디타에 예쉬바가 설립되어 수라의 예쉬바와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아마도 샤푸르 1세의 통치 때에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장관 및 자치에 관하여 협상이 있었고 잠정적이나마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 같다.


주후 272-292년 사이에는 군주들이 단명하였는데, 이때 마즈다 교인 외에 다른 모든 종교의 신봉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마니교도나 기독교인들보다는 더 나은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르세(주후 293-301년) 통치 때 박해가 종식되었다가, 샤푸르 2세(주후 309-379년) 통치 초기에 미미한 박해가 있었으나 다시 수그러들었다. 주후 363년 로마 황제 율리안이 바벨론에 침공하였을 때, 몇몇 유대인 공동체는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워주겠다는 율리안의 말을 믿고 그를 지지하였다가 후에 페르시아인에 의하여 살육 당하기도 하였다.


예즈데게르드 2세(Yezdegerd II, 주후 438-457년)와 그의 아들 피루즈(Firuz, 주후 459-486년) 때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주후 455년에 안식일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디아스포라 장관 후나 5세도 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후 468-474년 사이에 회당들은 파괴되고 토라 연구는 금지되었다. 코바드 1세(Kovad I, 주후 488-531년) 때에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후나 5세의 아들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디아스포라 장관의 자리에 오른 마르수트라 2세(주후 496-520년)는 소규모의 유대인 군대를 편성하여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조그만 유대인 왕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수도는 마호사였다. 마르수트라 2세는 7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였으나, 결국 주후 520년에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이처럼 계속되는 박해로 인하여 주후 634년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이슬람은 유대인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아래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바벨론을 점령한 이후 이슬람이 등장하기까지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연대기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벨론 디아스포라 연대기>


주전 331년. 알렉산더 대제의 바벨론 정복

323년. 셀루시드 통치 시작

120년. 파르티아 통치 시작

주후 약40년. 아디아베네 왕가 유대교로 개종

114-117년. 하드리안의 파르티아 침공

170-210년. 후나 1세 (첫 디아스포라 장관)

226년. 사싼 왕조 아르싸키드 왕조를 물리치고 왕국 차지

224-241년. 아르다쉬르 1세

241-271년. 샤푸르 1세

259년. 네하르데아의 예쉬바 품베디타로 옮기다

262-263년. 팔미르 침입

272-292년. 단명한 군주들

293-301년. 나르세

309-379년. 샤푸르 2세

363년. 비잔틴 황제 율리안의 침공

397-417년. 예즈데게르드 1세

420-438년. 바흐람 5세

438-457년. 예즈데게르드 2세

455년. 유대인 박해

459-486년. 피루즈

468-474년. 회당 파괴, 토라 연구 금지

약 470년. 디아스포라 장관 후나 5세 처형

488-531년. 코바드 1세

520년. 디아스포라 장관 마르수트라 2세 처형

531-578년. 호스로에스

579-580년. 호르미즈드 4세

590-628년. 호스로에스 파르웨즈

634년. 이슬람의 메소포타미아 점령  


바벨론 아모라임과 사보라임의 활동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과 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보다 수준 높은 학문 연구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유학을 하곤 하였다. 일찍이 힐렐(주전 75년생) 같은 학자도 팔레스타인에 유학한 바 있는데, 그는 그곳에 남아 명성을 떨쳤으나, '라브' 또는 '라베누'라는 칭호로 더 잘 알려진 아바 아리카는 팔레스타인 유학후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와 (주후 219년) 유대교의 창달에 힘썼다. 라브는 예후다 하나씨의 제자로서 바벨론 아모라임 중 최초의 학자에 해당한다.

 

친절하고 호감 가는 성격의 소유자인 라브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쉽게 친분을 맺었다. 라브는 일찍이 시장의 도량형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라브는 바벨론으로 돌아온 후 네하르데아 예쉬바의 원장직에 초빙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수라에 정착하여 그곳의 예쉬바를 발전시키는 일에 힘썼다 (주후 219년).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최근에 완성된 미슈나를 바벨론 디아스포라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의 교육 제도와 관습 및 기도문 등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라브 시대에 수라의 예쉬바에는 1200명 가량의 정규 학생이 운집하였다. 라브의 제자인 랍비 후나가 이끌던 40년 동안(주후 257-297년)에도 수라의 예쉬바는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라브 때 수라의 예쉬바와 쌍벽을 이뤘던 곳이 바로 사무엘이 이끄는 네하르데아의 예쉬바였다. 사무엘은 본래 의학분야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네하르데아 예쉬바의 원장이 된 이후에도 미슈나 해석뿐만 아니라 의학적 처방을 통하여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사무엘은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천문학에도 심취하였으나 점성술에 현혹되지는 않았으며, 뛰어난 시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수라와 네하르데아, 이들 두 곳의 예쉬바는 가온 시대가 끝나는 주후 10세기 중엽에도 건재하면서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팔미라 왕의 바벨론 침공 이후 시작한 품베디타의 예쉬바는 랍비 예후다 바르 에스겔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그는 주후 299년까지 원장으로 있었고, 그 이후로는 라바 바르 나흐마니, 랍비 요셉 바르 히야, 아바예가 봉직하였다. 주후 4세기 중엽 라바(주후 338-352년)의 인솔하에 품베디타의 예쉬바는 티그리스 강변의 마호사로 옮겨갔다가, 그가 죽은 후 다시 품베디타로 되돌아왔다. 

 

토라 연구 및 교육 기관인 각 예쉬바에는 유명한 학자 한 명이 우두머리(예쉬바 원장)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말하자면 라브와 사무엘과 같은 대학자의 후계자가 되는 셈이었다. 예쉬바 원장은 학생들의 토론을 인도하고 토론 후의 논쟁을 주관하는 좌장 역할을 하였다. 예쉬바의 학생이 되기 위하여는 입학시험도 없었고 별다른 입학 요구조건도 없었다. 연령 제한이 없이 누구든지 토론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와 공부할 수 있었다. 물론 토론을 위하여는 성경과 미슈나와 기타 유대인 법을 알아야 했다. 예쉬바에는 반이나 학급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한 강의실에 모여 같은 강의를 들었으며, 언제나 열띤 토의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필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학습 내용은 거의가 기억에 의하여 보존되어야 했다.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예쉬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일년에 두 달 동안 열리는 공개강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로쉬하샤나(유대인의 설날) 직전 달인 엘룰 월(양력의 8-9월에 해당)과 유월절 직전 달인 아달 월(양력의 2-3월에 해당)이 되면 유대인 노동자들과 농부들이 예쉬바에 몰려와 공개강좌를 듣곤 하였다.


그들은 다른 열 달 동안 바쁘게 일하다가 비교적 한가한 틈을 타 이 두 달 동안에 예쉬바에 와서 유명한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모인 숫자가 일만 이천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런 기회를 통하여 유대인 학자들(당시에는, 아모라임)이 연구한 결과는 유대인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이러한 모임을 가리켜 '칼라'라고 하였다. 칼라 모임은 라브와 사무엘 시대에 시작되었다.

 

바벨론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인 학자들의 학문적인 토론과 연구 내용이 축적되면서 더 이상 기억에만 의존하기에는 그 양이 방대해지게 되었다. 주전 2세기 말엽 팔레스타인에서 미슈나의 방만한 축적으로 결국은 예후다 하나씨와 같은 랍비가 그 내용을 성문화하였던 것처럼,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학자들 역시 주후 5세기에 들어와서 부터는 보다 본격적으로 미슈나에 관한 연구와 토의 내용(이를 가리켜 '배움'이라는 뜻의 '탈무드'라고 함)을 성문화하는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이미 주후 4세기 말엽과 5세기 초엽에 걸쳐 오랜 기간 (주후 371-427년) 수라에서 예쉬바 원장으로 활동했던 라브 아쉬에게도 있었다. 그는 이전 학자들의 토의 및 연구 결과를 검토하여 내용별로 조직적으로 분류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라브 아쉬의 이러한 분류작업은 그가 죽기까지 근 5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이 일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주후 470년경에 이르러 이 작업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수라의 예쉬바 원장이었던 라비나 2세(주후 474-499년)는 아쉬가 수집한 자료들을 기록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 무렵 페르시아 제국내에서는 급진적인 마즈다 종교가 활개를 치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과 보수적인 페르시아인들에게까지도 박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종교상의 박해 외에 부패한 정부와 경제적 어려움이 가세하여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커다란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략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주후 500년경에 이르러 페르시아 제국내 박해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었으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30년간의 후퇴를 회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라와 품베디타에 예쉬바가 다시 열렸으나, 학문활동이 이전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주후 6세기의 학자들은 그 이전에 준비된 자료들에 감히 손을 대어 더 이상 첨삭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벨론 탈무드가 주후 500년까지는 완성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이슬람 정복 직전까지 유대인 학자들은 더 이상 '아모라임'으로 불리지 않고 '해설가' 또는 '의견 소지자'라는 뜻의 '사보라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 사보라임은 탈무드를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순서를 재정리하거나 필요한 곳에 한두마디 첨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따라서 사보라임이 독창적으로 남긴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아마 주후 5세기 말엽의 박해만 없었더라면 바벨론 탈무드는 오늘날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분량의 문헌이 되었을 것이다.  


이슬람 시대 가온들의 활동


동로마 비잔틴과 페르시아 두 제국이 서로 오랫동안 투쟁하며 힘을 탕진하고 있을 때,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슬람이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하면서부터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다윗왕가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선택된 디아스포라 장관은 다시 바벨론의 전체 유대인 공동체의 우두머리와 대표로서, 칼리프의 궁정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왕과 같이 살면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바벨론의 유대인 공동체들을 위하여 법관들을 임명하였고, 범법자에게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이슬람 정부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아모라임과 사보라임 시대에 '예쉬바 원장'이라고 불렸던 직책은 이슬람 정복 이후 '가온'이라고 하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가온'이란 '뛰어남, 탁월함, 자랑'이라는 뜻인데, 처음에는 예쉬바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다가 후에 예쉬바의 원장을 가리키는 칭호로 바뀐 듯하다. 바벨론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탈무드가 절대적 권위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온들의 지위와 역할 또한 크게 신장되었다. 그리하여 가온은 때때로 디아스포라 장관보다 훨씬 더 권위 있는 직책으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이슬람의 정복 이후 유대인들은 정상 생활을 되찾게 되고, 수라와 품베디타의 예쉬바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1년에 두 달이나 되는 '칼라' 월은 유대인의 법들과 전승을 사업가나 농부에 이르기까지 퍼뜨리는데 최적의 기회로 이용되었다. 수라의 가온이 품베디타의 가온보다 월등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나, 둘 다 종교적인 일들에 있어서 권위 있는 자로 존경을 받았다. 무엇이든 질문이 있으면 이들 가온들에게 올라왔고 가온들은 일종의 최고 법원 역할을 하였다. 가온은 디아스포라 장관과 더불어 그 밑에 관리들을 두고 법정과 학교 등의 일을 감독하였다. 

 

일반적으로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가온에게 탈무드를 해석하는 권위가 있다고 간주하였다. 유대인의 각 지역 공동체에서 자체 법관이나 관리들은 해결하기 힘든 사안이 있을 때 편지에 '질문'을 적어서 수라의 가온에게 보냈다. 수라의 가온은 그 질문 내용을 예쉬바의 학자들에게 제시하고, 곧이어 그 물음에 대한 열띤 토의가 벌어진다. 가온과 학자들은 그 물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 낸 후 그것을 '답장(答狀)'으로 써서 문의가 들어온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법관과 수장에게 보낸다.


이와 같은 통신에 의한 질의응답은 유대인의 유대감(紐帶感)을 강화시켜 주었다. 어떠한 법도 가온들에게 바벨론 밖의 유대인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으나, 이 '질의응답' 방식에 의한 왕래는 먼 곳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까지 퍼져 나갔다. 심지어는 북부 아프리카와 스페인과 가울 지방에서도 질문이 들어왔다. 

 

이 '답장'에 대한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주후 860년에 회당 예배시 어떤 내용의 기도를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냐는 질문이 한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수라의 가온에게 들어왔다. 당시 수라의 가온은 라브 아므람이었다. 그의 답장은 라브 아므람의 '세데르' 또는 '시두르'(둘 다 '배열'이라는 뜻임)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60년의 세월이 흘러 라브 사아디아라고 하는 가온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 역시 답장으로서 라브 아므람의 배열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또 다른 '배열'을 내보냈다. 이로써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거의 비슷한 예배 순서를 갖게 된 것이다. 

 

바벨론의 가온들은 답장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탈무드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들의 결정 사항은 가능한 한 탈무드에서 그 해답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거로 작성되었다. 이리하여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대에 탈무드의 가르침은 가온들의 답장을 통하여 전 디아스포라로 퍼져 나갔으며, 그 결과 여러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사이에 탈무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실제로 많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탈무드 필사본을 소유하고 연구하기를 원했다. 가온의 답장이 유대인 가운데 탈무드의 지위를 확고히 해 준 것이었다.   


카라임의 등장과 가온 사아디아


타나임, 아모라임, 사보라임, 가온으로 연결되는 랍비 유대교의 전승은 주후 8세기 바벨론 디아스포라에서 '카라임'이라는 도전 세력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반 랍비 유대교에서는 이제까지 내려오는 전통을 강조한 반면에 카라임은 모든 전통의 권위를 거부하고 유대인 생활의 근거를 오직 성경에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라임은 오직 성경만을 믿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카라임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주후 760년경 바벨론의 디아스포라 장관이 자식이 없이 죽자, 그의 후임은 관례대로 남자 쪽의 가까운 친척 중에서 결정하여야 했다. 이런 경우 수라와 품베디타의 가온들이 선택을 하였고 칼리프는 그들의 건의에 따라 인준해줄 뿐이었다. 죽은 디아스포라 장관에게는 아난과 하나니아라는 두 조카가 있었다. 가온들은 보다 어린 하나니아를 선택하였고, 칼리프는 그들의 천거에 따라 하나니아를 디아스포라 장관직에 임명하였다.


이에 분개한 아난 벤 다비드는 가온들과 예쉬바와 탈무드와 유대인의 전통을 비난하면서, 동조자들에 의하여 별도로 디아스포라 장관에 추대되었다 (주후 767년). 칼리프는 이를 반역 행위로 보고 그를 잡아 투옥하였다. 이 무렵 이슬람 안에는 몇몇 상호충돌적인 교파가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아난은 자신은 유대교에 대한 반역자가 아니요 전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칼리프는 아난을 풀어줬고, 아난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열심히 자기의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아난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한편, 탈무드 전통들이 요구하는 바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아난의 추종자들은 전에도 예수와 랍비들 사이에 이런 싸움이 있었다고 믿었다. 아난의 추종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요 예언자라고 간주하였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설립하러 온 것이 아니요, 랍비들이 부과한 규제 법규들에 맞서서 토라의 최고권위를 재정립하고자 온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아난의 후계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랍비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에 그 거룩한 책의 애초의 의도가 무수한 법들 속에서 상실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토라의 기록된 말씀을 엄정하게 준수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브네 미크라' 또는 '카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물론 카라임도 성경의 진술들이 때때로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카라임은 각 유대인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성경의 진술들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공식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각 유대인이 면밀히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라임 사상에는 '정통파'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아난 자신도 추종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견해에 의존하지 말고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라"고 하였다. 카라임 공동체들은 각각의 이해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규례들을 정하였다. 그들은 탈무드 전통을 거부하였지만, 성경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새로운 규례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카라임의 이런 특징 때문에 이 분파는 여러 개의 소규모 분파로 지리멸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난 사후 약 반세기가 지나 활동하였던 베냐민 나하벤디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이 깊은데다 합리주의자였던 나하벤디는 카라임의 특징인 종교적 개인주의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가르치기를 "탐구는 하나의 의무이다. 때때로 탐구에 의하여 발생하는 잘못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카라임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 운동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토라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데서 생긴 많은 엄중한 규례들을 수정하면서까지 카라임 사상을 체계화시켰다. 

 

바벨론의 가온, 디아스포라 장관, 랍비들이 점차 관료주의에 빠져들어 가면서 카라임의 사상은 많은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라임의 사상은 바벨론의 국경을 넘어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그리고 비잔틴 왕국으로까지 스며들어갔다. 특별히 예루살렘에는 이슬람 국가 도처에서 금욕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카라임 사상가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시온을 애도하는 사람들'('아벨레 찌욘'), 또는 '들장미꽃'('쇼샤님')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핍생활을 하면서 성전이 파괴된 것을 애도하였으며, 그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카라임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각자의 지성을 의지하여 성경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종교적 개인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후 900년경에 나타나 카라임 세력의 발전에 쐐기를 박은 유대인이 있었는데, 바로 사아디아 벤 요셉(주후 882-942년)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집트 파윰에서 생장한 사아디아는 아직 젊은 나이에 카라임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아디아는 성경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아랍어로 주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어 사전도 편찬하였는데, 이 모든 활동은 일반 유대인 대중으로 하여금 카라임의 설명 없이 직접 성경을 읽게 하여 그들에게 탈무드가 영감(靈感)된 점을 이해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카라임의 선전에 맞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카라임은 이 운동의 특징이기도 한 종교적 개인주의 때문에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주후 11세기 이후 카라임 운동의 추종자들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였고, 유대인들 가운데 확실히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임이 성경 연구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 언어 연구 분야에서 개척자적인 역할을 한 동시에, 올바른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주지시킨 공로는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아디아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거쳐 바벨론으로 이주해 온 후 수라의 가온으로 임명되었다 (주후 928년). 사아디아는 유대교 교리를 철학화시키고, 그 제도를 당대의 사상과 조화시키고자 노력한 종교철학자였다. 그는 랍비 유대교의 창달을 위하여 저술 활동에 힘을 다하였다. 그는 "신앙과 사상"이라는 철학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두 가지 수단으로서 이성과 계시가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학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아디아는 가온의 순수한 종교적 지도력을 선호하여 디아스포라 장관의 악행을 들춰내어 비난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디아스포라 장관의 권위와 제도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디아스포라 장관과 가온 사아디아의 싸움이 격화되면서 양측은 칼리프 알 카히르에게 호소하였다. 재판 결과 칼리프에 의하여 면직된 사아디아는 4년 동안 바그다드에서 왕성한 저작 활동에 들어갔다. 그후에 사아디아는 디아스포라 장관과 화해하고 복직되었지만, 머지않아 세상을 뜨게 되었다. 

 

사아디아 사후 6년이 지나서 수라의 예쉬바는 문을 닫게 되었다. 품베디타의 예쉬바는 셰리라와 하이의 영도 아래 얼마간 명맥을 유지하다가, 주후 1040년 칼리프가 가온 하이를 처형함으로써 결국 그 운이 다하게 되었다. 이로써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정신적 지도력도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대한 이유로서,

첫째, 이슬람을 신봉하는 민족들의 분열로 인하여 서로 다른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 접촉이 어려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경제적인 어려움이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쇠퇴를 부채질하였다. 물론 바벨론의 유대인 인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계속하여 살았다. 이제 유대인 세계의 정신적 주도권은 서서히 서쪽, 특별히 스페인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 장을 닫기 전에 이슬람 시대 바벨론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연대기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기로 하자.   


<이슬람 시대 바벨론 디아스포라 연대기>


주후 634년. 이슬람의 메소포타미아 점령

634-644년. 오마르의 통치

661-750년. 우마야드 왕조

750-1258년. 아바시드 왕조

767년. 카라임 운동의 시작 (아난 벤 다비드)

882-942년. 가온 사아디아 벤 요셉

928년. 사아디아가 수라 예쉬바 원장직에 임명되다

946년. 수라의 예쉬바 문 닫다

1040년. 가온 하이 처형, 품베디타의 예쉬바 문 닫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랍비 유대교는 바벨론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온상에서 더 많은 전승을 발전시켰다. 성경에서 미슈나로 그리고 미슈나에서 다시 탈무드로 확장되는 동안 유대인 랍비들은 각 시대 및 지역별 상황에 부응하는 법들과 그 해석을 덧붙여야 했다. 결국은 초기의 랍비들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그것은 '미크라'라고 불리는 성경보다 그것에 기초하여 이룩된 미슈나와 탈무드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유대인들 사이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미슈나와 탈무드로 대표되는 랍비들의 전승이 유대인 공동체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자, '카라임'과 같이 다시 전승보다 성경을 중시하는 사상이 등장했을 때는 이미 뒤늦은 감이 있어서 결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시되는 추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는 계시(啓示)의 말씀이다. 유대인의 조상은 자신들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계시를 받아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수해 주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는 그 계시 내용의 몇 갑절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전승을 발전시켜 그 계시 주변을 둘러 막음으로써, 계시의 진가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유대교 기독교 할 것 없이 지나치게 확대된 전승을 가지고 계시의 말씀 위에 덧칠해 버린다면 이미 진정한 신앙의 길을 벗어나 탈선의 길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제2장. 스페인 디아스포라  


스페인 디아스포라의 초기 역사


언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유대인들이 정착하였는지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의 스페인 디아스포라는 적어도 로마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주후 305년에 열렸던 기독교의 엘비라(Elvira) 공의회에서는 이베리아 반도내의 기독교인들을 유대인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주후 412년 서고트족이 스페인을 장악하면서부터 약 1세기 반 동안은 비교적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주요 상인으로서, 또는 대지주로서 존경도 받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고트족 왕들은 시시때때로 스페인 귀족들의 반발과 반역에 부딪쳐야 했다. 마침내 주후 589년 레카레드(Reccared)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전향하고 교회 감독들과 힘을 합하여 타종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나라를 떠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중 일부는 북아프리카나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 등지로 도망하였고, 어떤 이들은 외면상 기독교로 개종하고는 비밀리에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쪽을 택하였는가 하면, 일부는 스페인내 강력한 귀족에 기대어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주후 7세기는 스페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시기였다. 주후 700년경에는 유대교 의식을 행하는 것이 발견되면 노예로 팔리고 그 자녀들은 기독교 사제들에게 맡겨서 양육하도록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슬람 통치하의 스페인


주후 711년 이슬람을 신봉하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침공했다. 무어인들은 그로부터 4년 안에 스페인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의 스페인 정복과 더불어 일부 유대인들도 정복자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해 들어와서 기존의 유대인 공동체와 합류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점령한 지역내에 사는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법전을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보통 '오마르의 협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협약의 목적은 이슬람 외 다른 종교(특별히 기독교)의 신도들은 이슬람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었다. 그들은 구성원중 하나가 이슬람에 가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수리는 허용하였으나 새 교회 또는 회당을 지을 수 없었고, 교회나 회당의 탑이 근처 이슬람 사원보다 높아서는 안됐다. 이슬람 외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말을 타지 못했고, 노새는 허용되었다.


비이슬람 교도는 칼을 차고 다닐 수 없었으며, 이슬람교도와 쉽게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하여야 했다. 비록 이러한 오마르의 협약이 무어인 통치하의 스페인에서도 유효하긴 하였지만, 엄정하게 실시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무슬림 무어인들의 통치와 더불어 유대인들은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위장 개종했던 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왔으며, 북아프리카나 프로방스 지방 등지로 도망했던 유대인들도 귀환하였다. 

 

무슬림 무어인들은 피지배 민족에 대하여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시도하였으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종보다는 인두세 받는 일을 더 크게 여겼다. 따라서 비이슬람 교도에 대한 규제 사항들도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슬람 스페인은 이제 서서히 경제, 철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매력적인 분위기 때문에 바벨론과 페르시아내 유대인 공동체의 많은 구성원들도 스페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한편 주후 10세기를 전후하여 바벨론의 어려웠던 정치 경제 상황도 바벨론내 유대인들의 이주를 부채질하였다. 그들중 많은 유대인들이 찾아나선 새로운 삶의 터전이 바로 스페인과 남부 이탈리아 같은 곳이었다. 이제 이베리아 반도는 앞으로 대략 500년 동안 전 세계 유대인 역사의 중심장이 될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내 우마야드 왕조의 첫 칼리프인 압드 알라만 1세(주후 756-788년)의 통치는 주후 756년에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의 코르도바에서 시작하였다. 무어인이 점령한 스페인에 기독교인들과 서고트족의 인구 비율이 큰 점을 감안 우마야드 왕조는 관용정책을 취하였다. 더 이상 바그다드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하게 된 우마야드 왕조의 통치기에 스페인은 바야흐르 문화적 번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압드 알라만 3세(주후 912-961년)의 통치 때 유대인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우마야드 왕조는 스페인에서 약 250년을 통치한 후 주후 11세기 초엽부터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오랜 내전이 발발하였는데, 주후 1031년 우마야드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궁중의 유혈 혁명에 의하여 폐위되고 말았다. 

 

내전을 틈타 베르베르족은 코르도바를 약탈하였다 (주후 1013년). 이슬람이 다스리는 스페인의 통일은 깨지고, 나라가 지리멸렬되어 군주들이 서로 싸웠는데, 심지어는 기독교 제후의 힘을 빌려서라도 서로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무슬림 세력의 중심은 자연히 북아프리카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내 여러 작은 무슬림 국가들의 내분이 끊이지 않자, 이 틈을 이용한 반도내 기독교도들은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기독교 열성분자들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주후 1085년 서고트족의 오랜 수도인 톨레도에서 무슬림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톨레도에서 기독교인들의 통치는 잠시 잠간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무슬림들은 모로코에서 베르베르족에 속한 알모라비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주후 1086년). 알모라비드 왕국은 남부 스페인의 맹주가 되어 잠시 버티다가 그 창시자의 죽음과 더불어 바로 와해되고 말았다. 이 무렵 카스틸레의 기독교도왕 알폰소 6세(주후 1065-1109년)는 유대인들을 보호하여 유대교는 카스틸레에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다시 북부 스페인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압력이 있자, 이번에는 무슬림 유니테리언 교도들인 알모하드파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주후 1146년). 알모하드파의 지도자 모하멧 이븐 투마르트는 주후 1149년까지 이미 북아프리카를 모두 점령하고 코르도바까지 밀어붙였다. 주후 1150년에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도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주후 1172년까지 알모하드는 이슬람 스페인의 통일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들 정복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무참하게 쓸어버렸다. 코르도바, 세빌레(Seville), 루세나(Lucena)의 유대인 학교들은 폐교되었고, 회당들은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은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되는 신세였다. 다행히 이 무렵 북부 스페인의 기독교 국가들은 군주들이 관용적 태도를 취하였다. 카스틸레 왕은 알모하드의 박해에서 벗어나 도망한 유대인들을 환영하였다.   


스페인에서 꽃피운 유대교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주후 900-120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스페인에서 누린 황금기를 어느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스페인의 유대인 공동체가 배출해 낸 수많은 훌륭한 시인, 언어학자,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등을 통해 볼 때, '황금기'라는 표현은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시대를 빛낸 몇몇 대표적인 유대인들을 소개하기로 하자.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주후 약915-970년)는 의사로서 심지어는 우마야드 왕조의 칼리프를 치료하기도 하였다. 헬라어 고전들을 번역하기도 한 그는 또한 비공식적으로 칼리프(압드 알라만 3세)를 위한 외교 분야 자문역을 맡기도 하였다. 코르도바 항구의 세관 총감독 일도 그의 차지였다. 그는 이름만 없다뿐이지 사실상 외무대신 일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압드 알라만 3세가 죽은 후에도 (주후 961년) 그의 아들 하캄 2세는 하스다이를 유임시키고 그가 죽기까지 궁중에서 일을 돕도록 하였다. 

 

하스다이는 동족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각국에서 사절단이 올 때마다 그는 그 나라들에 사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묻곤 하였다. 이런 일로 카자르 왕국을 알게 된 하스다이는 그곳의 유대교 왕국과도 통신 왕래를 한 바도 있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학문 활동을 장려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친분을 맺은 학자들 중에는 바벨론 예쉬바에서 파견되어 와서 스페인에 탈무드 연구의 기초석을 놓은 모세 벤 에녹도 끼여 있었다. 하스다이는 에녹을 도와 스페인 최초의 예쉬바를 설립하는데 재정적으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바벨론 수라의 예쉬바가 기울고 있을 때 네 명의 유명한 학자들이 기금을 모으고자 바벨론을 떠나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로 향하였다 (주후 972년). 모세 벤 에녹은 이들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해적들에게 잡혀서 숱한 역경을 겪은 후 결국은 코르도바에게 노예로 팔려갔는데 그곳의 유대인 공동체에 의하여 속량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해박한 탈무드 지식이 알려져서, 하스다이의 도움을 받아 세운 예쉬바의 원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함께 온 아들과 더불어 스페인 디아스포라에 바벨론의 탈무드 연구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코르도바 태생의 사무엘 이븐 니그델라(주후 993-1056년)는 언어, 수학,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랍어와 그리고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 까지도 공부하였다. 주후 1013년 베르베르족에 의하여 코르도바가 함락되자, 사무엘은 코르도바를 떠나 말라가로 이사하여 왕궁 가까운 곳에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때때로 글을 모르는 왕궁 하인들이 사무엘의 식료품 가게에 찾아와 편지 읽기와 답장 쓰기를 부탁하곤 하였다. 어느 날 사무엘이 쓴 편지가 한 대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아름다운 필체와 잘 다듬어진 문체에 놀란 대신은 사무엘을 청하여 자기의 비서로 삼았다 (주후 1025년).


사무엘은 이제 대신의 비서로서 그동안 쌓아둔 지식과 지혜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대신은 어려운 외교 협상이 있을 때마다 사무엘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는데, 마침내 전적으로 사무엘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대신은 죽기 전에 왕 하부스에게 자신의 자리에 사무엘을 앉혀 달라고 청하였다. 보잘 것 없는 베르베르족 출신의 하부스는 전에 식료품상 주인이었던 사무엘을 스페인의 주요 국가중의 하나인 그라나다의 외교 업무를 맡는 자리에 앉혔다. 사무엘은 궁정 안팎으로 수많은 대적들의 무수한 계략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30년 가량 하부스의 대신 자리를 굳게 지킬 수 있었다. 하부스가 죽고 후계자 선정을 둘러싸고 다툼이 있었을 때에도 사무엘은 승리자의 편에 서게 되었다. 새 왕 바디스는 통치보다는 술과 여색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사무엘은 나라의 실제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사무엘 이븐 니그델라는 유대인 공동체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주후 1027년 그라나다의 왕은 그를 '나기드', 곧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임명하고 거의 바벨론의 디아스포라 장관의 권력과 유사한 권세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그는 자신이 시인이기도 했지만, 유대인 학자들과 다른 시인들을 격려하고 도왔다. 그는 탈무드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운영하였으며, 탈무드 입문서와 성경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바벨론의 가온들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학자들과도 서신 왕래를 통한 교류를 가졌으며, 해마다 팔레스타인의 회당들로 올리브 기름을 보내기도 하였다. 

 

스페인에 처음으로 탈무드 교육기관인 예쉬바를 설립한 것은 바벨론에서 파송되어온 모세 벤 에녹이었다. 이 스페인의 첫 예쉬바는 주후 950년 코르도바에 세워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 탈무드 전승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어지고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북아프리카의 페스에서 왔다고 하여 알파시(주후 1013-1103년)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이삭을 통해서였다.


프랑스에서 라쉬(주후 1040-1105년)가 그 유명한 주석을 준비하고 있을 때, 루세나(Lucena) 예쉬바 원장이었던 이삭 알파시는 스페인에서 탈무드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다. 라쉬가 탈무드의 전체 내용을 쉽고 분명하게 풀어 설명한데 반하여, 알파시는 탈무드의 법 부분에만 관심이 있었다. 라쉬와 그의 후계자들이 연구를 강조한 반면, 알파시와 그의 후계자들은 법의 실질적인 준수에 중점을 두었다.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의 문학적 관심과 연구 열기에 자극을 받아 나름대로 히브리어 시작(詩作)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주후 11-12세기에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시인으로서는 솔로몬 이븐 가비롤(주후 1021-1069년), 모세 벤 에스라(주후 1080-1139년), 유다 하레비(주후 1086-1145년) 등을 들 수 있다. 앞의 두 사람은 대체로 종교적 색체가 나는 서정시를 즐겨 썼는데, 그들중 많은 구절이 스파라딤(스페인에 살았던 유대인들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 말)의 기도서 속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말라가 태생의 솔로몬 이븐 가비롤은 철학자로도 유명한데, 그가 남긴 철학서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생명의 샘'을 들 수 있다.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가비롤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이 작은 책자는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많이 읽혀졌다

 

의사였던 유다 하레비의 많은 시속에는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알알히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농후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미래의 희망찬 조국에 대한 그의 간절한 마음은 결국 말년의 그를 팔레스타인 땅으로 몰고 갔으며, 전설에 의하면, 그가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땅에 입맞추고 있을 때 한 아랍 기병이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하레비 역시 철학자로서 유대교의 우월성을 옹호하는 변증서를 남겼다. 

 

톨레도 출신의 아브라함 이븐 에스라(주후 1092-1167년)는 유럽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문법, 철학, 종교, 천문학에 관한 책들도 저술하였지만, 무엇보다 모세 오경을 비롯 성경 여러 책에 대한 주석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靈感)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가 성경 주석서에서 던진 몇 가지 질문들은 그를 고등 비평의 선구자로 자리 매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주후 12세기의 베냐민 벤 요나는 유대인 여행가로 유명하다. 스페인 반도 북쪽의 투델라 주민이었던 그는 상인으로서 약간의 돈을 모아 가지고는, 그동안 늘 꿈꿔왔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여행은 주후 1160년에 시작되어 1173년까지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남부 프랑스 지방, 이탈리아, 그리스, 아시아, 북부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의 관습과 생활방식을 글로 남겼다. 그가 남긴 일기는 그 당시의 유대인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예를 들어, 카라임과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그가 기록한 내용은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리고 그의 일기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 팔레스타인과 동방의 유대인들이 염색과 유리 제조에 탁월한 재능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모세 벤 마이몬 (주후 1135-1204년)


중세 스페인의 유대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아마도 모세 벤 마이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이모니데스라고도 알려지고, 또는 '라베누 모세 벤 마이몬'을 줄인 람밤(RaMBaM)으로도 불린다. 마이모니데스는 주후 1135년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지역 공동체의 법관이었다. 그가 13세가 되던 무렵 그의 가족은 다른 유대인들과 더불어 스페인내 알모하드의 박해를 피하여 스페인내 여러 도시들을 거쳐 마침내 북부 아프리카의 페스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거친 환경 가운데 그는 아버지를 스승 삼아 학문을 연마하였다. 약 10년의 세월이 흘러 마이모니데스의 가족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고자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에 올랐으나, 십자군으로 인한 팔레스타인내 소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을 바꿔 파티마드 왕조의 계몽정치가 지배하던 이집트의 수도 포스타트(지금의 카이로)로 와 거기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집트에 도착한 후 바로 세상을 떴다.


카이로에서 모세 벤 마이몬은 형 다비드와 함께 인도와 에티오피아에서 보석을 수입하여 파는 무역일을 보면서, 연구와 저술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이모니데스의 온 가족은 이 가업에 의존하여 살았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다비드가 인도양에서 무역선의 파선으로 죽자, 가족 생계 부양의 의무는 전적으로 모세 벤 마이몬의 두 어깨 위에 얹혀지게 되었다. 그는 의사가 되었다.


마침내 주후 1185년 살라딘의 대신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한 알파델이 그를 왕궁과 살라딘 가문의 주치의로 삼았다. 마이모니데스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영국의 리처드왕이 그에게 자신의 주치의가 되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마이모니데스는 봉건 유럽의 야만적인 환경보다는 이슬람 문명을 선호하여 리처드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의사의 업무 외에도 마이모니데스는 이집트의 유대인들을 위한 우두머리로 임명되어 그들을 위하여 봉사도 하였다. 

 

마이모니데스는 바쁜 생활 중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는데, 그가 남긴 문헌으로는 미슈나의 구조와 내용을 밝히 설명해준 '조명'(Siraj), 유대교의 윤리를 설명해준 '여덟 장', 유대교의 법들을 주제별로 모아 놓은 '미슈네 토라', 유대교를 변증하기 위한 '모레 네부힘'('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등과 아울러, 유대교의 기본 신앙 교리들을 정리하여 '조명' 마지막 부분에 수록한 그 유명한 '13개 신조'를 들 수 있다.   


주후 13세기 전후의 스페인


주후 12세기 막바지로 다가가면서 이슬람 스페인은 점차 분열되어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로 싸우면서 힘을 탕진하였고, 거기에 북북 아프리카에서 침입한 이슬람 광신자들은 그들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은 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기독교도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서서히 그들에게 내몰리는 형편이 되었다.


주후 1212년에 있었던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베리아 반도 남동부의 그라나다 왕국만 무어인의 통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나머지 지역에는 아라곤(Aragon), 카스틸레(Castile), 레온(Leon), 포르투갈(Portugal), 나바레(Navarre)와 같은 기독교 왕국들이 들어서서 점차 강성해졌다. 이처럼 주후 13세기 초엽에 스페인의 대부분 유대인들은 기독교 나라들 안에 살면서 반유대인 감정이 팽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불투명한 장래를 기다리는 운명이 되었다. 

 

주후 13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내에서의 문화 활동은 전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과 북으로부터의 공격과 위협 때문에 무슬림들의 지성적 관심마저도 점차 식어지게 되었다. 기독교 왕국들 또한 상호간 또는 이슬람 왕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문화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 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주후 13세기 이후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전같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주후 900-1200년 사이의 스페인 디아스포라 황금기에는 시나 철학과 관련된 문헌들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주후 13세기 이후에는 탈무드와 유대교 법을 다루는 저작에 치중한 편이었다. 그럼 이 기간 동안 활동한 몇몇 유대인 학자들을 소개하기로 하자.


스페인 게로나 출신의 모세 벤 나흐만(나흐마니데스 또는 람반, 주후 1194-1270년)은 의학과 탈무드에 관심이 있었고, 토라에 대한 주석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마이모니데스가 이성(理性)을 종교에 적용시킨데 반대하여, 철학 연구를 기피한 반면, 신비주의에 기운 편이었다. 자신의 사상을 심화시키기보다는 일반 유대인들이 취하여야 할 종교적 자세에 더 관심을 가졌던 나흐마니데스는 그의 주석을 명료하고 간단하게 썼으며, 가급적 경건한 교훈으로 채웠다.


그는 성경의 이적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예언을 일상의 심리적 현상으로 삭감시키는 것에 반대하였다. 종교 진리는 이성을 가지고 잴 수 없으며, 시내산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법에 대한 믿음만이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나흐마니데스의 제자인 솔로몬 이븐 아드레트(주후 1233-1310년)는 바르셀로나의 랍비였지만, 그의 명성은 바르셀로나뿐만 아니라 전 스페인의 국경 넘어까지 퍼져나갔다. 원근각처에서 수많은 질문이 그에게 쇄도하였고 이에 대하여 그가 남긴 '답장'(Responsa)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종교적 준수와 탈무드 법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븐 아드레트 역시 그의 스승처럼 철학 연구를 반대하였다.


하스다이 코레스카스는 나흐마니데스와 마찬가지로 마이모니데스를 반대하여, 유대교를 사색적인 철학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을 거절하였다. 걸작 '주의 빛'에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전지하심, 섭리와 능력 등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는 완전함에 이르는 것인데, 이것은 사색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표현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성취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유대교 신비주의와 카발라


주후 13세기 수난기를 맞기 시작한 스페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번영기에 활발했던 신학적인 탐구 활동보다는 당장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종교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탈바꿈하였다. 다시 말해서 연구와 토론, 사고(思考) 등 지적인 활동을 중시하는 랍비 유대교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유대교가 유대인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주후 13세기 레온(Leon)의 모세 벤 궑토브는 시몬 벤 요하이가 기록한 토라 주석서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시몬 벤 요하이란 주후 2세기의 유명한 랍비로서, 바르 코크바 반란 후에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13년간 홀로 숨어살았던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기간에 천사들은 랍비 시몬에게 성경 문구들 가운데 숨겨진 심오한 하나님의 뜻들을 계시해 주었으며, 이에 시몬은 일종의 토라 주석서를 기록했고, 그 안에 그가 받은 비밀들 중 얼마를 드러냈다고 한다.


이 책은 모세 벤 궑토브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극히 일부만 알려졌었다. 모세는 주후 1250년에 '조하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출간하였다. 유대교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이 책 내용들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모세는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각종 신비주의적 해석들을 자신의 책에 모아서 편집한 듯하다.   


개종을 강요당한 유대인들


주후 14세기 초반에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주후 14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내에는 다섯 개의 왕국이 존립하고 있었다. 반도 남동부의 그라나다 왕국은 이슬람권인 무어인이 통치하였다.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Aragon)과 카스틸레(Castile)는 내부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곪힌 지방들로 나뉘어 있었다. 스페인내 이들 기독교 왕국들의 중앙 군주들은 지방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가까이 하는 입장을 택하는 추세였다.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왕의 보호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함과 같이 일시적인 것이었다. 

 

주후 1348년 아라곤 왕국 안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폭동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안의 열광주의자들 때문이었다. 주후 1366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친유대인 정책을 취했던 페드로(Pedro, 주후 1350-1369년)가 패하고, 마침내 주후 1369년 헨리(Henry)가 카스틸레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헨리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각종 법률의 시행 외에도 그들 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 유대인들은 왕의 총신으로서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뜯어내는데 앞장선 요셉 피콘이라고 불리는 한 유대인을 죽이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틸레에는 한 약한 왕이 즉위한다. 드디어 주후 1391년 세빌레(Seville)의 부주교 페란드 마르티네즈(Ferrand Martinez)는 백성을 부추겨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회당을 부수며 유대인들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제 유대인들은 죽음과 십자가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세빌레, 코르도바, 톨레도 등을 비롯 수많은 도시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깡그리 무너지게 되었다. 정부조차도 폭도들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마르티네즈는 이웃의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까지 가서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 놓았다. 

 

이처럼 잔인한 박해 속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당면한 죽음을 면하고자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하였다. 박해의 폭풍우가 지난 후에 도망했거나 숨었던 곳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역시 이와 같은 개종의 대열에 줄을 이어야만 했다. 스페인의 기독교 사제들은 개종자가 기독교 규례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였다. 유대교로 재개종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린 것이었다. 

 

주후 1411년 유대인에 대한 또 다른 소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빈센트 페레르(Vincent Ferrer)라고 하는 도미니크회 수사가 선동자였다. 그는 한 손에는 십자가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토라 두루마리를 들고, 무장한 폭도와 함께 회당들을 기습했다. 모인 유대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전혀 마음에 없는 개종을 받아들여야 했다.   


종교재판과 스페인 추방


15세기에 들어와 스페인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숫자가 상당수나 되었다. 물론 절대다수가 강요에 의한 개종이었다. 이들은 기존 구성원들의 환영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저주받은 자' 또는 '돼지'라는 뜻의 '마라노'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충성스런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비밀 유대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들중 어떤 이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끝까지 거부한 유대인들과 비밀 접촉을 가지면서 유대교의 법들을 준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기독교 사제들은 이런 개종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려고 랍비들을 협박하면서까지 그 명단을 받아내려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일부 마라노들이 정치, 경제, 심지어는 종교(기독교)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특별히 가난한 무리들은 마라노들에 대하여 경계의 태도를 늦추지 않았다. 때때로 마라노들을 공격하는 소요가 발발하곤 하였다. 일부 종교인들은 마라노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재판을 도입하기를 원하였다. 종교재판이란 본래 이단을 찾아내어 처형하기 위한 제도였다. 종교재판을 좋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찬성파의 여론에 밀려서 마침내 종교재판이 도입되게 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드 왕과 카스틸레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미 수년 전에 결혼한 부부 사이로서, 주후 1479년 두 나라의 공동 통치자가 됨으로써 스페인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이들이 국가 권력을 견고하게 장악하면서부터 종교재판 제도를 열자는 요구도 더욱 집요하게 올라왔다. 특별히 이사벨라의 고해신부인 토르쿠에마다(Fray Thomas de Torquemada)가 종교재판을 원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는 주후 1478년에 이미 스페인에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하여 교황청에 청원 중이었다. 페르디난드 왕이 종교재판소를 왕실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여 허락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주후 1480년 9월 마침내 두 사람의 도미니크회 인사가 종교재판 감독관 자격으로 세빌레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서의 첫 처형은 주후 1481년에 있었다. 이때 6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 이후로 종교재판의 희생자는 날마다 증가하는 추세였다. 주후 1483년 5월에 통치자들은 이 제도를 스페인 전국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최고 종교재판장으로는 토르쿠에마다가 임명되었다. 많은 마라노들이 고문실에서 수난을 겪었고, 형장의 재로 사라졌다. 3세기 동안이나 계속된 종교재판 제도는 주후 1834년에야 완전히 철폐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주후 18세기 말엽까지 종교재판이 계속되었다. 

 

주후 1492년 1월 2일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군대는 마침내 그라나다를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주후 711년 이슬람에 의하여 점령당한 이후 처음으로 이베리아 반도는 그 전부가 기독교도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종교재판을 통하여 마라노들을 분쇄하고 정복을 통하여 무슬림 무어인들을 물리친 다음에도, 토르쿠에마다는 스페인에 남아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쉴 줄을 몰랐다. 그는 유대인들이 마라노들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그들 사이에 유대교 의식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스페인 땅에서 유대인들을 영원히 추방시킬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토르쿠에마다는 종교재판 제도가 시작되던 주후 1480년에 이미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명령이 떨어지긴 하였지만, 몇 차례 거듭하여 연기되더니 결국은 무산되고 말았었다. 왕이 유대인들을 추방함으로써 당할 경제적 불이익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르쿠에마다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집요하게 '유대인 추방'을 호소하였다. 주후 1491년 그는 교황 이노센트 8세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추방 계획에 대한 교황의 축복을 요청했지만, 그 계획이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토르쿠에마다의 인기가 왕의 인기를 능가하면서, 그는 교황의 허락도 필요 없이 결국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았다.


마침내 토르쿠에마다와 일부 사제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주후 1492년 3월 31일에 유대인들을 카스틸레와 아라곤에서 추방한다는 칙령에 서명하였다. 이유인즉 유대인들이 마라노들을 비밀리에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스페인내 모든 유대인들은 그해 8월 1일 전까지는 반드시 떠나야만 했다. 그 사이 유대인들에 대한 도움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15만 명의 유대인 중에서 약 5만 명 가량이 스페인을 떠나기보다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대략 1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은 추방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1492년 8월 1일 많은 무리의 유대인들이 카스틸레와 아라곤을 떠났다. 그러나 실제로 마지막 무리가 스페인 땅을 떠난 것은 다음날인 8월 2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솔로몬 성전과 헤롯 성전이 파멸되었던 아브월 9일이었다.


1492년 8월 2일 세빌레(Seville) 근처 항구에서는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들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바로 그 가련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하여 그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콜럼버스 자신을 비롯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북부에 살던 일만이천명 가량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에 가까운 나바레(Navarre) 왕국으로 향하였다. 그곳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재판 제도의 도입을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페르디난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바레 왕국도 결국 종교재판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으로 잠시 피신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하였고,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중 일부 부유한 이들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주후 1495년 마노엘 1세(주후 1495-1521년)라고 하는 새 왕이 포르투갈의 권좌에 올랐다. 그는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부부의 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하였다. 이들 부부는 마노엘의 왕국내에 비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주후 1496년 12월 포르투갈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전에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모두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마노엘은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유대인들이 떠나는 길을 방해하였다. 마감날이 지나자 마노엘은 미처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노예라고 선언하고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이들 중 다수 역시 비밀리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마라노가 되었다. 이처럼 주후 1497년에 유대인들은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스페인 디아스포라 연대기>


주후 305년. 엘비라(Elvira) 공의회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 분리 시도

412년. 서고트족의 스페인을 점령

589년. 레카레드(Reccared) 왕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637년. 오마르의 협약

711년. 무슬림 무어인들의 스페인 침공

756-788년. 스페인내 우마야드 왕조의 첫 칼리프 압드 알라만 1세

912-961년. 압드 알라만 3세

993-1056년. 사무엘 이븐 니그델라

1013년. 베르베르족의 코르도바 점령

1013-1103년. 알파시

1021-1069년. 솔로몬 이븐 가비롤

1080-1139년. 모세 벤 에스라

1085년. 톨레도에서 무슬림들 쫓겨나다

1086년. 알모라비드 침입

1086-1145년. 유다 하레비

1092-1167년. 아브라함 이븐 에스라

1135-1204년. 모세 벤 마이몬

1146년. 알모하드파 침입

1160-1173년. 베냐민 벤 요나의 여행

1194-1270년. 모세 벤 나흐만

1233-1310년. 솔로몬 이븐 아드레트

1250년. 조하르 출간

1348년. 아라곤 왕국에서의 반유대인 폭동

1391년. 세빌레(Seville)에서의 반유대인 폭동

1411년. 빈센트 페레르의 선동으로 인한 소요

1480년 9월. 종교재판 감독관 임명

1481년. 스페인내 종교재판의 첫 희생

1492년 1월.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군대에 의한 그라나다 함락

1492년 3월 31일. 유대인들을 카스틸레와 아라곤에서 추방한다는 칙령에 서명

1492년 8월 1-2일. 스페인 유대인들의 대탈출

1497년. 포르투갈의 유대인들 추방  


스페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한때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하였다가, 그 다음에는 서서히 박해 속에서 움츠러들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추방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주변 환경이 안락한 분위기를 제공해줬을 때에 랍비 유대교는 철학의 방법을 기초로 하여 인간 이성(理性)을 통하여 찾을 수 있는 종교적 진리 탐구에 힘썼다. 이러한 방법은 종교적 사상의 체계, 곧 '신학'이라는 영역을 중시하는 풍조를 초래하였다. 반면 수난기 유대교는 '신학' 보다는 '종교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것은 유대교에 있어서 신비주의 또는 영험(靈驗)주의라고 하는 산물을 낳게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도 친밀한 접촉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신학과 영험주의, 어찌 보면 이 둘은 종교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평화시기에는 인간 이성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신학적 체계를 정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경우 철학과 시는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그러나 일단 수난기가 닥치자, 철학도 시도 종교 문화적인 사치품으로 느껴졌다. 이제 많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의 생명력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인간 이성의 탐구에 의한 지성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도움이었다. 

 

랍비 유대교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이성의 지적인 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전승을 발전시켰다. 이 방대한 지적 산물은 원래의 진원지인 성경의 무게를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오늘날 많은 유대인들은 최초의 보화를 찾아 나서기도 전에 먼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양의 포장(包裝) 체계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다. 이에 반감을 가진 일부 유대인들은 그 모든 전승 체계를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신(交信)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간 편으로부터의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험들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의 스페인 디아스포라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이 두 가지 양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교훈해주는 바가 크다.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에 대한 인간의 신앙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시종교'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방법을 활용,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 곧 기독교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신학적 활동을 그리 나무랄 필요는 없다. 단 한 가지, 이성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로 주어진 계시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탐구하여야 한다.


한편 신비주의 경향으로 치우친 이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인간으로부터의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객관적인 영험이어야 할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양상중 어느 하나가 극으로 치우치거나 또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기독교 역시 랍비 유대교와 신비주의 유대교에서 보는 것처럼, 올바른 자리 매김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그릇되게 신앙하는 실패작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제3장. 서유럽 디아스포라  


서유럽에서의 유대인 존재는 기록상 주후 5-6세기 남부 가울 지방에 있었던 '레반틴' 또는 '시리아' 상인들의 식민 도시들로부터 시작된다. 이민족 침입 이후로 유럽에 처음으로 평화와 질서를 회복시킨 이는 샤를마뉴 대제(주후 742-814년)였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가치를 간파한 그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격려하였다. 샤를마뉴 대제 치하의 주후 797년 사절단의 통역인 자격으로 바그다드에 간 이삭이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바그다드로 가는 중 사신들이 죽자, 이삭은 혼자서 성공적으로 외교업무를 수행한 후 칼리프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로 받아 유럽으로 돌아왔다.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유대인들은 카롤링거 왕조 통치 전역으로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주후 9세기에 들어와 동방의 유대인 무역상들도 유럽에 보다 빈번히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남부 유럽의 어떤 유대인 가족들은 랍비들의 인도를 받아 북상하여 파리 일대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주후 9세기 프랑스와 독일의 법문서에서는 '유대인'과 '상인'이 거의 같은 뜻으로 호환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주후 10세기 유럽내 유대인들의 상권 장악은 서서히 기울다가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완전히 끝나고 만다.  


게르숌과 라쉬


주후 11세기까지 프랑스와 독일의 유대인들은 보통 수준의 삶을 영위하였다. 비록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로 인하여 토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사회조직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을지라도,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든지 상업활동과 기술직이라는 출구가 마련되어 있어서 그들중 많은 수가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을 포함 이웃과의 관계도 원만하여서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일부 유대인들은 탈무드 연구에 헌신할 수 있었다. 이 시대 서유럽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지성이 있었으니, 하나는 마인스(Mayence)의 게르숌이요, 다른 하나는 프랑스 태생의 랍비 솔로몬 벤 이삭이다.


메츠에서 태어나 마인스에서 대부분의 생을 보낸 게르숌 벤 유다(960-1028년)는 견실한 학문과 온화한 성품으로 인하여 '디아스포라의 빛'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그는 탈무드 주석 작업에 헌신하여 결국 그 열매를 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유럽 각지로부터 질문들이 쇄도하였다. 이에 대한 그의 답장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유대인 공동체들에서 법적인 효력을 갖는 것이었다.


주후 1000년경 게르숌이 내보낸 규례들 중에는 일부다처제를 금하고 쌍방이 모두 동의할 경우에만 이혼이 성립한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그는 또한 세례를 강요당한 유대인들에 대한 혹독한 법들을 수정하기도 하였다. 게르숌이 제시한 정책은 관용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의 영향과 노력으로 많은 강제성 개종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게르숌은 이들을 비난하거나 유대인 사회활동 전반으로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누구든지 출교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주후 1040년 랍비 솔로몬 벤 이삭(주후 1040-1105년)이 프랑스 트로이스에서 태어났다. 히브리어 이름 첫 글자들을 따서 보통 라쉬라고 불리는 랍비 솔로몬 벤 이삭은 역사상 성경과 탈무드 주석가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 학자이다. 독일의 보름스로 가서 가난하고 비참한 환경 가운데 공부했던 라쉬는 25세의 나이에 고향 트로이스로 돌아와 정착하였다. 라쉬는 그곳 유대인 공동체의 랍비로 임명되었다.


물론 당시에 으레 그렇듯이 급료가 없는 명예직으로서 라쉬는 포도원을 가꾸며 포도주를 생산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라쉬는 성경과 탈무드를 해설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라쉬는 전문적 연구나 비평적 해석을 추구하기보다는, 유대인 문헌의 모호한 구절들을 간략하고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의 주석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애독되고 있다.    


고조되는 반유대인 감정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 사제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때때로 무지하고 광신적인 사제의 독설적인 설교는 단순한 군중을 동요시켜 유대인 공동체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베지엘(Béziers)에서는 해마다 종려주일과 부활주일 사이 한 주간 동안에 유대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들에게 진흙과 돌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툴루스(Toulouse)에서는 시(市)의 백작에게 성금요일(예수의 수난일)에 유대인 지도자의 뺨을 때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주후 12세기초부터는 거액의 돈을 지불함으로써 이런 수치스런 관습을 모면할 수 있었다. 

 

주후 11세기를 통하여 유대인들과 모든 이교도에 대한 소위 유럽 기독교도들의 증오심은 점점 깊어만 갔다. 교회와 국가 지도자들도 그들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기보다는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그레고리 7세(주후 1073-1085년)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자, 거의 유럽 전체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그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엄중한 규제법안들을 제정하였다.


주후 1078년 그는 유럽의 모든 기독교 국가 안에서 유대인을 공직에 고용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선포하였다. 스페인 카스틸레 왕국의 알폰소 10세(Alphonso X)가 알모하드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온 유대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자, 그레고리 7세는 그를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교황은 그에게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을 유대인들 아래 복속하게 하고 그들의 재판에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반대하고 사탄의 회당을 높이는 행위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오만무례하게 취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폰소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다.   


십자군 운동과 유대인의 수난


주후 11세기 말엽에 시작되어 거의 200년 가량 유럽과 서아시아를 열광의 도가니로 빠지게 했던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비참한 운명을 자아낸 공포의 올무였다. 사실 십자군 운동의 처음 동기는 순수한 것이었다. 주후 11세기 말엽 교황 우르반 2세는 팔레스타인을 무슬림들의 손에서 탈환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지로 삼고 성지 순례객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자 십자군을 일으켰다. 교황은 십자군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든지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한 전투에서 전사하는 자는 낙원에 들어가는 자격이 보장된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전 유럽에 걸쳐 그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전반적으로는 종교적인 열성으로 가득찬 분위기였지만,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엉뚱한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귀족들은 새로운 영토를 찾고자 나섰고, 평민 가운데는 어려운 생활을 떨쳐 버리고 모험과 자유의 기회를 찾아 나선 농노(農奴)와 가난한 자작농들도 있었다. 마침 주후 1096년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에 전염병이 전 유럽을 강타하였고 로렌 지방에서는 기근이 뒤따랐던 터이라,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십자군 운동에 가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첫 번 째 십자군의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이 엉망이라는 점이었다. 식량이나 기타 군수품 배급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무질서한 이 오합지졸 부대가 성지를 향해 행군하던 중, 유럽내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약탈하기에 아주 적합한 대상이었다. 무리중 어떤 사람들은 멀리 있는 이교도들(무슬림)을 치러 가기 전에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으로서 자기들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을 먼저 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냐면서 "유대인을 죽이고 네 영혼을 구하라"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주후 1096년의 첫 번 째 십자군 운동 때 일반 대중에 의하여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국가 수반에 의하여 행사되어온 종래의 박해와는 달리 더욱 잔인하고 보다 지속적인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1096년의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죽임 당한 유대인의 수는 라인강 주변에 살던 독일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대략 일만이천명에 달하였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주후 1099년) 거기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을 회당 안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이처럼 경악스러운 일이 있은 후 황제는 강제로 세례받은 유대인들을 유대교로 돌아가도록 허용한 일을 비롯, 유대인의 신분과 안전을 회복시키는 일에 힘썼지만, 이미 대중 사이에 스며든 '유대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라는 비이성적인 반유대인 감정은 저지할 도리가 없었다. 

 

십자군에 의하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에 건설된 소규모의 라틴 왕국들은 전쟁을 통하여 베이루트에서부터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확장해 나갔다. 그들은 약 반세기 가량 견고하게 통치권을 지켜가면서 전세계로부터 기독교 순례객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탐심과 욕망으로 가득찬 통치자들의 태도 때문에 이 라틴 왕국들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주후 1144년 무슬림 군대는 십자군의 중심 요새라고 할 수 있는 에데사를 점령하였다. 이제 라틴 왕국들은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십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주후 1144년 두 번 째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뻔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은 예측치 못한데서 찾아왔다. 당시 가장 존경받던 교회 인사인 클레르보(Clairvaux)의 대수도원장 버나드(Bernard)는 유대인 살인을 부추기는 수사와 사제들을 강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버나드의 헌신적인 간섭과 보다 잘 정리된 군대 조직으로 말미암아 두 번 째 십자군 운동 때 유대인에 대한 공격은 처음에 비하여 훨씬 미약한 편이었다. 두 번 째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 번 째 십자군 운동은 주후 1189년에 일어났다. 이 무렵은 이미 십자군 운동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요건만 갖추어지면 얼마든지 유대인들을 박해하곤 하던 때였다. 이때 영국에서 있었던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정복자 윌리엄(주후 1027-1087년) 때 영국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 유대인들은 약 1세기 동안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문제는 리처드 왕(주후 1157-1199년)의 대관식 날(주후 1189년 9월 3일)에 발단되었다.


리처드는 대관식을 마치는 즉시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출정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런던 시내는 그를 따라 가겠다고 서원한 무리들로 가득하였다. 그때 갑작스럽게 새 왕이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명했다는 풍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폭도들은 잽싸게 이 풍문에 따라 실행에 들어갔으며, 왕의 신하들은 폭도들의 미친 짓을 힘겹게 막아야 했다. 리처드는 폭도의 우두머리 세 명을 잡아 사형에 처했고,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리처드 왕이 영국을 떠난 며칠 후에 몇 곳에서 폭동이 다시 발발하여, 수 백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한 일을 비롯, 유대인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주후 1208-1215년 사이에 있었던 알비주아 십자군은 프랑스 남부 알비(Albi) 지방에서 일어난 일종의 반로마 가톨릭 교단인 알비주아파를 섬멸하기 위하여 조직된 십자군이었다. 이로 인하여 프로방스 지방의 유대인들이 입은 피해 역시 적지 아니하였다. 유대인 정신 문명의 흐름에 있어서 프로방스는 스페인과 북중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였다. 이런 교량적 역할에 있어서 프로방스의 두 가문이 유명하다.


하나는 킴히 가문이요, 다른 하나는 이븐 티본 가문이다. 요셉 킴히(주후 1105-1170년)와 그의 두 아들, 모세와 다비드는 나르본(Narbonne)에 살면서 히브리어 문법 연구와 성경 주석에 힘썼다. 특별히 다비드 킴히(주후 약1160-1235년)는 스페인의 히브리어 문법학자들이 이미 연구해 놓은 결과들을 요약하고 히브리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제시하는 한편, 상당한 분량의 성경 주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븐 티본 가문의 유다와 사무엘 부자는 아랍어로 기록된 문헌들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일로 유명하다. 사아디아,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유명한 유대인 학자들의 책들이 아랍어에서 히브리어로 번역된 것은 바로 이들의 공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유럽내 유대인들의 안정된 공동체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들에 대한 민족적 혐오감이 강화되기 시작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로써 유럽의 유대인들은 주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조롱과 냉대와 혐오의 대상이요, 가난과 공포와 절망의 대명사로 근근히 생존하기에 이르렀다. 이 600여년 동안 유럽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존재는 경제적인 이용물일뿐이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이용가치가 있을 때는 삼키고 없을 때는 내뱉는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주후 13세기


서유럽내 로마 가톨릭 사제들 가운데 널리 퍼졌던 반유대인 감정은 이미 주전 325년의 니케아 종교 회의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일반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시키는데 선봉장 노릇을 하였다. 게다가 기독교인 상인층이 형성되면서부터 유대인들은 상업 활동에서도 제한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렇다고 농사를 짓자니 농노나 노예를 소유할 수 없어서 그것마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세 유럽의 길드 제도는 유대인들에게 기술자가 되는 길도 막아버렸다. 이런 상황하에 유대인들이 찾아 나선 새로운 직업은 고리대금업이었다. 마침 기독교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 빌려주는 일을 죄악시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일을 공공연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나마 인간사회에서 필요한 이 일은 기독교와 관계없는 유대인들의 차지로 떨어지게 되었다. 

 

주후 1200년경을 전후하여 이미 서유럽 전역에서는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거나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일이 두 세기 가량 지연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경제적 이용가치 때문이었다. 서유럽에서의 반유대인 감정의 표시로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유대인들이 차고 다녀야 했던 특별한 딱지였다. 이미 이슬람권에서는 주후 850년에 유대인과 기독교도 등 비이슬람 교도에 대하여 노란색 머리보자기를 쓰고 옷소매에는 노란색 천을 달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주후 1179년에 있었던 교회 공의회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법률이 거의 제정될 뻔하였었는데, 당시 교황의 개인적인 재정자문을 맡았던 예히엘이라고 하는 한 유대인의 노력으로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노센트 3세가 교황으로 있던 주후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에서 마침내 이 규정은 채택되고 말았다. 남자인 경우 13세 이상, 여자인 경우 11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은 겉옷의 앞뒤에 표시(보통, 노란 딱지)를 달아야 했다.


이노센트 3세(주후 1198-1216년 재직)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거부한 대가로 고난받으며 영원히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다. 그는 처음 교황직에 올라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과 강제적 개종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필립 아우구스투스(Philip Augustus)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던 유대인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들중 일부를 공직에 채용하자, 이노센트 3세는 필립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비난하였다. 필립이 '십자가형을 집행한 자들의 후손을 십자가에 달린 자의 후손보다 선호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주후 1205년 5월에 이노센트 3세는 스페인 카스틸레의 알폰소왕이 유대인들을 카스틸레의 궁정에 기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출교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유대인들에 관한 이노센트 3세의 정책은 그가 네베르스(Nevers) 공작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도 잘 알려져 있다: "형제를 죽인 가인처럼, 얼굴은 수치로 가리우고 도망 다니는 방랑자로서 땅 위에서 유리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운명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독교 제후들은 그들을 보호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농노 신분으로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알비주아 십자군 운동을 통하여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시킨 것도 이노센트 3세 때의 일이었다. 

 

이노센트 3세는 교황으로서의 집권 18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전 유럽을 통치하였다. 교황권을 반대하는 자는 범죄자나 신성모독자로 낙인찍혀 처형되었고, 그들의 저술은 공공연히 불에 태워졌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에게 내린 규제 조치가 바로 앞서 언급한 바, 주후 1215년에 열린 라테란(Lateran) 공의회에서 채택한 규정들이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유대인들을 위한 특별한 표시를 의무화한 규정 외에도, 이교도와 유대인들을 개종하기 위한 새 십자군 운동 선포, 유대인들의 공직 채용 금지, 유대인 대금업자들의 고금리 불허 등의 규례도 결의되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유럽인들의 반유대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탈무드가 불태워졌고, 유대인에 대한 의식(儀式) 살인 혐의가 다시 부상하였다. 

 

주후 13세기 서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깊어가고 동시에 일반 유대인들의 문화적 관심도가 높아 가면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유대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철학을 연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교를 논하기보다는 그것을 준수하고 믿는데 주력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견해가 서로 엇갈리면서 적지 않은 충돌이 있었다. 이 충돌의 불길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 처음으로 솟아올랐다. 탈무드 학자인 솔로몬 벤 아브라함은 철학을 공격하는데 앞장섰고, 다비드 킴히(주후 약1160-1235년)는 철학 연구를 옹호하고 나섰다. 약세에 몰린다고 생각한 철학 반대파는 가톨릭 교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이 기회를 이용 가톨릭 사제들은 많은 유대인 서적을 압수하여 공공연히 불에 태웠다.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남부 유대인들의 내부 분열은 주후 13세기 말엽까지도 지속되다가, 결국 주후 1306년 프랑스로부터의 추방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부서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 여부에 따라 박해를 더 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하는 고난의 파도를 타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서유럽 이곳저곳에서 추방되었다가 다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고, 군주들과 일반 대중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어졌다. 주후 1290년 가을에는 영국내 일만 육천명이나 되는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되었으며, 주후 1306년에는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 첫 번 째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던 주후 1096년부터 주후 1306년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기독교 문화를 표방하는 서부유럽 국가들에서 온갖 박해의 대상이 되어 살았다. 이로써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은 더욱 골이 깊어졌으며, 이때부터 유대인은 정처 없이 방랑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주후 14세기


주후 14세기는 서유럽의 유대인에게 혹독한 수난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주후 1306년 프랑스의 필립(주후 1285-1314년)이 자기의 전 국토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였을 때, 그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프랑스 국경 주변으로 피하여 귀환령만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9년이 지난 주후 1315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환령이 떨어졌다.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프랑스 통치자의 수입원과 맞물린 함수관계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어디까지나 착취의 대상으로서 필요없으면 내뱉고 다시 필요하면 받아들이곤 한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통치자의 착취 못지 않게 일반 서민층의 공격 역시 유대인 공동체들에게는 커다란 화근이 되었다. 주후 1320년에는 남부 프랑스의 가난한 양치기들과 농부들이 난을 일으켜 많은 유대인들에게도 피해를 입혔는가 하면, 그 다음 해에는 문둥병자들로 인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주후 1321년에 남부 프랑스에서 문둥병자들이 질병을 퍼뜨리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자, 몇몇 문둥병자들이 잡혀와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자백하기를, 스페인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연합하여 유럽의 기독교 인구를 독살할 계획으로 문둥병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우물에 독을 살포함으로써 질병을 퍼뜨리도록 사주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무근한 자백으로 말미암아 수백명의 유대인들이 잡혀 고문당하고 죽임 당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루이 10세(Louis X)의 약속 기간을 채우지도 못하고, 또 다시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주후 1359년에 프랑스는 재정난 때문에 다시 유대인들을 불러들였다가, 주후 1394년 9월에 또 다시 결정적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다는 칙령이 떨어졌다. 이 추방령이 서명된 날(주후 1394년 9월 17일)은 마침 유대인의 속죄일이었다. 

 

이 무렵 독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운명도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의 운명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주후 1336-1338년 사이에는 남서부 독일에서 일단의 불량배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온갖 잔혹한 행동을 일삼으며 설친 적이 있었다. 주후 1348-1349년 유럽 전역에는 그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죽어갔다.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그것이 쥐에 의하여 전염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것을 알 턱이 없었던 14세기의 유럽 사람들은 공포와 무지 가운데 희생양을 찾다가 결국, 유대인들이 사탄과 연합하여 행한 짓이라고 하는 일부 악덕한 사제들의 허무맹랑한 비난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 다시 주후 1321년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살포했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유대인들을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제 유대인들은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 외에도 무지한 하층 계급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무지한 박해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클레멘트 6세는 서신을 띄워 유대인들의 무죄를 증거하며 그들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황제 챨스 4세는 유대인 학살을 막는 일에 별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일반 군중 사이에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유대인에 대한 짙은 혐오감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무렵 독일내 유대인 인구의 절반 정도가 진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후 13-14세기의 독일은 중앙 정부와 황제의 권한이 약화되고 각 도시 제후들이 독자적인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체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도시마다 독립을 추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 도처에 난무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은 모두의 희생제물로 전락하기가 일쑤였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한 도시에서 쫓겨나 다른 도시로 피하거나 아니면 아예 동유럽으로 이주해 버린 이들도 있었다. 

 

주후 14세기 후반부에 들어와 독일의 유대인들은 비록 본래 살던 곳으로 입경이 허락되었지만, 도시내 한 구역에 모여 살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게토'라고 불리게 되는, 도시 안의 작은 유대인 거주구역이다. 이처럼 도시내의 한 특정한 구역에 분리되어 살면서, 유대인들은 단순한 과세 대상으로서 결코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되었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도시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도 없었거니와 자발적인 이주도 허용되지 않았다.   


주후 15-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유대인 추방에도 불구하고, 주후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 사이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르네상스 정신 덕택에 보다 나은 운명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르네상스 운동은 상류 계층에만 제한되었으며, 전반적으로 도덕과 윤리 수준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서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한편 주후 15-16세기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각 분야에서 유럽의 지성사에 두드러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특별히 서유럽의 지성인들이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도움을 전보다 더욱 필요로 하였다. 로이힐린(John Reuchlin)과 같은 기독교인 학자는 유대인 문헌들의 이용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없애려는 세력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로이힐린은 심지어 독일내 모든 대학에서 히브리어 강좌를 개설하여야 한다고 황제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주후 1483-1546년)가 로마 가톨릭을 공격한 내용 중의 하나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사제와 수사들이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자 그들을 공격하고 박해한 일을, 루터는 강렬한 어조로써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루터는 "유대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좋은 혈통이다. 성령은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책을 세상에 주시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자녀요, 우리는 손님이요 나그네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가 된 것으로 만족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권했던 친절과 관심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루터의 말에 큰 기대를 걸고 그를 환영하였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망하는 태도였다. 

 

루터는 자신의 부드러운 말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루터는 크게 실망하였다. 루터는 말년에 유대인들의 완악한 마음과 유대인 문헌의 '거짓됨'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는 유대인 박멸을 권하는 끔찍한 말까지도 그의 입에서 나오게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및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과 심지어는 많은 마라노들까지 르네상스기에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도시들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탈리아에서도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주후 1516년 베니스는 유대인들을 완전히 격리시키고자 최초의 게토를 세웠고, 주후 1540년 나폴리 왕국까지 관장하고 있던 챨스 5세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주후 1550년에는 제노아에서 유대인들이 축출되었고, 1569년에는 교황이 지배하는 모든 영토 안에서 추방당했다. 

 

이 무렵에도 여전히 독일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게토 안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야 했다. 주후 1492년에 있었던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은 유럽 전체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끼쳤다. 또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리고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경제적 역할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은 미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언제나 피해보는 쪽이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유대인들은 추방당하거나 아니면 게토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게토에서의 유대인의 삶은 가난하고 절망적이고 무력한 것이었다. 밤이 되면 유대인들은 게토밖에 남아 있을 수 없었고, 비유대인들이 게토 안에 남아 있는 것도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모자에 노란 딱지가 달린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게토에 사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헌 물건들을 사고 팔거나, 아니면 물건을 저당잡고 소액의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 일 정도였다. 게토 안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탈무드와 미드라쉬 등을 연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리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 박해 양상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표방한 중세 서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표적인 박해 양상으로서 의식(儀式) 살인 혐의, 성찬식 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양상의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와 기독교의 메시야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 감정은 점점 깊어만 갔다. 

 

첫째, 의식 살인 혐의란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의 사내아이를 납치하여 죽인 후 그 피를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에 발라먹는다는 오해를 가리킨다. 중세 유럽 많은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은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집단적, 정치적, 및 문화적인 기독교화의 소산으로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소수 무분별한 지도층의 선동에 쉽게 끌려가곤 하였다. 게다가 중세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유럽에서 성경이 일반인들이 보통 사용하는 언어로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 16세기의 일이었다. 평신도, 사제 할 것 없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하였다. 이런 무지 가운데 중세 유럽의 일부 무분별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의식 살인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었다.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 퍼진 유대인들에 대한 두 번 째 혐의 내용은 유대인들이 성찬식 때 사용되는 빵을 훔쳐다가 날카로운 기구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소문이었다. 이런 풍문이 퍼지면서 역시 무분별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 회당을 불태우곤 하였다. 

 

셋째, 탈무드의 소각은 주후 1244년 처음으로 파리와 로마에서 있었고, 주후 14세기 프랑스에서 네 번의 소각 사건이 더 있은 후 200년 동안 더 이상의 소각은 없었다. 탈무드 소각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해는 주후 1553-1554년경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탈무드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서적은 12번이나 화형대에 올랐다. 주후 1558-1559년 로마에서 두 번의 소각이 더 있고 난 후에 이 유행은 사라졌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주후 1757년에 단 한 번 탈무드 소각이 있었다. 

 

유대인 박해의 네 번 째 양상은 기독교도와 유대교 랍비와의 종교 논쟁이다. 이것은 특별히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요청함으로써 이루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논쟁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억지 결론을 내리는 방향으로 끝을 맺곤 하였다. 앞서 언급한 다른 세 가지의 유대인 박해 양상도 역시 일반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관련된 경우가 많이 있었다. 

 

중세 기독교의 무지와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것은 비단 유대인만은 아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 역시 이단이나 마녀 사냥이라는 명목 아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중세의 유럽 사회는 기독교를 빙자하여 비기독교적인 행위를 일삼곤 하였던 것이다.  


주후 17세기


일반적으로 개신교에 동정적이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오렌지의 윌리엄 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비교적 자유롭고 진취적인 국가를 형성하였다. 네덜란드는 본래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박해가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로 도망 오곤 하였었다. 마라노들 역시 종교재판의 마수를 피하여 네덜란들로 도망 오곤 하였다. 주후 1600년경 네덜란드는 마라노들에게 유대교 법들을 준수하도록 허용하였다. 주후 17세기초에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에 회당을 설립하고 공동묘지로 쓰기 위하여 토지도 구입하였다. 이 무렵 유대인들 사이에 '네덜란드의 예루살렘'으로 알려진 암스테르담에는 무려 500개의 유대인 가정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유대인들(스파라딤)과 특별히 30년 전쟁(주후 1618-1648년) 이후 독일 쪽에서 온 유대인들(아슈케나짐) 사이에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 이들 두 유대인 공동체에는 각자의 랍비, 학교, 공동묘지, 관리들이 있었다. 비교적 명문 가문 출신의 유대인들로 구성된 스파라딤은 게토 출신으로서 가난한 배경의 아슈케나짐을 천시하였다. 특별히 네덜란드에 이주해온 스파라딤은 식민지 무역에 있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다이아몬드 산업은 수세기 동안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라노 출신으로서 네덜란드로 이주해온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는 전통적인 유대교 사상을 떠나 정신적인 방황을 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교회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우리엘 다코스타(주후 1590-1640년)는 기독교에 실망한 나머지 비밀리 유대교로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공공연히 유대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유대교의 끝없이 많은 규범들은 순수한 이상주의자인 우리엘을 실망시켰고, 결국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주후 1640년 자살로써 생애를 마쳤다.


바룩(베네딕트) 스피노자(주후 1632-1677년)는 젊었을 때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크게 기대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개인주의자로서, 조직화된 어떠한 종교 안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소년 시절 스파라딤 공동체의 학교에서 탁월한 학습 능력을 인정받았던 스피노자는 서서히 유대교 철학이 아닌 일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청년 스피노자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규례를 어기는 생활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암스테르담의 스파라딤 공동체는 스피노자에게 파문 선고를 내렸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유로운 네덜란드 땅 안에서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윤리와 철학 등에 관한 저술 활동에 시간을 보냈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거절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주후 1673년).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스파라딤 공동체 안에서 마라노 출신의 모든 유대인이 우리엘이나 스피노자와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므낫세 벤 이스라엘(주후 1604-1657년)은 마라노 가문 출신으로서 암스테르담에서 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학교의 선생으로 출발한 그는 스파라딤 공동체의 랍비가 되었다. 인쇄업에도 관여한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라틴어와 스페인어로 출간하였다.


당시 한 유대인 탐험가를 통하여 퍼진 아메리카 인디언 이야기를 듣고, 순진하게도 므낫세는 스페인어로 출간된 (주후 1650년) '이스라엘의 희망'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주전 8세기에 앗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하여 유배된 북왕국 이스라엘 열 지파의 후손들이 아시아를 지나 북아메리카까지 이주해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주후 17세기 해외 무역에 있어서 네덜란드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영국은 유대인들을 다시 입국시키는 일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설명한대로, 영국의 유대인들은 주후 1290년에 완전히 추방되었었다. 주후 1650년 암스테르담의 랍비 므낫세 벤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영국 재입국을 위하여 올리버 크롬웰에게 청원하였다. 주후 1652년 크롬웰은 므낫세 벤 이스라엘을 영국으로 초청하여 이 문제를 협상하고자 하였다. 전쟁을 비롯 몇몇 난관 때문에 므낫세의 영국 방문은 주후 1655년에야 성사될 수 있었다. 주후 1657년 크롬웰은 비공식적으로나마 유대인의 영국 입국에 동의하였다.


크롬웰 시대에 영국 안에서 다양한 계층간에 유대인의 재입국 문제에 대한 격렬한 토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미 오래 전부터 영국 안에 살아왔던 몇몇 마라노들은 주후 1655년에 공개적으로 유대인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주후 1660년에 영국의 왕좌에 복귀한 챨스 스튜어트 역시 경제적 필요에 의하여 유대인의 입국에 대하여 묵인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영국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서서히 재기하게 되었다.  


주후 1618년에서 1648년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독일에서는 신구교도 간에 3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전체가 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유대인들 또한 그 피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전쟁 이후 독일의 인구는 격감하였고, 경제 또한 붕괴되었으며, 독일은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나라는 오스트리아, 그 다음에는 프러시아 순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왕은 명목상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겸직하였다.


유럽은 전반적으로 중세 길드 제도로 인하여 경제 회생 능력을 상실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만이 유일하게 구태를 벗어나 부와 권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한편 프러시아의 선거후(選擧侯) 프레드릭 윌리엄(Frederick William, 주후 1640-1688년)은 길드 제도를 없애고 새롭게 경제를 개혁할 필요성을 간파하고는, 그 방법 중 하나로서 유대인을 이용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규제를 풀고 그들에게 상권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주후 17세기 말엽 독일의 유대인들은 경제 재건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사무엘 오펜하이머 같은 사람은 주후 1670년 비엔나에서 추방당한 후 윌리엄에 의하여 기용되어 프러시아의 재무를 담당했던 유명한 유대인이다.   


주후 18세기의 모세 멘델스존 

 

주후 17-18세기 독일내 유대인 공동체의 학문 활동은 참으로 미약한 것이었다. 특별히 주후 18세기는 유럽 역사에 있어서 합리주의가 꽃을 핀 시대라고 할 수 있으나, 유대 민족은 정신사에 있어서 밑바닥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미신에 빠져 있었고, 학문의 열기도 식었고, 지도력도 빈약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의 계몽주의에 해당하는 '하스칼라' 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 모세 멘델스존(주후 1729-1786년)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주후 1729년 독일의 데사우(Dessau)에서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몸이 허약하게 되었다. 14세 때에 유대인들에게는 금지된 베를린으로 들어가 독일어권 문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주후 1754년 독일인으로서 뛰어난 비평가요 드라마 작가인 고트홀트 레싱(Gotthold Lessing)을 만난 것은 멘델스존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발전의 계기였다. 레싱은 멘델스존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을 긍정적으로 예찬한 독일인이었는데, 멘델스존을 만난 후 더욱 깊은 인상을 받고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레싱의 영향으로 멘델스존은 저술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후 1755년에 발표된 멘델스존의 미(美)철학에 관한 작품은 독일 미학 비평의 고전이 되었다. 베를린 학회가 후원한 형이상학 학술 경연대회에서 멘델스존은 영예의 일등 수상을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사(名士)가 되었다. 이 경연대회에는 그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도 참여하였다. 이 일 이후 몇 달이 지나서 멘델스존에게는 '슈츠유대'(Schutzjude)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든 제한 사항에서 해방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주후 1767년 멘델스존은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를 모델로 삼고 '패돈'(Phädon)을 저술하였다. 불멸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이 저작에서 멘델스존은 당시 유행하던 견유(犬儒)학파와 물질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이 책은 무수한 언어로 번역되고 판을 무수히 거듭하여 찍을 정도로 유럽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친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멘델스존은 '독일의 플라톤'이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멘델스존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칠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토라(모세 오경)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주후 1783년).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책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주후 1783년에 멘델스존은 "예루살렘"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도 출간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모든 민족의 양심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아울러 어느 종교도 진리를 독점한 것으로 자만할 수 없으며, 참 종교의 시금석은 종교가 그 신봉자의 행동에 미치는 선한 영향이라고 지적하였다. 

 

멘델스존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물리적 게토에 걸맞는 정신적 게토를 구축하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주변 문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문화 유산만을 고집한다. 유대인들은 이 정신적인 게토를 떠나서 넓은 세계의 일반 문화로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유대교의 고유 문화를 해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주장하에 멘델스존은 토라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토라의 히브리어 원문 옆에 히브리어 문자로 음역한 독일어 번역문을 나란히 두어 편찬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쉽게 독일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유대인들에게 일반 문화를 소개하고 가르치는데 힘썼다. 당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그가 유대교를 파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양심의 자유를 신봉하고 종교적 강요를 그릇된 것으로 간주했던 멘델스존은 비록 정통파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나, 뒤따라올 자유 시대를 위하여 유대인들을 준비시킨 개혁 사상가였다. 멘델스존은 동족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그들을 지성적이고 심미적인 삶으로 인도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서유럽 디아스포라 연대기>


주후 960-1028년. 게르숌

1040-1105년. 랍비 솔로몬 벤 이삭 (라쉬)

1073-1085년. 교황 그레고리 7세

1096년. 제1차 십자군 운동 시작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및 유대인 학살

1105-1170년. 요셉 킴히

1144년. 무슬림 군대의 에데사 점령, 제2차 십자군 운동

1160-1235년. 다비드 킴히

1189년. 제3차 십자군 운동, 영국에서의 유대인 학살

1198-1216년. 교황 이노센트 3세

1208-1215년. 알비주아 십자군

1215년. 제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

1290년. 영국의 유대인 추방

1306년. 프랑스의 유대인 추방

1315년. 프랑스의 유대인 귀환령

1320-1321년. 남부 프랑스에서의 소요, 프랑스 유대인 재추방

1336-1338년. 남서부 독일에서의 소요

1348-1349년. 흑사병

1359년. 프랑스 유대인 재귀환령

1394년 9월. 프랑스 유대인 재추방

1483-1546년.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1516년. 베니스 최초의 게토

1540년. 나폴리 왕국에서의 유대인 추방

1569년. 교황이 지배하는 모든 영토로부터 유대인 추방

1590-1640년. 우리엘 다코스타

1604-1657년. 므낫세 벤 이스라엘

1618-1648년. 30년 전쟁

1632-1677년. 바룩(베네딕트) 스피노자

1657년. 유대인의 영국 입국에 대한 크롬웰의 비공식적인 동의

1729-1786년. 모세 멘델스존  


이미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어서 그들은 가울(오늘날의 프랑스)과 스페인 등지로 흩어져 나가며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스탄디나비아 국가들을 제외하고 서유럽 국가들의 형성기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일익을 담당하였다. 농업에서 상업으로 상업에서 금융으로, 그들이 살았던 서유럽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유대인들은 신속히 변모하면서 경제 분야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유대인들은 동방의 지식을 유럽인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에도 큰 기여를 했으며, 의학, 수학, 천문학, 철학, 문학, 언어학 등 각 분야에도 동서양의 다리 역할을 하여 적지 않은 공헌을 남겼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의 이름 아래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특별히 십자군 운동은 서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악몽이었다. 자신에게 있는 경제적 능력과 기타 사소한 이용가치 말고는 환영받지 못하는 '나그네 민족', 이것이 바로 중세 유럽을 살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었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시녀로 전락할 때에, 그 지도층과 추종자, 그리고 그 변두리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군중은 자기들의 눈에 들지 않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도 박해하거나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핑계로 남을 미워하고 학대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결코 없다.  


제4장. 동유럽 디아스포라  


비잔틴 시대에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오늘날 발칸이라고 불리는 지역과 크림 반도에 형성되어 있었다. 주후 8세기 동로마 제국 황제들의 박해로 인하여 그들은 다뉴브강을 따라 더 멀리 북상하여 정착하였다. 

 

주후 600년경 오늘날의 튀르크족과 유사한 '카자르'라고 불리는 한 호전적인 민족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지역을 점령하고 카자르 왕국을 세웠다. 카자르족은 원주민인 슬라브 인구와 섞이게 되었다. 유대인과 무슬림과 기독교도 상인들이 이 왕국을 찾아오면서 문화적인 열매를 맺게 되었다. 주후 8세기 경 카자르 왕국의 왕과 백성은 상당히 문명화되어 종래의 이교 신앙을 버리고 그들의 남방 방문객들이 소개한 유일신 종교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비잔틴 왕국의 상인들은 기독교를, 페르시아 상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카자르 왕국의 왕가와 상당수의 귀족들은 유대교를 선택하고 개종을 실시하였다. 카자르 왕국은 주후 965-969년 키에브의 스비아토슬라브 공작의 침략을 받아 서서히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주후 1016년 러시아와 비잔틴 연합군에게 패하고, 다시 얼마를 유지하다가 결국 주후 1240년경에 타르타르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망하게 되었지만, 그들중 많은 수가 유대인으로 남아, 이미 러시아로 들어온 다른 유대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주후 13세기 중엽에 러시아의 초원은 타타르 유목민의 무리에 의하여 짓밟혔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라고 불리는 영토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 사는 많은 인구는 서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들중 많은 유대인들은 당시 새로운 국가로 조직되어 가고 있던 폴란드 영토에 정착하였다. 마침 서유럽에서 들어온 유대인들도 폴란드에서 함께 모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슬라브족의 땅에서 환영을 받았다.


주후 1264년 폴란드내 한 나라의 통치자인 볼레슬라브는 대(大)폴란드 영토 안에서 유대인의 완전한 자유와 특권을 보장하는 헌장을 공표하였다. 주후 1354년 폴란드의 카시미르 대왕은 볼레슬라브의 헌장을 재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몇 가지 규정을 더 추가하였다. 주후 1348년 유럽 전역에 돌았던 흑사병으로 인하여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을 무렵,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로 이민해 들어왔다. 

 

주후 14세기 말엽 리투아니아의 대공(大公) 자겔로(Jagello)가 폴란드의 왕위 계승자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두 나라는 통일되었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자겔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가톨릭교도로서, 가급적 사제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활동을 제한하는데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추방령(주후 1492년)에 영향을 입어서, 주후 1496년 폴란드 왕의 형제이자 상속자인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 결정을 내린 적이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하였다.


스페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강제 개종과 추방에 의하여 무너지고, 독일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칼과 공포에 의하여 쇠잔하였을 때, 폴란드를 중심한 동유럽은 유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사실 주후 1096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십자군 운동 이후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피난처는 동유럽이었다. 

 

주후 13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기까지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을 시작하여 계속 발전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성숙기를 맞이하였다. 게토에 의하여 외부와 분리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대교 생활방식에 의하여 스스로를 격리시켜 살았다. 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지도자와 법관과 관리들이 선임되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거두어 활용하는 등,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독립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이처럼 평화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16세기 폴란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샬롬 샤크나(주후 1500-1558년), 모세 이설레스(주후 1520-1572년), 솔로몬 루리아(주후 1510-1573년) 등 유명한 랍비들을 배출하였다. 

 

폴란드 유대인들의 교육과 학문 연구 열기는 때마침 도입된 인쇄술의 도움을 얻어, 수많은 책들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보급할 수 있는 충분 조건을 이루어 놓았다. 이제 개인들도 장서들을 모아 서재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지식의 파급 속도도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이 무렵 폴란드의 유대인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언어가 바로 이디쉬이다. 수많은 독일계 유대인들이 보헤미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으로 이주해와서 비교적 순수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의 유대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살았다.


이들 동유럽의 독일계 유대인들은 독일에서의 언어 변화를 따를 수 없었고, 또 그들이 가져온 독일어에 점차 히브리어와 슬라브어를 섞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마침내 주후 16세기를 즈음하여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언어가 바로 이디쉬인 것이다. 이디쉬는 특별히 토라와 탈무드 교육에서 제외된 유대인 여성들에게 문학 언어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주후 16, 17세기 동안에 동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비교적 연합체를 형성한 가운데, 자신들의 권익을 적절히 보호하고 문화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주후 1501-1648년 사이에 폴란드내 유대인 인구는 5만에서 50만으로 증가하였다. 특별히 시기스문드 1세(Sigismund I, 주후 1506-1548년) 통치의 자유로운 분위기 때 유대인들을 포함 모든 소수민족들은 통치자와 백성의 관대한 대우를 즐겼다. 주후 1551년 시기스문드 아우구스투스(Sigismund Augustus)는 유대인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헌장을 공표하였다. 이 헌장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최고 랍비와 법관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주후 16세기 폴란드의 영토는 폴란드 본래의 땅, 러시아쪽 폴란드 (루테니아), 리투아니아의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모든 지역내의 유대인들은 연합하여 하나의 공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주후 1623년 리투아니아의 유대인들은 별도의 공회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은 정부가 그들에게 세금을 별도로 부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폴란드의 유대인 공회는 네 지역으로 다시 조직되었다. 

 

평화롭게 살던 폴란드, 특별히 남동부 우크라이나 지방의 유대인 공동체는 주후 1648-1658년 사이 10년 동안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였다. 폴란드가 전체적으로 로마 가톨릭을 표방한 반면에 우크라이나 지방의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 가톨릭을 수용하였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을 러시아 사람으로 간주하고 폴란드인 지주들을 정복자로 생각하였다.


한편 대초원의 자유분방함을 만끽하고자 하는 이들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폴란드인들은 농노로 간주하였다.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반역의 소문이 있을 때마다 폴란드인들은 잔혹하게 처리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폴란드의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은 폴란드인 지주들에게서 넓은 농장을 빌리거나 또는 감독관으로 고용되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농사일을 관리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눈에 폴란드인 지주들과 한 통속으로 간주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 군대의 하사관 출신인 보그단 흐멜니츠키는 개인적으로 폴란드인 귀족으로부터 권리침해를 받은데 대하여 앙심을 품고 복수를 결심하였다. 그는 드니퍼 강을 건너 폴란드 통치 영역을 벗어났다.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에 속하는 호전적인 카자흐족과, 크리미아 반도를 다스린 타타르족을 결속시켜 마침내 폴란드 침공을 단행하였다. 이때가 바로 주후 1648년이었다. 때마침 폴란드 중앙 정부의 약화와 결속력의 부족으로 흐멜니츠키의 연합군은 남동부 폴란드를 휩쓸 수 있었다. 이때 무수한 유대인들이 폴란드인들과 더불어 살육된 일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방에서의 소요는 3년이 지나서야 평정되어 도망했던 유대인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 

 

흐멜니츠키가 다시 드니퍼 강을 건너 퇴각함으로써 폴란드의 곤란한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가 약해진 틈을 타서 이제는 러시아가 북동쪽으로부터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들어왔다. 이로써 빌나의 유대인 공동체가 잠시나마 흩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북쪽에서는 스웨덴인들이 쳐들어 왔는데, 그들은 비교적 신사답게 굴어서 심지어는 유대인들을 폴란드인중 불량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전후에 스웨덴인들과 내통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이상의 전쟁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폴란드는 더욱 쇠약해졌고, 폴란드내 유대인 공동체는 적어도 10만 명이 넘는 중요한 인명을 잃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중 대부분은 이미 가난하고 힘없는 무리로 변해 있었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재정비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예전같이 역동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무기력한 공동체였다. 때는 바야흐르 카발라와 같은 신비주의에 쉽게 빠지고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이 고조될 만한 분위기로 무르익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중 카발라 신봉자들은 주후 1648년이 메시야의 해라고 믿고 있었다.


한편 일부 기독교인들은 주후 1666년이 메시야가 재림하는 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난무하는 유럽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메시야 대망 사상은 유대인 기독교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팽배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메시야임을 자처하고 등장한 유대인이 바로 샤베타이 쯔비(주후 1626-1676년)였다. 그에 대하여는 뒤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하시딤과 전통적 랍비 유대교


주후 17-18세기 폴란드의 정치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유대인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마기드'라고 불리고, 다른 하나는 '바알 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공인된 설교자인 마기드는 도덕과 윤리에 관한 유대교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중 많은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설교는 지식보다는 감정과 신비주의에 호소하는 경향이었다.


바알 궑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한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귀신과 떠도는 혼령들의 생태와 습관 등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부적을 나눠주고, 주술적 기도를 드리며, 안수하여 병을 고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미래를 예언하는 일도 시도하였다. 주후 18세기 중엽 동유럽 디아스포라에서는 두 사람의 종교 지도자가 등장하였다. 하나는 리투아니아에 있는 빌나 출신의 엘리야요,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벤 엘리에셀(주후 1700-1760년)은 주후 1700년 포돌리아 지방의 오코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고아가 되어 유대인 공동체의 감독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자라면서 학문 탐구보다는 조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스라엘은 수시로 산으로 피하여 자연과 벗삼아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첫 번 째 아내를 사별한 이스라엘은 한나라고 하는 처녀와 결혼하였으나, 처남의 홀대(忽待)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카르파티아 산지로 들어갔다. 그는 산골짜기에서 석회를 팠고, 그의 아내는 인근 마을 시장에 그것을 내다 팔면서 이들은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스라엘은 깊은 자연 속에서 기도에 힘썼으며, 각종 식물을 통한 치료의 비방도 익힐 수 있었다. 이처럼 몇 년을 지낸 뒤 그는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의 아내는 조그만 여관을 열었고 이스라엘 자신은 유대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는 중 그는 서서히 '바알 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대략 36세 때부터 이웃 유대인들의 감정적 필요를 위하여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부적, 축복, 충고, 예언의 말 등을 얻고자 찾아왔다. 그의 명성이 점점 퍼져 나가면서 그는 '바알 궑 토브'(좋은 이름의 권위자)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말재주가 있었고 상상력도 뛰어났던 그는 일상생활에서 단순한 실례들을 들어 자기의 사상을 전개하는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과 희망을 강조하였으며,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를 위하여 많은 학식이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는 단순한 기도로써 충분하다고 그는 가르쳤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편재성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사람의 마음과 사물 속에, 모든 관계 속에, 그리고 선과 악 속에도 편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제 삶과 무관한 토론이나 연구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진실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아름다움과 그 위로하심을 구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자연히 기쁨과 낙관론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괴롭히고 슬퍼하는 것은 신성(神聖)에 다가가는 길이 아니요, 오직 기쁨과 밝은 마음만이 기도를 더욱 쉽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은 이생의 일들이 그들을 짓누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안내자를 필요로 한다. 각 세대마다 영적 지도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의인들(짜디킴)은 안내자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바알 궑 토브(주후 1700-1760년)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찾는 삶, 기도의 효력, 기쁜 삶과 영적 지도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가르침은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여 퍼져 나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높이 추앙했으며, 그의 가르침과 그가 행한 이적들을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 그의 제자중 하나인 랍비 야콥 요셉은 그의 행적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 출판하였다.


랍비 베르는 마기드 출신으로서 바알 궑 토브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야콥 요셉이 주로 바알 궑 토브와 관련된 이적과 그의 경건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퍼뜨린 반면, 마기드 베르(단순히 '그 마기드'라고도 불림)는 바알 궑 토브의 종교적 교훈들을 전승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바알 궑 토브보다 훨씬 학문이 많았던 마기드 베르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스승의 종교적인 교훈들을 자신의 폭넓은 학문을 이용, 보다 확고한 근거 위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 그의 활동 덕분에 바알 궑 토브의 사상을 따르는 많은 차세대 지도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바알 궑 토브와 마기드 베르의 특징은 '짜디킴'(의인들)이라고 하는 개인적 지도력을 옹호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랍비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중재자도 허용하지 않는다. 랍비는 하나의 스승 내지 본보기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특별한 도구로 간주되지 않는다. 마기드 베르의 제자들과 바알 궑 토브의 후손들은 동유럽 여러 유대인 공동체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아 서서히 랍비들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짜딕('짜디킴'의 단수형)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간주되었다. 짜디킴 직책이 제도화되면서 점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심지어 짜딕은 아들이나 또는 가족내의 다른 구성원에게 자신의 능력을 전수해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 직책이 세습되는 일이 많았다. 

 

바알 궑 토브의 가르침은 특별히 무지하고 가난한 서민층에게 쉽게 확산되었다. 짜디킴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시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올바르게 해석한다고 믿었다. 짜디킴 따르기를 거절하고, 기도보다는 연구를 그리고 감정보다는 지성에 더 치중하는 사람들은 경건심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시딤 중 일부는 자신의 무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시딤 운동이 퍼져가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은 하시딤과 이를 반대하는 미트나그딤(반대파)의 두 부류로 나뉘었다. 폴란드 남부에서는 하시딤 운동이 급속하게 퍼졌고, 북부에서는 지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전통적 랍비 유대교가 훨씬 우세였다. 

 

주후 18세기 하시딤 운동을 반대한 미트나그딤의 선두 주자는 빌나의 가온 엘리야(주후 1720-1796년)였다. 그는 주후 1720년 리투아니아 빌나의 한 이름 있는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6세에 성경 공부를 마치고 탈무드도 익혔으며, 13세에는 이미 대부분의 랍비 문헌과 신비주의 문헌을 섭렵하였다. 자라서 엘리야는 모든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작은 급료의 일에 만족하면서 계속하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엘리야의 한거(閑居)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동유럽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온'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지성과 경건심에 있어서 탁월함을 인정받은 엘리야는 당시 유대인 사회의 문제점들을 보는 시각에서는 하시딤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나, 그에 대하여 바알 궑 토브가 제시한 치료책이 무가치하다고 보았다. 하시딤이 중시한 믿음, 소망, 예배의 기쁨은 탈무드 연구와 유대교를 준수하는 삶을 통하여 얻어지는 부산물일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서 엘리야는 하시딤을 이단시하였다.


폴란드 남부에서 출발한 하시딤은 랍비 유대교의 아성인 리투아니아까지 스며들었다. 하시딤은 민스크와 심지어는 빌나에서도 비밀 회당을 조직하여 그들의 예배 의식을 준행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자 빌나의 하시딤 지도자들은 공개적인 참회를 강요당하였고, 그들의 책은 불에 태워져야 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주후 1772년 봄 빌나의 랍비들은 모임을 갖고 하시딤을 추방키로 결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딤의 비밀 모임은 끊이지 않았다. 한편 남부 폴란드에서는 미트나그딤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주후 1796년 가온 엘리야가 병들어 죽을 무렵 많은 유대인들이 슬퍼할 때, 빌나의 하시딤은 경축행사를 가졌다. 이 일로 몹시 분개한 미트나그딤은 가온 엘리야의 무덤 앞에서 하시딤을 완전히 소탕하기까지 쉬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에 보다 훨씬 더 엄중한 추방령을 결의하였다.  


하바딤의 유래


하시딤과 미트나그딤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자 하시딤중 몇몇은 이러한 국면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바알 궑 토브의 일반 원칙을 따르면서 동시에 하시딤을 전통적 유대교의 방향으로 근접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마기드 베르의 제자중 슈노이르 짤만(Shneur Zalman, 주후 1745-1813년)은 마기드의 문하에 들어오기 전에 완벽한 랍비 유대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슈노이르 짤만은 폭넓은 탈무드 지식과 아울러 신비주의 문헌에도 정통한 학자로서 양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이 둘의 조화를 꾀하였다.

슈노이르 짤만은 하시딤의 입장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기쁨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런 기쁨은 토라 연구에 헌신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미트나그딤의 주장처럼, 종교지도자는 유대교 법의 전문가요 랍비 문학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동시에 종교지도자는 무지한 일반 대중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오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도의 길을 택한 슈노이르 짤만은 하시딤 사상의 근간을 지혜(호크마), 명철(비나), 지식(데아) 이 세 가지로 수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모든 하시딤이 그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슈노이르 짤만의 주장에 따르는 하시딤을 가리켜 이 세 가지의 첫 글자들을 따라 '하바드'(복수형은 '하바딤')라고 한다. 이들 하바딤은 하시딤중 지성적인 파로 간주된다. 

 

하바딤의 등장으로 하시딤과 미트나그딤의 분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주후 19세기 초 하시딤과 미트나그딤은 공동의 적인 '하스칼라'(유대인의 계몽주의) 운동을 새로이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왕국의 와해로 인하여 하시딤과 미트나그딤의 분규는 저절로 끝이 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시딤이 강세를 보였던 남부 폴란드 지방은 오스트리아로, 그리고 미트나그딤이 우세했던 폴란드 북부의 리투아니아 지방은 러시아로 각각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주후 18세기 중엽 전 세계 유대인 인구는 대략 300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들중 대부분은 동유럽에 편중되어 살고 있었다. 폴란드에는 주후 18세기말까지 자그마치 15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폴란드가 붕괴되면서 이들은 러시아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주후 1772년, 1793년, 1795년 3차에 걸쳐 있었던 폴란드의 분할로 러시아는 90만 명의 유대인을 수용하는 중요한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동유럽 디아스포라 연대기>


주후 8세기. 카자르 왕국 유대교로 개종

1264년. 폴란드 유대인의 완전한 자유와 특권을 보장하는 헌장 공표

1506-1548년. 시기스문드 1세(Sigismund I).

1648-1658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의 소요 (흐멜니츠키)

러시아의 리투아니아 침공, 스웨덴의 북부 폴란드 침입

1700-1760년. 바알 궑 토브

1720-1796년. 빌나의 가온 엘리야

1745-1813년. 하바딤 운동의 창설자 슈노이르 짤만
 

유대인들이 서유럽에서 기독교 문화권의 제후들과 백성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을 때, 이제는 동유럽이 그 문을 활짝 열고 유대인들을 위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주후 16세기에 이르러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는 그 성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마치 나라 속의 나라, 민족 속의 민족, 정부 속의 정부처럼 독자적인 조직체를 구성하여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유지해 나갔다. 이런 환경 가운데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이디쉬가 유대인들 가운데 자리잡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디쉬는 독일 계통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 사이에 확실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주후 17세기 후반기부터 서서히 어려움을 겪게 된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주후 18세기에 이르러 경건주의 운동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시대 환경이 동유럽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감정적이고 약간은 신비주의적인 경건주의를 도입하게 한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할 것 없이 종교인이라면 일반적으로 외부적으로 곤란한 환경에 부딪칠 때 이성에 의존한 철학적인 접근 방법보다는 감정과 신비주의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스페인 디아스포라에서도 살펴보았다. 

 

유대인의 하시딤 운동은 유대교 역사상 작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랍비 유대교는 자성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하시딤 운동의 추종자들 중에서도 일부는 타협점을 모색 결국은 하바딤 운동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종교가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고안해낸 방법에 의존할 경우 그 방법이 아무리 좋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義)에는 이를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로 세움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거나 중심이 되지 않은 신학이나 경건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제5장. 아메리카 대륙 디아스포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생애는, 어떤 면에서 볼 때, 비밀에 싸여 있다. 그가 조상을 숨기고 자기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상한 표시를 사용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혹시 그가 마라노의 후예가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콜럼버스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르든 흐르지 않든 간에, 그의 탐험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데는 유대인들의 도움이 컸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마라노들에게 최상의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남아메리카의 유대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적잖은 마라노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였다. 포르투갈의 마노엘 왕과 조약을 맺은 마라노 페르디난도 데로론하는 주후 1502년 종교재판을 피해 탈출하고자 하는 마라노들을 다섯 척의 배에 싣고 브라질 탐험을 시작하였다. 이때 몇 명의 기독교인들도 동행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있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이 신대륙의 이름이 붙여진다. 주후 1503년 데로론하의 마라노 무리는 브라질 땅에 첫 요새를 건설하였다. 초창기 신대륙에서의 유대인 정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령의 남아메리카, 멕시코, 서인도 제도에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마라노들만이 올 수 있었다. 유대교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스페인 식민지에서, 그리고 주후 1508년 이후에는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마수는 신대륙으로까지 뻗쳐와서 희망에 부푼 마라노들에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후 1520년에는 멕시코에서 한 스페인 군인이 비밀리에 유대교 의식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주후 1593년에는 북부 멕시코의 총독인 루이스 데 카라바쟐의 가족이 유대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죽임을 당하였다. 주후 1639년에는 페루에서 63명의 마라노들이 선고를 받고 그중 10여명이 화형 당하였다. 이들 10명 중에는 마누엘 페레스라고 하는 거부도 있었는데, 그가 죽자 그의 엄청난 재산이 국고로 돌아가게 되었다.


브라질 해안의 레시페(Recife)라는 곳에는 상당수의 마라노들이 살았었다. 주후 1620년부터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이 있었는데, 이 식민지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점령당하였다 (주후 1631년). 이에 레시페의 마라노들은 당장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곳에 유대인 공동체를 설립하고 암스테르담으로부터 랍비도 초청하였다. 레시페의 유대인 공동체는 수천 명으로 증가하였고, 레시페의 소문은 구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시페에 대한 네덜란드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주후 1654년 1월에 레시페는 포르투갈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레시페의 유대인 공동체는 와해되고 유대인들은 신대륙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과 많은 고충에도 불구하고 남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에서 일부 유대인들은 대형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마데이라 섬에서 브라질로 사탕수수를 처음으로 옮겨 심은 것은 아마도 포르투갈의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주후 1654년 이후 유대인들은 바르바도스, 자메이카, 마르티니케, 산토 도밍고 등지로 흩어져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였다.  


북아메리카의 유대인


브라질에서 박해를 피하여 나온 유대인들중 일부는 북아메리카로 향하였다. 주후 1654년 뉴네덜란드라고 불리는 식민지의 뉴암스테르담 항구에 페르남부코(=레시페)를 도망 나온 23명의 유대인이 도착하였다. 뉴암스테르담의 총독은 이들의 상륙을 허용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몇몇 유력한 유대인 주주를 가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 때문에 총독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입경을 허락하여야 했다. 이들 가련한 유대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은 자기 식민지 안에 그들을 정착시킬 마음은 없었다. 그는 단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 때문에 미지근한 태도로 그들에게 일시적 수용소를 제공하는 정도로 일을 끝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 23명의 유대인들중 아셀 레비라는 청년은 불굴의 투쟁정신을 발휘하여, 마침내 군복무, 상업 활동, 부동산 소유, 심지어는 식민지 공동체내 한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뉴암스테르담에 도착한지 10년 안에 레비는 그곳에서 영향력 있고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레비와 같이 된 것은 아니었다. 뉴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보장받아 누리기 시작한 동안, 영국이 이 식민지를 점령하였다 (주후 1664년). 영국은 뉴암스테르담을 뉴욕으로 바꿨다. 유대인들의 지위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주후 1727년까지 유대인들은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로 뉴욕은 대서양 연안의 다른 식민지들과 더불어 자유로운 땅을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이상들이 발흥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시대에 유대인의 역사는 공동체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동체 단위로 유럽에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개별적 또는 가족 단위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은 광대한 북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새로운 사회조직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들에서는 극소수의 유대인들이 비록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으나,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정착 생활을 다져갔다. 주후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마저도 신대륙에 와서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두꺼운 벽을 쌓았다. 그리하여 이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구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북아메리카의 유대인 공동체는 조직이나 계획 없이 산발적으로 더디게 형성되었다. 주후 1621년에는 버지니아에, 1649년에는 메사츄세츠에, 1658년에는 메릴랜드에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로져 윌리엄스(Roger Williams)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메사츄세츠를 떠나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에 새 식민지를 건설하였을 때, 그는 모든 종류의 사람을 위한 관용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어느 정도 구분이 되었다. 주후 1684년에 제정된 법은 유대인들에게 온전한 시민권은 아니지만 '나그네'로서의 정착은 허용하였다. 어쨌든 로드아일랜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관용적인 식민지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로드아일랜드의 중심 도시인 뉴포트(Newport)와 프로비던스(Providence)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미국의 독립전쟁 때까지 북아메리카 전체에는 대략 2500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식민지 시대 초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스페인 계통의 스파라딤이었다. 그러나 주후 17-18세기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에게 뉴욕뿐 아니라 북아메리카 동부해안 전역이 매력을 끌었다. 용감한 유대인들은 주로 비교적 자유로운 네덜란드나 영국을 통하여 아메리카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들중 대부분은 사회적 및 정치적 박해를 피하여 신대륙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직업선택이 비교적 자유롭고 선택의 폭도 넓었다. 따라서 북아메리카의 유대인들은 다방면의 직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시대에 북아메리카의 대학들에서는 히브리어를 중시하였다. 예일과 하버드에서는 히브리어 과목이 필수였다. 식민지 시대에는 유대인에 대한 종교 및 정치적 자유의 제한이 있었으나, 독립 이후에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주후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모든 사람의 인권과 존엄성이 동일함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오랜 세월동안 지구 곳곳에서 박해를 받아오던 민족이 마침내 처음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 먼 옛날 유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후손들은 처음에 걱정하던 바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지나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정작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고국에서보다 훨씬 더 편안한 삶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후 15세기 말엽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유대인의 운명 역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페인을 비롯 유럽 각처에서 박해받으며 음지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것이다. 특별히 후에 미국으로 발전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구대륙에서 학대받던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바벨론'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전처럼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요, 자의적으로 신대륙을 택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디아스포라 시대의 마지막 무렵에 이들의 후손인 유대인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는 피난처를 준비하신 것이다. 


제6장. 아프리카와 아시아 디아스포라  


바벨론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관하여는 이미 기술하였고, 이집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관하여도 필요에 따라 조금씩 언급한 바 있다. 이 장에서는 바벨론을 제외한 아시아 나라들과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들에 분산된 유대인 공동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지역에 따라 그 연대는 천차만별임을 먼저 밝혀둔다.    


이집트의 유대인


이집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래 최초로 형성된 디아스포라이다. 요셉이 형제들에 의하여 팔려갔고, 다음에 요셉을 통하여 그의 부친과 형제들이 전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에 내려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 제26왕조의 삼틱(Psamtik) 1세(주전 671-617년)는 외국인 용병들을 많이 고용하여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바로 이때, 또는 제26왕조의 다른 왕 때에 용병으로 이집트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나일강 안의 한 섬에 위치한, 엘레판틴이라고 불리는 성읍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이 남긴 기록(파피루스에 적힌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견됨)에 의하면, 이들 유대인들은 주전 7세기 후반기 또는 주전 6세기초에 이곳 엘레판틴에 성전을 세웠던 것 같다. 주전 6세기 초엽 남왕국 유다가 망하였을 때 많은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일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더불어 이집트행을 택하였다.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제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어 프톨레미 왕조가 들어선 이후 이집트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매력적인 거주지로 비쳤다. 이집트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상인, 농부, 용병, 관리 등으로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지중해변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프톨레미 왕조의 관용 정책에 힘입어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주전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모세의 토라(율법)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대사업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로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도 모두 헬라어로 번역되어 칠십인역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집트를 비롯 이방 세계 가운데 유대인의 존재와 그들이 이루어낸 칠십인역 성경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심지어는 많은 이방 사람들의 마음을 복음을 위하여 준비시켜준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동방 세계 정복 이후 헬레니즘은 오랫동안 유대인에게 심각하고도 때로는 위협적인 영향력을 행세하였다. 이 영향력의 여파로 말미암아 정치권의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유대인 사이에는 점차 견해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포용력이 강한 이 헬레니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위협적인 '침입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정치, 종교,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 새로운 침략자와 싸워야 했다. 

 

이집트,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든 면에서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발전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헬레니즘에 맞선 투쟁은 더욱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헬라어 칠십인역의 완성은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생겨난 하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 또는 사상을 외부 헬라 세계에 소개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자기들만의 용어가 아닌 헬레니즘의 용어로서 좀더 조심스럽게 변증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등장한 유대인 사상가가 바로 필로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상가 필로의 출생과 사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주전 20년경에 출생하고, 주후 5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자신 헬라 디아스포라 세계에 사는 유대인으로서, 필로는 헬레니즘을 통하여 헬라 세계에 유대인의 사상을 변호하고 더 나아가서는 전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주후 1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번성하였다. 주후 1세기에 이집트에는 대략 10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시 전체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인구 분포도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인구 사이의 충돌을 얼마든지 예고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주후 37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주후 37-41년)로부터 팔레스타인 북북 지역의 왕으로 임명을 받은 아그립바는 자기가 받은 왕국을 취하러 로마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에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존경의 표시로 그의 임명을 경축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축하 행사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국민 왕을 갖지 못한 알렉산드리아의 이방인 폭도들은 이를 조롱거리로 이용하였다. 유대인들의 경축 행사가 끝난 다음날 폭도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그 도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바보에게 유대인 왕처럼 옷을 입혀 절을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유대인들과 아그립바 왕을 우롱하였다. 

 

이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대인 감정을 부추긴 최대의 선동가는 아피온(Apion)이라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도들은 황제의 친구인 아그립바를 우롱한 일로 인해 황제의 진노를 살까봐 두려워서, 위선적으로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의 로마 총독 아빌리우스 플라쿠스(Avilius Flaccus)에게 가서 요구하기를, 유대인 회당에 칼리굴라 황제상을 두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충성스런 로마인임을 보이게 해달라고 하였다.


플라쿠스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종교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익히 알면서도, 정치적인 두려움과 야망 때문에 폭도의 요구에 응하는 편을 택하였다. 플라쿠스가 폭도가 요구한 바대로 명령을 내리자, 유대인들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플라쿠스는 유대인을 외국인이라 하면서 유대인 최고 공회원 몇 명을 공공연히 채찍질하였다. 이에 의기양양해진 폭도들은 유대인 구역밖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을 400명이나 약탈하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호소하기로 결정,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이교도들 역시 아피온(Apion)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칼리굴라 황제는 아피온의 아첨에 놀아나 필로의 말에 경청하지 않았다. 

 

주후 66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공민권 문제로 유대인과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로마 총독은 양편 가운데서 심판 행세를 하여야 했으나, 그 처리 결과가 어느 편에서 보더라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로마 사이의 긴장 관계가 알렉산드리아까지 영향을 미쳐서, 이곳의 유대인들은 언제든지 헬라인들과 부딪칠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팔레스타인을 도망쳐 나온 몇몇 유대인들이 이집트와 키레나이카(Cyrenaica)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한 항쟁을 시도하였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층과 부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제1차 봉기 실패 후 1-2년 지나서 이집트에서 잠깐 미미한 항쟁이 있었으나 바로 진압되었을 뿐이었다. 그 벌로서 헬리오폴리스에 서 있던 유대인들의 오니아스 성전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제1차 봉기 실패 이후 이집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이스라엘 땅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유대인들을 위하여 수확한 농작물중의 일부를 보내기도 하였는가 하면, 야브네의 학자들은 이집트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정당한 공민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후 115-117년의 봉기는 로마 점령지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이집트 유대인들의 대량 학살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트라얀의 후임자인 '하드리안 황제의 명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60만 명 씩 두 번씩이나 살육하여, 그 피가 키프로스 해안까지 흘렀다'고 한다.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때부터 결정적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주후 3세기 말엽까지도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로마, 곧 비잔틴 제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미미하게나마 증가하기 시작하여 아랍이 근동 세계를 정복하는 주후 7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가 비록 예전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다시 상당히 큰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주후 640년의 일이다.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서서히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주후 1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사아디아 벤 요셉(주후 882-942년)은 이집트 파윰에서 생장한 사람이다. 그의 활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서 카라임 세력이 맹위를 떨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렵 바벨론과 이집트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사아디아 본인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거쳐 바벨론으로 이주해 온 후 수라의 가온으로 임명되었다 (주후 928년). 

 

주후 969년 파티미드 왕조가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로 이집트는 강력하고 광대한 시아파 무슬림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파티미드 왕조는 주후 10세기 말엽에 이르러 이집트를 비롯 북아프리카 거의 전체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통치영역을 확장하였다. 이집트에서 파티미드 왕조는 주후 1171년까지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은 집권자들의 관용 정책에 힘입어 경제와 문화 등 제방면에서 번영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파티미드 왕조가 몰락하면서 다시 정통파 이슬람이 이집트의 종교가 되었다. 살라딘과 그의 후계자들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부활시키긴 하였으나, 그것을 문자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 활동한 대표적인 유대인은 스페인 출생의 모세 벤 마이몬, 곧 마이모니데스(주후 1135-1204년)이다. 그는 파티마드 왕조 말기에 이집트의 수도 포스타트(지금의 카이로)로 이주해와 거기서 남은 평생을 보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마이모니데스는 주후 1185년 왕궁과 살라딘 왕가의 주치의로 임명되었다.


마믈룩의 이집트 통치는 주후 13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마믈룩 시대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주후 1517년 오토만 터키의 이집트 정복과 더불어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활동에 있어서 충분한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재무, 세금 수거, 세관 등의 행정직에 있어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되어 터키 제국내로 이민 온 유대인들은 이집트내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주후 17-18세기에 들어와 터키 정부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특별히 상류 계층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일반 유대인들도 그 영향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북아프리카 다른 지역의 유대인


이집트 외에 북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에도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트리폴리에 해당하는 키레나이카(Cyrenaica)에도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살았는데, 이들은 주전 3세기부터 이곳으로 이주하여 온 듯하다. 주전 2세기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자 일부 유대인들이 도망 나와 키레나이카에 정착하였는데, 그 중에 야손이라는 사람은 마카비 전쟁에 관한 책을 썼다. 주후 1세기에 지중해 연안 도시인 키레나이카에는 10만 가량의 유대인이 살았었다.


트라얀(주후 98-117년) 통치 때인 주후 115-117년 사이에 디아스포라 곳곳에서 유대인들의 대로마 항쟁이 번졌다. 이집트, 키프로스, 키레나이카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항거하여 전쟁을 벌였다. 트라얀은 팔레스타인, 이집트, 키레나이카에서의 유대인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키프로스 섬에서는 수천에 이르는 유대인 인구 전체가 살육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섬에 발을 들여놓는 일 조차도 금지되었다. '심지어는 폭풍우 때문에 이 섬에 피신한 유대인일지라도 죽음에 처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키레나이카와 리비아의 유대인 공동체도 크게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로마군의 손아귀를 피하여 보다 서쪽에 위치한 마우레타니아 지역(오늘날의 튀니지아, 알제리아, 모로코에 해당)이나 남쪽의 사하라 사막으로 도망하여야 했다. 

 

주후 430년 가울과 스페인 지방을 전전하던 반달족이 마침내 북부 아프리카에 왕국을 세웠다. 이들의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주후 6세기에 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로마 제국을 위하여 북부 아프리카를 점령하려 했을 때, 일부 유대인이 남쪽의 사하라 사막으로 도망치는 결과를 초래한 일 말고는, 북부 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주후 5-6세기에 걸쳐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 가운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성숙하여, 주후 7세기 후반부 무슬림 군대가 이집트를 넘어 서쪽으로 진격해 들어올 때에, 디아 카헤나와 같은 유대인 여장군이 베르베르 사람과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힘을 규합하여 잠시나마 무슬림 군대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 시대에 북부 아프리카의 카이라완(고대의 카르타고가 위치했던 도시)에도 활발한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지중해 연안 북부 아프리카 최서단에 위치한 페스에도 이슬람 정복 시기 이전부터 이미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페스는 스페인으로 가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스페인의 운명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들락날락한 곳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주후 11세기까지 이슬람 통치하에 비교적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주후 1056년부터 대략 2세기 동안 박해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 북아프리카의 많은 유대인 중심지가 파괴되었다. 주후 13세기 말엽 북아프리카에 다시 평화가 정착되었으나, 유대인들의 신세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정해진 구역 안에 갇혀 살아야만 했고, 이슬람의 반유대적 규제 사항들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후 1391-1492년 사이 스페인의 유대인들중 강요된 개종을 피하여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먼저 정착한 유대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정착한 유대인들의 낮은 문화 수준을 보고는 그들을 멸시하였다. 스페인계 유대인, 곧 스파라딤은 오늘날까지 북아프리카 유대교의 종교적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통치자의 정책에 따라 운명이 바뀌었다. 근세기에 이르러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주후 19세기 유럽 제국들의 식민정책을 환영하였다. 주후 1870년 이후 프랑스령 알제리, 튀니지아, 모로코 일부 지역의 유대인들은 프랑스 시민으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35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였다. 그들중 많은 이들은 주후 19세기 유럽 열강의 식민주의 정착 때 그들의 깃발 아래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물론 대다수는 옛날부터 들어와 정착한 유대인들이었다.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유대인


주후 875년경 북부 아프리카에 엘닷이라고 불리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랍어와 뒤섞인 특이한 히브리어를 구사한 엘닷은 단 지파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지파 사람들이 과거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 (주전 723년) 도망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 사람들도 같은 곳에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특별히 그곳에서 험한 강을 지나 일 주일이나 걸리는 '삼바티온'이라고 불리는 지역에는 모세의 후손이 살았으며, 그들이 전수한 법들이 팔레스타인과 바벨론에서 발전된 법들과 다소 다르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전해 주었다. 후기 학자들은 이들이 아마도 오늘날 팔라샤스(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 일대의 흑인 유대인)의 조상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팔라샤스(Falashas) 최초의 조상은 아마도 이집트 남부의 국경 수비대 구성원이었던 유대인들일 것이다. 아비시니아에는 주후 115-117년 디아스포라 봉기 이후에 다른 유대인들도 이주해 들어왔다. 이들 유대인들은 원주민과 혼인하여 검은 색 피부로 바뀌게 되었다. 아비시니아에서는 유대교가 급속히 파급되어 주후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비시니아인 가운데 유대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 이후 기독교가 강세를 보였는데, 집권자들은 유대인들을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팔라샤스라고 불렀다.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인


유대인들이 언제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나,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에 최초의 유대인 이민이 들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 이후라면 아마도 하스모니아 시대에 유대인 인구의 증가로 말미암아 소수의 유대인이 자발적으로 이주해 왔든지, 아니면 나바테아 왕국의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유대인 포로를 잡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주후 70년을 전후한 1차 봉기의 실패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후 5세기 중엽에는 이미 아라비아 반도에서 상당수의 유대인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반도의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예멘 왕국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주후 6세기 초기에 두누와스라고 하는 예멘 왕은 유대교로 개종하고, 이름마저도 요셉으로 바꾸었다. 그는 스스로 유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동로마(비잔틴) 황제들이 유대인을 박해하는데 대하여 분노를 금치 못하고 복수를 다짐하였다. 예멘의 정서쪽에는 홍해 건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비시니아 왕국(오늘날의 에티오피아)이 위치하고 있었다. 비잔틴 황제는 아비시니아 왕을 자극하여 예멘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결국 예멘은 패배하였고, 요셉 왕은 해안의 절벽으로 말을 몰고 가서 바다로 뛰어 내림으로써 자살하고 말았다 (주후 525년). 예멘의 유대인들은 북쪽의 다른 아랍 부족들 가운데 피난처를 찾아 이주하였다. 

 

예멘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3만 가량의 유대인이 수세기 동안 생존해 내려왔다.  


페르시아의 유대인


유대인과 페르시아의 관계는 주전 6세기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명한 코레쉬(=고레스)의 칙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남았던 유대인들중 일부는 보다 동쪽으로 옮겨가 페르시아 땅의 몇몇 지역에 정착하였던 듯하다. 유대인에 대한 페르시아 왕들의 관용정책으로 인하여 다니엘, 에스더, 모르드개,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사산 왕조의 통치 시대(주후 226-642년)에 페르시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꽤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원하여 이주해 들어온 유대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일부는 페르시아 인근 지역으로부터 강제로 이주되기도 하였다. 이슬람의 칼리프들이 페르시아를 통치하는 시기(주후 642-1258년)에 페르시아의 유대인들 역시 다른 이슬람 지역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마르의 협약에 의하여 '2등시민'으로 전락하였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분파주의의 온상이 되어, 아부이사와 같은 자칭 메시야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페르시아의 수도 이스판을 중심으로 활동한 아부이사는 자신이 메시야의 다섯 선구자중 가장 마지막 사람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탈무드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의 명백한 원칙들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페르시아내 일만 명이 넘는 가난한 유대인들이 칼리프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고 그를 따랐다. 그러나 결국 아부이사는 전투에서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주후 755년). 아부이사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 유드간이 이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역시 죽임 당하고 말았다. 

 

몽골족이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시기(주후 1258-1336년)에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제도는 폐지되었다. 몽골인들은 심지어 유대인들을 관리로도 임용하였다. 그러나 사파위드 왕조의 통치기(주후 1502-1736년)에 시아파 무슬림의 득세로 인하여 페르시아내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포함 모든 비이슬람교도는 '의식적으로 부정(不淨)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에 대한 박해 정책을 폈다.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표식물 부착 등, 분리 정책이 부활하였으며, 시아파로 개종한 자만이 유대인 친척의 재산을 상속하도록 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개종을 부추겼다.


사파위드 왕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카자르 왕조(주후 1794-1925년) 통치 때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박해의 대상이었다. 이 무렵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강제로 개종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후 1839년 메셰드(Meshed) 시의 전 유대인 공동체가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된 일은 특기할 만하다.  


터키의 유대인


주후 14세기에 시작된 오토만 왕조는 터키를 장악하고, 주후 1389년까지는 사실상 발칸 반도 전체를 정복하고 그 국경을 다뉴브강까지 확장시켰다. 오토만 터키는 주후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터키인들이 유대인들을 환영하자, 주후 15세기 말엽에서 16세기 사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중 많은 사람들이 터키 제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주후 16세기에는 마라노들도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플 등의 도시들에는 제법 커다란 유대인 공동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만 자그마치 3만 이상의 유대인이 정착하였고, 살로니카는 유대인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터키의 유대인들은 주인 민족의 영향을 받아 비록 학문 분야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으나, 일부가 고급 관료로서 국가 행정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스페인을 비롯 유럽 각국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은 터키 안에서는 유럽 상황을 경험하고 유럽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유일한 구성원이었다. 이런 이점으로 인하여 몇몇 유대인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후 16세기의 요셉 나씨(주후 1524-1579년)는 포르투갈의 부유한 마라노 가문 출신으로서 모험 끝에 터키로 도망 와서는 가톨릭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복귀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술탄의 신임을 얻어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터키 제국 안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요셉 나씨는 폴란드 왕 선출, 네덜란드의 대(對) 스페인 투쟁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요셉 나씨는 '낙소스의 공작'이라는 신분을 얻어 왕족이 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였다. 한편 그는 자민족을 위하여 헌신적인 사람이기도 하였다. 히브리어 저술들의 간행을 위하여 개인 인쇄소를 소유하였는가 하면, 해외에 있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고자 가능한 모든 외교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술탄과의 관계를 이용, 티베리아 지역에 유대인들을 위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요셉은 죽기 몇 해 전에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인도와 중국의 유대인


페르시아에 가까이 위치한 인도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살았던 유대인 상인들이 쉽게 이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이슬람권인 페르시아에서의 생활 환경이 악화되면서 인도에 친숙했던 유대인 상인들이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더욱 북상하여 중국으로까지 이주하였다.

 

인도의 유대인 공동체로서는 인도 최남단의 코친(Cochin)에 형성된 공동체와 중서부 해안의 봄베이 일대에 형성된 공동체를 들 수 있다. 주후 5-8세기 아모라임과 가온 시대 때때로 발생했던 박해 때 일부 유대인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를 떠나 인도의 코친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주후 16세기에는 유럽인들이 인도에 출몰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과 마라노 추방자들이 수천명 인도로 유입되었다. 인도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본토인과 혼혈화되어 인도인처럼 변하였다.


아마도 중국에는 주후 1-2세기경 최초의 유대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에 의하여 알려진 최초의 유대인 중국 이민은 주후 8세기에 있었다. 초창기에 들어온 중국의 유대인들은 타지역의 유대인들과 오랜 세월 동안 격리되어 살아왔다. 주후 13세기 말엽에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중국내 유대인들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주후 1600년경 중국에 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카이펑의 유대인들이 서방 세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비록 오랜 세월 동안 바깥 세계와 격리된 가운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왔지만, 나름대로의 회당 예배도 존속시켜왔다.


1900년경에는 홍콩, 상해, 천진에도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곧 이어 하얼빈에도 유대인들이 정착하였는데, 주후 1921년에는 하얼빈에 조직화된 유대인 공동체와 학교, 두 개의 회당, 자선 기구 등이 있었다. 한편 1차세계대전과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일부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주후 1937년경 중국내 유대인 인구는 대략 1만 명에 달하였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거의 지구 구석구석까지 흩어져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에 정착하든지 잠시 머물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임시 거류민으로서가 아니라, 상황이 허락하는 한 반영구적 정착민 내지는 영구적인 시민으로서 살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곳에 가서 정착하든지 늘 그곳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속히 뿌리를 내리고자 최선을 다하였고,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이 훌륭한 적응력을 입증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늘 국가 속의 국가, 민족 속의 민족으로 남아야 했다. 그들의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이 그들로 하여금 타민족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도록 늘 막아왔던 것이다. 지상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결국 자신들은 한 곳에 다시 모여서 살아야 할 운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지구 끝까지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이스라엘 땅으로 모일 시간이 무르익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세계적인 분산과 마지막에 있을 재집결에 관하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은 예고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하여 이 성경의 예언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제3부. 메시야와 유대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야웨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야웨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세아 3:4-5). 


제1장. 주인 없는 땅의 임시 통치자들  


주후 70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해이다. 스룹바벨을 비롯한 귀환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다시 지었으며 헤롯 대왕이 엄청난 예산과 노동력을 투입하여 증축 미화하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불길에 휩싸이며 무너짐으로써 수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해이다.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헤롯 성전이 무너진 날(아브월 9일)이 되면 하루 종일 금식하면서 기도를 한다.


그후 예루살렘은 로마 통치자들의 정책 때문에 그만 이방인의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주후 4세기 로마 세계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면서부터는 성지 순례객들과 수도자들이 몰리기 시작하였고, 주후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나서부터는 이슬람의 성지로도 부상하게 되었다.


드디어 주후 11, 12세기 이미 기독교 문화권을 형성한 유럽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유하며 기독교 순례객들과 수도자들을 괴롭혀 온 무슬림들을 응징하고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다. 종교와 정치가 함께 얽히어 동서의 묘한 대결 양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런 수라장 속에서 유대인들은 그나마 자기 땅에 남아 있든지 아니면 동서에 흩어져 있든지를 막론하고 어느 편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고 핍박과 수모를 당하였다.


팔레스타인은 여러 차례 주인 갈이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늘 주변의 거센 조류에 휩싸여 본래의 주인을 잃은 채 열방의 발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이스라엘이 그 옛주인 유대인을 맞아 독립하기까지 엄밀한 의미에서 그 어느 민족이나 집단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진정한 독립을 누린 일이 없었다. 이들 이방 주권자들은 외부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다스렸을 뿐이다. 십자군이 100년 가량 팔레스타인에서 독립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세력 기반과 종주권은 결국 유럽에 있었던 것이다.


본 장에서는 디아스포라 세계가 아닌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의 과정을 서술하며, 그 안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운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는 앞서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먼저 주후 70년 이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다시 독립을 되찾는 1948년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연대기를 간단히 제시한 후 이슬람 시대부터 기술하고자 한다.   


<팔레스타인 연대기> 

 

주후 66-70년. 유대인의 제1차 대로마 항쟁

70년. 예루살렘성전 파괴

73년. 맛사다 함락

132-135년. 바르 코크바의 반란

135년. 앨리아 카피톨리나(예루살렘)에 주피터 신전 건축

이스라엘 땅은 팔레스타인으로 개명됨.

200년경. 티베리아에서 미슈나 최종 완성

400년경. 예루살렘 탈무드 완성

614년. 페르시아의 침입과 예루살렘 함락

638년. 이슬람의 침입과 예루살렘 점령

661-807년. 우마야드 왕조의 통치

807-969년. 아바시드 왕조의 통치

969-1091년. 파티미드 왕조의 통치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1187년. 아랍 살라딘 장군의 대승리

1192년. 십자군 재기하기 시작

1244년. 십자군 다시 기울기 시작

1291-1517년. 마믈룩 시대

1517-1917년. 오토만 터키 시대

1520-1566년. 예루살렘 성곽 건축

1799년. 나폴레옹 아코에서 패배하다

1831-1840년.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의 팔레스타인 통치

1840년. 터키의 통치 재개

1917-1948년. 영국 식민지 시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  


십자군 이전 이슬람 통치시대


비잔틴 시대까지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앞에서 이미 기술하였다. 이제 주후 638년 이슬람의 점령 이후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슬람이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 팔레스타인에는 인근 지역에 살던 아랍 사람들과 베두인(유목민)들이 서서히 이주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전부터 살아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서서히 소수 세력으로 바뀌게 되는 한편 점차 이슬람 종교와 아랍어가 강세를 띠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아랍 도시들과 마을들이 곳곳에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 칼리프 술레이만(주후 715-717년)이 건설한 라믈레는 남부 팔레스타인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팔레스타인은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 변화에 따라 우마야드 왕조(주후 661-807년), 아바시드 왕조(주후 807-969년), 파티미드 왕조(주후 969-1091년)를 차례로 거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내 무슬림의 대부분은 이슬람에서 주류를 이루는 수니파로서 이들은 시아파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비이슬람 교도들에 대하여 보다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시아파를 표방한 파티미드 왕조도 시아파 선전과 확장 정책에 있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별 효력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슬람 아랍이 통치하던 처음 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기독교인 인구는 비교적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우마야드 왕조의 창설자인 칼리프 무아위야(주후 661-680년)는 영토 확장에 힘쓰는 한편, 이슬람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실시하며 그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오마르 2세(주후 717-720년)가 칼리프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비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규제가 심해져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아바시드 왕조(주후 807-969년)와 파티미드 왕조(주후 969-1091년) 때에도 상황이 특별히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모든 규제 사항이 철저히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사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비잔틴 통치 때보다 이슬람 통치하에서 비교적 제한을 덜 받고 살았다. 당시 유대인의 대부분 인구는 갈릴리 지역에 살았는데, 특별히 티베리아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리는 당시 티베리아를 중심으로 성경 전수 작업에 열성을 보인 맛소라 학자들의 노고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히브리어 낱말 '맛소라'는 '전통'을 의미한다. 맛소라는 성경 본문의 정확한 전수를 위하여 성경 본문의 세부 사항에 대하여 주를 달거나 특별한 부호를 명기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맛소라 성경'이라고 함은 이들 유대인 맛소라 학자들에 의하여 전수된 자음 성경 본문 내지는 그들에 의하여 보다 이용하기 편리하게 여러 가지 보조 수단(=맛소라)들을 통하여 단장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본래 순수한 자음만으로 기록되었다. 히브리어 자체가 애초에 모음부호가 없이 자음 부호만으로 표기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맛소라 학자들은 표준 자음 성경의 본문만 전수한 것이 아니라, 모음 부호와 강세표를 고안하여 이를 자음 본문에 옷입히기도 하였다. 언제부터 모음 부호가 히브리어 성경 사본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까지 알려진 사본중 최초로 모음 부호가 완전히 사용된 것은 89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카이로 사본이다. 그리고 보통 인쇄된 히브리어 맛소라 성경의 모음 체계는 티베리아 전통을 따른 것이다. 

 

서기관들의 전통을 이어 계속적으로 구약 표준 성경을 보호하고자 수고한 맛소라 학자들의 전통은 보통 서너 갈래로 나뉘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하며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통은 티베리아 맛소라이다. 주후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걸쳐 티베리아에서 활동한 맛소라 학자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가문이 바로 벤 아셀 가문이다. 벤 아셀 가문의 전승은 후에 보편적으로 채택되어, 오늘날 맛소라 성경의 대명사가 되었다. 

 

벤 아셀 가문의 한 사람인 모세 벤 아셀은 이미 주후 890-895년경에 하나의 맛소라 사본을 편집한 사람이다. 카이로 사본이라고 불리는 이 사본은 히브리어 성경의 세 부분중 예언서만을 포함하고 있다. 사본 내에 기록된 발문(跋文)에서 이 사본의 기록자는 자신을 모세 벤 아셀이라고 밝히면서, 이것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제 827년에 티베리아에서 완성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대인 연대 계산법에 의한 것으로서 현재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에 의하여 주후 895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맛소라 성경을 얘기할 때 주후 10세기에 활동한 아론 벤 아셀의 사본을 빼놓을 수 없다. 아론 벤 아셀은 위에 언급한 모세 벤 아셀의 아들로서 자기 아버지의 사본보다 더 유명한 맛소라 성경 사본을 남긴 사람이다. '알레포 사본'이라고 불리는 이 성경 사본은 주후 10세기 전반기에 기록되었다. '레닌그라드 사본'은 아론 벤 아셀의 맛소라 성경을 참조하여 수정한 사본으로서(주후 1008년), 성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맛소라 성경 사본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주후 9세기에 일단의 카라임 유대인들이 이라크와 페르시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이후로 예루살렘은 카라임의 중요한 본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카라임 사람들은 예루살렘내 한 구역에 모여 살면서, 자신들을 가리켜 '시온을 애도하는 사람들'('아벨레 찌욘'), 또는 '들장미꽃'('쇼샤님')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핍생활을 하면서 성전이 파괴된 것을 애도하였으며, 그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카라임과 같은 산발적인 유대인 이민에도 불구하고 주후 11세기 말엽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점차 감소하여 이미 민족적 또는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특징을 상실하게 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팔레스타인


주후 1096년에 유럽에서 결성된 첫 번째 십자군은 1099년 마침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성은 1099년 7월 7일부터 15일까지 포위되었다가 결국 십자군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곧 이어 예루살렘성내 2만 내지 3만 명 가량의 주민에 대한 무시무시한 대학살이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성내 자기들의 구역을 방어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유대인들은 일부는 싸움에서 죽었고, 나머지는 성이 점령된 후에 회당에 갇혀 산채로 불에 타 죽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극소수만이 아스켈론과 이집트로 도망했을 뿐이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음, 주변 산지의 도시들과 해안평야 일대의 주요 거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십자군이 해안의 대부분 도시들을 점령하는데는 10년(주후 1100-11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편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동남쪽의 비교적 건조한 지역에도 눈을 돌려, 네겝 최남단에 위치한 엘랏과 심지어는 사해 동남편의 샤우박 케락을 점령하여 요새화 함으로써, 그 지역을 지나는 이슬람 '성지순례 길'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세운 예루살렘 왕국은 이처럼 확장을 계속해 나가다가 아랍의 살라딘에 의하여 제동에 걸리고 만다. 대략 주후 1170년부터 팔레스타인내 십자군의 거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한 살라딘은 주후 1187년 7월 갈릴리의 히팀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팔레스타인내 십자군의 팽창에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고야 말았다. 결국 예루살렘(주후 1187년 11월)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내 모든 십자군 도시들과 요새들은 대부분 제대로 싸움도 못하고 살라딘에게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유일하게 레바논 지중해변의 두로(Tyre)만이 살라딘의 정복으로부터 살아남아서 남아있는 십자군 세력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 십자군은 주후 1189년 8월부터 오랜 기간동안 아코를 포위하고 수차례 공격을 시도하던 중 마침내 1191년 7월에 이르러 그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코 점령은 십자군에게 재기의 도화선이 되어서, 마침내 주후 1192년 9월의 평화조약에 따라 두로와 욥바 사이 지역에 다시 십자군 왕국이 건설되었다. 아울러 십자군은 무슬림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순례할 수 있는 권한도 확보하였다. 

 

주후 1193년 살라딘이 죽은 이후로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왕국은 몇 차례의 십자군 운동 덕택에 관할 영토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긴 했지만(예루살렘도 점령함), 눈에 띄는 정복이나 발전은 없었다. 주후 1244년 8월에는 예루살렘이, 그리고 1247년에는 티베리아와 아스켈론이 이집트의 무슬림들에게 함락되었고, 1291년에는 십자군 왕국의 중심지인 아코가 함락됨으로써 팔레스타인에서의 십자군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십자군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상황은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의 상황보다는 나은 편이었으나, 일반적으로 가난과 불안을 면할 수 없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두로, 아코, 아스켈론, 예루살렘, 티베리아, 쯔파트 등의 도시에 소수 유대인 가정들이 살고 있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유럽의 디아스포라를 떠나 동경의 대상인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정착하기도 하였다. 주후 1141년에는 랍비 유다 하레비가 스페인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향하였다. 이것은 유대 민족을 위한 삶의 중심지요 거룩한 땅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그의 종교적 확신 때문이었다.


주후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예루살렘에는 소수의 유대인 가정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증가하였다. 특별히 살라딘은 온 세상의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여 예루살렘에 정착할 것을 권면하였다. 주후 1210-121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300명의 랍비들이 유대인 무리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아코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주후 1229-1239, 1243-1244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주후 1267년에는 랍비 모세 벤 나흐만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모세 오경 주석서를 완성하였으며, 후에 예루살렘을 떠나 아코로 이주하여 거기서 생을 마쳤다 (주후 1270년). 주후 1291년 마믈룩에 의하여 아코가 점령되는 동안 아코의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전부 무너지게 되었다.  


마믈룩과 터키 시대의 팔레스타인


마믈룩은 본래 아유비드 왕조(주후 1171-1250년)의 술탄들이 그들의 군대에 복무시키고자 데려온 노예들로서, 이들은 마침내 자기들의 주인들을 뒤엎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마믈룩은 주후 1250년 이집트에서 통치를 시작하였고,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1291년의 일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마믈룩의 통치는 주후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마믈룩은 이슬람의 많은 계율들을 잘 지키지 않았으나, 헌신적인 무슬림인양 행동하였다. 이들은 특별히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한 성전(聖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십자군 시대 이후 팔레스타인은 폐허로 남았다. 비유대인 인구도 그러하거니와 유대인 인구도 격감하였으며, 대부분이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경제 형편과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일부 상류층의 유대인들은 차별 정책을 피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마믈룩 시대의 술탄들은 민사법에 관한 한 유대인들의 자치권을 허용하여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나기드'라고 불림)를 인정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시시때때로 유럽과 아프리카 각지에서 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이주해 들어왔다. 특별히 주후 1492년과 1497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유대교의 법들과 유대교 신비주의 등 종교적인 삶에 관심이 컸다.


주후 1488년 미슈나 주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유대인 학자 오바댜는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고자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편지를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내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였는지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주민은 4000명 가량이요, 그 중에 유대인은 아주 가난한 70 가정만이 남았다고 들었다. 일상적인 생활 필수품이 결핍하지 않은 가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일년 먹을 양식을 가진 사람은 부자로 통하였다." 오바댜는 학문과 성품 때문에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에서 곧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예쉬바를 설립하여 탈무드를 가르쳤고, 무슬림 당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팔레스타인 안에는 특별히 예루살렘과 쯔파트 두 곳에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한 때 랍비 안수 문제로 두 도시의 유대인 공동체간에 마찰도 있었다 (주후 1538년).


주후 1517년 팔레스타인에서 마믈룩의 통치가 끝나고 오토만 터키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마믈룩과는 달리 오토만 터키는 보다 합리적인 조직과 안정적인 통치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증가 추세를 보였고, 경작지도 점차 확장되었다. 주후 1521-1522년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던 랍비 모세 바솔라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과부들을 제외하고 약 300 가구의 유대인 가정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오토만 터키 시대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는 독일 계통의 아슈케나짐, 스페인 계통의 스파라딤, 북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마그레비',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온 '무스타아랍'으로 나뉘어진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외에도, 나블루스, 헤브론, 가자, 쯔파트 등의 도시들과 갈릴리의 여러 촌락에 거주하였다. 특별히 쯔파트에는 오토만 터키 통치 초기에 300여 가정이 비교적 양호한 경제 조건 가운데 살았다. 오토만 터키 통치 초기에 팔레스타인에는 대략 일천 가구의 유대인 가정(즉, 약 5천 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후 16세기 중엽에 들어와 쯔파트의 유대인 인구는 1만 명으로 증가하여 명실공히 신비주의 유대교의 본산으로 발전하였다. 

 

주후 16세기경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신비주의적 유대교가 발전하였다. 주후 13세기에 스페인에서 기록된 신비주의 작품 '조하르'는 신비주의 유대교의 고전이 되어 있었다. '조하르'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유대교 신비주의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켜 보통 '카발라'라고 부른다. 이제 카발라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들과 심지어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이르기까지 관심의 대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메시야의 출현을 간절히 기대하며 살았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카발라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예루살렘보다는 쯔파트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비주의 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출생한 요셉 카로(주후 1488-1575년)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와 쯔파트에서 활동한 학자이다. 그는 일반 유대인들을 위하여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매순간 지켜야 할 종교적 의무들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한 책을 편찬하였다 (주후 1567년). 그것이 바로 '차려진 식탁'이라는 뜻의 '슐한 아루크'로 불리는 유명한 책이다. 

 

쯔파트의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현실 세계를 떠나 상상의 세계에 지나치게 쏠린 나머지, 극단적으로 치우치기도 하였다. 이삭 루리아(주후 1534-1572년)는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대표자였다. 독일계 유대인 가문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그는 쯔파트에 정착하였다 (주후 1569년). 히브리어로 '사자(獅子)'라는 뜻의 '아리'라고도 불린 그는 윤회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요셉의 후손 메시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유대인 전승에서 '요셉의 후손 메시야'란 본래의 메시야인 '다윗의 후손 메시야'보다 앞서 오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어쨌든 이삭 루리아와 그의 제자 하임 비탈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들에 카발라를 확산시키는 일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주후 16세기 오토만 터키 치하에 요셉 나씨(주후 1524-1579년)는 술탄과의 관계를 이용, 티베리아 지역에 유대인들을 위한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누에를 길러 비단을 생산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티베리아에는 무수한 뽕나무들이 심겨졌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요셉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유대인 난민들을 실어오기 위한 선박도 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터키와 베니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요셉의 계획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주후 16세기 말엽부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베두인(유목민) 강도떼나 드루즈족의 도적질과 약탈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토만 터키 행정 당국의 불공정한 차별화 정책도 한 몫을 하였다. 쯔파트에는 소수의 유대인만이 남았으며, 주후 17세기 말엽 티베리아에는 단 한 명의 유대인도 남지 않았다. 이 무렵 예루살렘과 가자와 헤브론의 상황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어서 타지역에서 박해를 피하여 나온 유대인들을 위한 일시적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주후 17세기 말엽 디아스포라 세계에 만연했던 메시야 열풍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 물결을 부추겨 주었다. 주후 18세기 초 샤베타이의 추종자인 유다 하시드와 하임 말라크의 인도로 일단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유럽에서 1500 명의 무리가 조직되어 출발하였는데, 오는 길에 500 명이 죽고 나머지 1000 명만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1200 명이었다. 이들 샤베타이의 추종자들의 예루살렘 정착은 오히려 그곳 유대인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켜, 주후 1720년 아랍 사람들이 아슈케나짐의 회당에 불을 지르는 사건까지 초래하기도 하였다. 

 

주후 18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가난에 허덕이면서 늘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들은 주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보내주는 구제금에 의존하여 살아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충분하거나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종교적 열성 때문에 온갖 시련과 가난을 견디며 버틸 수 있었다.  

 

제2장. 기독교와 이슬람과 유대인  


많은 종교들 가운데 3대 유일신 종교를 뽑으라 한다면, 바로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라는 대답을 얻게 된다. 이 세 종교는 모두 오늘날 '중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발원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구약 성경을 뿌리로 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는 구약 성경 외에 신약 성경을 더하였고, 이슬람은 신구약 성경을 꾸란으로 대체하였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을 유대교에서 가지쳐 나온 종교들로 이해한다.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유럽과 이슬람이 지배하는 아랍 세계 안에서 흩어져 살면서, 차별화 정책과 박해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 물론 사람마다 그리고 시대마다 차이는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피해를 입은 쪽이었고, 일부 기독교도들은 공권력과 결탁하여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은 정권 그 자체가 되어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쪽이었다.   


기독교와 유대인


주후 324년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 제국 전체의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유대인들은 기독교 황제의 손 아래 놓이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죽인 '옛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주장하였다.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인을 기독교도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법안을 제정하였다. 기독교인은 유월절 무교병을 먹거나 유대인과 같은 날에 절기를 지켜서는 안되었다. 기독교인은 회당을 방문하거나 유대인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토요일에 안식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일요일을 유일한 안식일로 제도화하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주후 1198-1216년 재직)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거부한 대가로 고난받으며 영원히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다. 유대인들에 관한 이노센트 3세의 정책은 그가 네베르스(Nevers) 공작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형제를 죽인 가인처럼, 얼굴은 수치로 가리우고 도망 다니는 방랑자로서 땅 위에서 유리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운명이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제도적인 규제와 아울러 일부 기독교 사제들의 적극적인 유대인 박해 활동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과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잔인성 사이에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랍비 유대교에서는 예수의 신비한 출생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과 삼위일체 교리를 절대적 유일신 신앙과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온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고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다시 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의 메시야됨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주후 13세기 스페인에 살았던 유대인 학자 모세 벤 나흐만(나흐마니데스)의 말을 통하여 들을 수 있다: "메시야가 도래하면 평화와 정의가 뒤따른다. 기독교인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이 세상에 불의가 성행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메시야가 이미 왔다고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나흐마니데스의 말은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을 중간기를 고려하지 못한 발언이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 따르면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상당한 기간(이 기간을 '말일'이라고 함)이 있어서,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와 정의는 메시야의 재림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실현된다. 메시야가 이미 왔는가 하는 문제 외에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주요 논쟁 주제로서 예수의 성육신과 승천, 신성의 본질과 정의 등을 들 수 있다.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표방한 중세 서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표적인 박해 양상으로서 의식(儀式) 살인 혐의, 성찬식 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양상의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와 기독교의 메시야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 감정은 점점 깊어만 갔다. 중세 기독교의 무지와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것은 비단 유대인만은 아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 역시 이단이나 마녀 사냥이라는 명목 아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중세의 유럽 사회는 기독교를 빙자하여 비기독교적인 행위를 일삼곤 하였던 것이다.


유럽에서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과거의 부정적인 시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혁자들은 과거 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정권과 결탁하여 저질렀던 과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 의식을 가졌으며, 유대인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자 노력하였다.   


이슬람과 유대인


이슬람을 창시한 모하멧(주후 569-632년)과 그의 추종자들은 종족으로 보나 언어로 보나 자기들과 가까운 유대인들 가운데 커다란 지지 세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 초창기에 유대인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모하멧은 추종자들에게 유대인의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명하였고, 심지어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모하멧을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자, 이에 분개한 모하멧은 유대인 박멸을 꾀하였다. 그는 기도의 방향을 메카로 바꿨고, 속죄일의 금식 대신 1년중 한 달(라마단)을 금식 기간으로 정하였으며, 유대인들과 관련된 모든 의식과 습속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서, 아라비아 반도내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종 계급으로 전락하여 항상 무슬림들의 칼을 두려워하며 살게 되었다.


기독교가 내면의 영적인 회심에 의하여 신도들을 확보해 간 반면에, 사막에서 시작한 이슬람은 칼을 가지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들의 통치권 안에 들어오게 되자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공적인 정책을 제정하여야만 했다. 

 

이슬람은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유일신을 섬기는 '책의 민족'으로 인정하여, 다른 종교인들과는 약간 달리 취급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점령한 지역내에 사는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법전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보통 '오마르의 협약'(주후 637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협약의 목적은 이슬람 외 다른 종교(특별히 기독교)의 신도들은 이슬람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었다. 비이슬람 교도들에게는 큰 소리로 예배드리는 것, 공직 활동, 무슬림 노예 고용 등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구성원중 하나가 이슬람에 가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특별히 비이슬람 교도로서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인두세를 내야 했다. 그리고 수리는 허용하였으나 새 교회 또는 회당을 지을 수 없었고, 교회나 회당의 탑이 근처 이슬람 사원보다 높아서는 안됐다. 이슬람 외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말을 타지 못했고, 노새는 허용되었다. 비이슬람교도는 칼을 차고 다닐 수 없었으며, 이슬람교도와 쉽게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하여야 했다. 이러한 법을 통하여 그나마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이슬람 안에서도 분규가 있어서,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은 이 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절하였다. 

 

오마르 1세 이후 2세기가 지나서 칼리프 쿠타와킬은 주후 850년에 비이슬람 교도는 노란색 머리보자기를 쓰고 옷소매에는 노란 색 천을 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다음의 칼리프들은 때로는 이 천을 더 밉살스럽게 보이도록 하였고 때로는 전적으로 무시하기도 하였다. 몇 세기가 흘러 유럽의 기독교들 역시 이 방법을 배워서 유럽내 유대인들에게 노란 딱지를 붙이게 하거나 이와 비슷한 규정을 정한 적이 있다. 

 

이슬람에서 주류를 이루는 수니파는 시아파에 비하여 유대인들에 대하여 보다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알리의 추종자들인 시아파는 주로 혁명을 통하여 정권을 잡곤 하였는데, 수니파의 전승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을 가장 혹독하게 박해한 무슬림 통치자들 중의 하나인 이집트의 파티미드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 바므르 알라는 시아파의 한 사람이었다. 주후 1008년경 그는 '유대인들은 목에 송아지 형상을 달고 다녀야 한다'는 규정을 비롯 몇 가지 잔혹하고도 천박한 법들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주후 1021년에 사라졌다. 

 

이슬람은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과 심지어는 신약 성경의 예수도 신봉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문제는 신적인 예언 활동이 언제 끝났느냐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만을 신봉하며 그 안에 등장하는 예언자들만을 받아들인다. 기독교는 예수를 단순히 예언자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믿는다. 이슬람은 모하멧까지의 모든 예언자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모하멧을 알라의 최종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예언자로 신봉한다. 

 

이러한 종교적 차이점만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나 무슬림에 의하여 박해받을 이유는 별로 없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인임을 표방하는 이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또는 그 권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타종교인을 종교의 미명하에 박해한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박해는 종교적 무지와 권력과 부(富)에 대한 야욕에서 나온 것이며, 유대인에 대한 이슬람의 박해는 종교적 공권력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유래와 역사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층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온 가난한 유대인들이었다. 교회의 수뇌부에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있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당시 예루살렘에 모였던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이 새로운 신앙으로 흡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새로운 신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예수의 유대인 제자들은 사마리아와 디아스포라 세계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야고보는 주후 62년 순교하였다. 

 

다소 출신의 바울은 본래 열성적으로 바리새파를 추종하던 사람으로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을 핍박한 사람이었으나 다마스커스(다메섹)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디아스포라 세계로 나가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대대적으로 퍼뜨린 사람이다. 그의 노력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특별히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까지 교회 안에 들어왔으나, 이 일은 오히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골을 깊게 하였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첫 공회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의 결과 이 신앙에 들어온 이방인들을 위하여 몇몇 중요한 계명 외에는 유대교의 모든 짐을 덜어주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 신자들은 계속하여 유대인 계명들을 지켜나갔다.   


나사렛파 사람들


교회 역사의 초창기에 예수를 메시야로 믿은 유대인들 가운데 정통적인 신앙을 견지(堅持)했던 이들은 '나사렛파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적어도 주후 4-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이들은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과 함께 비운의 운명을 함께 나누면서 로마에 대한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후 66-70년 사이에 발발했던 제1차 봉기에도 참여하였고, 주후 132-135년 사이의 제2차 봉기에도 참여하였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하여 함락되기 직전에 이들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누가복음 21:20)고 경고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루살렘 성을 떠나 요르단 강 동편의 '펠라'라고 불리는 조그만 마을로 피신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 공동체는 펠라로 이주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사렛파 사람들의 나머지 일부는 갈릴리 지역에서 살았다. 

 

주후 70년의 대사건은 일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커다란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먼저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이 전쟁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빠진 가운데 수행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민족주의적 유대인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사이에 괴리 현상이 생겼다. 그리고 유대인의 계명 준수와 성전 예배의식에 대한 태도 변화가 초래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더 이상 종교 중심지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예수의 복음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보다 폭넓은 자유와 독립성을 허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일을 메시야를 거절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믿었던 이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제2차 봉기 때에도 역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유대인들과 더불어 로마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랍비 아키바가 반란 지도자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라고 선언하자 예수 외에는 어떤 메시야도 있을 수 없다면서 반란의 대열에서 떠났다. 이런 사건들은 왜 나사렛파 유대인들이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림을 당하게 되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국가의 운명에 앞서 그들의 주이신 예수에 대한 충성을 지킨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그의 나라는 결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므로 이 세상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욱 깊이 간직하였던 것이다.  


나사렛파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은 유대인의 민족적 위기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주후 7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운동은 단순히 하나의 또 다른 이단으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제1차 대로마 봉기를 즈음하여 바리새파가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주후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주후 135년 바르 코크바의 봉기가 실패한 이후, 민족적 위기에 처한 유대 민족은 민족적 존립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위험시하게 되었다. 유대 민족은 사방으로 거대한 로마 제국과 적대적인 이방인들에게 둘려 싸인 가운데, 하나의 민족 종교적 소수 집단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러한 노력은 특별히 요하난 벤 자카이를 비롯 바리새파의 전통을 따르는 랍비들의 활동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성전 파괴 이후 랍비들은 유대교를 표준화하고 통일시킬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들 랍비들에게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새 신앙 운동은 민족적 결속력을 해치는 위험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 신앙 운동은 보편적이고 초(超)민족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인의 유산을 간직하면서도 메시야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를 내부로부터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따라서 유대교 랍비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민족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주후 1세기 말엽 야브네의 랍비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유대교로부터 끊어버리고자, 날마다 드리는 '18 항목'의 기도문에 열 아홉 번 째 조항을 첨가시켰다. '비르카트 하미님'이라고 불리는 이 조항은 '이단자에 대한 (저주)기도'로서, 당시에는 특별히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에 대한 저주문이었다. 이처럼 매일 기도문을 다시 구성한 것은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기 위함이었다. 덧붙여 랍비들은 이들을 일반 유대인들과 분리하고자, 상업이나 기타 상호 관계를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주후 1세기 말엽부터 랍비 유대교와 유대인 기독교의 분리는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하였다. 바르 코크바 봉기 때에 이르러 랍비들은 기독교인이 필사한 토라 두루마리가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담고 있을지라도 전혀 정결하지 못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초대 교회의 모든 저작을 불법화하였다. 이런 박해로 말미암아 유대인 기독교는 서서히 약해지고 그 대신 이방인의 기독교가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에비온파 유대인


예수를 메시야로 믿은 유대인들 가운데 나사렛파의 정통적인 신앙을 떠나 유대인의 계명 준수를 중시하며 이를 고집하였던 이들은 특별히 '에비온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에비온파 유대인들의 견해는 사실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에비온파는 예수의 인성(人性)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한다. 또 그들은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인하고, 예수를 훌륭한 도덕 선생 내지는 예언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편 에비온파와는 달리 나사렛파 사람들은 비록 유대인의 미슈나에 나타난 구전 율법을 지키긴 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이방인 신자들 뿐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유대 민족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 가운데 에비온파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를 메시야로 믿은 유대인들에게는 당시의 상황을 통해 볼 때 세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그들 중에는 당시 점점 부상하는 이방 교회에 흡수되어 서서히 이방 세계에 동화되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둘째, 앞서 설명한 나사렛파 사람들로서, 이들은 신앙적으로는 이방 교회와 동일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의 몇몇 계명들을 지키되 이방인 신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유대 민족에 대한 충성을 지키려 했으나, 로마와의 전쟁 때 반군의 무리를 떠남으로써 변절자로 낙인찍힌 일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제 남은 세 번째 부류가 바로 에비온파라고 할 수 있다.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유대교의 회당으로 돌아가든지(거기에는 메시야 예수를 부인하는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방교회와 교류하며 함께 지내든지(이는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유산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딜레마는 유대인 신자만의 것이었다.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이방인에게는 다만 종교적인 선택일 뿐이었으나, 유대인에게는 민족적이고 동시에 종교적인 선택이었다. 이런 문제를 회피하고 타협한 사람들이 바로 에비온파 사람들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처세술이 옳지 못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에비온파는 이방인의 기독교에서도 그리고 유대교의 회당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제4장.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메시야라고 하는 존재는 유대민족과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 옛날 히브리인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분명히 예고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이 변함없이 기다려온 메시야는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그들 역사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주전 6년 유다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주후 30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고 하는 유대인은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야요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주후 1세기 유대인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랐으며,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인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하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이 소식을 온 누리에 외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의 유대인 제자들이 전하는 소식을 믿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중에 절대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이미 주후 1세기 말엽부터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수를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야로 규정하고 서서히 그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감을 키워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유대인은 영적인 메시야 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야, 다시 말해서 유대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현 지상의 외부세력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해줄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을 갖춘 메시야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메시야상은 구약 성경에서 예고하고 있는 메시야관에서 상당히 거리를 두게 된 것이었다.   


바르 코크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하여 예수 이후 유대인에게 처음으로 메시야로 표방된 사람이 바로 바르 코크바이다. 바르 코크바는 주후 132-135년 사이에 발발한 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의 주도자였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을 성취하려 했던 민족적 영웅이었다. 그의 투쟁은 약 2년 반 가량은 아주 성공적인 것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의 절대 지지와 더불어 메시야적 기대감마저도 북돋아주었다. 바르 코크바는 아주 엄한 지휘관이었다.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자료들에 의하면 (심지어 바르 코크바가 직접 쓴 편지들도 발견되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르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처형하곤 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반대 발언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독재적 영웅상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유대인에게는 그와 같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어쨌든 그는 여러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민족혼과 투쟁 정신은 유대인들에게 새 힘을 불어넣었다.


당대의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와 동시대인으로서 역시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명성을 날리는 거성이다. 그는 랍비 중의 랍비라고 불릴 정도로 유대교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당시 바르 코크바가 정치적 영웅이었다면 랍비 아키바는 종교적 영웅이었다.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와 그의 승리를 통하여 예언의 성취를 보는 듯하였다.


유대인 나라의 구속을 위하여 열 지파가 다시 이 땅에 돌아오는 것이나 엘리야의 출현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소위 '주의 날'에 관한 예언의 실현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랍비 아키바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구절을 (민수기 24:17) 당대의 영웅 바르 코크바에게 적용시킨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적 예언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당시 다른 랍비들의 반발에 부딪친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고 연이어 종교적 핍박이 더욱 강화되자, 메시야에 대한 백성의 기대는 한꺼번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당장 시급한 유대 민족의 생존 문제와 이스라엘 땅에서의 정착 강화 문제에 더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시대의 거짓 메시야들


이슬람 시대에 들어와 모하멧의 이야기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어 주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평범한 백성 중에서 그런 지도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으며,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아시아로부터 로마 제국이 축출된 일은 '말세'가 가깝고 유대인의 구속자가 머지않아 출현하리라는 믿음을 부추기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거짓 메시야의 출현은 얼마든지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후 8세기 초 시리아의 세레네라고 하는 유대인은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무슬림들을 성지에서 쫓아내도록 자신을 예정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탈무드로부터의 해방을 구호로 삼고, 유대인의 까다로운 음식법과 각종 절기에 대한 규례와 기타 유대인들을 짓누르는 각종 법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한때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를 따랐으나, 결국 칼리프 야제드 2세는 그를 체포하여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 처형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에는 페르시아의 수도 이스판을 중심으로 오바야 아부이사라는 무학(無學)의 유대인 재봉사가 출현하였다. 이 무렵 우마야드 왕조가 그 기초부터 흔들리던 터이라 아부이사에게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아부이사는 자신이 메시야의 다섯 선구자중 가장 마지막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탈무드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의 명백한 원칙들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페르시아내 일만 명이 넘는 가난한 유대인들이 칼리프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고 그를 따랐다. 그는 기적을 믿고 자기 주위에 모여든 유대인들로 군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부이사는 전투에서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주후 755년). 유드간 알라이라고 불리는 양치기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였으나 역시 죽임 당하고 말았다. 

 

주후 13세기 아브라함 아부랄피아는 카발라 사상에 심취하여, 18세 때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가 살면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삼바티온강을 찾아 동방에서 방랑하였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예언자 노릇을 하면서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전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아부랄피아는 주후 1281년 로마로 와서는, 교황 니콜라스 3세를 유대교로 개종시키겠다고 장담하였다. 이 일로 교황청의 감옥에 투옥된 그는 간곡히 사죄(謝罪)한 후 석방되어 시실리 섬으로 들어와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포하며 돌아다녔다. 다시 시실리 섬 주민들의 조롱과 적대감 때문에 도망한 아부랄피아는 죽을 때까지 방황하며 지내야 했다.   


다비드 르우베니와 솔로몬 몰코


주후 1525년경 로마에, 스스로를 아라비아 근처 어딘가에 위치한 한 유대인 왕국 왕의 동생이요 사신이라고 주장하는, 다비드 르우베니라고 하는 한 유대인이 출현하였다. 그 왕국의 백성은 '잃어버린 열 지파'의 후손들이라고 하였다. 그가 온 목적은 그 유대인 왕국이 동서 사방으로부터 몰려오는 공격을 막는데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르우베니의 말에 흥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믿었던 교황(클레멘트 7세)은 그에게 사신에 적절한 대접을 베풀었으며, 포르투갈 왕에게 추천서까지 써 주었다. 이탈리아의 유대인들과 이베리아 반도의 마라노들은 열광하였다. 지상 어딘가에 강력한 유대인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고양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유대인 대사와 유럽 열강 사이의 협상을 통하여 자신들의 운명이 개선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심지어는 머지않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회복하리라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마라노중에 디에고 피레스라고 하는 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부에서 좋은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르우베니를 따라 그의 유대인 왕국으로 가고자 하였다. 르우베니가 그의 청을 거절하자, 디에고는 포르투갈을 도망 나와 다시 유대교로 복귀하고 이름도 솔로몬 몰코라고 바꿨다. 팔레스타인에서 잠깐 동안 체류한 후, 그는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몰코는 그럭저럭 교황과 안면을 터놓고서는, 티베르 강의 범람과 포르투갈에서의 지진을 예언하였다. 실제로 이 두 가지 일이 발생하자 그는 신비적인 힘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종교재판관은 그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황 자신이 그를 도와 도망하게 하였다. 마침내 솔로몬 몰코는 자신을 메시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주후 1532년 르우베니와 몰코는 사실상 힘을 합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챨스 5세를 도와 터키를 물리칠 수 있다고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챨스와 그의 모사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챨스 황제는 명을 내려 그들을 체포하였다. 몰코는 화형대에서 타 죽었고, 르우베니의 최후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그도 또한 몰코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 유대인들과 마라노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두 사람의 경력이 끝나고 말았다.  


샤베타이 쯔비


주후 1618년에서 1648년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독일에서는 신구교도 간에 3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전체가 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유대인들 또한 그 피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주후 1648-1658년 사이 10년 동안 폴란드는 사방으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사람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에 속하는 호전적인 카자흐족과, 크리미아 반도를 다스린 타타르족을 결속시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흐멜니츠키의 연합군은 남동부 폴란드를 휩쓸었다. 러시아는 북동쪽으로부터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들어왔고, 북쪽에서는 스웨덴인들이 쳐들어 왔다.


이와 같이 동서유럽은 40년에 걸쳐 전쟁의 마수에 할퀴어 지칠 대로 지치게 되었다. 유럽 제국은 더욱 쇠약해졌고, 유럽내 유대인 공동체는 무수한 인명을 잃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중 대부분은 이미 가난하고 힘없는 무리로 변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유대인들은 카발라와 같은 신비주의에 쉽게 빠지고,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이 다시 고개를 쳐들게 되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중 카발라 신봉자들은 주후 1648년이 메시야의 해라고 믿고 있었다. 한편 일부 기독교인들은 주후 1666년이 메시야가 재림하는 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난무하는 유럽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메시야 대망 사상은 유대인 기독교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팽배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메시야임을 자처하고 등장한 유대인이 바로 샤베타이 쯔비(주후 1626-1676년)였다. 

 

샤베타이 쯔비는 주후 1626년 터키의 서머나에서 한 스페인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공교롭게도 유대인들의 1,2 성전이 파괴된 아브월 9일이었다. 이 사실은 메시야의 생일이 성전 파괴일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유대인의 전설에 따라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주었다. 어려서 샤베타이 쯔비는 보통 유대인 아이들이 받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샤베타이 쯔비는 자라면서 탈무드연구 보다는 조하르와 카발라식 주석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는 천부적으로 지도자적 재질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그에게 몰려들면서 그는 그들에게 비밀리에 카발라의 신비주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서히 위대한 일들을 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주후 1648년 마침내 샤베타이 쯔비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회당의 토라 두루마리 옆에 서서 샤베타이 쯔비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된 대로 발음하였다. 주후 1648년은 카발라 신봉주의자들이 메시야의 해로 기대하고 있던 해인지라, 아마도 샤베타이 쯔비는 이런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샤베타이 쯔비의 불경스런 행동에 분노한 서머나의 유대인 공동체는 그를 추방시켜 버렸다. 

 

샤베타이 쯔비는 비록 서머나에서 추방되기는 하였지만 (주후 1651년), 어디를 가든지 추종자를 모을 수 있었다. 살로니카에서 많은 학자들과 카발라 신봉자들이 모인 가운데, 샤베타이 쯔비는 갑자기 혼인예식용 덮개와 토라 두루마리를 준비시켜 놓고 토라를 자기의 신부로 맞이하는 혼인예식을 올렸다. 또 다시 샤베타이 쯔비의 이 기상천외한 행동은 모인 무리를 깜짝 놀라게 했고, 샤베타이 쯔비는 다시 방랑의 길에 올라야 했다. 마침내 그가 안심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곳은 이집트의 카이로였다. 

 

카이로의 부유한 유대인 라파엘 요셉 켈레비는 아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몇 명의 추종자들을 자기 집에서 부양하였다. 샤베타이 쯔비 역시 이 집에서 환영을 받게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는 켈레비의 집에서 가장 뛰어난 카발라주의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켈레비가 구제 목적상 예루살렘으로 심부름을 보낼 일이 있었을 때, 그는 샤베타이 쯔비를 선택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샤베타이 쯔비는 마치 하나님의 천사로 보였다. 이 무렵 샤베타이 쯔비는 예언자적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가자의 나탄을 만났다. 나탄은 스스로를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육신을 입고 온 것이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샤베타이 쯔비를 메시야라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일부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샤베타이 쯔비가 카이로로 돌아 왔을 때, 켈레비의 무리들도 그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한편 이 무렵 유럽에서는 사라라고 불리는 한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사라의 부모는 흐멜니츠키의 침입 때 죽었고, 그녀는 수녀원에서 자라야 했다. 사라는 죽은 아버지가 자기를 수녀원에서 데려다가 그녀가 메시야의 신부가 될 거라고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샤베타이 쯔비는 사라를 자기의 신부가 되도록 초청하여 켈레비의 집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러한 소식은 전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로 퍼져 나갔고, 일부 광신적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곧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것이라는 큰 기대감으로 술렁대기 시작하였다. 한편 주후 1666년이 메시야의 해라고 믿고 있었던 일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일고 있는 이 메시야 소동을 놀란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마침내 샤베타이 쯔비는 메시야로서의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샤베타이 쯔비는 콘스탄티노플로 갈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거기서 터키의 술탄이 샤베타이 쯔비를 보자마자 권좌를 포기함으로써, 샤베타이 쯔비가 왕중 왕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추종자들로 둘러싸인 샤베타이 쯔비의 배가 터키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즉시 체포되어 아비두스 요새에 구류되었다.


샤베타이 쯔비는 후에 술탄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그 요새 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알현식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치 터키 당국은 그를 위하여 요새를 제공한 것처럼 보여졌다.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이 이 자칭 메시야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샤베타이 쯔비와 그의 예언자들은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명령과 선언서를 내놓았는데, 특별히 폴란드의 유대인들에게는 위대한 미래와 고난의 종식을 약속하면서 느헤미야 코헨이라고 하는 사람을 자기들에게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사람은 스스로 앞으로 올 메시야의 예언자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샤베타이 쯔비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임을 그에게 확인시켜 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비두스에 와서 샤베타이 쯔비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느헤미야 코헨은 샤베타이 쯔비가 메시야가 아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샤베타이 쯔비의 열광적인 추종자들의 협박을 피하여 느헤미야 코헨은 무슬림들에게로 찾아갔다. 터키 당국은 코헨의 충고를 받아들여 마침내 샤베타이 쯔비를 술탄 앞으로 끌고 갔다. 술탄은 샤베타이 쯔비에게 그의 모든 주장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결국 샤베타이 쯔비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술탄의 궁정에서 문지기 직분을 하나 얻었으며, 심지어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에도 동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샤베타이 쯔비를 따랐던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날벼락과도 같았다.   


샤베타이 쯔비의 여파


샤베타이 쯔비의 아들임을 자처한 야콥 케리도는 자기 안에서 샤베타이 쯔비의 영혼이 계속하여 메시야 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러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케리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이슬람으로 연합하여 들어갔다. 느헤미야 히야 하윤은 서유럽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기독교와 유사한 유대교를 전하였다. 이처럼 샤베타이 쯔비의 정체가 드러난 후에도 신비주의적 환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자, 랍비 유대교 세력은 탈무드보다 카발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유대인은 누구든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 태생의 모세 하임 루사토(주후 1707-1747년)는 신비주의 경향의 시들을 써서 가르쳤다고 해서 랍비들로부터 샤베타이 쯔비의 추종자로 오해를 받아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도망하다시피 이주하여야만 했다.


주후 1740년 남부 폴란드에 프랑크라고 더 잘 알려진 야콥 레이보비츠라는 유대인이 나타났다. 그는 그 전에 이미 남동부 유럽을 전전하면서 그곳에 남아있는 샤베타이 이단의 교리들을 배운 바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샤베타이 쯔비가 다시 화육(化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랑크와 그의 추종자들도 이곳저곳의 유대인 공동체들로부터 추방당하여 결국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주후 1759년) 탈무드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가톨릭조차도 그가 계속하여 메시야임을 주장하는 것을 알고는 그를 체포하여 13년 동안 투옥시켰다. 야콥 프랑크는 석방 후에도 바론 폰 프랑크라는 이름으로 다니면서 서유럽에서 거의 20년 동안이나 사기행각을 계속했다.   


예수는 자신의 출처가 하나님 자신이요 자기가 메시야임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꾼'이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일 것이다. 유대인 예수의 이 엄청난 선언은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 동안 대부분의 유대인으로부터 거절을 당하는 결과를 자아냈다. 예수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닌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 왔다. 예수는 진짜 메시야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동안 바르 코크바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수가 메시야를 대망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끈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진정한 메시야로서 인정받는 사람은 없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나사렛 예수만은 걸러낸 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거짓 메시야들에게 지칠 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힘없이 나사렛 예수를 재고해보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사렛 예수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진정한 평가를 받게되고 '그의 그됨'이 온 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맺는 글  


주후 1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예수를 거절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것은 예수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기독교를 자기의 종교로서 표방하는 사람들중 많은 이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릇 해석하고 오해하여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을 박해한 것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와 예수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게 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수를 거절한 유대인들의 책임 역시 작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지난 2000년 가까운 방랑의 세월 동안에 과연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반감이나 혐오감을 품어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유대인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방인들에게 결코 유대인에 대한 박해나 증오심을 명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 동족을 사랑한다. 예수, 그는 유대인중 유대인이요, 랍비중의 랍비요, 유대 민족이 그렇게도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제 유대인들은 자신의 지난 방랑사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주후 30년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피를 흘렸던 저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난 2000년간 유대인이 받은 민족적 고난의 이유를 되묻는 일은 모두에게 가슴아픈 일이다. 유대인들은 '왜 우리가 고난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왜 그가 고난을 받았나' 하고 물어야 한다. 유대인을 포함 모든 민족의 제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은 '우리 자신의 고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만 찾을 수 있다. 

 

대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굳게 서 있을 수 있었던 민족, 전 지구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운명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던 불굴의 민족, 이것이 바로 유대 민족이다. 이에 대한 공은 누구에게 돌려야만 할까? 압제자들에게 맞서 싸운 유대인들의 투쟁정신이었나? 랍비들의 학문과 정신력이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역사적인 우연이었나?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바, 과거 유대인의 조상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지만, 지난 2000년간 이스라엘의 방랑사 속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엿볼 수 있다.


4000년 전에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신 대주재 하나님은 그의 후손의 운명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 메시야 예슈아(예수의 히브리식 음역)께로 돌아올 시간이 이르렀다. 얼굴에 덮인 수건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그의 계시의 말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영원한 왕 예슈아에게로! 그의 나라, 곧 메시야 왕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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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가온: '가온'이란 '뛰어남, 탁월함, 자랑'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정복 이후 예쉬바의 원장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게토: 도시 안의 유대인 거주구역.


나기드: 중세시대 이슬람 국가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로 인정된 지도자를 일컫는 말.


나씨: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 서 있던 유대인 대표로서 벧딘(법정)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았다.


답장(Responsa): 유대교 법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을 때 예쉬바 학자들의 열띤 토의를 거쳐 가온과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 낸 후 그 내용을 문의가 들어온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법관과 수장에게 보내기 위하여 기록한 것.


디아스포라: 헬라어로 '분산' 또는 '이산(離散)'이라는 뜻으로서,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땅에 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사는 경우, 이러한 상황 내지 이들 유대인이 사는 그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아스포라 장관(레쉬 갈루타): 바벨론 유대인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일반적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간주되었다.


라반: 미슈나 시대에 벧딘의 대표 또는 나씨직에 있는 랍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서, 후에는 존경의 의미로서 '랍비' 대신 라반이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랍비: 유대인들 가운데 지도층은 일반적으로 랍비라고 불렸는데, 이는 본래 '위대한 이' 또는 '상급자(上級者)'라는 뜻이다. 랍비는 후에 '나의 스승'이라는 뜻의 호칭으로 발전한다.


랍비 유대교: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성전 예배(곧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는 사라지고 오직 토라의 연구와 준수만을 문제삼는 '랍비 유대교'가 태동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해 오게 되었다.


레쉬 갈루타: '디아스포라 장관'을 볼 것.


마기드: 유대인 공동체에 의하여 공인된 설교자로서, 도덕과 윤리에 관한 유대교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


마라노: '저주받은 자' 또는 '돼지'라는 뜻의 이 용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대부분 강요에 의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무슬림: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미드라쉬: 보통 '미드라쉬'라는 용어는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우선, 성경 연구 작업 자체를 가리키며, 둘째, 성경 연구의 결과, 곧 성경을 해석한 문구를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해석들로 이루어진 저술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마지막 의미의 미드라쉬이다.


미슈나: 토라에 대한 해석과 토라로부터 추출해낸 법적인 진술들이 산발적으로 모아져서 편찬된 유대인 구전율법의 총체.


미트나그딤: 동유럽에서 하시딤 운동이 퍼져가던 무렵 이를 반대하던 사람들을 가리켜 '미트나그딤'이라고 부른다.


바리새파: 대략 주전 150년에서 주후 70년 사이에 대중적인 기반을 두고 특정한 지도자 없이 활동한 유대교 사상의 한 줄기로서,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랍비 유대교의 전신이 되었다.


바알 궑: '바알 궑'이란 '이름의 권위자'라는 뜻으로, 천사들과 귀신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을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인다. 이들은 귀신과 떠도는 혼령들의 생태와 습관 등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부적을 나눠주고, 주술적 기도를 드리며, 안수하여 병을 고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미래를 예언하는 일도 시도하였다.


베두인: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반사막 지역에서 물과 가축의 꼴을 찾아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하는 유목민.


벧딘(법정): 주후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어 산헤드린이 더 이상 모일 수 없게 되자, 처음으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71인의 학자를 모아 산헤드린과 비슷한 형태로 야브네에 세운 기구.


사두개파: 제사장 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유대교의 분파로서, 바리새파와 달리 부활이나 천사를 믿지 아니함.


사보라임: 바벨론 탈무드가 완성되어 가던 주후 500년 무렵부터 이슬람 정복 직전까지 활동한 유대인 학자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해설가' 또는 '의견 소지자'라는 뜻이다. 이들 사보라임은 탈무드를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순서를 재정리하거나 필요한 곳에 한두마디 첨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산헤드린(공회): 예루살렘의 산헤드린(대공회)은 수장인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1인으로 구성되었다. 성전이 건재한 동안 산헤드린의 모임은 성전 한 쪽에 있는 커다란 방에서 열렸다. 구성원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임명하거나, 공회원 자신들이 공백을 메워 나갔다. 본래 산헤드린은 최고법원의 역할을 하였으나, 헤롯과 로마 시대에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사안은 대공회의 권한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산헤드린은 민사 및 종교적 사안들만 처리하게 되었다.


세데르: 유월절이 시작되는 밤에 식사와 더불어 행해지는 유대인들의 종교의식.


수니파: 이슬람의 주류로서 비교적 온건한 경향을 보임.


술탄: 이슬람 국가의 군주로서, 특별히 터키 시대에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


스파라딤: 스페인과 포르투갈 계통의 유대인들.


시아파: 이슬람에서 비교적 과격한 파로서, 알리의 추종자들인 시아파는 주로 혁명을 통하여 정권을 잡곤 하였으며, 수니파의 전승을 무시한다.


시카리: 옷속에 단검을 가지고 다니면서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살해하곤 했던 과격파 민족주의자를 가리킨다.


아모라임: 탈무드 시대에 활동한 랍비들을 가리켜 '아모라임'이라고 부른다. 한편 아모라임 이전, 곧 미슈나에 언급되거나 또는 미슈나 시대에 속하는 랍비들을 가리켜 '타나임'이라고 부른다.


아브월(月) 9일: 아브월은 유대력으로 다섯째 달이 되는 달로서,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의 7, 8월 사이에 해당한다. 이 달 9일은 모든 유대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주전 588년 솔로몬 성전이라고도 불리는 제1성전이 바벨론 군사에 의하여 불에 탔고, 주후 70년 헤롯 성전 곧 제2성전이 로마군에 의하여 파멸된 것으로 전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많은 유대인들이 금식을 하며 기도한다.


아슈케나짐: 독일 계통의 유대인들로, 언어로서 주로 이디쉬를 구사할 줄 안다.


엣센파: 바리새파 및 사두개파의 사상과 예루살렘의 성전을 거부하고 쿰란과 같은 외딴 유다 광야 지역에 들어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유대교의 한 분파이다.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주요 예배 의식이었던 대부분의 주류 유대인들과는 달리,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성경 공부와 찬송과 기도로서 자신들의 주된 예배 의식을 삼았다


예쉬바: 모세의 토라를 비롯하여 미슈나와 탈무드 등을 배우고 가르치는 유대인 최고의 교육기관을 가리킴.


예쉬바 원장: 예쉬바의 최고 책임자.


오마르의 협약: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의 제2대 칼리프 오마르(주후 634-644년)에게 찾아와 보호를 요청했을 때, 오마르가 그들에게 제시한 협약으로서(주후 637년), 이슬람 외 다른 종교(특별히 기독교)의 신도들은 이슬람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약에 의하면, 비이슬람 교도들은 구성원중 하나가 이슬람에 가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수리는 허용하였으나 새 교회 또는 회당을 지을 수 없었고, 교회나 회당의 탑이 근처 이슬람 사원보다 높아서는 안됐다. 이슬람 외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말을 타지 못했고, 노새는 허용되었다. 비이슬람 교도는 칼을 차고 다닐 수 없었으며, 이슬람 교도와 쉽게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하여야 했다.


이디쉬: 수많은 독일계 유대인들이 보헤미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으로 이주해와서는 그들은 비교적 순수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의 유대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살았다. 이들 동유럽의 독일계 유대인들은 독일에서의 언어 변화를 따를 수 없었고, 또 그들이 가져온 독일어에 점차 히브리어와 슬라브어를 섞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마침내 주후 16세기를 즈음하여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언어가 바로 이디쉬이다.


조하르: 레온(Leon)의 모세 벤 궑토브는 시몬 벤 요하이가 기록한 토라 주석서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시몬 벤 요하이란 주후 2세기의 유명한 랍비로서, 바르 코크바 반란 후에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13년간 홀로 숨어 살았던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에 천사들은 랍비 시몬에게 성경 문구들 가운데 숨겨진 심오한 하나님의 뜻들을 계시해 주었으며, 이에 시몬은 일종의 토라 주석서를 기록했으며, 그 안에 그가 받은 비밀들 중 얼마를 드러냈다고 한다. 이 책은 모세 벤 궑토브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극히 일부만 알려졌었다. 모세는 주후 1250년에 '조하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출간하였다. 유대교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모세는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각종 신비주의적 해석들을 자신의 책에 모아서 편집한 듯하다.


짜딕: 하시딤에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간주되는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용어.


카라임: 주후 8세기 바벨론 디아스포라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분파로서, 창시자 아난 벤 다비드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한편, 탈무드 전통들이 요구하는 바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아난의 후계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랍비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에 그 거룩한 책의 애초의 의도가 무수한 법들 속에서 상실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토라의 기록된 말씀을 엄정하게 준수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브네 미크라' 또는 '카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물론 카라임도 성경의 진술들이 때때로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카라임은 각 유대인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성경의 진술들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공식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각 유대인이 면밀히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라임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각자의 지성을 의지하여 성경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종교적 개인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카발라: '조하르'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유대교 신비주의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켜 보통 '카발라'라고 부른다.


칼리프: 이슬람 초기 모하멧의 후계자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후에는 이슬람 나라의 왕을 가리키는 용어가 됨.


타나임: '타나임'은 '타나'의 복수형으로서, 미슈나에 언급되거나 또는 미슈나 시대에 속하는 랍비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시기적으로 대략 주후 10년에서 시작하여 주후 220년경까지 활동한 랍비들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그 이후 탈무드 시대의 랍비들을 가리켜 말하는 '아모라임'과 시기적으로 구분된다.


탈무드: 탈무드는 미슈나에 대한 일종의 체계적인 주석서로서, 토세프타를 그 전신으로 두고 있다. 탈무드에는 두 가지가 전해 내려오는데,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주후 400년경에 완성되었고, 바벨론 탈무드는 주후 600년경 이전에 완성되었다. 쉽게 말하여, 구전 율법인 미슈나의 내용을 두고 랍비들이 벌인 토론 내용을 종합하여 편집한 것이 탈무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탈무드는 대개 대화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그리고 탈무드의 본문은 미슈나이고, 주석 부분은 특별히 '그마라'라고 일컫는다.


토라: 히브리어의 '토라'는 본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예전부터 유대인들은 '토라'라는 용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토라'는 1) '모세 오경', 2) '구약 성경 전체', 3) '구약 성경에 미슈나, 탈무드 등 유대인의 구전 토라를 포함한 것'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본서에서는 대부분 첫 번 째 또는 두 번 째 의미로 사용하였다.


토세프타: 토세프타는 문자 그대로는 '보충, 첨가'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미슈나와 밀접히 관련된 타나임들의 진술과 전통을 모은 것이다. 토세프타는 주후 300년경 문서화 작업이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전적으로 미슈나에 의존하여 형성된 문헌으로서, 미슈나의 체계를 그대로 따라서 6권과 부, 장으로 나뉜다. 그리고 내용면에 있어서는 먼저 미슈나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 있고, 그 다음에는 미슈나 본문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미슈나 본문과 관련하여 미슈나의 의미를 보충해주는 진술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미슈나의 형식만을 따르는 독자적인 진술도 있다


팔라샤스: 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 일대의 흑인 유대인을 가리킴.


하가다: 하가다는 비(非)할라카적인 성경 주석으로서, 격언, 비유, 설화 등을 포함한다.


하바딤: 슈노이르 짤만(주후 1745-1813년)이 주창한 운동으로서, 지혜(호크마), 명철(비나), 지식(데아) 세 가지를 사상의 근간으로 삼는다. 하바딤은 하시딤중 지성적인 파로 간주된다.


하스칼라: 유대인의 계몽주의 운동.


하시딤: 바알 궑 토브에 의하여 시작된 유대교 경건주의 운동으로서, 짜디킴('짜딕'의 복수형)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시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올바르게 해석한다고 믿었다. 짜디킴 따르기를 거절하고, 기도보다는 연구를 그리고 감정보다는 지성에 더 치중하는 사람들은 경건심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시딤 중 일부는 자신의 무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시딤 운동이 퍼져가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은 하시딤과 이를 반대하는 미트나그딤(반대파)의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할라카: 할라카란 성경에 근거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유대인의 법에 대한 전통적인 진술을 가리킨다.


회당: 유대인 공동체의 종교 및 사회적인 모임 또는 하나의 예배 및 기도 처소.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 방랑사'는 제목 그대로, 주후 1세기 이후 대략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방랑 또는 분산의 역사를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유대인의 이런 상황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디아스포라'이다. 디아스포라란 헬라어로 '분산' 또는 '이산(離散)'이라는 뜻인데,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땅에 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사는 경우, 이러한 상황 내지 이들 유대인이 사는 그곳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 본서는 유대인의 독특한 방랑의 역사를 특별히 유대인중의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서술하면서, 그들의 방랑의 역사가 갖는 성경적 의미를 찾아 보고자 시도한다.

 

도서명: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 방랑사

지은이: 김경래 (전주대학교)  

약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온갖 박해를 당하다가 다시 옛 땅에 모여 나라를 세운 유대 민족의 역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역사이다. 「그리스도 이후 유대인 방랑사」는 제목 그대로, 서기 1세기 이후 대략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방랑 또는 분산의 역사를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유대인의 이런 상황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디아스포라'이다. 디아스포라란 그리스어로 '분산' 또는 '이산(離散)'이라는 뜻인데, 유대인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 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사는 경우, 이러한 상황 내지 이들 유대인이 사는 그곳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 본서는 유대인의 독특한 방랑의 역사를 특별히 유대인중의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서술하면서, 그들의 방랑의 역사가 갖는 성경적 의미를 찾아 보고자 시도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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