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1. 문제 제기

   한국기독교인들의 사회운동에 대한 참여가 그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나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부터였다.
그리하여 송건호는 1970년대의 한국교회를 "3.1운동이후 또 다시 십자가를 진 교회"라고 표현하였으며 지명관은 이를 "사명을 재인식 하려는  교회로 보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이후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구실로 정치 권력이 절때화, 독점화, 장기화 되면서 이른바 개발독재와 인권  탄압이자행되는  상황속에서 한국교회가 벌인 그러한  사회운동은  외롭고도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교적인 면에서 그  바탕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세상속으로 눈을 돌리며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직접 그 역사의  현장속으로 뛰어든 것은  하나님의 선교신학이 등장한 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이요, 구원은 마침내 세상안에 나타나는 샬롬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신앙과 현실 참여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오직 개인의 영혼 구원만이 선교하는 종래의 선교개념이 지배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원화되가고 있는 현대 사회속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선교개념은 본래적인 선교의 사명을 다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감리교는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신학과 정치 신학이 발전하기 전인 18세기에 요한 웨슬리 통하여 사회개혁운동에  참여를 하였다.  웨슬리는 사회운동을 기독교 복음의 한 본질로 이해하여 사회개혁운동을  주로함으로써 그 당시 병들고 타락했던 영국 사회에일대 변화를 일으켜서 하류층의 자기 인식을 새롭게 했으며,  또한 유혈 혁명을 막았다.

  이러한 웨슬리의 행동은 감리교 사회인식과 사화운동 전통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 한국 감리교회의 대부분이 이러한 웨슬리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변질된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이 부르짓는  전통적인 개념의 선교를 고집하여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따위의 일들을 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위임받은  선교의 사명을 다한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심한 작태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교단적인 차원에서 학문의 존엄성이  지켜져야할 신학교 교우들에  대한 징계를 거론하는둥 천동설을 주장하던 중세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제로하여 한국  변혁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선교관과 실천을 위한 신학적 근거를 모색하는것을 목적으로 하고자 한다.
 

 2. 연구 범위및 전개방법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의 범위를 1970년대로 극한 시킨것은 민족  분단과 6.25를 전후로 하여 단절되었던 사회운동이 60년대 초  4.19를 계기로하여 다시 일어나 그 맥을 이어왔지만 아직 각 부분의 운동들이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70년대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참여는 전국 한국 사회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1) 기독교의 사회운동이 선교적 관점에서 시작되어야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장으로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선교 개념에 대하여 살펴 보았으며 선교 개념은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2) 사회운동 이념을 다루기 위한 기독교 신학의 전제로서 신학의 상황성에 대한 확인과 그것에 대한 역사적인 검증 그리고  특히 사회 변혁적 상황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응답을 가능케하는 기독교  신학의 내적 요인과 기독교 신앙의 원초적 유형들과 성서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3 1970년대 강력한 유신체제하에서 이에 굴하지 않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예언자적 사명을 다한 기독교 사회운동의  실제적 인면을 살펴보았다.

4) 이러한 1970년대 사회운동 이후로 요청되어지는 문제중 핵심적인 것으로 이데올로기 문제와 마르크스 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대화는 어떻게 이루워져야 할 것인가를
모색해보며 새로운 신학의  정립을 시도해 보았다.

  또한 연구 결과에 대한 요약과 함께 본 연구에 있어서 보완되어져야할 점등을 지적하였다.


 3. 교회의 선교적 기능

  선교는 주님이 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이다.
  이러한 선교의 명령을 받은 교회는 인간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스리시며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시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선교를 교회 밖에서의 기독교인의 활동 또는 교회와는  무관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 기능의 일부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 가치는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의 근거지요,  선교의 중심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 공동체(Missionary Community)이다. 즉  교회는 그 자체가 주인이거나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앞에 순종하는  공동체며  그 중심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고백하며 교회는 곧  선교라는 것이다.

  핸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는 교회가 오순절의 탄생과  동시에 선교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중심이 될 때에는 "쓸모없는 교회"가 될것이며  하나님의 사역 현장이 세상인 것처럼 교회도 세상과 인류에  그  사역의 촤점을 두어야 한다. 즉 전도와 선교가 주요한 기능이다.

  마태복음 28장 17절에서 부터  20절까지가  주님의  대위임명령인데 이는 선교가 주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선교적 사명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그 자손이  계승하게 하셧으며 또 선지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 사명을 받아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세상에서 보냄을 받은 교회 이외에는 다른 교회란 있을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선교 이외에 다른 선교란 있을 수 없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위탁받은 그리스도의 선교의  연속으로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선교를 통해서  존재하였고 또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에밀 브르너(Emil Brunner)도 "교회는  마치 불타는 것으로서  존재 하듯이 선교가 없는 곳에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교회는 곧 선교란는 기본 뜻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작업은 곧 삶을 통한 복음의 구체적인 실현, 보편화, 생활화를 통해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몸된  교회는 주의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선교의 일원이요 하나님 활동에  있어서 도구가 되며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부여받은  교회의  사명은 선교인 것이다.


 4. 선교의 의미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선교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중세기 프란치스칸 수도원에서 부터였다. 이 수도원에 속한 수도사들을 선교사라고 부르는데서 라틴어의 선교(Missio)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그때 선교사란 말은 초대 교회의 사도란 개념과 같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세상을 위하여 일할 사람들을 가르킨 말이다.

  그러한 선교의 개념에는 크게 두가지가 양극을 이루고 있다.  즉 이 세상이 언제 멸망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늦기전에 구조작업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이 사회는 저주받아 곧 멸망하게 되므로 사회 구조 개선에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고 하는 전통적인 견해와 "하나님은 역사 과정 가운데서 일하시며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사회조화의 의미에서 샬롬(Shalom)(헬라어의  의미로  '평화','안녕')의 건설에 있다"는 에큐메니칼 견해인 것이다.

  고전적인 선교 개념은 이방인의 회심, 교회의 설립과 확장,  하나님께 영광돌림의 세가지로 정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교  이해아래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등장하기까지 선교 사업이 수행되어  왔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이 처음 발생된 것은  1952
년  빌링겐(Willengen)국제 선교 대회( I M C )인데, 1961년  I.M.C와 W.C.C가 합류 되면서 본격적인 연구와 발전을 보게 되었다. W.C.C운동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진부한 것으로 배격하고 사회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1960년에는 '인간화'로  1970년에 와서는 '해방의 선교'라는  정치화로 비약 발전하였다.

  호켄 다이크는 "선교는 교회의 선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선교는 전체  역사  속에서 되어지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밖에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주관해 가신다."  고 말했다.

  여기에서 선교의 목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되고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하나님의 샬롬을  건설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더 구체화 한  것이요  구원의 개념을 인도주의적으로 세속화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첫째, 여기에서 구원은 세상 역사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샬롬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샬롬을 증거하고  그런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세계를 절망과 소망이 엇갈려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교의 일터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독일의  게오르규 F.  휘체돔(George F. Vicedom)이었다.

  그는 "선교란 더 이상 교회의 선교가 될  수 도 없고 오직 그의  선교 곧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며  "선교란  하나님께서 오늘도  인간의 구언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말해주는 표적이며 교회가  하는 모든  일즉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일을 선교의 일"  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서 선교 활동의 내용을   선교사들의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역사안에서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할동에 참여하는 모두로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구체화  하는것이요 구원은 마침내 세상안에 나타나는 샬롬이다.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며 선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이 역사와 세계속에  생존하는  전 인류를 그리스도안에서 자기에게로 화해하시는 것이다.


 5. 선교의 성서적 근거 / 구약

  선교에 대한 개념은 전통적 개념과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불문하고 다 그 근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바로 이 하나님이 선교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속에  직접  침투하시어 그들을 고통 가운데서 돌보셨고 출애급과 해방의 역사를 주관하셨다.  구약 성서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창조 그리고 우주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창12장 부터는 인류중 특별히 선택받은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고 함으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구속사적 관계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땅의 모든  족속"이란  모든종족과 국가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신  목적은   만민적이고  전 인류를 포함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범죄를 말할때 그의 교만과 우상 숭배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태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한것이 죄로 지적되고 있다.(행16;49)

  모세에 의하여 주도된 출애급 사건을 볼때,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측면에서 종교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외국의 압제밑에서 자우를 잃고 고통하는 백성을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 보면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선교의 역활은 영적 구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샬롬의 건설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신  가장 훌룡한 본보기이며, 하나님께서 참으시사 그들을 회개하도록 이끄신다
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이탈하려던 한 선교사의 본보기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요나는  그 뒤에 성공적인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사야40-55장을  통해서 볼때 그 종은 온 백성에게 공의를 베풀고(사42;1)이방의 빛이 되어 (42;6,49;6) 하나님의 구원을 온  땅에 전하라고 불러 내셨다(49;6).이와 마찬가지의 소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를 통해 구속자가 오게하고 그들에게 계시가 주어지고 보존하시려는 것이요 그것은 "온 족속"   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보편성(Universalism)이다.

  구약에서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의 표현은  없으나  그 내용은 신적인 지배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이스라엘의  종말적인 희망이며,  이  희망은 낙관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을끌어 올려 그 영광에  참여케  한다는 샬롬, 평화, 구원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는 미래적인 구원과 평화이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정점에 달했다고  볼수 있다.


 8. 정치 신학
  정치신학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정치신학은 희랍의 도시국가, 스토아 철학,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가 국가종교로서 가졌던 정치신학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몰트만은 전자를 가리켜 정치적 우상숭배의 종교로 후자를 가리켜  정치적  십자가의 신학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정치신학의  등장은 1960년대 이후로 '세속화 신학','신의 죽음의 신학'에 이어서  서구신학의 풍토에서 일어난  종말론적 신학의 하나이다.

  이 정치 신학은 1970년 이후에 특히 제3세계 신학을  상징하는 해방의 신학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것은 또한 신학의 정치.사회적 차원과 과제에 대한 특수한  신학적  반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혁명의 신학'과 공통성을 가진다.

 현대 정치신학의 출발때 부터 주도적 역활을 해온 몰트만은 정치신학을 다음 두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정치신학은 새로운 교의학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기독교 신학의  정치적 자의식을 각성시키려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신학은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사변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의 고유한  정치적 실존과 실질적인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둘째로, 정치신학은 희망의 실천론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미래의 궁극적 해방을 희망한다면, 그는 미래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는 미래를 찾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삶의  조건들을 갱신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때문"이라고한다.

  또한 정치신학의 카톨릭 대변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Metz)는, "정치적 신학은 교회 전통과 오늘의 정치, 사회에 대한 이중적 비판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정치신학의 적극적  과제는 종교와 사회의, 교회와 사회의 공공성의, 종말론적 신앙과  사회적인 실천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보니노는 현대 인간 생활은 "정치화"되어있어  우리의 모든  행동이되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갖게되고 이 책임은 개인주의적, 고립적인  방식이 아닌 집단적인 참여의 구조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있다고본다. 즉 개인  윤리의 문제들이 사회윤리의 문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현대세계는  인간이 자율적인 주체인 동시에 전체적인  체계속에 통합되어 외부  결정에  개인이 영향을 받고, 또 여향을 미치게  되므로 모든 결정이 정치적 결정이 되는 것이다.

  더나아가 이것은 현대과학기술과 초국가적 기업에 대한 '정치  편재'현상으로 말미암아, 이 두개의 현상은 경제력을 좌우하게되고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정치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정치는 사라지지않고 보이지 않게 은밀히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복잡한 현실을  소위 객관적인 "과학 기술적 이유"나 "경제 법칙"에 맡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니노는  이러한 상황속에서의  정치윤리의 필요성을 두가지로 말한다. 그 하나는 오늘의 복잡한 세계를 인간적 가치가 통제하는 세계로 만들기  위한  정치 윤리의 필요성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잘못된 정치화 - 복음으로 부터 직접  정치윤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 프로그램까지  이끌어 내리는 - 를 피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치윤리의 필요성이다.  결국 보니노가 추구하는 그리스도교적  정치윤리란 "정치에 대한 윤리적비판"이며, 동시의 "신앙의 정치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9. 정치신학의 기초적인 신학적 입장 /  종말론적 그리스도인

  정치신학이 그 출발점과 표준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 통치의  성취자로서  예수, 그러나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이다. 즉 예수라는  존재가 그  중심이 된다.
  기독교 신학이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로서 이해하기를 참으로  원한다면 예수와 그의 생애를 종말론적 방법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의 법과의 충돌과 구약의 약속들의 성취를 이해하려면 구약의 언약적  역사라는 틀 속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보내진 세상의 해방은 그의 이야기가 기억된 구약의 희망과 자각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빛 가운데서 읽혀질 때라야 비로서 역사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했을때  그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이해가 된다.

  이것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된 매우 오래된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당신이 오실 그 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현대의 종교적인 질문은 "내가 무엇을 소망할 수 있을까?"이다. 이 두번째 질문은 유대인들의 질문과 매우 유사하다. "오실분"이라는 말은  동시에 메시아적인 해방자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상징이었다.

  세례 요한 의 물음에 대한 알려진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본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4-6)였다.

  비슷하게 누가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을 요약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 여기서 미래의 가난 전체적인 질문은 재앙을  총체적 구원으로 바꾸고 사람들을 억압에서 자유로 이끌 "오실 분"에 관한 질문으로 촛점이 맡추워진다.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전한 그의 복음과  병자들이 치료와 죄인의  용서를 통해서 그 자신이 오실분임을 나타내신다면, 또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오실 분으로 안다면 전체적인 구원의 미래와 자유의 왕국은 그로부터 기대해야만 한다.  가난한 자들이  그를통해 복음을 듣는 곳에서, 소경들이 그를 통해 시력을 회복하는  곳에서, 절음발이가 걷는 곳에서,억압받던 자들이 자유롭게 되는  곳에서,죄가 용서함 받는 곳에서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로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현재 상태를 그들의  진정한 미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메시지와 행동들은 메시아

적 예견의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그를 통해서 또 그의 방법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와 있다." 따라서 이미 그의 치료하심, 그리고 구원의 행동은 지금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 역사의  종말은 이미 감추어진  방식으로 역사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되는 아주 다양한 메시아적 타이틀들을 "예수-하나님나라의 예견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예견자라면, 그는 동시에 불가피하게  하나님께 반(반)하는 세상의 세력과 미래에 대해 닫혀진 세상의 법에 대항하는  저항의 표시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부자들과는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죄인들에게 주었고 경건한 척하는 자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열심당원들의  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주되심을 나타냈고, 빌라도는 그를 로마 황제신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예견은 불가피하게 역사적인  저항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고  억압된  세상을해방시킬 수 없다.

  우리가 예수의 이야기를 그의 부활과 다시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빛 가운데서 읽는다면 이것을 더욱 명확히 알게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이것은 전체적인 죽은자들의 부활이 이미 예수의 부활  가운데서 시작됴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미래의  새로운 창조는 이미 시작됐다.
사람들은 부활한 메시아를 믿고 인식하기 때문에 말세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대망하며 모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부터의 부활은 종말론적인 예견으로서 또 부활과정의 진실된  시작으로, 그리고 말세의 새로운 세계 창조의 시작(롬 8:11)으로서 이해 되어야만 한다.


 10. 정치적 성서해석

 정치적 해석학은 역사해석을 통해서  현재의 조건들을  변화시키고  실제적 해방의 수단과 방법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초기의  성서해석은 일반적으로 원문에서 원문으로, 이해에서 이해로,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성서해석이 언약적 역사라는 것과 연결될때 해석의 방식은 약속에서 성취로 라는 것이 된다.
  그것이 소망의 역사를 포함할 때 해석은  "기대에서  실현으로"라는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해방의 기억을 포함할 때에  해석방법은 "억압에서 자유로"의 형식이 된다. 즉 성서를  하나님의  계약사와  인간의 해방사의 증언으로서 읽는다.

  그렇게 읽을 때 하나님의 계약사란 언제나 온갖 금고(금고)로부터인 간들을 해방시킨 역사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해방은 언제나 '위기'와 맞붙어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은 '미래의  능력'으로서  의미된다. 이 미래의 능력은 과거와  현재의  연관속에서 항상 인간들을  자유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또한 정치해석학은 역사에 참여함으로써만 역사를 해석한다. 즉  부름받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서 그 나라 일에 참여하지 않고는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서란 '정치적'행위와 고난 속에서 압제받는 자의으로 볼 때 비로소 이해되며 그때 비로소 정치해석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책임을 자각하게 한다.

  따라서 정치해석학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비판적 이론은 실천에서  해방되어 새로운것을 촉구하며, 비판적 실천은 특정한 이론을 좇으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11. 해방신학

 해방신학은 1960년대 중반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 억압,  착취,불의등의 사회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겠다는 깨달음에서  트기 시작하였다. 해방신학의  대표자격인  구티에레즈는 그의 주저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착취 와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  이라고  말하고있다.

  비록 남미의 상황과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도 가난과 억압과 소외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해방신학의 배경

  라틴아메리카의 여러나라에서 풍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러한  풍요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인구의 5%가 전체재산의  80%소유, 노동자의 형편없는 임금,  인구의2/3가  영양실조상태, 질병에의  시달림, 높은 문맹률 등, 이러한 극한 상황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절감하면서 해방신학은 태동된다.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남미교회의 태도변화는 많은 신부와  평신도들이 가난한 자들의 권익보장을 위한 투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태동되었다. [억압받는자의 교육]이라는 저서를 통해 남미의 도시와  농촌에 산재해 있는 수백만명의 문맹자들에게, '문맹이 가난한 자의  전체적인 자기모습과 인간의 완전한 자기발전 가능성을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문맹퇴치운동을 하게된다.

  1968년 메들린 공회에서는 '해방,정의,평화,가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의 하였는데 그 회의에서는 교회의 주요한 관심사로서  빈곤과억압, 해방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  라틴아메리카의 빈곤의  근원으로서 제국주의와 경제적 종속에 대한 인식, 가난한  자와의 유대에  대한  소임과 불의와 억압을 거부해야할 필요성 등의 내용이 다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해방신학은 태동되었다.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2)


 11. 해방신학

 해방신학은 1960년대 중반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 억압,  착취,불의등의 사회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겠다는 깨달음에서  트기 시작하였다. 해방신학의  대표자격인  구티에레즈는 그의 주저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착취 와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  이라고  말하고있다.

  비록 남미의 상황과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도 가난과 억압과 소외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해방신학의 배경
  라틴아메리카의 여러나라에서 풍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러한  풍요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인구의 5%가 전체재산의  80%소유, 노동자의 형편없는 임금,  인구의2/3가  영양실조상태, 질병에의  시달림, 높은 문맹률 등, 이러한 극한 상황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절감하면서 해방신학은 태동된다.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남미교회의 태도변화는 많은 신부와  평신도들이 가난한 자들의 권익보장을 위한 투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태동되었다. [억압받는자의 교육]이라는 저서를 통해 남미의 도시와  농촌에 산재해 있는 수백만명의 문맹자들에게, '문맹이 가난한 자의  전체적인 자기모습과 인간의 완전한 자기발전 가능성을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문맹퇴치운동을 하게된다.

  1968년 메들린 공회에서는 '해방,
정의,평화,가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의 하였는데 그 회의에서는 교회의 주요한 관심사로서  빈곤과 억압, 해방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  라틴아메리카의 빈곤의  근원으로서 제국주의와 경제적 종속에 대한 인식, 가난한  자와의 유대에  대한  소임과 불의와 억압을 거부해야할 필요성 등의 내용이 다루어졌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해방신학은 태동되었다.


 12. 해방신학의 방법론
  인식론적 전제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독교적  프락시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해방신학은  진리를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일에 더  역점을  둔다는말이다.

  이는 과거의 신학은 복음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사고했지만 해방신학은 먼저 실생활에서 직접 체험해보고 이러한 체험을  근간으로  하여 다시 복음에 대해 숙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사고노선에서 구티에레즈는 "하나님의 신앙은 그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행동하는데서 성립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앙은 믿는 자의 신앙적 행위에 있는 것이지 어떤 신적 존재를 사색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행위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신앙적 복종의 행위에서 이해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신학은하나님의  속성이나 행위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기 보다는  신앙적 복종의 행위에서 이해되고 실현되는 프락시스의 양해를 천명하는 노력이다. 라는  보니노의 주장은 구티에레즈와  일치한다.  신학은 진리를 행하는 신앙적  행위를 도와주는 수단이라는 전제가 해방신학자들의 신학적 방법론뿐 아니라  신학적 내용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것이다.

  이렇게 볼때 해방신학의 인식론적 전재는 진리는 실천을 통해서 도달할 수있다. 즉 진리의 출발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적으로 감독할 수 있는 준거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들은 실제란 이념의  구현화" 라는 이상주의 진리의 관점을  배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상주의적 진리의 관점은 그 진리가 그 진리의  역사적 작용 이전에  그리고  그것과는 독립해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는 "하나님 신앙은 그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행동하는데서 성립한다.  라는데서도  인식론적  존재는 실천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13.  프락시스 신학

  인식론적 존재에서 신학은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신학의 정당성은 내용에서라기 보다는 신학하는 방법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구티에레즈는 "신학적 숙고는 반드시 교회와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부름받고 명령을 받아 들이는 한에서  그것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어야 한다....그것은 역사적 프락시스와 분리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즉  역사적 프락시스로 작용하는 신학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신앙행위에  대한 숙고이며 이 숙고는 해석학적 순환의 전과정을 밟아가는 종합적 행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을 행위에 대한 분석적, 비판적  숙고를 따라 이루어지는 후속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구티에레즈는 이것을 "신학은 뒤에 따라온다  그것은  2차적관계이다.

  신학은 목회자적 활동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활동을 숙고한다. 신학은 목회자적 활동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행위로 고무시키는 성령의 임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때 신학은 신앙의 행위를 위한 성서적계시의 근원을 제시해  줌으로서 목회자적 활동의 방향을 제시해 두고 인간을 해방하는  기능을 감당할수 있게 된다. 해방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추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개념적인 숙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추구하려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사랑, 정의가 무엇이라고 철학적으로 그리고  사변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사랑과 정의는 누구에게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실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어떤 사건에  부딪혔을때 자기 안에서 정확하고  신속한 비판적 숙고 작업을 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예수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바리세인들의  고정된 신학적 확신을 예수는 전혀 개이치 않았던  것이다.  예수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라고 바리세인들에게  물었을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신학을  역사적 상황이나 현실 이전에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예수의 행위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바리세인들의 신학적 확신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주는 예수의 신학하는 방법이다. 다국적 기업의 사회관은  병들어 죽어가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을 고쳐주기 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했고 어떠한 새로운  변화나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을려고  했던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발전이론이나 확신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아니라 외부에서 추상적으로 정립된 일종의 사회학적 확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나 확신은 인간의 인간적 삶을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자들의 이익추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허구적인 것이다.   이 이론때문에 라틴아메리카는 파멸직전에 놓이게되었다고 폭로하는 새로운 사회과학적인 종속이론과 혁명이론은  인간학적 학문으로서  신학자들의 역사적 명상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으며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교회의 전략은 주관적,임의적 태도와 애매모호한  태도를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해방이라는 지극히 인간학적 목적을 중심으로 신학과  사회과학이 정복 될때 해방을 위한 노력은 객관성을 띠게 된다. 극히   주관적으로  흘러버릴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신앙의 행위는 과학의 도움으로 객관적인  행위로서의 방향을 잡게 되어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으며 그 세계를 위해 투쟁하는 전략에서 또한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있다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이 편만해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파헤친 과학의 발견은 구원사적 의지를 가지고  기독교의  해방사상과 일치하게 되고 과학은 그런 방향으로 계속  진척되도록  격려를  받게될 것이다.

  구티에레즈는 프락시스 구원의 개념의 구원이 기독교 자체내에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계시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응답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응답은 단지 게시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자기 실생활 속에서 책임있게 실천해 가는 것이라
한다.

  해방신학은 프락시스의 참여라는 지점에서 출발하게 되었고 바로 이점에서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신앙을 실천하는 노력을 통해서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게시해 주신 해방의 희망을 숙고함으로서만 신학의  존립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프락시스를 그  출발점으로  성장함으로서해방신학은 몇가지 점에서  전통신학과의 차이점을 나타낸다. 첫째,  전통적인 신학이 교회와  교회의 교리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달리 해방신학은  상황에서 시작한다.

  둘째, 해방신학은 신학적 진리가 연구만을  통해서  습득될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려 노력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 습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전통적인  신학과의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프락시스를 그 출발점으로 하는 해방신학의 중요 공헌중의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그러한  시각에서 신앙을 실천해 보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변혁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도록 도와주고  또한  교회의 사명을 사회의  밑바닥에서  수행하도록도와준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14. 해방운동

  '해방'의 개념에 관해서는 몇가지 차원에서 분석한다. 첫째, 해방은 압제받는 대중과 사회계급의 염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경제,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충돌적인 면을 강조하며 그들을 부강국이나  압제계급과 투쟁하는 상대역으로 등장시킨다. 그러므로 이 해방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이 안고 있는 비극적이고 투쟁적인  면모에 대해서 허위의 허상을 그려 놓는 '개발'이라는 개념에 대한 상대적인 것이다. 즉, 개발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해방운동을 창출해낸 것이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이러한 개발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사회, 정치, 문화면에서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것을 어떤 사회계급이 다른 계급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체제와 지존질서의 테두리안에서 변화를  시도하던 능력은  기존 상황을 오히려 다지는 결과만을 낳은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상황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일, 즉 현존하는 사유재산제도의 개혁, 피 착취계급의  세력신장, 인간예속을 무너뜨릴  사회혁명만이 기존사회를 새로운 사회,  사회주의적 사회로 변화시킬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두번째 단계로 구티에레는 해방은 인간실존과 역사에  대한  이해로 일컫는다.   오늘의 역사는 모든 제약, 인간의  자아실현을  훼방하는 모든  장애로 부터의 해방, 인간의 자유의 행사를 저해하는 온갖 요소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염원이 불타고 있는 역사라고 본다.

  그것은 동서남북 세계 어디서나 인간이 진정한 인간실존과,  자유로운 생활과, 인류가 역사에서 쟁취하여 얻은 활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여건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투쟁하여 손에 넣는 것임을 그 어느때보다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었다는 점이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해방은 집단적, 역사적 차원 뿐만  아니라   인격적,심리적 영역의 해방이 서로 통합되어 져야 한다. 인간이 비로서  인간답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생산구조를 도모해야할 뿐만 아니라  프로이드가 말하는 심리적 영역의 억압에서도  해방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적 자유에의 실현을 위해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을  상대로 투쟁해야 한다고 구티에레즈는 말한다.

  그리하여 체제의 근본개혁, 곧 사회 혁명을 실현하고 더 나아가  지속적 창조, 인간이 되는 새로운  길,  영속적 문화혁명을 목표로 해야한다.   고 말한다. 그리하여 역사는 곧  인간해방의 과정이며   해방은 실존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해방'운동은 곧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해방운동은 해방의 신학적 개념을  보다 주요한 해방운동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세번째 단계의  해방운동이다.

  성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행업을 하나의 해방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구티에레즈는 말한다. 갈라디아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셔서 우리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한 바울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바는 자아를 향한 이기적인 전향, 곧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 죄는  인간세계의 모든 불의와 압제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데, 이웃을 사랑하기를 거부함이며, 종국에는 주님을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웃과의 단절 즉, 이웃의 억압과 압제에 무관심하다면 이것이 곧  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운동은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에서 가장 깊은   의미와 완전한 실현을 발견할 수 있고 이러한 신학적 해방을 해방운동의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해방신학자들의 신학방법의  근거요 희망이다.


 15.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 /  과정적분석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장적 분석

 해방신학이 긍정적인 많은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 원리중 상당수가 취약한 기반 즉, 인간과 그의 세계에  대한  과장된 분석을 그 기초로하고 있다고  조세 B. 폴리가는 말한다. 해방신학의 경제분석가들은 인간의 기본문제를 경제적인 것으로 본다. 더우기 그들은 물품과잉의  이론을 고수한다.

  그들은 인구폭발, 토지와 천연자원의 한계를 경제적문제에 대한 원인들로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를 유토피아 사회로 보는 그들의 관점은 비현실적이고 비성서적이다. 계층이 없는 평등사회에  대한 모색은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교묘한 하나님의 나라를 모색한다는 구실아래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악순환의 덧에 걸려들게 한다.

  하나님은 더이상 그의 나라의 유일한 창조주가 아니다. 인간이 그의 나라의 설립에 참여한다. 죄에도  불구하고 인류평등주의가  이생에서 성취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인간들의  욕구를 채워주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 사실은 해방신학자들이 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방신학은 인간화라는 목표아래 해방과 구원을 동일시하고 죄를 사회적 규정의 면에서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과 해방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구원은 창조와 타락의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생각되어야지 이런  원초적인  문제보다는 현실상황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성격을 띈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의 유죄성을 축소시키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지 사회에서 형성되는 죄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죄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은 해방신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유죄성을 축소시키고 그 죄책을 제도에 전가시킴으로 그 책임을  면하는 도피처를 그에게 제공하였다. 개인적인 죄의 의미는 극소화되고 사회적 세력들이 죄인이 된다.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은 인간의 성장을 더욱 낙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생산이 높아진 만큼 인간이  향상되고 개조되어질때 해방에  보다 참여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점은  어느정도는 맞으나  과학적으로 인간의식이 성장과 비례해서 해방이  온다는 것을 검증할 수 없거니와, 인간은 낙관적으로 성장하여  계속적으로 그 향상이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인간향상은 의식화작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6.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 /  지나친 프락시스의 강조
 지나친 Praxis의 강조

  해방신학은 Theory보다 Praxis를 너무나 강조했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속에서 나타나 모순을 Theory의 확립에 기초한 것 보다는  Praxis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함으로서 행동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실천과 함께 진리의 추구 작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실천안에 있는 신학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신학의 모순이 그대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신학은 Theory와Praxis가 함께 나타나고 Theory를 근본으로 하여  Praxis가  전개되는것이 바로 신학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해방신학이  Theory보다는Praixs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신학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해방 신학자들은 Praxis가  없는 정통교회는  사실상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은 추상적 신앙 보다는 행동적 신앙이라고 신앙보다는 행동적 신앙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행동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활성화를 목표로 삼는다.  프락시스가  진리의 규범이 된다. 진리는 관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행동을 통하여  파악된다. 진리는 효과를 나타내는 그러한 것이다. 이 진리를 함축하는 행동은 언제나 가난한자와 피압박자의 해방을 위한 행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그리스도적 프락시스를 통한 신학의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문제는 프락시스가 없는 Theory가 문제가 되듯이 Theory가 없는 Praxis역시 사상적인 정당성을 상실하기 쉽다는 논리를 간과하기 쉽다는 것도 사실이다.


 17.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 /  새로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
  해방신학의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판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운동이 뒷바침하고 있는  구국적이념으로서 설정한'새인간'과 '새사회'이다. 이 새인간은 모든 사회,  정치적구조의  예속에서 해방된 인간이다. 이러한 새인간이 출현하는 해방운동은 압제받는  국민들 손으로, 자발적으로 수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새로운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에 의해서며, 사회적인 예속에서 해방됨으로서가  아니라  더 나아가 새인간은 영적본질에 있어서도 새롭게된 인간이나 이러한 관점을 약화시키는 점이 있는  것이다.  물론 총체적인 해방의 개념속에는 모든 예속에서의 해방이  포함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영적본질의 회복이라는 이 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새로운 사회는 그 특성을 알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미래의  어떤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현  역사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왕국에 접근하고 있으며, 도래하시는 구세주완의 계명과 율례에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중생한 교회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해방신학자들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불확실성을 헛되이 조절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왕국을 반영하고 있는 중생한  교회 안에서 새로운 사회형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될 수 밖에 없다.


 18.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 / 계급 투쟁론과 조건적 폭력에 대한 비판

  계급 투쟁론과 조건적 폭력사용에 대한 비판

  해방신학이 모든 신학의 주제를 압박자와 피압박자의 이분법을 통해 서술 하려고 하는 그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피압박자에게는 하나님이 같이하고 압박자는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식의 논리는 맞지 않는다.

  어떻게 온 인류를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를 전제와 근거로 하는  기독교신학이 인류를 서로 적대하는  두개의 계급으로 이분할 수 있겠는가?  세계의 역사를 계속되는 이분법으로 본다면 역사속에서 언제  투쟁이  끝나고 해방이 오겠는가? 신학은 전체성과 보편성을 띄고 주체성을 띄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이  구체적  상황만을 강조하고 보편성을 상실한다면 신학이 존재하겠는가? 또한  해방신학자들이 계급투쟁의 근거를  마르크스의 정치적 계급투쟁설에 드는데, 인간의 역사는 압박자와  피압박자간의 투쟁이고 결국 피압박자의 해방으로 이어진다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은 신학의 방법으로는 적당치 않다고 본다. 이것은 결국 해방신학자들이 인간과 사회 모두에 있어서 바라는 바 변화를 창출할   복음의 능력에 대한 신앙을 잃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인간 노력에 호소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시이다. 대응 폭력은 보복과 다름없는 것으로 성서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그 악을 연속화  시킬 뿐이다.

  힘의 사용을 통하여 수립된 사회 제도는 힘의 사용에 의하여 유지될것이 뻔하다. 최근의 역사적 사건들은 이러한 결론을  정당화시켜  준다. 쿠바, 베트남, 캄보디아, 이란의 경우들이 이를  충분히   증거해준다.그리스도 시대의 열심당원들은 그리스도의 재가를 얻지  못했다.
사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권고하셨다.


 19.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 /  마르크스주의적 성서해석 비판

  마르크스주의적 성경해석 비판
인간의 역사와 운명에 관한 계시의 중심으로서 그리스도와 성경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에 비추어 문화적인 배경을  조명해  보는대신에  구스타보 구티에즈와 같은 해방신학자들은 현재의 사회, 정치적 상황들이  성경자료를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진다.

  즉 이런 관점을 통해서 신앙은 정치적인 측면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신학 연구란 반드시 성령 계시가 아닌 역사적  상황에 근거를 두어야만 하며 미리 약속했던 사회 재건을 위해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사회,  정치적 상황에 부여했다는 것은 문화적 현상을 유토피아적  세계관에  철저히복종하는 것은 비해방신학을 '현상 유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추종이며,  사실상  제국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과 기술문명을  내세우고 선교를 위한 기업이라고 여겨 한탄한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 사회 윤리에 과학적인 면을 제공했다고 말하며, 올바른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려면 구체적인  역사  상황에 사회주의 구조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 정립을   위해서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함으로써 해방신학은 성경의 계시를 오염시키고 제한시키며, 붕괴시켜 버린다.


 20.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

  먼저 교회의 선교 대상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한 이해를 갖게  해준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 그 선교의 대상을 논할때, 단순히 개인구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과  세계,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역활을 하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갖게 해준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경륜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오늘의 삶의 자리에  대한  보다정확하고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하여준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 실천(Praxis)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신앙함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점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대한 전적 응답일때  그것은 삶의 모습에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실천은  모든 불의와 죄악의 상황과 모순 소외화 억압받는  자와연계함을 이끌어  줌으로써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신앙의  행동을낳게 해준다. 더 나아가  타인을 위한 봉사에로 그리스도인을  부르게된다.

  해방신학은 죄와 모든 악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봄으로서,그러한 불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여 준다.

  해방신학은 보다 총체적인 구원개념을 설정함으로서 전인해방에  관심을 가지게 하며, 인간과 인간이 머물고 있는  현실세계  자체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하는 것으로 존중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개념은  인간을 보다 형제애로서 친근히 대할 수 있도록 이끌고  그럼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여 준다.

  해방신학은 교회가 철저히 교회본위의 관점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상을 정립시켜 준다. 이것은 오늘 선교 1 세기를  넘어선  한국교회가 지향해야할 목표로 제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해방신학은 또한 미래뿐만 이니라 현재의 중요성을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먼 피안의 종교가 아니라 현실을 강조함으로서  '오늘 여기서부터'라는 현재의 연속성속에 있는 종말적 신앙의 터를  제시하고  있다.  이점은 현재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 옳바로  응답받고 살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이현재속에 체험되어질  수  있는것으로 신앙의 현재성을 말한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라는 특수한 형편과 상황에서 생겨난 신학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배경이 비록 역사적, 사회적 특수한  배경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선포하고 인간본래적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사랑의 행위에서 나온 신학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해방신학의 여러가지 약점들 즉,앞에서 논했던  인간본성적 죄성에 대한 지나친  관대성,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구원과 해방에 대한 편협적 해석,조건적 폭력에 대한 묵시적 동조  등의  문제점들을 계속해서 비판받고 검토되어 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 바로 구원이라는 등식은 자칫 해방신학의 교만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은 가난한자와 피압박자 상태를 개선하는 주의를 그리고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도록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세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해왔고 앞으로 할것이라고 본다.그리고 전통적인 신앙이이기보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데서 기인하는  교회본질적 사명과 존재의 의에 대한 무책임성과 모호성에 대해 새로운  자각과  충격을 던져 하나님이 자신을 던져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대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이도록 촉구했다고 하겠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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