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보는 희년

 

희년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 부쩍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 기독교 안에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된 때부터이다. 특히 남.북이 갈라진 지 50년이 되는 1995년이 분단이 끝나는 해, 곧 통일의 원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에서는 남과 북이 나뉜 지 50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 희년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3차 글리온 회의에서 북한 교회가 여기에 동참하였고, 놀랍게도 북한 정부 당국마저도 이 희망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있다. 여기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희년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서의 희년


  1) 희년법이 규정한 희년이란 어떤 해인가?

  희년에 관한 언급은 구약성서 레위기 25장 8절 이하에 나와 있다. 먼저 8-13 절의 본문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13)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 ({개역} 레 25:8-13)
 
  위의 진술 내용 중에서 특히 8-10절에 모호한 점이 있어서 주석가들이 이 부분에서 본문 해석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고, 견해도 여러 가지로 갈라진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희년 계산 법이다. 희년이 49년마다 오는 것이냐 50년마다 오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희년법이 역사적으로 실천된 법이었느냐, 아니면, 다만 하나의 이상일 뿐이었느냐 하는 것도 문제로 제기되어 왔지만 본문 주석에서의 일차적인 과제는 희년의 계산 방법이다.  

  "일곱 안식년을 계수하라"(8절)는 것은 안식년을 일곱 번 세라는 것이므로 이 말 자체에 어려움은 없다. 이미 레위기 25장 1-7절에서 매 칠년마다 "땅의 안식년"이 된다고 하는 언급이 있으므로,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는 것은 7x7=49 라고 하는 수학적 계산이므로, 독자들은 이러한 계산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칠년이 일곱번"[7x7]이라는 말과 "안식년 일곱번"[(6+1)x7]이라는 말은, 같은 내용을, 표현을 달리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표현을 달리하여 반복하는 점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데, 8절에서 말하려는 것이, 사십 구년째인 일곱번째 안식년이 되면 그 해가 곧 희년의 시작이란 말인가, 아니면, 일곱번째 안식년이 끝나서 사십 구년이 지나고 나면, 희년이 시작된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곧 두 경우 모두 안식년을 일곱 번 세면 "사십 구년"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시간적으로 "사십 구년"이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 끝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식년을 일곱번 세어서 제 사십 구년째 해가 시작되는 해가 희년을 말하는 것이라면, 일곱번째 안식년 곧 사십 구년째 해가 희년이 된다. 그러나, 안식년을 일곱번 세어서 제 사십 구년째 해가 끝난 그 다음 해가 희년임을 말하는 것이라면, 제 오십년째 해가 희년이 된다. 분명한 것은 8절이 사십 구년째 해가 "희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그런 것에 반해, 10절과 11절과 12절은 제 사십 구년째가 아닌 제 "오십년째 되는 해가 희년"이라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그대로 9절 이해에까지 연결된다. "사십 구년"의 시점이 어디냐에 따라서 9절에 언급된 속죄일이 "사십 구년째"가 되는 안식년의 속죄일인지, "오십년째"가 되는 해의 속죄일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매년의 속죄일이든지, 사십 구년째의 속죄일이든지, 오십년째의 속죄일이든지, 매해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다. 속죄일에 관해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30)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31)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2)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레 23:26-32)  


  여기 언급된 여느 해 속죄일 행사와 레위기 25장 9절의 속죄일 행사 사이에 차이가 있다. 레위기 25장 9절의 속죄일 행사에는 다른 여느 때 속죄일과는 달리 "나팔을 분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언급하고 있다. 일곱째 달 열흘날 나팔을 부는 것으로 희년이 선포된다. "나팔(sofar)"은 숫양의 뿔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도 독자들은 몇가지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여느 해 속죄일에는 나팔을 불지 않는가? 그래서 나팔을 부는 속죄일은 희년을 알리는 속죄일인가? 속죄일에 나팔을 부는 것으로서 희년이 시작되는가? 9절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9절은 단순히 희년을 마지하는 속죄일(욤 키푸르)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느 속죄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9절은 여느 속죄일을 말할 문맥이 아니다. 여기 속죄일은 지금 희년을 말하는 맥락에서 언급되는 것이므로 이 속죄일은 희년의 속죄일을 일컫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 희년이 사십 구년째의 희년인지 오십년째의 희년인지만 여전히 문제될 뿐이기는 하지만, 여기 속죄일이 희년의 속죄일인 것은 그 맥락에서 분명하다.    

  "희년"이라는 말은 10-13절에서 나온다. 그리고 "희년"은 "제 오십년"이라는 말과 관련되어서 나온다. "(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13)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

  희년(禧年)은 한자를 풀이해 보면, 복(福)되고 길(吉)한 해이다. 이 낱말의 영어 대응 단어 쥬빌리(jubilee)는 히브리어 '요벨(yobel)'의 음역이다. '요벨'은 '수양' '수양의 뿔' 혹은 '수양뿔로 만든 나팔'이라고 알려져 있다. 악기의 일종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 어원과 일반적인 의미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우리말 '희년'은 히브리어 '슈낫 요벨'(요벨의 해)을 번역한 것이다. 

  위의 10-12절에서 보듯이, 희년은 50년만에 한번씩 온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40여 년의 광야 유랑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지파별로 각 지파의 크기에 따라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게 된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된 그 해를 기점으로 하여서, 칠 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센다. 이렇게 일곱 번의 안식년을 맞아서 49년을 보내고, 50년째 되는 해의 일곱째 달 십일에,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서 온 땅에 희년을 알린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히브리인들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땅을 사유재산으로 삼거나 필요 이상의 땅을 가져서 땅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그들의 이상은 각 집안이 똑같은 조건에서 살림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못 사는 사람은 땅과 집과 심지어는 노동력인 몸까지도 팔려고 내놓게 되고, 이렇게 내놓은 땅과 집과 몸을 잘 사는 사람들이 사들이게 된다. 여기까지는 허용된다. 그러나 땅과 집과 몸을 판 그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사이가 너무 벌어지고, 마침내 평등 공동체가 파괴된다. 그래서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고, 팔린 땅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로 되돌리고, 몸을 팔아 종이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 "제 오십 년"이라는 것은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던 히브리 사람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간 해를 기점으로 하여, 즉 땅을 '영원한 유산'으로 분배받은 바로 그 해를 기점으로 하여, 매번 50년이 되는 해를 말하는 것이다. 왜 50년을 주기로 정하였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유산을 잃거나 늘리거나 하는 불평등의 발생은 인정하되, 그 지속 기간은 한정시킨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그런데 50년이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라"(10절)는 것이다. 여느 해와는 달리 구별하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3절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창조하는 일을 끝마치고, 일곱째 날 쉬시면서,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일이 있다. 이것은 한 주간 주기에서 어느 하루를 거룩하게 하여서, 특별히 "우리의 살림살이를 위한 노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희년에도 사람의 이기적인 욕심을 제한하거나 비참해진 상태를 중단시키고 자유를 선포하는 특별한 뜻이 들어 있다.

  다음으로, "자유를 공포하라"(10절)는 것이다. 묶인 사람에게 자유(드로르)를 주는 것이다. 이 자유, 이 해방은 누구에게 선포되는가?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즉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공동번역}) 선포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선포되는가? "땅"에서 선포된다. 역사 위에, 시간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이 선포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저마다 제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간다. 누가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돌아가라'이다. '돌려보내 달라'가 아니다. '(노예된) 너희가 스스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여기 '유산'이란 자기가 노력하여 벌어들인 재산이 아니라 그저 분배된, 그리고 영원히 물려받고 물려주는,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가문의 몫'이다. 가문의 재산이다. 이것은 대대로 물리어 내려오는, 가문이 함께 공유하고 관리하는 가문의 재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윤 추구의 상행위를 하여서 벌어들인 재산과는 구별된다.

  저마다 제 유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 한 편으로는, 흩어진 가족 구성원들이 모이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바로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똑같이 나누어 받은 그 처음 상태로 회복됨을 뜻한다. 사람들이 상속받은 집과 땅을 떠나서 타향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은 '가난' 때문이다. 살다 보니 가난해져서 물려받은 땅을 파는 수밖에 없게 된다. 땅을 팔았으니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주택을 팔아 넘기고 고향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성곽 도시 안에 있는 주택'과 '들에 있는 시골집'으로 나뉘는데, 들에 있는 집은 들, 곧 밭의 일부로 여겨진다. 유산으로 받은 땅과 집을 팔고 나면 자연히 남의 집에 의탁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희년이 되어 해방이 선포되면, 고향과 친족을 떠난 이들이 자유인이 되어 본래 상속받은 그 땅과 집으로 돌아가서, 소유권을 다시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희년에는 분배 받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규정과 함께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규정이 함께 있다(11절).


  2) 땅과 집과 몸은 하나님의 것

 
희년법에 따르면, 물려받은 땅은 일시적으로만 팔 수 있을 뿐, 영구적으로 팔아 넘기거나 사들일 수는 없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고대 이집트에서는 땅은 왕의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토지는 왕과 왕궁 성소의 것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땅 위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식객에 불과한 것이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란 말은 땅이 왕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국가나 국가 종교의 것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나 기관이나 단체도 땅에 대해서만큼은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땅이나 집은 먹을거리를 내는 농토와 주거용 대지를 뜻한다. 땅은 생산 수단이다. 이 생산 수단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사유재산으로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성서 시대의 이스라엘은 생산 수단인 땅을 영구히 매매하는 것을 합법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서 함께 발견된다. 제사장 전통에서는 땅의 영구 매매나 무제한적인 사유화를 법으로 금하고(레 25:23-55), 예언자 전통에서는 땅을 영구적으로 매입하거나 사유화하는 부자들을 규탄하는 형식으로 땅의 사유화를 불법화한다(미 2:1-2).

  물려받은 유산인 땅을 일시적으로 팔 수는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개념대로 말한다면, 일정 기간 땅을 임대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임대 계약과 다른 것은, 희년법에 따르면, 판 땅은 판 사람의 형편이 허락되면 언제든지 되돌려 살 수 있다는 점이다. 혹시 되돌려 사지 못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본래 주인이 소유권을 회복한다(레 25:24-28).

  희년법은 집도 땅처럼 아주 팔아 넘기거나 사들이거나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곽 도시 안에 있는 주택과 성 밖에 있는 시골집에는 차이를 두고 있다. 성곽 도시 안에 있는 주택을 팔았을 때에는, 판 지 한 해가 지나면, 무를 권리가 없어지고 만다. 판 사람이 되돌려 살 수 있는 유효기간은 일 년인 셈이다. 그러나 성 밖에 있는 시골집은 땅과 같은 것으로 쳐서, 판 사람은 그 집을 어느 때나 무를 수가 있다(레 25:29-31). 

  땅이나 집이 언제나 무를 수 있는 것이 듯이, 종으로 팔린 몸도 언제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은 희년이 될 때까지 여유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종살이를 하면서 살 수 있다. 가난한 동포를 종으로 데리고 있는 사람은 희년이 되면 그 종을 내보내서 자기 지파에게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5:35-43). 몸의 경우 어느 때나 무를 수 있다는 명문화된 규정은 없다. 그러나 희년법 안의 '몸'에 관한 규정은 가난한 이를 보호하는 규정이지, 종을 부리는 부자의 편의를 위한 규정이 아니다. 동족이 부자 이방인에게 몸이 팔려 갔을 때에 그를 데려오도록 하는 규정(레 25:47-55) 안에는, 몸의 경우도 언제든지 무를 수 있도록 명문화되어 있다. 이것은 동족끼리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라도 '가까운 친족'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고, 상속받은 토지와 집을 되돌려 살 수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확대 해석이 가능하다.


  3) 희년 이전이라도 넉넉한 이들이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응급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희년법은 가난한 사람 곧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희년이 되기 이전이라도 넉넉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어떤 배려를 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가난하게 되어서 땅이나 집이나 몸을 팔았을 때에, 일차적인 응급조치는 그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 와서 팔린 땅이나 집이나 몸을 도로 사는 것이다. 그 가까운 친족이 바로 '고엘' 곧 '유산 무를 자' 혹은 '친족 의무 수행자'이다. '유산 무를 자'라고 할 때에, '유산'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과 사업을 일컫는다.

  '무르다'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산 물건을 되돌려 주고 값으로 치른 돈을 되찾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물건을 산 사람 쪽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년법에서 '무르다'는 말은, 가난하게 되어 할 수 없이 밭이나 집이나 몸을 판 사람이 그 판 것을 도로 찾기 위하여, 물건 값으로 받은 돈을 자기의 부동산을 산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판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을 뜻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산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하다' 혹은 '친족 의무를 수행하다'라는 표현은 다음에 말하는 네 가지 일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친족이 아내를 홀로 남기고 고인이 되면, 고인의 가까운 친족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그를 아내로 맞이하여서, 고인의 이름과 유산을 이을 아들을 낳아 주는 경우다. 이 때에 '유산 무를 자'란 바로 고인이 된 친족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데려가는 친족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룻 3:13).

  둘째는 친족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어서 유산으로 받은 밭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을 때에, 가까운 친족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나서서, 그 밭을 다시 되돌려 사서 본래의 주인의 소유권을 회복시켜 주는 경우다(레 25:26, 33; 룻 4:4,6).

  셋째는 어떤 사람이 가난해져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어느 누구의 종이 되었을 때에, 가까운 친족 가운데에 한 사람이 그 종의 주인에게 몸값을 갚아 주고, 그 친족을 데리고 와서 다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경우이다(레 25:47-55).

  넷째는 친족 가운데 누가 억울하게 살해되었을 때에, 그 가해자를 잡아죽여서 원수를 갚아 주는 경우이다(민 35:19-27). 이렇게 원수 갚아 주는 것도 역시 '고엘'의 임무다. 이 경우에, 구약성서는 그 원수 갚아 주는 사람을 '유산 무를 자'라 하지 아니하고 '피를 보복할 친척'이라고 한다.

  위의 네 경우에서, 첫째와 셋째는 '유산 무를 자'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아니하다. 네 가지 경우를 폭 넓게 담으려면, '고엘'을 '친족 의무를 수행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람이 가난하게 되어 땅이나 집이나 몸을 팔 경우가 되면 이처럼 '고엘'이 응급조치를 취하여서, 그 친척을 구하여야 한다. 그런 뜻에서 '고엘'은 나중에 '구원자'라고까지 그 의미가 확대된다.

  위에서 이미 잠깐 언급하였지만, 유산이나 몸을 판 사람은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판 것이므로, 그 유산이나 몸은, 자신에게 힘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언제든지'란 말이 레위인의 집과 관련되어서만 나오기는 하지만(레 25:32), 일반인의 밭이나 집이나 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 규정의 문맥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고엘'이란 바로 '되돌려 사는' 사람이다. 판 것을 물리는 것은 고엘이 대신 해주거나 판 사람 자신이 능력이 생겨 스스로 물리거나 하는 것이다.

  이상 두 가지 응급조치는 가난한 사람 쪽에 언제든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성곽 도시 안의 주택은 무를 수 있는 유효기간이 일 년이다. 그러나 팔아 버린 밭이나 집이나 몸을 되돌려 사줄 친척이 없거나 스스로 되돌려 살 힘이 없으면 희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밭이나 집이나 몸을 팔 때에,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절대로 '억울하게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이다(레 25:14-17). 가난한 사람이 팔려고 내놓은 밭을 살 때, 그것을 사줄 수 있는 부자는 그것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을 '속이는 행위' 곧 '억울하게 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레 14:17). 가난한 사람이 아쉬워서 팔려고 내놓았다고 하여서 함부로 값을 깎아 내리는 것은 그 가난한 사람을 속이는 일이고 억울하게 하는 일이다. 다음 희년까지 햇수가 얼마 남지 않아 경작할 햇수가 적으면 적게 내겠지만, 아직 경작할 햇수가 많으면 사는 사람은 당연히 값을 많이 내야 한다. 그래야 파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소유를 산 부자는 판 사람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물려 줄 각오를 하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의 몸을 산 사람은 그를 '나그네'나 '동거인'으로 여기고서 데리고 살아야지, '종' 부리듯 부려서는 안된다(레 25:35-43). 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부자는 자기에게 팔려 온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이자 돈을 놓아서도 안되고, 먹을거리를 '장리'로 꾸어 주어서도 안된다. '품꾼'이나 '동거인'처럼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자식들과 함께 집에서 내보내서 자기 지파에게로, 상속받은 땅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레 25:40-41).


  4) 희년법과 유사한 법들


  출애굽기(21:2,5,26-27)와 신명기(15:1-18)에도 희년법이 규정하는 것과 비슷한 규정들이 있다.

  출애굽기 21장 1-11절의 종에 관한 법령에 따르면,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을 때에 칠 년이 되면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주인은 종에게 어떤 보상을 해줄 의무는 없다(2절). 만일 그가 종으로 들어올 때에 아내를 데리고 왔으면 아내도 함께 데리고 나가게 하여야 하며, 주인이 그 종을 장가 들여서 그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그 아내와 자식들은 주인의 것이므로 그 종은 자기 혼자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종이 자유인이 되기를 싫어하면,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서 영원히 종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6절).

  칠 년이 되지 않았을 경우라 하더라도, 과실치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그 보상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과실치사 및 과실치상에 관한 법령에 따르면, 자기 남종이나 여종의 눈을 때려 멀게 하였으면 그 눈 대신에 종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하고, 또 자기의 남종이나 여종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 이 대신에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한다(출 21:26-27).

  신명기에도 종에게 자유를 주는 규정이 있다(신 15:12-18). 동족인 히브리인이 남자건 여자건 종으로 팔려 오면 육 년만 부리고 칠 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21장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신명기 법전은 종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에, 빈손으로 내보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양떼와 타작마당에서 거둔 것과 솜틀에서 짜낸 것을 한 밑천 되게 마련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희년법과 마찬가지로 이런 법의 신학적 근거는 출애굽 신앙이다.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그 때를 생각하고, 또한 거기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생각해서 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규정을 지키라는 것이다(신 15:15).

  신명기 법전은 또한 희년법과 유사하게 '빚을 삭쳐 주는 것'에 관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칠 년에 한 번씩은 남의 빚을 삭쳐 주도록 되어 있다(신 15:1). 이 명령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으며, 이 요청에 응하여야 할 대상은 약속의 땅을 유산으로 받은 백성이다. 땅 점유 전승이 이 법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본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백성은 그 위에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한 것이라는 희년법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여기서는 하나님의 토지를 관리하는 관리인들로서 백성이 피차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고 있다. 빚을 삭쳐 주는 해를 칠 년에 한번씩 규정한 배후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해와 땅 위의 풍요한 삶에 대한 약속이 함께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땅 위에서 가난한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땅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이 어차피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신 15:11). 그런데, 동족끼리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고 손을 뻗어 도와주면, 다른 민족에게 돈을 꾸어 줄지언정 남에게 돈을 꾸는 일이 없을 것이며,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있어도 남에게 다스림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이 규정에 붙어 있다.


  5) 이런 법들은 언제 나왔으며, 누가 전승시켰으며, 어떻게 실시되었는가?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이나 출애굽기 21장의 종에게 자유를 주는 규정 및 신명기 15장의 빚 삭쳐 주기와 종에게 자유를 주는 규정 등은, 시행 세칙에서는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법정신 곧 법규의 실천에서 언급되는 '해방' '자유' '빚 없애 버리기', 이상 세 가지의 요소는 동일하다. 그리고 이러한 법규 배후에 '출애굽 전승'과 '땅 분배 전승'이 함께 그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도 동일하다. 또한, 구조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이 이 법의 실천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여기에 응답하도록 요청 받고 있으며, 그 결과는 땅위에서 누리는 안전한 삶이라고 하는 약속의 내용도 동일하다.

  이러한 법규들이 출애굽기, 신명기, 레위기 등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레위기의 희년법 안에 담겨진 '해방' 선포 전승은 일찍부터 생긴 전승이며, 레위기 25장은 오랜 발전 과정의 마지막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레위기 25장 자체의 다양한 문체들 역시 본문의 성장 단계를 실증한다. 법규 선포 대상이 단수 2인칭으로도 나오고 복수 2인칭으로도 나온다(예를 들면, 레위기 25장 안에서 8-13, 17-24, 35-55절 등은 복수 2인칭 '너희들'이고, 14-16, 25-34절은 단수 '너' '네가'이다).

  희년법의 주요 관심사가 토지에 대한 소유권 회복인 만큼 이 법의 발생 연대를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 이후로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희년법이 성안에 있는 영구 건물과 성 밖에 있는 임시 거처를 구별한 것을 보면,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이 벌써 성 안에서도 살고 있다는 전제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역사 배경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여러 도시 속에 들어와서 살게 된 왕국 시대 초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희년법 자체의 내적 증거와 자료 분석이 보여 주는 외적 증거를 종합하여 보면, 이런 법규는 이미 통일 왕국 초기부터 생겨나서, 바빌로니아 유배기에 최종적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출애굽기(21장)에서 '자유'가 선포되기 시작하여, 신명기(15장)에서는 '자유'와 함께 '빚 삭쳐 주기'가, 그리고 레위기(25장)에서는 부동산 및 몸의 소유권이 회복되는 '해방'의 선포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의 측면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보호법이 줄곧 전승되어 내려왔으나, 놀라운 사실은 이 법규들이 구체적으로 실시된 사실을 확인하여 볼 만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혹시 이러한 법이 실제 적용이 없는 한낱 이상적인 법으로만 남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예언서의 희년 정신


  1) 하나님이 선포하였으나 사람이 지키지 아니한 희년

  구약성서의 종교 문헌이나 법률 문헌이나 지혜 문헌들을 고대 근동 지방의 같은 종류의 문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유사성이나 관련성을 찾아보기란 쉽다. 그러나 고대 근동 지방의 법률 문헌 가운데에서 레위기 25장의 희년법과 비교해 볼 만한 유사한 법이 그리 흔하지는 않다. 구약성서 자체 안에서도 희년에 관한 법만 있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그 비슷한 법(희년법 정신과 유사한 신명기 15:12-18의 '종에게 자유 주는 규정')이 한 번 선포되었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기록은 볼 수 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을 공격했을 때, 유다의 왕은 시드기야였고,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예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다의 성읍들은 느부갓네살에게 거의 점령당하고, 겨우 라기스와 아제카, 그리고 예루살렘만 남아 있었다. 시드기야 왕은 예루살렘 온 시민에게 노예를 다 풀어 주도록 노예 '해방'을 선포하였다. 예루살렘 시민들(자유민들)은 이 결의를 따라서, 남녀 종들을 있는 대로 다 풀어 주면서 그들을 다시는 종으로 부리지 아니하겠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마음이 변하여 풀어 준 남녀 종들을 도로 잡아다가 다시 종으로 부렸다는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다(렘 34:6-16).


  2) 그러나 예언자들은 희년법 정신으로 이스라엘에게 도전한다.


  빚을 지게 되면, 먼저 농사짓는 땅을 빼앗기고, 다음에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을 빼앗기고, 마지막으로는 몸(노동력)을 빼앗겨야만 하였다.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먹을거리를 내는 터전을 빼앗기는 것인 만큼, 경제적 기반의 상실을 뜻한다. 집을 빼앗긴다는 것은 가족들의 분산을 뜻한다. 제각기 흩어져서, 호구지책으로 몸(노동력)을 판다.

  역사의 무대 위에서 똑같은 몫을 가지고 똑같이 출발하지만, 마치 장거리 달리기 경기에서 앞서고 뒤서고 처지는 사람이 생기듯이, 풍부하게 사는 사람, 구차하게 사는 사람, 낙오된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희년법(레 25)이나 신명기법(신 15)이나 출애굽기의 법(출 21)은 이런 현실을 긍정한다. 그러나 어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똑같은 조건으로 삶을 다시 시도하여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희년법은 일정 기간 이후에 땅과 집과 몸의 소유권 환원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땅.집.몸 세 가지를 담보로 잡을 때에 채권자가 이것으로 이익을 보는 일이(손해까지 감수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으나) 있어서도 안되며, 이 세 가지를 상실한 자가 학대를 받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레 25:17). 예언자 미가에게서, 우리는 이와 같은 희년법 정신이 예언 선포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권력 잡은 것을 기회로 어떻게 해서라도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사유화하려고 지능적인 수법을 고안하는 도시의 부호들을 꾸짖는 미가의 말을 들어본다.


(1)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이나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2)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
(미가 2:1-2)


3) 사람이 지키지 않은 법을 하나님이 지키심
  하나님께서 이 법을 실시하시는 날은, 한 쪽 사람들에게는 재앙의 날이며, 다른 한 쪽 사람들에게는 구원받는 날이다. 같은 날이 한 쪽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 되고, 다른 한 쪽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사람이 거절한 법을 하나님이 지키시기로 결심하신 내용이 이사야의 한 신탁(61:1-9) 안에 전개되어 있다. 그 서두만 여기 인용한다.


(1)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2)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사 61:1-2)


  위의 신탁에서는 두 가지가 선포되고 있다. 하나는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처럼 거룩하게 구별된 시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레위기 25장의 희년이 주로 경제사회의 측면을 취급한 것이라면, 이사야 61장의 "주의 은혜의 해"는 보다 광범위한 삶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레위기 25장의 경우는 그런 즐거운 소식이 전파되고 해방이 선포되는 해를 다만 "요벨의 해"(수양뿔 부는 해, 즉 기쁨의 해)라고 부르는 데 반하여, 이사야 61장은 같은 날을 상반되는 두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마음 상하고 잡히고 묶이고 한 맺힌 이들을 반겨 주실 "은혜의 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약탈하고 마음 상하게 하고 포로로 잡고 묶어 놓고 한 맺히게 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기도 한다.

  일정 기간마다 '해방'이 선포되고, 소유권이 본래의 주인들에게로 돌아가고, 노예들은 자유를 얻어 자유인이 되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 위로 다시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의 달력에는 희년, 곧 "주의 은혜의 해"는 없었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에서 "은혜의 해"는 약속과 심판 형식으로 선포되고 있다. 해방을 선포하여야만 하였으나 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앙갚음이, 그리고 해방의 선포 대상이었던 이들에게는 본래 그들의 기본권과 기본 재산이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은혜의 시간이 선포되는 것이다. 이 신탁을 선포하는 자, 곧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는 여기에서 자신과 은혜의 해에 혜택을 입을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있다. 은혜의 해가 진정 기쁨의 해가 될 대상들은, "가난한 사람들", "상한 마음", "포로", "갇힌 사람",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따로 떨어진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류의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 질병의 여러 증상을 묘사한 것이다. 은혜의 해가 되면 가난과 빚 때문에 묶인 몸, 상한 마음, 맺힌 한, 이 모든 것들이 끝나게 된다. 이들에게 선포될 내용은 기쁜 소식(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것), 치유(상처를 싸매 줌), 해방, 지하 감옥에서 석방(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 눈이 열리는 것), 위로 등이다.

 

민영진 교수(감신대 교수, 기독교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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