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말은 해방 후 십 년 동안 그 교회가 걸어온 길을 주로 역사적·사회적인 입장에서 보고 하는 말이다. 전문적인 학적인 비판은 못되고, 그런 것을 할 능력도 없고, 그러나 그런 깊고도 날카로운 공정한 비판이 나오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하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상식적인 소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막연하고 부분적인 말일 수밖에 없다. 본래 종교의 일은 통계수자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같은 일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로 지껄일 수 있는 대신, 공정한 말이 못되기 쉽다. 될수록 그런 치우친 말이 아니되기를 바라면서 하는, 정말은 자기반성의 하나이다.  

 

비판의 필요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어느 종교도 다 신성불가침을 주장한다. 비판이라 할 때 교회는 본능적으로 수염을 끄들리는 봉건귀족의 기분 같은 생각을 가진다. 사실 교회는 봉건제도의 뱃속에서 설러져 나온 것이고, 아직도 그 젖 냄새를 못 버린 점이 많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판받아야 한다. 이젠 인간은 무반성의 신뢰만이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어떤 경전도 인간은 비판없이 읽으려 하지는 않는다. 반성을 아니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계시, 환상을 본 사람도 영구적으로 자아의식을 초월해 버린 일은 없다.

 

“나를 본 자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는 사람은 분명한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이지 결코 탈혼상태(脫魂狀態)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비판을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교회를 역사적인 사회적인 산 생활에서 떨어져 화석화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는 엎디어 두 손으로 받아야 하는 절대지만, 일단 뱃속에 들어가면 원형을 남기지 않도록 소화를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교회를 비판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일반적인 데부터만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현 단계의 필요에서부터이다. 자각증상은 고사하고 보는 남의 눈에 병색이 뵈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사(私事)가 아니다. 믿는 자의 취미에만 그치는 일이 아니다. 종교는 물론 인생에 초연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초연은 인심 위에 지도적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 하는 초연이지 결코 관계 아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관계를 예수께서는 소금과 등불과 산성(山城)으로 비유했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 종교로써 구원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처음에는 종교는 사사라 하여 관계 아니하다가 후에는 깨닫고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고 규정을 짓고 무자비한 탄압을 하게 된 것이다. 아편이겠는지, 생명소겠는지는 각각 제해석대로 하겠지만 그런 관련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도리어 교회가 툭하면 사회에 대해 오불관언(五不關焉)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기독교다. 즉 국민의 양심 위에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는 진리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인생관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내붙이는 교리와 실지가 다르고, 겉으로 뵈는 것과 속이 같지 않은 듯하고, 살았나 죽었나 의심나게 하니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선도(古仙道)나 화랑도(花郞道) 모양으로 역사적·사회적으로 아주 완전히 죽어버렸다면 문제없다. 그것은 식은 재다. 삼국시대의 불교나 이조시대의 유교 모양으로 인심 위에 산 작용을 하고 있다면 또 문제 없다. 그것은 산 불길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미지근한 재요 시들어가는 나무다. 지금 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손을 내미는데, 교회는 왜 아무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 않을까? 이 시대에 구원이 기독교적인 데서 와야 한다는 것은 전 인류의 방향이 지시하는 바다. 물론 기성 어느 정신적 체계로도 될 것은 아니고 인류는 앞으로 근본적으로 생각을 새로이 할 것이지만, 아무래도 역사적인 존재인 이상 기존하는 어느 것을 기본으로 하고 나오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렇다면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아무래도 기독교적인 데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식자들이 의견이다.

 

그런데 그런 지위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왜 아무 열심도 보여주지 못할까? 우리는 이제 그 뿌리를 들춰보고 그 미지근한 속에 손을 넣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살았으면 더 북돋우고 아주 병이 들었으면 뽑아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어야 할 것이며, 아직 불꽃이 있으면 살려 일으켜야 하겠고 아주 꺼졌으면 어서 쓸어버려 새로 심는 나무의 거름으로라도 해야 할 것이다.

 

 

처음의 감격

 

기독교가 본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정복적인 생명력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사상으로 하면 선도적(仙道的)인 것과 유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이 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어왔다. 물론 처음에는 고선도(古仙道)가 국민생활을 지도해 왔을 것이고, 대륙으로부터 유교문화가 들어오자 도덕에 관한 한은 대체로 유교적인 것으로 대치가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사회생활의 실제 도덕에서는 높은 것이었으나, 세계관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주는 것이 없으므로 고래(古來)의 고선도적인 것으로 내려오다가 불교가 당시의 중국에서 성했던 물질적·예술적인 문화를 타고 올 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대부분 불교적인 것으로 돼버렸다.

 

그리하여 오랜 동안 정신계를 말하면 상반신 세계관적인 데 관한 한 불교적·고선도적이었고, 하반신 도덕적인 데 관한 한 유교적이었다. 그것이 일개 산 체계를 이루어 국민생활의 척수가 되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이조말에 와서는 아주 썩어버려 민심을 거느릴 수가 없어졌다. 썩었다는 것은 다른 것 아니요, 언제나 종교 도덕이 일부 지배계급에 독점이 되어 그 물질적 이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삼강오륜도 제대로 있고 천당 지옥도 제대로 있지만 그것은 양반계급이 자기네의 지배자 지위를 지켜가기 위해 쓰는 것인 줄을 아는 민중에게는 아무 양심의 지침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된 때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천지간에는 오직 한 분 신령한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인은 그 자녀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종래 듣던 것보다 모두 합리적이요, 모두 깊고 큰 세계관이며 공정하고 높은 논리요, 거기는 인류 역사를 개조한다는 약속이 들어 있는 복음이었다. 그리하여 민중의 마음은 섶에 불이 당기듯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실지로 그 새 종교의 공연한 신도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관계로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공중의 대기와 같이, 민중의 양심에, 막연은 하면서도 절대의 권위를 가지는 청신한 생기를 주는 세계관·인생관·역사관은 전체적으로 그것으로 대치가 돼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소위 쇄국주의를 버리고 개명을 한다고 한 이래, 국민적 일대사(一大事)가 있을 때 민심 위에 결정적인 판단을 내린 것은 종래 있던 불교적인 사상도 아니요, 유교적인 윤리도 아니요,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이 기독교의 주장대로 됐다는 말은 아니다. 국민 양심의 배후에 서는 분위기를 말하는 말이다. 이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역사가 나가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사회의 소식은 3·1운동의 사실상의 주동자인 이승훈 선생이 자기를 재판하는 일본인 법정에서 한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독립운동은 왜 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했다”하였다. 이러했기 때문에, 국민적 양심을 지지하는 척수가 기독교였기 때문에 일제는 그것을 극력 압박하였다.

 

그러나, 한편 3·1운동 이후 우리는 거기 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본다. 공산사상의 침입이다. 그것은 기독교와는 정반대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민중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거기는 세계사적 근거가 없지 않으므로 계급적 압박에 고생하는 민중의 양심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냐? 공산주의냐? 살기 위하여는 그 둘 중 어느 것을 택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일제와는 공통된 대적이었으므로 그 둘은 서로 반대는 되면서도 그 한 뱃속에서 쌍태(雙胎)로 자랐다. 그리하여 해방이 되던 날 그 두 쌍둥이가 나와 서로 장자(長子)로 상속권을 다투게 되었다. 누가 에서가 되고 누가 야곱이 될까?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현실에 붙는 자 에서가 되고 이상에 열심 있는 자 야곱이 될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역사의 영원히 변할 길 없는 법칙이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이 왔을 때 교회가 맨 처음으로 보여준 것은 커다란 감격 속에 가지는 흥분의 얼굴이었다. 감격은 전 국민이 다 가진 감격이지만, 기독교가 가진 감격은 일반보다는 독특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불교도도 유교인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간단히 한말로 표시한다면 “이제 우리 때가 왔다”하는 것이다. 거기는 역사적인 어떤 사명감과 자부심이 흐릿하게나마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을 말하는 것 아니요 국민적 양심의 핵심이 거기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위에서 말한 것같이 공산주의에 의하여 양분이 되었다. 같은 흥분을 가지고, 그 근본정신도 다르고 따라서 그 방법도 다른 것이지만, 서로 역사적 사명을 자부하는 흥분에서만은 서로 같이 가지고 대립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분위기로 말한다면 국민은 대체로 기독교 편에 손을 들 형편이었지, 결코 공산주의가 이기리라고 생각을 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예 언

 

그러고 보면 38선이 갈라지고 미·소 두 진영이 대립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스탈린이 교활해서도 아니요 루즈벨트가 속아서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일의 외적 계기가 됐을 뿐이지 속 원인은 아니다. 속 원인은 역사의 태(胎)집 안에 벌써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만일 우연한 일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 된 것이라면 그 원인을 치밀하게 연구해 밝히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전투적 실천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야곱 모양으로 이상은 하늘에 닿는 사다리같이 높은 것을 가지면서도 그 실현을 위해서는 양가죽을 벗겨낸 털을 대신하고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14년을 머슴 노릇을 하는 것 같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적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요,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 하니 내 자신 속에 있다는 말이다. 고로 해결이 내게 있다. 밖에서 왔다면 요행을 기다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항복을 해버리겠지만, 내게서 나간 것이라면 내가 힘써야 할 것이요, 힘쓰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38선이 갈라진 불행을 당하고 교회는 어떻게 했나? 처음 흥분이 식고 미·소 양군의 주둔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당할 때 교회는 한동안 환멸의 비애를 느끼고는 그 다음 일어난 것이 예언이었다. 그저 저마다 예언이다. 3년 후에 통일이 된다, 5년 후에 된다, 어느 해는 예수가 재림하고 소련이 망한다, 이런 것이 유행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역사적 문제를 전혀 우연한 것으로 안 심리이다. 말은 우연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니 계획이니 예언이니 하지만, 그것을 역사적 현실의 문귀로 해석해 놓으면 우연이란 말이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이 형식적·관념적이요, 실천적인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계의 일과 현실적인 일을 혼동하여 하늘나라의 일을 곧 지상에서 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역사에 대해 도덕적인 노력의 입장에 서지 않고 전적으로 자연현상에 대하는 모양으로 기다려서 결과를 얻으려는 심리에 빠진다. 고로 예언을 하게 된다. 정감록식으로 운명을 기다리는 심리가 자기암시가 되어가지고 나온 특수 정신적 현상이 곧 이 예언이다. 그런 고로 몇 번 해보아도 들어맞지 않은 것을 안 요사이는 전혀 그런 것은 없다. 구약에 많이 있는 예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이 윤리적인 것이다. 국민의 갈 길을 지시해 힘쓰게 하자는 것이지 요행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고로 교회가 공산주의를 역사적 상속권을 위해 싸워야 할 대적으로 안 것은 옳은 일이나, 그 대립의 원인을 도덕적으로 내부에서 구하지 않고, 운명적·정치적인 데서 구한 것은 전연 잘못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손을 묶고 앉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으로서 활동을 힘껏 하기 위해 생사 성패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역사적 사회적인 인간생활에 관한 그 원인을 찾고 그 해결 방법을 연구 실천하는 것이 신앙이다. 구약 중에 역사가 많은 것은 역사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인데, 그들이 잘못 알았기 때문에 역사적 관심을 잃고 옛날의 운명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후 교회 신도들이 부흥회에만 취하고 정치에 관한 한 “일본이 갔으니 우리 손으로 하면 그만이다”는 단순한 식의 생각밖에 아니하는 것을 보고 “너희 놈들이 사회를 개량해 보자는 성의가 있느냐?”하고 욕했고, 그래서 그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옳은 말이 되었다. 공산주의자의 인해전술의 무서운 습격을 받다가도 북한 상공에 예수가 나타났다면 정말 그런가 믿고 일시 안도감에 취해 보려는 교회인이라면, 역사에 대해 그렇게 얕은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면, 신앙이란 것을 그렇게 미신적으로 취하는 민중이라면, 6·25전쟁은 한 번만 당할 것이 아니다.

 

 

교파 싸움

 

예언이 들어맞을 리가 없다. 역사를 통해 성격을 기르자는 하나님이 기적으로 게으름뱅이에게 복을 줄 리가 없었으니 그 예언이 하나님의 계시일 리가 없다. 해보다가 아니되니 그런 예언은 제 마음이 스스로 가르쳐 다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는 일어난 것이 교파 싸움이다. 장로회가 이분(二分)이 되고, 감리회가 이분이 되고, 한 교회당 안에서 두파가 대립해서 예배를 드리고, 경관을 출동시키고, 교회당 차압을 하고, 천주교는 우리는 그런 싸움 아니한다고 자랑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마치 국민의 불평을 식민지전으로 전가시켜 겨우 통일을 유지해 가는 제국주의 국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교파는 다 열교(裂敎)라는 것을 밤낮 선진해서만 유지돼 가는 통일이다. 개신파에서 개종해 온 것을 선전 광고하는 것은 그것이 교파심 아니고 무엇인가?

 

종교 싸움은 기독교 저희끼리의 싸움인데 저희끼리 싸움을 하는 것은 외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근본으로 말하면 일체 현세적인 것을 상대로 싸우잔 것인데 그 근본 정신이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그칠 날이 없다. 그런데 외적이 없다는 것은 타협한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타협을 한 것은 속았기 때문이다.

 

교(敎)의 파쟁(派爭)이 일제시대에는 별로 없었다. 공산침략이 심할 때는 천주교와 개신파도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대적이 좀 멀어질 때 종파 싸움은 맹렬히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인가? 대적을 전연 밖에서만 보았고 안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속았다는 것은 그것이다. “원수가 네 집의 식구리라.” 정말 대적은 나 자신 속에 있는 것인데, 민족이 다른 데, 주의가 다른 데 있는 것같이 생각한 것이 속은 것이 아닌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다면 내 편인가? 그런 나라를 시인하고 교황사절을 보내고만 있으면 기독교는 이긴 것인가? 적산이권(敵産利權)을 교회에 허락해 주기만 하면 그건 우리 정부인가? 그 모든 것은 게릴라 부대로 내부에 침입한 적의 교묘한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를 불신자가 보고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 수 없지”하는 싸움을 싸울 때 완전히 적의 책략에 넘어간 것이다. 서로 싸우는 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릴 예수가 아니요, 저보다 나은 신앙이 시기가 나서 카인으로 하여금 일어나 동생을 때려죽이게 하던 그놈이다. 이 나라의 기독교가 종파 싸움이 심하단 것은 그만큼 이 나라 위에 하늘나라를 임하게 하려는 의욕이 적고 목적을 현세적인 권력에 두는 증거다. 이래가지고는 저들은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할 때는 눈물을 흘리며 남북 통일을 구하고 머리를 들고는 폭력을 써서 교회당 쟁탈전을 하고, 그런 통일주의는 썩 잘한대도 자기 교파가 독재적 통일을 원하는 것밖에 될 것 없다. 그럼 무엇이 공산주의와 다를까?

 

 

성신운동

 

한편으로 교파 싸움이 날로 심한데 또 다른 한편으로 일어난 것이 소위 성신받는다는 일이다. 삼각산이요 용문산이요 대구요 뚝섬이요 서울운동장이요 엄장로요 박장로요 또 무슨 장로요, 한 편에서는 병이 나았다, 불이 내렸다, 또 한편에서는 사람을 때려죽였다, 재판을 한다 등등 가을 들에 시든 풀이 불붙듯이 번져나간다.

 

그건 무엇일까? 먹지 못한 양의 몸부림이지 다른 것 아니다. 교회는 원조물자 오면 나눠 먹을 생각만 하고, 목사들은 큰 교회 자리를 얻기 위해 싸움만 하고, 유력층에 운동해서 적산이권(敵産利權)이나 얻으려 하고, 그보다 조금 높은 것은 미국의 유학갈 길을 찾고, 세계적인 회합이 있는 기회에 한 번 대표로 가보려 하고 있는 동안에, 세계 정세는 호전하는 것도 없고, 산업은 날마다 쇠해 가고 관리는 점점 더 썩어져 가고, 학교 선생님들은 고리대금업자로 화하고, 민중은 실로 마음을 가져다 붙일 곳이 없다. 사람은 죽지는 못하는 것이다. 심령은 살기 위해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갈급(渴急)해하는 심리에서, 궁금한 심리에서 나온 것이 성신받는다는 현상이다.

 

실천적으로 노력해 보자는 마음은 본래 배우지 못했으니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사방이 막힌 것으로만 보이고, 그러니 바랄 것은 하나님의 능력뿐이고, 구하는 자에게는 준다 했고, 그러니 최후의 수단이 산천(山川)기도 식일 수밖에 없다. 정신은 본래 혹하는 물건이요, 혹은 제 생각하는 대로 되는 법이다. 굶은 자의 눈에는 제 자식도 먹을 음식으로 뵈고, 변태성욕자의 눈엔 나무 그루터기도 미인으로 뵈는 법이다. 내 마음속에서 불을 바랐으니 불이 뵌 것이고, 들은 것은 안수(按手)니 죽기까지 주무르게 되는 것이다. 병이 낫는다는 것은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기독교의 성령을 기다릴 것 없이 무당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령이라 하는 ‘성령’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그 성격이 윤리적인 데 있지 결코 마술적인 능력에 있지 않다. 이제 성신받았다는 사람들이 양심의 정도가 올라가는 것은 별로 없고 기적적인 것을 행하는 데만, 더구나 방언 식으로 환상 식으로 많이 기울어지는 것은 그 진리 체험의 정도가 어떻게 옅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고로 기적으로 나라가 건져진 일은 없다. 느브갓네살의 10여만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인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만, 그것으로 나라가 구원되지는 못했고 되었다면 다음 깨달음이 온 이후이다. 구약이 보여주는 것은 그 진리이다. 그런 기적은 다 국민의 성격을 닦아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본말(本末)을 거꾸로 하면 잘못이 생기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도덕적으로 성격이 정화되기를 힘쓰는 것 없이 한갓 능력만 구하는 사람들이 건전한 영(靈)을 받지 못할 것은 당연할 일이고, 건전하지 못한 이상 여러 가지 폐단이 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그 현상은, 예언과 마찬가지로, 또 한때 불고 지나가는 바람일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평소에 진리를 가르쳐준 것이 없는 교역자(敎役者)의 잘못이다. 그들이 신앙이라면 그저 능력을 얻는 것으로만 가르쳤고 복 받는 것으로만 말했고 윤리적인 노력을 하는 것을 지도하지 않은 고로 오늘의 병증(病症)이 나타난 것이다. 이 성신운동 현상은, 열심히 울고불고 기도하고 죄를 회개한다고 하여 사교심리의 변태적인 행동을 하고, 그로써 약간의 병이 낫고, 헌금으로 금가락지 금시계 자동차가 들어오고, 모모 장관 부인이 어쨌다는 것을 광고로 하고 집회자 숫자를 과장해서 광고를 하고 하는 식으로 하는 이 성신운동은 종교로도 그런 종교가 서 있을 수 없지만 나라는 더구나 절대로 구원이 못된다. 구하는 열심은 있으나 그 근본 태도가 진리적이 아니다. 이것으로 민심은 올라가고 밝아지지 못하고 내려가고 어두워질 것이다.

 

 

교회당

 

마지막으로 최근에 와서 보는 현상으로는 교회당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먼저 교회당은 무엇으로 그처럼 늘어갈까? 여러 말 할 것 없이 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도 이때껏 어디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보냈다는 것은 못 들었고 인간이 지은 것들인데, 인간이 지었다면 어디서 났거나 돈 있어서 된 것이지 건축가가 지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해방 후 날로 더 못돼 가는 경제에 교회에는 어떻게 그런 돈이 있을까? 하나님이 정말 기독교에게는 특별한 복을 주어 사업이 성했나? 그렇게 믿는 아주 갸륵한 양심도 다분(多分) 있기는 하지만 거기 생각할 점이 없을까? 아무리 보아도 교인이 불신자보다 양심이 더 나은 것은 있는 것 같지 않고, 또 설혹 낫다 하더라도 이렇게 전국이 궁핍에 주리는 이때에 기독교만이 양심적인 생활을 넉넉히 하고도 남아서 굉장한 교회당을 오 보 십 보에 경쟁해 가며 세울 수 있게 돈을 퍼부어 준다면 그는 공정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교인이 특별히 복을 받아서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인가? 돈의 출처는 두 곳밖에 없다. 하나는 외국, 주로 미국서 오는 원조요, 하나는 부정 매매에서 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정당한 사업을 양심적으로 해서 돈 벌 수 없다는 것은 청천백일하에 내놓고 하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기독교인만이 어떻게 깨끗한 돈을 벌었다 할까? 설혹 어디 가서 도둑질한 물건은 아니라 하자, 내 손으로는 아니했다 하더라도 대체 도둑 손을 아니 거친 물건이 이 나라에 있을까? 또 백 보를 양보해서 깨끗한 물건이라 하자. 그는 어떻게 장사하고 어떻게 공장을 경영하나? 어떤 제도하에서 어떤 시장, 어떤 은행법, 어떤 세제하에서 하고 있나? 하층사회 사람이 살기 어렵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회의 정치 경제의 조직이 권력 없는 자의 소득을 부당하게 빼앗아서 상층계급에게 주도록 되었다는 말 아닌가?

 

하나님을 아무리 믿는다 하여도 우리 생활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제도하에서 하고 있으니 내가 의식적으로 했거나 무의식적으로 했거나 내게 생활의 여유가 있다면 남의 노동의 결과를 빼앗아서 된 것이지 결코 정직한 이마의 땀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기독교인이 “나는 정당한 돈으로 산다”한다면 그럴수록 그의 양심의 정도의 낮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양심이 날카롭다면 이 사회 현상에 냉담할 수가 없고, 사회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거기 죄악적인 정도가 합법적이라는 가장구조(假裝構造)를 가지고 되어감을 모를 수 없고, 만일 그 사실을 본다면 일신(一身)이 일 없다고 안연(晏然)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당한 보수하에 신부 목사 노릇을 한다 할지 모르나 그 정당은 뉘 정당인가? 하나님의 정당인가? 자본주의의 정당인가? 도대체 직업적 전도사란 것이 자본주의의 산물 아닌가? 그렇게 보면 적어도 이 사회에 사는 한 피묻은 옷 입지 않은 종교가 없고 피로 세워지지 않은 교회당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피가 아니고 착취를 당하고 죽은 노동자의 피 말이다.

 

교회 경영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무슨 힘으로 되나? 소위 장로급이 중심이 되어서 돼가는 것 아닌가? 장로란 결코 신앙의 계급이 아니다. 돈의 계급이지. 돈 있는 사람, 교회 경영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을 장로로 하는 것이요, 지금 교의 파쟁이 대부분 그 장로급을 중심으로 하고 하는 일 아닌가? 그럼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맘몬의 교회인가? 기독교인은 속죄를 받은 결과 이런 것도 죄로 아니 느낄이만큼 강철 심장이 되었는가?

 

그 다음 미국의 원조를 생각해 보자. 미국은 왜 외국을 원조하나? 다 자선심 깊은 사람이 되어선가? 어린애도 그렇게 생각은 아니할 것이다. 남의 선을 일부러 악의로 해석하자 해서가 아니라 현상 밑을 흐르는 역사적 관련을 밝히지 않은 선은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조하는 것은 하지 않고는 자기네가 살 수 없는 점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를 유지해 가기 위해서다.

 

미국으로서 정말 동정심이 있으면 왜 넓은 지역을 자유 개방해 누구나 가서 살 수 있게 하지 않고 국경선이란 인위적인 울타리를 치고 비교적 소수의 국민이 막대한 부원(富源)을 독점하고 있는가? 그러면 동정이란 자기네의 호조건의 부원을 길이 독점하고 향락을 계속하기 위해서 역외(域外)의 불평자의 불평을 막기 위한 한 방책이 아닌가? 미국인도 세계가 불안한 이상 자기네 홀로 아무리 자원이 많고 기계가 발달했어도 그냥 오래 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계가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어 같이 살 수 있나 하는 데 있지 내가 당장 문제가 다소 해결되었나 아니되었나 하는 데 있지 않다. 내 교회 생각만 하는 것이 기독정신일까? 작게 보면 교회는 미국 기독교도의 전도열에서 오는 자비의 선물을 받고 있는 것이나, 크게 보면 알지 못하는 동안에 미국의 자본주의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막는 약탈자와의 사이에 서서 그 울타리, 혹은 충돌을 피하는 스프링 노릇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원조는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해서든 원조로 우리 곤궁을 면하면 그만 아니냐 하는 순 물질적인 생각으로 한다면 문제될 것 없으나 만일 적어도 정신이 문제라면, 그저 원조를 청해 사업을 하는 것은 문제이다. 원조를 받아다가 학교를 세우지 못하고 역사의 짐을 더 무겁게 메어 세계개조의 혁명의식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 역사의 긴 과정을 두고 보면 도리어 더 잘한 일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장학금을 얻어 공부를 하면 행복이라 하겠으나 자유정신을 기르는 편으로는 도리어 불행일 수도 있다. 사람이 남의 돈을 얻어 쓰고 그 사람의 결점을 알기는 참 어려운 법이다. 미국이 늘 세계의 영도권을 쥘 것도 아니고, 정의가 있는 것으로 옮길 터이니 그 옮겨지는 날에 어떻게 하려나?

 

그렇게 볼 때 교회당 탑이 삼대같이 자꾸만 일어서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궁핍에 우는 농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의 가슴 속에 양심의 수준을 높여주어야 정말 종교인데 이 교회는 그와는 반대이다. 교회당 탑이 하나 일어설 때 민중의 양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 치 깊어간다. 그렇기에 “예수 믿으시오”하면 “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습니다”한다. 이것은 악한 자의 말일까? 하나님의 음성 아닐까? 석조전을 지을수록 거지는 도망하게 생기지 않았나? 교회당이 없었던들, 원조를 주겠다 해도 “아니요, 우리는 십 년 후라도 우리 땀으로 짓겠소”했던들 그것은 불쌍한 자의 도피성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하지 않을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신라말에 절이 성하여 불교가 망했고, 고려시대에 송도 안에 절이 수백을 셌는데 그후 그 불교도 나라도 망했고, 이조때 서원을 골짜기마다, 향교를 고을마다 지었는데 유교와 나라가 또 같이 망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애급도 그렇고 바빌론도 로마도 그랬다. 그럼 성전이 늘어가면 망할 것은 누구인가?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가 아니다. 지배하지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도취하자는 종교지 수도·정진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안락을 구하는 종교지 세계 정복을 뜻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 빤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기만적인 현상이다.

 

광야에 나가면 벌판에서, 바닷가에 가면 배 위에서, 밭에 가면 밭고랑에서, 길을 가다가는 우물가에서 예배하는 종교하고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는 무지한 군중을 찾아 가르치다가 저물면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간에 같이 나눠 먹고, 밤이면 홀로 산에 올라 별을 바라보며 기도·예배하는 종교, 그러한 예수의 종교, 성당 없는 종교, 종교 아닌 종교는 지금 이 나라에 있나, 없나?

 

 

맺음

 

이렇게 볼 때 이 교회의 증상은 고혈압이라 진단할 수밖에 없다. 뚱뚱하고 혈색도 좋고 손발이 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찍이 노쇠하는 경향 아닌가? 그렇기에 이렇게 혼란해 가는 사회를 보고도 아무 용기를 내지 못한다. 전쟁이 났다면 기독교 의용대나 조직해서 불신자로부터는 병역기피라는 비방이나 듣고, 수많은 청년을 양심의 평안도 못 얻고 육신의 생명도 못 누리고 죽게 하고, 성직자는 먼저 구해야 한다고, 그 가족은 먼저 도망을 하고 신도는 또 그렇다고 비난을 하고, 교회당에 피난민이 오면 신자를 먼저 들이고 불신자를 막고, 구호물자가 오면 그 때문에 싸움이 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미끼로 전도를 하려 하고, 그리고 선거를 하면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으라, 누구를 부통령으로 찍으라 하고, 기독교 연합을 하여 추천을 하든지 매수(買收)를 하든지 하고, 교회를 지반으로 정당운동이나 하고, 기독교 학교라는 학교도 다 남보다 못지않게, 누구보다 더 학생을 착취하고 있을 뿐이지, 이 역사를 세우려 기독적인 입장에서 높은 입장을 주장하는 커다란 사상적인 노력도, 기울어져 가는 집을 한 손으로 당해 보려는 비장한 실천적인 분투가 힘있게 나오는 것도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 산 신앙이 더러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땅에 떨어진 도의와 정신에, 만고에 없는 환난을 당해 순교의 정신으로 생명을 증거한 것이 있다면 그래도 기독교인이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 점은 감격할 일이요, 그 귀한 것으로 하면 단 한 사람을 가지고도 전 교회의 면목이 선다 할 수 있고, 국민이 당한 물질적·인적 모든 손해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 또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어찌 그뿐일까? 개인적으로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공적으로 아무 변호를 할 말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런 신앙에 방해를 하고 구속을 했을지언정 도운 것이 없다. 신사참배 문제 때에도 그랬고 미군정시대에도 그랬고 공산주의 침입에 대해서도 그랬고 6·25 때에도 그랬고, 교회는 결코 이겼노라고 면류관을 받으려 손을 내밀 용기가 없을 것이다.

 

나는 위에서 교회의 현상을, 먹을 것을 다 먹고 고치에 든 누에에 비교했다. 과연 그렇기를 바란다. 그것은 갇혀서도 갇힌 것이 아니요 죽은 듯해도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줄을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남은 일이 하나 있다. 때가 올 때 여는 것이다. 죽는 누에는 자기의 힘이 아닌 신비에 의하여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나오는 날이 올 것이요, 그때에 이때껏 보호와 압박의 일을 기이하게 겸해 하던 집을 대번에 깨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적어도 최후로, 스스로 양보해서 열리는 겸손과 아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때까지의 실패가 그 한 일로 인하여 자랑으로 살아날 수 있으나, 만일 그때에도 역시 고혈압의 버릇을 그대로 고집해서 솟아나는 새 생명을 질식케 하는 일이 있다면 멸망이 있을 뿐이다. 탑이 높아가는 석조 교회당 밑에, 그 눌림 밑에서도 산 신앙이 있다면, 그것을 들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나, 다만 한 가지 조건은 산 공기를 마신다는 것이다.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죽지 않았다가 변화하려면 산 공기와 일광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같이 내리누르는 교회당의 무게 밑에서도 생명의 씨가 살려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셔야 할 것이다.

 

(『사상계』 1956년 1월호에 실린 글)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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