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신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신앙고백이요 선언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4 가지 절대가 함축되어 있다.

곧 태초-시간의 절대, 하나님- 존재의 절대, 천지- 공간·시간의 절대, 창조- 만듦의 절대. 하나님은 절대의 존재로서,

시간·공간과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막연한,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인격적이며 자존적이며 자의식적이신 분이시다. 만물의 근원이시며 만복의 근원이 되신다.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되고 끝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맹목적인 허상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에 기초한 신앙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1.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

그럼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성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형식상의 증명으로 입증하려고 시도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으로 알기보다는 기정사실이므로 인간은 당연한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실히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기왕 믿는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인 지식을 넣어 주어 믿음을 돕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되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1)우주론적 논증
이는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계시이다. 창조되어 있는 이 우주를 보고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우주가 생긴 것은 우연이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이 있어 우주라는 결과가 생겼는데 그 원인의 제공자 곧 창조자가 있어야 하는 데 그 창조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1장 3절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또 "집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은이가 하나님이시라"(히3:4) 한 것처럼

우주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은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본체론적 논증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지옥에 가라하면 화를 내는 것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위급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도 바로 양심의 호소인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9절 - 20절에 하나님을 알만한 양심을 저희 속에 두시고 그의 만드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이 충분히 계시되어 있어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3)종교론적 논증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종교성이 있는데 이 종교성이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알게 모르게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셨다. 이것은 인간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두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종교적 존재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4)역사적 논증
인류의 역사를 보아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의 역사 또 미래의 역사까지도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다. 성경의 말씀이 바로 인류의 역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역사가 바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5)도덕론적 논증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보아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 두려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이 양심의 가책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적이고 지적인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를 창조하신 배후 역시 지적 도덕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6)성경적 유신론증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증명하기도 한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말씀을 통한 계시에 의해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신다.



2. 하나님의 명칭


하나님이란 우리가 부모님의 이름이 있는데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듯이 하나님은 그분의 단순한 칭호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훼 등으로 불리워진다.

1) 엘(El)
능(能)한 강(强)한 자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나온 복수형으로는 엘로힘, 엘리욘, 엘엘리욘, 엘샤다이, 엘로와, 엘올람 등의 말이 파생되어 나왔다.

2)아도나이(Adonai)
재판하다. 다스리다. 전능하신 통치자, 혹은 주님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3)야훼(Yahweh)
영원 자존자의 뜻.

4)여호와(jehovah)
스스로 존재하는 자 (출3:4)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신성하여 함부로 부를 수 없으므로 야훼의 자음 밑에 아도나이의 자음을 붙여 여호와라는 복합명사를 만들어 일반적으로 불렀다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속의 준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름이다.

5)하나님
구약의 엘이나 엘리온의 뜻으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명칭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나라의 하느님과 구별되어 쓰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왜 '하나님'으로 부르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한국 전통의 하느님은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하늘+님, 곧 '하늘'에 접미사 '님'자가 붙어 하늘님이 되었으나 바늘질이 바느질,

버들나무가 버드나무, 불나비가 부나비가 되는 것처럼 'ㄹ'이 탈락되어 하느님이 된 것이다. 이 하느님은 본래 우리나라에서도 옛부터 불리워 오던 범신론적인 뜻으로

쓰인 용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唯一)의 뜻을 가진 '하나'에 접미사 '님'이 붙은 말로 '유일하신 님(神)'의 뜻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하느님'으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이신 분이므로 '하나님'이라고 해야 맞다고 본다.

성경은 철저히 유일신을 주장하고 있다. 왕상 8장 60에는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또 이사야 43장 10-11절에서는 "나의 전에 지음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여러 신 중의 한 분이라든가. 불교에서의 부처나, 도교의 옥황상제와 같은 절대자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생각은 못된 것이다.

5)주 (主, Kurios)
전능자, 권세자, 통치자, 왕의 뜻으로 씌었으며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어 왔다.

6)아버지(Father)
이 말은 주로 신약에서 쓰이었으나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 성부와의 관계
하나님은 창조물을 지배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래서 삼위의 다른 두 위와 구별하여 성부 하나님이라 한다.

7)신(Theos)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공통된 호칭이다.


3.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속성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나 어떤 속성은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에서 인간에게도 발견된다.

그래서 그 둘을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내재적 속성과 유출적 속성,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대개 이 4 가지 방법으로 분류를 하고 있으나 그 분류 내용은 동일하다.

1)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단순성 : 하나님은 합성적이거나 복합적이 아니시며 불가분 적이시다 (요4:24)
※문제 : 단순성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무효가 되는가? -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단순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고 삼위일체는 그의 현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일성 :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신 6:4)
유일성 : 절대자는 오로지 한 분이시다. 여러 신 중의 하나가 아니시다.
자존성 :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출3:4) 존재의 근거는 자신이 근원이 되신다.
무한성 : 종식(終息)이나 한계가 없다.(왕상8:27)
영원성 : 시간의 연속으로부터 자유하시다. (창21:33)
완전성 : 지식, 사랑, 주권,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다.(시145:3)
불변성 : 하나님은 변하지도 않으며, 변할 수도 없다((약1:17)

※토론 :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거나 후회하시지 않는가?(창 6:6)

            아니면 이것은 허용적 작정의 표현인가?

편재성 :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시 139-7-12) 그러나 만물 속에 계시지는 않다. 그렇게 되면 범신론이 된다.
전지성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마11:21)
전능성 :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다.(계19:6)
주권(권능) : 하나님은 최고 통치자이시다. 창조, 보존, 통치, 선택, 유기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2)하나님의 공유적 특성
공의 : 도덕적이시고 공정하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행17:31)
사랑 : 지고(至高)의 선(善)을 추구하신다.(엡2:4-5)
진리 : 자신으로부터 대표되는 모든 것과 일치하고 일관성을 갖는다.(요14:6)
자유 : 피조물로부터의 독립( 사40: 13-14) 시간, 장소, 행위로부터의 자유를 가지신다.
거룩함 : 의로우시다. (요일 1:5) 이는 도덕적 초월성을 말하는 것으로 더 이상 거룩할 수 없다. 신적 완결성을 보여주신다.
지혜 : 지혜의 근본이 되신다.

3)하나님의 영성적 속성
(1)비물질적이고 무형적이시다.(눅24:39)
(2)불가시적이시다.(출33:20) : 눈으로 볼 수 없다.
(3)살아계신다.(수3:10):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신다.
(4)인격적이시다.(창1:3)

4)하나님의 지적 속성
(1)원형적이며 근원적이시다.
(2)완전 무결하시다.
(3)예지적이시다.
(4)전지하시다.
(5)전능하시다.

5)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1)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2)선하신 하나님이시다.
(3)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신다.
(4)공의(公義)로신 하나님이시다.



4. 하나님의 사역(使役)
하나님의 사역에는 일반적인 작정과 구원에 대한 예정 그리고 창조 사역 및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등을 들 수 있다.

1) 작정(作定)
(1)작정의 정의
예정(豫定)과 흔히 혼동되기 쉬우나 작정은 만물과 만사에 관계하는 넓은 범위의 하나님의 영원한 도모를 의미하는 것이고,

예정은 특별히 구원(救援)에 관계되는 좁은 범위의 하나님의 사역을 뜻한다고 하겠다.

(2)작정의 목적
피조물의 행복이나 거룩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나 이것은 이차적인 목적일 뿐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보아야 한다.(시19:1, 엡1:6)

(3)작정의 특성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에 기초한다. 작정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는 영원적이고 불변적이다. 작정은 창조적 작정과 허용적 작정으로 나누기도 한다.

2)예정
(예정론은 고도의 신비로운 신학적인 문제이므로 다루기 어려우나 질문하는 사람 들이 많으므로 간단히 말해보겠다.)
예정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인간의 구원에 관한 일들을 미리 정하셨다는 뜻으로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예정의 종류
①선택(選擇) :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을 미리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예지 : 당신의 요구에 응답할 사람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
㉡예정 :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할 자의 운명을 미리 정하셨다.
②유기(遺棄) :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에서 선택되지 못한 버려진 자를 말한다.

※ 참고
1) 절대 예정 - 칼빈의 주장으로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거룩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을 자를 미리 정하셨다. 그리고 그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절대로 관여할 수 없다

2) 예지 예정 - 이는 알미니안주의 예정설로 예정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 기는 하나 하나님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 구원 받도록 예정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아셨다(예지)는 것 뿐 믿는 사람은 모두 받아들이도록 예정하셨다.

※이 두 견해는 둘 다 구원의 궁극적인 결정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공통점이나 칼빈은 절대주권을 말하고 예지 예정은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선 택의 권리를

침해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다르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반론

①너무 불공평하다. 사랑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반론에 대한 반론 :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를 실천하시기 위해 누군가는 유기자가 되어야 한다.


②그렇다면 예수 십자가의 공로는 선택받은 사람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되어 유기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냐?

   요한 복음 1:12에도 영접 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③인간의 자유의지와 조화가 되지 않는다.
④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
⑤예정의 교리는 인간들로 하여금 숙명론으로 가게 만든다.

(2)예정의 시기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신 지혜로 선택 또는 유기하시었다.

(3)예정의 대상
이성적인 모든 피조물

※ 예정에 대한 인간의 자세
①유기자를 있게 하신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 유의지를 주셨으므로 결국 구원을 받고 못 받는 것은 자기 책임인 것이다.

②유기된 사람은 전도해도 소용이 없지 않느냐고 말들을 하는데,

하나님의 예정이란 마치 기차가 레일 위를 지나가듯 이 하나의 계획 안에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나 권리 도무시하고 운명적으로 로보트처럼 굴러가게만 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전지하신 지혜로 사람의 행위와 결과까지 다 아시고 계시다는 것이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10:13)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 못 얻고는 전적으로 자기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 라(딤전 2:4).

 "네가 만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 은자 가운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고전1:21)라 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또 우리는 누가 선택자이고 누가 유기자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전도를 해야 한다.


③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죄의 창시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죄가 예정론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 자신이 죄를 계획하시거나 창출하신 것은 아니라 인간의 죄를 허용하신 데 불과하다.

오히려 하나님은 공의를 위해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셔야 했다.



5.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1)창조
(1)창조 시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

(2)창조 방법
우주 만물과 생명을 무(無)에서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3)창조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

(4)창조 범위
온 우주의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창조하셨다.

※창조에 관한 잘못된 학설들
이원론, 유출설, 진화론



2)섭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우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사건 가운데 개입하셔서 행위하시며 또 만물들로 하여금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여 나가 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님이시다.

(1)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역사하시며, 통치 보존 주관하신다.
(2)그의 절대적인 권능과 지식으로 주관하신다.
(3)대상 : 자연계에 대한 섭리

동물계에 대한 섭리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 대한 섭리
인간 개개인에 대한 섭리

(4)섭리의 성격
보편성, 주밀성(周密性), 주권성, 허용성

3) 심판: 심판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죄와 부정을 미워하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알자.

1) 하나님은 막연한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성삼위 일체되시는 구체적인 하나 님이시다.
2)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하느님과는 동일하지도 않고 같을 수도 없다.
3) 기독교의 하나님을 불교에서는 부처 또는 염라대왕으로,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로 부를 뿐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4)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는 견해는 못된 것이다.
5) 구약의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6) 열등의 하나님과 우수의 하나님 두 하나님이 계시다는 잘못된 것이다.
7)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잘못된 것이다.
8)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지금은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하나님은 간섭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9) 하늘에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한하나가 하나님이시다는 잘못된 것이다.
10)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라딘의 램프로 생각하거나 샤머니즘의 하느님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 무교(巫敎)에서의 신은 조건만 맞으면 다 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결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면 그래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인지라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을 그 이성 작용과 합리성, 과학성의 잣대에 맞아야 이해가 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인식은 인간의 지혜나 과학적인 증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믿음이지 이성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으로 판단하려 하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은 실제 걸으신 것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고,

홍해를 가른 것은 실제 가른 것이 아니라 썰물 때 건넌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를 이성으로 판단하려하면 구약을 이스라엘의 역사로 볼 수밖에 없다.

과학과 종교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고,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태양을 멈추게 했다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하시는 일 등에 관한 인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이 믿음은 온전히 인격적인 관계에 기초한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인간과 자연을 바로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우주와 영원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바로 볼 수 있고 바로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믿는 자로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아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각기 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참 하나님은 오로지 한 분이심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우리들이 막연히 부르는 하느님이 아니요, 구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우리가 부모님의 이름이 있는데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듯이 하나님은 그분의 단순한 칭호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합니다.

1)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 계신 것을 압니까?

첫째, 우주의 인과법칙을 보아도 살아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이 우주가 생긴 것도 누군가가 창조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연히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연치고는 너무 오묘합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임을 증명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연이라면 가끔은 오묘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도 생겨야 하는데 그런 일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작해야 70-80평생 사는 인간이 어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무신론을 내세웁니다만 이는 한갓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나름대로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합리화하려는 데 불과합니다. 그럼, 우주를 창조한 이가 누구이겠습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는 '집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은이가 하나님이시라.' 했고, 로마서 1장 20절에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로1:19) 한 것처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한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게 만드셨습니다.


둘째, 자연의 오묘한 법칙과 질서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의 모습을 보면 신비하고 오묘하기 그지없습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가을이 옵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 맺고, 가을이 되면 열매가 익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열리지 배가 열리지 않습니다. 음양의 조화는 더욱 신비합니다. 한 송이의 꽃은 그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수정을 합니다. 어떤 암펄은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수펄을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크던, 작던, 강하던, 약하던 간에 그 나름대로 자신들을 보호하면서 종족을 퍼뜨리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보면 자연의 질서는 참으로 오묘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생김새 하나만 보아도 그 오묘함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머리털은 열을 차단하기 위해서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깜박거리지 않는다면 먼지가 들어가 금방 상하고 말 것입니다. 눈썹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빗물이 떨어지면 흘러서 모두 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콧구멍은 밑으로 뚫어져 있습니다. 위로 뚫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오면 감당을 못할 것입니다. 귓바퀴는 소리를 모으기 위해 오그라져 있습니다. 옆 얼굴과 귀바퀴 사이에는 물이 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볼록 튀어 나와 있습니다. 혹 잘못해서 물이 귀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귀밑으로 홈이 나 있습니다. 이것을 어찌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그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반드시 일정한 조직과 일정한 배열 속에서 일정한 법칙대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물질의 구성을 보면, 어느 물질이든 원자들로 되어 있고, 이는 다시 양자와 전자로 나누어져 있어 소우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창조도 그렇습니다. 어찌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태어날 뿐입니다. 위장에 병이 들어 죽게 되어도, 심장이 말을 안 들어도 똑같은 위장, 똑같은 심장을 못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하물며 영혼이 깃든 인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40장에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 속이나 험한 골짝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렇습니다. 오묘한 우주의 질서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인간의 도덕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도덕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도덕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소위 무신론을 주장하는 분들도 죄짓는 것은 싫어합니다. 또,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덕적 양심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양심은 선과 악을 구분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인간의 종교성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종교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셨고, 우리의 마음 속에 종교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도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으려는 종교성이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미약한 인간의 존재를 살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더 겸손한 생각으로 되돌아보면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없이 오래오래 살 수도 없습니다. 이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 인간은 꼼짝도 못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보다 숙연해 지게 되고, 보다 겸손해 지게 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여섯째, 개인의여섯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 수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어 보여주실 때가 더러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오늘날도 놀라운 기도의 능력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신비로운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째,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 점 일 획도 거짓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면 남는 것은 겉장뿐입니다. 성경은 여러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썼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썼어도 신약과 구약을 통해서 볼 때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연결된 것을 보면 오묘하기 그지없습니다.

2)영이신 하나님
성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 했습니다. ( 요 4 : 24 )

영은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물질로 된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창 1 : 1 ) 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다른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또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3)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가 있는 자니라.'( 출 3 : 14 )라 했습니다.

유일하신 분은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 : 3 )고 했습니다.

오로지 한 분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다른 신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 : 1 )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신 분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우주 만물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우주 만물들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시편 104편 24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또 지혜의 근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물론, 우리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까지도 눈동자같이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라.'( 마 6 : 31-32 )라 했고,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 : 13)라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감히 감출 수 있겠으며 감추려 들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5)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사랑의 영적 교제를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요 3 : 16 )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요, 사랑이요, 보배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나를 더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못된 짓을 하는 자식을 다른 자식보다 더 염려하고 사랑하듯,

내가 더 못된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집 떠난 못된 탕자를 우리의 아버지가 주무시지도 않고 기다리시듯,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난 나를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6)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사 6 : 3 )라고 성경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멀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악을 싫어하시고, 거짓을 원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 하나니' ( 말 3 : 6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네 여호와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신 7 : 9 )라고 했습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잠 19 : 5 )고 했고, '속여 취하지 말라.'( 잠 21 : 6 )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 : 1)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신실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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