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을 기억하는 공간..흥선대원군 그늘 벗어나려 완성한 건청궁


1863년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1852~1919년, 재위 1863~1907년).

즉위 후 10년간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왕으로서 존재감은 별로 없었지만, 고종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기까지 44년간 조선의 왕으로 있었다.

52년간 재위한 영조와 46년간 재위한 숙종 뒤를 이어 27명의 조선 왕 중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고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12년을 더 살았다. 이 역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광해군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다.

고종은 재위 기간과 퇴위 후 상왕으로 있던 기간을 합하면 모두 56년이나 된다.

왕과 상왕으로 오랜 기간을 보낸 만큼, 고종과 인연이 있는 역사적 공간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고종이 태어난 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이다. 고종은 여기서 태어나 왕이 된 12세까지 살았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잠저라는 이유로 ‘궁’의 명칭을 받게 돼 운현궁이라 불리게 됐다.

고종의 잠저가 된 후 운현궁은 확장, 증축되기 시작해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4년에 노락당과 노안당, 1870년에 이로당이 완공됐다.


노락당은 1866년 3월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식을 올리기도 했던 곳이다. 같은 해 2월 왕비로 간택된 후 명성황후는 운현궁으로 가서 왕비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왕비가 궁궐에 들어가기 전 예비 준비를 하는 별궁은 주로 어의궁을 활용했으나, 이번에는 대왕대비가 운현궁으로 정했다.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이 별궁으로 지정된 것은 고종의 혼례에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운현궁에는 아재당과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을 모시는 사당이 설치됐고, 건물을 두르는 담장 둘레가 몇 리에 이를 정도로 공간이 확대됐다. 흥선대원군은 창덕궁과 운현궁의 편리한 왕래를 위해 왕 전용의 경근문과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을 세우기도 했다.

운현궁은 한때 아들 고종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을 이룬 공간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실각 후 위세는 크게 기울었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1820~1898년)은 섭정을 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의지에서, 임진왜란 후 폐허로 방치돼 있던 경복궁 중건 사업을 진두지휘했고, 1868년 경복궁이 완성되자 고종은 이곳으로 돌아와 생활했다.


흥선대원군의 그늘에 있던 고종은 성인이 되면서 스스로 왕의 입지를 확보해가는 노력을 전개했고, 재위 10년으로 접어든 1873년 마침내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친정을 선언했다. 이 무렵 고종이 사비를 들여 새로이 건물을 하나 완성했으니, 이곳이 바로 궁궐 속의 궁궐 ‘건청궁’이다. 이후 건청궁은 고종 시대를 대표하는 공간이 됐다. 건청궁 공사는 비밀리에 진행됐다. 후에 건립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대 상소문이 올라왔지만, 고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공사를 진행시켰다.

 

건청궁은 궁궐 건축이 갖는 격식보다는 사랑채·안채·행랑채를 갖춘 사대부 집에 가깝게 만들어 임금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사랑채인 장안당에는 고종이 거처했으며, 안채인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거처였다. 복수당에는 상궁들의 거처와 곳간 등이 있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 형태는 순조 때 지은 연경당이나, 헌종 때 지은 낙선재와 비슷한 구조다. 건청궁은 용도를 떠나,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국정을 주도하면서 세운 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복궁의 내전 일부가 불에 타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건청궁은 건립 초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85년(고종 22년) 고종이 건청궁에 보금자리를 틀면서, 건청궁은 근대사의 중심 무대가 됐다. 고종은 이곳에서 근대 문물 수용에 관심을 기울였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를 들여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하면서 전등에 불이 들어왔는데, 이는 자금성에서 전기를 받아들인 것보다 시기가 빨랐다.


1888년에는 건청궁 내 관문당이라는 건물을 고쳐, 한국 최초의 서양식 2층 건물인 관문각으로 만들었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이 건물은 명성황후가 외국 손님을 접견하는 곳으로 활용됐다.


명성황후 역시 건청궁에 거처하는 동안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등 서양 여러 국가와 활발한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자 일본은 건청궁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써 건청궁은 근대사의 최대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황후의 죽음을 접한 고종은 1896년 2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경복궁은 왕이 살지 않는 공간으로 남게 됐다.


건청궁 서북쪽에는 청나라 양식의 요소가 많아 이국적인 향기를 품고 있는 건물도 있다. 집옥재를 중심으로 서쪽에 팔우정, 동쪽에 협길당이 유리창 있는 복도로 연결돼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다. 이 같은 양식과 자재는 당시로는 최신식이었다. 집옥재와 협길당·팔우정, 세 채의 건물은 1881년(고종 18년)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함께 옮겨놨다.


고종은 이 건물들에 어진을 봉안하고 서재로 사용했다. 고종은 집옥재를 서양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중심 공간으로 삼고 국왕이 주도하는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다. 고종대에 집옥재에는 4만여권의 도서가 수집돼 있었다. 고종은 이곳을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활용했다. 1893년(고종 30년) 한 해에만 영국·일본·러시아·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나 접견한 기록이 ‘고종실록’에 나타난다. 2016년부터 집옥재는 궁궐 내 도서관으로 만들어져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집옥재를 찾아 궁궐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맛볼 것을 권한다.


함녕전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고종 황제가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1897년에 지었는데 1904년 수리 공사 중 화재가 일어났고 지금의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망국의 설움을 안으면서 함녕전에서 노년을 보내던 고종 황제에게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1912년 회갑을 맞은 5월 25일에 궁인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은 것이다. 7월 13일 순종실록 부록에는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나아가 새로 태어난 아지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생후 50일도 안 된 갓난아기를 자신의 침전으로 데려올 만큼 고종의 사랑은 유별났다. 덕혜옹주는 고종 말년의 최대의 즐거움이었고, 고종은 덕수궁 곳곳에 딸과의 추억을 남겼다. 1916년 4월에는 덕수궁 준명당에 다섯 살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으며, 아이들이 놀다가 혹여 다칠까봐 건물 바깥쪽에 난간도 설치했다. 어린 덕혜와 말년을 함께한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함녕전에서 68세의 생을 마감했다.


뇌일혈 혹은 심장마비가 공식 사인이었지만, 일제가 독살했다는 설도 파다했다. 고종의 독살설은 3·1 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이후 함녕전은 고종 황제의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됐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사망한 후 황제릉이 조성된 곳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홍릉이다. 고종은 생전에 이곳을 수릉(壽陵·생전에 미리 정해놓은 장지)으로 정해놨다. 1897년에는 현재의 청량리 자리에 조성했던 명성황후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1904년의 러일전쟁으로 공사가 중지됐고,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뒤에야 청량리 홍릉의 천릉이 시작됐다. 현재 금곡 홍릉은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시신을 함께 모시는 합장릉 형태로 조성됐다. 홍릉은 이전의 조선 왕릉과 달리 황제릉으로 조성됐다는 점에서 다르다. 정자각 대신에 일자형의 침전을 만들고, 무덤 주변에 배치하는 석물도 훨씬 다양해진 것이 특징이다.


1895년 명성황후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함께하지 못한 고종과 명성황후 두 사람은 1919년 홍릉이 합장릉의 형태로 조성되면서 다시 만났다. 격동의 근대사를 헤쳐나갔던 그 시절에 대해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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