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7대 임금 순종 | 500년 왕조의 무기력했던 마지막 황제


백제 의자왕, 신라 경순왕, 고려 공양왕 등 망국의 왕에게는 대부분 사치와 향락, 무능, 실정 등 부정적 용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외국의 왕도 비슷하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1908년 3세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지만 1912년 신해혁명으로 8세 때 퇴위했다.

1934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 황제가 됐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련에 체포됐다가 중국으로 송환된 후 정원사로 말년을 보내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았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894~1917년)는 러시아혁명 후 총살당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년)의 삶 또한 역사의 격랑 앞에서 고난의 연속이었다.

순종은 1874년 고종과 명성왕후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1866년 각각 15세, 16세의 나이로 혼인을 했지만, 후사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 컸다. 혼인한 지 4년이 되는 1870년 왕비가 임신했으나 유산했고 이후에도 왕비는 매년 임신을 했으나 자식을 갖지 못했다. 1871년 11월 4일에 태어난 아들은 대변을 보지 못해 4일 만에 죽으면서 고종과 명성왕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1874년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난 아들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중궁전이 오늘 묘시(卯時)에 원자를 낳았으므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해조에서 규례대로 하게 하라…

하늘이 종묘사직을 도와 원자가 태어났으니, 이것은 사실 동방의 더없는 경사이다.”


고종실록은 순종의 탄생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순종은 탄생 다음 해인 1875년 1월 7일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이름을 척이라 했다. 영조가 42세에 낳은 늦둥이 아들 사도세자가 2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사례처럼 최연소 세자 책봉이었다. 1882년(고종 19년) 2월 22일 9세의 나이로 여흥 민씨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후의 순명효황후)으로 맞았다. 혼례식이 행해진 곳은 안국동 별궁이다. 현재 풍문여고가 자리한 곳이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르자 왕세자 신분이던 순종은 황태자로 책봉됐다.


1906년에는 새롭게 해평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 11월 5일 타계한 후 1906년부터 순종의 재혼이 논의됐다. 7월 4일에 초간택이 거행돼 여러 후보가 뽑혔고 이 중 윤택영의 딸이 최종 후보로 결정됐다. 당시 황태자비(후의 순정효황후, 1894~1966년)는 13세였고, 황태자로 있던 순종은 33세였다.


순종이 재혼하던 1904년 11월은 일제의 침략 위협이 더욱 거세졌던 시기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고종은 이에 항의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고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했지만, 오히려 1907년 7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게 된다. 황태자 순종은 고종의 양위를 받아 7월 19일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 8월 2일에는 연호를 광무(光武) 대신 융희(隆熙)로 고쳤으며, 8월 27일 경운궁의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만 해도 순종은 자신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될 줄 짐작조차 못했을 터다.


1907년 7월 19일 황제 즉위부터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4년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 기간은 일제에 의한 한반도 무력 강점 시기였다. 국권을 모두 잃고 500년 왕조의 마지막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순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 날 “일본 천황의 축전이 오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각국 영사를 수옥헌에서 접견했다”거나 나라의 외교를 망쳤다는 이유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헤이그 밀사를 처벌했다”는 기록은 당시 상황을 잘 드러내준다.


7월 24일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강제로 체결해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했다. 각 부의 차관 자리에 모두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는, 소위 ‘차관정치’가 시작됐다. 조선의 내정 간섭권을 탈취한 일제는 재정 부족이라는 구실로 8월 1일에는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군대 해산에 맞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은 자결로 불의에 저항했다. 극악의 상황 속에서도 황제의 자리만 차지하고 실권을 갖지 못한 순종은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일제는 1909년 7월 12일 사법권과 감옥권을 일본 정부에 이양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체결했다.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당시 협정의 주체 또한 황제가 아닌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 순종의 자리는 없었다. 순종은 의례의 수행, 일본 천황에게 감사의 전보 보내기, 일본국 주요 인사의 접견 등의 역할만 담당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살해됐지만, 일제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한반도 무력 강점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토 이후 소네 아라스케가 잠시 통감이 됐다가 군부 출신 데라우치가 1910년 5월 통감으로 부임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더욱 노골적으로 바뀌었고 결국 강제 합병으로 이어진다.


일제는 친일파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앞세워, 조선인이 원해서 조선을 합병한다고 선전하면서 합병을 추진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순종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상의해서 협정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간에 맺어진 협정 제1조 내용이다.


8월 29일에는 순종의 이름으로 한일합병이 발표됐다. 당시 순정황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파악하고 마지막까지 협정 체결을 막기 위해 옥새를 치마 폭에 숨겼다고 한다. 하지만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옥새를 빼앗아 위임장에 도장을 찍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순종은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고 항변했지만 500여년간 이어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모습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당시 합병조약에 서명한 순종의 수결(手決)이 위조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마지막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왕으로 강등돼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으로, 태황제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황태자는 왕세자로 지위가 강등됐다.


일제에 의해 ‘이왕’의 신분으로 격하된 순종은 창덕궁에서 쓸쓸히 말년을 보냈다. 현존하는 초상화에도 일부 드러나지만 순종은 생전에 병약했고 눈빛은 초점이 없는 모습이었다. 일설에는 고종을 독살하려고 누군가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탔는데, 커피 맛을 아는 고종은 이를 뱉어낸 반면 순종은 이를 모르고 그대로 마신 후로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망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마지막 황제는 1926년 4월 25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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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 홍릉의 바로 옆에 위치한 유릉이다. 순종의 사망 후 첫 번째 부인인 순명황후 무덤이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순명황후의 무덤은 처음에는 현재의 어린이대공원 인근에 조성돼 무덤을 유강원이라 했는데, 이때 이곳으로 옮겼다. 지금도 어린이대공원 일대를 능동(陵洞)이라 하는 것은 유강원이 이곳에 있었던 인연 때문이다. 1926년 순종과 순명황후의 합장릉으로 조성된 이곳에는 1966년 승하했던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가 오게 됐다. 순정황후가 유릉에 묻힘으로써, 유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동봉삼실(同封三室·같은 봉분 아래에 있는 3개의 방)의 합장릉 형식을 띠고 있다.


4년 재위 기간 동안 순종은 일제의 강제병합 전략에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물론 러일전쟁마저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이에 동조한 일진회 등 친일파의 득세로 힘겨운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국격과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에는 너무나 능력 없고 의지도 없었던 ‘마지막 황제’였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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