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의 몽골 제국

(Mongol Empire of Kublai Khan)

 

1215년 칭기즈칸의 손자(4남 톨루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쿠빌라이는

어려서는 별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1251년이 될 때까지 톨루이 가문이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었고,

쿠빌라이는 톨루이 가문에서도 둘째 아들이라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소르각타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훗날 그가 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중국을 다스리는 데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1259년 형 뭉케가 남송원정 도중에 사망하자 모든 이목이 쿠빌라이에게 집중된다.

칸으로 즉위함에 있어 막내동생인 아릭베케와 대립하게 된다.

1260년, 쿠빌라이는 상도에서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제5대 대칸에 오르게 된다.

아릭베케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하는데 킵차크,

어거데이, 차가타이칸국이 아릭베케의 편에 서고

훌레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베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겨 대도()라 일컫고,

이어 1271년 국호를 원()이라 칭하였다.

대원제국 수립 후 내적으로는 아릭베케의 잔당인 하이두(어거데이의 손자)와

도와(차가타이의 손자)의 반란으로 인해 30여 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났다.

쿠빌라이가 실시한 주요 외정으로는 고려, 동남아시아, 일본 정복이 있다.

쿠빌라이의 만년은 만주에서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제국 각지에서의

잇따른 반란과 끝날 줄 모르는 통치권 도전으로 시끄러웠다.

게다가 의지했던 황후 차비가 1281년에 죽고,

그녀가 낳은 황태자 친킨 역시 1285년에 병사하자 쿠빌라이는 인간적인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후 10년 동안 정치 업무를 새 황후인 남비에게 일임하고 폭음과 폭식을 거듭했다.

그 결과 급속도로 건강을 해친 그는 1294년 사망하고 친킨의 아들인 테무르가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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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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