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법과 형벌론

법률(法律)을 숙지하고 남형(濫刑)을 경계하라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본다.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기획: 실학박물관

 

순조 초년,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 유배지에서 18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조선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 그의 유배 생활에 대해 “개인에게는 불행이지만, 조선의 역사에는 행운이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다산은 고립무원의 유배지에서 고독과 절망을 이겨내면서 학문적으로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탈법과 부정, 형장 남용으로 얼룩진 조선의 현실과 피폐한 백성들의 생활상을 목도하고, 법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급한 대책을 그의 책에서 하나하나 제시하였다. 이 글은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통해 당대의 법집행 상황과 다산의 형벌론을 추적해본다.

목민심서, 실학박물관 소장

“법은 임금의 명령”

조선왕조는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을 받아들여 기본적인 형법전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대명률> 규정 가운데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거나, 새롭게 법규를 신설할 필요가 있을 경우 수교(受敎, 임금으로부터 받은 각종 행정 명령서)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새로 만든 법규(수교)는 특별법에 해당하며, <대명률>은 일반법으로서 기능했던 셈이다. 현행 법령들을 모으고 왕조의 통치 질서를 정비하기 위해서 조선 왕조 5백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법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영ㆍ정조 시기에는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고 체제 정비를 위해 법전 편찬과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영조는 조선전기 <경국대전> 간행 이후 200여년 만에 새롭게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였으며. 민ㆍ형사 법제를 바로잡고 각종 가혹한 악형(惡刑)을 금지시킨 것도 이 무렵이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또한 형정(刑政)을 왕정(王政)의 가장 시급한 일의 하나라고 인식하였다. 즉위 직후에 형구(刑具) 규격을 세밀하게 규정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만들고, 형조의 소관 사무를 정리한 <추관지(秋官志)>를 편찬하게 한 것도 그 한 예이다. 살인을 비롯한 중범죄자들에 대한 신중한 판결을 위해 역대 국왕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옥안(獄案)을 경전 보듯이 읽었다. 이러한 정조의 노력은 재위 기간 그가 판결한 사건을 모아 놓은 <심리록(審理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처럼 18세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형정 정비 작업은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19세기 세도정치의 혼란 속에서 지방사회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면서 지방관들의 법 집행 과정에서의 문란이 여기저기서 노출되었다. 비판적 지식인 다산 정약용으로서는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먼저 다산 정약용의 법에 대한 인식을 <목민심서>의 다음 글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법(法)이란 것은 임금의 명령이니, 법을 지키지 않음은 곧 임금의 명령을 좇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하 된 자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목민심서> 봉공(奉公) ‘수법(守法)’조

다산은 법을 국왕의 명령이라고 규정짓고 철저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의 준법 의식과 법에 대한 신념을 확인할 수 있다. 고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분쟁을 조정해야 하는 지방관에 있어 풍부한 법 지식은 필수적이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다. 다산은 사대부들이 평소 법률을 등한시하고 관련 서적을 제대로 읽지 않는 당시 세태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기껏해야 과거시험과 관련한 사부(詞賦)에만 힘쓸 뿐, 기본적인 법률 서적인 <대명률>, <속대전>과 법의학 서적인 <세원록(洗寃錄)>도 읽지 않고 6품에 오르면 군현의 수령으로 파견되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속대전>, 영조대에 편찬된 종합 법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다산은 평소 법을 숙지해야 함은 물론, 실제 재판에 임해서는 다음 두 가지 태도를 특히 강조하였다. 먼저, 아전과 기생 등 아랫사람에게 소송을 맡기지 말고 자신이 직접 챙기라는 것이다. 한갓 서리(胥吏)의 입만 쳐다보고, 총애하는 기생의 손에 따라 판결이 번복되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옥사를 판결할 때 공평무사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평무사하게 한다는 것은 신중하면서도 맹쾌하고(明愼), 지체하지 말며(無滯), 의심이 없도록 하며(無疑),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無寃)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법을 중시하고, 재판에 임하는 목민관의 자세를 특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사회 형장 남용의 실상

앞서 다산은 관리들이 법률을 익히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 바 있었는데, 당장 눈앞에서 그가 목도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방사회에서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법으로 정해진 것 이상의 형벌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산이 지적한 지방사회 형장 남용의 실상은 탈법과 불법 그 자체였다.

원래 고을 수령이 자체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형벌권에는 제한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형벌은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 등 오형(五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령은 이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인 태형 50대까지 칠 수 있었다.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형장 집행 권한이 훨씬 적었음을 알 수 있는데, 관찰사의 형벌권도 유형까지이고, 사형 판결은 오직 국왕만이 가능하였다. 수령이 태형 50대를 넘는 형벌을 집행하거나, 중죄인을 심문할 때는 반드시 관찰사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현실은 이런 규정을 제대로 지켜는 관리가 많지 않았다. 먼저 다산은 당시 관리들이 태(笞), 장(杖), 신장(訊杖)만으로는 통쾌한 맛을 느끼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써서는 안 되는 곤장(棍杖)을 즐겨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원래 규정에는 군사 업무와 관계된 경우가 아니라면 곤장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관찰사조차도 조정 관리를 지낸 사람에게는 함부로 곤장을 가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긴 관리는 남형율(濫刑律)로 처벌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내지(內地)의 수령은 목사(牧使), 부사(府使)도 곤장을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는데, 근래 습속이 흐리멍덩해져서 법규를 알지 못하여 죄를 다스릴 때 오직 곤장을 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문할 때 정강이를 30대까지 때리는 신장(訊杖) 또한 관찰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멋대로 시행하였다. 한번 수령의 비위를 건드리기만 하면 아전이나 좌수와 별감, 심지어 예로서 대우해야 할 향교 유생과 사족(士族)에게까지 멋대로 신장을 써서 고문을 하였다.

지방관들의 곤장과 신장의 남용과 함께 또 하나 우려스러운 일이 도적을 다스릴 때 쓰는 악형(惡刑)을 일반 평민들에게 경솔하게 시행하는 일이었다. 조선후기 강ㆍ절도에게 시행한 무거운 고문으로 난장(亂杖)과 주리(周牢)가 있었다. 난장은 양쪽 엄지발가락을 한데 묶어 모아 놓고 발바닥을 치는 것인데, 1770년(영조 46)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정강이 사이에 몽둥이 두 개를 끼우고 벌려서 고통을 가하는 주리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수령이 종종 시행했다고 한다. 다산은 백성들이 한번 주리 틀기를 당하면 평생 부모 제사를 지내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망가지는 후유증을 가져온다고 언급하여 절대 이런 악형을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예(禮)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최선이며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말단의 방법이라고 인식하였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다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통치를 위해 불가피하게 형벌을 쓸 수는 있지만, 형장을 남용하는 것은 결코 풍속을 교화시키고 고을을 통치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다산은 형장을 가할 때 부녀자와 노약자에 대해서는 특히 배려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큰 죄를 저지는 부녀자에게 불가피하게 형장을 가할 수는 있지만, 볼기를 치는 일은 욕스러운 일이므로 차라리 신장으로 종아리를 치라는 것이다. 아울러 어린이와 나이가 많은 노인, 그리고 병이 든 자들은 법전의 규정을 준수하여 고문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남형을 경계하는 가운데 특히 노약자나 여성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은 다산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죄수들에게도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다산은 여러 해에 걸친 벼슬살이와 유배지 강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대 지방사회 형정의 실상과 문제점을 예리하게 진단하였다. 그런데 그의 연민은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감옥에 갇힌 하찮은 죄수들에게까지 미쳤다. 다산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의 형전(刑典)에 ‘휼수(恤囚)’ 조문을 별도로 두어 당시 감옥에서 자행되던 각종 폐단을 열거하며 목민관의 이들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였다.

먼저 다산은 당시 감옥을 ‘양계(陽界)의 귀부(貴府)’, 즉 이승의 지옥과 같은 곳이라 묘사하고 그곳에 갇힌 옥수(獄囚)들의 고통을 잘 헤아려주는 것이 어진 사람의 도리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다산 자신이 감옥에서 옥고(獄苦)를 치른 바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 1801년(순조 1) 자신의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의 천주교 관련 서적이 발각되면서 천주교와 관련된 남인들이 대거 체포되는 가운데 자신 또한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같은 해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으로 다시 한 번 유배지 장기에서 국문장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던 그였다.

그는 감옥살이의 고통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형틀의 고통, 토색질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을 말한다. 사실 조선시대 감옥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미결수들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형이 확정되면 신체형을 당하거나, 특정 지역에서 노역과 귀양살이를 하거나, 사형에 처해지거나 하는 것이 있었을 뿐 지금처럼 감옥에서 징역을 살게 하는 형벌은 없었다. 하지만 옥사가 발생하면 사건 처리가 지체되기 일쑤였고, 범인뿐만 아니라 관련자나 목격자들까지도 확정 판결 때까지 기약 없이 옥에 오래 갇혀 있어야 하는 체옥(滯獄)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백성들도 생활하기 빠듯한 상황에서 이들 죄수에게 번듯한 음식과 잠자리를 내줄 리 만무하였고, 이 때문에 다산이 열거한 것처럼 감옥에서 죄수들은 여러 가지 고초를 견뎌야 했다.

<흠휼전칙>, 정조 때 형구의 규격과 사용 권한을 분명히 한 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특히 감옥 내에서 토색질과 가혹 행위는 상상 이상이었는데, 옥졸들이 고참 죄수들과 합세하여 신참 죄수들을 괴롭히고 돈을 뜯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문례(踰門禮), 지면례(知面禮), 환골례(幻骨禮), 면신례(免新禮) 등은 다산이 지목한 당시 감옥 내에서 행해지던 다양한 신고식이었다고 한다. <목민심서>에 나오는 1783년(정조 7) 황해도 해주 감옥의 신참 죄수 박해득(朴海得) 사망 사건은 바로 옥졸과 고참 죄수들이 신참 죄수의 돈을 뜯기 위해 가혹 행위를 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다산은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각각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큰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백성들을 가급적 옥(獄)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농민들이 농사철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모내기 할 때나 추수기에는 살인 사건과 같은 중대 사건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정범(正犯) 이외에는 가두지 말라고 당부한다. 또한 불가피하게 감옥에 갇힌 죄수의 경우 명절날에 집으로 휴가를 보내주는 은혜를 베풀어주고, 심지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자손을 낳을 수 있도록 그의 부인이 감옥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할 것을 수령들에게 조언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방 각 고을에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달리 다른 지방에서 유배 온 죄인들도 있었다. 유배인들은 정치범에서부터 일반 형사 잡범에까지 다양하였는데, 정조대에는 한 고을에 유배인이 10명을 넘지 않게 하였다. 다산은 감옥 내 죄수와 별도로 유배 온 죄인들의 슬프고 측은한 정상을 헤아려서 이들에게 집과 곡식을 주어 편안하게 머물게 하는 것이 수령의 책임임을 환기시켰다. 아울러 귀양 온 자들에게 휴가를 보내주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집안이 확실한 경우 못할 것이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법을 지키되, 그렇다고 법조문에만 메여서는 곤란하다는 생각. 이는 법과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에 맞추어 유연하게 정책을 펼칠 줄 알았던 다산 정약용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흠흠(欽欽)’, 삼가고 삼가라

다산의 형정론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그가 살인 등 인명(人命) 사건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산은 사망자의 사망 원인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법의학, 형법 등에 관한 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는 전문적인 학문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성리학 이외에 법학, 의학 등 실용 학문에 대해 등한시하던 당대의 사대부들의 태도와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는 지점이다.

 

 

 

 

 

 

 

 

 

◀<흠흠신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다산은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는데, 그것이 바로 <흠흠신서>의 편찬이었다. <흠흠신서>는 당시 중국과 조선에서 발생한 다양한 살인 사건을 유형별로 분류, 정리해놓 고 수사 및 재판과 관련한 문제점과 자신의 비평을 덧붙인 것으로 조선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법률 서적이다. 다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판례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바로 군현에서 발생하는 살인 사건의 일차적인 조사, 처리를 맡은 지방관의 무거운 책임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흠흠신서> 서문에서 다산은 당시 지방관들의 미숙한 살인 사건 처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즉, 그에 따르면 살인 사건은 군현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지방관이 항상 접하는데도 사건을 수사하고 죄인을 확정하는 것이 엉성하여 늘 잘못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조 치세에는 옥사 처리를 잘못한 감사와 수령이 파직당하는 등 강한 문책이 있었지만, 순조 이후에는 기강이 바로서지 않아서 억울한 옥사가 더욱 늘어났다고 당시 상황을 꼬집었다.

실제로 당시 지방 고을에서 살인 사건이 한번 발생하면 해당 마을은 쑥대밭이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수령이 시신을 검시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아전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큰 사건이 발생하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한 아전(衙前)과 군교(軍校)들이 시신 검시 및 수사를 빙자하여 민가가 쳐들어가 마음대로 설쳐대며 세간을 약탈하였다. 또한 살인 사건 가해자 외에도 죄 없는 목격자, 이웃 사람들이 덩달아 조사를 받게 되면서 무고한 사람들이 몇 개월씩 감옥에 수감되며 집안 재산이 거덜 나고서야 풀려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살인 사건이 한번 터지면 한 마을이 패촌(敗村)이 되기 십상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민간에서는 살인 사건이 발생해도 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건을 관에 고하지 않고 숨기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유배지에서 오랫동안 백성들과 호흡한 그는 경험상 살인 사건의 열에 일곱, 여덟은 관에 고하지 않고 처리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다산의 지적이 다소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살인 사건 수사와 관련한 폐단이 얼마나 심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살인 사건 처리와 관련한 당시 잘못된 관행과 가렴주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다산은 옥사를 처리하는 관리의 핵심 덕목을 제시하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책 제목에 나오는 ‘흠흠(欽欽)’이었으니, 인명에 관한 일을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흠흠’, 즉 옥사 처리를 삼가고 삼가야 한다고 해서 모든 죄를 덮어 놓고 너그럽게 용서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용서할 수 있는 사안은 융통성을 발휘하되 결코 원칙을 어기지는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인명 존중의 정신과 함께 법치를 구현시킬 것을 강조한 그는 <흠흠신서>에서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구체적인 사례 별로 예시해두어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좋은 지침이 되게 하였다.

 

<증수무원록대전>, 시신을 검시할 때 꼭 살펴보아야 할 주요 부위를 표시한 그림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말의 감옥

오랜 유배 생활 동안 백성을 위하는 학문을 멈추지 않았던 다산 정약용.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항상 백성의 편에 서서 당대의 잘못된 관행과 탈법을 비판하며 진지한 해결책을 모색하던 그의 법사상과 형정론은 그가 왜 오늘날까지도 조선시대의 위대한 학자,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정조대의 <심리록>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대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 법제사 및 사회사 분야를 연구해 왔으며, 현재 조선후기 사회변동의 의미와 성격을 비교사적 시각에서 해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역사>한국사>조선역사  2015.07.21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4&contents_id=94609&leafId=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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