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적 12개의 수수께끼 

 

구리 두루마리

보물은 어디에?

 

지금까지 발견된 사해사본들 중의 하나인 구리 두루마리에는 60가지 이상의 보물목록과 감춰진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 구리 두루마리는 1952년에 발견되었는데, 구리에 기록된 유일한 사본이다. 어쨌든 이 기록의 몇 구절은 아직까지 해석이 불가능하여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보물들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양의 금과 은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이 감춰진 장소에 대한 마지막 설명과 관련해서 이 구리 두루마리는 또 다른 두루마리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기록에는 이 보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 목록에 기록되어 있는 보물 중에서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이런 상황이나 장소묘사의 부정확성 등으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놓고 발전된 전설에서 나온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쿰란

에세네파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쿰란의 유적지와 그 주위의 동굴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현세기의 가장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해사본이 바로 그것이다. 1947년 사해에 근접한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시작으로 하여 그 근처의 동굴과 쿰란 유적지의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었다.

 

고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든 쿰란의 거주자들은 하스모니아시대(기원전 2-1세기)부터 시작하여 로마인들에 의해 유대인들의 대반란이 진압되기까지(기원후 68년) 이 지역에 살았다.

 

지금까지 쿰란에 거주하던 이 종교인들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이들은 제 2 성전시대의 중요한 종파 중에 하나이던 에세네파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다. 늙은 펠리니우스는 기록하기를 이 에세네파 사람들이 사해 서쪽 해안, 대추나무들 사이, 엔게디 북쪽에 살고있다고 했다. 쿰란 언덕이 위치나 발굴을 통해 밝혀진 쿰란 거주자들의 단순하고 금욕적인 생활상은 에세네파에 대한 이런 표현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쿰란의 거주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관련된 책들을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었으며, 어떤 위험이 닥쳐오자 이 두루마리들을 쿰란 근처 동굴에 숨겼다고 한다.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조직이나 규율을 묘사하고 있는 두루마리들과 발굴에 의해 드러난 유물들 간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이곳에서 최근 발견된 토기조각 위의 기록에 의하면 '호니/후니()'라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카트 하야하드(함께 하는 종파라는 뜻)'라는 이 단체에 기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위의 주장을 반증해 준다.

 

몇몇 학자들은 쿰란 유적지와 사해사본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쿰란 유적지는 지방의 유지의 주택, 혹은 작은 요새였을 뿐이다. 로마에 대항한 유대의 반군들은 제 2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 다양한 두루마리들을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사해 근처의 동굴들에 감추었다. 이런 과정에서 쿰란 거주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수는 있다.

 

마사다

이 요새를 건축한 사람들과 거기서 죽은 사람들

 

과연 마사다는 하스모니아인들이 건축했는가? 과연 마사다를 지키던 사람들은 자살했는가? 요셉 벤-마티티야후에 의하면 대제사장이었던 하스모니아의 요하난(아마도 알렉산더 야나이일 것이다)이 이 장소에 요새를 짓고 마사다라고 명명했다. 사해지방에 있는 하스모니아시대의 다른 요새들은 벤-마티티야후의 기록을 반증해준다.

이 주장이 옳다면 하스모니아인들은 헤롯보다 앞선 건축자가 된다. 헤롯은 기원전 37-31년에 마사다에 요새와 궁전을 지어 유사시 도피처로 준비해 두었다.

 

마사다를 발굴한 에후드 네쩨르 교수에 의하면 이런 기록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고고학적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하스모니아시대 마사다의 존재여부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하스모니아시대로 분류할 수 있는 유물은 두 가지가 있다: 두 개의 물저장용 웅덩이와 알렉산더 야나이 시대의 동전들(기원전 103-76).

 

마사다의 멸망에 대해서 네쩨르는 고고학적인 발굴결과 벤-마티티야후의 기록대로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했다고 말한다. 고지 위에는 수비용으로 건설된 목재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수비자들은 멸망 이전에 나무로 만든 천장을 분해하여 목재로 이용했다), 고의로 불을 지펴 자신들의 재산을 파괴한 흔적도 발견된다. 그러나 마사다의 멸망과 관련된 가장 큰 수수께끼는 과연 요새를 수비하던 사람들이 자살을 했느냐 아니면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 뿐이냐 하는 것이다. 네쩨르에 의하면 자살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한다.

 

벤-마티티야후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할 열 명을 제비뽑기로 선정하고 그 중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결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사다에서 발견된 글자가 기록된 몇 백 개의 토기조각들 중에서 약 11개는 바로 이 제비뽑기에 사용된 것이라고 이갈 야딘은 주장한다. 이 토기조각들에는 각각 인명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벤야이르()'라는 이름도 있는데 엘리에제르 벤-야이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네쩨르는 인명이 기록된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는 고대의 기록을 증명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남쪽 절벽의 동굴에서 발견된 유골도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유골들이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그 사인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아직 논란이 많다.

 

여리고

히샴궁전은 누가 지었는가?

 

여리고(히르밧 엘-마프쟈르)에 있는 오마야시대의 히샴궁전 유적은 과거에 조각과 모자이크, 부조들로 가득한 화려한 궁전이었음을 증명해준다. 조각들 중에는 전사들, 수영하는 사람들, 춤추는 사람들, 그리고 전설적인 동물들의 모습이 남아있다. 발견되어 재구성된 대부분의 조각들은 현재 예루살렘 록펠러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슬람 예술의 전문가인 히브리대학의 리나 탈감 박사는 말하기를 당시 조각예술은 비종교적인 이슬람 건축예술 분야에 아직 허용되었는데, 히샴궁전은 오마야시대의 어떤 다른 궁전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다양한 예술작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이 궁전을 건축한 사람은 누구인가? 할리프 알-히샴인가, 아니면 그의 조카 할리프 알-발리드2세인가? 탈감은 이 궁전이 724-743년에 지배자였고, 존경받는 할리프였으며, 안정적인 성격의 히샴의 작품인지 아니면 그의 조카로 다음 할리프를 지냈고 소문난 난봉꾼이며, 탐미주의적인 전원생활 찬양가 알-발리드 2세(743-744)의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 유적지에서 히샴의 이름이 새겨진 기록이 발견되어 그가 이 궁전의 건축자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시리아에 궁전을 지었던 그가 이스라엘 땅에도 이런 궁전을 지으려고 생각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알-발리드는 지배연한이 너무 짧아서 이런 규모의 궁전을 지을 여유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온건하면서도 독특한 궁전의 건축양식은 알-발리드의 건축설을 뒷받침해준다. 이 궁전의 건축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동원되었다: 비쟌틴-콥틱 예술가는 물론 페르시아의 예술가들도 동원되었다. 이들은 서로 절충되면서도 감각적이고 창조적인 예술품들을 남겼다. 이 궁전의 중앙 홀에는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은 포도주와 물로 채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알-발리드는 그 연못가에 앉아서 시인들의 낭독을 듣기를 즐겼다고 한다.

 

헤로디온

사라진 무덤

 

헤롯왕은 기원전 4년에 여리고의 궁전에서 사망하였으나, 시체는 화려한 장례식을 거쳐 그의 거대한 여름궁전이었던 헤로디온에 옮겨 묻혔다. 요셉 벤-마티티야후에 의하면 헤롯왕 자신이 헤로디온에 묻히기를 원했으며, 이미 살아생전에 무덤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그의 관은 보석이 박힌 금으로 만들어졌고, 왕은 금관과 왕의 홀, 왕의 예복을 입고 장사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몇 백 명의 귀족들과 군 장성들, 그리고 신하들이 참석했다.

 

헤로디온을 발굴한 히브리대학의 에후드 네쩨르 교수는 언덕마루에 있는 비쟌틴시대의 교회에서 이차적으로 사용된 매우 화려한 건축용 석재를 발견하였다. 이 석재는 원석을 쪼아 만든 장식이 화려하고 무겁고 큰 돌로 주위를 돌아가며 깎은 자국이 있다. 이 돌은 성전과 당시 무덤 비석에 주로 사용되던 전형적인 석재이다. 네쩨르는 이 돌들이 비쟌틴시대의 교회 근처에 있던 다른 큰 건물(아직 발견되지 않은 큰 무덤?)에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짐작한다. 가까운 장소에서 대형 미크베(정결례용 목욕탕)와 약 350미터에 달하는 일종의 경주트랙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헤롯의 장례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물들에 비추어 보아 네쩨르는 헤롯의 무덤이 언덕마루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블레셋 갓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이 연구되기 시작한 이래 학자들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을 찾으려고 꾸준히 시도하였다. 약 2년 전에 텔-미크네에서 '에크론'이라는 이름이 적힌 기록이 발견되어 이 곳이 블레셋의 에글론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아스글론과 아스돗은 아직까지 성서시대의 이름을 지키고 있으며, 이미 발굴되어 블레셋 물질문명을 대변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아직까지 남은 미스터리는 갓과 가자의 위치이다. 갓은 그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유일한 블레셋 도시이다. 일반적으로는 세펠라지역(구릉지)의 텔-짜핏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갓이 북부 세펠라에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갓이 에글론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블레셋의 두 대형도시가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갓은 좀 더 남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텔-짜핏에서 이루어진 발굴에서는 많은 블레셋 토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이 곳이 블레셋의 거주지였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갓으로 확정하기에는 아직 무리다. 이 곳에서 재개된 발굴 책임자인 바르-일란 대학의 아하론 메이르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 현재 유다왕국 시대의 지층까지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이 시대에 이미 블레셋문명의 특징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발굴이 더 진행되면 혹시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편 가자는 고대의 이름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에글론을 발굴한 히브리대학의 트루다 도탄 교수는 근처에 블레셋의 가자라고 짐작할만한 다른 큰 거주지가 발견되지 않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가자에 옛 블레셋 도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현대 도시가 고대 유적지 위에 그대로 건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유물들이 학자들간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게젤

신비의 비석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게젤은 바로 왕이 자신의 딸과의 결혼선물로 솔로몬 왕에게 선사한 도시이다. 텔 중앙부분의 북쪽 끝에서 솔로몬 왕 시대 바로 이전 지층에 속하는 신비의 제단이 발견되었다. 이 제단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한 줄로 늘어선 거대한 열 개의 돌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들은 대개 그 높이가 3미터 이상이 된다.

이 비석들 서쪽에는 대야 모양의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발견되었다. 이 비석들은 중기 청동기시대, 기원전 약 17-16세기 가나안 도시 게젤이 발전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건설되었다.

사실 이 제단은 고고학자 멕칼리스터가 금세기 초에 발견하였다. 그는 이 유적을 "제 2 셈족시대"에 분류하였는데, 물론 이 시대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중기 청동기시대와 비슷한 연대이다. 멕칼리스터는 이 제단이 성서에 나오는 산당의 하나이며 이 비석들은 가나안의 아세라상이라고 해석하였다. 혹자는 이 비석이 가나안의 서로 다른 지파나 도시들이 동맹을 맺는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유적들이 어떤 신을 섬기기 위해 건설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의식적 행사가 거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도시

 

예루살렘에 관련된 대부분의 질문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역과 관련이 된다. 다윗성의 G 지역에서는 소위 '계단식 건축물'이라고 불리는 비스듬한 구조물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큰 돌로 지어져서 윗부분의 궁전이나 요새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연대에 대해 논란이 있는(유다왕국 초기, 즉 기원전 10세기, 혹은 그 이전 청동기시대 말) 이 건축물 이외에는 예루살렘에서 다윗이나 솔로몬과 관련된 아무런 유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윗왕조의 왕궁은 물론 역대 왕들의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다. 철기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은 모두 분열왕국시대의 것이고, 주로 히스기야왕(기원전 8세기) 시절의 가옥과 성벽이 발견된다.

 

예루살렘 연구가 가비 바르카이 박사는 말한다.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기록자료가 있지만 그에 비하여 고고학적인 유물들은 항상 일정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하였다는 점이다. 어떤 시대든지 바로 전 시대의 유적을 파괴하고 건설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유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 시대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일 누가 다윗이 상상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면 히스기야의 궁전은 어디 있냐고 묻고 싶다. 유적이 없기는 '엘-아마르나 시대(기원전 14세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집트 엘-아마르나 서고에서 발견된 믿을만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 시대에 예루살렘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 2 성전시대에 예루살렘은 두 번에 걸쳐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원래의 성벽 북쪽으로 '제2, 제 3 성벽'이 건설되었다. 제 2 성벽은 헤롯왕이 건설했다고 요셉 벤-마티티야후는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건물인 헤롯의 궁전과 경마장, 야외극장, 그리고 일반 극장 등도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에 학자들은 100년 이상 '마데바지도'에 나오는 6세기의 건물인 '네아교회'를 찾다가 70년대 초반에 예루살렘 유대인구역에서 이 교회를 발견한 바 있다.

 

므깃도

고대의 제단에서 섬기던 신은 누구인가?

 

학자들은 므깃도의 동쪽 부분에서 크고 인상적인 건물들을 발견하고 신전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 섬기던 신이 누구이며 어떤 의식적인 행사가 치러졌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초기-중기 청동기시대(가나안시대)에 므깃도는 이미 그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초기 청동기시대, 기원전 약 3000년 경 가장 오래된 신전이 여기에 세워졌다. 이 신전은 중앙에 작은 제단이 있는 가로로 넓은 방 하나로 되어있다. 이 신전 뜰의 바닥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도식적으로 새긴 그림들도 발견되었다. 로버트 도이취에 의하면 이 신전 뜰은 훨씬 더 오래된 금석병용기의 신전이 있었던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 신전에서 행해지던 종교 행사를 알아볼 만한 신상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므깃도의 종교지역에서 2년 전에 재개된 발굴에서는 3개의 길고 두껍고 높은 벽들이 나란히 발견되었다. 이 벽은 50미터 이상 끊이지 않고 연결된다. 이 벽들은 아마도 기원전 2500년을 전후하여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벽 사이에서는 수천 개의 소뼈가 두꺼운 지층을 이루며 쌓여있었다. 이 뼈들은 아마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잡은 동물들의 남은 부분일 것이다.

 

학자들은 이 곳에서 이루어 졌던 초기 청동기시대의 종교행사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도이취의 말대로 이 건물은 중동에서 발견된 초기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가장 큰 것이며, 이와 유사한 다른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다. 그러나 이 건물에 대해서 학자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기원전 1000-2000경의 유적인 3개의 신전과 둥글고 큰 제단은 이미 20-30년대 미국 탐사단의 발굴 때 발견되었다. 미국인 학자들은 이 신전을 '메그론'이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현재 그리스의 미케네에서 발견된 조금 후대의 비슷하게 생긴 에게해식 건물에서 따온 것이다.

 

텔 단

누가 '다윗 왕조'라고 기록된 비석을 파괴했나?

 

몇 년 전에 텔 단에서 발견된 기원전 9세기 후반의 기록에는 성서 밖에서는 처음으로 '다윗 왕조(유다왕조)'라는 표현이 남아있다. 이 발견은 근래에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록은 아람의 왕(하사엘?)이 세운 승전기념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이미 고대에 파괴되었고, 단의 바깥 성문 근처 바닥을 까는 재료로 재사용된 것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다.

 

이 기록에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이나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스라엘), 유다 왕 아하지야의 이름도 일부분 남아있다. 성서는 기원전 9세기에 이스라엘과 아람이 치른 많은 전쟁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호람과 아하지야의 동맹군은 라못 길르앗에서 아람 군에게 패배하였다. 히브류 유니온 컬리지를 대표해서 텔 단의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아브라함 비란 교수는 말한다: "'다윗 왕조'라는 말이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건에 유다왕도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통일왕국은 물론 다윗과 솔로몬이 실제인물이 아니라고 믿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기록은 하나의 저주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지켜내기 위하여 문제의 표현을 '베이트 도드/두드(요리용 냄비)'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다윗 이후에 150년이 흐른 상황에서도 아직 유다왕국을 다윗왕조라는 말로 부르는 분명한 증거이다."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는 문제들도 있다.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학자들은 하사엘이 기록자라고 믿는다. 과연 하사엘이 이 글을 기록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하사엘을 믿어야 하나, 아니면 예후가 반란을 일으키며 두 왕을 죽였다고 기록한 성서를 믿어야 하는가? 이 비석은 정확히 언제, 그리고 어떤 역사적 배경 하에서 기록되고 단에 세워졌는가? 이 비석을 파괴한 사람은 누구인가? 만약 -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로 - 다메섹을 공격한 이스라엘 왕이 이 비석을 파괴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예후의 손자인 여호아스인가?

 

님로드

십자군의 요새인가 아니면 이슬람시대의 성인가?

 

과거에는 님로드성을 바니아스의 십자군 요새로 해석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역사자료에도 바니아스(님로드성이 있는 산기슭의 샘 근처 마을)의 요새가 '클리앗 아-쯔비바'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대부분 이 성이 십자군에 의해서 12세기경에 건설되었고, 십자군과 이슬람교도 사이에 주인이 서로 엇바뀌다가 1164년 이슬람교도들에게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다고 본다. 이 요새를 탈환하려는 십자군들의 시도는 그 이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성에 있는 여러 기록들은 아랍어로 쓰여있다. 요새의 건축양식도 십자군과 중세 이슬람의 양식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석재의 주위를 돌아가며 판 장식. 십자군의 건축양식에만 있는 특징적인 요소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몇몇 학자들은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요새는 샘 근처 바니아스 마을의 성벽의 한 망루를 지칭하는 것이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님로드 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학자들은 님로드 성이 십자군의 철군 이후, 이슬람시대, 약 13세기에 건설되었다고 본다. 아직 최종적인 결론은 없다.

 

하솔

사라진 서고

 

하솔에서 재개된 발굴에서 새로 드러난 도시국가시대 왕들의 궁전은 거기에 속한 큰 서고가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아직 그런 서고는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2000-1000년 사이에 하솔은 매우 크고 강한 도시국가로 몇 백년을 지속하고 있었다. 새로 발견된 궁전은 바로 이 후기 가나안시대에 속한다. 건축구조는 같은 시대 '알알락(시리아-터어키 국경지대)'의 궁전과 같다. 알알락 궁전에서는 왕궁서고와 몇 천개의 토판문서가 발견된 바 있다.

 

지금까지 하솔의 궁전에서는 몇 개의 방과 적은 수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문서들은 궁전보다 몇 백년이 앞 선 것으로 중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드러났다. 학자들은 만약 서고가 있었다면 궁전 안에 있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텔 아비브 대학의 성서 고고학 박사과정에 있는 로버트 도이취는 말하기를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비슷한 궁전에는 항상 문서로 가득찬 서고가 발견된다. 만약 궁전을 모두 발굴했는데 서고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지붕은 있는데 이를 받치는 기둥이 없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혹시 하솔을 점령한 사람이 서고의 모든 문서들을 전리품으로 가져갔거나 완전히 파괴했을까? 도이취는 서고는 귀금속도 아니므로 전리품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서고에 있는 대부분의 문서들은 상업에 관련된 장부나 영수증, 송장이고 역사문서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제공: 윤성덕,  '하아레쯔' 1998,10,1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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