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천재 작가' 이상(李箱)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글 | 김태완 조선pub 기자

 

 

이상의 외조카 문유성씨와 아내 박영분씨.
  혹자는 이상(李箱·본명 金海卿)의 작품보다 그의 생애가 더 난해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상의 친구인 화가 문종혁(文鍾爀·1910~?)은 산문 〈심심산천에 묻어주오〉에서 ‘그(이상)는 재기 있는 사람이었고 조숙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개성은 이미 그의 10대에 뚜렷이 나타났고 그의 내면세계는 이미 전개되었지만, 그 속을 들 여다보고 이해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스물여덟 짧은 생애 동안 이상(1910~ 1937)은 기괴하고 낯설며 창조적인 글쓰기로 당대 문단을 거꾸러뜨렸다. 1934년 이태준·박태원·정인택 등이 결성한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한 뒤 〈날개〉 〈종생기〉 〈봉별기〉 등의 소설과 〈오감도〉 〈위독〉 등의 시, 그리고 〈권태〉 〈산촌여정〉 등의 수필을 남겼다. 이상의 출현 이전 이후에도 이상처럼 글을 쓰는 문인은 없었다. 시인 김기림은 이상을 ‘주피터’라 불렀고, 이어령은 ‘이카루스’라 칭했다.
 
  이상은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의 변동림(卞東琳·후에 김향안)과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이상이 이듬해 4월 17일 도쿄에서 폐결핵으로 숨지자 변동림(1916~2004)은 7년 뒤 화가 김환기(金煥基·1913~1974)와 재혼했다.
 
  사실, 이상의 혼인 사실은 호적에서 찾을 수 없다. 혼인신고를 안 했기 때문이다.
 
시인 이상.
  이상에게 후손이 없으니 기자는 방계를 찾아보았다. 이상의 할아버지 김병복(金秉福)은 독자다. 김병복은 형제를 낳았는데 장남이 김연필(金演弼·1883~1932), 차남이 김영창(金永昌·?~1937)이다. 이상의 아버지 김영창은 궁내부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다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후 이발사로 생계를 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 가끔 친구들에게 아버지를 ‘도코야(이발사)’라고 소개했다고 전한다.
 
  김영창은 아내 박세창(朴世昌· 1887~1979)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이상(金海卿)과 운경(金雲卿· 1913~?)과 옥희(金玉姬·1916~2008)는 세 살 터울이다. 해방공간 통신사 기자로 알려진 김운경은 1950년 6·25 직후 납북, 혹은 월북했다는 설이 있다. 2008년 호적이 말소됐다.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는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深川面) 출신인 문병준(文炳俊·1913~1990)과 결혼했다. 이상보다 세 살 아래인 문병준은 이상의 집에 놀러갔다가 김옥희를 처음 만나 연애 결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말년의 그녀는 치매로 고생하다 2008년 12월 9일 사망했다.
 
  문병준·김옥희 부부는 슬하에 4남 1녀를 뒀는데 장남 완성(文完成)은 1982년 사망했다. 기자는 서울 창동에 살고 있는 차남 유성(文有成)씨를 만났다. 《국민일보》 편집부국장을 지낸 정철훈씨 도움을 받았다.
 
  문유성(74)씨는 한국무역협회에 28세에 입사해 정년퇴직했다. 아내 박영분(朴榮分·71)씨는 1989년부터 서울 도봉구 창동에서 메밀전문식당 ‘감나무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는 2008년 사망
 
총독부 건축기사 시절의 이상(화살표).
  차남 문유성씨에게 물었다. “직장 동료들이 어머니가 이상의 여동생이란 사실을 아느냐”고. 그는 “모른다. 얘기를 거의 안 했다”고 했다.
 
  —왜요?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나요.”
 
  좀 심드렁한 말투다. 곁에 있던 아내 박영분씨가 말을 보탰다.
 
  “이 양반만 그런 게 아니에요. 시어머니(김옥희)도 그러셨어요. 언젠가 식당 벽에 이상 사진이랑 시를 써 붙여놨더니 싫어하셨어요.”
 
  남편 문씨의 말이다.
 
  “어머니가 ‘그거 다른 사람이 알면 뭐가 좋으냐. 네가 (이상을) 알 것도 없다’ 하셔서 사진이랑 떼버렸어요. 아버지(문병준)도 처남 얘기는 잘 안 하셨어요. 다들 말씀하시길 피하셨어요.”
 
  박씨는 “만약 떼지 않았다면 손님들이 더 많이 찾아왔을지 모른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럼, 언제 이상이란 존재를 알게 됐나요.
 
  며느리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1972년 시집와서 시댁 작은아버님(문병혁)댁에 인사드리러 간 일이 있어요. 그때 ‘이상 시인을 알고 시집왔느냐. 대단한 시어머니시니 잘 모시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속으로 ‘이 집안에 시집온 것이 영광이구나’고 생각했죠.”
 
  —어머니 김옥희 여사의 성격은 어땠나요?
 
  문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너그럽지 못하고, 보통사람처럼 온화한 성격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 박씨에게 “어머니 성격이 어땠어?”라고 되레 물었다. 그녀는 다소 신중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착하면서 성격이 날카로우셨어요. 자기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좀 까다로우셨어요. 베푸셔야 했는데, 시아버님과 안 맞는 이유가 그거예요.”
 
  —남편(문병준)과 갈등이 있었나 보네요.
 
  “…네. 왜냐하면 어머니가 조금…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셨어요.”
 
  어쩌면 김옥희는 오빠 이상의 성격을 빼닮았는지 모른다. 이상을 두고 그의 문우(文友)들은 한결같이 “이상은 고고(孤高)했다”고 평한다. 이상은 뜻이 안 맞는 사람과는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낯을 가렸다. 자신의 신변에 대해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일절 말하는 바가 없었다. 심지어 “언동(言動)이 젊은이답지 못하고 노인같이 조용하다”(문종혁)고 말할 정도다.
 
  이상의 성격을 짐작하기 위해 출생과정과 유년시절을 더듬을 필요가 있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은 조선총독부 하급직 관리로 재직하다 사업에 성공, 상당한 재력을 지녔으나 후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동생의 맏아들 이상을 양자로 데려다 길렀다.
 
  이후 김연필은 애 딸린 여성인 김영숙을 후취로 삼았는데 그녀가 데려온 사내가 김문경(金汶卿)이다. 이상의 이복동생이 되는 셈인데,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 알려진 게 없다.
 
  문씨의 말이다.
 
  “어머니가 예전에 쓰신 〈오빠 이상〉이란 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오빠의 성격을 서막부터 어두운 것으로 채운 사람은 우리의 큰어머니(김영숙)였다고 집안에서는 다 그렇게 생각한다. 김연필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큰오빠를 양자 삼아 데려다 길렀다. 그런데 자식을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시던 큰어머니께 큰오빠 존재가 마땅치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요.”
 
  이상은 어쩌면 아버지가 2명인지 모른다. 이발사인 가난한 아버지(김영창)와 총독부 관리인 아버지(백부 김연필)를 오가며 서로 다른 아들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의 시 〈오감도(烏瞰圖) 제2호(第二號)〉에 아버지에 대한 내면의 읊조림이 나온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졸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김옥희와 김문경, 그리고 ‘여동생’
 
이상의 가족. 가운데가 어머니 박세창, 왼쪽이 이상의 남동생 김운경, 오른쪽이 누이 김옥희.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유년시절을 보내며 냉랭한 서(庶)백모 김영숙과 대립했을 개연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심리적 좌절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5년 동안 자취생활을 같이한 화가 문종혁은 산문 〈심심산천에 묻어주오〉에서 이상의 서백모를 이렇게 묘사했다.
 
  〈상의 백모님은 이북 분이었다. 미모의 여인이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좀 독기가 서린 것 같은 얼굴이시다. 깔끔하고 다루기에 조심되는 성격이셨다.
 
  그러나 이 어른도 남편에게는 물론이요 시어머니나 조카 상(이상)에 대해 간섭하거나 대립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다만 그의 아들 문경이를 나무랄 때 보면 옆에서 보고 듣기에도 따금하시다.〉(p233, 잡지 《여원(女苑)》 1969년 4월호)
 
  —혹시 이상의 서백모 김영숙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나요?
 
  문씨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상의 이복동생으로 알려진 김문경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서울 제기동에 살 때 어느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분이 어머니에게 막 대하더군요. ‘밥 해 달라’고 하고… 그러면 어머니는 ‘밥도 못 먹고 다니느냐’고 하셨어요. 그분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 계통의 혈육이 아닌가 싶어요. 짐작건대 김문경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그분이 외할머니(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에게는 예의를 지키더군요. 한번은 그분의 여동생도 온 일이 있는데 그 여성도 어머니에게 막 대해요. ‘막 대한다’는 편하게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김문경의 여동생 말인가요?
 
  “친동생인지, 사촌동생인지 몰라도 여성분이 오셨는데 어머니(김옥희)가 ‘걔는 왜 안 오냐’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그 여성과 말다툼을 벌인 일이 있어요. 제가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그 여성이 외할머니를 어디서 나쁘게 평했던가 봐요. 그래서 어머니가 ‘왜 그렇게 말했느냐’고 따지더군요. 그 후로 (그 여성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문유성씨의 기억에 김문경과 그의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이상의 어머니 김옥희를 가끔 찾아왔다는 것이다.
 
 
  백부의 갑작스런 사망과 〈봉별기〉의 ‘각혈’
 
백부 김연필의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집. 이상은 이 집에서 백부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 사진은 《문학사상》 1973년 2월호에 실렸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이 1932년 5월 나이 쉰에 사망하자 그해 8월 서백모 김영숙이 데려온 김문경이 호주를 상속했다고 한다. 이상이 양자로 갔다면 호주상속은 이상의 몫이지만, 이복동생 김문경이 호주가 됐다. 당시 어떤 변고가 있었던 것일까.
 
  이상이 1936년 《여성》 12월호에 쓴 소설 〈봉별기〉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봉별기(逢別記)란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다.
 
  〈스물세 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날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이하 중략)〉
 
  나이 스물셋과 스물넷 사이, 이상은 백부가 살던 서울 통인동 154번지 집을 정리한 뒤 그때부터 효자동에 집을 얻어 친부모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결핵 치료와 요양을 위해 황해도 배천온천을 찾았고 그곳에서 기생 금홍과 만났다고 전해진다.
 
  —여동생 김옥희가 바라보는 큰오빠 이상의 여성관이 궁금합니다.
 
  며느리 박영분씨의 말이다.
 
  “시어머님(김옥희)이 옷 심부름을 다녔대요. 이상이 혼자 사니까 빨래를 박세창 할머니에게 부탁했나 봐요. 저기, 성수대교 넘어가기 전 황학동인가? 그쪽 어디에 이상이 살았대요.
 
  세탁한 옷을 들고 큰오빠 집에 가면 여성의 직감으로, 동거하는 여성이 있거나 그런 여성이 오간 흔적이나 느낌이 없었대요. 호사가들이 ‘복잡한 여자관계’를 얘기하지만 시어머님이 보시기에 전혀 그렇지 않았답니다. 온천 가서도 휴양을 겸해서 글을 쓰셨는데 왜 글은 그렇게 썼을까요?”
 
  한때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1986년 《문학사상》 4월호부터 이듬해 1월호까지 연재한 글에서 “이상의 소설 〈날개〉의 금홍이는 이상이 창조한 인물이다. 〈종생기〉 〈동해〉도 같은 경우다. 나는 이상과 방풍림을 걸으며, 많은 소재를 이상에게 제공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금홍이란 여성이 허구적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상은 백부에게 받은 유산으로 종로1가에 카페 ‘제비’를 열었고 금홍이란 여인과 동서(同棲)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옥희는 1985년 《레이디경향》 11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카페 ‘제비’에 가면 큰오빠는 홀에서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금홍이는 주로 뒷방에서 자고 있곤 했어요. 저는 주로 큰오빠의 빨랫감만 받아서 곧 돌아오곤 했기 때문에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지만 굉장히 살결이 곱고 예쁜 여자였어요. 그에 비해서 변동림이라는 여자는 얼굴은 금홍이만 못했죠.〉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의 恨
 
1965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의 인터뷰 기사.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은 어떤 분이었나요?
 
  문유성·박영분 부부는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을 평생 모시고 살았다.
 
  “외할머니(박세창)는 가끔 ‘외삼촌(이상)이 살았으면 너희를 좋아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어요.”(문유성)
 
  “그분은 94세에 돌아가셨어요. 1979년 4월생인 우리 딸 도희(文度嬉)가 태어나고 일주일 뒤였어요. 화장을 해서 도봉산에 뿌렸습니다. 평소 말씀이 없으셨고 안경도 안 쓰시고 온종일 방에 앉아 책만 보셨어요. 성경책을 열심히 읽으셨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사위(문병준)를 무서워하셨어요.”(박영분)
 
  문씨는 “아버지가 잘못이야. 장모가 책 읽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했다.
 
  —(박세창은) 맏아들 이상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던가요.
 
  문씨의 계속된 말이다.
 
  “외할머니는 이상이 숨진 그해(1937년) 상(喪)을 3번 치렀다고 합니다. 그해 4월에 남편(김영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어머니도 너무 놀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외할머니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고 두 시신을 한꺼번에 화장하고 돌아오니 이번에는 맏아들의 객사(客死)를 알리는 전보가 와 있더란 겁니다.”
 
  《조선일보》 1965년 5월 16일자 5면에 박세창의 인터뷰가 실렸다. 기사 제목은 ‘남편·시모·아들을 동시에 잃고 궁핍과 인종의 28년’이다.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은 주름살투성이다. ‘(이상 사후) 28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아들 얘기만 하면 어머니의 깊은 가슴의 묵은 상처는 쓰라리고 다시 목이 메인다’고 썼다. 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6·25 땐 둘째 아들이 소식도 없이 월북해 버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은 해방 전 ‘스스로 택한’ 남편과 만주로 떠나갔었고… 그러나 요절한 천재 아들을 생각하면 고생도 눈물도 달아나고 ‘내 아들에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가 되겠다는 투지가 솟았다고 한다.
 
  (중략)
 
  그러나 말도 없고 우울하고, 여인과의 동서(同棲)생활을 위해 훌쩍 어머니를 떠나버리기도 하는 무정한 아들을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다는 박 여사다.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녀석이 큰사람이 되려고 그러겠지” 하고 어머니의 천성(天性)으로 아들의 진가를 감득(感得)했던 것이다. 아직도 돋보기 없이 바늘귀를 꿸 줄 알고, 청각이 젊은이 못지않게 예민한 박 여사는 요즘도 《삼국지》와 야담(野談)을 열심히 읽고 있다.〉
 
  —신문 기사에 이상의 동생 김운경이 월북했다고 합니다.
 
  문유성씨의 말이다.
 
  “부모님을 따라 1947년인가 48년인가 평북 심천에서 개성을 거쳐 서울에 온 적이 있어요. 당시 서울에서 어머니(김옥희)가 어떤 젊은 부부와 만났던 기억이 나요. 당시 어머니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이상의 동생’이라고 하셨어요. 치마저고리를 입었던 여성이 아주 미인이었는데 김운경의 아내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어머니는 생전에 작은오빠에 대해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외할머니(박세창)도 ‘사상적으로…’라며 말끝을 흐려 더는 말씀을 않으셨어요.”
 
  이상이 말수가 적고 책을 즐겨 읽었던 것은 어머니 박세창의 영향이 컸던 것일까. 말년의 박세창은 말없이 온종일 책만 읽었다고 전한다. 친구 문종혁의 산문 〈심심산천에 묻어주오〉에 이런 글이 나온다.
 
  〈그는 벌써 책을 골라 읽기 시작한다. 이상은 서서 읽고 있다.
 
  글을 수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읽는다는 말이 있다. 정말 사선으로 읽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책장은 쉴새없이 넘어가니 말이다. 밤이 늦어서야 둘이는 귀로에 접어든다. 그는 돌아오면서 지금 읽은 책을 이야기한다. 지명, 인명, 연대, 하나도 거침없이 나온다. 금방 읽었다 하지만 제 집 번지, 제 이름, 제 생년월일 외듯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의 기억력은 참으로 놀랍다.〉(p232, 《여원》 1969년 4월호)
 
김해경이 李箱으로 불린 까닭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시켜라! 李箱’

 
 
이상은 당시 조선인이 좀처럼 입학하기 어렵다는 3년제 전문학교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전체 63명 중에 23등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건축과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3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상이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 취직하게 된 것은 1929년도 경성고공 건축과 수석 졸업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경기고공의 졸업 사진첩 말미에 학생들이 ‘남기고 싶은 말’을 적었는데 이상의 글도 남아 있다고 한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시켜라! 그것은 발명보다도 발견! 거기에도 노력은 필요하다. 이상(李箱).’
 
  권영민 교수는 “도안체 글씨로 석 줄이나 차지하게 쓴 이 글귀의 끝에 ‘이상’이라는 이름이 표시돼 있다”며 “김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이미 경성고공 시절부터 사용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이상이란 이름을 처음 썼다는 것이다. 김해경이 연초(煙草) 전매국(당시 서대문과 서울역 사이에 있었다.) 신축 현장감독으로 있을 때 한 인부가 “이상~” 하고 그를 불렀다. ‘상’이란 말은 씨(氏)나 미스터처럼 성씨 다음에 붙이는 일본 존칭어다. 그 인부는 그를 이(李)씨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이씨인 양 대답했다고 한다.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는 1964년 《신동아》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큰오빠 김해경이 ‘이상’으로 불린 경위를 이렇게 적었다. ‘그러니까 1932년의 일이다. 건축공사장에서 있었던 일로 오빠가 김해경이고 보면 ‘긴상’이라야 되는 것을 인부들이 ‘이상’으로 부른 데서 이상이라 자칭했다’는 것이다.
 
  김해경이 이상이란 필명으로 처음 발표한 시가 〈건축무한육면각체〉이다. 이 시는 1932년 《조선과 건축》 7월호에 실렸는데 첫 행과 둘째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의난圓.(이하 생략)〉
 
  총독부 기사(技士) 시절, ‘식민지 천재’ 이상은 자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을 ‘사각형 속의 사각형 속의 사각형’으로 묘사한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큰오빠 이상의 묘를 못 찾아 평생 恨으로 여겼어요”
 
말년의 문병준·김옥희 부부.
  —문병준과 김옥희,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요.
 
  박영분씨 얘기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데 시아버님(문병준) 말씀이 ‘이상 집에 왔다가 네 어머니를 만났다’는 거예요. 두 분이 좋아하셔서 결혼한 것은 사실입니다. 가끔 시아버님이 ‘네 어머니가 이랬다, 저랬다’ 그러셨거든요. 옛날 사진을 보면, 시아버님이 뭘 하셨는진 몰라도 옷을 잘 입으셨어요. 시어머님도 맵시 있는 차림이셨고요. 이북(평북 선천군)에서 잘사셨나 봐요.”
 
  —이상과 문병준은 어떤 사이였나요?
 
  “잘 알지 못합니다.”(박영분)
 
  —문병준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1960~70년대 을지로 3가에서 ‘한국유리 대리점’을 하셨어요. 사업이 안되는 바람에 제기동에서 창동으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6·25가 나기 전 대구에 살 때는 서문시장에서 신발가게를 했는데 상호가 ‘태평고무’였어요.
 
  처음엔 장사가 잘됐는데 6·25가 터지면서 접고 말았어요. 수금이 안 됐어요. 수금 사원을 보내면 돈을 받아 도망치거나 못 받았다고 시치미를 떼니 어쩔 도리가 없었죠.
 
  아버지에게 남동생이 한 분 계셨는데 6·25 때 소식이 끊어졌다가 제주도 미군부대에서 일하다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좋으셨어요. 온갖 전화번호, 주소를 다 기억하셨어요. 물론 어머니도 보통 넘으셨고요. 두 분은 만주에서 형(문완성)을 낳고 고향인 평북 선천에서 저와 제 동생(文昌星·1947~)을 낳았어요. 여동생 미성(文美星·1951~), 막내 내성(文來星)은 각각 대구와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형은 서울사대를 나올 정도로 똑똑했는데 술로 건강이 악화돼 1982년에 숨졌고 막내도 2012년 사망했어요.”(문유성)
 
  “말년에 시부모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저희는 박세창 할머니와 아버님을 모셨고, 어머님은 시동생(文昌星) 내외가 모시기도 하고, 막내 시동생(文來星)과 어머님이 잠원동, 압구정동 등지에 따로 사셨어요.
 
  우리 집에 이상과 관련한 스크랩 자료가 꽤 많았는데 다 어디 사라졌는지 없어졌어요. (두 손을 어깨 넓이만큼 벌리며) 이만큼 자료가 있었어요.”(박영분)
 
  김옥희는 산문 〈오빠 이상〉에서 ‘오빠가 돌아가신 후 임이 언니(변동림)는 오빠가 살던 방에서 장서와 원고뭉치, 그리고 그림 등을 손수레로 하나 가득 싣고 나갔다는데, 그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다’고 적었다. 변동림의 후손들은 혹시 이상의 유품을 가지고 있을까.
 
  —김옥희 여사는 큰오빠 이상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가졌나요?
 
  문씨는 “한번은 어머니께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는 이상의 묘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종암동, 장위동, 돈암동이 갈라지는 미아사거리 일대는 온통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아리 공동묘지는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
 
  “안된 얘기지만 일본에서 유해를 모셔다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고 이따금씩 찾아가 술도 한잔씩 부어놓곤 했는데 6·25를 거치며 (이상의) 묘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폭격을 맞아서인지 유실돼 흔적이 없어졌고 이후 온통 집들이 들어서 버렸답니다. 어머니는 큰오빠 묘를 못 찾아 평생 한(恨)으로 여기셨어요.”(문유성)
 
 
  “시어머니(김옥희)가 아들보고 ‘오빠, 오빠’ 그러셨거든요”
 
김옥희 여사와 손주들. 왼쪽부터 문도희, 진호, 재호.
  —김옥희 여사는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문씨는 “치매를 2~3년 앓으셨나?… 더 앓으신 것도 같고…”라고 말했다.
 
  아내 박씨는 이런 말을 보탰다.
 
  “치매 앓으실 때 가끔 이 양반(문유성)보고 ‘오빠, 오빠’ 그러셨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년의 이상 오빠한테 하는 말 같았어요. 어떤 때는 한참 뭐라고 중얼대시다가 ‘오빠, 오빠 왔어?’ 하며 말하는데 그다음 말은 혼잣말이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어요.”
 
  —치매 증상은 어떻게 아셨나요.
 
  “어머니가 한번은 ‘막내 동생이 때리면서 돈을 뺏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을 불러다가 혼을 냈어요. 동생이 억울해하며 ‘안 그랬다’는 겁니다. 반복해서 몇 번 어머니가 그러니까 치매인 줄 알게 됐어요.”(문유성)
 
  “2008년 12월 9일 시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식구들은 수목장하자는 걸 제가 말렸어요. 왜냐면 그때 막내 시동생이 아팠고 먼저 돌아가신 시아버님 묘가 양수리 무궁화공원에 있는데 수목장할 이유가 없잖아요.”(박영분)
 
  —현재 문씨 집안에 예술가가 있나요?
 
  “제 딸 도희(文度嬉·37)가 서울대 음대를 나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석·박사 학위(작곡 전공)를 받았어요. 스탠퍼드대 ‘컴퓨터음악음향연구소’(CCRMA)에서 초빙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독일 청년을 만나 결혼해 지금 독일에서 잘 살아요. CCRMA에서 연구원을 뽑을 당시, 기계공학, 건축, 약학, 컴퓨터 전문가 등 전 세계 내로라하는 소리 전문가가 다 모였는데 예술 전공자는 도희밖에 없었대요. 도희가 그림도 그리는데 그림이 기가 막힙니다.”(박영분)
 
  CCRMA는 MIT 미디어랩과 더불어 세계 컴퓨터음악의 가장 중요한 산실로 꼽힌다. 5년 전인 2011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아이패드와 현악4중주단과의 협연이 세계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는데 당시 문도희 박사가 ‘i21’이란 곡을 만들었다. 박씨의 말이다.
 
  “i21은 현악4중주와 전자음향을 위해 쓰인 작품입니다. 전자음악 부문은 텔레 네트워크(Tele-network)를 통해 미 스탠퍼드 CCRMA에서 아이패드(ipad)로 실시간 연주해 한국으로 보내고, 또 한국을 대표하는 현악4중주단 ‘콰르텟21’은 이를 받아 협연, 실시간으로 다른 두 공간에서 리얼타임(Real time) 연주가 가능하게 했어요.”
 
  문 박사의 창작곡은 지금까지 웨스턴 미시간 오케스트라(Western Michigan Orchestra), 노빌리스 트리오(the Nobilis Trio), 피아니스트 엄의경 등이 연주했다고 한다. 문 박사의 오빠 진호(文辰皓·39)씨는 현재 개인 사업을 준비 중이다.
 
  문병준·김옥희 부부는 슬하에 4남 1녀를 뒀는데 장남 문완성의 아들 재호(文宰皓·40)는 현재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셋째 문창성은 아들 형제를 뒀는데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넷째 문미성은 자매를 뒀으나 예술 관련 종사자는 없다고 한다.
 
  —이상의 방계 후손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문씨 부부의 말이다.
 
  “과거에는 이상 여동생 집안이란 사실을 감추려 했어요. 그러나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여기 식당 한쪽에 이상의 사진이나 자료들을 전시할까 해요. 어머니(김옥희)는 ‘오빠 시비(詩碑) 하나라도 세웠으면’ 하고 염원하셨지만 그 꿈을 이루진 못했죠. 어머니 한을 풀어드릴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요.”
 
  생전 이상은 백부 김연필의 석비 앞에 ‘주과(酒果) 없는 석상(石床)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고 읊조렸다고 한다. 정작 요절한 이상은 석상이나 석비는커녕 무덤의 자취마저 없다. 자취가 없기에 그의 이름이, 그의 모습이, 그의 문학이 더 그리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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