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형성사 및 번역사

 

 

초기의 히브리성경


구약성경은 BC 1450년에서 BC 400년까지 무려 1000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모세는 최초로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로서 대략 BC 1450-1400년경에 모세오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구약의 마지막 기록자인 말라기는 BC 400년경에 성경을 기록했다.

구약의 본문(本文, Text)


구약성경의 첫 부분은 갈퀴모양의 문자인 고대 히브리어로 가죽이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이 고대 문자는 점차로 발전되어 BC 400년 이후에는 둥근 종 모양의 문자로 되었다.

이 종 모양의 문자는 사해 사본과 마소라 사본과 1477년 이후 인쇄된 히브리성경에서 발견되었다.

구약의 정경화(正經化)


성경의 정경이라 함은 권위있고 성스러운 문서의 목록으로 지정되었다는 말이다.

헬라어에 이러한 표현으로 '카논'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원래 갈대나 자(尺)를 뜻한다.

실제로 이것은 "측정하는 것", 즉 표준.규범.규칙을 나타내며, 특히 표준이나 규범으로서 "측정 되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의 표준이나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정되었던 책들은 "정경"으로 편집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영감된 성경이 공식적인 수집이나 단순한 인준에 의하지 않고 성령을 통한 영감의 중요성 때문에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성경비평학적 견지에서 볼 때, 정경화의 과정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BC 444년에 율법서가 제일 먼저 정경이 되었고 예언서는 BC 400-200년이 되어서야 정경화되었으며, 성문서가 대략 BC 165-100년경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경비평학에서는 히브리정경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본래 연대적인 문제에 기인한다고 본다.

 

예언서는 BC 300년이 지나서야 대중화되어 그 결과 그 다음 세기에 수집되어 정경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소위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대체로 40∼66장)는 그 기록자들을 전혀 찾아낼 수 없으므로, 이사야서의 뒤에 부착시켰다고 한다.

 

다니엘서는 BC 167년이 지나서야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에스더와 역사상.하 그리고 에스라.느헤미야도 너무 늦게 작성되어 역사서 부분에 포함시킬 수 없어 성문서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히브리 정경의 삼분화를 기록자의 신분이나 예배의식의 편의상의 배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완전성이 유지되는 초기 연대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유대 정경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항상 신교의 입장이 되어왔다.

마소라 학자들의 활동


AD 500년 이전의 히브리 사본에는 장모음을 표시하는 일부 자음을 제외하고는 모음체계가 없었다.

AD 600-950년에 이르러 마소라(Masoretes)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완전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보안해냈다.

그들은 또한 케리(Keri)라고 명명되는 난외(marginal readings)와 케티브(kethiv)라고 명명되는 본문과 상이한 것(textual variants)을 수록하여 본문을 표준화시키기도 하였다. 마소라 학자들의 히브리 성경 연구는 5세기 후에 성경을 인쇄하는데 있어서 기틀을 마련했다.

히브리성경의 인쇄


인쇄된 히브리성경의 제일 첫 부분은 시편이었다.

이것은 1477년의 일이었으며, 1488년에는 모음부호와 악센트가 첨가된 히브리 구약성경 전체가 첫 출판을 보게 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성경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 거의 20년 동안은 주로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유일한 성경이었다.

최초의 신약성경은 일찍이 AD 45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야고보서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은 일반적으로 9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뒤늦은 책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약만을 성경으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는 스데반(행 7:2-53), 빌립(행 8:32-35),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구약(행 2:14-16)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신약의 모든 기록자들은 구약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영감적 기록은 구약에서 영감을 받는 계시에 근거하였다.

신약의 기원


복음(고전 15:3, 4)은 초기에 구전을 통하여 전파되고 구약 역사와 예언에 비추어 해석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구전은 글로 기록되어 마침내 AD 70년경에 영감적인 공관복음을 형성하게 되었다.

 

율법주의나 비도덕주의와 같은 오류에 반하여 기독교를 정의할 필요가 강조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교리적인 설명을 요하게 되었다.

바울서신과 그 외 일부 서신들이 이를 위해 기록되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개괄적 설명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기록되었다.

 

신약의 정경화


정경화 이전의 초기 신약서들

제1클레멘스

로마의 클레멘스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BC 96년)로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정경의 권위가 있다고 인정되었으며, 170년경 고린도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낭독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이집트의 기록자들은 이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포함되어 있다.

제2클레멘스

역시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포함되었던 서신이다.

이것은 로마의 클레멘스의 것으로 잘못 간주되었으며 널리 읽혀지지 않았다.

이것과 제1클레멘스는 여전히 서방에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2사도의 교훈집(Didach, 12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일부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서 성경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널리 회람되었다.

바나바의 편지(130년경)

시내 사본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집트에서는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히에로니무스(400년경)는 이것을 외경으로 여겼으며, 이것은 점차로 성경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해갔다.


헤르마스의 목자서(140년경)

로마의 주교이자 피우스의 형제인 헤르마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것 역시 시내 사본에 수록되어 있고 무라토리 정경(Muratorain Canon)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성경으로 인정받은 적은 없다.

베드로의 묵시록(145년경)

앞에서 열거한 책들보다는 다소 중요성이 떨어지나 동방에서는 매우 귀중하게 여겼고 서방에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이것은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허위문서로 인정되었다.

바울행전(170년경)

널리 회람되었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정경으로 여겨졌으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외경적인 성격이 드러나 점차 정경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졌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이후에도 많은 복음서, 행전, 서신과 묵시록 등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명백한 허위문서로, 교회는 이것들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약 정경화의 원인


정경 또는 반정경으로서의 제1클레멘스서, 12사도의 교훈집, 바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서 등을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동방에서는 3세기 말 명확하게 제정된 정경의 필요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마르키온 이단(140년경)의 불완전한 정경 역시 당시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마르키온은 영지주의자로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가운데 10편만을, 그것도 많은 삭제를 한 후 그들의 교리적인 근거로 삼았다.

 

정경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다른 외경적인 위문서들의 출현으로 정경을 명확히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했다.

또한 후일 모든 성문서를 불사르라는 로마의 박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도 정경의 제정을 독촉했다.

신약 정경성의 표준


첫째 표준은 "사도성"이었다.

기록자가 진실로 사도인가? 아니면 마가복음의 기록자나 누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히브리서신의 기록자의 경우와 같이 그가 사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둘째 표준은 "내용"이었다.

그 주제나 그 주제의 취급과 영적인 특징이 성경으로서 합당한가? 이러한 기준에 의해 위문서들은 제거되었다.

 

셋째 표준은 "보편성"이었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 문서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문서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는가?

 

넷째 표준은 "영감성"이었다.

그 문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 3:16)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은 진실하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는가?

이것이 마지막 기준이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더라면 신약 정경은 올바르게 제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경으로 승인된 초기 문서


이처럼 인정된 책들을 오리게네스(245년)는 「호모로구메나」("인정된" 또는 "승인된")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영감적인 성경으로서 널리 인정된 신약 문서였다.

 

오리게네스는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1서,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포함시켰다.

그는 히브리서를 「호모로구메나」중에 넣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이나 정경적인 서신으로서 인용했다.

 

실제로 그가 성경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책들은 유다서와 요한 2서.요한 3서 뿐이었다.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300-325년경)는 「호모로구메나」가운데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요한 1서,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을 넣었다.

그는 부주의로 히브리서를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문제시된 신약 문서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시되었던 책들을 「안티레고메나」("항변되는" 또는 "논쟁되는")라고 불렀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그는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2. 요한 3서, 야고보서, 유다서,

바나바의 외경적인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서, 12사도의 교훈집 그리고 히브리복음서 등을 포함시켰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안티레고메나」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①단순히 논쟁되거나 의문시되는 문서로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 1.2서,

②확실히 위조되었거나 영감되지 않은 문서로 바울행전, 헤르마스의 목자서, 베드로묵시록, 바나바서신 그리고 12사도의 교훈집.

일부 신약 문서를 의심하는 이유


초기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일곱 권의 책들은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히브리서, 요한 2.3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이었다.

몇몇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책들의 인정을 주저한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내적인 증거를 근거로 가지고 있었다.

 

①야고보서와 유다서의 문체는 자신들을 사도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요한 2.3서의 기록자는 자신을 사도가 아닌 "장로"로서 표현하고 있다.

②히브리서는 기록자 불명이고 바울서신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어휘나 문체가 다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은 기록자 불명은 아니지만 베드로전서와는 어휘나 문체에 있어서 다르다.

③또한 야고보서는 초기의 유대인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지 이방인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④유다서는 에녹(1:9; 5:4; 유 1:14, 15)의 외경적인 책에서 인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서방의 정경 초기 형성


로마의 클레멘스의 증언(AD 96년경) 그가 로마 주교로 있을 당시 고린도교회에 보낸 매우 정평있는 편지에서(제1클레멘스로 알려짐),

그는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대한 지식을 보여 주며 히브리서에 대하여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르키온의 증언(140년경) 영지주의 이단자로서 그는 다만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중 10편만을 인정했다.

다소 잘못된 점은 있으나 그의 증거는 계몽적이며 교회가 현재의 신약성경을 수집하고 인정하는 데 중요한 지표를 형성케 하고 있다.

헤르마스의 증언(150년경) 그는 매우 정평있는 헤르마스 목자서의 기록자로서

마태복음, 에베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확증하였다.

이레나이우스의 증언(40-203년경) 그는 청년 시절에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와 교분이 있었으며,

후일 고올지방 리용의 주교로서 사복음서,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바울의 모든 편지와 요한계시록을 입증하였다.

무라토리 정경의 증언(172년경) 이 단편문서는 1740년 밀란의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이탈리아인 무라토리가 발견했다.

삭제된 처음 부분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었다.

이것은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문서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170년 이전의 고대 라틴어역 증언 이것은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테르톨리아누스시대 이전에 첨가된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서들에 대하여 입증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150-222년경) 이 카르타고의 다작의 라틴 작가는

사복음서, 13편의 바울서신,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바나바라고 하면서 이를 넣지 않았다.

키프리아누스의 증언(200-258년경) 카르타고 주교로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빌레몬서, 야고보서, 요한 2.3서, 유다서는 인용하지 않았다.

서방의 정경 후기 형성


히에로니무스의 증언(340-420년경) 그는 라틴어 불가타역의 뛰어난 번역자이며 명성있는 학자로서, 우리가 소유한 신약 정경 모두를 증언했다.

그는 바울에 의해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음을 인정하였고,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가 어떻게 인정될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그의 견해는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증언(354-430년) 히에로니무스와는 달리 그의 견해는 모호했다.

그는 문제시되었던 일곱 권의 책을 모두 수락하기는 했으나,

성경의 권위에 정도의 차이를 두고 대체로 외경을 포함하여 폭넓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약 경전 확립에 기여하였다.

교회협의회의 활동 신약 정경의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어떠한 협의회에서도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개개의 문서가 지닌 영감적인 가치나 내적인 권위가 그 결정요소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경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문서의 순수함이나 확실성에서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다.

4세기 말 이전 어떠한 협의회도 이런 주제에 관해서 아무런 공언도 하지 못하였다.

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397년) 여기에서 정경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규정된 사항 중의 하나는 교회내에서는 오로지 "정경으로 인정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목록이 되었다.

히브리서는 바울의 것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었다.

히포 교회회의(419년)는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의 목록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처럼 정경의 선정은 개개의 책들이 자체의 가치를 입증한 후 교회회의에서 확인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동방의 정경 형성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116년경), 서머나 주교 폴리카르푸스(69-155년경),

히에라폴리스 주교 파피아스(80-155년경)는 마태복음, 요한복음,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1서, 사도행전에 대해서 증언했다.

 

12사도의 교훈집(120년경)은 마태복음을 특히 많이 언급하고 대부분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누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사르디스 주교 멜리투수(170년경)는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2.3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약성경을 인용했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115-118년경)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입증하였고 이것들은 구약 정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루키아누스(312년에 순교)는 자신의 "안디옥 정경"에서 요한계시록, 베드로후서, 요한 2.3서를 제외시켰고,

그가 개역한 구약과 신약성경에서는 유다서를 제외시켰다.

 

가파도키아의 대 바실리우스(329-379년경)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30-390년경)는 요한을 계시록의 기록자라고는 했으나,

이를 제외한 현재의 정경에 있는 모든 문서를 인정했다.

 

몹스에스티아의 데오도루스(350-428년)는 가톨릭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의 이러한 견해는 콘스탄티노플 정경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루키아누스의 "안디옥 정경"에서 발전된 것으로,

요한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페쉬타(411-435년)도 콘스탄티노플 정경과 유사하였다.

필로크세누스(508년경)가 이 부인된 책들을 첨가하여 시리아 페쉬타성경을 개정하고부터 콘스탄티노플 정경의 그릇된 영향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초기 형성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년경)는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중대한 증언을 하면서 이것을 사도 요한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서를 잘 알고 있었고, "베드로의 회고록"이라는 표제가 붙은 마가복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15년경)는 현재 신약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문서에 정통하였으며,

유다서, 히브리서, 공동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모든 문서를 인정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185-253년경)는 많은 논쟁이 되었던 책들(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2.3서, 야고보서, 유다서)을 인정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인정된 책들(「호모로구메나」) 가운데,

요한계시록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정경의 후기 형성


프레드릭 케년 경에 의해 1933-37년에 출판된 3세기 체스터 비티(The Chester Beatty) 파피루스 사본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히브리서(로마서 다음에 있음), 요한계시록(9:10∼17:2 부분만이 보존되고 있다)을 인증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00-265년경)는 야고보서, 요한 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영감된 성경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히브리서가 바울서신임을 증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8-373년)는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27권의 신약성경에 대하여 "정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신약 정경 형성사의 요약


신약 정경은 교회협의회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개개의 책들이 지닌 영감성과 내적인 권위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경화하는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었다.

 

AD 200년에 이르러서야 신약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서들을 포함하였다.

그 후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오늘날과 같은 권위와 확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3세기에는 「안티레고메나」로 논쟁이 벌어졌다.

 

동방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인정치 아니하였으며, 서방에서는 히브리서를 부정하였다.

실제적으로 3세기 말에 가서야 모든 외경서들이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그리고 이집트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이 설정한 명확한 구분으로 실제로 어떠한 문서가 정경의 지위를 갖는가에 대한 논쟁은 그치게 되었다.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397년)는 이 결정을 확증하였으며, 이때부터는 어느 신약 문서에 대한 논쟁도 그치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방과 알렉산드리아 아타나시우스의 경우,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영향은 모든 반론을 일축시켜 버렸다.

 

페쉬타(시리아 성경)에 요한 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첨가함으로써 정경에 대한 문제는 동방 역시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신약 정경은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맞추어 서방에서는 400년에, 동방에서는 500년에 이르러 그 결정을 보았다.

현재까지의 정경사


몇 가지 근소한 차이점을 제외하고서는 4세기 초 신약정경에 대한 결정은 현재까지 내려오는 교회의 결정으로 남아 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은 소위 교회의 절대성이라는 권위에 항변하여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구약 정경에 대하여 로마교회는 1546년 「사크로산크타 교령」(Decree Sacrosancta)으로 트렌트공의회 중 14권의 외경서 중 11권을 정경으로 공포했다.

이것은 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마카베오상.하,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이었는데 그 후 로마가톨릭교회는 에스델서를 추가했다.

신약의 본문


고대로부터 신약만큼 서방세계에 영향을 많이 주었던 문서는 없었다.

어떠한 고문서의 본문도 이렇게 잘 입증되지는 못했다.

 

거의 5천편의 헬라어 사본(필사본)이 있으며,

초기 번역문서의 사본만도 1만여편이 존재하며 이외에도 수천에 달하는 교부들의 인용문이 있다.

본문연구의 문제는 비교연구에 의하여 순수한 본문을 결정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본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자료 : 본문연구


파피루스 사본 1세기에 걸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로 현재 P 문자로 명명되어 P1, P2의 색인표가 붙은 신약본문의 파피루스 단편문서가 75편 이상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연대는 2∼8세기에 걸쳐 있으며, 신약본문의 약 40%로 총괄 부수가 25권의 책을 이루고 있다.

 

P52는 요한복음 18:31-34, 37, 38의 부분이며 연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대략 135년의 것이다.

P46, P46, P47은 체스터비티 파피루스 Ⅰ, Ⅱ, Ⅲ(200년경)에 들어 있다.

 

P66은 200년경으로 추정되며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보드머 파피루스이다.

P75는 새로 발견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기록된 보드며 파피루스인데 200년경의 것이다.

언셜자체 사본 이것은 둥근 종 모양의 대문자로 양피지위에 기록되었으며 800년경까지 신약 필사본에 사용되었다.

현재 300여개의 언셜자체 사본이 남아 있다.

초서체 사본 소문자 필사본은 초서체로서 기록되었는데, 9∼18세기로 추정된다.

모두 합쳐 2,647편의 소문자 사본이 발견되었다.

역본 100년 전의 헬라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들은 대단한 가치가 있다.

이 가운데서 고대 라틴어역(2세기),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역(382-84년),

시리아역(4∼5세기), 콥트역(2∼4세기), 아르메니아역(5세기 초), 고대게오르기아역(5세기), 에디오피아역과 고트역(4세기 중기)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성구집 이것은 연중행사에 통독된 성경 교훈을 담고 있는 교회 예배서이다.

언셜자체와 초서체로 된 2천여 성구집이 남아 있다.

이들의 연대는 280-1600년경으로 추정된다.


패각과 부적 현재 신약 본문이 부분적으로 새겨져 있는 25개의 패각과 9개의 부적이 알려져 있다.

연대는 4∼13세기경이다. 교부들의 인용문 이 중에 8만 6천여편 이상이 알려져 있다.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


가장 오래된 마소라 히브리어 필사본 그 연대를 9세기 말 이전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예언서가 기록된 카이로 사본(895년), 구약 전문이 기록된 알렙포(Aleppo) 사본(925년경), 레닌그라드 사본(1108년에 완성됨)으로서,

후자는 키텔의 《Bilblia Hebraica》의 본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947년에 발견된 2개의 이사야 필사본 사해 두루마리는 우리에게 BC 2∼1세기로 추정되는 구약문서들 중의 하나를 제외한,

모든 단편문서와 함께 1천년이나 더 앞선 히브리어 본문을 보여 준다.

가장 오래된 신약 사본


시내 사본(a) 4세기, 신약이 148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1844년과 1859년에 시내산에 있는 성 캐더린수도원에서 티쉔도르프가 발견한 것이다.

역시 여기에는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 단편문서도 들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사본(A) 5세기, 이것은 대부분의 구약과 신약 사본을 담고 있다.

1627년 영국 찰스 1세에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기증한 것으로, 1757년에 대영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바티칸 사본(B) 4세기, 이것은 1481년 이래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본은 히브리서 9:14∼13:25, 목회서신, 빌레몬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는 구약과 신약 전부를 수록하고 있다.

 

에브라임 사본(C) 5세기, 신약 238장 가운데 145장이 보존되어 있다.
베자 사본(D) 5세기, 신약에 관한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제1체스터 비티 파피루스(P45) 3세기 초,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기록된 파피루스 본문 중 30장을 포함하고 있다.
제2체스터 비티 파피루스(P46) 3세기 초, 바울서신이 기록된 파피루스 사본 104장 가운데 86장이 보존되어 있다.
제3체스터 비티 파피루스(P47) 3세기 말, 32장의 파피루스 요한계시록 사본 가운데 10장이 남아 있다.
제2보드머 파피루스(P66) 3세기 초, 요한복음이 기록된 파피루스 사본 150장이 남아 있다.
제14, 15보드머 파피루스(P75) 3세기 초, 요한복음과 누가복음 본문 144장 전부가 발견되었다.

성경 영어역본


초기 앵글로-색슨어역ㅡ 비드(Bede)에 따르면 680년경 캐드몬은 일상어로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시로 표현했다.

비드(735년에 죽음)는 요한복음 번역자로 정평이 있었다. 앨프릿 왕(848-901년)은 성경의 여러 부분을 자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위클리프(14세기)와 틴들(16세기)시대까지는 성경이 부분적으로 영역되었다.

위클리프역(1382년)ㅡ 이것은 최초로 완역된 영역본으로 1400년경에 수정되었으나 1415년에 몰수되어 불타없어졌다.

그러나 적어도 170여편의 필사본이 남아 있다. 단점은 헬라어 원본 대신에 라틴어 불가타역을 기초로 했다는 점이다.

틴들역(1525-35년)ㅡ 틴들역의 중요성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에서 번역된 일련의 번역본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서,

그 문체가 매우 독창적이고 또한 인상적이어서 1611년에 번역된 공인 홈정역(KJV)의 근간을 형성했다.

커버데일(Coverdale)역ㅡ(1535년) 마일즈 커버데일은 틴들의 학자적 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는 미완성되어 있던 부분을 독일어와 라틴어 번역을 통해 자력으로 보충하였다.

그는 최초로 인쇄된 완역 영어 성경을 출판하였다.

토마스 매튜 성경(1537년)ㅡ 틴들의 친구 존 로저스에 의한 틴들의 개정판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토마스 매튜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태버너 성경(1539년)ㅡ 토마스 매튜 성경에서 대부분의 주와 논쟁자료를 삭제한 리처드 태버너의 개정판이다.

대성경(1539년)ㅡ 크기 때문에 "대(大)"라고 명명되는 것으로 최초의 권위있는 성경이었다.

또한 제2판(1504년)에 실린 대주교 크랜머의 서문으로 인하여 "크랜머성경"이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제네바 성경(1560년)ㅡ 대성경의 개정판이다.

주교 성경(1568)

제2의 공인 영어 성경이며 제네바 성경, 일반대중을 위한 성경, 대성경과 교회의 풀핏 성경 등을 능가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번역작업은 주로 학구적인 주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두에이 성경(1609-10년)

최초로 영역된 로마가톨릭 성경이다.

흠정역(KJV, 1611년)

전술한 초기 번역본과 개정판 가운데 극치를 이루었다.

영국 제임스 1세의 후원으로 제3의 "공인" 영어 성경이 되었다.

또한 이것은 13세기 켄터베리의 대주교 스티븐 랭튼(Stephen Langton)의 장구분법과 로버트 에스티엔느(Robert Estienne, 1551년)의 절 구분법을 사용하였다.

이 번역은 1611-1881년까지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개정역(RV, 1881-85)

65명의 영국 학자들이 히브리.헬라어 원문을 직역한 흠정역의 개정판이다.

미국 표준역(ASV, 1901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그린(William H. Green)의 지도 아래 미국 학자들이 독서의 용이함과 체제의 변형을 시도하여 출판한 1885년 개정역 미국판이다.

영어 개역 표준판(RSV, 1952년)

신약(1946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in the U. S. A)에서 인정된 것으로,

이 교단에 가입된 회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비가입 회원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 번역은 우수한 점도 많으나 구약의 중요한 메시야 어구를 번역함에 있어 의미가 미흡하고 애매한 데가 있다.

새 영어 성경 /신약(1961년)

케임브리지의 도드(C. H. Dodd)의 지도 아래 영국 학자들이 출간한 완전히 새로운 번역본.

이것은 고어법이나 체계없는 현대어법을 탈피하여 헬라어 원문의 관용적인 영어 표현을 시도하였다.

미국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많은 복음주의자들로 인한 문제가 없지 않다.

현대어 번역


증보판(Amplified) 신약성경 

미시간주의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존더반 출판사에서 1958년에 발행했다. 간단하고 유용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증보판 구약성경

제1부는 창세기-에스더, 제2부는 욥기-말라기로 되어 있으며, 존더반 출판사가 발행했다. 간단하고 기본적인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20세기 신약성경

처음으로 인기를 얻은 현대어 번역으로 1898년에 출판되었다. 20명의 영국 학자가 만들었으며 매우 좋은 번역으로 평가받는다.

웨이마우드(Weymouth)의 신약성경

영국의 침례교 평신도가 번역했으며, 그가 죽은 후인 1903년에 출판되었다.

1924년, 1933년에 다른 사람이 개정했다.

펜톤(Fenton)의 현대 영어 성경

부유한 영국인 페라 펜톤이 몇 년 동안 원어(原語)성경을 읽고,

다른 번역을 참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1903년에 출판되었다.

모패트(Moffat)의 번역

스코틀랜드 사람이며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교수인 모패트가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은 1913년에, 구약성경은 1924년에, 신.구약 합본은 1926년에 출판되었다.

강변(Riverside) 신약성경

조합교회의 목사이며, 오벌린 신학대학의 학장이었던 발렌타인이 1923년에 출판했다.

스미드와 굿스피드의 성경전서

시카고대학의 굿스피드는 1923년에 그의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시카고대학의 J. M. 포이스 스미드는 맥길대학의 고든, 터론토대학의 미크, 미시간대학의 워터맨과 공동으로 구약성경을 번역하여 1923년에 출판했다.

몽고메리의 100년 기념 신약성경

1924년에 출판되었다. 뉴욕주 로체스터에 살던 몽고메리 부인은 1921년에 북부침례교 총회의 회장이었다.

그의 신약성경은 미국 침례교출판협회의 100년 기념 출판으로 북부침례교 총회의 회장인 몽고메리 부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성경이며 1924년에 출판되었다.

기본영어 신약성경

1941년에 출판되었다. 런던 대학이 S. H. 후크(Hooke)가 8명의 저명한 학자의 협조를 번역했다.

영어의 가장 쉬운 단어 1천개를 사용했으며, 기독교 출판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버클리(Berkeley)의 성경

1959년에 존더반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인쇄가 잘되었고 읽기가 쉽다.

원문을 현대영어로 잘 옮겨 놓았다고 학자들이 평한다.

성경 읽기에 흥미를 주는 간단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놀리(Norlie)의 신약성경

존더반 출판사가 발행한 이해하기 쉬운 말로 번역된 책이다.

새 영어 성경, 신약성경

1961년에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에서 발행했다.

증보판 성경

존더반 출판사에서 발행했다.

처음에 구약과 신약을 별도로 출판한 것을 하나로 합본한 증보판이다.

예루살렘 성경

불어판 예루살렘 성경을 기초로 번역했고, 히브리어 본문과 헬라어 본문을 대조했다.

새롭고 읽기 쉬운 성경이다.

새 미국 성경(NAB, 1970)

가톨릭과 개신교의 학자들이 공동번역한 것이다.

30년 동안 작업하여 문체와 해석의 통일성이 결여되었다.

오늘의 영어 성경(TEV, 1976)

일반 언어학의 반종교적 번역 이론을 기초로 한 최초의 영어 성경.

Good News of Modern Man(현대인을 위한 기쁜소식)이라는 표제하에 보급판으로 판매되었다.

새 국제 성경(NIV, 1978)

보수파 개신교의 입장에서 번역하여 원어에 충실하고 의역을 피했다.

영국과 미국의 교인들이 공중예배와 개인연구에 모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리빙 바이블(LB)

ASV를 기초로 하여 현대 영어로 의역한 성경. 읽기 쉬운 구어체로 번역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자세한 것은 《기독교대백과사전》8권 1449-1486면을 참조 바람)

 


한글성경의 번역사


1. 해방 이전


한국에 성경을 소개한 사람은 1832년에 화란 선교사 구츨라프 목사였다.

그는 홍주 고대도에 얼마동안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한국 사람 이응찬, 백홍준은 1883년에 누가복음 3천부를 발행했다.

1887년에 로스목사는 같은 계통에서 파송된 매킨타이어(John Mclntire)와 함께 신약성경 전부를 번역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 관비유학생 이수정이 1884년에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1885년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그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1887년에 아펜젤러 역 마가복음, 1890년에 언더우드역 누가복음과 스크랜톤 역 로마서,

1892년에 3인 공역인 마태복음, 1894년에 펜윅(Fenwick) 역 요한복음, 1895년에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1897년에 골로새서와 베드로전.후서, 1900년 5월에 신약성경 전부가 완역되었다.

1904년에 신약전서가 개역되었고, 1906년에 이것을 재수정하여 결정본으로 공인역으로 출판되었고,

1937년에 다시 개역하여 일제 말기를 지나 8.15해방을 거쳐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공인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2. 해방 이후


1961년 1월 25일에 한국 학자들만의 노력으로 마태복음이 번역되었다.

1967년 12월 15일에 새 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었다.

한글 고문으로 한갑수, 문장 위원으로 전영택.안신영.임한영.박영준.석용원.김재준 제씨,

원문 대조위원으로 지원용.윤성범.곽안전 제씨, 서기는 정용섭 목사가 수고하였다.

 

1968년 2월 15일에 신.구교 성경번역 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김정준 박사, 서기 정용섭 목사, 위원에 배제민.문익환.선종완(신부).최의원(사정상 사퇴) 제씨다.

 

1971년 부활절에 신약성경 공동번역이 출판되었다.

위원에는 구교측에 백민관 신부, 최창덕 신부, 김창렬 신부(사정상 사퇴),

평신도측에 김진만 교수(성공회), 이근섭 교수(감리교),

신교측에 정용섭 목사(성서공회 직원), 박창환 목사다.

 

1977년 4월 부활주일에 공동번역 성서(신.구약합본)가 출판되었다.

한편 생명의 말씀사에서는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영어판 리빙 바이블을 기초로 하여 1977년에 《현대인의 신약성경》을,

1985년에는《현대인의 성경》을 발행했다.

 

또한 대한성서공회에서는 1967년에 나온 새번역 신약성경을 수정하고 구약성경을 다시 번역하여 1993년《표준 새번역 성경》을 발행하였으나,

이 성경이 진보적 신학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지나친 의역이라는 이유로 보수 신학계와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있다.

  

(옮겨온 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