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독론적 본질

 

1. 이름과 실제(nomen est realis)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이 모임(카알, 에다, 에클레시아, 쉬나고게)이다. 주님 자신께서 이러한 단어를 가장 먼저 교회에 적용하셨다(마 16:18; 18:17). “카할”은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 곧 회중 자체를 , “에다”는 특정한 곳에서의 모임을 지칭하는 경향이 강하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카할”과 “에다”는 모두 언약적 개념인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부르심의 소명과 그 부르심에 따른 회집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구약의 “카할”은 신약의 “에클레시아”로, 구약의 “에다”는 신약의 “쉬나고게”로 주로 번역된다. 다만 예외적으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여호수아에서는 “카할”이 “쉬나고게”로 번역되었다. “에클레시아”“불러냄”, “쉬나고게”는 “함께” 모임이라는 자구적 의미가 부각되는데, 양자를 공히 우리가 교회라고 번역함은 뜻이 서로 어우러져 분리할 수 없는 비가시적이며 가시적인 교회를 동시에 표상하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상 “쉬나고게”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회합과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뜻하는 의미로 적용됨에 따라서(마 4:23; 행 13:43; 계 2:9; 3:9), 교회를 뜻하는 단어로서 “에글레시아”만이 사용되게 되었다.

 

“교회”라는 말은-혹은 교회의 정체 즉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뜻하든(롬 16:4; 고전 16:1; 갈 1:2; 살전 2:14) 혹은 그들의 회집을 뜻하든(행 5:11, 11:26; 고전 11:18; 14:19, 28, 35)-일정한 지역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인 지역교회 혹은 지교회(ecclesia localis, particularis)를 흔히 지칭한다. 지교회는 그 양상에 따라서 가정을 회합의 장소로 하는 가정교회(롬 16:5; 고전 16:19; 골 4:15; 빌 2)와 어느 지역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일종의 지역교회(ecclesia nationalis, provincialis)로 존재하기도 한다(행 9:31).

 

교회는 다수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신부, 충만으로서 하나이다. 교회는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 안에서 그에게로 자라간다(롬 12:5; 고전 12:12-28; 15:9; 갈 1:13; 빌 3:6; 엡 1:22; 4:15; 5:22-33; 골 1:18, 24).

 

이러한 우주적 혹은 보편적 교회(ecclesia universalis, catholica)는 그 형성과 영속이 후험적이지(a posteriori) 않다. 그것은 WCC가 주장하듯, 세속적·기구적 일치를 뜻하지 않는다. 교회의 보편성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그와 함께 연합한 택한 백성들의 총수(總數) 즉 “보편적 무형교회”에 터 잡는다(엡 1:22-23; 3:10, 21; 5:23, 32; 골 1:18-20; 3:11).

 

그리고 이러한 부르심의 소명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한 신앙을 고백하고, 한 진리의 말씀을 받으며, 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로서 “보편적 유형교회”가 있을 뿐이다(고전 10:32; 11:22; 12:28; 엡 4:11-16). 사실 “교회”라는 이름을 자신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가 된(롬 8:17)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처음으로 적용하신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셨다(마 16:18; 18:17).

 

- 비가시적 교회가 예배와 기도와 말씀으로 들어나는 것이 가시적 교회(유형교회)이다.

- 가시적 교회는 실상 보이지 않지만, 그 행위는 보이는 것이다.

- 보이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교회다. 건물부터 생각하면 안 된다.

- 비가시적 교회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가시적 교회 또한 보편적이다.

 

 *드러냄

 

- 목회에서 드러냄이 있다.

- 예배의 은혜가 드러나고, 말씀에 능력이 드러난다.

- 드러남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 영향력, 감독, 변화

 

이러한 기독론적 기원상 ‘교회(church, kerk, kirch)’라는 말은 ‘주님께 속한 집’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 그들의 회집, 하나님의 나라를 함의하는 역동적인 개념이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의로 구원을 받은 언약의 성도들이 그들의 교제와 교통을 통하여 덕을 세워가는(건덕, 고전 14:12; 엡 4:12; 골 2:19)-함께 자라가는- 형제와 자매들이라는 사실을 이 말은 부각시킨다(마 12:48; 18:15; 23:8; 25:40; 28:10; 요 15:14-15; 20:17; 롬 8:29; 히 2:11)

 

- 교제: 사귐의 시작(칭의-세례)

- 교통: 사귐의 계속(성화-성찬)

- 자라감: 세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그의 의를 온전히 드러냄으로

- 태어남을 기념하는 것이 세례이고 자라감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이다.

- 어떠함과 어떠해야 함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을 영/영광/말씀이 충만한 성도들의 그분과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것 혹은 그 차체를 자주 제시한다.

 

①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소마. 엡 1:23; 골 1:18; 고전 12:27). 교회는 단지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이다.

이는 교회의 일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의 일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개개인을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심으로 서로 연합하여 자라가는(골 2:19) 지체가 된다(롬 12:5; 엡 4:25). 성도들은 각양의 은사에 따라 서로 의존하며(고전 12:15-20), 서로 귀히 여기고(21), 서로 돌아보며(25), 고락을 같이한다(26).

-유기체로서 조직체

 

②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혹은 아내이다(요 3:29; 마 25:6; 계 19:7; 고후 11:2; 엡 5:22-33).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부로 묘사되고는 하였다(렘 2장; 호 1-3장). 그리스도가 교회의 신랑이시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반면 그분께 복종해야 하며(엡 5:24-25)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해야 한다(엡 5:26-27)

- 교회는 몸이다.

- 하나님의 사람을 드러냄

 

③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린다.

교회가 그러하므로 성도가 그리하다(고전 3:16-17). 그리스도가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 성도는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엡 2:20-2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신령한 집이다(벧전 2:5).

-영원한 공동체. 교회시대가 영원하다.

 

④교회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16),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 21:2)으로 불린다.

지상의 교회는 역사상 존재하는 개혁되어지고 있어야 할 교회 즉 ‘전투적 교회’이나 위로 택함 받은 백성의 전체가 모여 하나가 되는 영원복락의 천상적 ‘승리적 교회’를 미리 맛본다.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계속적 증보로 말미암는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지고 있어야 한다.

 

⑤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곳이며 그 말씀에 따라서 성례가 거행되고 권징이 시행되는 곳이다. 교회가 이렇게 불리는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온당히 설 때에만 진정하기 때문이다(고전 3:11-12). 사도들은 이 진리를 저나고 가르치는 이차적인 터일 뿐이다(엡 2:20; 계 21:14).

 

 

2. 역사와 이론

 

초대교회 이후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고, 부르심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점이 깊이 인식되었다. 다만 성도의 교제가 교회의 본질로 부각된 반면 아직 가시적/비가시적 교회, 유기체/조직체 교회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보편적 이라는 말이 속사도 이그나티우스에 의해서 이미 언급되었다.

 

이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측면에서 개진된 말이었다. 교회 안에도 밖으로 쫓겨난 자가 있고 그 밖에도 안에 속한 자가 있다는 오리겐의 말도 있지만, 대체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키프리아누스와 이를 인용한 어거스틴에 의해서 잘 알려진 이 말이 있기 전 더욱 직설적인 표현들이 먼저 나타났다.

 

예컨대, 이레니우스는 교회를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닥다리라고 표현하고 교회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이 있으며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교회를 택자들의 모임이라고 단언하므로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교회론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키프리안은 한 하나님과 한 주가 있듯이 하나의 교회가 있으며, 이는 자식에게 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과 흡사하다고 보았다. 교회가 없으면 구원이 없으니, 이는 빛이 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가지가 나무로부터 떨어질 수 없으며, 시내가 샘의 근원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는 형혼과 육체에 관항 인간의 구조 논쟁을, 펠라기우스파와는 구원의 은혜에 관한 논쟁을, 도나투스주의자들과는 교회론 논쟁을 벌였다. 어거스틴의 사고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회에 구원이 있고, 교회가 은혜의 보고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이 없으나, 은총론과 교회론이 항상 동일한 궤적을 그리지는 않는다고 여겼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은혜는 분명 하나님이 창세 전에 무조건적으로 선택한 자녀들에게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교회가 구원의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오직 그 안에 성령, 사랑, 인애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교회 밖에 있는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한다고 여겼다(유 10).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보편성과 거룩성을 무시하고 객관적인 은혜의 방편인 말씀의 교리와 정통적으로 수립된 성례와 직제 등의 제도로부터 이탈하고자 한 도나투스주의자들을 맹공 하였다. 이러함에도 어거스틴은 가시적 교회의 공동체가 곧 은혜의 비가시적 교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참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참된 몸(corpus verum)”과 현실적 교회의 모습인 “혼합된 몸(corpus permixtum)”을 구별하였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명목상으로는 초대교회의 정통의 맥에서 교회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객관성이 극단적으로 왜곡되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명분을 위하여 언급될 뿐,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교회의 가시성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하는데,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오직 교회의 직분과 성사를 통해서만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본질상 이러한 역사를 이루는 제도적 기관으로 여겨졌다. 세 가지 뚜렷한 경향이 이로부터 나타났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이 거부된다. 중보의 유일성이 부인되고 사제중보주의가 수립되었다.

 

둘째, 교회는 그 본질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도들 혹은 성도들의 교제로 인식되기 보다는 성도를 가르치는 어머니로서 우선 치부되었다. 물론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로서 양육하는 기능을 하지만 그 근저에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놓여 있다. 교회의 모든 일은 새로운 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성도들의 삶을 돕는데 있다.

 

셋째,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듣는 교회’보다 ‘가르치는 교회’가 앞선다고 여겼다. 교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신의 말을 가르친다. 교황의 말 혹은 전통은 성경으로부터가 아니라 성경과 더불어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몸이 연약하나 영혼과 함께 있는 한 그 다스림과 영향 가운데 있듯이, 성도는 몸 된 가시적 교회에 속해 있다는 자체로 이미 하늘의 은총을 누린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로 초대교회 교부들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극단적으로 곡해한다.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성도에게 전가되는 의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 자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구원의 질료가 아니라 단지 재료에 불과하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은 사제의 축성(consecratio)이다. 이러한 사효성(ex opere operato)에서 교회의 공로가 시원성과 절대성을 갖는다고 본다.

 

루터에 의해서 선도된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에만 권위가 있다는 점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점이 양대 지주로 강조되었다. 이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원리와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는 공로를 창출하는 곳이 아니며, 사제의 중보는 이방습속에 불과하고, 교회의 무오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듣는 교회’가 ‘가르치는 교회’에 앞선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루터가 주창한 ‘만인제사장주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사실상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선포였다. 루터는 교회의 가시적 측면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측면에 주목하였다. 보이는 직제와 외형적 의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성찬의 합당한 거행을 교회의 표지(nota ecclesiae)로 여겼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표지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교회가 외형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지, 어떤 무엇으로 진위를 판단 받는 곳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터의 가장 직설적 공격은 로마 가톨릭의 이러한 잘못된 교회론을 표적으로 삼았다. 루터는 교회는 그 본질상 성도의 연합에 있다고 봄으로 정통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비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의 ‘교회(ecclesia)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를 말하였다.

 

루터의 교회론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터와 그를 잇는 일단의 루터란들은 ‘객관성’에 대한 중세적 오류를 안전히 걷어내지는 못했다. 예컨대, 멜랑흐톤의 경우에서 보듯이, 교회의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모든 택함 받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여겼다.

 

루터와 루터란들이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지상적/천상적 교회 개념에 치중해서 보았다면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주의자들은 이를 전투적/승리적 교회 개념으로 환원하였다. 칼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과 교회가 어머니로서 성도를 자라게 한다는 점을 통하여 교회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함께 다루면서 특히 어거스틴이 그러하였듯이 교회와 은총의 개념을 깊이 생각하였다.

 

칼빈은 구원의 비밀이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을 교회의 제도적 기능에 묶을 수는 없다고 보았다. 칼빈은 보편교회는 비가시적이며 지교회는 가시적이라는 관점에서 비가시적/가시적 교회를 다루지 않았다. 그는 비가시적이든 교회에는 보이지 않는 구원의 경륜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강조하였듯이 보편적 무형교회와 보편적 유형교회의 개념이 모두 가능한 것이다.

 

칼빈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이심, 신랑 되심,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심 등은 그 속성상 비가시적이나 그 역사와 영향은 -심지어- 그 본질에 있어서조차 비가시적 교회뿐만 아니라 가시적 교호에도 적실하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머리로서의 교회와 어머니로서의 교회,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듣는 교회와 가르치는 교회가 역동적으로 연결된다. 그 근저에는 칼빈의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한 구속사적-구원론적 이해가 놓여있다. 이는 서론에서 상술한 바 있다.

 

로마 가톨릭은 구원을 사제의 성사와 연관시킨다.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주입된 은혜(gratia infusa)’는 오로지 세례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세례는 성도의 자질에 따라 도움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공로 즉 합력적 공로(meritum de congruo)를 인친다.

 

이러한 은혜는 사제의 축성(consecratio)으로 말미암는다. 세례 전 성도는 단지 지식 없는 맹목적 신앙을 가지고 있을 뿐이므로 가르치는 교회의 역할이 필히 요구된다. 교회의 가르침이 없이는 성도의 들음이 없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오직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획득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학교가 아니라 교회의 학교에서 먼저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기 전에 교회의 음성-사제의 음성-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종교개혁은 이를 말씀의 설교에 연관시켰다. 사제의 성사가 없더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실로 존재한다. 그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전달된다. 사도는 말씀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언할 뿐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체가 곧 말씀을 듣는 것이며, 사도들은 그 증인들이며 증언자들에 불과하다(요 17:3; 요일 1:3).

 

종교개혁 이후 전개된 다양한 근대적 교회론은 구원을 주관적인 상승(elevatio)으로 여기는 극단적 주관주의에 경도되었다. 대체로 그것은 이성주의거니 신비주의의 모습을 띄었으며, 공히 윤리적이었다. 그것이 쏘씨누스의 이성,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리츨의 윤리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모두 전통적인 성경적 교회론으로부터는 멀어져 있었다.

 

이러한 근대적 교회론은 오늘날 더욱 극단화되어 교회의 성도라는 개념 자체가 지워지고 인류의 구성원으로서-혹은 건전한 시민으로서 교인이라는 개념이 부각된다. 오늘날 교회는 거듭난 거룩성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new humanity)을 더욱 추구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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