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에 관한 성경적 고찰
평신도(平信徒)는 "평신자"(平信者)라고도 부르며 성직자와 대비되는 일반성도를 총칭하는 단어이다 평신도라는 용어는 A.D 2세기경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제자이며 속사도 시대 최초의 교부로 알려진 클레멘스(Clement 1) 로마교회 초대장로가 처음 사용하였다 클레멘스가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때 그는 서신의 일부 내용에서 장로, 집사, 평신도(Laity)라는 구분된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교회에서는 현재에 이르기 까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AD 96~97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클레멘서 1서는 클레멘스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적인 편지가 아니라 로마교회가 보내는 공문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멘스가 고린도에 보낸 서신은 크게 4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구약은 신약의 기초이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둘째, 구약의 제도와 예배의식은 기독교회의 의식을 지배하고 계승한다.
셋째, 교회는 종말론적 임박성을 가진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아니라 제사장에 의한 지배구조 성격을 가진 계층구조를 가지고 발전한다.
넷째, 성직은 사도에 의하여 계승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와 후대에 그대로 전승되기 위한 것이다.
클레멘스는 이러한 서신을 통하여 교회공동체의 조직을 통할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고, 이것이 총회와 칙령등을 통하여 모든 교회와 공동체의 표준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이다.
평신도는 본래 헬라어 "laos"에서 유래된 것으로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뜻하는 "평민"(平民,plebeian)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평신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믿는 사람으로 구원이 확정된 사람들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즉, 이 땅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신분과 차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직자와 장로와 집사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동일한 개념인 백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서는 현재와 같은 수직적인 조직과 시스템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단지 하나님 나라의 왕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있을 뿐인 것이다 지금과 같이 왕과 백성 사이에 어떤 조직과 조력자와 균형잡힌 시스템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생존해 있는 이 땅은 천국의 미완성이 공존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공동체 속에서 그 공동체를 리더하고 조정해 나가며 융합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직분과 구분이 없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관성 있는 평균적 본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신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현재 교회에서 구분되고 있는 용어의 정당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평신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한 국가의 "평민"(국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광의의 의미에서 모두 "평신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1954년 WCC 에반스턴 회의에서 제기되고, 1958년 신학자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가 주장한 신자유주의적 사고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동의한 헨드릭 크래머는 그의 저서 "A theology of Laity"(평신도신학)에서 19세기 이후 미국의 기독교는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평신도 사도성"(the lay apostolate)을 주창하며 평신도 중심의 교회개혁과 갱신을 요구하였다 그의 논리는 일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토착신앙간의 협력을 모색하고 성경관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기본적 성경교리의 원칙을 흐리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헨드릭 크래머는 성직자의 개념을 무력화 시키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하여 모두가 강도권과 치리와 축도권을 가지는 자유민주적 사관을 결합하려 한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었다.
성경에서는 평신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으며 그러한 용어도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지시를 수행하던 리더가 있었으며, 신약에서도 사도와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수행한 것 처럼 모두가 그 일을 회전방식으로 돌아가며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즉, 누군가는 말씀을 전하고, 누군가는 성도를 돌아보며 구제와 선교를 담당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일과 병행하여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광의의 평신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직분상 다르게 나타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거나 이끌어낸 지도력이 아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대부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도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이름으로 통용하였을 뿐 왕이나 지도자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지도자와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세를 왕과 지도자로 보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과 절대적인 지도자로 본 것이 아니라 모세의 리더십에 의해 움직여 간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모세를 원망하였고 급기야는 그를 지도자로 세운 하나님까지 원망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모세는 모세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그들이 노예로 살던 시절, 그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메시야적 사상을 모세앞에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원망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40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시절을 껶으면서 그토록 힘든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구절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들이 모세와 함께 하면서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끊임없이 쏟아 낸 것은 평균이 무너졌다는 자괴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만큼 사람들은 자기 자신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즉, 애굽군인으로 부터 끊임없이 억압당하던 시절의 컴플렉스로 인하여 누군가 또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불평과 불만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다.
세월이 흐르고 오늘날에 이르러 교회조직은 방대해 지고 많은 일들이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의 시스템이 일부 수직화 되고 결정권자가 소수에 이르는 상황이 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성, 미완성, 다양성 이라는 현재의 한계성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는 예수를 함께 믿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세우고 조직화 되었을때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하여 세속적 시스템에 대한 필요성을 갖게 된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시스템은 그 본질상 일부 민주적인 절차에 따르지 못할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준행하여 이루어지는 독특한 관계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은 미완성으로 인하여 때로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본질을 흐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되기도 한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언제나 영적 부지런함을 갈구한다 양은 목자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인도대로 삶을 작용한다 성직자와 목자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인도하고 찾는 일을 계속한다 평신도와 양은 성직자와 목자의 인도를 따라 계승하며 생산적 확장을 계속한다 한편 성직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 직분을 대행하여 제사를 주관하고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와 축복을 집례한다 평신도는 성직자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인하고 인지하며 그것을 신뢰한다 평신도는 성직자의 설교대로 생활에서 실천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성직자는 강단에서 설교할 시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위치에 서 있게 되지만 그가 전하는 말씀은 본인에게도 요구되는 사항들이다 즉, 강단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평신도적 위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직자는 강단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평신도적 행위와 실천에 대한 의무도 함께 가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요한복음1:29,베드로전서1:19)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셨던 예수님은 참 목자이심과 동시에 평신도적 인생관을 동시에 가지고 사셨다(요한복음10:11,요한계시록17:14) 즉, 말씀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적 생산자의 활동도 겸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전도된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4복음서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 나라에 적용했을때 우리는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는 예수님의 속성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 분이 이 땅에 계시다고 해서 미완성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동일한 왕이시며 완전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 분께서 스스로 "어린 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요한복음1:36,요한계시록14:1)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의 적용점을 찾아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18:4절에서 예수님께서 순위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고 비워 종의 형체로 이땅에 오셨다(빌립보서2:7) 그러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직자와 장로와 집사와 권사와 서리로 다시 세분화하여 수직체계를 갖추려 한다 이것이 교회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최선이라고 그 정당성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클레멘스 교부가 고린도에 보낸 서신에서 나타난 평신도는 오늘날의 평신도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 평신도는 불완전한 교회의 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평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신도"라는 용어보다 "평신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그것은 평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클레멘스의 평신자, 즉, 평민은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낮음이 없는 가장 완전한 수평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만 평민의 수직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었다.
스데반(Stephen)집사를 기억하는가?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7대 집사로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이다 사도행전 6장에는 스데반이 6명의 집사와 함께 빈민 구제사업을 활용하며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데반은 헬라어에 능통하며 신앙이 매우 돈독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7장에는 대제사장들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하는 스데반의 설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회개하며 울부짖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분노하였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여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에게 징벌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면죄하여 줄 것을 요구하며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다
예루살렘의 7대집사는 스데반을 비롯하여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사람 니골라 였다(사도행전6:5) 이들은 한결같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행정과 구제와 선교에 관한 중요사항들의 실무를 맡아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선구자로서 그들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인 동시에 유대교인들과의 첨예한 대립하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그것을 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로마서 16장에는 사도 바울을 도왔던 수많은 평신도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와 동역자이며 순교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유니아,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그리스도안에서 인정받은 아벨레, 아리스도불로, 헤로디온, 나깃수,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주의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룰로고, 율리아, 네레오, 올름바,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더디오, 교회를 돌보아주는 가이오, 에라스도, 구아도 등 33명의 명단이 실명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과 로마서에 나타난 평신도를 바라보며 우리는 평신도가 갖고 있는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평신도는 사도들에 의해 임명되었고, 사도들과 동역하며 교회의 구제와 관련한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들의 구제는 교인들로 부터 받은 구제금과 구제내용을 공평한 원칙에 의해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는 빈곤과 질병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구제 대상자였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로마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같은 동족으로 부터도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힘을 모아야 했고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생계를 연명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의 역할은 매우 공정해야 했고 진실해야 했다 이것이 평신도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은 이들의 신앙과 표준이 정확하게 확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6:5)
둘째, 평신도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사도행전6:5)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예수를 믿었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담대함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겐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여 있었다 그들의 성령충만은 단회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스데반은 말씀을 선포하다가 순교하였고,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바울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것이었다.(사도행전7:57,로마서16:3~4)
샛째, 평신도는 남과 여, 기혼과 미혼, 청년과 노인, 그리고 친족의 구별이 없었으며 평신도의 복음은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로 전해졌다 뵈뵈는 겐그레아교회의 자매였고, 사도바울을 대신하여 희생되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부부였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사도바울의 친척 관계였고, 루포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헌신하였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는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섬겼으며,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는 그들의 자매와 함께 섬겼다(로마서16:1~16) 이처럼 평신도는 남여노소 전혀 구별없이 동일하게 헌신하였고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더 나아가 평신도의 복음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로 나아 갔으며 그 복음의 열매는 매우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동역자들은 한결같이 가족과 동반하였고 친척과 함께 하였다 이것은 평신도 사역이 기밀성을 갖고 있는 가운데 그 기밀성 유지를 위해 가족전도가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사도들의 동역자로서 성도들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었다(로마서16:3, 16:6)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사도 바울의 동역자 였다 마라아는 성도들을 위하여 수고한 평신도였다 동역자(Wiktionary)란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를 도와 교회의 일을 돌아보고 성도들을 위해 크고 작은일에 솔선수범한 사람들이었다 평신도의 동역은 목숨을 나눌 정도로 신뢰가 친밀하고 그 수고의 댓가를 바라지 않는 신앙인이었다.
다섯째, 평신도는 그리스도안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며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었다(로마서16:10, 16:13) 그리스도안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과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누군가 당신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보증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택하였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인정하고 누가 택하였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께서 평신도를 인정하고 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께서 교회에 소속된 평신도들을 택하였다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성도를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택함으로서 영원을 보장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택함을 받는다는 것은 평신도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자들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교회 공동체속에서 높낮음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 또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평신도란 무엇인가? 그리고 성직자란 무엇인가? 만인제사장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우리는 모두 성직자이며 모두 평신도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어린양이시며 참목자이신 예수님의 성품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질서를 포용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구약에서 기초하여 전승되어 오는 규약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평신도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만인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공동체 속에서 모든 사람이 설교를 하고 축도를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동의하고 지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그 질서는 유지되어야 하고 계승되어져야 교회공동체는 지속성을 가지고 전승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평민이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우월주의적 자세 만큼은 철저히 배격하고 버려야 할 유산일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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