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출애굽의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고고학
 

글 /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 교양학과 성서고고학)

 

서론


I. 역사적 배경
1. 13세기설
2. 첫 번째 역사적 출애굽: 힉소스 컨넥션


II. 지리적 배경
1. 고센땅의 도시들: 피톰, 수콧, 람세스
2. 출애굽 루트와 신명기 사가의 영토관
3. 출애굽 루트와 이집트의 광산개발
4.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
5. 열재앙과 구름기둥, 불기둥


III. 고고학적 배경
1. 가데스 바네아 문제
2. 여리고 문제


IV. 종교적 배경
1. 하토르 여신과 금송아지
2. 유일신교로서의 야훼교


결론

 

 


서론


본 논제는 만일 출애굽기 1장 11절의 ‘피톰과 람세스’라는 두 국고성에 근거하여 성서적 출애굽의 절대연대를 람세스 2세 시대인 서기전 13세기로 설정한다면, 이 사건에 관한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이 문제에 매우 민감한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은 1956년의 제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이 시내반도로 진격했을 때 8일간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가데스 바네아를 탐사했다. 특히 1967년 6일전쟁 이후 1983년 이집트에게 넘겨줄때까지 약 15년에 걸쳐서 이스라엘 학자들은 시내반도 전체에 대한 매우 자세한 탐사와 발굴을 진행했다. 하지만 서기전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성서적 출애굽 사건에 관해 다음의 질문들을 제기하게 된다. 요셉의 이집트 출세 사건과 출애굽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왜 파라오는 요셉의 가족을 ‘람세스의 땅’(창 47:11)에 정착시켰는가? 출애굽은 어느 시대에 발생했는가? 고센땅은 어떤 곳인가? 출애굽과 광야방황 기간은 왜 40년이나 걸렸는가? 출애굽 루트는 왜 먼 거리로 우회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왜 가데스 바네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는가? 왜 아론은 시내산 기슭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는가? 여리고 성벽의 기적적인 붕괴는 믿을만한가? 야훼교는 유일신교인가?

 

 

I. 역사적 배경

 

1. 서기전 13세기설


출애굽 사건의 절대연대는 출애굽기 1장 11절의 ‘피톰과 람세스’라는 두 개의 국고성에 기초해 있다. 즉 람세스는 제 19왕조의 람세스 2세는 남쪽의 수도인 테베스(Thebes)와 함께 이집트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 북쪽의 삼각주에 ‘피-람세스(Pi-Ramses)’, 즉 ‘람세스 도시’를 건설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출애굽기의 주석가들은 출애굽의 연대를 람세스 2세의 통치시대인 서기전 13세기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의 어떠한 역사적 자료에도 람세스 2세 시대에 대규모의 이스라엘 민족의 탈출 내지는 이주에 관한 언급이 없고 고고학적 발굴결과도 확인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출애굽의 서기전 13세기 가설은 더 이상 타당성이 없게 됐다. 이러한 배경에서 힉소스 컨넥션이 제기되게 된다.

 

2. 서기전 15세기설: ‘첫 번째 역사적 출애굽’과 힉소스(Hyksos) 컨넥션


‘역사적’이라는 용어를 ‘역사기록에 등장하는’것으로 본다면 첫 번째 역사적 출애굽은 서기전 1550년경 이집트 17-18왕조의 파라오들에 의한 힉소스 민족의 추방 사건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의 중왕국이 붕괴되어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북쪽의 삼각주 지역에는 가나안 지역에서 이주해 온 새로운 민족들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집트는 이들을 ‘헤카우 하숫트’, 즉 ‘외국의 지도자들’로 불렀다. ‘힉소스’라는 단어는 서기전 1900년경 중부 이집트 산양(oryx) 주(州)의 지사였던 크눔호텝의 무덤 벽화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37명의 가나인 사람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 이집트로 온 것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서상으로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파라오 바로 밑에 위치한 국무총리의 지위까지 오른 것으로 등장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가나안 사람들이 제 15왕조 약 100년 기간동안 이집트를 직접 통치했다. 그들의 수도는 고센땅에 위치한 아바리스(텔 엘-다바)였으며 모두 6명의 왕의 이름들이 스케럽 도장을 통해 밝혀졌고 그들중의 하나가 ‘야곱(야아콥-헤르)’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집트의 북쪽에는 힉소스의 15왕조가 그리고 남쪽에는 이집트 원주민의 17왕조가 공존했는데 서기전 1560년경 17왕조의 파라오 세크넨라(Seqnenra) 시대부터 서서히 힉소스 왕조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카모세는 전쟁을 통해 북쪽의 힉소스 영역을 침공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힉소스 추방은 제 18왕조의 첫 왕인 악흐모세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힉소스 왕국의 수도인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도망치는 힉소스르 추격하여 가나안의 샤룩헨을 파괴했다. 따라서 적어도 이집트의 역사적 관점에서 첫 번째 출애굽은 18왕조의 악흐모세 시대인 서기전 1550년에 발생한 힉소스의 추방사건이라는 것이다.

 

 

II. 지리적 배경

 

1. 고센땅의 도시들: 피톰, 수콧, 람세스


피톰(Pithom)=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
출애굽기 1장 11절에서 피톰은 람세스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로 동원되어 건설한 국고성으로 나타난다. 구약성서에 단 한번 등장하는 피톰(???)은 고대 이집트어 ‘페르 아툼(Pr-Itm)’의 히브리어 음역으로 볼 수 있다. ‘아툼의 신전’이라는 뜻의 페르-아툼의 지리적 위치 확인은 영국의 이집트 탐사재단이 람세스라고 추정했던 텔 엘-마스쿠타를 발굴한 결과 얻어진 뜻밖의 수확이었다. 1883년 나빌(E.Naville)이 처음으로 발굴을 시도하여 흙벽돌로 성벽이 쌓여진 모두 4만6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요새를 발견했다. 1970년대 이후에 텔 엘-마스쿠타를 집중적으로 발굴했던 카나다의 할러데이(J.S. Holladay)는 람세스 2세의 석상들이 이 곳에서 발견되기는 했지만 토기면에서 제 15왕조(서기전 1650-1550)를 제외하고는 서기전 600년 이전에는 주거층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텔 엘-마스쿠타를 더 이상 출애굽과 연관된 피톰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만일 텔 엘-마스쿠타가 피톰이라면 람세스 2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람세스와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출애굽기 1장 11절에 피톰이 람세스와 함께 히브리 노예들이 동원되어 건설한 국고성으로 표현되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출애굽의 첫 번째 여정인 수콧과 피톰과의 연관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콧(Succoth)
출애굽의 두 도시인 피톰과 람세스와 관련하여 고센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첫 번째 목적지였던 수콧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수콧(????)은 그 어원상 히브리어로 천막이라는 뜻을 지닌 수카(????)의 복수형으로서 유목민들의 천막촌을 의미한다. 수콧이 출애굽 이야기에서 출발지인 람세스를 떠난 후 첫 번째 도착한 지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출애 12:37) 19세기의 성서학자들은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 지방 중에서도 되도록 가나안과 가까이 있는 북서쪽의 고센 땅에서 그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1875년 부룩쉬(H. Brugsch)는 이집트 지명과 히브리어 지명의 유사성을 통해서 이집트 고대 기록에서 등장하는 체쿠(?kw)가 다름아닌 출애굽기의 수콧으로 볼 수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만일 이집트의 체쿠가 성서의 수콧이라면 수콧은 고대 이집트 기록에서는 항상 피톰과 같이 등장하기 때문에 피톰과의 관계속에서 그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지리학자와 이집트학자들은 와디 투밀랏트(Wadi Tumilat)에 위치한 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를 피톰으로 보고 있으며 수콧은 바로 피톰을 포함하는 와디 투밀랏 지역 전체로 보고 있다. 와디 투밀랏트는 고대 이집트의 행정구역상 하이집트의 여덟 번째 구역인 ‘동부 작살(Harpoon East)’ 주(州)이다.

 

비록 텔 엘-마스쿠타는 그 주거역사상 람세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체쿠와 피톰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서 서기전 1200년경 기록된 당시 학교에서 교재로 쓰이던 파피루스 기록을 들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발견된 후 최초의 소장자의 이름을 따서 아나스타시(Anastasi) 제 VI파피루스라 불리는 이 문서에는 체쿠의 궁수대장인 카켐웨르가 시나이 반도쪽으로 도망친 두명의 노예를 잡기 위해 궁전(람세스)을 출발하여 다음날 체쿠에 있는 요새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출애굽 기록(12:37)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람세스를 출발하여 다음날 수콧에 도달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아나스타시 제 V파피루스에는 피톰의 연못 근처에서 목축을 할 수 있도록 에돔 출신의 샤수 민족을 체쿠에 있는 메르네프타 요새 곁으로 통과시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서기전 1200년경의 기록에서 체쿠는 도시라기 보다는 피톰이 위치했던 지역 이름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서기전 600년경 기록된 피톰 석비의 ‘체쿠에 있는 페르-아툼’이라는 구절과도 일치한다.

 

아나스타시 파피루스의 체쿠와 페르-아툼(피톰)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나스타시 파피루스 제 V, VI권에 나타난 이 기록은 체쿠에 주둔하고 있는 궁수대장과 서기관 이네나가 각각 탈주한 노예와 에돔 출신의 샤수 민족의 이동에 관해 보고한 내용들이다.

 

체쿠의 궁수대장 카켐웨르(Kakemwer)가 궁수대장 아니(Ani)와 궁수대장 바켄 프타(Baken-Ptah)에게:
제 3계절 3월 9일 저녁 무렵 나는 두 명의 노예를 추적하기 위해 궁전의 넓은 광 장을 출발했읍니다. 3월 10일 체쿠의 요새 성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남쪽 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읍니다. 내가 다음 요새에 도착했을 때 광야에서 파견된 척후병은 그들이 세티 메르네프타의 미그돌을 지나 도망쳤음을 알려줬읍니다. 내 편지가 당신께 도달하거든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들 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어떤 내용이며 누가 그들을 쫒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들에 관한 모든 것과 추격하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파견했는지 내게 답신하 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서기관 이네나(Inena)가 재무성의 서기관 카가부(Qagabu) 상관님께:
저는 제게 맡겨진 모든 임무를 훌륭하게 그리고 무쇠처럼 단단하게 수행했습니다. 저는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제 8년 연말, 셋트의 생일이 있는 5일간의 휴 가 기간 동안 에돔 출신의 샤수(Shasu) 민족을 체쿠에 위치한 메르네프타 요새를 통과하여 페르-아툼의 물가에 정착하도록 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과 그들의 가축이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텔 엘-마스쿠타를 피톰으로 본다면 아나스타시 파피루스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고고학적 발굴 결과 재구성된 피톰의 주거역사에서 서기전 1200년 경 이 곳은 폐허였는데 어떻게 피톰이 계속 언급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피톰을 도시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체쿠 지역 어디엔가 서 있었던 아툼의 신전으로 본다면 그 해석상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 당시 히브리 노예들이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할 도성으로서 피톰을 건설했다는(출애 1:11) 구절은 텔 엘-마스쿠타의 발굴 결과와는 상반된 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600년경 기록된 텔 엘-마스쿠타에서 출토된 피톰 석비의 “체쿠의 피톰”을 근거로 출애굽기의 피톰과 수콧에 관한 언급은 람세스 시대보다는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빌로니아의 통치에 반대하던 이스마엘 일행은 느부갓네살이 책봉한 유다의 통치자 그달리야와 그 추정자들을 미스바에서 살해한 후 이집트로 망명한 사건이 있다(왕하 25:25-26). 예레미야도 마지못해 이 행렬에 동참했고 이집트의 다바네스에서 예언을 시작하게 된다(예레 43:6-8). 이때부터 본격적인 이집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콧과 피톰에 관한 언급은 서기전 580년경 예레미아를 비롯한 유다의 난민이 바빌로니아의 침공을 피해 이집트의 고센지역으로 피난 간 이후에 생겨난 전승으로 볼 수 있다.

 

람세스(Ramses)


람세스 시대에 이집트 제국의 수도는 남쪽의 테베였지만 북쪽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으로의 군사적 원정 등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상 이집트의 테베와는 별도의 하 이집트의 수도로서 건설된 도시가 바로 람세스 도시였다. 람세스 도시는 서기전 1300년경 세티 1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설되었고 람세스 2세의 왕궁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서기전 1069년 신왕국 말기에 람세스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이 곳의 석재들은 북쪽의 타니스의 신전과 부바스티스를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은 ‘페르-라메수-메리-이멘(Pr-R`mssw-mry-'Imn)’, 즉 ‘아문의 사랑하는 람세스의 저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1929년 이집트 고고학성의 함자(M. Hamza)가 아바리스 근처의 칸티르(Qantir)에서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궁전터를 발견하면서부터 이곳이 유력한 람세스 도시의 후보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특히 수천점에 달하는 매우 아름다운 파이앙스 타일은 왕궁이나 신전 건축에만 사용되는 고급품이어서 이 곳이 왕도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나아가 1940년대 초 하바치(L. Habachi)가 왕궁 목욕탕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잔해를 발견하면서 더욱 그 위치가 확고해졌다. 1966년 이래로 비엔나 대학과 오스트리아 발굴단이 제 15왕조 힉소스 시대의 수도였던 아바리스(Avaris), 즉 텔 엘-다바(Tell el-Daba)에 대한 대규모 조사와 발굴을 시작하면서 람세스 도시의 본격적인 발굴이 계획되었다. 아바리스나 피람세스는 모두가 지금은 말라서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고대 나일강 줄기 중 하나였던 펠루시움 지류 동편에 위치해서 운하와 인공호수를 이용한 내륙항구와 함께 발달한 도시들이었다.

 

1980년대부터 칸티르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독일 펠리제우스 박물관 발굴팀의 책임자인 푸쉬(E. Pusch)박사는 여러가지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이 유적지가 출애굽기에서 언급한 람세스라고 단언한 바 있으며, 특히 1998년 12월에는 황금으로 덮인 람세스 2세의 궁전 바닥을, 또한 1999년 10월에는 400여 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마굿간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아직 최종 발굴보고서의 출판을 기다리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람세스의 유적지는 칸티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2. 출애굽 루트와 신명기 사가의 영토관


전통적인 출애굽 루트는 고센 땅의 피톰과 람세스 지역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 반도로 들어왔고 남쪽의 시내산을 거쳐 가데스 바네아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데스 바네아를 출발하여 남쪽의 홍해에 위치한 에일랏을 거쳐 에돔 땅을 들어갔고 북상하여 모압평지에 이르러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돌아온다. 그런데 당시의 해당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목적지인 여리고 맞은 편을 지나 북상하여 길르아드와 심지어 골란 고원지역인 바산에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이민족들을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평지까지의 루트는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사해 남단에 대한 군사적 원정 루트와 일치하며 단지 진행방향의 화살표만 반대일 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네 왕들의 최종 목적지가 소돔과 고모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남쪽의 홍해변의 에일랏을 거쳐 가데스 바네아를 거친 다음 비로소 사해 남단에 도달하는 우회로를 택했는가? 이러한 물음은 왜 이집트를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 건너편을 돌아가는 우회 경로를 선택했느냐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사건의 지리적 루트가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영토를 잃은 바빌로니아 포로기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던 신명기 사가가 이상적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국가의 남쪽과 동쪽의 최대 경계였음을 유추하게 된다.

 

3. 출애굽 루트와 이집트의 광산개발


이집트는 금속과 보석을 구하기 위해 나일강변은 물론이거나와 멀리 떨어진 지역의 광산들을 개발하기 위해서 이미 왕조 이전시대부터 탐사로를 개척해왔다. 특히 터키옥의 경우 이집트 지역에서는 왕조 이전시대(서기전 4000년경)의 무덤에서부터 발견되며, 아직까지는 나일강변에서 어떠한 터키옥 광산도 발견되지 않았고 오직 시내 반도에만 존재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발굴결과 고왕국시대 제 3왕조 시대부터 와디 메가라에서 본격적인 터키옥 채굴이 이루어졌으며 중왕국 시대부터는 세라빗트 엘-카딤에서 대규모 터키옥 광산이 개발됐다. 또한 이집트는 신왕국시대부터 구리를 채굴하기 위해서 아라바 광야의 팀나(Timna)를 집중적으로 개발했으며 페이난(Feinan) 광산은 이스라엘 왕정시대의 중요한 구리 생산지였다.

 

1) 터키옥 광산: 와디 마아라(Wadi Maghara)와 세라빗트 엘-카딤(Serabit el-Khadim)
이집트가 시내 반도에서 가장 최초로 개발한 지역은 와디 메가라의 터키옥 광산이었다. 가장 최초의 조직적인 채굴작업은 제 3왕조의 첫왕인 사낙크트(Sanakht) 시대(서기전 2686-2667)부터 시작됐으며 이 광산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전체 면적이 6000 평방미터에 달하는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 특히 파라오가 베두인들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휘어잡고 곤봉으로 내리치는 장면이 새겨진 토기조각이 이 곳에서 발견됨으로써 이 광산이 왕명에 의해 직접 개발되고 관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연한 하늘색에서부터 녹색에 이르기까지 매우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상을 자랑하는 터키옥은 이집트 귀금속 장식에 있어서 신의 육체로 여겨지는 황금, 짙은 남색의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그리고 붉은 빛의 카넬리안(carnelian)과 함께 4대 중요 보물로 취급되던 보석이었다. 세라빗트 엘-카딤은 시나이 반도의 남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고대근동의 대표적인 터키옥(turquoise) 광산지역이다. 이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본격적인 광산개발은 중왕국시대부터 시작됐다. 제 12왕조의 아메넴헷트 1세(서기전 1991-1962)는 이곳에 하토르 여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했고 이 신전 유적에서 하토르 여신을 ‘터키옥의 귀부인’으로 표현한 상형문자의 기록이 발견됐다. 또한 이곳에서는 최초의 알파벳으로 알려진 원(原)-시내어(Proto-Sinaitic)의 기록물이 여러점 발견되어서 당시 이집트 상형문자권의 광산에서 일하던 가나안 노동자들이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문자의 개발을 시도했던 흔적을 확인하게 되었다.

 

2) 구리광산: 팀나(Timnah)와 페이난(Feinan)
이스라엘 남부의 아라바에 위치한 팀나는 이미 서기전 4000년경부터 구리를 채굴한 흔적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1959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과 탐사가 시작된 팀나에서는 초기 청동기 I-II시대(서기전 3300-2700)와 후기 청동기 II시대(서기전 1400-1200),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 그리고 로마시대에 각각 구리를 채굴한 흔적을 발견했다. 팀나의 절벽 아래 세워진 하토르 여신의 신전이 발견됨으로써 하토르는 시내반도에서 ‘터키옥의 귀부인’일 뿐만 아니라 아라바에서는 ‘구리의 수호신’이었음을 알게 됐다. 아라바의 팀나로부터 북쪽으로 약 10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페이난은 원래 지질학적으로 팀나와 같은 지역이었는데 아라바 골짜기를 남북을 가로 지르는 단층작용으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성서에서는 부논(Punon)으로 민수기 33장 42-43절에 이스라엘 민족이 진을 친 곳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발굴결과 도시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초기 청동기 I시대 부터 구리를 채굴한 흔적이 있으며 중기 청동기 I시대인 서기전 2200-2000년에도 구리를 생산했다. 특히 페이난은 철기 시대에 들어와서 이스라엘과 요단 건너편 왕국들의 중요한 구리산지 역할을 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곳의 활동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집트인들이 자국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팀나를 집중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


오늘날 기독교 전승이 인정하는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 남부지역 화강암 산악지대에 위치한 해발 2285미터 높이의 ‘제벨 무사’이다. 하지만 이 전승은 서기 4세기 비잔틴 시대부터 형성된 것이어서 그 역사적 신빙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서기전 3세기 이후부터 서기 3세기까지 약 600년 동안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보다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북동부 오늘날의 헤자즈 북부지역인 ‘아라비아의 미디안’ 지역에 있는 것으로 고대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만일 성서적 출애굽 사건의 연대를 출애굽기 1장 11절의 람세스 도시를 근거로 서기전 13세기 람세스 2세 시대로 본다면 시나이 반도에서 당시의 주거흔적이나 유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 의문을 품게 된다. 오경의 편집자가 시내산을 언급했을 때 과연 그는 그 지리적 위치를 알고 있었는가? 어쩌면 왕정시대에는 시내산의 분명한 지리적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거나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늘날 고고학적인 관점에서나 역사학적인 관점에서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를 증명할 만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시내산에 관한 연구는 출애굽기를 비롯한 성서에서 묘사하는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한다기 보다는 언제 어떠한 배경에 의해 특정지역의 산봉우리들이 구약시대의 시내산으로 확정됐는지 그 과정을 분석할 수밖에 없다.

 

아라비아의 미디안


만일 호렙산과 시내산이 동일 지역이라면 시내산의 위치에 관한 첫 번째 구절은 미디안 광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미디안 체류 시절 모세는 양떼를 이끌고 미디안 광야를 지나서 호렙산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미디안 광야는 어디인가? 서기 4세기 오늘날의 제벨 무사가 시내산으로 확정되기 이전까지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는 미디안, 즉 아라비아 지방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기전 2세기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서에서 미디안은 마디암(Μαδιαμ)으로 표기되며 특정한 경우에는 ‘마디암 도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서기전 3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역사가 데메트리오스(Demetrios)는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 한 후 마디암 도시에 정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전 2세기에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벨서는 성지의 지리학 부분에서 시내산이 아라비아 반도에 있다고 언급했다(요벨서 8:9). 그렇다면 왜 알렉산드리아 공동체는 시나이 반도보다는 아라비아를 주목했는가? 최근 이 주제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를 발표한 성 요셉 대학의 커크슬레이져(Allen Kerkeslager) 교수는 그 이유를 홍해를 거치는 향품 무역의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아라비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향품무역로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 도시의 유대인 학자들에게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시나이 반도보다는 잘 알려진 아라비아의 헤자즈 북부 지역을 미디안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디안의 한 도시라고 여겨지는 알-바드(Al-Bad)는 서기전 200년경 이래로 남쪽 홍해변의 무역항 아이누나(류케 코메)로부터 북상하여 나바테야 왕국의 수도 페트라로 연결되는 무역로의 중간에 위치하여 일종의 정거장 역할을 담당했다.

 

칠십인역의 영향을 받은 서기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팔레스타인의 요세푸스, 그리고 바울 등의 기록을 통해서 신약시대 저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시내산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견해들을 종합해 볼 수 있다. 서기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는 모세가 이집트 관리를 살해한 후 피난 간 곳이 아라비아 지방이었고 모세의 부인 십보라는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 여인이었다고 기록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메섹에 가기전 아라비아에 들렀음을 언급하고 있다(1:17). 아브라함의 두 여인 하갈과 사라를 비교했던 바울은 이들을 각각 시내산과 예루살렘으로 대비시켰다(갈 4:21-31). 이 비유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바로 시내산이 아라비아 있다는 구절이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인 서기 50년대 아라비아는 나바테야 왕국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출애굽기의 모세 사건을 기록하면서 모세가 이집트 관리를 살해한 후 탈출하여 도착한 곳을 홍해변의 ‘마디안 도시’로 표기하고 있다.

 

서기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프톨레메우스의 기록에서 시나이 반도의 중부와 와디 페이란 오아시스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인 행정구역상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aea)로 편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이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디안이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 유세비우스, 제롬 등은 대부분 칠십인역과 서기 1세기 유대인 기록(필로와 요세푸스)에 영향을 받아서 여전히 시내산을 아라비아 북서쪽에 위치한 마디안 도시 근처로 보았다. 비록 이러한 기독교 전승은 서기 7세기 이 지역이 무슬림들에 의해 정복되면서 사라졌지만, 서기 9세기부터 아랍인들은 마디안을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고향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마디안이라고 여겨지는 알-바드 오아시스의 옛 이름이 ‘무가이르 슈아입(Mughair Shu`ayb)’으로 나타나는데 ‘슈아입’은 다른 아닌 이드로의 아랍식 이름이다.

출애굽기 19장 16절 이하에서 시내산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 가운데서 야훼가 나타나는 모습을 근거로 시내산은 화산활동이 있었던 곳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시대 이후로 화산폭발의 흔적이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북서쪽, 또는 헤자즈(Hejaz) 북부 지역이 시내산의 후보지로 떠 올랐다. 이러한 해설은 시내산이 미디안 근처에 있으며 미디안은 다름 아닌 헤자즈 북부지역이라는 지리적 추론과 일치한다.

 

쿠라야(Qurayyah)


‘아라비아의 미디안’중에서 유일하게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된 곳은 쿠라야 유적지이다. 쿠라야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북서쪽 광야지대에 위치한 길이 1km에 폭 350m 규모의 바위언덕 지역이다. 주위보다 50미터 높은 이 언덕 위에는 1.4m 두께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건설됐다. 요새의 아래에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12만m2 넓이의 주거지가 발견됐다. 아마도 쿠라야 유적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 ‘오스타마(Ostama)’로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쿠라야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68년 런던대학 발굴팀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 고고학자들에 의한 부분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쿠라야 주거지의 성격과 최종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출판된 자료를 근거로 이 유적은 서기전 13세기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연대는 이스라엘 남부의 구리 광산 팀나의 유적과 비교를 통해 얻어졌다.

 

시나이 반도 남부지역


와디 페이란(Wadi Feiran)의 기독교 공동체
와디 페이란 오나시스는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아시스이다. 서기 3세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곳에 형성되기 이전에 페이란 오아시스는 나바테야 민족을 비롯해서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오가며 향품 무역을 했던 사람들의 중요한 중계 무역도시로 번창했다. 페이란에는 서기 100년경 처음으로 촌락이 형성됐고 4세기부터 도시로 개발되어 서기 5-7세기에 최고조로 발전하다가 서기 700년경 폐허가 됐다. 서기 250년경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이 시나이 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박해의 열기가 식어질 무렵 시나이 반도 남부의 와디 페이란 오아시스 지역에는 수도사들의 공동체가 형성됐다. 이 공동체에는 시나이 교구를 대표하는 주교좌를 지닐 정도로 번창했고 최대 600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유대인 전승에서 시내산을 미디안 지역으로 보았지만 아마도 페이란 공동체 초기인 서기 2-3세기에는 이곳에서 바로 남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해발 2070미터 높이의 제벨 세르발(Jebel Serbal)을 시내산으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시내산이 제벨 세르발에서 제벨 무사로 이동됐는가? 몇몇 탐험가와 지리학자들은 현장의 지정학적인 조건들을 점검하고는 무슬림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중요 통행로인 와디 페이란보다는 이곳에서부터 남동쪽으로 35km 내륙으로 들어간 제벨 무사 골짜기가 좀 더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페이란 기독교 공동체에게 시내산의 위치가 그리 큰 관심을 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서기 4세기 후반부터는 모세의 시내산을 방문하려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순례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근처의 특정한 산봉우리를 성지화시키는 작업이 시작된 것 같다.

 

제벨 무사(Jebel Musa)


제벨 무사가 위치한 바위산 구역은 길이가 3.3km, 폭 1.7km로서 전체면적이 5.6km2에 달한다. 이 구역에는 해발 2000m 이상의 산봉우리들만 25개에 달하는 고산지대이다. 제벨 무사를 시내산을 인정한 최초의 장본인은 360년경 이곳으로 이주해 왔던 시리아 출신의 율리아누스 사바(Julianus Saba)였다. 사바는 특히 해발 2285미터 시내산 봉우리에 교회당을 건설했고 이 교회당의 존재는 서기 380년경 시내산을 등반했던 순례자 에게리아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건물은 서기 5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 증축됐으며 시내산을 찾은 여러 순례자들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됐다. 이 교회당은 서기 8세기경 더 이상 돌보지 않아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1860년대 이 교회당을 조사했던 영국의 성서지리학자 윌슨(C.W. Wilson)과 팔머(R.S. Palmer)는 건축적으로 산기슭의 성 카타린 수도원의 변화 교회와 비슷한 점들을 발견했다. 오늘날 제벨 무사 정상의 교회당은 길이 25m 폭 11m 규모로서 1934년에 증축된 것이며 서기 4세기 최초의 건물 이후 5번째의 것으로 확인됐다.

 

떨기 나무


장인의 양떼를 치던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야훼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출 3:1-5). 지금까지 밝혀진 여러 군데의 시내산 후보지들 가운데 떨기나무 전승이 있는 곳은 제벨 무사뿐이다.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에 있는 떨기나무와 이를 기념하는 성소는 서기 350년경부터 그 전승이 생겨났다. 성 카타린 수도원의 전승에 의하면 서기 300년경 이 곳에 온 수도사들은 그 장소의 중요성을 몰랐지만 근처의 베두인 유목민들이 한 골짜기에 서식하는 식물을 모세의 가시덤불이라고 알으켜 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은 그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 우선 아랍인들에게 모세 전승이 알려진 것은 적어도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이 최종편집된 서기 7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결론

 

이집트는 이미 서기전 3000년경부터 터키옥을 채굴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의 와디 마아라와 세라빗트 엘-카딤 지역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서기전 1500년경 하쳅숫트 여왕 시절에는 ‘푼트(Punt)’로 불리는 소말리아 지역과의 국제무역을 위해 홍해를 통과하여 아라비아 반도와 소말리아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했다. 아마도 이 시기부터 미디안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 같다. 서기전 13세기 제 19왕조의 발전과 함께 이집트는 팀나와 페이난(푸논)의 구리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이스라엘 남부 지역과 에돔지역으로 진출했다. 따라서 이집트적 관점에서 아라비아의 미디안이나 시나이 반도는 이른 시기부터 잘 알려진 지역이었다. 이스라엘 왕정시대 시내산의 위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엘리야의 호렙산 원정은 단지 브엘세바 남부의 한 지역으로만 나타난다(왕상 19:1-14). 하지만 서기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발전과 함께 홍해를 경유하는 인도와 아라비아의 향품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이 도시의 유대인 기록에서 모세와 미디안의 관계가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당시 미디안은 아라비아의 북서지역이었으며 당연히 시내산도 이 곳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기전 2세기에 최종 편집된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필로나 요세푸스 등도 이 전승을 따랐다. 서기 2세기 기록에서 시나이 지역이 행정적으로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aea) 지방에 속하게 되면서 자연히 미디안도 시나이 반도와 관련을 맺게 된다. 한편 서기 3세기부터 이집트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시나이 반도의 페이란 오아시스 지역으로 몰려들어 수도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내산의 후보지가 아라비아의 미디안에서 시나이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기 4세기 기독교 부흥과 함께 와디 페이란의 기독교 공동체는 가장 큰 규모로 발전했다. 당시 시내산은 와디 페이란에서 바로 올려다 보이는 제벨 세르발이었다. 서기 4세기 중엽 제벨 무사 산기슭에서 한 떨기나무 서식지를 모세와 연관시켜 신성화하기 시작했고 이는 서기 380년대 이곳을 방문했던 순례자 에게리아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입증됐다. 이때부터 시내산이 제벨 세르발에서 제벨 무사로 옮겨졌다. 서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벨 무사 기슭 해발 1500m 지점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카타린 수도원을 건설함으로써 오랜 기간 지속된 시내산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5. 출애굽의 열재앙과 구름기둥-불기둥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를 위협했던 모세의 열 가지 재앙(출 7-11장)은 이집트 지역에서 가뭄과 홍수, 그리고 지진과 화산 폭발의 결과 발생하는 대표적인 자연재난들이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것은 홍수가 날 때 흙탕물로 인해 색깔이 붉어질 수 있지만 이어서 발생하는 물고기 폐사와 악취와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이 재앙은 홍수 직전 나일강의 수위가 연중 최저치에 달했을 때 발생하는 적조현상으로 물고기가 집단폐사하고 물이 썩음으로써 음용수로 부적합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청나일의 원류격인 이티오피아의 타나 호수에서 서식하는 편모충(flagellates)의 증가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범람한 물이 빠진 후 개구리와 파리가 대량 서식하며 홍수로 익사한 동물과 사람의 부패된 시신을 통해 가축과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이 번진다. 반면에 가뭄이 들면 메마른 아프리카 대륙을 휩쓰는 메뚜기 떼가 나일강변으로 몰려들어 모든 농작물과 초목을 완전히 먹어치운다. 특히 열재앙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곱 번째의 폭풍우 현상과 아홉번째의 흑암현상인데 최근의 연구결과 대규모의 화산폭발로 인한 기상이변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때문이다.

 

일곱 번째 재앙: 천둥(???), 우박(???), 번개(??), 비(???)
이 재앙의 시기는 보리의 이삭이 돋고 삼의 꽃이 피는 11월경으로 추정된다(출 9:31).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떨어져 농작물과 가축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쳤다. 이것은 심한 폭풍우가 몰아쳤음을 의미하는데 23절에는 천둥, 우박, 번개만 등장하고 비에 관한 언급이 빠져있다. 하지만 당시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34절에서 천둥, 우박, 비가 그친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폭풍우는 북쪽의 지중해 지역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은 광야성 기후를 지닌 이집트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이 재앙을 겪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놀라움은 이집트 민족이 개국이래 처음 당하는 천재지변이라는 24절의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온 이집트 땅에 그와 같은 일은 없었다.

 

물론 개국 이래 첫 재앙이라는 표현은 평소에 겪지 못하던 대규모의 기상이변을 강조하려는 통속적인 표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근동의 다른지역에서는 겨울철 우기에 자주 발생하는 폭풍우 현상이 유독 이집트에서는 재앙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화산폭발후 단기적 현상으로는 며칠동안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그치지만 장기적 효과로서 여러종류의 기상이변이 발생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한파가 몰아닥치는 것이다. 많은 양의 화산재가 성층권으로 치솟아 젯트기류를 타고 인근지역으로 번짐으로써 태양빛을 차단하게 되며 지구의 평균 기온이 섭씨 1도 정도 떨어지는 소위 냉방효과를 초래한다.

 

아홉번째 재앙: 사흘 동안의 어두움
출애굽기의 열재앙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은 사흘 동안 하늘이 캄캄해진 사건을 중동지방의 열풍인 함씬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아랍어로 50을 뜻하는 함씬은 연중 50일 동안 부는 바람, 또는 20세기에 들어와 시작된 기온관측적 차원에서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는 뜨거운 바람이라는 것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전자의 이유가 좀 더 타당할 것 같다. 함씬은 일년중 3-5월 사이에 발생하는데 끝없이 펼쳐진 리비아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이집트에 심한 함씬이 불어닥치면 짙은 먼지가 태양빛을 차단해서 거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어두워지며 모랫바람 때문에 사람들이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이 봄철에 발생하는 이집트의 연례행사라면 굳이 열가지의 특징적인 재앙으로 부각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1967년부터 시작된 아크로티리 발굴 이후 그 위력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지중해 테라 섬의 화산폭발의 결과 이집트 전역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기상이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은 대규모 화산폭발 이후 화산재가 하늘을 덮어 발생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구름기둥-불기둥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유랑 이야기 속에서 대규모의 화산폭발을 암시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야훼가 그의 백성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했다(출 13:21-22)는 것이다. 서기 1867년 테라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근처를 지나던 배에 탄 사람들은 ‘낮에는 연기가 밤에는 불길이 치솟았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연기는 수증기 구름을 말하며 밤에는 여기에 불빛이 반사되어 불기둥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III. 고고학적 배경

 

1.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 문제


가데스 바네아는 시내반도 북동 지역의 베두인 중심지인 쿠세이마(Quseima) 남동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텔)이다. 텔 상류 1 킬로미터 지점에는 가데스 바네아의 수원지인 쿠데이랏트 샘(Ain el-Qudeirat)이 자리잡고 있다. 1956년과 1976-82년에 걸친 조직적인 발굴결과 이 요새는 이스라엘 왕국의 남쪽 경계를 수비하기 위해서 서기전 10세기 솔로몬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가데스 바네아의 중요성은 이 요새가 서기전 8세기 우시야, 서기전 7세기 요시아에 의해 각각 재건된 점으로 미루어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데스 바네아는 더 이상 성서적 출애굽과 연관시킬 수 없게 되었다.

 

2. 여리고(Jericho) 문제


여호수아의 군대가 기적적으로 파괴시켰다는 여리고는 1868년 영국의 워렌(C. Warren)이 처음으로 발굴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이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 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 Watzinger)가 다시 발굴했을 때 그들은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 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것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발굴 당사자들은 과연 어느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결국 그들은 서기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청동기 시대의 성벽을 최종적으로 선택했고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같은 시대로 보았다. 이 연대를 기준으로 광야생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 사건도 서기전 1500년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여리고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신봉하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주장되는 초기 출애굽설을 낳게 된다. 젤린의 발굴 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리버풀 대학의 가르스탕(J. Garstang)은 1930년부터 새로운 성벽을 찾기위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 하지만 7년 동안의 발굴 결과 내린 가르스탕의 결론은 젤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연대를 100여년 늦추어서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 성의 파괴가 서기전 15세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여리고의 대표적인 발굴은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인 케년(K.M. Kenyon)에 의한 것으로서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지속됐다. 그녀는 이 발굴에서 가장 발전된 발굴기술을 적용하고 토기들의 분석을 통한 정확한 연대추정 결과 여호수아 성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곳에는 이미 1만년전부터 거대한 성벽과 망대가 건설됐기 때문에 여리고가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것이다. 도시문명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서기전 4000년경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결과였다. 한편 그녀의 ‘여호수아 성벽’에 대한 연대추정은 그 이전의 발굴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1997년부터는 이탈리아 발굴팀이 여리고에 대한 새로운 발굴을 시도하고 있다.

 


IV. 종교적 배경

 

1. 하토르 여신과 금송아지


하토르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여신으로 암소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암소의 두 귀가 강조된 여인의 모습으로 조각되기도 한다. 원래 하토르의 이집트어인 ‘하트-호르’는 왕권을 상징하는 ‘호루스(Horus)의 집’이라는 뜻으로서 파라오의 모신(母神) 역할을 담당했다. 하토르 외에도 이집트에는 아피스(Apis)라 불리는 황소신이 있었고 이 신은 멤피스의 지혜의 창조신인 프타(Ptah)의 영혼(ba)으로 여겨졌고 고왕국 시대부터 이곳의 신전에서 숭배됐다. 특히 아피스 숭배는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이교도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세라피스(Serapis)로 알려졌고 지중해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숭배되었다. 금송아지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종교로 도입됐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출애굽 시대에까지 소급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출애굽의 금송아지 숭배사건은 이집트의 전형적인 황소-암소 숭배로부터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2. 유일신교로서의 야훼교


모세의 시내산 사건에서 비롯된 야훼교는 그 출발부터 십계명을 통하여 유일신 사상과 결부되어 있다. 고대 근동의 다신교적 환경속에서 야훼교의 유일신 개념은 매우 획기적인 사상이었으며 야훼교의 기원도 유일신교의 역사적 형성으로부터 찾아볼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수기 이후에서야 비로소 유일신 개념을 확립하였고, 왕정시대(서기전 1020-586)에는 일반적으로 다신교적 경향을 나타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야훼교의 특징으로 십계명 중 제 2계명에 해당하는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나는 형상 숭배의 철저한 금지를 들수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결과 많은 도시에서 신상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왕정시대 동안에는 야훼가 유일신으로 숭배되지 않았음을 잘 알수 있다. 실제로 구약의 해당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정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는 다양한 이방 종교의 우상숭배가 만연했음을 쉽게 알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유다왕들의 치적을 기록한 왕조실록인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등에는 각 왕들이 야훼신 외의 이방신을 섬기는 산당과 제단의 건설, 아세라 및 기타 우상숭배 행위에 따라 전체의 업적이 평가되는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종교현황과 유일신교인 야훼교의 위기를 다음의 대표적인 성서의 귀절들을 통하여 시대적으로 유추해 볼수 있다.

 

서기전 10세기: “솔로몬은 시돈인의 여신 아스도렛을 섬겼고 암몬인들의 우상 밀곰을 숭배하였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동편 산 위에 모압의 우상 그모스의 산당과 암몬의 우상 몰록의 신당을 지었다”(왕상 11:5,7).

 

서기전 9세기: “야훼의 예언자로서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요. 그러나 (아세라의 예언자는 사백명이며)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 오십명이나 있읍니다”(왕상 18:22).

 

서기전 8세기: “아하즈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고약한 풍속을 본받아 자기의 아들을 불에 살라 바쳤다. 짐승을 잡아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그늘에서 번제를 드리고 향을 피웠다”(왕하 16:3,4).

 

서기전 7세기: “유다 사람들아, 너희가 위하는 신은 성읍의 수만큼이나 많고, 바알의 산당은 예루살렘의 거리만큼이나 많구나.”(렘 11:13).

물론 상기한 내용은 부정적인 종교관에 관한 귀절들만 선택한 것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솔로몬 성전 건립 이후라 하더라도,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있던 나름대로의 종교적 전통을 지닌 지방성소에서는 여전히 이방신 숭배와 야훼교가 병행되었다는 점이다.


유일신교의 이집트적 배경


유일신교(Monotheism)의 수립은 인류 종교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 유일신교의 기원을 이집트 신왕국(New Kingdom) 시대의 아텐교(Atenism)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집트 18왕조의 아멘호텝(Amenhotep: ‘Amun is content’) IV세는 서기전 1350년경 왕이 되고나서 그의 통치 제 6년에 수도를 테베스(Thebes)에서 엘 아마르나(El Amarna)로 옮기고 새 도시를 아케타텐(Akhetaten: ‘아텐의 지평’)으로 명명한 뒤 자신의 이름도 아케나텐(Akhenaten: ‘One beneficial to Aten’)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텐은 당시까지 이집트의 최고신이었던 아문(Amun)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부정하고 태양원반을 상징하는 아텐(Aten)을 유일한 존재로 부각시켰다.

 

이러한 아텐교(Atenism)를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아케나텐은 수도이전과 함께 이집트 전역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신전벽에 새겨져 있던 기존의 아문신의 이름을 모조리 지울것을 명령하였다. 아케나텐은 자신을 아텐신의 아들로 자처하고 그때까지 왕의 이름에만 적용되었던 카르투쉬(cartouche)를 아텐의 이름에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아케나텐은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의 권위를 낮추어서 신과 왕이 동일시 되는 작업까지도 수행하였지만, 일반인들이 아텐신을 직접 숭배할수 없었고 기존의 최고신 아문에 대한 극렬한 말살정책의 후유증으로 그의 사후에는 더이상 아텐 숭배가 지속되지 못해서 결국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났다고 볼수 있다. 또한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은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당시 이집트의 전통적인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테베의 아문신 제사장들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후대에까지 보전될 수가 없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종교학자들은 만일 출애굽을 서기전 13세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면 초기 이스라엘의 유일신 개념은 이집트 제 19왕조의 세티 I세나 람세스 II세의 궁전에서 교육받은 모세에 의해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

 

성서적 출애굽의 역사적 고고학적 분석 결과 간추려진 결론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힉소스 민족의 역사성을 염두에 둔다면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출세는 고센땅에 세력을 확립한 제 15왕조와 연관시킬 수 있다. 서기전 1550년경 힉소스가 추방된 후 고센 땅은 폐허로 남겨져 있다가 람세스 2세 시대부터 대규모 도시건설이 진행됐다. 따라서 비교적 후대에 형성된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아바리스(Avaris)라는 서기전 16세기의 도시보다는 람세스라는 서기전 13세기의 도시가 남아있었고 파라오가 야곱의 가족을 람세스의 땅(창 47:11)에 정착시킨 것으로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역사적 출애굽은 서기전 1550년경 발생했던 힉소스 추방사건으로 볼 수 있다. 광야 40년의 기간은 실제적인 기간이라기 보다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했던 12지파의 정탐꾼들의 탐사기간이 40일인데 결론적으로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야훼가 하루를 1년씩으로 모두 40년 동안 고생하리라(민 14:34)는 다분히 신학적 해석의 결과이다. 먼거리를 우회한 출애굽 루트는 신명기 사가의 이상적인 영토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서기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변방 요새로 밝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출애굽의 정착지로 보기 어렵다.

 

시내산을 거쳐가는 광야길은 서기전 3000년 경부터 이 지역의 터키옥(turquoise) 광산과 구리 광산을 개발하고자 했던 이집트의 중요한 탐사길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순례자들이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오르는 시내산은 서기 4세기부터 모세의 산으로 인정받았다. 아론의 금송아지와 유일신교는 각각 이집트의 하토르 여신 숭배와 아케나텐의 유일신교적인 아텐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리고는 서기전 1550년경 힉소스 추방의 여파로 야기된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전쟁 당시 심하게 파괴되어 더 이상 도시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이집트에부터 쫒겨 나올 당시 요단 계곡의 중요한 도시인 여리고가 파괴되었다는 역사적 기억이 후대에 전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