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Apocrypha)

 

 

헬라어 '아포크리포스'로 번역하면 '숨긴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가경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책들을 가리킨다. 공개되지 않은 이유는 그 내용에 문제성이 많기 때문이 다. 그 문제성 가운데 그 저작들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과 그 책들의 교훈이 진리에서 이 탈되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다.

아포크루포스란 말은 숨긴 것이란 뜻으로 가경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책들을 가리킨다.

 

1. 구약가경
제1,2에스드라, 토빗, 유디드,
에스더 잔부, 솔로몬의 지혜, 시락의 아들의 지혜문, 바룩, 세 성도의 노래, 수산나의 역사, 므낫세의 기도, 벨과 용, 마카비1,2서 등이 있다.


2. 정경 제외의 이유
히브리 정경으로 인정된 예가 없으며 신약 저자들이 가경에서 인용한 일이 없고 그릇된 교리와 행위를 가르치는 등의 이유가 있다.

3. 신약 가경
마리아전,
야고보 복음, 가마채복음, 요셉의 복음, 도마복음, 니고데모의 복음, 바울과 데굴라, 베드로전, 요한전, 안드레전, 도마전, 예수님이 압갈에게서 받으신 서신과 회답, 바울과 세네카와의 서신 거래, 클레멘트의 고린도전후서, 바나바의 서신, 익나티우스의 일곱서신, 폴리갑빌립보서, 어마서, 바울라오디게아서 등이 있다.

4. 가경 문학에 대한 평가
가경이
정경이 될 수 없음에 대하여는 고대 교부들과 교회가 판정하였고, 가경의 사용을 금한 사실이 증거하며, 그 문학의 내용이 자증하는 것이다.

 

외경은 헬라어로 '아포크뤼파‘라고 하는데, '감추인것', '숨긴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외경(外經)은 정경(正經)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구약의 헬라어 성경인 ‘70인역’에는 포함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책들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인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제2에스드라서》《토비트》《유딧》《에스델》《지혜서》《집회서》《바룩서》《예레미야의 편지》《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수산나》《벨과 뱀》《므낫세의 기도》《마카베오상(上)》《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예레미야의 편지》를《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 가톨릭 교회는 외경을 제2정경이라고 부르며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이 이것들을 정경으로 받지 않았다.
(A.D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외경을 제외한 39권만을 정경으로 인정)
2.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 역시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 가톨릭 교회도 원래는 안 받았던 것인데 종교개혁 이후 트렌트 공의회(A.D 1546)에서 개신교를
반대하는 어떤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채용한 것이다.
4. 외경들의 내용이 정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5. 외경 어디에도 “여호와께서” 또는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느니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외경으로서의 문학적 가치는 인정할 수 있으나 성경으로서의 영감과 권위는 부여할 수 없다.

[참고자료] Naver 백과사전 / “간추린 성경 개론”, 강진선, (생명의 말씀사, 2000)

외경은 구약 정경이 편집된 이후 구약과 신약 중간시대에 기록된 14권의 책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외경서들은 구약 히브리 정경에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책들은 70인역과 불가타역에 수록되어 구약과 신약 사이에 놓여졌다. 로마가톨릭교회는 14권 가운데 11권을 소위 '제2의 정경'으로 인정하여 AD 1546년 트렌트공의회에서 성경의 한 부분으로 선포하였다. 개신교에서는 내.외적증거로 하여 이 책들의 정경적 지위를 부정한다. 이 외경서들은 유대인들이나 예수, 신약에 의해서 또한 그 증거를 객관적으로 조사한 교부들 중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성경으로 인정된 일이 없다. 외경에 속한 책들을 열거,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
이 책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역대하 정경과 동일한 역사적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광범위한 부분(3:1∼5:6)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대체로 전설적인 이야기로 그 내용은 참 지혜를 확증하기 위해 다리오 왕정에서 세 사람의 유대인 시동(侍童)이 벌이는 경연으로 되어 있으며 스룹바벨이 승리자였다. 그는 상으로서 유대인의 송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왕명으로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책은 BC 100년경에 기록되었다.

제2에스드라서
이 책은 AD 100년경에 완성된 몇 편의 예언적 성격을 띤 묵식자품이다. 1∼2장은 유대인 에스라의 묵시 원문인 3∼14장에 첨가되는 반유대적인 부분이다. 3∼15장까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살랫디엘 묵시 : 3∼10장은 악의 문제와 이것의 내세에서의 해결을 취급하고 있다. ② 독수리 환상 : 11∼12장은 로마제국과 메시야 도래를 취급하고 있다. ③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인간(메시야)의 환상 : 13장, ④ 에스라가 어떻게 성문학을 재기록하였느나를 설명하는 전설 : 14장. ⑤ 마지막 15∼16장은 신약과의 어구적인 일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소 뒤늦게 기록한 것으로 AD 270년으로 추정된다.

토비트서
이 이야기는 BC 150년경에 기록된 종교소설이다. 이것은 앗수르에 이주되어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 토비트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토비트는 앗수르치하에서 살해된 자기 동족을 격식을 갖추어 장사지내다가 사고로 눈이 멀게 된다. 비통 중에도 토비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도움을 간구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 토비아스를 보내서 가바엘이라는 친척에게 예치해 둔 돈 전부(약 2만 달러)를 찾아오게 한다. 천사 라파엘이 믿을 만한 친족으로 가장하여 토비아스와 함께 간다. 그것은 눈 먼 토비트의 기도에 응답해 줄 뿐만 아니라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과 에드나의 딸 사라를 도와 주기 위해서였다. 악신 아스모데오의 시기로, 사라와 결혼했던 일곱 남편이 모두 결혼 첫날 밤에 차례로 살해되었던 것이다. 토비아스는 티크리스강가에서 야영을 하다가 물고기 염통과 간을 태워서 악신을 쫓아버리고는 사라와 결혼한다. 라파엘은 그 사이에 라구엘에게 달려가서 돈을 찾고, 니느웨에 있는 토비트와 그의 처 안나에게로 토비아스와 갓 결혼한 아내를 인도하여 돌아온다. 토비아스의 여행이 오래 지체됨으로 그들은 비통에 잠기게 되었으나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신부를 맞이하여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 돈으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라파엘의 지시대로 토비아스가 연로한 아버지의 눈에 물고기의 쓸개를 얹어 놓음으로써 토비트는 시력을 회복한다. 천사 라파엘은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사라진다.

유딧서
이것 또한 교훈적인 가치가 있는 소설적인 이야기로 BC 2세기에 기록되었다. 유딧은 용모가 아름답고 경건한 유대인으로 베툴리아(세겜의 가명)의 과부이다. 유딧의 용기는 홀로페르네스 휘하 느부갓네살 침략군으로부터 그녀가 속한 도시를 구해낸다. 그 도시의 장로들이 5일 이내로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유딧은 당당하게 그 도시를 떠나 홀로페르네스 진영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미모와 언약을 통하여 장군을 현혹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베툴리아로 돌아온다. 이 결과 그 도시의 수비대는 진격하게 되고 홀로페르네스의 대군은 잇따른 혼란 속에서 도망하다 파멸된다. 대제사장 요아킴(Joakim)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걸 유딧을 칭송하기 위하여 베툴리아로 온다.

에스더의 추가서
이것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본문 가운데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 70인역에서는 정경 에스더서에 삽입되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모르드개의 꿈과 그가 왕에 대한 모반을 사전에 막는 이야기. 히브리 정경 제1장의 앞에 17절이 포함디어 있다. ② 왕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 이 부분은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와의 조서. 이 부분은 히브리 본문 3:13에 이어진다. ③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 히브리 정경 4장에 이어진다. ④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극적으로 알현함. 5장에 8절이 추가된다. ⑤ 하만의 처형과 유대인을 칭송하고 자위적 방비를 허락하는 왕의 조서. 정경 8:12에 이어진다. ⑥ 모르드개의 꿈 해석과 부림절의 의미에 대한 끝맺음말. 이 부분은 히브리 정경 에스더의 마지막 장에 이어진다

솔로몬의 지혜서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있는 외경서 가운데 하나로 BC 50년경에 기록되었다. 첫부분(1:1∼6:8)은 '종말서'라고 불리는데,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비교함으로써 비도덕성의 진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부분(6:9∼11:1)은 솔로몬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지혜의 찬사이다. 셋째부분(11:2∼19:22)은 앞 부분들보다는 못한데, 이 부분은 애굽과 광야의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서 우상숭배(13∼15장)의 기원과 악함을 거론하며 끝맺는다. 복합적인 이책은 기록자 불명이다.

집회서
51장으로 된 이 책은 「호크마」 또는 히브리 지혜문서에 속한다. 이것은 외경 가운데 저자가 알려진 유일한 책이다. 그는 예루살렘 시락의 아들 예수(50:27)로 BC 175년경에 기록하였다. 그의 손자는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BC 132년 히브리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집회서의 전통적인 라틴어 명칭은 외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교회서' 임을 보여 주며 '금언'이 지닌 높은 도덕성과 영적인 성격, 초기시대 이래 그리스도인 들에게 널리 호평을 받았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마카베오상
수준 높은 역사, 문학작품. 이 책은 134년 모데인반란(BC 167년)에서 시므온 마카베오의 살해(BC 134년)까지 마카베오 일가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 후임자에 맞서 싸우는 모데인의 마따디아 아들들, 즉 유다.요나단.요한.엘르아살과 시므온의 전율어린 용솟음치는 애국심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마카베오하
이 책은 부분적으로 마카베오상과 동시대(BC 175-160년)의 기록이나, 역사적인 가치면에서는 그것보다 떨어진다. 그리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이 다소 신화적인 찬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레네 사람 야손의 작품을 요약한 이야기라고 하나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바룩
예레미야의 서기 바룩이 바벨론에서 기록한 것으로 공언되는 작품이다. 전반부(1:1∼3:8)는 산문체로, 후반부(3:9∼5:9)는 시가체로 기록되었으며, 이사야.예레미야.다니엘 및 기타 예언서와 흡사하다. 이 책은 포로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담고 있으며 회복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젊은이의 노래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이 외경은 풀무불 이야기(단 3:23) 다음에 삽입되었다. 이 책은 아자리아의 감동적인 기도, 기적적인 구원의 기사와 세 젊은이가 합창으로 드리는 찬양시로 되어 있다.

수산나 이야기
정경 다니엘서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외경으로, 정숙한 바벨론 부인 수산나가 어린 소년 다니엘의 지혜로 어떻게 조작된 간음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헬라어 역본에서는 제1장 앞에, 라틴어 불가타역에서는 제13장에 기록되어 있다.

벨과 용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우상숭배를 조롱할 의도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다니엘서의 세 번째 추가 외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상 벨 신상은 살아 있는 신이어서 매일 밤 그 곁에 차려진 엄청난 양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고 생각되었다. 다니엘은 신전 바닥에 재를 흩뿌려 놓아서 제물을 정작 먹어 없애는 것은 벨신 제사장이라고 왕에게 증언한다. 그 즉시 왕은 벨 신상을 파괴하며 그 제사장들을 처형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바벨론에서 숭배되는 용의 이야기다. 용에게 경배하라고 소환된 다니엘은 역청과 머리털과 비계를 섞어 용에게 먹임으로써 용의 숭배를 타파시킨다. 격노한 백성들은 사자굴 속에 다니엘을 던져 넣으라고 왕에게 강요한다. 이 속에서 그는 유다에서 추수꾼들에게 음식을 가져가는 길에 천사에 의해서 머리털을 휘어잡혀 바벨론으로 옮겨진 예언자 하박국의 도움으로 엿새 동안을 먹고 지내게 된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다니엘을 건져내고 그를 해치려던 자들을 굶주린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므낫세의 기도
이것은 의도적으로 기록된 므낫세의 참회기도다. 그는 유다의 사악한 왕으로 앗수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었다. 대하 33:19 이하에 삽입되었으며, 대체로 BC 1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외경(外經,Apocrypha)에 대하여

 

기독교를 흔히 책의 종교라고 말한다. 책의 종교라는 말에서 책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성서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과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규범이 되는 것이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이론이라 할지라도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또는 성서 말씀과 상치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성서만이 기독교의 최고의 규범이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책이기 때문에, 성서는 기독교의 정경이 된다. 정경이라는 말은 영어로 Canon이라고 한다. 정경과 대비되는 것으로 외경이 있다. 외경이란 글자 그대로 '정경 밖의 책'으로서 구체적으로는 '구약 정경 밖의 책'을 말한다. 구약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정경 밖의 책'들이기 때문에, 외경은 실제로는 '구약의 외경'이 되는 것이다.


'
구약의 외경'이 어떤 책들인가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의 정경'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오늘날 개신 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서는 모두 39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러면 구약성서의 39권의 책들은 언제부터 정경이 되었는가? 구약책들 중에서 '5'(Pentateuch)은 가장 먼저 그 권위를 인정 받게 되었고(에스라 시대,주전 450년경), 다음은 예언서가 정경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주전 2세기경). 마지막으로, 5경과 예언서들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성문서라고 부름)은 주후 90년경에 이스라엘 땅의 Jamnia에서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그 범위가 확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Hebrew Old Testament) '얌니야 회의'에서 정경의 범위가 39권의 책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면 외경(Apocrypha)이란 무엇인가? 외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소위 '70인역'(희랍어 번역 구약성서)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주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고대 근동 지역은 희랍세계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이후로는 희랍어가 고대 근동 세계의 통용어가 되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점차 잊게 되어 희랍어를 상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 구약 성서의 희랍어 번역작업은 주전 3세기 중엽, 당시 희랍문명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희랍어로 번역된 구약을 <70인역, Septuagint>이라고 부른다. 한편 희랍시대에 있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구약 이외에 많은 종교적 문헌들이 양산되었고, 또 애독되었다. 이 당시에 출현한 많은 종교적 저작들 중에서 15권의 책들은 특별한 사랑과 권위를 인정 받았다. 그리하여 <70인역>이 완성되었을 때, 15권의 책들도 이에 첨가되어 전체가 한 묶음으로 구약성서로서 읽혀지게 되었다. 즉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Greek Old Testament) <70인역> 번역부분에 15권의 책을 첨부하여(히브리어 구약성경 번역부분+15) 이 모두를 '구약성서'로 인정하게 되었다. 15권이 포함된 희랍어 구약성서를 <알렉산드리아 정경, Alexandrian Canon>이라고 부른다. 15권의 책은 아래와 같다.



토비트(Tobit=Tobias)
이스라엘 북왕국의 포로 기간 중에 경건한 히브리인 토비트와 그의 아들 토비아스에게 일어난 이야기다. 토비트는 유배지에서도 유대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으며, 우연히 실명하게 된 후 그의 아들 토비아스가 구해 온 물고지의 쓸개즙으로 시력을 회복하였다 토비아스는 오랫동안 행방 불명 되었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원래 아람어로 기록된 듯하다.

유디트(Judith)
느부갓네살의 수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목을 자른 용감한 유대 과부에 관한 이야기로 그녀가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한 후 그의 군대는 포위망을 푹고 퇴각하였다. 유디트의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로서 BC 2세기경에 쓰여졌으며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솔로몬의 지혜(The Wisdom of Solomon)

유대 지혜 문학서들 중 백미로 꼽히며,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형식과 구성이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 이 책은 지혜를 천상적 존재로 인격화시키면서 그것을 찾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조상의 믿음을 굳게 보존하라고 격려한다. 헬라어로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기록된 장소는 알렉산드리아이다.


바룩(Baruch)
예레미야의 친구인 서기관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책을 여러 사람들이 쓴 혼합 저작물로서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한다. 바벨론 포로민들을 염두에 둔 이 책은 지혜를 기리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한다.

예레미야의 편지(The Letter of Jeremiah)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라는 점에서 예레미야 29장고 유사하며, 우상 숭배를 질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는 아람어로 기록된 듯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헬라어본이다.

마카비서 상·(1·2 Maccabees)

BC 175-134년에 해당하는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로서, 하스몬 왕조의 전쟁들과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 등을 수록하고 있다. 이 두 책들은 불일치하는 내용들이 발견되는데, 대체로 마카비 1서가 좀 더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카비 2서는 구레네 사람 야손의 역사서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다.

수산나(Susanna)

다니엘서에 첨가된 내용으로, 정숙한 유대 여인이 무고하게 간통죄로 고소당했으나 다니엘에 의해 무죄로 판명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세 청년의 노래(The Song of Three Young Men), 아자리아의 기도(The Prayer of Azariah)

다니엘서에 나오는 풀무불 속에서 행해진 기도와 찬양을 담고 있다. 특히 세 젊은이의 노래는 기독교 예배에서 축복 기도로 사용되었다.

벨과 용(Bel and Dragon)

다니엘서에 첨가된 내용이며, 다니엘은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용을 죽인 대가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다니엘서에 첨가된 이 세부분, 즉 수산나,세 청년의 노래와 아자리아의 기도,벨과 용 등은 BC 100년경에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에스더 속편(Additions to Esther)

에스더서의 내용 중 여섯 부분을 윤색하여 옮긴 책. 기록된 원어가 히브리어인지 헬라어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나 BC 114년 이전에 번역된 것으로 본다.

벤시락 또는 집회서(Ben Sirach, Ecclesiasticus)

이 책에는 여호아를 경외하는 것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실제 삶의 지헤와 연결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삶의 태도를 가진 서기관의 이상적인 출발을 묘사한다. 이 책은 기독교 안에서 애독되었으며,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에스드라 상(1 Esdras)

역대상 하와 에스라서, 느헤미야서에 수록된 일부 사건들을 재현하고 있으며, 여기에 '세 젊은이의 논쟁'(3:1-5:6) 부분이 첨가되었다. '세 젊은이의 논쟁' 기사는 바사의 이야기에서 착안된 것으로, 다리오 왕의 한 경호원이 포도주와 여인과 진리 중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논쟁에서 이긴 후 왕에게 성전 재건의 의무를 상기시킨다는 내용이다. 에스드라 상은 원래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가 에스라 시대 이전에 헬라어로 번역된 것으로 짐작된다.


에스드라 하(2 Esdras)

에스라 4서로도 알려져 있으며, 유대 묵시 문학적 내용에 기독교적 관점의 보충 기록이 첨가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일곱 환상이 나온다.(3:1-5:20, 5:21-6:34, 6:35-9:25, 9:26-10:59, 11:1-12:51, 13, 14) 이 환상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고난을 다루면서 장차 도래할 새 시대를 대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원래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므낫세의 기도(The Prayer of Manasseh)

역대하 33:11 이하에 언급되어 있는 기도의 구체적 내용으로 여겨지는데, 이 사실이 처음 입증된 때는 AD 3세기 경이다.



위에서 언급한 '얌니야 회의'에서 유대인 랍비들이 결정한 것은 결국 이들 15권의 책들은 정경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전통의 입장에서는 이 15권의 책들은 정경 밖의 책, 즉 외경이 되는 것이다.
'
얌니야 회의' 이후부터 구약성경의 정경은 두 가지 전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서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15권을 제외시키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승과 15권의 책을 포함시키는 '희랍어 구약성서' 전승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기독교회에서는 희랍어로 번역된 '희랍어 구약성서'를 읽었다. 즉 기독교회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희랍어 구약성서' 전통을 채택한 것이고, 이것은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 의해 계속해서 유지되어 내려왔다. 즉 로마 카톨릭교회는 '희랍어 구약성서' 전승을 받아들여 온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정경전승은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루터는 위대한 성서학자였으며, 정경문제에 관해서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승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5권의 책을 외경으로서 정경의 범위에서 제외시켰다.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Protestant Church)에서는 외경을 제외한 39권의 책만을 구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트 종교회의(Trent Council, 1545-1563)가 소집되었고, 여기서 정경문제에 관해서는 종래의 '희랍어 구약성서'의 기본 입장을 재확인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는 문제의 15권의 책 가운데서 3권은 정경의 위치에서 제외시켰다.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제외된 3권의 책은 에스드라스 상,(1,2 Esdras)와 므낫세의 기도(The Prayer of Manasseh)이다.그 결과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서는 개신교회보다 12권의 책이 더 많은 구약성경을 사용해 오고 있다.한편 개신교회에서는 13권의 책은 외경으로 취급하며 정경의 범위에서는 제외시키고 있다.

 

 

위경과 외경의 종류

* 정경 (正經, canon)

1)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경전을 가리키는 말.

신·구약성서를 말하며 정전(正典)이라고도 한다. 본래 그리스어(語)의 kanon에서 유래한 말로서, 라틴어 ‘카논’은 ‘표준 ·척도 ·모델’을 뜻한다. 사도 바울로는 이 말을 ‘인간행위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썼으며(갈라 6:16),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과 행동의 모범’이라는 뜻으로 썼다.

2)오늘날에는 성경 가운데서 최초부터 교회가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인정한 것을 ‘제1정경(Libri Prodocanonci)’이라고 하고, 일부 교회(특히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제2정경(Libri Deuterocanonci)’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의 일부분 등 몇몇 부분이 그러한데,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것들은 ‘외경(外經)’으로 여기는 데 반하여, 가톨릭에서는 ‘제2정경’(7권)이라 하여 이것들도 정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의 정경이 지금의 39권(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BC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것처럼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였다.


* 외경 (外經, Apocrypha)

1) 외경은 성경의 편집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

2) 시대 : BC 2세기 ~ AD 1세기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도 한다. 정경(正經)과 대비되며, 그리스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구약의 ‘70인역’에는 포함되고 헤브라이어 성서에 들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처음엔 문학적 용어로 일반대중에는 금지된 책이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여진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 《제2에스드라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

외경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명칭도 서로 다른데, 가톨릭 학자들은 외경을 제2정경(正經: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종교적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외경의 형성 경위는 이스라엘 역사 중 바빌로니아 포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하였던 이스라엘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성전의 재건과 헤브라이어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헤브라이어 정경이 율법서(《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예언서(《여호수아서》부터 《12소선지서》까지), 성문서(聖文書:그 이외의 《시편》 《잠언》 등을 대표로 하는 문학서)로 확정되면서 유대인들에게 규범적인 문서로 등장하였다(90년경).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하면서 그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를 당시 국제공용어로 만든 이후로, 점차 모국어인 헤브라이어를 잊어 가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BC 3세기 중엽), 이 때 원래의 헤브라이어 성서에는 없던, 그리스어의 종교서적들이 삽입되었다. 이 외경의 종교적 가치에 대해서도 신 ·구교가 상이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대 동방교회가 4세기 이래 외경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반면, 라틴 교회에서는 외경에 큰 비중을 두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외경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견해를 빌려 설명할 수가 있는데, 그는 “외경, 이는 성서와 동등시될 수 없는 책이지만, 읽어서 유익하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경은 역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구약외경은 특히 신약성서 이해에 큰 공헌을 해왔다.


* 위경(僞經, Pseudepigrapha)

구약성서의 마지막 책이 되는 '말라기'와 신약성서가 시작되는 '마태복음'사이에는 적어도 수 백년의 시간간격이 있다.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곧장 이어진 것은 아니다. 수세기에 걸친 시간의 '다리'를 건너서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했던 시대를 보통 '중간시대'(Intertestamenta Period)라고 부른다.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구약/신약 중간시대'가 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간단히 '중간시대'라고 부른다. 이 '중간시대'에 특기할 일은, 유대인들(유다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여러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이에서 엄청난 분량의 종교적인 문헌들이 양산된 것이다. '중간시대'에 유대인들에 의해서 저작된 엄청난 분량의 종교적인 문헌들을 통틀어 '위경'(僞經)이라고 부른다.

'위경'이 양산된 기간은 '중간시대'중에서도 주전 2세기 이후 희랍시대. 로마시대의 기간으로 보고 있다.
'위경'을 영어로 Pseudepigrapha라고 부른다. 즉 '위서'(僞書)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경'이나 영어명칭은 정확한 이름이라고 보기 어렵다. '위'(僞)라는 말은 허위(虛僞), 위증(僞證), 위계(僞計) 등의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속임', '거짓'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위경'이라면 '거짓성서', '성서로 속이는 거짓책'이라는 대단히 부정적인 뜻이 된다. '위경'이라는 말 자체는 이 책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저해하고, 다분히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명칭이다.
'위경'에 포함된 책들은 결코 스스로 성경이라고 주장하거나, 허위로 속이는 책들이 아니다.

다만 성서학자들이 '위경'이라는 별로 명예스럽지 못한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따라서 '위경'이라는 책의 이름은 그 내용의 진위를 판단하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명칭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될 때까지는 이것을사용할 수 밖에 없다.

'위경'의 한가지 특징은 위경을 구성하고 있는 수 많은 책들 중에 한 권의 책도 정확한 저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위경의 책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그 책의 저자로 내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아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솔로몬, 엘리야, 다니엘 등 구약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그들을 저자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저자들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뒤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렇게 위경의 책들은 실제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스라엘 역사의 위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쓴 책들이다. 즉 차명서(借名書)들이다. 오늘날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쓰는 차명(借名)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시대에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러면 위경은 어떤 책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1913년 영국학자 P.H.Charles는 당시까지 수집된 위경의 책들을 영어로 번역, 편집하여 두 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책을 출판하였다.

'구약의 외경과 위경'(The Apocrypha and Pseudepigeapha)이라는 제목의 책은 1913년 이후70년 동안 위경의 교과서가 되어왔다. 그러다가 1983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의 Games Charlesworthsms는 그 후에 발견된 위경을 포함하여 새롭게 번역한 두권의 책을 출간하였다(Old Testament Pseudepigrapha). 이 두 학자의 책들은 위경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경신학적으로 볼 때 위경은 부활신앙, 천사론(angelology), 마귀론(demonology) 등을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위경'의 범위와 분류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내용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참고


외경 논쟁에 대하여

1. 구약 목록의 확정, 얌니야 회의

바빌론 유수기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성서 문헌들은, 유다민족의 운명만큼 파란만장한 운명을 가졌다. 성서 문헌들의 원본은 전부 소실되었고, 히브리인들은 전란의 와중에서 성서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긴 전란은 유다인 민족을 여러 나라에 흩뜨려 놓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유다인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와, 신앙을 차츰 잊기 시작했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유다교의 랍비와 사제들은 성서 문헌의 수집과 보존에 힘쓰고, 또한 이국의 유다인을 위해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70인역은 바로 그 결과로 생긴 산물이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 원본 성서를 두서없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와중에, 히브리 원본 출처를 알기 어려운 새로운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이 들어가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당시에 번역된 70인역은, 히브리어 원본보다 오히려 그 가짓수가 훨씬 더 많았다. 어쨌든, 이 70인역은 이후 일반적인 성서로서 히브리어를 몰랐던 대다수의 유다인들에게 자리를 잡았고, 유다인들은 70인역으로 공부를 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 70인역은 일반적인 유다교의 성서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그 성서 인정 목록이 달랐던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오경은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원전이 남아있는 성서 문헌의 권위는 높았었고, 그 당시 히브리어 원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비슷한 가치를 인정받는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목록이 어떤 것인지는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외경 논쟁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루살렘 붕괴로, 제사장들과 사두개 계급이 소멸된 가운데, 바리새 랍비들은 성서 목록의 확정작업에 들어간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의 난립으로, 교계 내에서 경전 사용에 혼란을 겪었고, 나자렛파(기독교)등의 유다교내 이단분파들이 발호했기 때문이었다. 즉, 분파주의 덕분에 유다왕국이 멸망당했다고 바리새 랍비들은 인식하였는데, 당시 유다교 내의 최대의 분파주의자들은 바로 나자렛 당(현재의 기독교)이었기 때문이다. 그 들이 택하고 있는 분파주의의 위험요소가 있는 그리스어 문헌들은 경전중에서 당연히 제거대상이 된 것이다.

이단 분파들이 주로 사용하던 70인역의 권위를 무효화시킨 랍비들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히브리 원전이 남아있는 문헌들만 성서로서 긍정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전성 부족'의 굴레가 '아가서'에 붙기도 하지만, 이는 히브리어 원전의 존재로서 상쇄되고, 그대로 경전성을 인정받게 된다.

히브리어 원전이 없는 70여권의 그리스어 문헌들은 유다교로부터 경전성을 부정당한다. 그 사유는 일단 원래 대본이 없음으로 인한 '출처 불명확'이었고, 거기에 보충하여 바리새파의 가르침에 반하는 경전들에게는 '경전성 부족'의 사유가 추가되었다.


2. 불가타 번역작업.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따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안에 있는 외경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으나,이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그러나 멜리토(2세기 소아시아 사디스 주교)가 작성한 구약 성서 목록에는 그리스어 성서에서 추가된 문서들(외경)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오리게네스(약 185-254년)의 헥사플라는 구약 정경을 엄밀하게 22권으로 제한하고 있다.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의 총주교 다마수스는 라틴어 성서의 확정 작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작업은 당시 그리스어의 권위자였던 히에로니무스에게 떨어졌고,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을 기반으로 라틴어 구약 번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70인역의 많은 내용이 오역되어 있고, 출처가 불명확한 점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 그는, 유다교의 히브리어 본문이 보다 정확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을 어필시키며, 문헌적인 근거가 확실한 히브리어 성서를 기반으로 하여 불가타 성서를 번역하고자 했다.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생각대로 24권의 히브리 성서 목록을 39권으로 재분류하여 번역을 하였고, 70인역에는 있되 히브리어 원전에 없는 성서 문헌들을 '외경(αποκρυφσ, apocrypha)'으로 부르며 따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 문헌들의 경전성에 의구심을 피력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다른 교부들의 공명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력한 반박에 굴복하여 외경의 경전성을 최종 긍정함으로서 초기의 교부갈등은 봉합되었다.

그 이후 아프리카 교회의 초기 공의회들(히포에서 393년, 카르타고에서 397, 419년)은 신약 성서의 목록을 최종 확정함과 동시에, '교회의 책들'(외경)을 성서로서 사용할 것을 긍정하였다.

시리아 동부에서는 7세기까지도 교회가 히브리 정경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집회서(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를 더하고,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를 제외한 히브리 성서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솔로몬의 지혜, 바룩, 예레미야의 편지, 다니엘 추가본 등이 합쳐지기도 하였다. 6세기 페시타(시리아 본)의 필사본은 암브로시안 사본으로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마카베오스 3, 4권과 에스드라 2, (때로는 4) 권, 요세푸스의 전쟁사 7권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3.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의 경전확정.

천주교의 제 2경전에 속하는 70인역의 '외경'들은 힙본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의 성서 확정 이후부터, 별 다른 의구심 없이 경전성을 인정받아 왔지만, 히에로니무스 이후에도 가톨릭 내에서 극 소수의 신학자들이 외경의 경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계속 제기하였다. 한편, 초기 불가타의 목록 중에서 마카베오스 3, 4권, 동방의 그리스도교, 시편 151편의 경전성이 가톨릭 내에서 최종적으로 배제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가톨릭 교리 일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마리아 신심, 성인 성녀의 중보기도, 구원에 있어서의 행실의 중요성, 연옥설 등은 그 주요 타겟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기능하는 토비트서, 집회서, 마카베오스 2서등으로 인해서, 외경 전부는 그들에게 있어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마리아 신심의 경우, 초기 개혁자들보다, 개신교 교리 발전 과정에서 반 가톨릭 경향에 따라서 비판된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개혁자들은 마리아 신심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유다교 얌니야 회의의 결정을 그대로 따라, 유다교의 24권 경전(κανων, kanon)을 재분류하여 39권으로 나누는 히에로니무스의 경전 목록을 인정하고, 교회의 책들, 즉 외경들은 경건문학으로 분류하며, 경전성을 부정함으로서 가톨릭의 일부 교리들을 공격하는 포문을 열었다. 14세기 초의 리라의 니콜라스는 히브리 성서 목록을 진리로 규정하고, 라틴어 불가타를 비판하였다. 이런 전통은, 이후 얀 후스, 울리히 쯔빙글리, 마르틴 루터, 쟝 깔뱅, 존 녹스등의 종교 개혁가들이 그대로 계승하였고, 그들의 자국어 성서 번역본들은 '외경'을 '정경'들과 분리해서 수록하였다.

이에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 측의 주장을 억누르고, 내적인 '정경시비'를 종식시키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었다. 주교들의 회의는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사크로 산크타 교령'을 통해서, 교황의 교도권으로 70인역 성서의 목록, 즉 '교회의 책들' 중에서 7권의 문헌을 경전으로 공식 인정하고(제 2경전), 초기 불가타 목록 일부를 제외하여, 구약 46권의 경전을 최종 확정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에스드라스 3권과, 70인역에 없고 불가타에만 있었던 에스드라스 4권과 므나쎄의 기도는 2경전의 목록에 들지 못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개신교측은 정경 66권만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성공회와 루터파를 제외한 나머지의 종파는 가톨릭의 사크로 산크타 교령에 저항하여 외경의 교회내 봉독을 금지하였다. 장로교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통해 처음 그 경향을 확정하고, 나머지 종파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동방 정교회측은 예루살렘에 각국 정교회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모여 시노드를 개최하고, 외경의 경전성 문제를 논의하였다. '교회의 책들' 중에서 정경과 작성 연대가 비슷하고 초대 교회에서부터 논란 없이 이어져온 4권만을 경전으로서 인정하고, 4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불가타 목록에서야 확인되었던 나머지 문헌들은 '외경'으로 둠으로서 경전성을 부정한 것이다.


4. 사해 문서와 외경 논쟁

1947년 사해 문서의 발견은, 종전의 신 구교간의 '외경논쟁'에서 일단 가톨릭 측의 손을 부분적으로 들어주었다. 종전에는 외경(제 2경전)에 해당하던, '예레미야의 편지(바룩)', '집회서', '토비트' 등의 동방 정교회의 2경전 목록에 해당하는 고대 히브리어 필사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얌니야 회의에서 외경 배제의 결정적 사유로서 주장되었던 일부 외경 문서들의 '출처 불명확'의 근본적인 사유가 어느 정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쥬빌리'나, '하가다'등의 개신교의 '위경(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헌도 발견되었으며, 정경의 문헌들과 비교해 볼때, 외경의 히브리어 문헌들의 보존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출토된 외경 문헌에는 정경 문헌과 달리 미드라쉬의 존재가 없다는 점을 놓고서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히브리어 문헌 출토가 경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유다교의 경우에는 아직 사해문서와 얌니야 회의의 결정의 연관성을 놓고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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