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姓氏 사용, 고려왕실 정리한 '왕대종록' 最古

 

 

족보(族譜)는 혈연관계로 이어진 한 가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우리 사회의 유산(遺産)이다. 한 집안의 족보가 모이면 우리의 역사가 된다. 하지만 성(姓)씨 제도를 바탕으로 한 족보는 가부장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양성평등과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 핵가족화 등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족보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그 의미를 되짚어봤다.

 

◆족보의 바탕 성(姓)씨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중국 한자문화가 들어온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성을 쓴 사람보다는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 무역상인 등이 사용했다고 전한다.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도 성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면서 고(高)씨라고 했다.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내려주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해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했다. 신라에는 박(朴)씨와 석(昔)씨, 김(金)씨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며, 유리왕 9년에 육부(六部) 촌장에게 각각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裵)`설(薛)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에게 성을 하사하면서 성씨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려 초기부터 귀족과 관료들은 대부분 성을 쓰게 됐다. 고려 문종 9년(1055년)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렸고, 이를 계기로 성이 보편화됐다. 문종 이후부터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 초기 성씨는 양민에게까지 고르게 퍼졌지만 노비와 천민계급은 조선 후기까지 성씨를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돼 모두가 성을 얻게 됐다.

 

일제강점기 시대는 성씨의 수난기였다.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으로 인해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이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공포함에 따라 비로소 우리나라 성씨를 되찾게 됐다.

 

우리나라 성씨 수는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277개를 시작으로, 1766년(영조) 이의현(李宜顯)이 쓴 도곡총설(陶谷叢說)에 298개, 1908년(고종)에 발간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496개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선 286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족보 변천사

족보는 성씨를 근본으로 만든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시조(始祖)부터 현재까지 역대 조상의 역사가 담겨 있어서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족보는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기록유산이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족보 전문 도서관이 있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책으로 만들어 2천 년 가까이 기록해온 나라는 드물다.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 종의 족보 1만3천여 권이 소장돼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족보는 고려 18대 왕인 의종(1146~1170) 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다. 이 책은 고려왕실의 계통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종 7년인 1476년 나온 안동 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를 가진 최초의 족보로 평가된다. 이 족보의 특징은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담았고, 여성의 재혼을 인정해 그대로 족보에 표현했다는 점이다. 또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등재했다.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계보를 수록하고자 했던 것이다.

 

명종 20년인 1565년 간행된 문화 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는 모든 혈족을 총망라한 족보로서, 다른 가문에 표본이 돼 이후 족보 제작이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족보가 양적으로 증가하는 한편 족보의 변경`위조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양반 신분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족보 간행이 증가했다. 특히 문중 간의 경쟁으로 족보가 가문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자, 선조들의 계보와 관직 등에 대해 과장하거나 심지어 조작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양에도 족보가 있지만 주로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족보는 중국에서는 종보(宗譜)라 하고 일본에서는 가보(家譜)라 부른다.



Read more: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314&yy=2014#ixzz3ClliKtc3
Follow us: @dgtwt on Twitter | maeilshinmunsa on Facebook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