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신학과 선교(Theologia crucis and Mission)

 

글 / 김영동 조교수(선교학/세계선교대학원장)  

 

1. 오늘의 상황 진단과 논지  


개신교의 핵심 모토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이다. 이것은 성경과 복음을 떠난 중세 말기 타락한 기독교를 개혁하는 종교개혁자들의 결연한 의지를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는 비본질적인 껍질을 깨어버리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언이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본질로 돌아감은 이전 교회가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보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의 말은 적절하다.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여태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는 이가 있을 때 발생한다."  


사랑, 은혜, 믿음, 구원, 십자가, 선교 등의 용어가 전혀 다르게 보여야 할 때가 되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그 본질이 가려지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들 가운데 우리 시대 가장 새롭게, 전혀 다르게 조명되어야 할 말은 '십자가'이다. 지난 세기 동안 십자가는 한편으론 인간의 이상과 유토피아 건설에 가려졌고, 다른 한편으론 영혼구원과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좁혀졌다.

 

지난 천 년 이상의 서구 교회에서 '십자가 정신'은 '십자군 정신'과 구별되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을 왜곡하여 전달되게 하였다.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 세계화의 이데올로기적인 물결 한 복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군으로 오해되고 있다. 십자가 정신이 순교라면, 십자군 정신은 정복이다. 십자가 정신은 종의 모양으로 낮추는 것이라면, 십자군 정신은 왕의 모습으로 영광을 취하는 것이다. 십자가 정신은 남의 유익을 위하여 내가 변하는 것이라면, 십자군 정신은 남의 불행도 마다 않고 나의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중심이다. 십자가야말로 인본주의와 상대주의의 늪에 빠져 참된 방향과 목표를 상실한 이 시대에 유일한 구심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진리의 올바른 방향을 잃어버리고 '혼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바로 이 십자가의 '중심점'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Christ of the Cross)를 참 진리로 깨닫고 바른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Cross of the Christ)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십자가를 바로 이해할 때에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적 권위와 생명력이 충족될 뿐 만 아니라, 복음의 올바른 방향 제시와 그 최종 목표가 달성된다."

 
십자가는 이기심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와 독재정부와 다국적기업과 무자비한 부자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십자가의 서신"으로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중심성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것은 초상집의 장송곡이 아니라 진리의 깨달음의 극치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함을 의미하고 참된 기쁨과 영광을 맛보며 살며 일하는 기독자 됨의 본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가 없는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유케하는 십자가이다."  


세계는 경제적 세계화라는 새로운 물결에 휩싸여 흘러가고 있다. 거대한 규모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물결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수혜자는 기업 경영자들과 정부 내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동맹 자들, 그리고 새롭게 강력한 힘을 얻고 있는 중앙집권적 세계 무역 관료들이다. 이들이 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펼쳐 보이는 미래의 비전은 언제나 긍정적이며 유토피아적이다. 세계화가 현대 세계가 맞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한다. 무비판적이며 진상을 가리는 세계의 언론들도 이들과 단짝이 되어 진실을 왜곡한다.

 

그러나 세계는 장밋빛 청사진보다는 종말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빈곤의 증가, 땅과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증가, 폭력과 테러와 소외의 증가, 세계적인 기후변화, 오존층 파괴, 생물의 대량 멸종, 거의 한계에 이른 대기오염, 토양오염, 수질오염 등 지구의 자연과 인간은 거의 황폐화되어가고 있다. 더 빠른 속도로 근대주의적 개발모델을 따르며, 더 넓게 이런 개발과정이 세계화된다면 우리에게 대단한 혜택을 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은 한갓 신기루에 불과하다.  


세계 경제는 많이 새로워졌다. 그러나 그 본질은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새로운 세계적 규칙, 세계적 개발, 상업의 속도 증가, 세계적인 정치 권력 구도의 변화, 화폐가 국가의 통제에서 자유로워진 것 등 새로운 현상은 있다. 그러나 이전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이름이 개발로 바뀐 것 외에는 그 본질적 구조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를 개발시키기 위한 강력한 조치들은 순수하게 제3세계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서구의 상품과 서비스를 소모하기 위한 시장 창출의 수단이며, 서구의 산업이 사용할 싼 노동력과 원료의 공급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제3세계 지역 경제를 서구의 무역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는 필요에 따라 시행된 수단이었다. 식민지 시대와 개발의 시대는 그 형태만 달라졌지 공통의 목적을 가졌으며 그 목적달성을 위하여 사용된 방법과 그 방법을 적용한 데 따른 사회적, 생태학적 결과 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이 있다. 1870년대 이후의 식민주의 시대 말기와 20세기 후반부의 개발 시대의 연속성은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과정으로 표현된다. 동일한 과정으로 간주되는 까닭은 대체로 그들이 같은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악명 높은 영국 기업가이자 식민주의자였던 세실 로즈(Cicil Rhodes)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들의 은밀한 목적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우리는 원료를 쉽게 입수하는 동시에 식민지 원주민들이 제공하는 싼 노예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땅을 찾아야 한다. 식민지는 또한 우리들의 공장에서 생산된 잉여 제품들을 쏟아놓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개발론을 부르짖은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세계평화, 평등, 박애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얼굴을 달리한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식적인 식민주의가 종말을 고한 것은 단지 식민지를 차지한 강대국들이 식민지에서 얻는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더 나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더 놓은 방법을 통해 그러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체계가 기능할 수 있는 법적, 경제적 하부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19세기 말 라틴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식민지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은 "무역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안정적인" 사법 시스템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의 충격과 서구적 가치관의 확산으로 전통적인 사회가 붕괴되어가고, 자급자족인 경제가 시장 경제로 대체되면서 폭발하듯 늘어나고 있는 도시인들이 시장경제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됨에 따라 서구의 침략과 무역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유지하는 작업이 쉬워졌다. 이제는 전통적인 식민 제국을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이전 보다 더 효율적으로 통제 가능한 독립 토착 국가들 자체 안에 편성되어 있는 정치, 경제적 틀을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1944년에 미국은 브레턴 우즈 회의를 열어 전 세계에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 추구 중심의 시스템 구축을 위한 논의를 했다. 미국 기업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세계 경제에 대한 꿈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지도자(재계와 대외정책 정부 권력자)에 의해 열렸다. 이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세계 경제 활동의 틀을 정하고 통제력을 행사하는 세계은행, GATT, IMF 등이 만들어졌음이 우연이 아니다. 브레턴 우즈 회의의 기본적 경제적 세계관의 전제 중 결정적인 결함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적 성장과 세계 무역의 강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

둘째, 지구가 지니고 있는 한계에 의해 경제적 성장이 제한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주의자들과 관료집단 외에는 대체로 경제성장이 빈곤의 확산과 빈부격차 증대, 환경문제, 강력한 사회조직에 대한 해결책이 못된 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으며, 경제적 세계화가 경제 성장의 열쇠라는 주장도지지 받지 못하고 있다. 성장 지상주의 세계 경제의 지속성은 불가능의 명제임이 정직한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그 대안은 세계화의 반대이다.

 

세계화는 세계적인 기업형 중앙계획경제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것은 명백하게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 즉 세계적인 "기업형 식민주의"로 불릴 수 있으며, 과거의 식민주의와 지난 50 여 년의 개발이란 이름의 식민주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고 가난하게 만들고 그들을 사회의 소외된 계층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문화를 파괴하고 더 많은 환경 파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면, 세계화는 결코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오는 마술지팡이가 아니라 형식이 바뀐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이며, 이로 인한 영향은 극소수 과소비계층의 부익부 현상으로 세계 인구 80% 이상의 빈익빈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문화의 획일화와 교육의 획일화로 세계는 더 특적 이익 계층의 통제아래 놓이게 된다. 세계 경제의 근간을 이루며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세계를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위기로 몰아넣는 이데올로기적 원칙들이 마술 지팡이처럼 휘둘려지고 있다.

 

여기에는 경제 성장 주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자유 무역의 강조, 규제가 없는 '자유 시장', 정부의 규제 철폐, 서구 기업의 이상을 충실하게 반영하며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는, 세계적으로 동일한 개발 모델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와 결합된 탐욕스러운 소비지향주의 등이 포함된다. 이 원칙들에는 또한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탄자니아, 스웨덴, 아르헨티나처럼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나라들까지 똑같은 세계 경제 모델에 동참해서 자신들의 '떠오르는' 배를 똑같이 저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되어 있다.

 
세계적인 규모의 기업형 중앙계획경제로의 전환은 우리의 모든 개인적 공적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제3세계와 서구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어느 지역이든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세계의 여러 민족과 국가는 세계화로 인한 민주주의와 권력, 고용, 지역사회, 농장, 식량, 공공보건과 문화의 다양성, 생물 다양성의 보존에 미치는 영향 등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세계화의 충격과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세계화와 세계적인 "기업형 식민주의"의 시대에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어떤 변화의 원동력이 되는가? 우리의 신학적 성찰과 실천에 어떤 의미를 주며 나의 삶의 양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가? 지역교회와 세계 교회 공동체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신학적 작업으로서의 선교신학을 추구한다.  

 

 

2. 십자가 신학의 역사적 이해  


이런 세계화와 세계적인 "기업형 식민주의"의 시대에 기독교인과 교회는 어떤 생활 방식을 가져야 하나? 이 시대 선교적 과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시대적 표지를 읽으면서 기독교의 선교적 대응은 기독교의 본질에 부합해야 한다. 식민주의 시대 선교가 반선교적인 실천으로 현지인에게 비난받았던 것은 서구 선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과 재림이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 있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신학적 용어와 개념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이제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변화된 세계에서 변화된 선교 사역을 위한 십자가 신학의 의미를 풀어내는 것이다. 십자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어떤 변화의 원동력이 되는가? 우리의 신학적 성찰과 실천에 어떤 의미를 주며 나의 삶의 양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가? 지역교회와 세계 교회 공동체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신학적 작업으로서의 세계화 시대의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인의 선교신학을 추구한다.

  

2. 1 바울이 본 십자가 신학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율법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신칭의는 구원의 원리요 해방의 원리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원리에서 자기 정당화와 자기 업적 과시주의로부터 해방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의 말씀은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하나님 이해를 비판하는 중심점임을 천명한다. 따라서 십자가 인식이야말로 세상의 권세들로부터 해방이 시작된다. 표적을 찾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요,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자유이다.

 

표적과 지혜를 찾는다고 하면서 자기를 우상화하는 비인간적인 처사를 비판하며 불의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한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통하여 인간의 강함과 지혜를 타파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가 신앙과 신학의 중심점이다. 해방과 회복의 구심점이다. 온갖 비인간적이고 불의하고 억압하고 차별을 두는 사회에 비판적 힘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과 이들의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한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변화된 인간과 공동체는 비인간적이고 소외구조를 영속화하는 사회의 지배구조를 무력하게 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바울에게 십자가 신학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이요, 악이 지배하는 기성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개혁론이요, 모든 욕심과 개인적, 구조적 악으로부터 자유하게하는 해방과 회복의 윤리이다.

  

2. 2 루터의 십자가 신학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계승한 루터는 피조물과 역사 내에 있는 업적을 토대로 한 신 인식을 거부한다. 중세의 교회 중심적 사회가 지녔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에 반대한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해방시키는 복음에 대한 인식을 십자가 신학으로 표현하였다.

 

중세 후기에 십자가 신학은 수난의 신비를 의미하였던 반면, 루터는 이것을 엄밀하게 사용하여 새로운 신학적 인식의 원리로 만들었다. 시편 22편 주석에 연이어 서술된 십자가 신학은 보름스 국회로 가기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루터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518년 4월 26일에 있었던 어거스틴 수도사들과의 정기적인 신학적 수도회 회의(혹은 하이델베르크 논박)에서였다.

 
중세 로마 카톨릭이 비인간화되고 공적사상의 구원론을 주장하며 자기 우상화하는 죄를 범할 때 루터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식이야말로 바른 신앙의 길임을 천명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 능력, 창조를 통해서 보다는 고통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식된다. 따라서 십자가는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이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루터는 인간의 자기 의를 부인한다.

 

하나님 인식과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 인식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 사이에 갈등을 초래한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은 마침내 인간의 파괴를 파괴하고, 소외된 자를 소외시킨다. 이리하여 그는 비인간을 인간성에로, 자기의 업적을 통한 자기확증으로부터 하나님의 업적을 통한 신앙적 인식의 길로 인도한다. 이러한 인도의 지팡이요 나침반은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이 무너뜨리려는 우상은 인식과 업적을 통하여 자신을 우상화하며 신격화하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관심이다.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 인식은 그의 인간성을 내버린 인간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우상들과 그의 참되지 못한 신성을 파괴하고, 인간적인 교만으로부터 참된 인간존재로 회복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인식은 탐욕과 우상숭배로 인하여 자신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urvatius in se)이 되어 자기를 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열린 사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십자가 신학은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다. 모든 기독교 신학의 일반적인 특징이요 기독교적 신학의 표식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 신학은 속죄론과 구원론을 넘어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해석의 중심점이다. 모든 신학적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규범적인 특성을 지니는 십자가 신학은 단순한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선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비판적이고 해방하는 실천과의 연관성 속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십자가 신학은 현상유지(status quo)의 신학이 아니요, 모든 인간의 마음을 고착하게 하고 모든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는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해방하는 힘으로서의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를 갈라놓고, 업적과 행위의 강요로 인한 노예화된 인간의 해방이며, 모든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사물들을 올바른 이름으로 불렀다(dicit quod res est)."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어떤 한계점이 없는가? 현대 신학에 십자가 신학의 부활을 일으킨 주인공인 몰트만에 의하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한계점은 십자가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의 철학(Werkphilosophie)과 효과적으로 대결시켜서 이 대결로부터 하나의 "십자가 철학"(philosophia crucis)을 형성시키지 못한 점이다. 1525년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휴머니즘에 반대하여 십자가 신학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은 멜랑히톤의 도움을 받아 개신교에 영향을 미쳤으며 개신교의 업적의 윤리(Leistungsethik)를 장려하게 되었다.

 
중세의 사회, 종교적 체재에 반대하여 이론적, 실천적으로 형성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정치적 내지는 사회, 윤리적 한계를 지녔다. 이것은 루터가 농민전쟁에 반대할 때 그의 십자가 신학에 상반되는 논리를 말함으로써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십자가의 비판적이며 해방하는 힘,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가난한 자들의 선택, 교만과 압박, 권세욕과 노예상태에 대하여 침묵하고 말았다. 그 대신 고난의 신비와 겸손한 순종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2. 3 몰트만의 십자가 신학 이해

사실 십자가 신학은 신학 역사상 그리 환영받은 주제는 아니었다. 신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고 할지라도 쉽게 무시되거나 잊혀지기 일쑤였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십자가 신학은 교회의 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여러 교회 전통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칼 라너(Karl Rahner)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에 의해, 문학에서는 니콜라스 베르자에프(Nicholas Berdyaev)로부터, 정교회에서는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개신교에서는 디이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칼 바르트(Karl Barth), 카조 키타모리(Kazo Kitamori),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uengel) 등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특히 태국 선교사였으며 아시아 상황화 신학의 대표자인 코수케 코야마(Kosuke Koyama)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희망의 신학과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과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 십자가 신학을 신학의 중심으로 전개한 몰트만의 이해와 아시아 신학자인 코슈케 코야마의 십자가 신학을 살펴본다.  


십자가 신학은 몰트만이 신학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지속되어온 신학적 사고의 중심점이었다고 고백한다. "가시 철조망 속에 사로잡힌 전쟁포로의 한 사람으로서" 청년 몰트만은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해석학적 열쇠를 십자가 신학에서 찾았다.

 
몰트만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 이해의 한계성을 역사적 한계와 정치적 한계로 구분하여 지적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몰트만의 과제는 십자가 신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으로서, 종교이해를 넘어서 세계이해와 역사해방에 이르기까지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신학은 구원론과 신론과 기독론의 차원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적이며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모든 형태의 악과 지배와 차별과 착취와 비인간적인 구조를 비판하며 변혁하는 것을 포함한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의 하나님을 철두철미 신학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과 인격성의 영역, 사회와 정치적인 영역 그리고 마침내는 우주론의 영역에서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책에서 몰트만은 십자가 신학이란 관점에서 기독론, 신론, 인간론, 교회론, 사회비판론 등을 전개한다. 그의 신학 체계의 핵심 개념은 삼위일체론적 십자가 신학이다. 고대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은 생사를 건 중대한 신학적 문제였으며, 기독교를 다신론, 범신론과 유신론으로부터 구별하는 이론이었다. 이슬람이 등장하여 소아시아를 넘어서 유럽에까지 확산될 때도 삼위일체론이 결정적인 논쟁점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서구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개신교에서도 삼위일체론은 멜랑히톤 이후 쉴라이에르마허와 19세기 도덕적 신학 이후로부터 아무 의미도 없는 신학적 사변으로 간주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 삼위일체론을 신학적 담론의 중심적인 주제로 부각시킨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사이에 어떤 내적 논리적 연관성이 있는가를 탐구한다.

 

그가 묻고자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적인>,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삼위일체론 적으로 생각되어져야 하는가? 반대로 십자가의 사건이 간과될 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삼위일체론 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사건,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 없는 자들과 대적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내적 삶 속으로 통합된다.

 

이 사랑 안에 살 때 그는 하나님 안에 살게 되고 하나님이 그 안에 살게 된다. 삼위일체성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일어난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된다면 삼위일체성은 그 자신 안에 폐쇄된 하늘의 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을 위하여 열려진 종말론적 과정을 뜻하게 된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개방된 상하기 쉬움을 의미하며, 사랑이 없고 사랑 받지 못한 비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개방성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문 밖"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성문 밖 골고다 산 위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도 극복하게 한다. 삼위일체론 적인 십자가 신학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의 양자택일적인 구도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피안에도 계시고 차안에도 계신다.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고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다. 거꾸로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 마음은 그의 백성들의 불손종으로 인하여 상하고 고통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상처받은 사랑이며 인간에 대한 그의 반응의 방법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분노의 원천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사랑의 반대는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에서 물러서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가 아직도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그의 백성과 함께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셨다: 구원은 나와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전쟁의 포화가 울려 퍼지는 참호 속에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서 인간의 고통과 함께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개방성이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 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십자가 신학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수단이 된다. 즉,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한 대속물이시다. 여기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근원에서부터 파악한다는 의미의 철저성이란 관점에서 철저한 기독교 신앙이란 남김없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과 관계 형성을 말한다. 이런 관계성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희망이나 목표나 좋은 의도를 보증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철저한 회개와 변혁을 요구하며 그에 동반하는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향이 없게"하고 안전의 기초를 뒤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진리와 마주치게 한다. 십자가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사고하도록 인도할 뿐만 아니라 바꾸어 사고하도록, 혹은 철저히 회개하도록(Umdenken)한다. 교회와 종교적 안주로부터 이끌어내어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연합하도록 하는 상징이다. 역으로 이것은 내어쫓기고 버림받은 자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고, 교회를 통하여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과 결합하도록 부르는 상징이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우상화하는 교회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따라서 십자가 신학은 회개와 변혁의 신학이며 해방과 자유의 메시지이다.

  

2. 4 코슈케 코야마의 "물소 신학"

1960-68년까지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Thailan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코슈케 코야마는 토쿄와 뉴욕에 이어 제3의 신학적 삶의 자리로서 태국이란 이 세 가지 상황과 성경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지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Water Buffalo Theology(1974)를 낳았다. 약간 변경된 제목과 내용으로 25주년 기념 판이 나올 정도로 현존하는 상황화 신학, 아시아 신학의 거장으로 세계 신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코야마의 신학적 관심은 아시아인의 대다수가 신봉하는 종교들과 아시아인의 고난과 슬픔(한)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과 화해의 에큐메니즘이란 역사적 배경에서 태어난 {물소 신학}은 성경 메시지의 중심과 연결된다고 한다. {물소 신학} 25주년 기념 판에서 그는 이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하나님의 열정(hot God)의 선교적 의미를 강조한다. 바로 이 뜨거운 하나님, 열정의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슬픔의 현장에 임재한다. 만민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이 아시아인의 고난과 슬픔을 해방하신다는 것이 코야마의 "십자가 신학"이다.

 
"열정적인 하나님"(hot God)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코야마는 성경의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의 언약 개념은 근본적으로 "열정적이고 뜨거운"(hot) 개념이기 때문이다. 열정적인 하나님은 차가운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난과 한과 슬픔을 수용하심으로 하나님은 차가운 사람과 사람의 차가움을 수용한다.  


이와 같이 코야마는 아시아 종교의 전통적인 종교 개념을 성경의 하나님과 연결하여 신학적으로 풀이하면서 변두리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신학을 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영광이나 특권이나 힘이 없는 변두리 사람들에게 다가감으로 그의 중심 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변두리야말로 망각되는 장소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시내 산에 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변두리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한 장소에 고착된 신이 아니다. 시내 산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고착된 신과 종교의 우상을 타파하며 도전하는 하나님이다. 예수님도 성문 밖 골고다 산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산(장소)"에 고착된 인간의 우상과 종교에 도전한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곧 천황의 신격화를 도전하는 것이다.

 

 

3. 아시아 상황과 십자가 신학  


십자가 신학은 신론, 기독론, 구원론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의 중심점이다. 신학의 규범적인 성격을 지니는 십자가 신학은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새롭게 성찰되고 해석되어야 할 비판적인 성격을 지닌다. 모든 상황과 시대를 넘어서 있는 완전한 신학이란 있을 수 없고, 신학의 자리인 문화와 사회는 늘 변화의 흐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 아시아 상황에서의 십자가 신학의 의미를 물을 수 있고, 아시아인에게 주는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할 과제를 가진다.

 
스리랑카의 불교 전문가이자 카톨릭 신학자인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가 진단했듯이 아시아의 특성은 한마디로 가난과 종교성이다. 아마 아시아에 들어온 기독교가 식민주의적 서구 기독교의 형태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신학과 실천이었다면 아시아의 기독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띄고 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과 사역을 자기 이해의 핵심으로 하는 초기 교회의 복음 이해가 전해졌다면 아시아의 종교성과 사회 문제에 더 개방적이었을 것이다. 백성을 해방하기보다는 노예화하고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소외된 자들을 배척하는 특성을 보여주는 아시아의 대다수 종교가 새롭게 변화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라는 지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식민주의 시대의 시작과 함께 아시아는 세계 문제에 편입되어 있고 세계화와 "기업형 식민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아시아 종교성과 가난의 문제는 아시아의 문제임과 동시에 세계의 문제로 파악하고 대응할 때 올바른 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 따라서 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신학적 성찰과 선교적 논의 역시 아시아적이면서 세계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성과 가난을 기본 영성으로 가진 아시아 상황에서 세계화 시대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선교적 과제로서의 십자가 신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3. 1 아시아 종교성과 십자가 신학

비밀경찰은 두 유대인 남자와 한 소년을 회집한 포로들 앞에서 교수대에 매달았다. 두 남자는 빨리 죽었지만 그 소년의 죽음의 투쟁은 반시간이나 걸렸다. 이 때 내 뒤에 서 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그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소년이 여전히 밧줄에 매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남자가 다시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때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여기에 있다 ... 그는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선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다. 순교의 현장에는 늘 하나님의 침묵이 질문되어지고 그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북녘 땅 어딘가에 기독교인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이 질문을 하며 쾡한 눈 속에 이글거리는 빛으로 응답을 찾으며 순교적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순교의 현장에 주님은 무감동한 타자로 구경꾼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현장에 들려지는 주님의 음성은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나도 너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이다. 성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나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함께 하셨고, 캄보디아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 치하 프놈펜 시내 비밀 감옥 "S21 수용소"(Toul Sleng Museum)에서 죽어가던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강함과 능력과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연약함과 무력함과 상처받기 쉬움으로 친히 인간이 되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만민의 구원을 여시고, 모든 불의와 착취와 파괴를 물리치시고 정의와 평화와 화해와 치유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하나님은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갓난아기로 태어나심으로 시작하셨다(눅 2:1-7, 빌 2: 1-11). 성육신은 하나님 이해와 인간 이해의 중심점이다. 그런데 성육신은 십자가와 분리해서 이해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틀에서 인식해야 한다. 여기에 복음 증거의 근원과 방법이 기초하고 선교의 기본 틀이 형성된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의 상처받기 쉬움(vulnerability)과 무력함(powerlessness)은 기독교 영성과 선교의 기본 틀로서 아시시의 프랜시스를 통하여 입증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 개념은 오랜 식민지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지배를 합리화하는 세계화 혹은 "기업형 식민주의"에 휩싸여 허덕이는 아시아인에게 낯선 개념이다. 아시아인의 종교성은 생명을 존중하고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탐욕과 정욕을 벗어나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인과 성과 효의 윤리적 길로서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개념은 생소하다.

 

아시아 종교는 아시아인의 운명을 형성하고 아시아의 역사를 수놓아왔지만 고난과 사랑의 하나님 개념에는 낯설다. 아시아 종교는 물질적, 정신적 해탈과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지배계급과 가진 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것도 사실이다. 소외된 자, 병든 자, 천민 계급과 가난한 자에게 운명 순응적인 교훈을 하였다. 아시아 종교가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는 데 모자랐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문제는 서구에서 상업(무역)과 문명(무력)과 단짝이 되어 아시아에 들어온 기독교(선교)는 이러한 아시아 종교의 역기능과 비인간화를 변혁하기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수처럼 아시아인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더 깨뜨려놓았다. 아시아인에게 수치심을 심어준 기독교와 선교는 아시아 땅에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한 바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아시아인에게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부흥을 일으킨 외부적 요인이 되는데 더 큰 기여를 하였다. 아시아인은 이제 서구인이 명명하는 대로 이름 불러주는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 문명비평가로서 현대 서구 사회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점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즉 "동양" 또는 "동양적인 것"이란 실제의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인들의 편견과 왜곡이 빚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동양인)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가 없다. 다른 누군가가 표현해 주어야만 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말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그에 대해 권위를 지니는 서구의 스타일"이라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사이드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리엔탈리즘은 극복되어야 마땅하나 아시아에 팽배해 있는 가난, 무관심, 억압, 무지, 종족 분쟁, 인종주의, 전쟁, 테러와 광신주의가 종교와 연루되어 있는 점이 지닌 문제점도 극복되어야 한다.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치유하고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여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건설하게 하는 것이다.

 

아시아에 한이 없는 사랑(compassion)의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으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은 변두리의 모든 소수자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다.

 

이 복음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이슬람과 십자군에 대해 성 프랜시스가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여주었던 접근방식, 즉 "십자군의 정신"(crusade mind)이 아니라 "십자가 정신"(cross mind)으로 아시아인(타종교인)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전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이며, 논쟁이나 지배자나 시혜자로 다가가는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3. 2 아시아 가난과 십자가 신학

아시아인에게 두 가지 종류의 가난이 있다. 하나는 자발적 가난이요, 또 하나는 강요된 가난이다. 자발적 가난은 아시아의 종교성에 세례 받은 고귀한 사랑의 원리요 단순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배계급의 등장과 함께 착취와 분열과 집착이 낳은 강요된 가난이다.

 

아시아 종교성이 인간의 원초적인 소유욕과 이기심을 제어하고 자기를 넘어 이웃과 자연에게로 삶의 공동체 성을 넓히는데 기여한 바 적지 않지만 그 반대로 강요된 가난을 낳는 이데올로기로도 악용되어 왔다. 서구 제국의 식민주의가 시작되면서 아시아의 대다수 백성은 더 철저한 착취와 수탈의 질곡에서 강요된 가난을 맛보아야 했다. 20세기 후반부터 더 본격화된 세계화와 "기업형 식민주의"로 아시아의 대다수 백성들은 최악의 강요된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  


세계화와 "기업형 식민주의" 문제와 그로 인한 강요된 가난은 비단 아시아만의 문제는 아니라, 제3세계 전체의 문제이다. 남미 해방신학의 등장 이후 선교학계에 하나의 기본 명제처럼 등장한 용어가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관심/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성 혹은 "해방하는 연대성"(liberative solidarity) 등이다.  


제3세계의 도전은 부유한 국가들에 대한 도전이다. 즉 그들의 가치와 이상, 야망과 기준, 철학과 삶의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이러한 도전은 단순한 자선행위나 원조계획 등을 통해서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부의 재분배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경제 성장을 목적 그 자체로 보지 않을 때 가능하고 또한 경제적 삶은 인간적 연합, 청지기 사상과 책임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 교회가 "회개와 자제"의 길을 기꺼이 따르려고 할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부유한 국가들의 교회에 요청되는 행동은 외적 성장보다는 내적 성장에 우선권을 두는 것이다.

 

제3세계에 필요한 성장은 소비자 사회 형성을 성장으로 보여주는 부유한 서구 모델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경제성장에 치중하나 인류와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장은 참된 성장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 사역은 전인격의 성장 또는 전 민족의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 선교 활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의 창출, 즉 새로운 소비형태에 기초를 둔 '영원히 지속될 삶의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전의 성장지향의 개발, 세계화와 "기업형 식민주의"의 은밀한 회유로서의 개발은 지양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으로 "변혁"(transformation)또한 기독교 선교는 인류에 봉사하고 자연을 존중히 여기는 새로운 기술 창출을 포함한다. 이제 우리는 긴급히 어네스토 사바토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 "기술과 과학의 인간적 의미를 재발견하고 그것들의 한계를 설정하며 또한 그것들을 신봉하는 현대적 종교를 마감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성장과 관련하여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정의의 토대 위에 인간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빈부 격차가 심한 상황 속에서 복음 선교 사역이 취해야 할 태도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14:17)

 

여기서 의라는 낱말은 'Righteousness'일 때는 '곧은 것'을 의미하지만 그 말이 'Justice'로 표현될 때는 '형평과 균형'을 뜻한다. 그러기에 의는 '나눔'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의 선교적 정행은 선지자적 삶의 방식이요, 바람직한 선교의 모델은 인류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보편성과 이 세상의 만민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창출되어야 한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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