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전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1. 전도에 열심인 나라 

 

우리나라만큼 ‘전도’에 열심인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일단 한 번 기독교인이 되면, 주위 사람들을 모조리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유난히 ‘모태 신앙인’이 많다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부모들이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자식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독교인’이라는 라벨을 붙여주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남자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인 마누라를 둔 남편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남편이 천하의 강심장인 폭압적 남편이거나 아니면 마누라의 신앙이 형편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 가정은 분란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오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 기독교인이 된다.


주의 사람들을 모조리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는 운동선수들 사이에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한 팀의 감독이 독실한 기독교인인 경우, 선수 전원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어떤 여자 실업 배구 팀의 경우는, 경기가 끝난 뒤 선수 전원이 코트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TV 중계에 방영돼 관심을 끌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 팀의 감독이, 팀웍과 정신적 안정을 위해 선수 전체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신앙의 힘’ 때문에, 이 팀은 한동안 여자 실업배구의 강자로 군림했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다. 몇 해 전에는 한창 인기가 있던 공중파 TV의 일일 연속극에 ‘교회에 나가 보라. 교회에 나가면 좋다.’는 식의 대사가 자주 나와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구설수에 휘말린 경우가 있었다. 당시 이 연속극을 집필하던 작가는 세상이 다 아는 ‘열성 기독교인’이어서, 작가가 자신이 집필하는 TV연속극마저도 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비난이 들끓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요즘 서울역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전철 혹은 버스 안에서 십자가를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동네에서 특정 교회의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교회에 나가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국민 모두를 자기와 같은 기독교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전도 열기에 대해 일반인들은 극도로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전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승객들의 표정을 통해 금방 읽을 수 있다. 한 마디로 보통 승객들은 ‘예수’를 외치는 전도자들에 대해 한결같이 ‘짜증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참을성이 떨어지는 승객의 경우는 아예 ‘시끄러우니 다른 곳으로 가든가 조용히 있으라’고 핀잔을 준다.

 

이쯤 되면 이것은 ‘전도’가 아니라 거꾸로 교회를 ‘동네 북’으로 만드는 ‘이적행위’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지하철 등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거나 찬송가 테이프를 틀고 다니는 것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기독교인들의 전도는 더욱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도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 남기신 지상명령이 바로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행1:8)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전도에 나서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의 열정과 용기를 칭찬해 줘야 할 형편이다.


더욱이, 일단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게다가 나의 사랑하는 남편, 자식,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 지옥에 떨어질 판인데,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만 있겠는가? 비록 그가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지라도,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하늘나라의 값진 보물을 전해 주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에게까지 순교를 감내하면서 복음을 외치지 않았던가?


전도는 기독교인의 당연한 사명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실현을 위해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한국 기독교인들의 전도는 짜증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더 나아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전도’의 올바른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인터넷 백과사전 ‘두산 엔사이버’이 의하면, 전도는 ‘어떤 도(道), 즉 종교적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앙적 내용으로, 복음을 다른 지역에 옮겨 심는 원심적, 확장적인 행위를 가리키는데, 사명 또는 파견을 뜻하는 ‘미션’(Mission)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달함으로써 인간을 회개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다는 내용적, 구심적인 뜻으로, 이 경우는 ‘에반젤리즘’(Evangelism)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첫 번째 ‘미션’의 의미는 기독교가 성립된 초기부터 철저하게 자각된 과제였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의 접촉, 변용(變容) 현상으로서, 이를 통한 게르만인의 서유럽화와, 근대에서의 세계적 규모의 접촉이 외국 전도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19세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위대한 전도의 세기’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각처를 향한 ‘미션’이 조직적으로 행해져, 기독교는 사실상 세계 종교가 됐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음의 눈부신 팽창을 가져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서유럽의 비기독교화에 따라 국내 전도라는 새로운 사태, 특히 특수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도(특수선교)의 필요성이 야기되기도 했다.


두 번째 의미에서의 ‘전도’는 내용적인 것인데, 단순히 주변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흔히 ‘전도’는 그것을 전파시키는 수단 방법, 때로는 대상에 따라 이름이 지어지고 분류되기도 한다. ‘개인전도’, ‘대중전도’, ‘교육전도’, ‘방문전도’, ‘가두(노방)전도’, ‘직장전도’, ‘문서전도’, ‘시청각전도’ 등이 그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전도’와 ‘선교’를 구분하는 경우도 많다.

 

즉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을 ‘전도’ 라고 한다면, ‘선교’ 는 이보다 더 큰 의미,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제를 실천해 나가는 것을 ‘선교’ 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산업선교’, ‘인권선교’ 등이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부각되기도 했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절실한 선교적 과제로 얘기되고 있다.


‘전도’와 ‘선교’를 구분할 경우 그 차이는 아주 명료해 진다.

즉, ‘전도’가 사람들을 죄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방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는 반면, ‘선교’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흩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이른바 ‘미시오 데이’, 즉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념 역시 이처럼 ‘흩어지는 교회’의 모델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를 강조하거나 ‘선교’를 강조하거나에 상관없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일 수 있으나,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회개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전도와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전도자’인 바울도, ‘내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는가 하면, 전도를 잘하는 것 자체도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2:6이하)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인들은 전도를 하는 것을 개인적인 신앙의 척도로 보고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신앙도 좋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이 좋은 사람이 전도 역시 많이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전도가 개인적인 역량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전도의 주체를 혼동하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지는 전도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사유화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해마다 ‘전도왕’을 선발해 시상하는 것은 이 같은 은사의 사유화를 부추기고 교인들 사이의 쓸데없는 경쟁을 유발하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정시킨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일관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보편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전도를 자신의 교회를 확장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말한 ‘전도왕 시상’에는 교인들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키워 보겠다는 목회자들의 속셈이 숨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교인들이 동네에서 주민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가기 위해 전도지를 돌리는 일이 요즘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심한 경우는, 다른 교회에 다니는 친구를 자기 교회로 끌어가는 경우도 ‘전도’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런 행태는 하나님의 교회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교인 쟁탈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땅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거나 ‘민족을 복음화한다.’는 구호들이 반드시 ‘최후의 한 사람까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다원 종교사회에서,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태도는 사회 속에서 종교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만을 키움으로써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짚어 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전도는 아주 순수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여러 차례 지적된 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있다. 하지만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반드시 전도만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 꼭 길거리에 나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쳐야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나 교단에서는 전도를 신앙의 척도로 보고 교인들에게 노방전도 등을 강요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일부 통신신학원 등에서는 아예 노방전도를 교과목의 하나로 정해 놓고 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전도가 먹혀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전도가 뭔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었기에 전도활동이 사람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2. 미성숙한 공공장소 전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은 이젠 기독교인들에 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더 익숙한 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명동과 서울역, 강남역 등 서울 도심 중심지에서 이를 쉬지 않고 외쳐되는 이들 때문이다. 또한 서울 시내 지하철 각 호선마다 고정적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이들의 단골 전도 명귀(名句)가 이것이다. 지하철로 출퇴근한지 10 년차 되는 김모씨는 아예 몇 호선 전철을 타면 어떤 방식으로 전도한다는 것까지 외웠을 정도다. 심지어는 찬송가를 틀어놓고 구걸하는 이들이 어떤 찬송가를 틀었는지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3호선은 양복을 입은 40대 남자가 한 사람 앞에 고정적으로 서서 일방적으로 큰소리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 또 1호선 시청역 안에는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은 60대 할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세례 요한처럼 ‘종말이 가까웠으니 주 예수를 믿으라.’며 외치고 있다는 것까지. 또 지하철 2호선의 경우 40대 여성이 그 교회 목사의 부흥회 소식이 담긴 전단지를 무차별로 뿌리며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다.

 

서울역 광장 앞에는 시간대별로 조직적인 전도대가 피켓을 들고 전도하고 있으며, 명동의 소비지구에서도 일군의 전도대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찬양과 노방전도를 하고 있다. 이같이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지하철과 서울시내 한복판에서의 전도 방법은 솔직히 믿는 이들에게조차 거부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현실. 그러니 믿지 않는 이들은 오죽할까? 라는 소리가 믿는 이들 내부에서조차 나올 때가 많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라는 지상명령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도방법은 시대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몇 십 년 동안 일관된 방법으로 지속되고 있어 개선의 목소리가 요구되고 있다.

 
일단, 이러한 전도 방법은 첫째 공공장소에서 너무 큰 소리로, 때로는 과도한 제스처까지 취해 일방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다를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 두 번째는 복음을 전하는 언어적 방법에 있어서 너무 저주스런 말만 되풀이해 듣는 이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당신은 죄인이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등 처음 복음을 접하는 이들에게 복음의 기쁨과 참 자유를 느끼게 해주기보다는 부정적인 한쪽 측면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전도하는 이들 중에는 이단교회의 전도자가 많다는 점도 한국교회의 시급한 대책을 요하는 부분이다. 귀신론을 주장하는 이모 목사 교회, 몇 년 전 일반 언론에서 여자 문제와 거짓 안수 행위로 문제가 됐던 모교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단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두 손을 놓고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기존의 건강한 교회 신자들이 하는 전도와 맞물려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수 백 개에 달하는 개신교 교파나 신학적 이단 가름의 잣대도 없기 때문에 점점 극성적인 이단교회의 전도 방법을 기존 교회와 기독교에서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상이다.


아무튼 공공장소와 길거리에서 보여 지는 이 같은 노방전도 방식에 대해 ‘싸구려 전도방식’이라고 일갈한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믿는 이들로서는 당연한 일이고,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순수하게 봐야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건 그 사람의 은사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들을 구원하고 싶어 나선 노방전도 방식이 그 순수한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때론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전도자와 ‘조용히 하라’고 반박하는 이들 간의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질 때도 많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 교리에 대해 믿지 않는 이와 논쟁을 벌이다가 신학적 이론이 약해 밀리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오히려 전도를 하지 않느니만 못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젠 시대변화에 맞게 전도방법도 세련되고, 성숙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3. 일회성 위주 총동원 주일


공공장소에서의 전도 방식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많은 거부감을 안겨 준다면, 교회 안에서도 한번쯤 토론하고 넘어가야 할 전도방법이 있다. 바로 개교회마다 오랫동안 전통으로 지켜내려 오고 있는 ‘총동원 전도주일’이다. 총동원 전도는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성도가 동원되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불신자들을 최대한 많이 교회문턱까지 데리고 나와 예배에 참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단 데리고 나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를 많이 하는 성도에게 전도상도 수상하고 막대한 재정을 들여가며 유명 연예인이나 부흥강사를 동원 전도 간증 집회도 연다. 또한 교회마다 구역별로 아파트와 주택 밀집 지역에 전도대를 구성해 전도하고 있는데, 지역주민의 인구와 가족사항 등을 조사해 꽤 구체적이며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전도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미리 알고 접근하는 것은 좋으나, 문제는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섬기기보다는 죄악시한다는 점이다.

 

모 교회는 아예 ‘마귀 토벌 첩보 작전’ 이라는 말로 비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 작전을 펼치고 있을 정도다. 이 점에 있어서 ‘총동원 전도 주일’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순수하게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라기 보다는 ‘교회 성장의 한 도구’ 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니냐는 지적이다. 교인 수 증가가 결국 교회의 외적 성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동원 주일에는 다른 때 보다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결신 자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총동원 전도 주일에 나온 교인수의 외적인 수보다는, 그들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영적 공급이 부족하고 내적인 전도의 질도 떨어진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사실 총동원 전도 주일을 기해 물량과 일방 통행식 전도 강요를 통해 교회에 온 새 신자들은 지속적인 전도자의 관심이나 새 신자부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총동원 전도 주일을 교회 성장의 한 도구로 보고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4. 전도 교육. 새 신자 관리 지속


전도를 어떻게, 왜 하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전도만 하고 끝나 버리기 때문에 새 신자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 도움을 주지 못하고, 끝내 귀한 영혼을 영원히 교회와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요즘 개교회마다 전도학교를 열기도 하고, 새 신자 관리에 부쩍 신경 쓰는 분위기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전도의 부담감과 어떻게 전도해야 할 지 언어 표현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도가 믿는 자들에겐 당연한 책임인데도 전도 한번 하기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의 의미와 당위성, 효과적인 전도 전략과 방법들이 교육되고 있다. 한 때 이슬비 전도 편지 방법도 하나의 전도 방법으로 대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방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도자의 마음 문을 거부감 없는 글귀로 열어 서서히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에 복음의 이슬을 적신다는데 큰 매력이 있었고,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잘 맞는다는 평가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서는 편지를 구입해야 하는 등 재정적 부담이 들고, 전도 대상자에 대한 장기적 시간이 요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전도자의 부지런함이 요구되기도 한다.

 

 

5. 개인의 삶의 변화가 중요


그러나 가장 좋은 전도 방법으로 많은 이들이 교인 개인의 삶 변화를 통한 보이지 않는 전도 방법을 꼽고 있다. 아무리 총동원주일이나 물량 공급세를 가장한 부흥집회, 공공장소에서의 담대한 복음 전도를 통해 교회에 나와도 몇 달간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통해 만난 교인들의 미성숙한 모습을 보면 단번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성격이나 인성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성경공부나 영적인 훈련을 통해 교인 개개인의 성품을 그리스도인답게 변화와 성숙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한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새 신자들은 믿는 자들이 거짓말 잘하고, 더 자기 이익을 따지는 모습에 실망하기 일쑤이다. 때로는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잔뜩 찌푸린 무관심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가기도 하고, 교회 안에선 은혜스럽고 좋은 말과 행동만 하던 사람들이 교회 밖만 나가면 언행일치가 안되어 혼란스럽고 실망스럽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더 참고 겸손하다는 소리보다는 여러 면에서 더 이기적이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는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이기성과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자기 것을 나눌 줄 모르고, 타종교에 대해 유독 치를 떨고 포용할 줄 모르는 지독교인들에 대해 솔직히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성토하고 있다. 그에 비해 가톨릭의 경우는 개신교와 달리 지난 20 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사람이 좋아서는 아니다. 그들의 실제 삶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디아코니아의 실천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 선하게 내비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사례들의 보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스스로 겸손하고 청빈하셨던 예수의 삶을 망가뜨리고, 드러내지 못하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많은 특혜가 있는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목사직을 아들에게 세습하고, 장로 권사 등 직분 있는 이들이 온갖 사회 비리와 연루됐으며, 성직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이 세상언론에 그대로 드러났다.


또 최근엔 타종교와 일반 사회 현상에서 드러나는 각종 문제에 기독교가 전문가적 식견과 포용적 태도와 방안을 내놓기보다는 마녀 사냥식 태도로 일관해, 많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이해를 설득해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 모든 비성숙한 모습이 거시적으로는 전도의 방해가 되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개교회 성장의 목표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확장’을 위해 전도의 모든 방식이 변화되고 성숙돼야 할 때이다. 개개인의 영적 성숙과 질적 성장은 외면한 채, 예배 출석률 수치로 목회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때는 지났다는 얘기다.

 

이제 교회는 영적인 봉사와 더불어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과 정의와 평화, 창조세계에 대한 개념수립,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공동의 선의 창출도 동시에 다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전도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인격적인 삶의 변화를 통한 옆의 이웃을 향한 전도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하드웨어가 건강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재 그것을 소홀히 하고 물량주의와 교회 성장의 한 측면으로서의 전도 즉 소프트웨에만 관심을 두고 있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방전도의 경우 이들에게 짜증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은 즉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전도대상자를 위한 것인지, 전도하는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도! 이렇게 합시다’의 저자인 민홍기 목사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며 “사람들에게 들려지도록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잘 파악하여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물론 노방전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구원받을 자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열심히 특별해 외국에까지 와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단 중의 하나인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몰몬교) 선교사들도 비상식적으로 만원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등 짜증을 유발하는 전도활동은 하지 않는다. 거리 등지에서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몰몬경을 건네며 전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세인들의 빈축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더욱 참신하고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 있다면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제는 전도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특히 정보화, 영상시대를 맞아 영상 전도법 등 정보화시대의 전도 방법에 대해 연구할 때가 되었다. 정보화시대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늦게 시작하면 더 이상 설 자리를 확보하지 못할 수가 있다.


교회의 젊은이들이 가상 현실과 멀티미디어 때문에 교회 밖으로 모두 나가 버리기 전에, 오히려 교회가 멀티미디어 제품을 제작하여 사회 속으로 소금처럼 녹아 들어감으로써 멀티미디어와 가상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멀티미디어를 연구하고 수용할 뿐만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서 기독교적 멀티미디어 전도물을 양산해 내어야 한다. 단독으로 영상물을 제작하기 어려운 경우 교단적 차원에서 영상물을 제작해 지원하는 방안도 바람직 할 것이다.

 

또한 초교파적으로 기독교가 연합해, 좋은 영화나 T.V 드라마 제작팀과의 연계를 통해 기독교적인 내용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담겨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작업도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만든 멀티미디어 제품은 교회 실정에 완전히 부합되기가 어렵다. 멀티미디어는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음성, 영상, 그림 등이 각각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기관에서 직접 제작하는 것이 좋다. 영상은 노방전도같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 속에 담겨진 메시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또한 교회 멀티미디어 제작 기관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에도 멀티미디어 선교에 비전을 가진 인재가 많이 양성되어야 한다.


민홍기 목사는 ‘문화운동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문화운동이란 문화적 변혁을 추구하거나 보전하며 창조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말한다며 문화를 상실한다는 것은 곧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잃고 마는 것과 같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 운동을 통해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에 가깝도록 하는 예수 운동을 필요성을 역설했다. 천박하며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문화는 제거해야 할 것이며 지키고 보전해야 할 문화는 다시 살려내고 발전시켜 미래적 인간 문화를 창출하는 모든 행위를 기독교는 지지하고 앞장서 해야 할 것이다.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하나님 뜻에 가까운 인간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운동이 그 시대의 문화 운동자가 되지 못한다면 결코 기독교의 선교는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전략 면에서도 끝없이 문화적 운동의 선봉에 서 있어야 한다. 이제 기독교인은 문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미래 우리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보급하는 건강한 문화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기독교를 믿는 자들의 수가 증가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교단 차원을 넘어 범교단 차원의 영상 전도기구가 설립되어야 한다. 이 기구에서는 영상전도 신학의 정립, 정보 매체 제품 제작에 관한 연구, 기독교 데이터 베이스의 구축, 신학교 교육 과정에 관한 연구, 현재 생산되고 있는 영상매체 제품에 대한 모니터링, 미래 사회에서의 효율적인 교회 성장안 연구, 세계 교회와의 연대 등을 연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의 인식 전환과 정보화 시대의 전도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 정보 매체를 통한 전도방법도 필요하다. 선교를 위하여 필요한 정보를 가장 빠르게, 정확하게 얻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가진 정보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인터넷이란 수단은 참으로 위력적이다. 정보 매체를 통한 전도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정보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이미 케이블 TV시대를 열게 하였으며, 위성 방송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전의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일 대 다수의 등식이 일대일, 또는 다수 대 다수의 관계없이 자유롭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 작용성 뿐만 아니라 영상과 음향을 저장하는 기술을 통하여 커뮤니케이션의 비동시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청각미디어에서 총체적인 멀티미디어로 전환하여야 한다.


이제는 듣는 설교에서 보고 체험하는 설교로, 듣고 이해하는 성경에서 보고 실천하는 성경으로, 작가로서의 그리스도인에서 퍼포머로서의 그리스도인으로 전환해야 하며, 이러한 변혁이 기독교에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보시대에 걸맞는 미디어 전도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전도! 이렇게 합시다’란 책에서 저자는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참 사랑 실천 전도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최근 한국 교회, 침체 현상의 가장 큰 요인으로 이웃 사랑 실천의 미흡과 질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 교인들의 모습 등이 문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전도전략도 사회봉사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며 교회는 지금까지의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시도해야 한다. 구조조정은 교회목적의 확실성을 더하여 줄 것이다. 전도도 그러한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편 직장선교회를 통한 전도에 힘씀으로써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게 할 수 있다. 특히 직장선교회의 장점은 삶의 현장 속으로, 일터 안으로 들어가 능동적으로 선교적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는 매우 희망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교회의 다양한 신앙적 프로그램이 직장 선교회로 더욱 확장되거나 전환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지취적인 전망을 안고 말을 타고 광산을 비롯하여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병원, 신용조합, 학교 등을 세우며 기독교의 사회적 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 결과를 두고 역사가들은 영국의 무혈 혁명 완수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웨슬리적 교회 운동은 오늘 직장 선교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매우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더 이상 교회가 예배당 안에 안주하거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뜻에서 웨슬리는 이미 250여 년 전에 교회가 이 세상 일터 속으로 능동적으로 들어가 일해야 한다는 예언자적 실천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인 전도방법들 중에서 한국 교회가 살려야 할 것들도 있다. 전도대상자가 여유 있는 시간에 찾아가 시간을 두고 사귀면서 전도하는 관계 전도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조건 외치는 전도보다 효과적이다. 실제로 ‘고구마 전도왕’으로 잘 알려진 김기동 집사(과천교회)는 주위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전도를 통해 수백 명을 예수님께 인도했다. ‘고구마’란 전도 대상자를 비유적으로 지칭한 말이다. 전도자가 전도 대상자를 만날 때마다 ‘젓가락으로 찌르는’(예수 믿을 것을 권유하는)가운데 익었다 싶을 때는 결정적으로 ‘젓가락 찌르기 한판’으로 교회로 인도하는 것을 ‘고구마 전도법’이라고 한다.

 

‘한 영혼을 위한 천 번의 기도와 백 번의 만남’을 집필한 엄호섭 집사(광성교회)는 전도편지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해 천 번의 기도와 백 번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늘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는 엄 집사는 전도 대상자를 위해 3~5 년 동안 꾸준히 전도 편지를 씀으로써 커다란 결실을 얻고 있다. 여러 가지 형편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이슬비 전도 편지’도 큰 호응을 꾸준히 얻고 있다. 이슬비 전도 편지는 다양한 내용과 기독교 신앙을 담은 시, 성경 구절 등으로 꾸며져 있다. 전도 편지를 연속적으로 발송한 다음 접촉점을 찾아 직접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외에도 한국창조과학회의 ‘당신은 창조주를 아십니까’란 내용의 전도 편지는 진화론을 최고의 과학적 이론으로 알고 있는 중.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무신론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복음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화론이 하나의 무신론의 형태로 자리잡아가며 반 기독교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응해서 그들의 과학적인 허구를 지적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태신자 전도 방법도 한국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전도 방법 중 하나이다. 태신자 전도란, 평소에 기도를 통해서 작정자를 정하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정해진 날짜에 교회로 초청하는 전도방법이다. 즉 성도들이 전도수첩을 마련해서 그 노트에 태신자로 정하고자 하는 사람에 관한 상황들, 예를 들면 성격, 결혼의 유무, 이전 신앙의 상태, 직업, 가족관계 등을 기록한다. 태신자 운동을 위한 조직도 미리 편성해 두고, 총괄적으로 이 행사를 진행하는 기획위원 팀과 실행위원 및 상설위원으로 나누어 구성한다. 실행위원들은 행사를 집행하고 상설위원들은 계속해서 발생되는 새신자를 관리한다.

 

나누어 주는삶을 통한 관계전도를 실행하는 예수마을교회 (장학일 목사 02-2237-5211-3)는 소외되고 죄많은 지역을 죄없는 마을을 만들면서 믿지않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를 대형으로 짓는 것을 포기한 교회이며, 대안학교인 서울실용음악 고등학교, 노인대학,성폭력 상담소, 알콜중독자 상담소, 법률상담소,주민들의 무료침술방에서는 침,뜸,부황,족욕등 시설을 하고 봉사자가 운영하면서 치료를 통한 전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주민들로 부터 칭찬받으며 관계를 이루어서 온동네와 온나라와 세계를 전도해야 할 것이다.

 

큰소리쳐야 전도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다.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전도는 소리없이 저들을 사랑으로 녹이는 것이다.

 

아울러 전도는 실제생활에서 하나님 나라에 거할 때만 가능하다며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될 삶의 자리는 하나님 나라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영. 혼. 육의 전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올바른 전도로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될 날을 기대해 본다.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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