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가 유명해진 이유

 

사상가들 중에는 활동할 당시에 인기가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생존 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제자백가도 마찬가지다.

 

법가의 상앙, 병가의 손무, 음양가의 추연은 활약할 당시 사회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상앙은 사회 제도를 개혁한 전문가, 손무는 전쟁을 승리로 일궈냈던 전문가, 추연은 불운과 행운의 시간을 예측하는 전문가로 각광을 받았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등은 생전에 그다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들 중 노자가 가장 먼저 주목받아 학계와 왕실의 애독서가 됐다. 한비는 자신의 책에 세상에서 최초로 ‘노자’에 대한 간단한 주석과 해설을 달았다. 이 해설은 오늘날 형이상학의 책으로 알려져 있는 ‘노자’와 달랐다. 한비는 노자의 사상 중에서 “애써 하려고 하지 않지만 모든 일이 때에 맞게 잘 풀린다”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에 주목했다.

 

이 말은 문명과 달리 자연(自然)은 외부 요인의 간섭 없이도 잘 굴러가는 것을 도(道)로 설명한 것이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비가 내려서 식물이 잘 자란다. 오히려 사람이 이런 자연의 움직임에 끼어들어 천지의 작용을 망치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한비는 노자의 주장을 법치(法治)가 완벽하게 작동하려면 누군가가 나서서 설치고 고함쳐서 될 일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법치의 시스템이 갖춰지면 명령하고 감시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비는 주장했다. 이는 교통질서의 확립을 위해 CCTV를 설치해놓으면 운전자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법규를 준수하는 것과 닮았다. 한비는 법치가 성공하려면 주관적인 요소보다 객관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항우와 유방은 진제국이 붕괴된 뒤 천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유방이 승리한 뒤 한제국을 세웠지만 사실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다. 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경제가 파탄이 나서 천자의 권위를 세우기도 힘들었다. 이런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위정자가 백성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선 간섭하지 않고 백성이 자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복구하도록 방임하는 게 더 낫다.

 

한제국 초기 노자의 무위이무불위는 이런 방임 정책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큰 역할을 했다. 이때 노자사상은 그냥 ‘도가’로 불리지 않고 ‘황로도가(黃老道家)’ 또는 ‘인군남면지술(人君南面之術)’로 불렸다. 즉, 군주는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기본 원칙을 정해서 업무를 실무자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제자리에 앉아서 일이 돌아가는 형세를 지켜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와 경제를 거치면서 한제국은 사회·경제의 기초 체력을 회복했다. 주위의 이민족을 압도할 만한 국력도 갖게 됐다. 특히 한 문제는 기존의 소극적인 수세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국정의 기조를 수정했다. 무제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법가의 인물을 통해 사회제도를 공고하게 만들고 병가의 인물을 통해 흉노 등 주변 민족을 정복했다. 또 유가의 인물을 통해 전통문화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자 했다. 이때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인물이 한제국의 조정에 대거 중용됐고 황로도가의 인물은 조정에서 물러났다. 학술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계기다.

 

새롭게 학술계의 주역으로 등장한 유학자들은 진제국의 분서갱유 정책으로 인해 사라진 고전 경전을 수집해서 텍스트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경전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주석 작업에 매진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경전에서 현실 정치(생활)를 규제할 수 있는 지침을 끌어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은 각자 자신이 해석하는 경전의 권위를 강조하고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했다. 학술계에서 권위를 얻기 위한 유학자들의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던 유가의 성세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후한이 통제력을 잃으면서 위촉오의 삼국이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조조의 위나라가 통일을 했다가 사마의(司馬懿), 사마소(司馬昭), 사마염(司馬炎) 등의 진(晉)에 나라를 넘기게 됐다. 수당(隋唐)에 의해서 통일이 되기까지 위진남북조시대는 정치적으로 왕조가 단명을 했다.

 

정치만 불안한 것이 아니라 학술과 일상생활마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정정이 불안할 때마다 숙청이 되풀이되고 왕조가 바뀔 때마다 정치적 보복이 뒤따랐다. 이제 학술은 영원한 이상을 실현하는 문제보다 변화하는 세태에서 불안을 달래며 자신의 행복을 가꾸거나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서 몰두할 새로운 세계를 찾아냈다. 그 결과 서정시가 생겨나고 음악과 회화가 의례용 예술에서 개성을 표현하는 장르로 바뀌었다. 학술계도 변화와 운수를 강조하는 ‘노자’ ‘장자’ ‘주역’ 등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아울러 ‘노자’와 ‘장자’는 아주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게 됐다. 이연(李淵)과 이세민(李世民) 부자는 618년에 양위 형식으로 당제국을 세웠다. 당시는 귀족 사회의 특징이 있었으므로 천자라면 그에 어울리는 ‘빛나는 가문’의 역사를 갖고 있어야 했다. 이연은 막상 황제가 됐지만 정통성이 불안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모든 문헌을 뒤진 끝에 이연은 이 씨가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라는 점을 밝힐 수 있게 됐다. ‘사기’를 보면 선진시대 노자가 ‘이이(李耳)’로 소개돼 있다. 당시 노자는 이미 사상과 학술 세계의 슈퍼스타로 대접받던 상황인지라 ‘노자=이이’와 당제국의 혈연적 연대는 이연이 갖고 있었던 불안을 한꺼번에 날려줄 수 있었다.

 

이후 당제국은 노자를 선조로 여겨 절대적인 존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자는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추존됐고 책은 ‘도덕경(道德經)’으로 불리면서 과거시험 과목에 첨가됐을 뿐 아니라 각 가정에 비치하도록 했다. 아울러 국립도학연구소에 해당되는 숭현학(崇玄學)을 설치·운영했고 노자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1301년으로 산정해 도력(道曆)을 창설하고, 태어난 날을 국가의 축일로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구보타 료온 외, ‘도교란 무엇인가’, 55~57쪽).

 

당제국 시절에 노자가 당제국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인물로 각광을 받게 되자 그 혜택이 장자에게 미치게 됐다. 일찍이 노자와 장자는 합쳐서 ‘노장(老莊)’으로 불릴 정도로 도가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자는 이전과 달리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불리고 그의 책은 ‘남화진경(南華眞經)’으로 불렸다. 그는 노자만큼 존중받지는 못했지만 자(子)의 존칭에서 도교의 진인(眞人)이 됐고 책은 ‘경’으로 취급됐다.

 

이렇게 노자와 장자는 선진시대에 활약하고 수당시대에 크게 부각됐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사상은 각각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고 이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노자와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언제 어떤 노자와 장자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장자’라는 책의 구성을 간단히 알아보자. 오늘날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등 모두 33편으로 돼 있고 글자 수는 6만4000여자가 된다. ‘한서’에는 내편 7편, 외편 28편, 잡편 14편, 해설 3편 등 모두 52편으로 소개됐으며, ‘사기’에는 글자가 10만여자로 소개돼 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장자’는 ‘한서’와 ‘사기’의 3분의 2에 해당된다고 한다. ‘내·외·잡’ 이 세 편 중에서 내편이 장자의 사상을 가장 진실되게 반영한다. 나머지는 장자의 후학들이 지은 글로 간주된다. 우리가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어떤 장자를 말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신정근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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