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그 최종형태 구성으로 다시 읽는다

(최근 성서해석학의 한 동향과 새로운 성서 읽기의 한 제안1)


글 / 박경철 목사 (전주갈릴리교회 / 전주대학교)

들어가면서

요즘에도 개교회마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주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매주 요절말씀을 외웠던 기억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줄줄 외우는 성경구절들은 이미 주일학교 시절 때 외웠던 것임을 상기하면, 주일학교 요절말씀 암송이 교회교육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때론 교인들의 신앙의 연륜도 은연중에 누가 더 많은 성경 구절들을 외우고 있는 가로 가늠하곤 한다.

설교에서도 선택된 해당 성서본문에 들어있는 단어들을 갖고 그와 연관되는 여러 성경구절들을 꿰어 맞추어 가는 주제설교들을 많이 듣기도 한다. 물론 많은 이들이 외우고 있는 성서의 구절들마다 은혜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 많이 있음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자칫 개별적인 성경구절들을 그 맥락과 함께 이해하지 않을 경우, 성서 본문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교인이 개업을 하면, 흔히 멋진 필체로 성경구절이 쓰인 벽걸이 선물을 하게 되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성경구절이 욥기 8장 7절 말씀인,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이다. 개업을 하는 교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말 중에 이보다 더 좋은 성경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이 말은 욥의 말이 아니다.

 

고난에 처한 욥을 향하여 욥의 세 친구들 중 한 친구인 빌닷이 한 말이다. 욥의 고난의 이유가 욥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를 회개하도록 하려고 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빌닷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말처럼 알고 자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서구절을 그 맥락과 관계없이 명언처럼 사용하는 그릇된 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의 소예언서들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아는 이들이 드물다. 예를 들어 하박국서가 어떤 내용인지 아는 이는 드물지만, “주여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하박국 3장 2절의 말씀은 귀에 익숙하다. 학개서 역시 2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으로 그 내용을 아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성전 건축 때마다 등장하는 본문이 바로 학개 1장 8절이다.“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구약의 마지막책인 말라기서 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단연 십일조 이야기다(말 3:9이하). 그러나 말라기서가 왜 십일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성서 본문을 그 맥락 속에서 읽으라는 말은 성서 각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의 순서대로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현재의 성서 각 책은 분명한 의도로 잘 짜여진 구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최근 성서학의 한 동향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구성비평 작업이다.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은 비록 성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 수집, 편집 등 여러 단계들을 걸쳤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렇다고 현 성서의 본문을 그런 역사적 제단계들로 구분하고 추려 내거나 갈라내지 않는다. 지금의 모습, 그 최종형태를 읽어 내려가는 방법이다. 이 때, 최종형태의 구성에 대한 관심은 바로 본문의 현 위치, 그 자리매김을 전체의 구도 안에서 조명한다는 말이다.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나는 아래에서 몇 가지 비유들을 들어 새로운 성서 읽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성서는 하나의 모자이크다!

“성서는 하나의 완벽한 모자이크이다.” 이 말은 성서는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있는 작품이라는 말임과 동시에, 반면에 각 조각들을 하나씩 떼어 놓고서는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전혀 다른 색과 모양, 크기들이지만 서로 모여서 전체적인 모습을 지녔을 때에만 그 모습의 내용과 의미를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숱한 다른 모양들과 색깔들이 섞여 있지만, 이들을 서로 구분해서 떼어내어 같은 것끼리 모아놓는 것이 아니다. 지금 최종의 모습, 현재 보여주고 있는 완성된 모자이크의 작품 속에서 그 예술성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하고 있는 한 모자이크 작품을 대한다고 해보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과 예수의 주변에 둘러선 여인들과 로마의 군병들을 본다고 하자. 그 나름대로 각기 그리스도의 수난사의 부분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눈빛 하나에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예술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완벽한 예술성을 갖춘 모자이크 작품으로서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각 조각들을 떼어 놓고 본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얼굴을 이루고 있는 조각들 속에서 같은 색과 모양, 크기별로 조각들을 떼어 놓고 맞는 색깔과 모양별로 모아놓고 본다면 예수의 얼굴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만약 얼굴이 어느 한 색으로 되어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예수의 몸 중에 단지 그의 발만이 그 얼굴의 색과 일치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그 얼굴을 발 옆이라든가 또는 예수의 발을 떼어내어 같은 색이라고 예수의 얼굴 아래 목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붙인다고 해보자. 그런 모습을 보는 어느 누구도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며 그 앞에 고개 숙여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날의 성서주석을 위한 역사비평연구방법론의 주류는 모자이크 성서를 같은 모양과 크기들을 구분해 내거나(양식비평), 또는 색깔별로 그 색을 찾아가는 방식(전승비평), 무언가 덧칠해진 부분을 골라내는(편집비평) 작업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비평의 작업은 이상의 것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전체 작품의 구도를 보며 그 예술성을 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와 물고기

역사비평학자들이 바라본 성서에 대한 관심은 마치 어항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항 속에 든 물고기가 물속에서도 숨을 쉬고, 살아가고 또 위로 아래로 이리 저리 물길을 알아가며 헤엄도 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래서 어항으로부터 그 물고기를 꺼내어 해부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성서해석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사고의 전환은 실로 그 이전 교권에 대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물고기를 어항에서 꺼내면 그 물고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물고기를 죽일 수 있겠는가,

 

이는 신께 대한 도전이라고 본 것이다. 성서를 인간의 눈으로 해석해 보고자 이를 인간의 손으로 해부한다는 것을 자유주의 또는 인본주의 해석으로 보았다. 결국 그러한 성서해석의 방법들로 인해 성서는 발가벗겨졌고 이리 저리 찢겨져 교회의 살아있는 말씀을 죽여 버렸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보수주의 성서해석자들의 역사비평에 대한 비난이다. 이런 면이 없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비평 작업이 해 놓은 공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즉, 어떻게 물고기가 물 속에서도 숨을 쉬고 살아 헤엄칠 수 있는지를 하나씩 알아낸 것이었다. 숨을 쉬는 아가미와 물고기의 비늘과 지느러미, 옆줄, 그리고 몸속에 들어있는 부레 등등을 파헤쳐 물고기의 생태를 살펴본 것이다. 이는 곧 성서가 갖고 있는 온갖 삶의 모습들, 그들의 신앙의 역사와 전통 및 전승들 고대 근동 문화 종교와의 관련들과의 비교 등을 통해 현재 성서 내에 있는 여러 모습들의 배경들을 살펴 볼 수 있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이런 역사비평의 공헌을 단순히 교권의 도전으로 무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성서의 복음을 봉인해 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최근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고기를 꺼내어서 다 해부해 놓고 이제 그 물고기의 생태에 대해서 훤하게 다 알았다고 치자. “아… 그래서 이렇게 물속에서도 숨을 쉬는 구나… 이래서 헤엄을 치는 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해부대에 올려져 있는 그 물고기는 지금 숨을 쉬지도 못하고 또한 헤엄도 치지 못하는 물고기, 죽은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성서학자들이 해나가야 할 작업은 이 물고기를 원상태로 돌려놓는 일이다. 다시 어항 속에 넣어서 제대로 숨을 쉬고 헤엄치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놓고 어항 속에 든 그 물고기를 보자는 것이다. 이제 다시 물고기의 동태를 볼 때, 그 이전에 알던 것 보다 그 내막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물고기의 원상태로의 복귀는 역사비평 이전 단계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비평 그 이후, 최근 성서학계의 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성서가 교회라는 어항 속에서 살아 숨쉬고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기 위해선 해부로 인해 찢겨진 성서로서가 아니라 최종형태로 전해진 그 전체를 다시 보는 일이다.

성서, 바다와 바닷물

한 아이가 바닷가에 서 있다. 저 멀리 수평선이 바라다 보이는 바닷가에 서서 엄마에게 묻는다. “와 바닷물이 엄청 많네. 엄마, 바다는 어떻게 만들어 졌어? 이 모든 물들이 어떻게 여기 다 모였어?” 소년의 물음에 대해 엄마는 여러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을 거다. 비가 오고, 샘물이 고이고, 지하수로, 시냇가를 따라, 강물을 따라, 흘러 흘러 여기 바다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창조주가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 마디 하고 입을 꽉 다물어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보이는 바닷물은 오랜 세월을 흘러 여러 통로들을 통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바닷물중 어떤 것은 빗물이고, 어떤것은 강을 통해 흘러온 것이며, 또 다른 어떤것은 지하수라든가 그 어떤 다른 통로의 요소라고 구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물이라는 속성 그 자체는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여기 물의 속성을 다시한번 고찰해 보자. 물은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그 어떤 틀 속에선 나름대로의 모양을 갖게 되고 거기서 새로운 자기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시냇가를 흐르는 물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는 강물소리와 다르다.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관심은 현 성서 각 책의 최종형태에 대하여 바닷물의 성분을 일일이 가려낼 수 없듯이, 성서 각 본문들을 역사층으로 갈라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손에 쥐어진 성서의 최종형태는 바로 바닷물처럼 수많은 통로들과 오랜 세월을 통해 전해져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서 현재 이것은 무엇이다, 어디서, 언제 들어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집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가설들일 뿐이고 이는 꼭 그렇게 분명하지도 않다. 이것이 최근 성서의 최종형태에 관심을 두는 학자들이 지난날의 역사비평방법론에 대한 반론인 셈이다.

성서와 영화

오래전에 ‘모레시계’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거기 지리산의 노고단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첫 장면은 태수가 사관학교 면접에서 떨어진 것이 지난 날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이었음을 알고 어머니가 그와 함께 지리산에 올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면에서이고, 둘째 장면은 태수의 어머니가 기차에 치어 죽고 화장한 재를 태수가 노고단에 와서 뿌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태수가 죽은 뒤에 그와 절친했던 친구 우석과 혜린이 태수의 화장한 재를 다시 그 장소 노고단에서 뿌리는 장면이다. 노고단을 선정한 이유는 노고단 바로 아래인 성삼재까지 차로 쉽게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제작진들의 편리를 위해서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 번이나 나오는 노고단 장면을 매번 올라가서 찍었을까? 분명 한 번에 배우들을 번갈아 가며, 그리고 분장도 바꾸어가며 찍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장면이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서 이를 연달아 보여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드라마 전체 구성을 위해 당연히 편집을 했을 터이고, 무엇보다도 같은 장소를 의도적으로 골랐다는 것이다. 성서의 최종형태 본문을 같은 시기로 여러 본문들을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재편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 최종형태의 구성이 갖고 있는 의도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똑 같은 장소 노고단의 장면이 전체 드라마 구성에 특별한 의미를 주듯이, 지금의 성서 역시 이와 비슷한 모습들이 분명 있으며, 그 구성이 보여주는 신학적 의도를 묻는 것이 바로 최근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비평방법이 하고자 하는 일이다.

‘텔미썸씽’이라는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는데, 이 극적 반전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아파트에서 떨어진 중학생의 교복 소매에 하나만 달려 있던 단추에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화를 끝까지 보아야만 알 수 있게 만든 의도된 영화의 구성이다. 우리가 흔히 잘 된 영화라고 말할 때, 그 영화의 구성이 탄탄하게 잘 짜여져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록 영화는 숱하게 많은 장면들을 찍고 또 찍어서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 숱한 영화의 각 장면들을 찍은 순서대로 보지 않는다. 영화관에 앉아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온다. 그리고 좋은 한 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을 오래도록 마음에 지니게 된다. 성서를 이런 감동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현 최종형태의 성서를 이리저리 재편집하지 않고, 지금의 모습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성서 각 책이 얼마나 잘 짜여진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최근 성서학계의 움직임

최근 나오는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학계의 연구물들을 소개하면 이상에서 말한 내용들이 성서해석학에서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날 시편연구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궁켈로 대표되는 양식비평 작업이다.

 

150편의 시들을 각 양식별로 구분해서 탄원시, 찬양시, 감사시, 제왕시…등으로 구분해 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시편 150편을 한 권으로 보고 시편의 신학을 얘기한다. 시편의 150편은 잘 알듯이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모세 오경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많은 시편의 시들이 “…의 노래”라는 표제어들이 있는데, 이 표제어들을 통해 보면 시편의 시 모음집은 중앙에 다윗의 시(51-72)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아삽의 시들(50: 73-83)이 있고, 그 앞, 뒤로 고라의 시들(42-49: 84-89)이 서로 대조적인 구성으로 짜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할렐루야 시들 역시 가장 뒤에 함께 모여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 1편(“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은 잘 외우고 있지만, 왜, 이 시가 시편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셋(토라, 예언서, 성문서)으로 나뉘는 구약성서 제3부 성문서의 첫 책인 시편 1편은 그 앞에 있는 히브리성서 제2부 예언서의 첫 번째 책인 여호수아서와의 연결을 염두에 둔 것이다(시 1:2; 수 1:8 비교).

 

또한 시 1편은 히브리성서의 구성상 바로 앞의 책인 예언서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의 마지막 주제인 ‘의인과 악인의 구분’과도 연결된다. 제2부 예언서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의 결론(말 4:4-5) 역시 제1부 토라와 제2부 예언서의 결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거의 백 년 이상을 지배해 온 이사야서의 셋으로의 구분(제1이사야 1-39장; 제2이사야 40-55장; 제3이사야 56-66장) 역시 최근에 와서는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오히려 전체 한 권 이사야서의 신학에 대한 관심이 급성장하고 있다. 다음에 할 말이지만, 이사야서 최종형태 구성에 관심을 기울일 때, 이사야서 1장, 2장의 내용들이 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서 마지막 장인 65-66장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최근 창세기 연구를 보아도, “오경을 여는 책으로서의 창세기”라는 책 제목이 보여주듯이, 최근 학계는 성서의 어느 한 권만을 보는 것에서 전체 구성 안에서 그 연관성을 찾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의 마지막 34장은 모세의 죽음 이야기이다.

 

이는 오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마지막인 50장의 야곱의 죽음 이야기와 관련이 있고,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축복을 내리는 장면인데, 이도 역시 창세기 마지막 전 장인 49장에서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의 12아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축복을 내리는 것과의 연결이다. 이것만 보아도 현 최종형태 오경의 구성이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12소예언서의 경우만 해도 각 권의 신학을 논했던 것에서, 이제는 12권을 한 권으로 보는 관심이 부쩍 일어나고 있다. 12소예언서를 한 권으로 본다는 말은 이를 지금의 순서대로 마치 일련의 시리즈물로 읽어간다는 말이다. 주전 8세기 예언서인 호세아서와 아모스서 사이에 주전 4세기로 알려진 요엘서가 왜 끼어있을까? 이를 구분하지 않고 연결해서 읽어 내려간다면 현 최종형태로서의 12소예언서 전체 구성의 신학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나가면서

지난 날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진보적 신학의 기치를 두었던 기장, 한신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역사비평방법론의 적극적인 수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돌이켜 보건데 한신의 성서해석방법론이 개교회 목회현장에서 얼마나 많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성서의 최종형태에 대한 최근 학계의 관심을 소개하면서 예전 역사비평 이전 단계로 돌아가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모세오경의 최종형태 구성의 통일성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 한다고 해서 모세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면서도 현 오경의 구성이 왜 모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보자는 말이다.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신학적 기반이 없는 개교회 교인들에게 역사비평주의적 성서찢기(?)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순수하게 성서를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가는 교인들에게 성서 전체가 얼마나 잘 짜여져 있는 지를 보여줌으로써 성서읽기에 보다 흥미와 은혜를 주기 위함이다. 나아가 이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설교가 성서본문의 의도와는 벗어난 은혜위주의 주제설교만으로 확대되어 가는 위험(?)을 줄이는 것이며, 성서의 최종형태를 전수한 성서시대 선조들의 신앙을 오늘도 이어가는데 큰 밑거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 본 글은 올 연말까지 연재형식으로 최근 성서해석학의 한 동향인, 공시적 성서해석에 있어서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연구를 평이하게 소개하는 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호에서는 성서의 최종형태 구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는 글이 될 것이며, 다음 호부터는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최근 최종형태 구성비평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2) 박경철 목사는 호서대학 신학과(1987)와 한신대학 신학대학원(1991)을 졸업하고 그해 독일로 유학을 가서 독일 괴팅엔 대학(Uni. G ttingen)과 프랑크푸르트 대학(Uni. Frankfurt)에서 수학하고 독일 빌레펠트 베텔 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에서 프랑크 크뤼제만 (Prof. Dr. Frank Cr semann)교수의 지도하에 이사야서 연구(“이스라엘의 정의와 열방의 구원” Die Gerechtigkeit und das Heil der V lker)로 2001년 7월에 박사학위 (Dr. theol.)를 취득하였다. 현재 전주대학교에 출강중이며, 전주갈릴리교회 성서아카데미 연구실장겸, 교회학교 담당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참고:
성서, 그 최종형태 구성으로 다시 읽는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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