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숨은 공신, 소양강댐

최대 수심 120m … 수도권 물 45% 공급, 한강 수위 1.7m 조절

 

 [중앙일보] 2013.10.12

 

처음에는 수력발전용 댐으로 설계

 

경부고속도로(1970년), 서울지하철 1호선(74년)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3대 국책사업의 하나였던 소양강댐이 준공 40년을 맞는다. 총 사업비 321억원이 투입된 소양강댐은 67년 4월에 착공, 6년6개월 만인 73년 10월 15일 준공됐다. 소양강댐 사업비 321억원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6614억원에 달한다(한국은행 강원본부 계산). 67년 댐 착공 당시 정부 예산은 1643억원에 불과했다. 건설 당시 소양강댐은 동양 최대, 세계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60년 4대강 유역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소양강댐은 처음엔 상공부 안대로 수력발전용 댐으로 설계됐다. 그러나 건설부가 용수 확보를 위한 다목적댐을 주장했고, 논쟁 끝에 박 전 대통령이 건설부 안을 받아들여 수정됐다. 또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설계됐으나 공사를 맡은 현대 정주영 회장이 현장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과 모래·자갈 등을 활용해 만들자고 제안해 변경됐다. 당시 철근·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 부족과 열악한 도로 사정에 따른 자재운송 문제, 비용 절감 등이 변경 사유였다. 시멘트에 비해 외부 충격에 강하다는 것도 이유였다.

 공사는 67년 4월 1호 가배수로 터널 공사로 시작됐다. 본 댐을 쌓기 위해 소양강 물줄기를 돌리는 공사다. 이 공사에서는 콘크리트 내부의 온도를 상승시키는 열(수화열)을 낮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열을 낮추지 않으면 콘크리트 내외의 온도 차이로 터널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균열이 생기면 물이 새게 되고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터널 공사에 참여했던 우지위(73 )씨는 "터널 안에 보일러 배관처럼 파이프를 설치하고 이곳으로 소양강의 찬물을 계속 흘려 보내 열을 낮췄다”고 회고했다.

 소양강댐 공사도 경부고속도로 등 다른 국책사업처럼 아침 해가 뜨기 전부터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서다. 69년 12월부터 72년 5월까지 발전소와 여수로 등의 공구장을 지냈다는 위해룡(74 )씨는 “공기에 몰려서 쫓기는 죄인처럼 항상 긴장 상태였다”고 말했다. 공기는 정해졌는데 장비가 부족하고, 시설이 열악해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발한 아이디어도 나왔다. 물을 발전소로 공급하는 수직터널 공사장엔 탄광에서 일하던 광원이 등장했다. 시공상 위에서 아래로 터널을 뚫어야 하지만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아래서 위로 함께 터널을 뚫는 방안이 도입됐다. 굴 뚫는 데 경험이 많은 광원을 활용한 이 시공법은 그 해 말 포상을 받았다.

 공사 현장에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들여왔다는 중장비가 처음 선보였다. 30여 대의 32t 덤프트럭, 진공다짐기, 굴착기 등이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국내 전체에 27대뿐인 레미콘 운송트럭 가운데 17~18대가 소양강댐 공사 현장에 투입됐으나 차량이 낡아 경사진 도로를 오르다 수시로 멈춰 섰다. 이를 불도저로 끌어 올렸다고 한다. 전기시설도 부족해 야간 작업은 트럭 헤드라이트에 의존했다. 자재를 내린 트럭이 후진할 때 “빠꾸 오라이”를 외치던 인부가 진흙에 걸려 넘어졌지만 어둠 탓에 트럭 운전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발생했다. 진흙과 자갈 등을 다지면서 기준 높이를 측량할 때는 횃불을 밝혀 눈금을 읽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직원과 인부들은 사명으로 알고 열성을 다했다고 위씨는 기억했다. 일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즐거움도 있었다. 정 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는 ‘직원 영양을 챙기겠다’며 몇 차례 직접 현장에 와 쇠고기를 구워 줬다고 한다. 때때로 맑은 소양강에서 피라미를 잡아 회로 먹었고, 현대 유니폼을 입으면 춘천 시내 어느 식당이든지 반겨주던 낭만도 맛봤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준공된 소양강댐은 수도권에 안정적인 용수공급과 홍수조절, 전력 공급 등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소양강댐은 연 12억t의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수도권 물 공급량의 45%에 달한다. 78년을 포함해 다섯 차례 전국적인 가뭄이 있던 해에도 수도권에 안정적으로 용수를 공급했다. 소양강댐은 5억t의 홍수 조절 능력을 갖췄다. 한강 인도교 수위를 1.69m까지 조절 가능하다는 것이 강원발전연구원의 분석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댐 안쪽의 최대 수심은 120m가 넘는다. 소양강댐은 20만㎾의 시설용량을 갖춰 연간 353Gkw 무공해 전력을 생산한다. 특히 73년 11월 제2차 석유파동으로 심각한 전력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소양강댐은 전국 수력발전 총량의 30% 정도를 분담하면서 전력난을 해소했다. 한국수자원공사 김종해 수자원사업본부장은 “70년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견인차로 현재까지 역할을 다해 온 소양강댐은 역사·경제적 가치가 높다”며 “댐 준공 40주년을 계기로 용수공급과 홍수조절, 전력생산뿐 아니라 국민에게 다가가는 환경친화적인 친수댐으로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맞은편으로 1.2㎞의 뱃길을 포함해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양예술관광농원. 숲에 가려 선착장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6~7분이면 닿는 곳이다. 농원 주인 최인규(56)씨는 소양강댐 건설로 수몰된 춘성군(현 춘천시) 북산면 추전리 출신이다. 76년 고교를 졸업한 최씨는 잠시 서울생활을 하다 80년 고향 근처인 청평2리 큰삼막골에 호수농원을 만들어 정착했다가 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86년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사물놀이패 김덕수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풍물패·실내악 등 다양한 공연을 열고있다. 최씨는 13일 소양강댐 40주년 기념 공연에도 친분 있는 예술인들의 참여를 주선했다. 소양강댐과 더불어 살아온 최씨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소양강댐의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관광상품을 개발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댐 주변 각종 규제에 주민들 불만

 수몰지역 가운데 가장 큰 곳이었던 북산면 내평리 내평초등학교 출신들은 동문회를 중심으로 모여 추억을 나누고 있다. 2008년까지는 10여 년간 동문체육대회를 열었고, 현재는 매년 봄과 송년이나 신년 등에 두 차례 모여 고향 얘기를 하곤 한다.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은 4학년까지 이 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동문회에 참여하고 있다. 최양대 (67·춘천시 효자동) 회장은 “후배가 없으니 규모가 점점 줄고 있지만 어느 동문회 못지않게 강한 결속력으로 재미있게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소양강댐 주변 지역에선 교통불편·기상변화 등의 피해가 많다는 주장도 나온다. 양구군은 지난 5월 국토교통부와 수자원공사에 댐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 달라는 건의문을 냈다. 양구군은 소양강댐 건설로 기존 국도가 침수되면서 춘천까지의 거리가 47㎞에서 배 가까이 늘어 주민이 재정적·시간적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인구도 1966년 4만1606명에서 2012년 말 2만2797명으로 크게 줄어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것이다. 양구군은 소양강댐으로 40년 동안 3조159억원의 피해를 봤다며 보상을 위한 관련법 제·개정 등을 요구했다.

 각종 규제에 대한 불만도 많다. 소양강댐 수면과 주변지역 등 229.89㎢가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묶여 있다. 이 지역에서는 농가의 단독주택과 초등학교 및 군사시설 등 특정시설 이외에는 건축이 제한된다. 강원발전연구원 전만식 연구위원은 “댐에 의한 편익과 피해를 형평성 있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며 “차가운 물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등 소양강댐의 콘텐트를 지역의 자원으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자원공사는 댐 준공 40주년을 맞아 12일 오전 10시 엘리시안 강촌리조트에서 국제학술세미나를 시작으로 기념행사를 한다. 세미나에는 ‘댐으로 인한 갈등해소 방안의 국제적 추세’ 등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13일에는 소양강 밑에서 정상까지 사면에 지그재그로 연결된 용너미길(1.2㎞) 걷기에 이어 댐 정상에서 각종 공연이 펼쳐진다. 댐 사면과 정상 일부에 경관조명도 설치해 불을 밝힌다. 소양강댐 준공 40주년 기념식은 18일 댐 오른쪽 광장에서 열린다.

 
이찬호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