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나이팅게일 (Nightingale, Florence)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간호사

 

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 - 1910년 8월 13일
수상 : 1907년 영국 메리트 훈장
경력 : 국제적십자 나이팅게일상 신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 창설
         1856년 영국군 야전병원 간호총감독 임명
         1954년 야전개혁으로 뒤낭의 적십자 창설의 동기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Lady of the Lamp).
1820. 5. 12 영국 플로렌스~1910. 8. 13 런던.
전문교육을 통해서 간호를 여성의 전문직업으로 확립한 영국인 간호사.
 
크림 전쟁(1854~56) 동안 터키의 스쿠타리에 있던 영국군 병원의 간호 책임자로 있으면서 야전병원의 혼잡함과 나쁜 위생 조건, 기본적인 물자 부족 등을 잘 극복하였다. 1860년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간호학교인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세웠다.
부모가 잠시 동안 살았던 플로렌스에서 아버지 윌리엄 에드워드 나이팅게일과 어머니 프란시스 스미스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나 가족과 함께 더비셔·햄프셔·런던 등지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교육받았는데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역사·철학·수학 등을 배웠으며 일생 동안 여러 나라 말로 된 많은 책을 읽었다.

 

사회생활에 별로 만족을 못 느끼다가 1837년 2월 7일, 그녀에게 어떤 사명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 사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9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병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겠다는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의 권유로 의회 보고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3년 뒤에는 영향력 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중위생과 공중병원에 관한 전문가로 간주될 정도가 되었다.

 

1846년에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에게 독일 카이저스베르트에 있는 간호사 교육기관인 프로테스탄트 봉사원회의 연감을 보내주었다. 4년 뒤 나이팅게일은 그 기관에 들어가서 간호사 교육 과정을 완전히 끝마치고, 1853년 런던에 있는 귀부인 환자들을 돌보는 기관의 간호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녀가 근무하면서 바꾸거나 새로 도입한 것들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그녀는 좀더 넓은 활동무대를 원했다.


 
1854년 3월 크림전쟁이 시작되었고 그해 9월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크리미아에 상륙하였다. 전쟁중에 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가 출판되자 영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들은 프랑스 자선수녀처럼 간호사로 봉사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서 나이팅게일도 즉시 3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3일 안에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떠날 것을 자원하였다.

 

한편 나이팅게일은 오래된 친구이자 그 당시 전쟁장관으로 있던 시드니 허버트(뒤에 허버트 경이 됨)로부터 좀더 큰 간호파견대를 차출하라는 공식적인 교섭을 받고 있었다. 터키 스쿠타리에 있는 야전병원의 간호 책임을 맡기로 하고, 1854년 10월 21일 간호파견대를 이끌고 영국을 출발하여 11월 5일 야전병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이팅게일은 쓸 만한 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들이 묵는 숙소에는 쥐와 벼룩이 들끓었고, 한 사람이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이라고는 약 0.57ℓ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식량을 사용해야 했으며, 의사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병동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도착한 바로 그날 있었던 인키르만 전투 이후 야전병원은 부상병들로 붐볐다. 각종 의료기구와 옷, 침대 등 모든 것이 부족하였으며, 복도에는 부상병들이 오물이 흘러 넘치는 속에 짚을 깔고 누워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도움을 요청받았는데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200개의 청소용 솔을 요구하였고, 그 다음에는 환자의 더러운 옷들을 병원 밖에서 세탁하도록 하였다.
 
각종 보급품은 곧 바닥이 났으나 나이팅게일은 가지고 있던 3만 파운드로 필요한 것들을 병원 밖에서 구입하였다. 해가 바뀔 때까지 물자공급을 혼자서 도맡다시피 했다. 병원을 운영하는 일과 수없이 많은 편지, 그리고 엄청난 양의 공적·사적 보고서 작성, 말을 듣지 않는 간호사 등이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어떤 간호사는 지나친 음주나 부도덕성 때문에 영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병동에서 보냈으며 그녀가 일일이 직접 돌보지 않은 환자는 거의 없었다. 저녁 8시 이후에는 그녀 자신 외에는 어떤 여자도 병동 출입을 못하게 하였으며, 야간 간호는 회복기에 있는 부상병인 임시 위생병이 맡았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 그녀는 직접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을 돌봐주고 조언도 해주었는데, 병사들은 나이팅게일을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불렀다.
 
1855년 5월부터는 환자를 간호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영국군 병사들의 복지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당시 그녀는 직접 간호사들을 이끌고 크림으로 갔으나, 발라클라바에 도착하자마자 크림 출혈열(出血熱)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그러자 평소 그녀를 시기하던 영국군 야전병원 간호감독은 그녀는 스쿠타리만 관할해야 하며 크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1856년 3월 16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정식 명령에 의해 영국군 야전병원 간호총감독으로 임명되어 그 지위가 확실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환자가 야전병원을 떠나자 나이팅게일도 곧 영국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국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그녀는 공식적인 귀국선을 이용하지도 않고 모든 공식적인 환영회도 거부하였다. 귀국하자마자 그녀는 인기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영국군의 보건과 생활환경 및 식사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이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으나 곧 어려움에 부딪혔는데 당국자들은 그녀의 계획을 아량있게 검토하였으나 일을 추진할 만큼의 열의는 없었다. 1856년 10월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과 그 부군 및 허버트의 후임인 팬뮤어 경 등과 오랫동안 면담을 나누었으며, 그 뒤 여왕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의 설립을 팬뮤어로부터 약속받았다.
 

1857년 5월에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나이팅게일은 군진의학과 병원행정의 전분야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하였으며 수많은 믿을 만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뒤에 이 자료들을 모아 개인적으로 〈영국군의 보건과 능률 및 병원관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점에 관한 보고 Notes on Matters Affecting the Health, Efficiency and Hospital Administration of the British Army〉(1858)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위원회의 활동 덕분에 1857년에 군의학교(軍醫學校)가 세워졌다. 같은 해 인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그녀의 관심은 인도에 파견된 영국군의 보건에 쏠렸는데, 1859년에는 이 문제를 위한 새로운 왕립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뒤 1868년에 인도 총독부 산하에 최고 권위의 위생국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나이팅게일은 다른 새로운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1860년에는 크림에서의 그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기부한 나이팅게일 기금 4만 5,000파운드를 가지고 성 토마스 병원에 세계 최초로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세웠다. 또한 극빈자 진료소에서 일하는 조산원과 간호사들을 교육시키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극빈자 구호소의 개혁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857년부터 나이팅게일은 병든 몸으로 주로 런던에서 살았다. 이 기간중에도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서신왕래가 엄청났으며, 해마다 침상에 누워서 신분이 높은 사람에서 미천한 사람까지 수많은 방문객을 맞았다. 그녀와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록 그녀는 인도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도의 모든 것에 대해 정통하였으며, 역대 인도 총독은 부임하기 전에 그녀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영향력있는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었다. 시드니 허버트가 임종에 처하여 그들의 일을 더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매우 매정한 편지를 보냈다.
 
나이팅게일은 진짜 병을 앓았던 것 같지는 않으며 그녀의 증상은 아마도 신경성이거나 의도적인 것 같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1901년에는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 하였다.

 

1907년 영국 국왕은 나이팅게일에게 여자에게는 최초로 메리트 훈장을 수여했다. 1910년 런던에서 죽었으며 국장(國葬)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을 사양하고 그녀의 희망에 따라 6명의 영국군 하사관에 의해 햄프셔 주 이스트웰로우에 있는 시골 교회 묘지의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나이팅게일 선서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는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I vow to God and to you that I wil live righteous and devoted to my profession.
I vow that I will never harm a life of one man in whatever situation I am at.

I will take all my effort to improve my nursing skills. I will also not involve any personal relationships or feelings into my work.
I solemnly vow that I will cooperate fully and responsibly with the preservation of human health and devote myself totally to maintain the health of my patients.

 

나이팅게일의 생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래 영국에서 가장 칭송받았던 여인은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일 것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37년 2월 7일 자신이 성령님의 지시를 받음으로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하나님과 4차례의 대화를 했다고 주장한다.

 

백의 천사라 불리는 나이팅게일의 아버지는 일 년 내내 여행을 즐기면서 곳곳을 다니다가 두 딸을 낳았는데 태어난 고장의 지명을 따서 딸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그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되었고  그녀의 언니는 파르세나피였다.


이 두 자매가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는 칼톤 호텔 1층 절반을 빌려 파티를 열을 만큼 런던 사교계에서 나이팅게일의 가문은 명문가였다.

23세의 나이팅게일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가 되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물론 그녀의 엄청난 선언에 가족들은 충격에 빠져 위장장애를 앓게 되었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녀의 말대로 하나님과 대화를 한 그녀는 히스테리 환자를 끌어들이는 신비한 능력을 겸비한 채 환자들을 간호하였다.

간호사가 된 그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7시까지 일하고 하루 3끼 식사는 죽과 스프였으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성경을 낭독하였다.


이렇게 힘들고 냉혹한 생활은 몽상에 빠진 그녀에게 해독제나 다름이 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어머니는 그녀를 결혼시키려고 했었고, 나이팅게일이 25세가 되었을 때 헤리 니콜슨이란 사촌이 청혼을 하였지만 나이팅게일은 결혼을 거부하였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봉사하기 위해 간 곳은 빈민보호시설이었으며 그녀는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 그곳의 경비를 반으로 줄였다. 이일을 계기로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전쟁담당 장관 시드니 허버트를 통하여 터키의 육군병원의 책임자로 임명받아 백의 천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바자회를 열기 위해 모아진 타임지의 기금 3만 파운드의 돈으로 나이팅게일은 영국 육군 간호부를 창설하고 간호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옷을 사주고, 먹이고, 그들의 집으로 편지를 쓰게 하고, 그들의 유서를 써주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묻힐 수 있도록 그 돈을 썼다.


한 밤중에 그녀는 램프를 들고 백색도료로 칠해진 4마일 길이의 스크타리 병원 병동을 회진하기위해 떠났다. 그 순간 감격한 환자들은 그녀의 그림자에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나이팅게일은 ‘스펙데이터’ ‘펀치’와 같은 잡지에 이르기까지 영국 모든 신문 기사에서 빛나고 반짝거렸다. 쇼핑바구니에 사진이 실리고 도자기에 그녀의 얼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거리와 아이들의 이름에도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나이팅게일이 열병을 앓았을 때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놀라고 고뇌했다.

세상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나이팅게일에게만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평민들의 영웅처럼 숭배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다.” 할 만큼 열정적으로 일을 하였다. 그녀는 인도의 위생 상태에 대한 개선을 지도했으며, 성 토마스 병원에서 나이팅게일 간호훈련 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성 토마스 병원의 간호학교를 찾아오는 젊은 소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노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영국 정부로부터 첫 여성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히스테리 환자에게 치명적인 나이로 여겨지는 한가롭고 무료한 90세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아마 그녀가 간호사가 아닌 정치가였다면 영국 최초의 여자 수상인 대처수상보다 더 먼저 수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환자들에게 백의 천사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What the horrors of war are, no one can imagine. They are not wounds and blood and fever, spotted and low, or dysentery, chronic, and acute, cold, and heat and famine. They are intoxication, drunken brutality, demoralization and disorder on the part of the inferior… jealousies, meanness, indifference, selfish brutality on the part of the superior.

전쟁의 공포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부상도, 피도, 열병도 아니다. 얼룩진 오염과 비천함도 아니다. 이질도 만성질환도 아니다. 심한 고통도 아니고 추위와 더움, 그리고 기근도 아니다. 전쟁의 공포는 열세에 있는 측에서는 흥분, 술에 취한 잔인성, 타락, 그리고 무질서다. 유리한 측에서는 시기, 비열함, 잔인함, 이기적인 만행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 : 영국 간호사, 교육자-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의 숭고함은 전쟁을 반대하고 부상자에게는 아군과 적군이 없었다는 점에서 비롯합니다. 나이팅게일의 이 명언은 명언이기보다 전쟁의 참혹상이 뭔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전쟁 속에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낭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아름다운 자태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병사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자태와 목소리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주 독해야 합니다. 단호한 의지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팅게일이 그 일을 수행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칭송을 받는 것이죠.

전쟁은 모든 것을 합리화시킵니다. 살인, 강간, 살육조차 정당화시킵니다. 이러한 것들은 전쟁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입니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와는 다른 겁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잔악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사회에서도 전쟁은 벌어집니다. 그러나 전쟁처럼 같은 종(種)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쟁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은 왜 하는 것일까요? 아마 이득을 취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전쟁이 아니었을까요?

‘혹성탈출(Planet of Apes)’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흥행에 성공해 아마 3탄도 등장한 것 같습니다. 훌륭한 정치가이면서 원로 과학자인 한 원숭이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대단한 천재들이야. 그러나 그 천재성 뒤에는 잔인함이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은 무능해야 하고 유능한 놈은 도태시켜야 하는 거야!” 전쟁은 천재들이 저지르는 건가요?

 
나이팅게일은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크림(Crimean)전쟁은 크리미안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크림은 러시아의 흑해와 연결된 반도입니다. 대부분 세계적인 전쟁이 반도(peninsular)에서 일어납니다. 이유는 대륙과 대륙을 이어주는 것이 반도이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이어주는 것도 반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의 운명은 기구합니다. 역사의 흥망성쇠(rise and fall, up and down)가 반도에서 나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가 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을 잃을 때는 갈갈이 찢어지고 분쟁의 씨앗이 잉태되는 곳입니다.

중국과 일본을 둘러싼 분쟁도 그렇고 서세동점의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했을 때도 우리의 한반도가 열강의 분쟁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이 중요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조센징(朝鮮人)’이라고 욕하지만 먹물이 든 일본 학자들은 우리를 ‘반도인’, 또는 ‘반도민족’이라고 비하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는 민족, 살기 위해서 나라를 파는 민족, 단결력이 없는 민족, 그래서 열등한 민족,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사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전쟁은 대부분의 종교 전쟁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가장 이기적인 속성에서 분출되는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전쟁(war)이지만 위대한 정치가에게는 전쟁게임(war game)입니다. 종교는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 훌륭한 구실이 됩니다.

크림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폴레옹이 패한 것은 러시아 원정 때문입니다. 이후 러시아 세력이 유럽을 지배할 정도로 강해집니다. 러시아에는 러시아 정교라는 게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몰린 종교입니다. 그리스에는 그리스 정교라는 게 있습니다. 역시 이단으로 몰린 종교죠.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터키(투르크)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유럽진출을 노린 러시아는 비슷한 종교를 믿는 그리스 정교의 그리스를 보호하자는 명목으로 포문을 열었는데, 로마 가톨릭의 프랑스, 영국, 독일 등 모든 유럽이 러시아에 맞섭니다. 크림 전쟁이죠. 여기에 우리의 아름다운 여성 나이팅게일이 등장합니다.

“The martyr sacrifices themselves entirely in vain. Or rather not in vain ; for they make the selfish more selfish, the lazy more lazy, the narrow narrower(자신을 희생하는 순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자신을 더욱 이기적으로 만들고, 더더욱 게으르게 만들고, 마음을 편협하게 만든다).” 기독교의 순교든 이슬람의 성전(Holy War)이든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죽음과 전쟁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러시아 이야기 조금만 더 할까요?

야심가 나폴레옹이 패망한 것은 러시아 원정 때문입니다. 나치의 히틀러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비참한 생애를 마친 것도 러시아 원정에서 독일 병력의 3분의 1을 잃으면서 전쟁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미국이 동참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대전을 종식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레닌그라드 전투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겁니다.

히틀러의 가장 무서운 적은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였습니다. 나폴레옹도 같은 생각이었죠.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않고 유럽을 지배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러시아를 정복한 나라와 영웅은 없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몽골의 징기스칸이 러시아를 정복했습니다.

어쨌든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에 불쾌합니다. 이차대전의 유럽을 해방시킨 것은 영미의 노르망디 작전이 아니라 레닌그라드 전투인데 공(功)은 미국과 영국이 다 가져갔다고 불쾌해 합니다. 우리도 이차대전은 유명한 노르망디 작전으로 독일이 패망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때로 전쟁사(史)를 읽어 보세요. 참 재미 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시와 낭만을 좋아하는 새(영어로 나이팅게일은 참새목 딱새과의 소형 조류를 뜻한다)와 같은 예쁜 여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칠고 의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I think one’s feelings waste themselves in words ; they all to be distilled into actions which bring results(사람의 감정이 말로써 자신을 소비하고 있다. 그 감정들은 좋은 결과를 줄 행동으로 변해야 한다).” distill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증류하다, 좋은 것으로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The very first requirement in a hospital is that it should do the sick no harm.” 좀 의역해 보겠습니다. ‘병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런 뜻인 것 같네요.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 종교, 철학이 아니라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다.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먹을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출생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플로렌스입니다. 영국과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의료시설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유럽ㆍ이집트 등지를 견학하고 귀국 후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됩니다.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34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로 가서 야전 병원장으로 활약합니다. ‘광명의 천사(The Lady with the Lamp)’로 불립니다. 1856년 귀국 후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 바 있고 1860년에는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하여 각국의 모범이 됩니다.

바바크라바와 잉커멘의 전투에서부터 부상당한 군인들의 진료를 시작으로 1만여 명의 부상자들에게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단 5개월 동안 병원에서의 사망률을 42%에서 2%로 줄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초인간적인 불굴의 노력은 전 군인들을 감동시켜 '크림의 천사'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활동은 앙리 뒤낭의 적십자 창설의 동기가 됐습니다. 승전국인 영국은 그녀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으로 크림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과장은 좀 있습니다. 그러나 승전국의 권리입니다. 국제적십자에서는 ‘나이팅게일상(賞)’을 마련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해 표창하고 있습니다. ‘나이팅게일 선서(Florence Nightingale Pledge)’는 간호사의 좌우명으로 유명합니다.

“I solemnly pledge myself before God and in presence of this assembly to pass my life in purity and to practice profession faithfully. I will abstain from whatever is deleterious and mischievous and will not take or knowingly administer and harmful drug. I will do all in my power to elevate standard of my profession, and will hold in confidence, all personal matters committed to my keeping, and all family affairs coming to my knowledge in the practice of my calling. With loyalty will I endeavor to aid the physician in his work and devote myself to the welfare of these committed to my care”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나이팅게일 선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문과 충실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의지의 여성입니다.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밤에만 우는 아름다운 새가 될 수 없습니다. 피와 썩는 고름냄새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생명의 존귀함에 투신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새인 나이팅게일과 포탄을 마다하지 않고 전장을 누볐던 거친 여성 나이팅게일의 공통점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있다면 외롭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점입니다. 간호사 나이팅게일을 새인 나이팅게일과 접목시키려는 것도 그러한 의도가 아닐까요?

나이팅게일은 오늘날의 간호사가 있게 한 장본인이지만 사실 그녀는 전쟁터에서 2년 동안 일했고 그때 얻은 병으로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을 환자로 지냈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하는 것처럼 사악하고 모진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목숨을 바쳐 남을 구하려고 하는 희생정신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인간 사회의 모순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조화라고 할까요? 그러면서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살 겁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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