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을 위한 복음 


글 /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인류 역사가 도시화의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도시화가 시작된 서구의 경우 기독교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서구화를 추구하는 비서구세계에도 점차 확산되고 있어서 도시선교의 성패에 기독교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화의 메가 트렌드


도시화(urbanization)란 기본적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또는 소도시에서 대도시로의 인구 이동현상을 의미하지만, 도시가 확장되면서 주변의 농어촌을 잠식하는 도시확산 또는 농어촌의 도시화도 포함한다. 도시는 고대부터 존재하였으나, 도시화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거대한 전 세계적 흐름이 되었다.

 

이 현상은 산업화(industrialization)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산업화가 시작된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하여 산업화를 추구하는 모든 국가들로 확산되고 있다. 서구의 경우 이미 20세기 초에 인구의 과반수가 도시로 이주하였으며, 세계적으로도 1950년에 28%이던 도시인구가 2000년에는 55%로 증가하였고, 인류의 과반수를 점하는 경제 후진국들이 산업화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21세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 살게될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산업화를 추진한 60년대 이후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어 오늘날 수도권에만 인구의 45%가 살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5만 이상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전 인구의 80%를 넘어섰다.

비록 도시화가 포화상태에 접어들면 대도시의 비인간적 생활환경에 염증을 느끼고 탈도시화가 진행되지만, 그것이 결코 도시를 떠나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중심에서 변두리로 이동하는 교외화(suburbanization)여서 도시화가 중단되거나 역행할 징후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도시화는 거부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메가 트렌드이며, 경제 선진국과 중진국이 주도한 20세기의 도시화는 21세기에 전세계로 확산될 것이어서 금세기는 인류역사상 도시화가 극치에 이르는 ‘도시화의 세기’가 될 것이다. 

도시화와 세속화


도시화가 시작된 서구의 경우, 서구교회는 예외 없이 세속화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세속화를 결과하는가? 세속화(secularization)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그것은 서구교회에 관한 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20세기 초에는 서구 모든 국가들에서 거의 전 인구가 기독교인으로 출발하였으나, 20세기 말에는 모두 인구의 반수 이하로 감소하였다.

 

그뿐 아니라, 서구교회는 많은 명목상의 신자 혹은 문화적인 기독교인을 포함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쾌락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경적인 신앙이 상당히 오염되었고,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감소하여 지엽화되었다. 물론 20세기에는 도시화 외에 다양한 운동들이 발생하였으며, 세속화는 그 복합적 결과이므로 도시화에만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서구의 세속화를 연구한 오웬 채드윅은 도시화가 세속화를 결과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오히려 도시화가 복음화를 활성화시켜 기독교인이 급격히 증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50년대에 기독교인은 5%에도 달하지 못하였으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된 60년대 이후 매 10년마다 2배 혹은 3배씩 증가하여 오늘날 전 인구의 약 25%가 복음화되는 급성장을 이룩하였다. 특히, 도시가 시골보다 5%이상 복음화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이례적이며 90년대에는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도시화가 반드시 세속화를 결과한다는 주장에 하나의 강력한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개발도상국가 혹은 비기독교국가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미국의 경우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운동으로 기독교의 급격한 감소추세가 둔화되고 거의 동수를 오랜 기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반박될 수 있다.

 

따라서, 도시화가 반드시 세속화를 결과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교회의 각성과 전도운동, 그리고 적절한 도시화 대응방안을 통하여 상당히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도시화의 초기단계를 제외하고는 도시화에 역행하여 교회가 오히려 성장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어서, 도시화가 분명히 복음화를 어렵게 하고 세속화를 부추기는 요인으로서 교회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교회의 대응


그러면 교회는 도시화의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는 먼저 도시화로 인해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하였던, 그러나 상당히 적극적으로 도시화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미국교회의 선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유럽으로부터 도입된 산업화와 함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880년에는 25%, 90년에는 33%, 1900년에는 40%가 도시화되었으며, 20세기 초에는 인구의 과반수가 도시에 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도시화는 청교도시대 이후 거의 완전한 개신교국가였던 미국의 신앙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으며, 대거 도시로 떠남에 따라 시골교회는 황폐화되었고 도시로 이주한 교인들도 더 이상 교회를 출석해야 할 사회적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교회를 대거 이탈하였다. 한편, 카톨릭국가들로부터의 대규모 이민들이 도시에 정착하면서 개신교회는 도시에서 절대적 우위를 상실하였다. 미국교회가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교회는 도시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책들을 마련하였다.


첫째로, 도시와 도시목회를 이해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865년에 예이트만(James S. Yeatman)은 「연구 회람(Circular of Inquiry)」이라는 책자를 배포하여 도시 사역자들의 도시 이해를 주도하였으며, 그 결과 도시사역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전문기구가 탄생하였다. 유럽의 선례들을 연구하고 도시 복음화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면서 매월 전문잡지를 발간하였다. 대학의 지성을 모르고 대학선교를 하려고 한다든지, 병원의 구조를 모르고 병원선교를 하려 한다든지, 농촌의 특성을 모르고 농촌선교를 하려는 것이 잘못된 것과 같이, 도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도시목회를 하려는 것은 근본적인 실패요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도시 이해는 도시선교의 성공에 결정적이다.

둘째로, 도시의 빈민을 돕기 위한 구제사역을 전개하였다. 산업화된 도시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였으나, 그들은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대개 도시의 빈민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교회의 따뜻한 사랑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영국의 도시화에서 형성된 구세군이 이 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빈민들이 교회출석을 꺼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대중을 교회당 안에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리로 나간 구세군은 구제사업에 헌신하였으며, 1880년 미국에 도입된 구세군은 급성장하여 빈민구제의 대표기관이 되었다.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는 영혼구원만을 제공하는 전통적 교회에 ‘사회복음의 신학’을 주장하여 통전적 복음과 전인적 구원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미국교회들이 도시적 상황에 맞는 교회로의 구조전환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다양한 디아코니아 사역을 시행하는 ‘기관교회(institutional church)'들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자면, 뉴욕의 파크회중교회는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교회를 짓고 예배실 외에 강의실, 도서실, 체육관, 무료 목욕실을 비롯한 사회봉사 시설들을 갖추었으며, 당시 미국 최대의 교회로 성장한 필라델피아의 침례교 템플교회는 특히 노동자들을 위해 다양한 야학을 제공하였는데, 여기에 10만명 이상이 참여하였으며 후에 템플대학교로 발전하였다. 또한, 보스톤의 모간기념 감리교회는 장애자나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공장을 운영하였는데 거대한 굳윌산업으로 발전하였고, 뉴욕의 성 죠지 감독교회는 여섯가족 밖에 남지 않아 문을 닫아야 될 상황에서 기관교회로 전환하여 5천명의 성도를 가진 교회로 발전하였다.

셋째로, 전도집회를 통하여 대대적인 도시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전도운동가 무디는 ’물이 언덕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가장 높은 언덕이 대도시들이다. 만일 우리가 도시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가 전국을 움직일 수 있다‘고 외치면서 도시복음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YMCA도 노방전도에 앞장섰다. 또한 인정이 매마른 도시에 사는 도시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는데, 심방과 축호전도를 위해서 여성사역자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안수없는 사역의 위임을 인정하지 않는 서구교회의 전통에 따라 여성안수가 요구되었고 점차 허용되었다.

넷째로, 도시문화에 맞는 예배와 설교의 현대화를 시도하였다. 도시인은 도시의 화려함과 다양한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안목이 높아져 교회의 구시대적 예배에 흥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도시 교회들은 간판과 장식을 바꾸고 예배당의 인테리어를 고급화하며 음악가와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고도의 수사학을 이용한 웅변적 설교가 등장하였다.

다섯째로, 기독교 교육운동이 발생하였다. 교회의 미래는 후세 교육에 달려있기 때문에, 아직 도시화의 병폐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들의 교육에 역점을 두고 ’주일학교‘운동을 강력히 전개하는 한편, 개교회들이 혹은 몇 교회가 공동으로 기독교학교들을 대대적으로 설립하여 신앙적인 인간 형성에 교회와 학교가 협력하였다. 여섯째로, 치유운동과 성령운동이 전개되었다. 도시화는 많은 병폐를 야기하며, 빈민들은 충분한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유를 중심으로 하는 이단종파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발생하여 큰 인기를 얻고 급성장하였다. 또 이 시기에 오순절운동이 발생하여 소외되고 매마른 도시인들에게 신비적 체험을 제공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물론 이런 대응들은 지금부터 한 세기 전 미국교회가 처음으로 도시화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취한 방법들이지만, 그 후에도 기본적인 대응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빌리 그래함도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도시들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개최함으로서 전략적으로 도시의 세속화를 방지하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현대의 예배갱신운동도 일관된 대응책이지만, 오늘날 소그룹운동이나 제자훈련은 도시화가 심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소외와 비인간화, 그리고 개인주의를 치유하려는 보다 현대화된 방법이다.

한편, 한국교회의 경우는 도시화가 전혀 위기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화의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거의 완전복음화 상태에서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한 명목상의 신자가 많았던 미국교회의 경우는 주거이동이라는 대변화 속에서 감소의 위기에 봉착하였지만, 한국교회는 성장 도상의 어리고 열심있는 교회로서 도시로 이주하였을 때 이탈하는 교인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외로운 타향살이에서 교회는 고향친구들이 만나서 교제와 위로를 나누는 장 혹은 도시생활에 적응하는 문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도시교회들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시골에서 올라온 신실한 교인들로 크게 강화되었으며, 특히 배타적인 토박이들의 교회보다 외지인들이 세운 개척교회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시골교회는 교인들을 잃고 크게 약화되었으나, 도시교회들의 동정과 지원을 받았다. 미국교회의 대응방법들과 비교해 볼 때, 한국교회는 강력한 전도운동과 성령운동을 전개한 점은 일치하지만, 다른 세가지 방법에서는 크게 다르다. 구제운동이나 산업선교는 극히 제한적으로 시행되었고, 교육운동의 경우 교회교육은 강조하였으나 기독교학교운동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감퇴하였다.

 

특히 현대 도시라는 특수상황을 이해하고 도시선교에 임하려는 노력이 거의 전무하였으며, 이것이 도시화의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크게 미흡한 이유라고 관측된다. 실로, 도시교회들은 개교회 성장에 전념한 나머지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도시의 의미를 이해하고 복음의 상황화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진력하지 못하였다.

도시의 의미


프랜시스 쉐퍼는 <도시속의 죽음>에서 에레미야가 도시에 죽음이 있다고 외쳤으며, 그것은 우리 시대에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지만 인간과 인격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도시와 시골의 차이는 단지 사람수가 많고 적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구의 집중은 사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그것은 영적인 측면을 포함하여 인간의 삶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도시사회학을 기초한 시카고학파는 적고 동질적인 시골에 비해 도시는 크고 이질적이며 비인격적이라고 비교하면서, 인구의 대규모 밀집은 구조적으로 친밀함이나 깊이가 없는 피상적이고 단기적인 인간관계를 결과하며 가족과 친척관계를 약화시키고, 끝없는 경쟁심으로 서로를 침해하고 자기방어에 급급하여 외롭고 허무한 삶을 살게 만들며, 범죄와 정신질환이 급증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부정적 도시관에 반대하여 다른 이론들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도시와 시골이 그 구성요인에서 다를 뿐 오히려 도시에서 더 풍요하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기회를 만날 수 있으며 긴밀한 인격적 관계가 가능하다는 구성론과 도시에는 출신 지역과 문화, 그리고 교육수준과 직업의 차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다문화론이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도시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성경에서 최초의 도시는 가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가 두려워 자기보호와 독립적 번영을 목적으로 에덴의 동쪽에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개발하였다. 또한 함의 아들 니므롯도 노아의 저주에 대항하여 도시를 건설하였고, 결국 최대의 도시 바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분열되고 파괴되었다. 따라서, 쟈크 엘룰은 <도시의 의미>에서 도시와 저주, 도시와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미 건설된 도시에서 단순히 살 수는 있으나 그것을 확장하는데 참여하지는 말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니느웨에서 최초의 도시구원을 볼 수 있으며,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도 성전과 함께 멸망하고 우리에게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일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신의 도시>에서 도시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도시와 자기를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고 분류하고, 인간의 도시는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으므로 신의 영원한 도시를 소망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한편, 세속화 신학자 하비 콕스는 <세속도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천상의 도시를 기다리지 말고 세속화와 도시화의 융합으로 발생한 세속도시를 신의 도시로 수용하고 선교적 자세로 임하자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적 관점에서 두 도시를 다 포기할 수 없다. 종말론적으로 천상의 예루살렘을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지상의 도시들을 사랑해야 한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사랑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도시와 도시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도시는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두 가능성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도시의 성화를 통해 세속도시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만드는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은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차이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웨인 믹스는 <최초의 도시 그리스도인들: 사도 바울의 사회적 세계>에서 바울이 얼마나 도시를 사랑하며 도시 중심으로 선교했는가를 설명한다. 도시 자체는 많은 사회학적,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으나, 선교적 동기에서 도시를 사랑하고 도시목회에 헌신하는 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인을 위한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지만 대상과 상황에 따라 네 개의 복음서가 출현하였듯이, 복음의 본질은 시골사람이나 도시사람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도시라는 특수한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강조되고 실현되어야 할 복음의 특성이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설명한 도시 이해에 기초하여, 과연 도시인, 도시교회, 도시목회가 하나님의 소명으로 실현해야 할 복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그것은 화해의 복음이다. 같은 방언을 사용하고 같은 학교를 다니며 생활이 거의 비슷한 시골과 달리, 도시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도시에는 다른 사투리를 사용하는 다양한 지역민들이 공존하고 국제화가 되면 다른 민족과 인종도 함께 살게 된다. 교육수준과 경제적 능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크게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한다. 따라서, 같은 도시 안에 각종 차별이 발생하고 끼리끼리 어울리는 파편화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죄악으로 야기된 모든 분열을 철폐하고 성령 안에서 인류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오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차별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빈부 귀천을 비롯하여 모든 죄악적 분열을 무너뜨리고 화해의 복음을 실현해야 한다. 물론 시골교회에도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해의 복음은 특히 도시교회의 소명으로서, 구속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오히려 일부 지역민이나 사회적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선호되는 교회는 복음에 역행하는 잘못을 범한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외적인 차별이 철저히 무시되고 성령 안에서 모든 사회 계층의 하나됨과 평등함이 인정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사랑의 복음이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 도시로 몰려들지만, 도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여 빈부격차를 비롯한 각종 격차들이 발생한다. 부자동네와 달동네가 공존하는 곳이 도시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정 파탄과 자살과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복음은 사랑을 지상 명령으로 요구하며, 그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사랑이다. 교회가 이와 같은 사명을 외면하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급기야 외면당하게 된다. 도시목회 전문가인 로저 그린웨이교수는 도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전인적 접근방식(holistic approach)이라고 강조한다. 영적인 구원뿐 아니라 육적인 구원도 필요하다. 도시화의 희생자들인 약자들을 찾아 돕고 도시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교육하며, 도시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교제의 복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낮선 이웃으로 가득 찬 도시생활에서 우리는 친구와 이웃을 상실한다. 도시교회는 이와 같이 고독한 도시인들에게 친구와 이웃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교제를 요구받는다. 그리스도인이 계속 고독을 느낀다면, 그것은 교회의 책임이다. 고독을 떨쳐 버리는데 필요한 친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도시교회는 과거의 농경사회와 같이 전체적으로 모여 예배드리고 헤어지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소그룹으로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진정한 친구와 이웃과 형제자매가 되어야 한다. 고독한 도시인에게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교제가 아니라 진실하고 인격적이며 실제적인 교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고독과 함께 그 결과로 발생한 자기중심성과 개인주의라는 암적 질병도 치료할 수 있다. 실로, 도시인들에게는 더 많은 상담과 교육이 필요하다.

넷째로, 그것은 치유의 복음이다. 도시의 지나친 경쟁과 물질적 허영, 그리고 향락문화와 자연의 상실은 도시인을 병들게 만들고 피곤과 무의미, 정신적 황폐와 비인간화를 결과한다. 그러므로, 도시교회는 도시인의 마음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확신함으로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며, 물질주의와 향락주의를 초월하는 영적 자유함을 얻음으로서 그리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인간성을 실현함으로서 정신적 치유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도시 안에 자연 환경을 조성하며 도시를 떠나는 연습을 통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자에 대한 감사를 회복할 수 있다. 교회 구조나 정원, 실내장식 등을 통해서도 이를 반영할 수 있다. 또한, 도시에서 가정은 잠자는 곳으로 전락하기 쉬우며 가족관계는 약화되고 심지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가정의 치유가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도시의 각종 병리 현상을 치유하는데 앞장서며, 비윤리적인 문화를 추방하는데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다섯째로, 그것은 기쁨의 복음이다. 온갖 향락문화가 넘쳐 나는 도시생활은 그 상업성으로 인해 타락을 조장하고 감성을 둔화시킨다. 도시인들은 호화스러운 상품들을 쇼핑하고 재미있는 대중문화를 즐기며 불야성의 밤문화도 향유하지만, 그와 같이 영리에 이용당하는 기쁨은 순간적일 뿐 환상이 깨면 허무와 우울에 빠져든다. 교회는 그들에게 복음이 주는 참된 기쁨을 주어야 한다. 예배와 설교가 도시인에게 참다운 의미와 기쁨을 제공하도록 변화되어야 하며, 중독되고 둔감해진 감성과 의지를 순화시켜야 한다. 그뿐 아니라, 힘들고 지친 도시인들에게 인생의 행복감을 회복시켜 힘차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실현하며 살도록 신앙의 용기와 헌신을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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