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원론[宣敎學 原論] 


채은수 지음  


제1장 선교신학의 발전


21세기를 향한 선교 신학을 세가지로 전망한다면. 첫째 변화속에 연속성 추구, 둘째 협력, 폭 그리고 특이성의 추구 마지막으로 역사 가운데와 그 지평 너머의 하나님 나라 추구이다.


1. 변화속의 선교신학 

세계선교는 역사의 진공 가운데 성취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독일 윌링겐 대회에서는 세계 상황은 타 신앙들과 혁명적 세력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었지만 교회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진취적으로 나아가기보다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선교의 열쇠되는 개념은 하나님 선교2)였다. 교회를 사도적 보냄의 기능보다 왕국의 기대라고 함으로 변경을 넘어가는 보내는 종래의 선교 개념을 폐기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왔으나 아직도 충만히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선교를 이데올로기화함으로 선교사상을 크게 변형시키고 말았다.
맥가브란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선교이다라고 함으로 파송의 개념을 망각한 웁쌀라 대회의 결의는 불신의 20억이라는 인구를 배반한 것으로 규정지었다. 교회는 선교이고 교회가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선교이다는 개념은 장미빛 인생이라고 맥가브란은 지적했다.


그는 선교의 정의를 복음을 선포함, 사람을 설복하여 그리스도를 수용케 하여 그의 제자가 되게함, 교회의 삶에 책임적으로 참여케 함이라 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은 선교와 전도를 구분했다. 전도는 교회가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복음을 전도함인데 그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가 제공하는 예배, 친교, 교육, 봉사, 증거의 삶에 참여케 되는데서 이루어진다. 선교는 교회의 영향력 넘어의 지역에 그런 제공들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주께 순종을 하지 않는 그런 지역에 사람을 보내어 일함을 의미한다.


2. 선교신학의 위치
15세기는 선교를 교회 주변에만 관심을 가진 전도정도로 생각하였고, 기구적인 교회 봉사와 교구적이고, 국내적인 사역 즉 실천신학에 관심을 두었다. 바빙크는 선교학을 실천과목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의 선교학 개론에서는 독립을 강조하였다. 라너는 선교를 기존의 교회가 아닌 선교지의 자 확대교회에서 교회의 자 실현이라고 했다. 윌리암 케리는 선교는 주의 명령을 순종함이라고 하였다.(마28:16~20) 선교의 의무는 찬성과 반대의 진지한 시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위해 내적으로 항상 싸우는 것으로 보았다.  선교신학의 이론은 조직신학과 병행하여 연구함이 필요하다. 즉 조직신학의 교의학,교회사, 변증학은 선교학에 가치가 있다.
디엠은 선교 신학을 조직신학 즉 삼위일체와 종말론을 교리의 과목내 둘 것을 강조한다.


3. 하나님 나라 위한 선교신학
19세기 선교는 미국의 부흥운동과 유럽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크게 입었다. 자유주의쪽에선 선교사업에 대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경건주의적 신학적 사고는 영혼구원중심적이고, 이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사고가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근본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육체적부활, 성경의 무오성, 주의 재림을 믿음의 요체로 보고 자유주의로부터 교회를 구원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났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거의 근본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영혼구원 중심, 세계를 부정하는 차세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사회적 행동과 선교에 자극을 주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의 화해나 치유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죄를 회개케 하며 선교를 주도하고 인도하는 성령에 인도함을 받아 교회를 심고 성장시키며 교회지도자를 양성하는 이 선교적 과업에 매진해야 한다.

 

 

제2장 선교를 왜 해야 할까? 
 
1. 선교의 요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에 따라 예수의 구원과 은사를 받도록 사람을 부르는 사역이다. 선교를 좁게 말하면 전도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스토우는 전도를 하나님의 목적에 모든 인간이 순복하도록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을 제공하는 행위이다.


2. 선교의 요청(要請) 
  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요청이다. 
  ②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요청이다. 
  ③ 은혜 입은 자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요청이다.  
  ④ 이방 세계의 상황에서 오는 요청이다. 
  ⑤ 이방 세계가 스스로 구원을 갈망하는데서 오는 요청이다.


3. 선교와 선포(宣布) 
   ① 구원의 선포이다. 
   ② 부름의 선포이다. 
   ③ 증거의 선포이다. 
   ④ 만유의 왕이신 주의 행차의 선포이다.


4. 선교의 장애(障碍)
20세기 후반기에 구미 교회들은 세계 선교에 대해 비관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자체 문화에 대한 회의(懷疑)이며, 폭넓은 관용주의, 문화 상대주의이다. 문화 상대주의란 한 문화의 옳고 그름을 가릴 객관적인 규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이다. 기독교 선교를 방해하고 있는 사고 방식에 대한 생각은, ① 기독교와 서방 문화는 별개의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 선교가 이방에서 강한 지역 교회 설립과 문화적인 향상을 도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방인들이 미신과 무지에서 깨어나 우주적 윤리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선교 운동의 열매이다.② 성경적인 변화가 이방에 요구된다. 이방인의 문화가 가져올 소란을 두려워하여 선교를 기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어 은혜 안에서 성숙한 심령은 그 사회와 문화 변혁에 긍정적인 추진자가 된다. 아직도 사단의 세력 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복음을 고대하고 있다.

 

 

제3장 선교와 바른 동기


버카일에 의하면 선교의 동기에는 순수한 동기가 있는가 하면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있다.

① 순종의 동기가 있다. 선교는 주를 순종하는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② 사랑, 긍휼, 자비의 동기이다. 이방인을 가리켜 소망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라 하였다(엡2:12) 이방인에게 사랑과 자비, 긍휼을 보이는 주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교량이라 할 수 있다.

③ 영광의 동기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힌 바 된 성도가 그분의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해 선교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④ 종말론적 동기이다.

⑤ 화급의 동기이다. 세월을 아끼라(엡5:16) 시간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인간에게는 무한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죄라고 하였다.

⑥ 개인적인 유익의 동기이다.  과거 역사를 통하여 불순한 동기에서 선교를 추진하였던 것이 있다. ① 제국주의와 결탁하였던 서방의 선교 실행이다.② 문화적동기이다. 선교는 문화전달에 기여하였다. 서방 문화의 가치는 선교에 의하여 식민지역에 이전되었다. ③ 상업적인 동기이다.④ 교회 식민주의적 동기이다. 복음을 수용한 토착교회는 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맹목적으로 선교한 교회의 형태를 좇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이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

 

 

제4장 선교란 무엇인가?

       

Mission이란 말은 파견, 사명, 위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교가 개인적인 보냄, 위임, 사명일 수는 없다. 그것은 교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선교를 불신 세계에 대한 교회의 임무라고 본다.
해외, 이방, 내국, 대중선교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내진 자, 순례자, 나그네, 증인, 선지자, 종, 소금, 빛이다. 이런 선교의 개념은 하나님의 선교의 그것과 일치한다.

Missions는 신약시대 교회가 변경과 그의 직접적인 복음 영향권 그 너머에 공인된 사람을 보내어 복음의 빈곤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과 타신앙 내지 무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속한 단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가 되는 기능적이고 번식적인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복음화는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우선시되는 사역으로서 회심자를 만들려는 결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적합하고도 지적인 언어와 설복적인 방법으로 성경에 계시된 바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권위적으로 선포하는 일을 말한다.

기독교화는 복음화 따라야하는 사역이다. 믿는 자로 하여금 복음과 기독교의 윤리로 무장시키는 일이다.
사회화는 개인 신자로 하여금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 기독교 공동체가 인정하는 기독교의 이상, 모범, 제도에 부합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선교의 개념과 정의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마9:35, 10:8에서는 선교는 ① 복음전파와 병치료에 전념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즉 고통의 세계에로 가지고 오는 일이다. ② 예수님이 대중을 긍휼히 여기심을 본다. ③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을 보낸다고 하셨다. ④ 제자를 보내셨다. 그의 선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한 구속을 주는 것, 악한 마귀를 내쫓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를란도 코스타스는 선교를 선포이며, 제자를 삼는 것, 활동하는 것, 복합적 성장과 해방이다. 존 모토는 교육, 의료, 사회 구조에 대한 투쟁 등의 사업을 더 큰 전도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선교는 축하이다, 승리적인 상황을 축하함이고 교회를 축하함이며 예배의 연속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선교는 하나님께서 그 기원을 두고, 하나님은 세상에 오시기 위해 변방을 가로질러 오신 선교사이다(성육신) 비세돔은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임을 의미한다. 또한 선교신학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는 선교의 목표이며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선교를 교회를 세우는 일이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두며,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역사에서의 구원 행위는 사홰적 일로만 불가능하다.  구원 역사는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된다. 
       

칼 바르트의 선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화해 사건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선교에 있어서 인간은 구원을 얻도록 초청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증인이 되게 하는 부름에 초청되는 것 뿐이다. 
       

구스타프 바네크는 비기독교인 사이에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도모하는 전체적인 일이다. 복음 선포를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에 연관시켰다. 
       

월터 프레이탁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관찰하려는 그 분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 선교라고 하였다. 
       

해롤드 쿡은 선교사라고 부르는 선택된 일꾼들의 그룹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인도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이다. 선교는 교회의 일이며, 다른 사람을 얻으려는 교회의 노력,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이끄는 것이다.


선교학의 연구 대상


아브라함 카이퍼는 prosthetics라는 말을 선교학에 사용. 사람을 낚는 것이다. 사람을 더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동시에 인간의 복음 전파에 달려 있다. 맥가브란은 선교학을 교회성장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했다. 호켄다이크는 선교학을 사도의 신학이라 하였다. 교회의 보내는 행동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기보다 사도적 증거, 가르침, 선포에 관심을 둔다. 버카일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계를 통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 역사를 펴는 것에 관한 연구이다. 티벳은 역사에서 하나님에게 인도된 개인들의 존재에 관한 연구이다. 선교학은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성경적 재료, 역사, 문화 인류학적 원리들과 기술, 신학적 토대에 관련되는 재료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적용하는 학문적 훈련,과학으로서 정의된다. 과학딘 선교학은 인류학, 통문화의 사소통이론, 에큐메니칼 운동, 역사, 문화관계 연구, 방법론, 종교적 조우, 신학과 같은 학문을 결합함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이론, 실천에 관한 조직적 연구이다.

 

 

제5장 선교는 어디로


선교는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 부과된 사명이다. 선교는 교회 본래적인 사명임이 틀림없다. 교회신학은 선교신학이다. 교회가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선교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가지 관점에서 관찰하면, 첫째는 교회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선교 사명을 강조하였다.


오스만 쿨만은 교회는 부활과 재림 그 중간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종말에 처한 교회의 시대적 특색과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부활의 승리, 성령의 내림)로 점철된 시대이다. 교회가 설립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 임하는 시대이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여야 할 사명, 주님의 나라를 선포할 사명, 복음으로 세계를 가득 채우며, 세계 역사를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의 시대는 무한한 복으로 채워진 시대. 교회는 위대한 사명 즉 세계와 그 역사를 하나님의 것으로 복귀케 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는 세상으로 파송된 단체이다라는 관점에서 선교의 사명을 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를 지으셨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속량하셨다. 블라우는 세상으로 보내진 교회 이외에 또 다른 교회가 없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여야 할 것이다.
 

1. 교회 중심주의 선교는 선교의 직접적인 목적은 무엇보다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보에티우스는 이방을 회개시키는 것과 교회를 설립하는 것,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한국 선교 운동은 자치, 자급, 자전도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쉐러는 선교사여 돌아가라는 책에서 교회중심주의를 비판하기를 교회설립이 선교의 최종 목적이거나 유일의 것이 될 수 없다. 그 정책은 비성경적이다. 교회는 주의 통치를 선포함이 선교의 목표이다.  

 

2. 영적부흥주의 선교는 인간의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하고 인간 생애의 총체적 영역에 미치는 것은 제한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경건주의, 모라비안 운동, 미국의 각성운동, 오늘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된다. 부룬너는 실존적이며 인격적인 현상이라는 사실과 자중심의 자아를 그에게 굴복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영적인 감정 개발에 강조점을 두었다. 영적인 감정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하는 것으로 그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은 도덕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도덕은 구원에 대해서 무력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을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라 하였다. 찰스 피니는 인간 회개 운동에 적용하였다. 한국의 부흥사는 칼빈주의적이라기 보다 알미니안주의적이며 깊은 신학적 토대가 결여된 피상적인 종교 놀음, 기교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3. 사회봉사주의 선교는 교회중심과 영적부흥주의에 대한 반동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인간 생애 전체에 관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선교는 기독화라고한 룰러가 이 운동의 선구자이다. 이 운동의 대두는 계몽주의 영향 때문이다. 구원의 개념은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에 대항하여 경제적인 공의를 위한 투쟁에서의 구원, 인간에 의한 인간 압박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의 구원,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대항하여 결속을 위한 노력에서 얻은 구원, 인간 생애의 절망에 대항하여 희망 쟁취를 위한 노력에서 얻은 구원으로 정의하였다.  결론적으로 어떤 하나님만을 고집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일과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일에 균형을 잃지 말고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다.

 

 

제6장 성령 운동과 선교


성령 운동은 오순절 운동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오순절파 운동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령운동을 다른 교단보다 더 강조하고 성령의 재세례와 방언, 예언, 치유, 축귀에 대한 독특한 견해와 특별한 강조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오순절은 단회적이라는 주장과 제2의 축복을 언금함, 방언은사를 중요시함, 말씀 대신 경험을 강조함은 비성경적이다. 그들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영적으로 교만을 보임과 신유은사 실천을 예배보다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성의 신앙, 성령중심에서 기독론을 약화시킴. 분열적으로 나아감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선교의 다른 하나의 근단인 오순절파 운동에서 훌륭한 점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교리적으로 충돌을 할 필요가 없으며 형제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제7장 교회와 선교


1. 교회의 성격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불리움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의 뜻을 마땅히 순종해야 할 백성이 교회라면 교회는 세계선교라는 주님의 의지를 받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교회의 구별됨, 특별한 목적, 일체감,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종말론적단체로서의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하나님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행동에서 시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교회의 태동은 예수님의 부활후의 일이었고, 부활의 신앙을 근거로 가능하였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 안에서 그리고 완전한 통치의 날을 기대함 가운데서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시 교회의 탄생은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원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신약에서는 소유된 백성,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를 말한다(벧전2:9)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은 이스라엘의 실패와 함께 좌절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적지는 미래에 올 도성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순례의 공동체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교회의 영적, 기능적 실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한스 킹는 그리스도는 교회안에 존재한다. 교회 없이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 없이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완전히 포함된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로서 존재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따라가야 한다.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영의 역사와 증거 위에 세워지고 영에 의하여 통치되고 채워지기 때문에 교회를 성령의 전3)이라고 한다. 교회를 조성하고 생명을 주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을 가리켜 부룬너는 교회의 호흡이라 하였다.
       

기구로서의 교회,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공회적이며 기구적이다. 즉 교회는 다른 세속 기구가 그러하듯 의식, 역할,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기구적이다.


2. 교회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라고 한다. 다드는 사도적 설교와 그 발전에서 교회가 전하여야 할 복음이 기쁨과 환희의 메시지임을 말한다.  선교의 내용인 복음은 무엇인가?

1) 복음

구약이 기대하던 소망의 성취이다.

구약의 소망은 공의와 의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공의를 행하도록 거듭 강조하였다. 평화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평화다. 평화는 그분의 속성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다. 고통을 통하여 매개된 소망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소망의 성취는 먼저 이스라엘의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는 종말론적 전망을 말하는 것이고, 메시야의 고난은 통하여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2)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사야 61장의 예언의 성취되었음을 언급한다.  새로운 시대의 출범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의 현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의가 현현하였다. 평화의 현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공의 실현의 도래릉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의 출현을 의미한다. 새사람의 창조를 의미한다. 그의 죽음의 결과는 평화, 화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인간성을 새사람의 의미이다. 교회가 그 분의 왕국은 아닐지라도 그분의 왕국의 표적인 것이다. 교회는 사랑, 공의 , 평화를 나타내야 한다. 또한 불의, 이기심, 소외를 막아야 한다,

3) 실천으로서의 복음. 복음에 대한 설교는 결단을 위한 부름이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재촉하고 주님과의 교제를 요구하는 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복음 전파의 궁극적 목적은 올바른 의미의 전달과 회개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끔하는데 있을 것이다. 교회의 메시지는 이미, 아직 미래로 남겨둔 것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3. 교회의 부르심의 목적
교회는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흑암으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부름을 받고 그것에 대해 신앙과 순종으로 응답한 자들의 공동체이다.

1) 예배의 목적-교회를 부르신 목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데 있다(엡1:6) 이것을 다른 말로 예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경배, 예배는 속죄 받은 자의 자발적인 표현이다. 출애굽의 주요 목적이 예배였다.

2) 선교의 목적-그리스도 안에서 산택된 백성이 모인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선교적 목적을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예배로서 그를 섬기고 하나님의 구속 사업인 선교에 참여함에 그 중요한 목적이 있다. 예배와 선교는 상호관련이 있다. 예배적인 언어에서 이해되고 예배는 선교 가운데서 찾게 된다.

3)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차원-블라우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교회 외에서 다른 교회가 없고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 외 다른 선교가 없다. 즉 세상으로 나감과 모든 나라들을 제자로 삼는 사명이다. 교회의 선교적 부름은 선지자적 차원이다, 선지자는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을 알리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선지자적 공동체로 부름받은 교회는 놀라운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어야 한다. 제사장적 차원이다. 증거와 선포라는 차원 다음에 성령의 전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제사장적 기능을 가진 교회의 선교적 차원이다. 왕적인 차원이다. 왕권이라 힘을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 왕권은 해방의 능력, 마귀와 정사에 억눌리고 노예화된 세상에 소망의 가능성을 준다

 

 

제8장 말씀 선포와 봉사


선교의 핵심은 말씀 선포이다. 주님께서도 친히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고, 제자들을 파송하여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다. 생생하고 능력있는 말씀 선포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도 주를 알 수 없을 것이다. 
 
1. 용어들을 통한 선교이해

전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신앙 응답의 도출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시는 단순한 보음의 역사적 서술에 그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조우하게 함을 말하고 신앙의 응답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헌신하게 함과 동시에 교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회원이 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전도의 방법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주입식적인 독백과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도의 개념은 잃은 자를 얻는 것, 영혼을 구원하는 것, 사람을 인도하는 것, 중생하게 하는 것이다.  그

 

리스도의 증거란 교회의 선포와 함께 사랑의 돌봄과 사회적 봉사를 함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교사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이다.  광의의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총제적인 성경적 과업을 지칭한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선교의 담지자이다. 선교란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 회심자를 얻는 것,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협의의 선교 개념은 사역의 대상 자격은 국내의 지역성을 넘어 외국의 지역까지를 의미한다. 세렐은 선교사여 본국으로 가라는 책에서 선교사의 자질에 대하여

①사도적인 정신성 ② 훌륭한 지적인 준비 ③ 기독교 신앙의 전달과 기독교 삶의 공유의 은사 ④ 삶의 헌신 ⑤ 영적인 깊이 ⑥ 값진 동일성 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젠트는 선교와 연관이 있는 용어들로서 기독화, 사회화, 문명화의 개념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기독교화란 한 개인이나 사회에서 복음을 수용하고 난 후 결과적으로 따르는 상황을 말한다. 기독교적 윤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사회화란 한 개인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이상, 모범, 제도에 일치되는 삶의 과정을 갖게 됨을 말한다. 문화화란 기독교 문화라고 하는 서양 문화의 규준에 일치하게끔 피선교지의 어떤 문화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선교란 삶의 모든 방면에 전제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맥가브란 박사가 주장하였다. 
 
2. 선교의 방향
오늘날 선교는 보수적인 것과 에쿠메니칼적인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구속을 지향하는 선교이고, 후자는 인간화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 신학을 주장한다.  선교의 전통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을 가진 주와 구주로서 말하는 복음을 선포한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보에티우스는 선교에 대하여 이방을 회심시키는  것, 교회를 세우는 것,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이후에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는 교회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에 근거를 두지 않고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에 초점을 두었다. 에큐메니칼의 선교 이해에서는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선교의 있어서 교회가 선교의 시작도 목표도 아니라고 하고 교회는 다만 구원의 매개자일 뿐이라고 한다. 교회의 기능은 미시오 데이에 참여함으로 세상적적 사건에 뛰어들어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3. 선교의 양 방향에 대한 평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선교 견해와 WCC의 선교 견해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상호보완의 것으로 수용하면 바람직할 것이다. 크레츠만은 복음주의가 폐쇄된 신학 체계와 관련이 될 때 위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 위험성이란 세계를 무시하는데 있다. 또한 교회의 분리성에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아들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빼어버릴 수 없는 것이 인간화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화해란 하나님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화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큐메니칼은 역사를 강조한 나머지, 종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 구원을 무시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삶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 결여
주님의 창조론과 성육신론이 안시하는 것은 세계를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이 아님을 해주고 있다.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간과해서 안되는 꼭 필요한 것, 즉 필요한 자에게 보여야 할 자비 사랑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말씀 선포와 봉사를 겸하여야 한다

 

 

제9장 인간 상황과 선교


1. 요한 칼빈과 일반 은총의 교리
우주적이고 객관적인 인간의 상황을 중요시하였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이 세상을 전혀 버려야 할 대상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죄와 그로 말미암는 저주 아래 있으므로 그곳을 떠나 사는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일반은총 역사가 있어 이 세상이 지탱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 미시오 데이와 역사
게오르그 비세돔은 미시오 데이라는 책을 출간되었다. 강조점은 선교에 있어 마땅히 인간 역사에 관심을 두자는 것이다. 이론적 근거는 선교 행위의 주인이 되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그의 선교적인 행위를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다는데 두고 있다. 육체적, 심리적 고통, 무지, 가난, 인종차별, 죽음의 위협과 같은 인간 상황 안에 있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과 봉사를 적극 장려하는 주장이라 하겠다. 
 
3. 호켄다이크와 살롬
사회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위한 구원을 말한다. 인간 영혼의 구원이라는 개념을 배격하였다.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 성취될 마지막 구원을 인간과 그가 처한 사회의 구원, 즉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살롬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회의 평화, 결합, 조화, 공의를 성립시키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위한 선포, 봉사, 증거가 바로 선교라고 하는 것이다. 
 
4. 왕국 의식과 광범위의 선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 중에 후자에 더 관심을 두는 경향이 나타난다. 진보주의자들이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보수주의의 약점은 역사 개념의 결핍, 희생적인 윤리사상의 부재, 문화적 사명과 사회적 사명 의식의 부재 등이다. 내세사상, 교회중심, 전도적 사명이 보수주의의 강점이다. 
 
5. 교회와 문화적인 사명
폴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개의 질서에 속한다고 한다. 하나는 나서, 자라서, 죽는 역사 안에 속한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너머에 있는 궁극에 속하는 초월적인 질서라고 하였다. 인간은 문화의 아들인 동시에 문화에 속하지 않는 초문화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루스베탁은 문화를 적응의 조직, 삶의 총체적인 설계, 삶의 독특한 설계라 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과 문화를 연결하여 생각할 때, 인간의 산물인 문화에는 신적인 요소도 있고, 악마적인 요소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복음으로 새 삶의 의미, 새 방향을 제시하는데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6. 교회와 사회적 사명
인간에게는 소속의 감정과 인정받음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사회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자(自)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에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된다. 사회적인 착취, 이용 등은 이런데서 생겨난다고 본다. 사회적인 문제를 혁명으로 성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기독교적이 못된다.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희생이요,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성육신 신학이다. 
 
7.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에 대한 사명
사람들은 영적인 것만 강조하고 육적인 것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희랍 철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희랍적인 이원론 사상과 배치되고, 양자의 세계가 주로부터 기원하였다는 일원적인 사상에 근거한다. 예수님은 타락한 물질의 세계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려고 하였다.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고,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영적인 명령은 교회에 주어졌다. 구속받은 자가 세상에서 주의 주권을 실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문화적 명령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물질 세계와 영의 세계 모두를 잘 간수하며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 중 전도의 사명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맥가브란의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복음을 전하되 삶의 컨텍스트 안에서 전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역사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0장 교회성장주의에 대한 평가


선교에 있어서 교회 성장주의는 교회의 성장4)이 선교의 우선적인 목표이다. 
 
1. 교회성장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그 내용
교회 성장을 선교의 목표라함은 선교 역사상 개인 영혼 구원을 선교 목표로 함에 뒤이어 일어난 운동으로 발전적인 것이다. 개인 영혼 구원 중심의 사상은 경건주의가 물려준 보수 교회의 유산이다. 그러나 개인 영혼 구원을 선교 목표로 규정한 것은 선교 활동의 영역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개신교는 이방인의 회심과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냄과 영광을 보임을 선교의 목적5)으로 보면서 自治, 自給, 自轉의 생활을 목표로 하였다. 교회중심적인 생각은 개인 영혼 구원을 선교의 목표로 보는 생각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임에 틀림없다. 교회 성장 신학은 개인 영혼 구원 사상과 교회중심 사상을 이어받은 20세기후반에 나타난 극히 미국적인 사고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① 영혼을 찾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곳간, 즉 교회로 불러들이는 추수작업에 강조점을 둠
② 숫자적인 성장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③ 교회 성장이 부흥 운동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말한다.
④ 교회성장은 사회구조적인 구조와 연관되어 일어난다고 한다.
⑤ 장벽을 넘지 않음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 한다
⑥ 단체 회심운동의 형태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방법이라 한다.
⑦ 토착적인 교회원리를 적용하자는 견해이다. 그는 토착적인 원리의 대표적인 것을 네비우스의 방법이라고 본다. 네비우스 방법은 선교사의 순회, 성경 중심적인 사업, 자전, 자영,자급의 교회 설립, 조직적인 방법으로 성경 연구 시행, 타교단과의 연합 사업등을 강조하였다.


2. 교회성장주의에 대한 평가
① 성경적인 평가-티벳교수는 선교의 목표를 교회 성장이 아닌 사회봉사나 타종교와의 대화하는 정도의 미지근한 태도에 그친다면 그것을 잘못이라 하였다.그는 구원의 체험의 전파와 그것을 체험한 자들의 교제, 교회의 세움은 선교의 지상 목표이기 때문에 아무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6)에 교회 성장을 찾았다. 영적인 성장, 질적인 성장보다 숫적인 성장에 대하여 지시하는 말씀으로 보았다사람을 회심케 함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단순한 도구 정도가 아니라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갖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자세로 일하여함을 말하고 있다. 그는 마28:19, 계1:11, 14:6의 나라, 족속, 방언을 보고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바베크는 화려한 결과는 고사하고 핍박만이 내다보이는 곳이라도 주가 원하시면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한다. 
 
② 신학적인 평가- 쥬이트는 교회란 말씀과 성례로써 선포된 사도적 메시지를 수용하는 가운데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교제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은혜의 선물이며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죄 많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맥가브란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거나 서로 상호 대비되는 것으로 갈라 놓으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백성 위에 임하는 통치도 주권이며, 교회는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을 그 중요한 기능으로 한다. 티벳은 성장의 구분을 회심에 의하여 성장하는 양적 성장,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완전을 추구함으로 오는 질적 성장, 교회가 토착화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유기적 성장이라 한다. 오클란도 코스타스는 예수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증가함을 숫적 성장, 내적인 신앙의 발전, 신자 상호간의 관계 발전, 기독교에 대한 개념 지식의 발전을 유기적 확장. 그리스도인이 사회 관계 속으로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 나타는 성장을 성육신적 성장으로 정의하였다.
교회가 진정으로 성장하려면 선지작적이고, 제사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사장적이고 희생적인 교회이어야 한다.  
 
③ 실제적인 평가-하워드 스나이더는 포도주 부대라는 책에서 제도화되고, 너무 비대화된 교회에서 비선교적이고 안이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교회가 비기동적임과 비유동적, 계층적인 구분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기동성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대교회보다 성막적인 교회가 더 바람직함을 말한다. 교회 성장주의가 교회만 설립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을 강조함에서 대교회주의가 나올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작은 교회의 장점은 영적이고 심리적으로 만족을 채울 수 있고, 신자들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 사회 봉사에 나아갈 기회가 많고, 인상적 진행에서 큰 교회보다 떨어지나 신자들에게 보다 깊은 변화를 줄 수 있다.


3. 결여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주의는 칼빈주의적이라기 보다는 복음주의적인 경향에서 나온 산물이다. 우리는 교회 성장에서 인간적인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령의 역할을 취급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은 수 있다. 교회의 이상적인 성장 즉 성경적인 성장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적인 바탕 위에 세워 나가지 않고 한 면만 추구하는 그의 주장은 자칫하면 사상 누각이 되기 쉽다.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가 그 기능을 충실히 다하여야 할 것은 교회의 선지자, 제사장, 왕적인 기능이라고 보면 성숙의 자리에 이른다고 본다.

 


제11장 선교의 제문제


1. 위기에 선 현대 문화와 선교
현대인들에게 종교적 구원론을 절실하게 요구되지 않고 있다. 종교 역시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① 聖가 俗의 구분이 폐하여짐에서 온다. 교회는 거룩의 대상이다. 오늘의 거룩의 개념이 달라졌다. 하나님은 구속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삶의 전 분야에 관여하신다는 사실이다. ②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폐하여짐에서 온다.  오늘의 신학적 경향은 교회와 세상을 다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로 본다. 교회는 열방들에게 보내어진 공동체이다. ③ 구원받은 자와 불신자 간의 구분이 폐하여짐에서 온다. 모든 사람이 주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④ 증거와 봉사를 구분하지 않음에서 온다. 존 스토트는 선교는 증거와 복사라고 하고, 봉사는 증거의 구체적 형태라고 한다. ⑤ 기독교와 비기독교 종교의 구분을 폐함에서 온다. ⑥ 선교사와 비선교사의 구분을 폐함에서 온다. 선교사란 역사 가운데서 참여에 의하여 하나님 사랑의 구현을 증가시키는 모든 자이다.  이런 현대 문화의 위기적 상화에 대한 보수주의의 선교적 대응은 무엇인가?
① 모든 착취 압박의 형태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한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은 바로 비인간화를 의미함 사회를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된다. ② 인간화의 강조가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과 관계문제이다. ③ 비인간화의 원인을 인간에 죄에서 찾차야 한다. 
 
2. 공의의 실현과 선교
공의의 실현이란 사회적, 정치적 이유로 자유를 상실하고 여러 가지를 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즉 사람들은 가난과 전쟁, 식민지 통치, 정치적 억압, 인종차별, 경제적 착취, 비정한 기계 문명 아래서 고통을 당한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개인인 인간이나 단체인 인간의 전체성을 위한 투쟁을 선교의 과제로 삼았다. 공의의 실현을 가장 강하게 외치는 신학은 해방 신학이다. 로잔 대회에서 우리는 공의 실현에 대한 복음주의의 소극적 선교태도에 대한 자성론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과 신약에서의 침묵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부지런함과 성화를 향한 선지자적 사명의 실천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3. 선교와 상황화
상황속에서의 선교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① 기독교의 불변적인 진리를 고수되어야 한다. ② 어떤 상대적 부분은 변화의 대상으로 두어야 한다. ③ 문화적인 면은 토착 문화의 것을 취해야 한다. ④ 성경의 규준이 모든 문화의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⑤ 우상 숭배와 같은 문화의 부분은 기능적인 대체호 승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주의 깊은 고찰 가운데 상황화를 이루어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펴는데 기여해야 한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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