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인간 죽산,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의 억울한 죽음은 가장 먼저 시로 표현됐다. 신경림 시인은 죽산이 세상을 떠난 직후 비통한 마음으로 ‘그날’을 썼다.

 ‘젊은 여자가 혼자/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열/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중략) 사람들은 가로수와/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아무도 죽은 이의/이름을 모른다/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시인이 ‘그날’을 쓴 지 무려 52년이 흘러서야 법이 나섰다. 2011년 1월 2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이용훈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망(亡) 조봉암. 재심청구인 피고인의 자(子)… 원심 판결과 제1심 판결 중 유죄 부분을 각 파기한다.”

 뒤늦게나마 법원 스스로 반세기 전의 ‘사법 살인’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조봉암이 뒤집어쓴 죄목은 간첩·간첩방조·국가보안법 위반 등이었다. 판결문은 이를 뒤집으면서 말미에 조봉암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덧붙였다.

 “피고인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의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고인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등을 쓴 이원규(66) 작가의 『조봉암 평전』은 죽산에 대한 기존 연구서·자료를 충실히 소화한 위에 현지 답사, 유족 인터뷰 등을 더해 상당히 품을 들인 책이다. 자료 수집에 2년 반, 집필에는 3년이 걸렸다고 저자는 밝혔다. 기록과 증언을 우선하되 소설가답게 대화 내용 묘사 등 ‘허용될 수 있는 한도에서’ 상상력을 보탰다. 덕분에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맛이 난다.

 

죽산 조봉암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60년 전 분단 현실에서 진보를 꿈꾸며 책임정치,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을 부르짖었으나 간첩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 1952년 죽산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던 제2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2 그의 두 번째 부인 김이옥 여사와 큰딸 호정.

 3 59년 간첩 누명을 쓰고 법정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 한길사]

 

 


 그러나 소설이라 쳐도 너무 비극적이다. 설득력과 대중연설에서 재능을 타고난 죽산은 좌·우 양쪽에 걸쳐 불화를 겪었다. 1919년 3·1 운동에서 시작해 투옥과 가혹한 고문을 번번이 당했고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였지만, 몸담았던 공산 진영은 헤게모니 다툼 과정에서 그의 몇 안 되는 약점을 파고들어 괴롭혔다. 상당 기간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편안히’ 있었다거나, 당원 아내(김조이)를 버리고 비당원 여성(김이옥)과 재혼한 점, 혁명가 유족을 돕는 기금을 아내의 병 치료에 쓴 일을 박헌영 등 경쟁자들이 끊임없이 문제 삼았다. 일제강점기 말기 용산헌병대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해방을 맞아 풀려난 뒤에도 견제는 계속됐다.

 해방정국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죽산은 1946년 공산당을 주도하던 박헌영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자기 비판도 있었지만 박헌영 비판이 주된 요지였다. 미처 부치지 못한 이 편지가 미군 방첩대(CIC)의 사무실 압수수색으로 미 군정 손에 들어갔다.

 미국은 이 편지로 국내 공산당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46년 5월 7일, 조선일보·동아일보·한성일보·대동신문에 편지 전문이 실렸다. 경악한 죽산은 좌익계 신문에 편지를 압수당한 경위 등을 밝혔으나 이미 일이 틀어진 뒤였다. 한 달 뒤 죽산은 미 군정의 회유를 받아들여 전향을 선언한다.

 전향했다지만 우익에 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3의 길, 즉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가고자 했다. 48년 5·10 선거에서 인천 을구에 출마해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그의 앞길은 탄탄해 보였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당시 전국 농가는 200만호. 자기 땅이 전혀 없는 완전 소작농이 49%, 약간의 토지를 갖고 소작을 병행하는 농민이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였다.

 유상몰수·유상분배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절묘하게 조합한 조봉암 장관의 농지개혁안은 성공했고, 신생 대한민국은 사회안정 토대를 든든히 할 수 있었다. 인기가 치솟은 죽산은 52년 2대 대통령선거(70만표 득표, 차점 낙선), 56년 3대 대통령선거(216만표 득표, 차점 낙선)에 연이어 출마해 무차별 선거부정·테러 와중에도 선전했다.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그에게 간첩 혐의를 씌웠다. 59년 7월 30일 대법원이 사형 재심 청구를 기각하자마자 다음 날인 31일 오전 11시 형이 집행됐다. 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등 죽산의 3가지 정치적 이상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한다. 선각자인 그에게 빚을 진 이는 비단 사법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죽산은 사형이 언도된 직후 변호사(김춘봉)에게 오히려 담담하게 말한다.

 “판결은 잘됐어요. 무죄가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정치란 다 그런 거지요.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 승리가 있는 거고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거지요. 정치를 하자면 그런 각오를 해야 해요.” 과연 오늘날의 정치도 그래야 하는 것일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 죽산의 말말말

▶“사람이 어떤 중요한 결심을 하고, 굳이 그것을 실천하려 들면 그 굳은 결의가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체험에서 알고 있었다.”

- 중국 공산당 활동 관련으로 1933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됐던 생활을 돌아보며.

▶“환영해주셔서 고맙지만 나는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 1948년 농림부 장관 시절 추곡수매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강화군청을 방문했을 때, 군수와 전 직원이 나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자.

▶“이 일에 국가의 장래가 달려 있습니다. 나는 강 국장만 믿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만 놀리면 안됩니다. 농민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 농림부 장관 시절 강진국 농지국장에게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너무 성급히 생각하지 말게. 우리가 못 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옥중 유언에서.

 2013.03.16

[중앙일보]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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