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오의 생애와 업적

 

-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피사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갈릴레이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 1581년 피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수학에 더 큰 흥미를 가졌다.

- 1583년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여 맥박계에 응용하였다.

- 1585년 피사대학을 중퇴한 뒤, 피렌체에서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

- 1589년 피사대학의 수학 강사가 되었으며, 후에 베네치아공화국(북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 동안 축성술, 기계공작기술상의 여러 문제

         를 연구하다가 동력학의 연구로 진출하였는데, 그 유명한 관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 1609년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해서 그 배율을 높여, 천체 관측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관측으로 달의 표면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금성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진다는 것, 태양에 흑점이 있어 태양면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 희미한 은하수가 실은 많은 별들의 집단이라는 것, 목성 주의에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목성의 위성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그의

         친구였던 독일 천문학자 케플러에게 써 보냈다.

- 1610년 피렌체 공국 코시모 2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 소속의 수학자가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지동설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결과

- 16l6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어 갈릴레이의 활동은 중지되었다. 그 후 갈릴레이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오르바누스 8세가 교황에

         즉위하게 되자, 다시 새 학설을 담은 책을 낼 것을 결심하고, 출판의 허가를 얻기 위해 직접 로마에 갔다. 그는 교황청 도서 검열계로부터 코페르니쿠스

         의 지동설을 가설로서만 서술한다면 출판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수년 동안 집필한 것을 천문대화라는 제목으로

- 1632년 출판하였다. 그런데 이 저서에는 표면상 천동설을 지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천동설이

         옳다는 자백을 하였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이 재판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70세나 되는 고령이었다. 그는 종신 금고형

         을 선언받고 나머지 생애는 엄중한 감시하에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이 근신 중에 갈릴레이는 '신과학 대화'를 써서 출판이 자

         유로웠던 네덜란드에서 1638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해 갈릴레이는 장기간의 무리한 망원경 관측이 원인이 되어 실명하고 말았다. 그리고, 쓸쓸한 말

         년에 '진공의 연구'로 유명한 제자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 1642년 세상을 떠났다. 이 해에 뉴튼이 태어났다. 갈릴레이가 죽은 후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장례를 지내는 것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금지하였다.

- 1992년 10월 31일 로마교황청은 10여년 동안 특별재심과학위원회에서 1633년 6월 22일의 종교재판에 대해 다시 검토한 결과 과오를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갈릴레

         이의 완전복권을 선언하였다.

 

갈릴레오 생애요약

 

1564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남

1581년피사 대학 의학부에 입학함

1583년피사의 사탐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함

1591년피사 대학의 교수가 됨.

1609년천체 망원경을 만들어 밤하늘의 목성을 관찰함

1610년'메디치 별' 을 발견해 그 관측결과를 정리한<별세계의 보고>라는 책을 펴내 코시모 데 메디치2세에게 바침.

1615년'지동설'에 찬성하여 재판을 받음.

1632년지동설을 주장한<두개의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를 펴냄

1638년<두가지 새로운 과학의 수학적 증명에 대한 담화>가 출간됨.

1642년세상을 떠남...

 

 

 

갈릴레오 갈릴레이 뒷얘기

 

-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말하지 않았다 -


1616년 5월 5일의 교령이 나온 며칠 후 로마 교황은 그 교령 안에 전혀 이름이 언급된 바 없는 갈릴레이를 접견했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완전하게 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또 그 일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갈릴레이가 그것을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바라지 않던 바를 갈릴레이는 그후 여러 해에 걸쳐 증명도 하지 않은 채 주장해 버렸다. 1633년의 재판은 그 때문에 열렸던 것이다. 그때의 재판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갈릴레이는 공정하고도 적절한 처우를 받았는데, 종종 인용되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기록을 보아도 분명하지만, 갈릴레이는 애당초 압력을 받기 전에 먼저 주장을 철회했다. 갈릴레이가 유죄가 된 것은 불복종이라는 죄목에 따른 것이지 이단이라는 죄목-교회가 이단이란 죄목으로 처단하기를 바랐다면 손쉬운 일이었을 테지만-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갈릴레이는 앞으로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우주의 현실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금지당하기는 했으나 천문학적, 수학적 작업 가설로 주장, 논의, 부연하는 것까지 금지당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연구를 더 진척시킬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열려 있었다고 교회사가인 발터 브란트뮐러는 쓰고 있다('갈릴레이와 교회. 오류의 권리', 레겐스부르크, 1982). 갈릴레이가 재판 기간 중에 감옥에 있었고 고문을 받았다는 따위의 말은 다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확실히 갈릴레이는 재판받는 동안 이단 심문소의 수인 처지였으나 독방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주거를 할당받고 자기 하인의 시중까지 받을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피렌체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어쨌든 갈릴레이는 피렌체 아카데미의 수학자였으며, 영사이자 피렌체 2백인 참사회의 멤버였고, 로마에서도 토스카나 공작의 비호를 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법정은 갈릴레이에게 형식적인 금고형을 선고했지만 갈릴레이는 실제로 감옥에 들어갈 필요 없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로마를 떠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시에나 대주교 밑에서 지내다가 만년의 몇 년은 피렌체 근교의 알체체트리 촌에 살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집필한 최후의 대저작이 '두 개의 과학에 관한 대화'로서 갈릴레이는 기계물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 등을 관찰하고 역학 연구를 통해 근대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여 교황청 종교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고, 350여 년이 지나 교황청에 의해 공식 복권됐다. 종교재판 이야기를 중심으로, 천문학과 물리학의 상징적 아이콘이기도 한 그에 관해 알아보자.

 

 

 

‘존엄하신 추기경(벨라르미노)은 위의 갈릴레이에게, 전술된 견해는 오류이며 그와 같은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다. 그 직후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명령했다. 그(갈릴레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돌지 않으며 지구는 돌고 있다는 견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그는 지금부터 말과 글을 포함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그 견해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추기경위원회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 갈릴레이는 이러한 지시에 따르고 순종할 것을 약속했다.’

 

 

교황청 추기경위원회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는 갈릴레이(오른쪽.1857년 작품)


1616년 2월 26일 로마 교황청 추기경위원회 의사록의 일부다. 갈릴레이는 1597년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바다의 조수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신봉해왔다고 밝혔다. 1610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의 표면, 금성의 차고 기움, 목성의 4개 위성을 관찰했고, 그러한 관찰 결과가 지동설을 뒷받침한다고 공표했다. 갈릴레이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예수회 소속 신부로 추기경이자 교황청 금서목록 위원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엄중하게 경고했고, 결국 갈릴레이는 1616년 2월 26일에 지동설을 논하거나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던 것이다. 당시 금지된 명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다.
- 태양은 하늘의 중심에서 부동(不動)이다.
- 지구는 하늘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부동이 아니라 이중 운동을

하며 움직인다.

 

 

갈릴레이는 1615년 12월 로마를 방문할 때만 해도 자신의 입장을 잘 설명하면 교황청을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의 자전에 따른 조수 현상이나 무역풍 등에 관해 강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미리 어느 정도 결정을 내려두고 갈릴레이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1616년 2월 18일 교황청 최고위 추기경위원회 회의에서는 갈릴레이의 주장에 대한 결론을 내렸고, 이어서 2월23일에 위원회 고문 신학자들은 갈릴레이의 견해가 ‘철학적으로 우매하고 신학적으로 이단적’이라는 의견을 제출했으며, 다음 날 추기경위원회는 이 의견을 수용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26일에 최종적으로 명령이 내려졌다. 서약을 마친 이후 갈릴레이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자신의 향후 활동에 대한 일종의 증서를 요청했다. 이에 같은 해 5월26일 추기경은 친필 서한으로 갈릴레이에게 회신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견해를 포기한다는 맹세를 공식적으로 작성하거나 속죄할 필요까지는 없으며, 다만 성서의 내용과 모순되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주장하거나 옹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릴레이와 친분이 있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했다. 갈릴레이는 그를 설득해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균형 있게 비교하는 책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허락을 받았다. 5년의 집필 끝에 완성한 원고의 첫 제목은 ‘밀물과 썰물, 조수에 관한 대화’ 였는데, ‘조수’를 삭제하라는 검열관의 명령에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로 제목을 정했다.

 

 

1632년 2월 21에 1,000부를 출간한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세 사람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변론하는 철학자 살비아티, 일종의 사회자 구실을 하는 시민 사그레도,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고집하는 심플리치오(6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주석가의 이름에서 따왔지만, 이탈리어에서 바보, 멍청이를 뜻하는 simpleton을 암시한다는 설도 있다)가 그들이다. 적어도 인물 구성은 공평해 보이지만 내용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충고, 즉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와 전통적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공평하게 다루라는 충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날카롭고 야무진 이미지의 갈릴레이(1578~1630년경의 작품)

 

 

살비아티는 심플리치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사그레도도 살비아티 쪽으로 기운다. 특히 지구의 공전과 자전 운동을 통해 밀물과 썰물을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12시간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는 갈릴레이의 예측은 실제로 6시간인 주기와 맞지 않았다(조수의 문제는 나중에 뉴턴의 중력 이론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설명되었다). 과학사학자들은 조수 이론보다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의 역학적 문제를 추상적, 수학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과학사적 가치를 찾는다.

 

이 책은 일단 검열을 통과해 출간되긴 했지만, 그 내용을 알고 화가 난 교황은 1633년 4월 12일 갈릴레이를 교황청으로 소환했다. 이날 첫 심문을 당한 갈릴레이는 이후에도 4월 30일, 5월 10일, 그리고 6월 21일까지 세 번에 걸쳐 심문 당했다. 마지막 심문 다음날인 6월 22일,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오늘날 이탈리아 국회도서관의 일부)에 딸린 방으로 안내된 갈릴레이는 형이 선고되는 동안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유죄 선고가 내려졌다. 1616년의 서약을 어겼다는 것이 중요한 유죄의 근거였다. 형벌로 종신 가택연금과 이후 3년 동안 매주 한 번 ‘7대 고해성시’(시편 6, 31, 37, 50, 101, 129, 142편) 음송, 사후 장례식을 하거나 묘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전술한 이론을 말이나 글 등 어떤 방식으로든 옹호하거나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명령을 이 성청(聖聽)이 저에게 사려 있게 암시한 뒤에도, 그리고 전술한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저에게 통보한 뒤에도, 저는 이미 단죄된 이 교리를 논의하고 이들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주장을 도출하는 한 권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원인이 되어 저는 이단, 즉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한 의심을 성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해 정당하게 제기된 이 강력한 의심을 추기경 예하와 믿음 있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앞서 말한 과오와 이단, 교회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과오와 교파 전반을 포기하고 저주합니다. 앞으로도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말이나 글로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p. 235-236)

 

갈릴레이의 이와 같은 굴욕적인 맹세는 곧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의 교황 대사들에게 전해졌고,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졌다.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갖고 있는 사람은 거주지 종교재판관에게 제출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금서 조치이자 사실상의 압수 조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대화>를 앞 다투어 손에 넣으려 했다. 책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손에 넣으려 경쟁한 탓에 1633년 여름에는 책값이 정가의 10배 이상으로 뛰어 오르기까지 했다.

 

 

갈릴레이(오른쪽)와 그의 제자 비비안니(1892년경 작품)


1633년 6월 22일 갈릴레이는 정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 (Eppur si muove)”는 말을 했을까? 여러 달의 재판을 통해 심신이 극도로 지친 칠순 노인이 서슬 퍼런 종교재판관들 앞에 홀로 서있다. 가볍게 속삭이는 혼잣말이라 해도 그런 말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었을까? 재판이 끝난 다음 마차를 타고 가다 내리면서 문제의 말을 외쳤다는 설도 있으나, 재판을 다시 받기를 자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황상의 추측이 아니더라도 많은 전문가들은 갈릴레이가 그런 발언을 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갈릴레이의 제자 빈첸치오 비비안니가 쓴 갈릴레이에 관한 최초의 전기에도 이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으며, 다만 갈릴레이가 신중하게 진정으로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소송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갈릴레이가 쓴 편지나 그 어떤 글에도, 당시의 다른 그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스페인 화가의 한 그림(1643년 또는 1645년경의 것으로 추정)에 문제의 문구가 등장한다는 게 1911년에 밝혀졌지만, 그 그림은 갈릴레이를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등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해 신뢰하기 힘들다. 다만 갈릴레이가 살아 있을 때도 이미 문제의 풍문이 나돈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해줄 뿐이다. 문헌 기록으로는, 프랑스의 신부이자 역사학자 오귀스탱 시몬 이라이유(Augustin Simon Irailh. 1717-1794)가 1761년에 전 4권으로 출간한 <문학논쟁>(Querelles littéraires 전체 제목은 ‘호메로스 시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문학 공화국의 혁명의 역사를 위한 비망록 또는 문학논쟁들’)의 제3권 49페이지에, 런던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이 1757년에 펴낸 이야기책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문제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이 책은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발언은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마치 사실처럼 오랜 세월 전해지는 이야기, 이른바 ‘도시형 전설’(urban legend)에 해당한다. 다만 일화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진실이 종교적 억압을 극복하고 이긴다는 뜻을 담은 상징적 일화라는 점 그 자체일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갈릴레이를 과학적 진리의 순교자로 형상화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뜻이 반영되었던 셈이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려,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오류를 증명했다는 얘기도 근거가 희박하다. 그런 실험을 한 것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스테빈이다. 문제의 전설은 갈릴레이 전기를 쓴 비비안니가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릴레이가 19살 때 피사 대학 예배당 천장의 램프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맥박을 측정해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희박하다. 예배당 천장 샹들리에는 갈릴레이가 19살이 되던 해보다 몇 년 뒤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이미 알려진 옛 별들보다 10여 배나 많은 별들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다른 것과 비길 수 없으리만치 커다란 놀라움을 주고, 특별히 내가 모든 천문학자와 철학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한 현상은, 이전에 어떠한 천문학자도 알거나 관찰하지 못한 네 개의 행성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1610년 베네치아에서 출간한 ‘별의 사자(使者)’(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를 발견한 것에 관해 위와 같이 말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를 지배하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목성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점, 그에게 4명의 자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그 위성들을 ‘메디치가의 별’로 이름 붙였다. 이에 따라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 전속 수학자 겸 철학자로 고용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네 위성이 ‘갈릴레이 위성’(Galilean moons)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달 표면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1608년 네덜란드의 리페르스헤이가 초보적 형태의 쌍안경을 만들어 베네치아 공화국에 팔려 한 소식을 접한 갈릴레이는, 즉시 망원경 개발에 착수해 1609년부터 확대율을 30배로 높여 천체를 관측했다. ‘달 표면은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광경 중의 하나다 … 그것은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모양이 아니라, 표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지구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광대한 돌출부, 깊은 계곡과 만곡부가 가득하다.’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가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확신한 갈릴레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리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순진한 것이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라도 기존의 주류 체계 및 신념과 맞지 않는 것은 배제 당해야 했던 것이다.


 

갈릴레이가 직접 그린 달의 변화도

 

 

 

 

교황청이 갈릴레이를 공식 복권시키기까지는 350여 년이 걸렸다. 1979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갈릴레이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 실수였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1992년 특별위원회가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 최종 보고 후, 10월 31일자로 갈릴레이는 교회에서 복권됐다. 갈릴레이의 이름은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상징적 아이콘이다. 1989년 10월 18일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를 통해 발사된(2003년 9월 목성 대기권 진입, 소멸) 목성과 그 위성 탐사선 이름은 갈릴레오호다. 유럽연합(EU)이 미국의 GPS에 대응해 추진하는 새로운 전 세계 위성항법시스템(GNSS)의 프로젝트 이름도 갈릴레오다. 두 개의 좌표계가 서로 일정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때, 한쪽 좌표계(관성계)에서 다른 쪽 좌표계로 뉴턴의 고전역학에 따라 변환해주는 법칙의 이름은 갈릴레이 변환(Galilean transformation)이다.

 

 

망원경을 들고 있는 갈릴레이 초상화(1597~1681년경 작품)


갈릴레이는 2009년 세계 천문의 해를 맞이하여 주조된 25유로 기념주화의 도안 인물이다. 갈릴레이의 얼굴과 그의 망원경이 나와 있고 배경에는 갈릴레이가 그린 달 표면 그림이 나와 있다. 세계 천문의 해도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 정해진 것이다.

 

종교재판 이후 갈릴레이는 피렌체 근교에서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1636년 73살 때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을 완성하고 2년 뒤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출간했다.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헌신적인 딸의 도움으로 완성한 최후의 역작이었다.

‘슬프다. 앞선 모든 시대의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한계를 내가 탁월한 관찰과 명석한 논증으로 백배, 아니 천배나 넘게 확장시켜놓은 이 하늘, 이 지구, 이 우주가 이제는 나의 육체적 감각으로 채워지는 좁은 영역 안에 움츠러들고 말았구나.’ 말년에 이렇게 탄식한 갈릴레이는 1642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5일 성탄절(당시 영국에서 사용 중이던 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이듬해 1월 4일)에 영국에서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갈릴레이의 천문노트>(앨버트 반 헬덴 지음, 승산) 1610년에 갈릴레이가 출간한 책으로, 망원경으로 관찰한 천체 관측 기록이다. 새로운 천문관측법을 삽화를 넣어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자 반 헬덴의 해설과 맺음말 부분이 갈릴레이의 천문학을 이해하는 게 요긴하다.

 

<갈릴레이>(요하네스 헴레벤 지음, 한길사) 어린이 위인전 성격의 책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사실상 유일한 본격적인 갈릴레이 전기다. 많은 서점에서 품절이나 절판된 점이 아쉽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갈릴레이의 천문노트갈릴레이갈릴레이의 생애.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

 

<갈릴레이의 생애.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베르톨트 브레히트 외, 두레)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가 다른 두 작가의 작품들과 함께 실려 있다. 과학자 또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주제로 한다고 볼 수 있는 세 편의 작품을 모은 선집인 셈. 브레히트는 이 희곡에서 갈릴레이를 고문 기구를 보고 두려워 자신의 학설을 철회한 소심한 인물로 그려냈다. 브레히트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갈릴레이가 아니라 현대의 지식인들이다. 같은 희곡 작품을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브레히트 희곡선집 2>(임한순 엮음)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 등을 관찰하고 역학 연구를 통해 근대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여 교황청 종교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고, 350여 년이 지나 교황청에 의해 공식 복권됐다. 종교재판 이야기를 중심으로, 천문학과 물리학의 상징적 아이콘이기도 한 그에 관해 알아보자.

 

 

‘존엄하신 추기경(벨라르미노)은 위의 갈릴레이에게, 전술된 견해는 오류이며 그와 같은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다. 그 직후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명령했다. 그(갈릴레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돌지 않으며 지구는 돌고 있다는 견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그는 지금부터 말과 글을 포함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그 견해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추기경위원회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 갈릴레이는 이러한 지시에 따르고 순종할 것을 약속했다.’

 

교황청 추기경위원회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는 갈릴레이(오른쪽.1857년 작품)


1616년 2월 26일 로마 교황청 추기경위원회 의사록의 일부다. 갈릴레이는 1597년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바다의 조수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신봉해왔다고 밝혔다. 1610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의 표면, 금성의 차고 기움, 목성의 4개 위성을 관찰했고, 그러한 관찰 결과가 지동설을 뒷받침한다고 공표했다. 갈릴레이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예수회 소속 신부로 추기경이자 교황청 금서목록 위원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엄중하게 경고했고, 결국 갈릴레이는 1616년 2월 26일에 지동설을 논하거나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던 것이다. 당시 금지된 명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다.
- 태양은 하늘의 중심에서 부동(不動)이다.
- 지구는 하늘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부동이 아니라 이중 운동을

하며 움직인다.

 

갈릴레이는 1615년 12월 로마를 방문할 때만 해도 자신의 입장을 잘 설명하면 교황청을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의 자전에 따른 조수 현상이나 무역풍 등에 관해 강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미리 어느 정도 결정을 내려두고 갈릴레이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1616년 2월 18일 교황청 최고위 추기경위원회 회의에서는 갈릴레이의 주장에 대한 결론을 내렸고, 이어서 2월23일에 위원회 고문 신학자들은 갈릴레이의 견해가 ‘철학적으로 우매하고 신학적으로 이단적’이라는 의견을 제출했으며, 다음 날 추기경위원회는 이 의견을 수용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26일에 최종적으로 명령이 내려졌다. 서약을 마친 이후 갈릴레이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자신의 향후 활동에 대한 일종의 증서를 요청했다. 이에 같은 해 5월26일 추기경은 친필 서한으로 갈릴레이에게 회신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견해를 포기한다는 맹세를 공식적으로 작성하거나 속죄할 필요까지는 없으며, 다만 성서의 내용과 모순되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주장하거나 옹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릴레이와 친분이 있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했다. 갈릴레이는 그를 설득해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균형 있게 비교하는 책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허락을 받았다. 5년의 집필 끝에 완성한 원고의 첫 제목은 ‘밀물과 썰물, 조수에 관한 대화’ 였는데, ‘조수’를 삭제하라는 검열관의 명령에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로 제목을 정했다.

 

1632년 2월 21에 1,000부를 출간한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세 사람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변론하는 철학자 살비아티, 일종의 사회자 구실을 하는 시민 사그레도,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고집하는 심플리치오(6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주석가의 이름에서 따왔지만, 이탈리어에서 바보, 멍청이를 뜻하는 simpleton을 암시한다는 설도 있다)가 그들이다. 적어도 인물 구성은 공평해 보이지만 내용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충고, 즉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와 전통적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공평하게 다루라는 충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날카롭고 야무진 이미지의 갈릴레이(1578~1630년경의 작품)

 

 

살비아티는 심플리치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사그레도도 살비아티 쪽으로 기운다. 특히 지구의 공전과 자전 운동을 통해 밀물과 썰물을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12시간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는 갈릴레이의 예측은 실제로 6시간인 주기와 맞지 않았다(조수의 문제는 나중에 뉴턴의 중력 이론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설명되었다). 과학사학자들은 조수 이론보다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의 역학적 문제를 추상적, 수학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과학사적 가치를 찾는다.

 

이 책은 일단 검열을 통과해 출간되긴 했지만, 그 내용을 알고 화가 난 교황은 1633년 4월 12일 갈릴레이를 교황청으로 소환했다. 이날 첫 심문을 당한 갈릴레이는 이후에도 4월 30일, 5월 10일, 그리고 6월 21일까지 세 번에 걸쳐 심문 당했다. 마지막 심문 다음날인 6월 22일,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오늘날 이탈리아 국회도서관의 일부)에 딸린 방으로 안내된 갈릴레이는 형이 선고되는 동안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유죄 선고가 내려졌다. 1616년의 서약을 어겼다는 것이 중요한 유죄의 근거였다. 형벌로 종신 가택연금과 이후 3년 동안 매주 한 번 ‘7대 고해성시’(시편 6, 31, 37, 50, 101, 129, 142편) 음송, 사후 장례식을 하거나 묘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전술한 이론을 말이나 글 등 어떤 방식으로든 옹호하거나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명령을 이 성청(聖聽)이 저에게 사려 있게 암시한 뒤에도, 그리고 전술한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저에게 통보한 뒤에도, 저는 이미 단죄된 이 교리를 논의하고 이들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주장을 도출하는 한 권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원인이 되어 저는 이단, 즉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한 의심을 성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해 정당하게 제기된 이 강력한 의심을 추기경 예하와 믿음 있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앞서 말한 과오와 이단, 교회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과오와 교파 전반을 포기하고 저주합니다. 앞으로도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말이나 글로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p. 235-236)

 

갈릴레이의 이와 같은 굴욕적인 맹세는 곧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의 교황 대사들에게 전해졌고,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졌다.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갖고 있는 사람은 거주지 종교재판관에게 제출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금서 조치이자 사실상의 압수 조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대화>를 앞 다투어 손에 넣으려 했다. 책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손에 넣으려 경쟁한 탓에 1633년 여름에는 책값이 정가의 10배 이상으로 뛰어 오르기까지 했다.

 

 

갈릴레이(오른쪽)와 그의 제자 비비안니(1892년경 작품)


1633년 6월 22일 갈릴레이는 정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 (Eppur si muove)”는 말을 했을까? 여러 달의 재판을 통해 심신이 극도로 지친 칠순 노인이 서슬 퍼런 종교재판관들 앞에 홀로 서있다. 가볍게 속삭이는 혼잣말이라 해도 그런 말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었을까? 재판이 끝난 다음 마차를 타고 가다 내리면서 문제의 말을 외쳤다는 설도 있으나, 재판을 다시 받기를 자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황상의 추측이 아니더라도 많은 전문가들은 갈릴레이가 그런 발언을 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갈릴레이의 제자 빈첸치오 비비안니가 쓴 갈릴레이에 관한 최초의 전기에도 이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으며, 다만 갈릴레이가 신중하게 진정으로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소송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갈릴레이가 쓴 편지나 그 어떤 글에도, 당시의 다른 그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스페인 화가의 한 그림(1643년 또는 1645년경의 것으로 추정)에 문제의 문구가 등장한다는 게 1911년에 밝혀졌지만, 그 그림은 갈릴레이를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등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해 신뢰하기 힘들다. 다만 갈릴레이가 살아 있을 때도 이미 문제의 풍문이 나돈 것이 아닌가 짐작케 해줄 뿐이다. 문헌 기록으로는, 프랑스의 신부이자 역사학자 오귀스탱 시몬 이라이유(Augustin Simon Irailh. 1717-1794)가 1761년에 전 4권으로 출간한 <문학논쟁>(Querelles littéraires 전체 제목은 ‘호메로스 시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문학 공화국의 혁명의 역사를 위한 비망록 또는 문학논쟁들’)의 제3권 49페이지에, 런던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이 1757년에 펴낸 이야기책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문제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이 책은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발언은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마치 사실처럼 오랜 세월 전해지는 이야기, 이른바 ‘도시형 전설’(urban legend)에 해당한다. 다만 일화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진실이 종교적 억압을 극복하고 이긴다는 뜻을 담은 상징적 일화라는 점 그 자체일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갈릴레이를 과학적 진리의 순교자로 형상화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뜻이 반영되었던 셈이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려,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오류를 증명했다는 얘기도 근거가 희박하다. 그런 실험을 한 것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스테빈이다. 문제의 전설은 갈릴레이 전기를 쓴 비비안니가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릴레이가 19살 때 피사 대학 예배당 천장의 램프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맥박을 측정해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희박하다. 예배당 천장 샹들리에는 갈릴레이가 19살이 되던 해보다 몇 년 뒤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이미 알려진 옛 별들보다 10여 배나 많은 별들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다른 것과 비길 수 없으리만치 커다란 놀라움을 주고, 특별히 내가 모든 천문학자와 철학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한 현상은, 이전에 어떠한 천문학자도 알거나 관찰하지 못한 네 개의 행성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1610년 베네치아에서 출간한 ‘별의 사자(使者)’(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를 발견한 것에 관해 위와 같이 말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를 지배하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목성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점, 그에게 4명의 자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그 위성들을 ‘메디치가의 별’로 이름 붙였다. 이에 따라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 전속 수학자 겸 철학자로 고용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네 위성이 ‘갈릴레이 위성’(Galilean moons)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달 표면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1608년 네덜란드의 리페르스헤이가 초보적 형태의 쌍안경을 만들어 베네치아 공화국에 팔려 한 소식을 접한 갈릴레이는, 즉시 망원경 개발에 착수해 1609년부터 확대율을 30배로 높여 천체를 관측했다. ‘달 표면은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광경 중의 하나다 … 그것은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모양이 아니라, 표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지구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광대한 돌출부, 깊은 계곡과 만곡부가 가득하다.’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가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확신한 갈릴레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리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순진한 것이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라도 기존의 주류 체계 및 신념과 맞지 않는 것은 배제 당해야 했던 것이다.


 

갈릴레이가 직접 그린 달의 변화도

 

 

 

 

교황청이 갈릴레이를 공식 복권시키기까지는 350여 년이 걸렸다. 1979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갈릴레이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 실수였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1992년 특별위원회가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 최종 보고 후, 10월 31일자로 갈릴레이는 교회에서 복권됐다. 갈릴레이의 이름은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상징적 아이콘이다. 1989년 10월 18일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를 통해 발사된(2003년 9월 목성 대기권 진입, 소멸) 목성과 그 위성 탐사선 이름은 갈릴레오호다. 유럽연합(EU)이 미국의 GPS에 대응해 추진하는 새로운 전 세계 위성항법시스템(GNSS)의 프로젝트 이름도 갈릴레오다. 두 개의 좌표계가 서로 일정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때, 한쪽 좌표계(관성계)에서 다른 쪽 좌표계로 뉴턴의 고전역학에 따라 변환해주는 법칙의 이름은 갈릴레이 변환(Galilean transformation)이다.

 

망원경을 들고 있는 갈릴레이 초상화(1597~1681년경 작품)


갈릴레이는 2009년 세계 천문의 해를 맞이하여 주조된 25유로 기념주화의 도안 인물이다. 갈릴레이의 얼굴과 그의 망원경이 나와 있고 배경에는 갈릴레이가 그린 달 표면 그림이 나와 있다. 세계 천문의 해도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 정해진 것이다.

 

종교재판 이후 갈릴레이는 피렌체 근교에서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1636년 73살 때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을 완성하고 2년 뒤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출간했다.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헌신적인 딸의 도움으로 완성한 최후의 역작이었다.

‘슬프다. 앞선 모든 시대의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한계를 내가 탁월한 관찰과 명석한 논증으로 백배, 아니 천배나 넘게 확장시켜놓은 이 하늘, 이 지구, 이 우주가 이제는 나의 육체적 감각으로 채워지는 좁은 영역 안에 움츠러들고 말았구나.’ 말년에 이렇게 탄식한 갈릴레이는 1642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5일 성탄절(당시 영국에서 사용 중이던 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이듬해 1월 4일)에 영국에서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갈릴레이의 천문노트>(앨버트 반 헬덴 지음, 승산) 1610년에 갈릴레이가 출간한 책으로, 망원경으로 관찰한 천체 관측 기록이다. 새로운 천문관측법을 삽화를 넣어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영역자 반 헬덴의 해설과 맺음말 부분이 갈릴레이의 천문학을 이해하는 게 요긴하다.

 

<갈릴레이>(요하네스 헴레벤 지음, 한길사) 어린이 위인전 성격의 책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사실상 유일한 본격적인 갈릴레이 전기다. 많은 서점에서 품절이나 절판된 점이 아쉽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갈릴레이의 천문노트갈릴레이갈릴레이의 생애.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

 

<갈릴레이의 생애.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베르톨트 브레히트 외, 두레)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가 다른 두 작가의 작품들과 함께 실려 있다. 과학자 또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주제로 한다고 볼 수 있는 세 편의 작품을 모은 선집인 셈. 브레히트는 이 희곡에서 갈릴레이를 고문 기구를 보고 두려워 자신의 학설을 철회한 소심한 인물로 그려냈다. 브레히트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갈릴레이가 아니라 현대의 지식인들이다. 같은 희곡 작품을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브레히트 희곡선집 2>(임한순 엮음)에서도 만날 수 있다.

 

종교적 통념을 뒤집은 갈릴레오의 진실은 무엇일까. 종교재판정에서 최후 진술을 통해 이단적 의견의 철회를 맹세하고 목숨을 건진 그의 본질은 교회의 적일까, 과학의 순교자일까. 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과연 진실일까.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자연계의 근본적인 법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일을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며 과학적 세계관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2009년은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세계 천문의 해'이기도 하다. 갈릴레오는 완전히 복권된 것일까.

이 책은 퀘퀘한 문서보관소에 묻힌 진실을 찾아 과연 교회와 갈릴레오는 화해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 저자는 400여년 동안 바티칸 비밀문서 창고에 잠자고 있던 갈릴레오 재판의 비밀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간다. 그 요체는 어두운 거래와 협상이었다고 저자는 1999년 공개된 갈릴레오 문서(갈릴레오에 대한 3쪽짜리 문서라는 듯에서 'G3 문서'라 불린다) 등을 통해 실증한다. 또 그를 화형대에 보낼 생각으로 재판 당시 교황청에 보관돼 있던 관련 문건들의 분석도 주요 논거로 제시된다.

저자에 따르면 갈릴레오 재판은 일종의 쇼였다. 교회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과학 이론을 고집할 것인가, 덜 위험한 천동설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릴 것인가를 둔 진실 게임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두께는 때로 진실보다 강하다. 현실적으로 지동설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던 교회의 선택은 교묘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동설에 대해 "상호 동의하는 결론을 얻어야 한다"며 공식 입장을 천명, 갈릴레오와 당시 교황 사이의 갈등이 은유적 '신화'였던 양 묘사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으로 교회가 과학을 박해했던 일 자체를 덮어버리려는 의도였다. 교황청은 그 해 갈릴레오에 대한 사면ㆍ복권을 선언했지만,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책은 실증적 문건들을 통해 이 같은 갈릴레오를 둘러싼 갑론을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갈릴레오의 삶에 대한 생생한 서술에 있다. 독신으로 살았지만 자신의 애인과 그녀가 낳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았던 이야기, 고집스러운 어머니와 방탕한 동생에게 시달렸던 사연, 학자로서의 야심을 잃지 않으며 반대자들을 조롱할 수 있었던 문장력과 유머감각 등 갈릴레오의 숨겨진 개인사는 이 책의 별미다. 또 그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정치적 분열과 갈등 상황 에서 슬기롭게 운신해 가는 모습 등은 자연과학자의 삶을 그린 기존의 책에서 보기 힘든 것들이다.

"가톨릭은 지금도 일종의 마술적 행위에 신앙의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믿음이 있는 한 교회가 갈릴레오를 '용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322쪽) 저자의 서술은 이 책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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