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 1724 ~ 1804 독일 철학자 )의 윤리

 

 글 / 이근호

 

칸트의 윤리는 인간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만약 인간이 신이라면 억지로 통제해야 할 충동이 전혀 없음으로 ‘자기 강제’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신성하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해야만 하는 것(당위)’로 나타난다. 이것인 인간을 굳건하게 만든다고 한다.

  

칸트는 법과 덕(德)을 구분하면서, 법은 오직 형식적 조건에만 관계하지만 덕은 선택의 내용, 즉 대상에 관계한다고 한다. 따라서 법은 순전히 외적 자유에만 관계하지만, 덕은 선택의지의 대상에 관계하므로, 덕은 내적 자유, 즉 목적의 설정을 자신의 영역으로 가진다.

  

칸트는 ‘윤리학 원리론’에서 자신에 관한 의무와 타인에 관한 의무를 다루고 있다. 자신에 관한 의무는 다시, ‘자기 자신의 완전한 의무에 대하여’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불완전한 의무에 대하여’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완전한 의무는 다시 ‘동물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오직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로 나누고 있는데, 전자에는 자살, 욕정, 부절제 등을 피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후자에는 거짓말, 탐욕, 비굴 등을 피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불완전한 의무는 자신의 자연적 완전성의 발전과 증대에 향한 의무와 더불어서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을 고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타인에 대한 덕 의무에 대하여는 ‘오직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의무에 대하여’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의무에 대하여’로 나누어지는데, 전자의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로 나누어지는데,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란 친절, 감사, 동정의 의무를 말하고, 후자는 오만, 험담, 비굴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속한다.

 

대체로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라고 할 수 있고,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는 ‘완전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는 각각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만약에 덕 의무를 넓고 불완전한 의무라고 한다면, 덕론에 완전한 의무들이 포함되어야만 하는 이유와, 개별적인, 즉 달리말해서 ‘좁은 의무’들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와, 또한 넓은 이유에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여지’와 ‘융통성’이 허용되는지를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완전한/불완전한 의무의 구분이 의무의 수혜자에 따른 구분이라는 말은, 완전한 의무는 의무의 수혜자가 모든 특정한 개개인인 반면, 불완전한 의무는 의무의 수혜자가 특정 개개인이 아니라 특정되지 않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완전한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그 의무의 수혜자인 특정한 개인이 잘못 대우받는 반면에, 불완전한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잘못 대우받는 특정한 개인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행위자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할 뿐이다.

  

이 원리로 인해 불완전한 의무의 이행은 칭찬받을만한 것이지만, 완전한 의무의 이행은 단지 마땅히 할 것을 했을 뿐이기에 칭찬의 대상이 안 된다. 예를 들어 존경의 의무는 완전한 의무로서 각각의 개인에 대해 의무지고 있는 것인 반면에,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로서 의무의 수혜자는 모든 사람이지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따라서 자선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이고, 특정한 사람에 대한 의무가 아니므로 언제 누구를 도울지 결정할 ‘여지’를 갖고 있다.

  

완전/불완전한 구분과 달리, ‘넓고/좁은’ 의무의 구분은 의무가 요구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넓은 의무, 달리 말해서 ‘넓은 구속성의 의무’는 내적 행위를 실행해야 할 의무이다. 준칙 채택의 의무가 넓은 이유는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결정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좁은 의무는 항상 실행되어야 할(또는 하지 말아야 할) 특정한 외적 행위가 지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약속을 지키는 것은 좁은 의미인 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넓은 의미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윤리적 의무는 준칙 채택의 의무이기 때문에 넓은 구속성을 갖는다.

  

윤리적 의무(즉, 덕 의무)의 범주에는, ‘넓고 완전한 의무’와 ‘넓고 불완전한 의무’를 가지며, 그 대신 ‘좁고 완전한 의무’는 법리적(法理的)의무에 속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칸트에 의하면, 덕 의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로 나누어진다. 타인에 대한 의무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 ‘타인에 대한 존경으로부터의 의무’로 나누어진다.

  

사랑의 의무에는 자선과 감사와 동정의 의무가 있다. 존경의 의무는 소극적으로 표현되는데, 타인을 오만하게 대하지 않을 의무, 타인의 잘못을 조롱하지 않을 의무 등이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타인을 단순히 수단으로 대하지 말하는 의무이다.

 

 이들 의무에 해당하는 덕들은, 자선( 타인을 도와 그들의 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게 하려는 성향), 감사, 동정(타인의 운명에 공감하는 성향), 겸손, 존경심 등이다. 이런 덕에 반대되는 악덕은 질투, 배은망덕, 악의, 오만, 험담, 조롱 같은 것이 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그것이 덕 의무이므로, 넓은 의무구속성을 가지며 따라서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준칙(본인의 기본 원칙)’과 관계된다. 사랑의 의무는 선의의 준칙을 채택하도록 요구하는데, 이것은 실천적 인류애로서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이다. 이때 그 타인이 사랑받을만한지 그렇지 않은지와 상관없다. 

 

타인을 사랑하고 있는 한에서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일은 쉽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쉽지 않고, 이런 경우, 자신이 하려는 일을 심사숙고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기 식구를 돕기보다는 구호프로그램에 기부하려고 할 때, 혹은 자신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보다 자신보다 모자라는 사람을 과연 존경해야만 하는지를 놓고 주저할 때, 그 사람의 도덕적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윤리적 의무인 까닭은, 그들이 지닌 인간성이라는 인류적 보편성이 무조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상관없이 그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덕 의무는 우리에게 타인의 내재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 가치에 준해서 그들을 대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따른 선호나 구별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의무가 ‘불완전’하다는 의미는 이 의무가 각각의 모든 특정한 개개인에 대한 것(이것은 완전한 의무이다)이 아니며, 한 의무의 준칙이 다른 준칙에 의해 제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웃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이 자기 부모에 대한 사랑에 의해 제한될 수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덕 의무인 자선의 의무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각각의 모든 사람을 다 도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 얼마나, 무엇을 도울지 결정할 ‘여지’를 갖는다.

  

따라서 자신의 자녀를 타인의 자녀보다 더 많이 돌보는 것은 도덕성에 반대되지 않는다.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에 근거한 구별은 ‘허용 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자녀보다 자신의 자녀에게 정성을 더 많이 쏟는 것은 허용 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웃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우연한 이유로 인해 그들이 도움 받을 권리가 사라졌다고 말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의무는 불완전한 의무이므로, 국제구호단체는 나에게 기부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기부할지 여부는 당연히 나의 결정이 달렸다. 하지만 나는 타인을 도울 일반적인 의무를 갖고 있고, 누구라도 나의 도움을 받을 후보가 될 수 있다.

  

내가 그들을 돕지 않더라도(불완전한 의무이므로), 나는 그들의 도덕적 지위를 인식해야 하는 의무(완전한 의무)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나의 자녀와 나의 부모를 우선적으로 돕기로 했다고 해서, 나의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나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 자선이나 동정이라는 불완전한 의무가 행위자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때 마치 완전한 의무(특정한 사람에 대한 의무)로 간주되어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적한 길을 산책하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보았다면,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산책하던 사람의 완전한 의무다. 만약 아이를 구하지 않고 지나친다면, 그 아이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 아이를 돕는 것이 완전한 의무로 보인다고 해서, 그 의무의 수행이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떤 의무의 이행이 칭찬받을만하다는 것은 그 행위의 수혜자가 행위자에 대해 감사의 의무를 진다는 의미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산책한 그 사람은 나름대로 내부적 의무의 형량을 무엇이 우선인지를 저울질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 쉬운 예를 들면, 개인적인 사랑의 감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어린 자녀와 늙은 부모를 보살피는 것이 의무이고,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는 친척을 돕는 것도 의무이다. 이런 의무들이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는 해도, 아직도 불완전한 의무가 되는 이유는, 행위자가 어떤 한 내부 준칙으로 다른 내부 준칙을 어떻게 제한할지 결정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도움 받을 길 전혀 없는 친척보다 자신의 자녀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약 윤리적 의무가 ‘넓은 의무’로서 목적의 준칙의 채택을 요구할 뿐 특정한 외적 행위의 실행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개별적 상황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상이한 목적의 준칙들을 올바르게 형량하는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런 형량들은 불완전한 의무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데, 완전한 의무는 절대적인 우선권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스러운 사람은 자선의 준칙에 따르는 것이 의무의 수혜자에게 존경의 결여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준칙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존경은 완전한 의무이고 자선은 불완전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둘 다 불완전한 의무인 자선의 준칙과 재기 재능의 계발의 준칙이 충돌하는 경우이다. 즉 학문적 성취를 위해 자녀 돌보기를 일정 정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자녀를 돌보기 위해 학문적 성취를 포기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고려되는 사항들의 형량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칸트는 우리 안에 동정의 느낌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동정심의 역할은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민감하게 감지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정심은 자선의 의무를 보완할 수 있다. 즉 자선의 의무는 언제, 누구를 도울지 지정하지 않으므로(즉 불완전한 의무이므로) 타인을 돕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잘못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정심은 우리의 성품을 타인의 곤궁에 민감하게 만들어서 특정한 경우를 자선의 의무를 실천할 상황으로 인지하게 한다. 우리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과 자기 재능의 계발에 대한 관심에 민감해짐으로써, 어떻게 부모로서의 책임과 학문적 성취 사이의 균형을 잡을지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의무와 관련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해서, 사랑 자체가 우선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 자녀는 부모에 대해 그들이(부모) 자신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지에 상관없이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보살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부모에 대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들보다 더 많이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 타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사이의 개인적 관계와 그 관계가 만들어낸 특별한 기대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도 이에 못지않게 역시 특별한 관계와 그 관계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전적으로 보살필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회에서는, 자녀의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불완전한 의무가 완전한 의무에 가까워진다. 이런 기대는 친족 집단이나 친구 혹은 연인 사이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의무를 완전한 의무처럼 만드는 것은 사랑이나 애정 자체가 아니라 개인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기대일 뿐이다. 사랑과 애정은 개인적 관계에서 마치 필수요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과 애정이 식어도 그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면 그 관계 내부의 의무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구속적이다.

  

불완전한 의무인 사랑의 의무가 자선으로 이끄는 ‘선의의 준칙’을 채택할 의무인 반면, 완전한 의무인 타인에 대한 존경의 의무는 타인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성의 존엄성으로써 우리 자신의 자기존중을 제한하는 준칙, 즉 타인을 단지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준칙으로 표현된다.

  

존경의 의무는 타인이 그의 인간성 때문에 무조건적인 가치를 통해서 자신에게 허용된 목적을 제한하라는 의무이다. 이것은 완전한 의무이다. 하지만 존경의 의무는 어떤 특정한 행위를 의무로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준칙의 채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완전한 의무’인 동시에 ‘넓은 의무’이다.

  

넓은 의무인 덕 의무는 자유로운 선택의지를 위한 여지를 남겨 둔다. 이 자유의지는 스스로 자기 사랑을 타인에 대한 존경으로 제한시킬 수 있는 자유의지이어야 한다. 내가 ‘자유의지’에 따라 나의 자기 사랑을 제한함으로써 타인에게 보여주는 존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그런 태도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내가 받아야 될 존경이 내가 타인에게 보여주어야 할 존경으로 인해 제한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에게 아무런 존경도 보이지 않는 악한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존경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악한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해도 최소한 자신의 인간성 때문에 갖는 존엄을 포기할 수는 없고, 우리는 그런 존엄에 대한 존경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범죄자의 처벌도 그것이 인간성 자체를 모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존경의 의무가 ‘완전한 의무’이므로 우리는 모든 각각의 인간을 존경으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마치 불완전한 의무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한에서’ 그들을 도와야만 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 대해서만 존경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특별한 자질(뛰어난 지능, 기술, 돈, 성격,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런 것이 없는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이런 가치 때문에 더 많은 존경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격의 가치를 우연한 속성과 성취에 근거해서 평가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잘못된 것이다.

  

지능이나 능력의 차이는 도덕적 가치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존경받을 자격을 갖기 위해 더 해야 할 것이 없다. 인간성이 갖는 내재적 가치는 무조건적이고 비교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가치로 인해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존경의 의무는 우리에게 타인의 내재적 가치를 인식하여 그에 따라 대우하라고 요구한다.

  

이 말 뜻은,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뛰어난 능력이 그들의 가치를 더 높인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만약 그들이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면, 그들은 동일한 점에서 자기들보다 뛰어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의무를 덜 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실력이 낮은 자에 대해서 실력이 높은 자가 존경할 의무가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든지,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존경 받는 것 이상을 주장하지 말아야 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실패를 했더라도, 우리는 어떤 점에서 우리보다 뛰어난 타인 앞에서 자신을 비하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오만과 비굴은 양쪽 다 악덕이다. 오만한 사람과 비굴한 사람은 모두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우연한 속성에 근거해서 평가한다. 자신에게 들어있는 내재적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그래서 타인에게 존경을 요구하지 못하는 태도)만큼이나 자신에게 더 높은 가치를 요구하는 것(그래서 타인을 존경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결론

  

칸트에게 있어 의무의 준칙을 ‘채택’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에 따라 한번 행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무를 준칙을 채택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그 준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덕을, 의무의 준칙을 채택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정의한다.

  

수영을 배우려는 목적과 도덕적 목적(예를 들어, 타인의 행복)은 모두 장기적인 기획들로 나타나는 목적들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수영을 배운다는 목적은 완수될 수 있고, 그래서 미래에 달성되어 할 ‘목표’로 나타난다.

  

그러나 칸트는 보기에 도덕적 목적의 실현은 완수 될 수 없고 따라서 미래에 달성되는 목표의 형태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의 완성이나 타인의 행복 같은 것은 ‘완수 될 수 없는 장기적 기획’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이들 목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수영을 위한 필연적이고 끊임없는 실천은 그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수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표인 것은, 그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는데 필연적인 행위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부모 되기’라는 기획은 그런 것이 아니다. 즉 특정 시점에 ‘좋은 부모 되기’라는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목적으로 나아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실천함’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행위가 곧 목적이 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악을 향하여 본성적 성향이 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인간이 지닌 동물적 경향성으로서의 본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동물적 경향성을 행위의 충분한 이유로 생각하여 정당화하려는 인간적 경향성 때문에 온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만약 덕이 동물적 성향에 대한 극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의지의 강인함’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적 성향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도덕법칙과 우연히 일치하기만 하면 스스로 자신이 도덕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자기 사랑’을 행위의 객관적 법칙으로 삼는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은 자기 사랑을 도덕적 근거로 삼는 위선이며 기만이다. 칸트는 여기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용기인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행위에 대해, 그 행위가 실제로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라는 것으로 스스로 폭로하고 인정하는 용기를 말한다. 따라서 ‘나약함’도 악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만 혹은 위선에 빠지는 근본적 이유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공존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 사회 속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의 가치를 타인의 눈을 통해 평가하게 되고 동시에 타인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간성의 가치를 자신과 비교해서 평가한다. 이것은 칸트는 ‘문화의 악덕’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어떤 혁명이 필요한가? 칸트는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신봉한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즉 “의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밖에 명령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서있다. 예지가 이성적으로 명령을 내리면 심성에 큰 결단이 벌어지고, 그 후로는 비록 감각적 본성이 자동적으로 따르지는 않기만 조금씩, 조금씩 얻어지는 경험적 덕에 의해서 습관적 성품으로 바뀌게 한다.

  

인간은 결코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긴 시간동안의 실제경험이 필요하다. 단 한 번의 불변의 결단으로 선한 인간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작용과 성장 속에서만 선한 인간이 된다.

  

인간에게 있어 끊임없는 전진만이 자유의 달성에 적합하며, 우리 본성 안의 근본악을 제거하는데 적합하다. 덕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무조건적인 가치로 인식으로 그것을 목적으로 삼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다. 이 투쟁은 또한 무조건적인 가치인 인간성을 조건적인 것으로, 즉 자기 사랑의 원칙 아래에 두려고 하는 부패한 경향성을 분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무는 행위의 목적이 아니라 행위를 해야만 하는 이유다. 우리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무를 위해서’ 해야 한다는 (마치 의무 자체가 우리 행위의 목적인 듯이) 뜻은 아니다. 그 의미는 도덕법칙이 명령하는 것을 (타인을 돕기, 자신을 존경하기), 그것이 명령되기 때문에, 즉 도덕적 명령이 의무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법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을 요구한다. 윤리적 의무는 여기서 비롯된다. 인간이 지닌 보편성 존엄성이라는 법칙에 대한 존경이 칸트 윤리의 시작이요 과정이요 끝이다. 

 

(평가)

 

십자가를 모르면 무조건 이단이다. 따라서 칸트도 무조건 이단이다. 이것은 칸트의 윤리관 이 새삼스럽게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의해서이다.

 

 

“인간이 모두 이단으로 태어났다

칸트도 인간이다

고로 칸트도 이단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죄인이 아니다. 단지 악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다. 또한 인간은 의인이 아니다 단지 선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다.

  

따라서 단순히 선한 본성을 잘 보존하고 키우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인간 내부에 있는 ‘악의 원인’마저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일 매일 본인이 가진 자율성(자유의지)으로 어떻게 하든지 결단내리고 용기를 갖고서 자신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악과 싸워 이겨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선한 준칙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악이 이러한 법칙을 위반하도록 자극함에도 불구하고, 그 악에게 저항하지 않는 심성, 그 자체가 곧 진짜 인간의 적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예수님께서 죄있는 육신으로 오신 이유를 모른다. 그에게 있어 단지 시범자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노리는 바이다. 십자가 능력만이 매일같이 성도 자신을 손댈 자격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손 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손대는 것은 우리를 우리의 윤리적 힘으로 살리고자 하는 환상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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