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영성이란 말을 즐겨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령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자세하게 들어보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선뜻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놀라움과 배신감을 가지고 오히려 실망감만 커져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제 영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1. 영성의 의미

성경에는 우리가 지금 말하려는 의미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영성이라는 한글 단어가 대상 16:19과 시 105:12에 두 번 나오는데, 이 때의 영성(零星, a few men in number)이라는 말은 ‘수효가 적어서 보잘 것 없는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는 단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이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천주교에서는 성인숭배, 성인의 유물들에 대한 찬미나 성체 참배, 또는 대중 축제에서 사제가 가지는 주도적인 기능, 즉 화해적 중보기도의 기능을 의미해 왔다. 그러나 수도사나 이상주의자들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수도사들은 영성이라는 말을 금욕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을 했고, 이상주의자들은 명상 추구를 향한 삶의 헌신이나 종교적 이유에서 나온 극도의 자기 부정이나 고행이라는 의미로 사용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청교도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긍정적이면서도 매우 폭이 넓은 의미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청교도들은 실천적인 하나님의 힘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불렀고,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거나 소유 또는 행사하는 것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말하는 일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영성이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일반적인 정의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말을 사제나 수도사 같은 특정한 사람이나, 명상추구 또는 은사 체험 같은 특별한 행동에만 제한해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영성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하고, 모든 행동에 관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혼 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하는 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2. 영성의 요소

영성을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든지 간에, 영성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필수적으로 들어 있어야 한다.

 

1) 하나님 중심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거나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영성은 참된 영성일 수 없다. 영성을 사람이 애써서 이루어 가는 금욕이나 은사 생활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것은 영성이라기보다 지극히 인간중심의 삶이요, 이기적인 삶이 되기 쉽다. 기독교 밖에도 금욕적인 삶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나 힌두교의 수련자들을 영성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참되신 하나님을 향한 금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령들도 희한한 영적 현상들을 생겨나게 한다. 악령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고(출 7:12), 돼지 떼를 몰아가고(막 5:13), 예언을 하게 한다(렘 27:14). 그러나 우리는 악령의 역사에 대하여 영성이 충만하다고 하지 않는다. 악령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와는 달리, 악한 결과만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영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 즉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졸거나 주무시는 일이 없다(시 121:4). 우주 안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없다(시 139:8).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 있다.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 하기를 잘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을 한다 하면서도, 그 입으로 남을 헐뜯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는 사람과 다르다. 신비한 환상을 보았다 하면서도, 세상 유희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지내는 사람과는 다르다. 예배나 기도 시간만이 아니라, 일을 하든지, 여행을 하든지, 사람을 만나든지, 놀이를 하든지, 잠을 자든지를 불문하고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Before God)의 자세, 이것이 바로 참된 영성을 가진 삶이다.

 

2)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의 삶은 반드시 성경 중심의 삶으로 연결이 되게 마련이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된다. 만일 성경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게 되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거나 우리 자신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참된 영성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 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영성은 성경을 통해서라야만 참되게 주어지고, 또 유지될 수가 있다.

 

성경에서 멀어져 있거나 성경에서 빗나가 있는 것은 제아무리 오묘한 신비라고 해도 참된 영성이 될 수 없다. 천사의 말이나 삼층 천의 비밀도 하나님의 비밀의 책인 성경과 어울리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는 꽹과리 소리나 허탄한 신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우리의 영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어린 아이의 입을 통해 들리거나 무식한 사람에 의해 외쳐진다 하더라도, 참된 영성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기독교 역사에 기억되고 있는 유명한 성자들이나 영성 깊은 사람들은 모두다 성경을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한자라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지켜보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대단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처럼 인정받고 세계적으로 영웅처럼 추대되던 사람이라도 성경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은 모두다 그들의 영성이 거짓 영성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난 참된 영성은 상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한다.

 

3) 교회 중심
영성은 교회 생활을 통해 표현이 되고, 성숙되어진다. 왜냐하면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엡 1:23),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엡 2:22). 사람의 영성 수준은 그 사람의 교회생활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영성이 높은 사람은 영성의 주된 관심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는 하는 사람은 교회의 예배와 봉사에 열심을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끔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지 않고, 영적 갈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원이나 특별집회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그 사람의 처지나 그 교회의 상황에 문제가 있어, 일시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의 중심 요소가 되는 교회 생활에 유익을 주기 위한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교회를 등한시 하며, 그런 것만 따르는 사람은 참된 영성을 가지기가 매우 어렵다. 오히려 있던 영성마저도 잃어버리거나, 변질시킬 위험이 더 크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전 14:1, 벧전 2:2)고 강조하셨던 사도들께서, 가시는 곳마다 먼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면서(히 10:25) 성도들이 피차에 영적 유익을 도모하라고 하셨던(살전 5:11)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4) 사모함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거나 교회생활을 하는 것 이외에, 신령한 삶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을 가져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가지는 간절한 소망은 기도의 형태로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성을 높이는 일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오순절 날의 성도들은 한 곳에 모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행 1:14). 그 기도는 ‘전혀 힘쓰는’ 기도였다. 이것은 간절히 사모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구하는 자식에게 좋은 음식을 주려고 하는 부모들보다도 항상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 하는 분이다. 그래서 구하는 자에게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이 충만하게 해주신다(눅 1:13).

 

영성이 충만한 생활, 즉 우리 안에 항상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생활을 위해서는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에 영성이 충만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늘 깨어 근신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3. 영성과 신비주의

 

영성과 신비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영성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수준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신비가 아니라 일상이다. 신비적 체험을 많이 가졌다거나 영적 은사를 많이 체험한 것을 마치 영성이 충만한 것과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영성이 충만해도, 특별한 신비 체험을 못가질 수 있다. 신비 체험을 한 사람도 참된 영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다.

 

영성의 자리는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다. 그리고 영성은 결과적 현상만이 아니라, 동기와 과정, 그리고 결과와 모두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영성과 신비를 혼돈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영성이란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영성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볼 때, 영성은 영혼 속에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의 핵심인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사모함은 성도의 삶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영적인 것이기에 신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성을 신비와 혼돈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잘못된 함정에 빠지는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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