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영적생활

기도는 우리가 모두 ‘영성’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속한다. 영성은 사실 ‘영적 생활’(vita spiritualis)에 대한 가장 확실한 표현이다. 따라서 ‘영적’(spirituale)이라는 말이 여기서 고유하게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질문해볼 가치가 있다.

‘영’(spiritus)에서 유래한 ‘영성’이란 말은 현대의 통상적인 언어 사용 안에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과는 달리 ‘영적 본성’, ‘내적인 삶’, 인간 인격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행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신학적인 언어에서 ‘영성’은 단순히 ‘신심’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다양한 신심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영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사실 형용사 ‘spirituale’(pneumatikós)는 한결같이 성령의 위격을 언급한다. 따라서 ‘영적’(spirituale)이란 말은 언제나 성령으로부터 야기된 ‘성령의 충만’을 의미한다.

교부들은 ‘영적인’(pneumatico) 것과 ‘자연적인’(psichico) 것 간의 바울적 구분을 받아들여 그것을 ‘영적 생활’에 적용하였다. 에바그리오가 ‘영적인’ 어떤 것을 정의할 때, 그는 보통 ‘성령으로부터 야기된’, 혹은 ‘성령으로부터 생기를 부여받은’ 어떤 것을 생각한다. 그렇듯 예를 들어 사물들의 ‘영적인 근원들’(lógoi)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영적 관상’은 사물들의 계시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언급된다. 비슷하게 덕행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으뜸인 사랑은 세례 받은 사람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열매들’이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영적 스승’이라고 일컬어지는데, 그는 ‘영적 사부’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 따라서 바울적 의미에서 ‘영적’이라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확실히 ‘영적 생활’의 진수인 ‘기도’ 역시 매우 자주 ‘영적’(pneumatiké)이라고 언급된다. 기도는 또한 ‘영과 진리 안에서’, 즉 ‘성령과 독생 성자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자주 ‘참된 기도’라는 말이 언급된다.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에바그리오는 영혼 안에서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을 구분한다. 후자는 다시 ‘정념적인 부분’(irascibile)과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passionale)으로 함께 명시되는 ‘욕망적인 부분’(concupiscibile)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이 두 ‘힘’을 통하여 우리는 감각적인 세계와 관계하며, 그것들은 영혼 안에 ‘비이성적인’ 욕정들을 들어오게 하여 ‘이성적인 부분’을 방해하여 눈이 멀게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절대적으로 영혼의 이 ‘논리적 부분’에 속한다. 사실 기도는 이성의 보다 탁월하고 보다 순수한 훈련이다. 기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며, ‘감상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말의 현대적 의미로 하나의 순수한 ‘이성적 활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성’(noȗs)은 ‘지능’(intelligenza)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중심’, ‘인격’, 혹은 성서적으로 ‘내적 인간’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Gabriel Bunge, Vasi di argilla, Edizioni Qiqajon, Comunità di Bose 1996, 27-33.




영성생활과 영적 은사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靈性)이란 단어는 사실 최근 들어 개신교회에서 자주 사용하게 된 단어 중 하나인데, 지성(知性)이나 야성(野性) 등의 유사한 다른 말의 용례 및 의미를 고려할 때, 영적인 것, 혹은 신령(神靈)한 것에 속한 품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정의이고, 이 말이 기독교 내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보다 전문성을 띠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영국 더람대학교(University of Durham)의 신약신학 교수인 스티븐 바턴(Stephen Barton)은 그의 저서 {사복음서의 영성}에서 "영성"이란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느끼며 그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영성"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 아래서의 삶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산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였던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살아간다는 말의 또다른 표현인데, 이 모두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호흡(呼吸)보다도 더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신다. 그런 주님을 날마다 매 순간마다 느끼며 호흡하고 사는 것이 영성생활의 근본 중 하나일 것이다.

2. 영적 은사란 무엇인가?

먼저 영적 은사(恩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선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주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은사(카리스마, ca,risma)에는 크게 영적 은사와 개인적 은사 두 종류가 있다.
개인적 은사란 독신(獨身)과 같은 것으로, 개인의 삶의 양식과 관련된 것이라 볼 수 있다(고전 7:7, 17, 20; 1:7; 롬 11:29).
한편 영적 은사는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은사인 것이다.
그런데 영적 은사라 하면 대체로, 우리는 방언, 예언, 통변, 신유 등의 특별한 무엇을 생각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은사의 전부는 아니다.
특별히 영적 은사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은사는 매우 다양하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神癒), 능력 행함, 예언, 영(靈) 분별, 방언, 방언 통역(고전 12:4-11), 그리고 사랑(13장).

물론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은사 목록의 서열(序列)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나, 우리가 흔히 은사로서 알고 있는 신유, 방언, 예언, 통역 등보다는 오히려 지혜와 지식의 말씀, 그리고 믿음이 목록의 선두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은 12장 27-31절에서 교회의 직분과 함께 다시 은사가 소개될 때, 사도, 선지자, 교사 다음에 능력, 신유, 방언 등의 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에서 다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도, 선지자, 교사에게 능력, 신유, 방언 등의 은사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들 지도자에게는 이런 능력적 은사보다도 오히려 지혜와 지식의 말씀, 그리고 믿음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말씀, 그리고 믿음은 내면적인 은사인 반면에 신유, 방언, 예언, 통역 등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은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적인 은사가 외적인 은사보다 더 우선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은사 목록이 제시된 후 12장 31절에서 더욱 크고 제일 좋은 은사로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인데, 이 역시 내면적 은사다.

아울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외적 은사인 방언 및 예언과 비교하면서 역시 내적 은사인 사랑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들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에서 은사는 복수(cari,smata)로 사용되었기에, 이 더욱 큰 은사가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2장 9, 28, 30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병 고치는 은사" 역시 하나의 은사를 가리키면서도 복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둘째로, 그들은 신약 어디에서도 사랑을 영적 은사로 표현한 곳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8절의 구제나 긍휼 역시 이곳 외에는 신약 어디에서도 은사로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은사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를 직역하면,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욱 큰 것(mei,zwn)은 사랑이라"고 번역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12장 31절의 "더욱 큰 은사"(ta. mei,zona)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와 14장 1절의 "사랑을 추구하라"는 같은 맥락에서 나타나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사이(13장)에 소개된 사랑은 은사로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과연 어떤 종류의 은사인가? 앞서 지적한 대로, 고린도전서 13장에 의하면, 사랑은 다른 은사인 방언이나 예언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고 귀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또 다른 목록의 은사를 소개하고 있는 로마서 12장에서도 사랑은 매우 중요한 덕목(은사)으로서 언급되고 있다(롬 12:9-10; 13:8-10).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을 율법의 완성(혹은 성취)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과 계명을 총 정리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마 22:34-40).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소개할 때 사랑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로써 아홉 가지 은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정작 열매(카르포스, o` karpo,j)란 단어는 단수(單數)라는 점이다. 열매는 하나인데, 사랑이 제일 먼저 소개되고 그 외 다른 여덟 가지 열매가 이어서 소개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 다른 여덟 가지 열매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이 경우에 따라 희락으로 나타나고, 또는 경우에 따라 자비로 나타나며, 또는 양성, 혹은 충성, 절제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은사의 표현에 있어서 근거와 중심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흔히 "사랑 장(章)"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지지를 얻는다.

사도 바울은 13장 4-7절에서 사랑을 소개하면서 오래 참음, 온유, 투기, 자랑, 교만, 무례하지 않음 등을 언급하는데, 사실상 이것들은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와 같거나 유사한 종류로서 이해된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5장과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을 연계하여 참작할 때 우리는 사랑이 성령의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열매이자 은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은사라면, 그것은 은사의 속성상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따라서 방언이나 예언처럼 별도로 받아야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랑의 독특성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령의 은사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랑은 직설법적 요소와 명령법적 요소를 아울러 지닌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성령의 은사로서 다른 신령한 은사를 추구하듯 사모하며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명령법), 동시에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자연스런 표현인 것이다(직설법).

그런데 성령의 열매이자 은사인 사랑은 이 두 속성을 함께 소유하는 까닭에 이 둘을 나누어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유비(類比)를 구원에 대한 진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롬 8:29-30; 행 16:31), 그러나 여전히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빌 2:12).
마찬가지로,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자 은사로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또한 여전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3.영성 생활과 영적 은사와는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위에서 소개된 영성과 영적 은사에 대한 논의를 고려할 때, 이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여기서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영적 은사인 사랑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결국 사랑은 우리들이 영성을 유지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즉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 외의 다른 은사들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하겠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하고 더욱 큰 은사는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이자 대표적 은사인 사랑 외의 다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은사들은 사실 영성생활에 있어서 사랑만큼 필수불가결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방언이나 예언, 신유나 능력 등의 은사가 없다고 하여 영성생활에 지장(支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아예 방언, 예언, 통역 등의 은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우리 삶의 표준적 지침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손에 주어진 이상 그 외의 다른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이런 외적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고, 이를 통하여 매우 건설적으로 긍정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은사들을 받은 이들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면서 더욱 깊이 있는 영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부 학자들은 방언이나 예언 등의 외적 은사들을 "부가적 은혜"(donum superadditu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좀더 설명하면, 방언이나 예언 등의 은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 이후 별도로 성도답게 살며 활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은혜 혹은 은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 예로서, 오순절 날 사도 및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한 일(행 2:1-4), 사마리아의 성도들이 믿고 세례 받은 이후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은 일(행 8:14-17),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 성령을 받은 일(행 10:44-48), 에베소의 제자들이 세례 받은 이후 사도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고 방언과 예언한 일(행 19:1-7)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고려할 때,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이러한 부가적 은혜 및 은사는 영성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은 아닐는지 모르나, 그러나 성도로서의 효과적인 영성생활을 위하여는 역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람직한 영성생활을 위하여 이런 종류의 부가적 은사들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은사란 본질적 속성상 전적으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은사들이 우리가 원한다고 하여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은사들을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사모하여 추구하기는 하되, 주어지지 않았다 하여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욱 크고 가장 좋은 은사로서 기본적이자 대표적인 은사인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4. 영성생활 중 영적 은사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

영성생활에서 영적 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같은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은사가 없다면 결코 올바른 영성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랑과 믿음처럼 기본적 은사는 아니어서 덜 중요할는지 모르지만, 그 밖의 외적 은사들, 즉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은사들 역시 효과적인 영성생활을 위해서는 매우 유익하고 긴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은사란 영성의 유지 및 고양(高揚)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도구로서 그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사실 가능한 많은 은사를 받는 것이 영성 향상에 더욱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은사란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지는 성격을 지녔고(고전 12:11),

따라서 모든 은사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까닭에, 그리고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이미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기본적 은사 외에 소위 부가적 은사들을 받지 못했다하여 전혀 낙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전지 하신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적합한 은사를 적절하게 나누어주심으로(고전 12:4-26)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도록 우리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자료제공: 김경진(金炅珍)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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