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소 '보진재' 4대째

 

100년간 마르지 않은 잉크… 대한민국 근대史를 찍어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회사,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보진재’(寶晉齋)가 다음 달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보진재는 1912년 8월 15일 서울 종로1가에서 처음 인쇄기를 돌렸다. 당시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인쇄소였다. 해방과 6·25전쟁, 70~80년대 경제성장기, IMF 외환위기 등을 거치며 수많은 인쇄 업체가 명멸했지만, 이 회사는 100년 세월 한우물을 파며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 보진재라는 회사 명칭도 바뀌지 않았고, 운영하는 주체도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창업주 김진환씨의 증손자인 김정선(61) 사장이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100년 동안 이 회사에서 나온 인쇄물을 모으면 작은 근대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교과서에서 졸업장, 잡지, 사전, 고속도로 통행권 등 우리의 자잘한 일상(日常)을 이루는 인쇄물들이 이 공장의 인쇄기를 거쳐 세상으로 나갔다. 일제 강점기 한글 연습용 습자서나 ‘문장’ 등의 유명 잡지도 이곳에서 인쇄했다.

 

1930년대에 크리스마스실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찍어냈고, 병풍 그림과 근대 회화, 세계지도 등의 컬러 인쇄는 보진재를 따라올 곳이 없었다. 1950~60년대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등장했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를 인쇄했고, 1970년대 대학입학 예비고사 문제지도 이곳에서 인쇄했다. 현재의 중·장년층 중에 보진재에서 인쇄한 출판물을 한두번 손에 쥐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 같았다. 특히 얇은 종이에 인쇄하는 성경 인쇄는 독보적 기술을 갖추고 있어 한때 전 세계 성경의 30%를 인쇄하기도 했다.

 

20년 전 대기업에 다니다가 가업을 이어받은 김 사장은 "지난 100년의 역사와 새로운 시대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구텐베르크 이후 550여년 만에 '종이에 잉크를 바르는' 인쇄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세상, 그의 입에선 전자책 태블릿PC 스마트폰 등의 단어가 자주 나왔다. 서울대 응용수학과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대기업 전산실에서도 오래 일한 그였지만, 이런 변화는 달갑지 않은 듯했다. 김 사장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잘못 휩쓸리면 안 된다"며 "인쇄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지난 100년처럼 묵묵히 사업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1912년 종로1가, 역사의 시작
일제강점기 한글 연습용 습자서, 잡지…
친일적 내용 담긴 원고는 인쇄주문 안 받아
1930년대 첫 크리스마스실, 1960년대엔 교과서

100년 동안의 일상을 기록하다

―100년 동안 수많은 출판물을 인쇄해왔는데도 '보진재'라는 이름은 낯설다.

"출판사가 아니라 인쇄 회사여서 그럴 것이다. 간혹 제약 회사 이름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다. 100년 넘은 기업이 국내에 더러 있지만, 그 100년 동안 상호를 유지하고, 한집안에서 계속 이어온 기업은 아마 우리가 유일할 것이다."

―보진재라는 이름의 의미는.

"진나라의 보물을 간직한 서재라는 뜻인데, 창업자인 증조부께서 좋아했던 북송 서예가 '미불'의 서재 이름이 보진재였다. '보진재 석판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옆 골목에서 시작했다."

―왜 석판 인쇄였나.

"나무나 금속으로 된 돌출 활판 인쇄는 단색의 인쇄물밖에 만들 수 없었다. 석판 인쇄는 돌에 그림을 새기고 잉크를 묻혀 찍는 방식인데 당시로선 컬러 인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신문이나 출판·인쇄업은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을 텐데….

"컬러 인쇄 전문이다 보니 책 표지나 서화집을 많이 했다. 그래서 오히려 (탄압을 피해) 살아남은 측면도 있다. 컬러 인쇄가 뛰어나서 1933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실을 인쇄했다. 아, 1938년 조선일보에서 독자 사은품으로 '8색 세계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지도를 우리가 찍었다. 당시에 8가지 색깔이 들어간 인쇄물은 요즘으로 치면 3D TV 정도의 최첨단 기술이었을까.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주로 어떤 잡지나 그림을 인쇄했나.

"증조부께선 민족문화를 고취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 계셨다. 친일적 내용을 담았거나 조선 민중의 정신과 사상을 해치는 원고를 인쇄해달라는 주문은 받지 않았다. '조선어사전'도 우리 인쇄소에서 나올 뻔했다."

―나올 뻔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1941년 한글학자들이 사전을 편찬해 원고를 우리에게 맡겼다. 한데 그 직후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관련자들이 구속됐고 일제는 사전 원고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우리는 해방될 때까지 그 원고를 간직했다. 하지만 해방된 다음에 원고를 되찾아가서 다른 출판사에 맡겼다. 조금 섭섭한 면도 있다."

1914년에 나온 서화 인쇄물과 1950년대의 초등학생용 교과서.

전 세계 성경의 30% 인쇄
성경용 종이인쇄 독보적… 100여개국에 수출
90년대초 동유럽 민주화 때 성경주문 폭발
다음 달엔 아프리카로 100만권 찍어 보내

전 세계에 수출되는 보진재 성경

보진재는 현재 전 세계 100여개국에 성경을 수출하고 있다. 성경과 찬송가는 1920년대부터 인쇄했다. 지난 17일에도 인쇄 공장 한편에는 불가리아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으로 인쇄된 성경이 제본을 기다리며 쌓여 있었다. 얇은 성경용 종이 인쇄에서 보진재를 따라올 만한 회사는 없다고 했다. 김 사장은 "과거에 비해 줄었지만 지금도 매출의 10%는 성경에서 나오고 있다"고 했다.

―성경 인쇄는 왜 힘든 것인가.

"성경을 찍는 얇은 종이를 박엽지(薄葉紙)라고 하는데, 종이를 다루는 기술이 중요하다. 제본을 위해 가지런하게 쌓기가 어렵다. 아무리 인쇄가 자동화돼도 그 얇은 종이를 다룰 수 있는 장인들이 있어야 한다. 다른 인쇄소로 빠져나갔던 주문도 다시 돌아오곤 했다. 1960년대 성경 1만부를 찍으면 우리는 로스(loss)가 3~4%였던 반면, 다른 인쇄소는 20~30%에 달했다."

―성경을 주로 수출하는 나라는 어디인가.

"요즘에는 아프리카 지역으로 성경이 많이 나간다. 80년대 말~90년대 초 동유럽이 민주화된 직후 그 지역에서 성경 주문이 엄청나게 들어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성경의 대량 인쇄를 불렀고, 이를 통해 중세 사회가 무너진 것과 비슷한 것 같다.

"한때 중국어 성경 주문이 들어오면서 기대를 했는데, 중국 정부에서 강력하게 제재를 했는지 얼마 안 가 뚝 끊겼다. 아랍어나 아프리카 쪽이 요즘 민주화가 많이 되는 것 같다. 다음 달 아프리카로 성경 100만권을 찍어서 선적해야 한다. 지금도 지구 어느 한쪽에서는 인쇄술 발명 이후 대량 인쇄 초창기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시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성경도 전자책으로 다 나왔고 읽어주기 기능까지 있다. 변화는 쓰나미처럼 닥칠 것이다. 전자사전이 처음 나왔을 때 가격이 30만원이나 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10만원까지 가격이 내려가야 보급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선물용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에 웬만큼 높은 가격에도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때 사전도 많이 찍었는데 지금은 찍지 않는다."

조선일보 1938년 6월 20일자 부록으로 제작한 8색 세계지도. 당시로선 첨단 인쇄물이었다. / 보진재 제공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던 아들
종이·잉크냄새 지긋지긋해 컴퓨터 전공
대기업 들어갔지만 40세에 '운명' 받아들여
아버지가 만든 70년史 뒤적이며 100년史 집필한때

벗어나고 싶었던 가업(家業)

어릴 적부터 종이와 잉크 냄새를 맡고 자란 인쇄소 집 둘째 아들은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다. 대학에서도 컴퓨터를 전공하고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 전산실에서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다. 벗어나고 싶어 일부러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임원 승진을 바라보고 있던 40세에 가업을 이어받게 된다. 그는 "그렇게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요즘 그는 30년 전 쓰인 70년사를 뒤적이며, 모르는 부분은 아버지 김준기(90) 명예회장에게 물어가며 100년사를 집필하는 중이다. 그에게 가업은 굴레이자 운명이었다.

―둘째 아들인데 경영을 맡았다.

"나는 6남매 중 둘째다. 위로 형이 한 명, 아래로 남동생 두 명이 있었다. 원래는 바로 밑 남동생이 맡기로 하고 미국 로체스터 공대에서 인쇄공학까지 전공했다. 하지만 이민을 떠났다."

―왜 맡지 않으려고 했나.

"어릴 적 자라면서 월급 때마다 잠을 못 주무시는 아버지 모습을 지켜봤다. 또 인쇄업이 주문을 따와야하는 수주 업종인데 사람 비위를 맞추며 영업하는 일, 나는 못할 것 같았다."

―경영 수업은 대기업에서 받은 셈인가.

"경영 수업이라고 할 것까지 없다. 아버님이 70세이실 때 아들이 4명이나 되는데 아무도 안 하겠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왔다. 당시는 영등포 당산동에 공장이 있었는데 오자마자 파업을 만났다. 대우자동차가 워낙 파업이 심한 회사여서 파업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온 다음에는 파업이 없다."

―무엇이 고민인가.

"지금 인쇄업은 일 자체가 너무 과당 경쟁이다. 산업 전체가 적자로 돌아서는 단계다. 인쇄 단가는 20년 동안 오르지 않고, 전자책과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 대응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디지털 교과서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너무 빨리 가려는 것 같다. 인쇄는 알게 모르게 사람 손이 많이 가는데…, 결국 자동화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설비도 바꾸고 빨리 변신해야 하지 않나.

"디지털 기계는 절대 처음에 사면 안 된다. 오프셋 인쇄기만 해도 수십년을 쓰지만, 디지털 기계는 3년만 지나도 못 쓴다. IT의 특성이다. 기술 격변의 초기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다."

―수많은 인쇄업체가 명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100년을 버텨온 것 자체가 엄청난 저력이다. 보진재만의 비결이 있지 않았을까.

"안분지족(安分知足), 만족을 아는 것이 우리 집안의 내력이다. 사업을 하면서도 욕심이 없었다. 어쩌면 회사가 크게 성장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대신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운 시절이 와도 버틸 수 있었다. 지금도 은행 빚은 없다. 대출을 해도 항상 그만큼의 예금을 넣어둔다. 그리고 100년 동안 세대를 이어오면서 쌓은 신용이 가장 큰 자산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1층 공장으로 내려갈 때 김 사장은 사무실의 전등을 다 끄고 갔다. 사무실도 사람이 없는 공간은 모두 전등이 꺼져 있었다. '짠돌이 경영'의 증거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원칙은 경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나.

"내가 오고 나서 '5% 룰'을 만들었다. 어떤 거래처도 우리 매출에서 5% 이상 차지하지 않게 한다. 수주업인 인쇄업에서 매출의 20%를 넘어가는 거래 업체가 있으면 우리는 그 회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커다란 거래처가 갑자기 떨어져 나가면 회사가 휘청거리게 된다."

―실제 위험했던 적이 있나.

"70년대 전국에 배포되는 대입 예비고사 문제지를 우리가 인쇄했다. 보안이 엄격해서 두달 동안 공장 출입을 제한하고 다른 주문도 못 받기 때문에 단가를 두배 더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라에서 감사를 받으면서 단가를 두배 준 것이 문제가 돼 다 토해내야 했다. 그것 때문에 회사가 위험할 정도였다. 이후 관급 물량은 맡지 않는다."

―가업은 누가 이어가게 되나.

"아들이 여럿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다. 디자인을 전공한 아들이 지금 일본에서 배우고 있다."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일본 시장을 미리 익혀두는 것인가.

"일본이 출판·인쇄 강국이다. 일본은 거대 인쇄소 3개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작은 시장에 수천개 회사로 자잘하게 나뉘어서 경쟁만 심한 상황이다. 원전 사태 이후 전력난으로 인쇄 단가가 올라간 일본 수출 시장을 뚫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파주 출판단지 입주기업 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우리가 파주 출판단지 입주 1호 기업이다. 출판인들과 교류하며 여러 가지를 배웠다. 결국 인쇄술이 있었기에 성경이 보급됐고, 종교혁명이 있었고 산업혁명과 민주주의의 발전까지 연결됐다는 것도 새삼 다시 깨닫게 됐다."

―출판단지가 10년이 됐는데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올해 '북소리2012' 가을축제를 크게 열고, 출판단지 활성화를 위해 '책방거리'를 조성하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명문 출판사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이런 출판도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100여개 출판사별로 자기 책방이 들어선 거리를 만들고 여기서 오래된 책도 팔고 신간도 팔면 명소가 되지 않을까."

―종이책은 어떻게 될까.

"아이패드 같은 전자책으로 읽는 습관이 들면 디지털 책이 주(主)가 되고 종이책이 부(副)가 되는 꼴이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되면 책을 읽으면서도 즉각적 반응만 찾게 되지 않을까. 독서가 사색의 시간을 주는 것인데 이제 독서도 게임 할 때처럼 사람을 빨리 반응하게 만드는 형태의 출판물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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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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