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무대 옮긴 ‘병신춤’… 무용계 큰 별 지다

 

 

 

판소리 명창 공대일 선생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창을 배우고 10세를 전후해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며 무용을 배웠다.

 

1945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무용가의 길에 들어섰다. 특히 공 여사는 전통 무용에 동물 춤을 접목한 해학적인 ‘1인 창무극’으로 한국 무용의 한 획을 그었다.

공 여사의 춤에 주목, 세간에 널리 알린 이는 무용평론가 정병호 씨였다. 심청전 맹인잔치 대목에서 공 여사가 풀어놓은 병신춤에 관객들은 배를 잡고 모두 웃었다. 그 대목만 뽑아낸 게 ‘공옥진 공연’의 대명사가 됐다. 그의 춤은 1978년 개관한 공간사랑의 고정 레퍼토리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병신춤은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그 때문에 공 여사는 많이 힘들어했다. 2009년 한 방송프로그램에서는 기초 생활 수급자로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고인의 모습을 공개해 모두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의 공연을 통해 가장 서민적인 한국예술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공 여사의 ‘1인 창무극’은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닌 창작무용이라는 이유로 무형문화재 지정이 거부됐으나, 2010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1인 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 춤을 접목해 ‘1인 창무극’으로 발전시켜 수십 년간 서민들과 함께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고인은 1998년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전남 영광에서 투병해 왔으며 최근 뇌졸중 후유증과 노환이 겹치며 타계했다. 무용 관계자들은 “한국 무용계의 소중한 큰 별이 졌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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