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장로교회

 

1. 아메리카에 건너온 장로교인들


아메리카의 장로교회의 초기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불굴의 흘란드인. 모험적인영국인, 열광적인 휴그노, 불타는 아일란드인, 집요한 스코틀란드인과 같은 조상들올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1607년 버지니아의 제임스 타운에 정착한 것이 아메리카에 영국인이 영구적으로 정착한 시초라고 말해준다. 그 결과영국의 아메리카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신교도(新敎徒)가 되도록 예정되었으며 영국의 미국 통치는 독립전쟁 전까지는 허드슨만으로부터 플로리다까지 뻗쳐 있었고 서부로는 대서양으로부터 미시시피 강까지였다.
 제임스 타운에 정착한 자들은 영국교회와 연관을 맺었다. 그들 중에는 약간의 칼빈주의적 청교도(淸敎徒)들이 있었다. 1611년에 알렉산더 휫타버라는 목사가 그곳에 도착했는데 그를 일컬어 밴크로프트는 “버지니아의 자기를 부인하는 사도”라고 했다. 그는 칼빈주의자였으며 장로회주의(長老會主義)를 신봉했다. 칼빈주의자들과 장로회주의자들은 식민지인 미국의 최초의 정착민들 가운데 있었다.

 
 1) 잉글란드에서 온 청교도(背敎徒)
1620년에 순례자들은 매사츄세츠의 플리머츠에 도착했다. 그들은 영국교회와 갈라져서 흘란드로 갔다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청교도들이었다. 얼마 안 있어 청교도들은 직접 영국으로부터 왔고 매사츄세츠나 그밖의 뉴 잉글란드 지역에 정착했다. 순례자들과 청교도들은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이었으나 그중 대부분이 회중적인 형태의 교회체제를 신봉했다. 어쨌든 그들 중에도 약간의 장로회주의자들이 있었고 수년 내에는 그들의 많은 후예가 장로교회로 들어왔다.
 1620년과 1640년 사이에 21,0OO명으로 추상되는 청교도들이 뉴 잉글란드에 왔는데 이들 중에 400명 이상의 뛰어난 청교도들이 장로교회의 체제를 지지했다. 이 교회들은 이른바 “회중화 된 장로회주의의 또는 장로회주의화된 회중주의”였다. 장로회적인 요소가 새로운 정착민들이 옴에 따라 점점 더해갔다. 코네티커트(Connecticut) 교회가 장로회로서 널리 알려지긴 했으나 결국은 회중적인 요소가 크게 이겼고 예외적으로 다만 남쪽과 서쪽으로 밀려난 청교도적 장로회주의만이 영구적으로 장로교회의 일부를 이루었다. 이것이 미국 장로교희의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2) 프랑스로부터 탈출한 위그노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박해로부터 도망하여 일찍 미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뉴 잉글란드에 정착했고 어떤 사람들은 뉴욕. 혹은 버지니아, 남 캐롤라이나. 죠오지아에 정착했다. 그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장로회체제를 신봉했다. 그들 중에는 미국의 성공회에 가입한 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장로교회에 가입했다. 다른 어떤 그룹보다 프랑스 위그노가 미국에 온 숫자와 유능한 사람의 수가 비례된다고 말해진다.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했다. 그러나 루이는 신교도들을 내쫓음으로써, 제거해 버리자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가 바랐던 것은 신교도들을 개종시켜 국가의 단일성을 회복해 보자는 것이었다. 가혹한 수단들이 위그노들로 하여금 도피할 수 없도록 막기 위해 실제로 취해졌다.
 따라서 위그노들의 탈출은 매우 큰 대규모였고 아무도 그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약 25만 명 정도라고 추측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빠져나갔는데, 어떤 사람들은 배를 타고 영국으로, 아일랜드로, 웨일즈로.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로 밀입국했고, 또한 인접국인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들은 비록 돈이 없었으나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수년 동안 프랑스를 경제적으로 뛰어난 국가로 이해하게 만든 기본적인 재질과 산업적인 비결을 그들의 깨끗한 손과 지성적인 머리 속에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도 그들의 특성을 살려 큰 영향을 끼쳤다.
 
 3) 네덜란드인
네덜란드인은 네덜란드로부터 직접 와서 비교적 일찍이 1623년 뉴욕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말로 예배를 드렸고 롱아일랜드와 뉴욕에서 평온하게 지냈다. 이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또한 장로회체제를 신봉했다. 이들은 이 지역들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과 이들의 후예들은 미국에 네덜란드개혁교회(Dutch Rcformed Church)를 창립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네덜란드라는 이름만 빼고는 모든 면에 있어서 장로교회였던 것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들 중 많은 수가 미국 장로교회와 연합했다.
 
 4) 스코틀랜드인
많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이민 초기에 스코틀랜드로부터 직접 미국으로 왔다. 이들은 뉴져지와 남북 캐롤라이나. 그리고 다른 식민지들에 정착했으며 미국의 장로교회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이야말로 미국에 설립될 장로회주의를 위한 핵심 인물들이었다. 1685년에 장로회 계약자(Cvenames)들이 스코틀랜드의 살육시기(殺戮時期)로부터 피신해서 뉴져지에 도착했다.
 
 5) 북 아일란드인(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1567년 경 아일란드의 최북단 지방인 울스터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몇 해 안되어 영국 왕은 울스터의 신교도들에게 경제적인 면에서 핍박을 했으며 그 결과 이들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인들의 미국으로 향한 대 이주가 행해졌다, 18세기 중엽의 옛 기록을 보면 이민단 중의 어떤 정직한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인의 기도가 있는데 “주님 내가 옳았다고 인정하시옵소서. 당신께서는 내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적혀 있었다.

북 아일랜드로부터 미국에 온 아일랜드인의 수는 장로회의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많았다. 어떤 역사가는 추산하기를 1705년부터 1775년 사이에 최소한 5O만 명이 스코틀랜드계 아일란드인들이 미국에 왔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에 오기 이전에 아일란드에 살았던 스코틀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뉴져지와 펜실바니아에 많이 정착했다.  펜실바니아에 정착한 사람들은 서쪽으로 피츠버어그까지 진출했고 또한 미국에서 최대의 장로회 도시인 이 위대한 도시 피츠버어그의 기초를 놓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펜실바니아로부터 버지니아 계곡 또는 북 캐롤라이나로 갔고, 또 찰스톤에 도착한 자들은 북으로 진출했다. 서와 북의 두 줄기는 북 캐롤라이나의 맥클렌베리와 남 캐롤라이나의 요크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 두 지역을 남부에서는 최대의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인 지역으로 만들었다.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인은 미국 장로교회의 중추적 인물들이 되었다.
 
 6) 독일인
1700년부터 1770년 사이에 수많은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 중에서 상당수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장로교인들이었다. 대부분이 펜실바니아에 정착하여 그곳에서부터 남쪽으로 진출하여 버지니아 계곡과 캐롤라이나까지 이르렀다. 이들 칼빈주의적 독일인들의 대다수가 미국에 있어서의 독일 개혁교회에 속했는데 이것은 독일이라는 이름만 빼고는 장로교회였다. 그러나 해가 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미국 장로교회에 가입하였다.
 
 
2 . 장로회주의(長老會主義) 설립의 시초

 

 1) 프랜시스 매케미(Francis Makermie),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
강인한 개성과 기민하고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 흩어져 있는 장로희주의 추종자들을 모으는 일이 요구되었다. 이 요구가 바로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rnie ; 1658-1708)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북 아일란드에서 태어나 스코틀란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1680년에 라간(Lagan) 노회에 의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미국 장로교회의 진정한 창립자인 그는 런던 연합회가 열리기까지 약 8년 동안 이 숭고한 선교 사업에 종사했다. 비록 그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지도력과 조직력에 있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는 메릴랜드 동편 해안과 버지니아에다 많은 장로교회를 세웠다. 바울과 많은 선교사들이 그랬듯이 매케미도 역시 장사(trade)를 해서 그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했다. 
1704년 여름 런던에서 그는 도움을 호소하여, 미국에 돌아갈 때는 그라스고우 대학의 졸업생인 존 햄프턴(John Hampton)과 죠오지 맥니쉬(George McNish)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매케미가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는 항상 인디안이나 강도들의 위협 중에 있었다. 메릴랜드의 정착민들은 일반적으로 강을 따라 정착했다. 매케미는 이들에게까지 기독교의 위로를 전해 주었고 잊어버린 칼빈(Calvin)을 상기시켜 주었다. 1683년 그는 르호봇과 스노우힐과 메릴랜드에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후에 그 부조에 여러 다른 교회들을 세웠다.
 
 2) 최초의 미국 장로회
1706년에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최초의 미국 장로회(Presbyte교)가 프란시스 매케미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것을 필라델피아 장로회(Presbytery of Philadelphia)라고 불렀다.  여기에도 단지 7명의 목사와 특정 장로들이 참석했다. 7명의 목사는 보이드(Boyd)씨를 새로 임명함으로써 8명이 되었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이고 또한 둘을 제외하고는 스코틀란드와 아일란드에서 목사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유일하게 미국에서 출생한 앤드류스(Jediah Andrews)는 필라델피아의 목사였는데 매사츄세츠에서 태어나 하바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68년에 필라델피아로 가서 1701년에 임명되었고 끈기 있는 노력으로 인하여 매우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미약한 회중을 한 군데로 모았다. 1705년에 새로운 집회소가 건축되었고 이 새로운 집에서 대(大) 장로회의 기원인 최초의 장로회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매케미는 이 모임에 대해서 이것은 “종교를 향상시키고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알맞는 방책을 상의하는 것으로서 목사의 활동을 위한 목사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이 모임이  미국에 있어서의 장로회주의 조직의 최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노회는 1706년 중의 어느 시기에 모였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아마도 1706년 12월 27일 존 보이드를 임명키 위해 열렸던 특별 모임이 바로 첫 번째 노회(老會)가 아닌가 한다. 이 장로회는 다만 메릴랜드와 델라웨어와 필라델피아의 회중들만을 포함시켰다.
뉴져지와 롱아일랜드의 몇몇 청교도 장로교회들이 곧 이어서 이 장로회에 합세했다. 그리하여 1716년에 이르러서는 7명의 목사가 17명으로 늘어났다. 필라델피아로부터 북으로 롱아일랜드까지의 목사들은 거의 뉴 잉글란드 계통이고, 델라웨어와 메릴랜드의 목사들은 스코틀란드나 아일랜드 계통이었다. 이 장로회가 돌본 유일한 목사지망생이었던 웨일즈 사람 데이빗 에반스(David Evans)는 1710년에 들어와 1714년에 임명을 받았다.
 목사의 수는 적었고 목사를 양성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로는 스코틀란드의 에딘버러나 그라스코 대학과 뉴잉글랜드의 하바드와 예일대학이었다. 창립한 지 몇 해가 지난 후에 장로회는 런던, 더블린, 그라스고우의 장로교인들에게 재정적인 보조를 요청하여 지원을 받게 되었다.
 
 3) 대회(Synod)의 창립
장로회가 창립된 이후 교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했는데 그것은 주로 목사들과 교인들이 해외로부터 계속 이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매케미와 그 밖의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그들의 일을 해 나갔다. 교회를 위한 봉사를 문자 그대로 자신을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하였다. 매케미는 1708년에 5O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또 여러 장로교회 목사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1716년에 이르러는 장로회의 목사 수는 17명이었다. 이들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었고 또 여행이 힘들어 출석이 어려웠으므로 한 개의 장로회를 4개로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4개는 필라델피아, 뉴 캐슬, 스노우 힐, 그리고 롱아일랜드였다. 

 

필라델피아는 펜실바니아의 교회들로 이룩되었고 뉴 캐슬은 델라웨어의 교회들로 이룩되었으며 스노우 힐은 메릴랜드의 교회들로, 롱아일랜드는 뉴욕과 뉴져지의 교회들로 이룩되었다, 1717년 9월17일 4개의 노회 중 3개의 노회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최초의 대회(Synod)를 조직했다 그러나 스노우 힐의 노회는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참석치 않았다.
  이즈음의 미국 장로교회는17명의 목사와 더불어 49여 개의 교회, 그리고 약 3,000명의 전도자가 있었다.
 
 4) 1729년 결의 채택
대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되어 심각한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교리를 찬성하는 서명이 요청되었을 때 그럴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1724년경까지는 회원이 된 모든 목사는 그들의 고국에서 임직이 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미국 장로교회 훈련과 정통성(正統性)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植民地)에서 양육 받은 젊은 사람들이 목사의 허가를 얻기 위해 신청을 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찬성해야만 할 신앙의 표준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코틀란드나 북아일란드 출신의 목사들은 이들이 서명할 표준에 철저한 동의를 했다. 반면 영국과 웨일즈 출신들은 반대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서 1729년 필라델피아대회는 결의를 채택키로 했는데 그 결의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필라델피아 대회의 교리적 표준으로 채택하였다.


 

3 . 분열, 성장, 재결합

 

몇 해 안되어 하나님의 성령 부홍 운동이 교회에 임했다. 그 시작은 제이콤 프렐링호이젠(Jakob Frelinghusen)의 열렬한 목회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는 뉴져지 주의 라리탄(Raritan)의 독일 개혁 교회의 목사였다. 프렐링호이젠과 거의 동시에 또한 개별적으로 뉴 잉글란드의 죠나단 에드워드의 설교에 은총의 소나기가 내려졌다. 이 무렵에 죠오지 횟필드(George Whitfield)가 미국을 방문하여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으며 부홍 운동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장로교회 내에서는 테넌트(Tennent)가 마음과 영혼을 부흥시키는 데 힘썼고, 프렐링호이젠의 목회를 통해 맹렬한 열심을 갖게된 그는 감격적인 설교와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서. 휫필드를 제외한다면 제1인자가 되었다. 이러한 부흥은 전지역으로 점점 힘차게 퍼져나갔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다툼과 고질적인 분리를 낳았다.
 
  1) 대회의 분열
1741년 필라델피아의 대회는 구파(Old-side)와 신파(Ncw-side)로 갈라졌다.
신파는 1745년 뉴욕의 대회로써 분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1741년부터 1758년의 재 연합까지 미국에는 2개의 분리된 장로교회가 있게 되었다. 하나는 필라델피아의 구파대회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의 신파 대회였다.
 이 무렵에 뉴욕의 대회는 5개의 노회, 즉 써포크, 뉴욕. 뉴 브른스위크. 말링톤. 뉴 캐슬을 갖고 있었으며 필라델피아 대회는 3개의 노회. 즉 필라델피아, 도네갈, 그리고 뉴욕 대회의 뉴 캐슬과는 다른 또 하나의 뉴 캐슬을 갖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분열이 전국에 걸친 위대한 복음전도의 물결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늙은 스코틀란드인과 아일란드계 목사들은 그들이 일컫는 바 새로운 열광(New Enthusiasm)도 인정하지 않고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사용된 방법도 인정하지 않았다.
복음전도에 있어 또 하나의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는 알 맞는 목사교육 문제였다.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또한 복음전도 부흥 운동에 의해 많은 개심자들이 생기자 목사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구파 그룹은 믿기를, 아메리카 교회의 목사는 뉴 잉글란드나 구 대륙의 대학에서 철저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신파 그룹은 그것을 너무 느린 과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구 대륙의 대학들은 신 대륙의 아메리카 목사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파(Ncw-side) 그룹은 목사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테넌트의 아버지인 윌리암 테넌트가 펜실바니아 근처 펜실바니아 네샤미니(Neshaminy)에 유명한 학교를 세워 많은 젊은 목사들을 교육했다. 반대자들은 이 학교를 조롱하여 부르기를 “통나무 대학”(the Log College)이라고 했다.
 윌리암 테넌트(William Tenunt) 목사는 1716년에 미국에 건너왔다. 그는 본래 아일란드의 감독 교회의 일원이었는데 그 후 감독 교회와의 관계를 바꾸어 1718년 9월 18일 필라델피아 대회에 합세했다. 1726년 그는 필라델피아 네샤미니에 정착했다. 통나무 대학은 교회를 위해 숭고하고도 필요한 많은 일을 하는 기관으로 존중되었다.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m) 목사는 1703년 아일란드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대학 문을 열었을 때 약관의 21세였으며 그의 아버지를 도와 가르쳤다. 그는 1726년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1727년 뉴져지주 뉴 브론스위크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설득력 있는 설교자였고 솔직하며 관대한 친구이자 근면한 목사였고 애국심 있는 시민이었다. 그의 영향과 명성은 매우 컸다. 1743년에 그는 필라델피아의 제2장로교회의 목사로 부름 받아 그곳에서 1764년 그가 죽는 해까지 성공적으로 목회를 했다.
 대회가 분열되자마자 양쪽 모두 학교를 설립했다.
뉴욕 대회는 죠나단 디킨슨(Johnadan Dickinson : 1688~1741) 목사를 필두로 하여 뉴져지 주의 엘리자베스 타운에 한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를 위한 설립 허가는 1746년 1O월에 받았다. 다음 해 1O월 뛰어난 학장이었던 디킨슨이 죽자 학교는 뉴져지 주의 뉴 라크로 옮겨져, 아론 버르(Aaron Burr) 목사가 책임을 맡았다. 1755년 또다시 뉴져지 주의 프린스톤으로 옮겨져서 1896년에 프린스톤 대학교로 번성하였다.
 
 2) 1758넌의 재결합
뉴욕 대회는 필라델피아 대회와 다시 1746년 이들의 연합대회가 트렌톤에서 열려 재결합의 가능성을 상의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① 필라델피아 대회가 1741년에 받아들였던 테넌트파에 대한 항의였고, ② “신앙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이라는 문구에 대한 일치하지 않는 해석이었다.
중복되어 소속되어 있는 노회들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도 두 대회가 재결합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난점들은 1758년의 결합 계획에 의해 모두 조정되었으나 첫 번째 문제는 매우 가슴 아픈 것이었다. 이 문제는 논의된 항의를 대회 전체의 공적 행위라기보다는 테넌트파를 받아들일 것에 서명한 개개 회원의 사적 행위로서 간주하도록 하는 필라델피아 대회의 동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필라델피아 대회에 양보되었는데 이후로는 교회에 들어올 목사는 논의의 여지가 많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이라는 문구를 뺀 신앙고백서에 서명해야만 한다고 했다. 또한 뉴욕 대회는 테넌트파는 양보하기를 목사들이 다른 회중에 초대받지 않을 것을 강요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인정했고 또한 교회 임원들의 권위에 대해 더 큰 존경을 인정했다. 동료 목사들의 무책임하고 냉정한 탄핵은 금지되었다. 테넌트파는 목사 후보생이 그들의 “종교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으로서 심사되어야만 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이러한 규정들에 의해서 결합의 계획은 드디어 1758년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기초하여 “뉴욕-필라델피아 대회”(Synod of Ncw York and Philadelphi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성취되었다.
확인된 바로는 이 재결합 된 대회는 98인의 목사와 200개 교회와 1만 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3) 변경 지역 선교
재결합된 교회는 점점 더해 가는 선교적 열심을 갖고 급속히 증가하는 인구에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서부로 향해 갔다. 기독교 학교들이 세워졌고 미래의 대학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다.
인디안 가운데서 선교적 일을 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문헌을 창작하고 전파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존 엘리오트는 지금까지 감춰졌었지만 이미 이전부터 인디안 가운데서 일했었다. 그는 홍색인종을 기도하는 마을로 모아들였으며 그들의 언어로 복음(福音)을 번역했다. 이러한 미국 선교사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니엘 브레이널드였다. 그는 뉴져지 주의 프리흘드에서부터 서스퀴호나 강에 이르기까지의 인디안들 가운데서 일하였다. 그는 1747년 낙심한가운데 불과 4년이라는 세월을 일하고 죽었으나, 그의 생애가 죠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기록되어 무수한 독자들로 하여금 선교적인 노력을 자극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서부 변경의 백인 정착민들도 역시 전도 사업의 대상이었다. 1755년 뉴욕대회는 서부 펜실바니아로부터 죠지아에 이르는 하노바(Hmover) 대회를 조직했다. 후에 뉴져지 대학의 학장이 된 능변의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cs)가 노회 설립 이전에 이곳에서 일했다. 이 변경 지역 노회는(Frontier Presbytery)다른 노회들의 모체가 되었다. 1781년 “뉴욕-필라델피아 대회”는 서부 펜실바니아 레드스톤에 노회를 설립했다. 이 노회는 당시 제일 서쪽의 노회였다.
 
 4) 미국의 혁명과 독립전쟁
오늘날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 미국의 특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전쟁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되었다.
 1774년에 9개 주의 식민지가 합법적으로 설립된 교회를 갖게 되었다.
희중교회주의(Congregationalism)의 인정은 코네티커트 주에선 1816년 그리고 매사츄세츠 주에선 1833년에 끝났다.
어쨌든 미국독립전쟁은 문화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기상(起床)이었다. 이 독립운동에 있어서 장로교인들이 지도자들이었다는 것과 더욱이 장로교인들 가운데서도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인이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역사가 밴크로프트는 말하기를 미국에 있어서 “대영제국과의 모든 연결을 풀기 위한 첫 번째 소리는 뉴 잉글란드의 청교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뉴욕의 화란인들로부터도 아니고 버지니아의 개척자들로부터도 아니고 아일란드 장로교인들이었다”고 한다.
장로교인들은 미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애국적인 헌신에 있어서 단연 첫째였다. 공교롭게도 경제적 정치적 대의(大義)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대의까지 미국 독립전쟁의 기초를 이루었다.
많은 비국교도들 그 중에도 특별히 장로교인들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미국 식민지에 상주하는 신부(神父)를 보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17세기에 두 번, 18세기에 한 번, 이 계획이 거의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
  장로교인들은 그들의 많은 직계 선조들이 영국에서, 스코틀란드에서, 아일란드에서, 국교도의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은 정부로부터의 지독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와야만 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비슷한 재난이 자기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자기들을 삼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필요하다면 검(劍)으로 찌를 각오도 되어 있었다. 국교에 반대하는 다른 교파들도 거의가 장로교에 공감했다. 비록 죠오지 워싱톤과 같은 뛰어난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감독교회 교인들은 독립전쟁 중에 있어서 “애국자” 편을 대적하여 독립 반대자로서 영국 편을 찬성했었다.
전쟁 중에 장로교회의 영향은 온 식민지에 크게 미쳤다. 뉴 잉글란드에서는 회중교회가 우세했고 남부 식민지역에서는 감독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일부 식민지역에서는(만일 네덜란드와 독일 개혁교회의 신봉자들을 “장로교인”에 포함시킨다면) 종교를 가진 자들 중 대다수가 장로교인들이었다.
1775년 5월 17일 뉴욕과 필라델피아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장로교의 바쁜 날이었다. 바로 한달 전에 독립 전쟁의 첫 번째 피가 워싱톤에서 흘려졌다. 같은 달 일찍, “두 번째 주 대표자 회의”(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모든 도시와 마을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이러한 열기 속의 혼란 중에 24명의 목사와 5명의 장로들만이 대회에 출석했다. 대회는 모든 회중을 위하여“엄숙한 금식과 금욕과 기도의 하루를 정했다. 대회는 또 목회서신(收會書信)을 기안했는데 이것이 비록 제한 받기는 했지만 애국자 편을 위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장로교인들은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장로교회의 저명한 목사였던 위덜스푼 박사(Dr. Witherspoon)는 주 대표자 회의의 회원이었고 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었다. 주 대표자 회의의 서기였던 찰스 톰프슨(Charles Thompson)도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죠셉 클라크(Joseph Clark)와 후에 장로교 총회장이 되었던 제임스 암스트롱(James F. Armstrong)도 전쟁 중에 장교였다.
장로교인들이 독립선언에 이르게 한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고 또 독립전쟁에 있어서도 많은 기여를 했으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미국의 헌법(憲法) 제정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미국 헌법과 장로교회의 헌법 사이에는 현저한 유사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5) 첫 번째 장로회 총희( First General Assambly)
정치인들이 미합중국의 헌법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교회는 미국에 있는 모든 장로교회를 포함시킬 수 있는 총회의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뉴욕과 필라델피아 대회는 1788년 5월에 모두 16개의 노회를 4개의 대회로 나누었다.
 첫 번째 총회에서는 16개의 노회로 되었는데 그 이름은 서포크, 더취스 컨트리. 뉴욕, 필라델피아. 뉴 브론스위크. 뉴 캐슬. 루이스. 발티모어. 칼리슬. 레드스톤, 워싱톤. 하노버. 오렌지, 아빙톤. 남 캐롤라이나, 트란실바니아이다.
이 16개의 노회들은 뉴욕-뉴져지 대회, 필라델피아 대희, 버지니아 대회. 캐롤라이나대회로 나뉘어졌다. 존 휘털스푼은 적절하게도 첫 번째 총회의 사회자로 임명되었다. 대회들은 지시된 대로 모여서 총회 조직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어 최초의 모임이 1789년 5월 21일 필라델피아에서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ne General Assambly of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s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그것은 죠오지 워싱톤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꼭 3주 후였다. 그리하여 장로교회는 넓게 볼 때 국민적인 교회가 되었다. 총회 안에는 177인의 장로회 목사들과 111인의 목사 후보자와 419개의 교회들이 있었다.
1789년에 첫 번째 총회를 열리게 했던 1788년의 협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교회의 신조로 채택했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담은 문서로 총회의 조직이 중대한 것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즉 “좋은 성품과 도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 할 그런 진리와 형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서 개개의 크리스챤과 단체들은 서로를 향한 상호 관용을 연습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총회가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바로 그때에 첫 번째 미국 국회가 새 헌법에 의해서 개최되었다. 총회는 죠오지 워싱톤에게 보낼 성명서를 기안하기 위해 뉴욕에서 존 휘털스푼을 의장으로 하는 하나의 위원회를 임명했다. 때때로 미국 헌법은 장로회 행정체제(長老會行政體制) 형식을 신중히 따를 것을 요청 받았다.
이 둘 사이의 뚜렷한 유사성은 이들을 기초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의 2/3가 칼빈주의적 장로교인들이었다는 데서 근거한다. 미국 내에 있는 교파가 다른 자매 교회들이 장로회 조직의 근본적인 원칙들에 의해 매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예컨대 교회 행정체제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대표자간의 동등성 같은 것을 말한다.
 
 
4. 영적 각성운동과 분열

 

 1) 영적 타락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미국 독립전쟁 후에도 전 미국에 걸쳐 도덕적이며 영적인 타락이 따랐다. 수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군 복무를 위해 신도의 의무를 버렸으며, 애국적 운동에 눈에 뜨이도록 헌신했던 장로교회는 교회의 건물이 때때로 적에 의해서 병사(兵舍)로 또는 마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기도 하였다.
 미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은 볼테르와 루소의 영향력과 다른 형태의 프랑스의 불신의 영향과 급진적인 사회관의 영향을 받게 만들었다.
톰 페인(Tom Pain)의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는 비종교적인 "자유 사상”(Free thinking)을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시켰다. 이때 뉴 져지 대학에는 크리스찬 교수가 2명밖에 없었고, 반면 예일(Yale)에는 많은 사람들이 루소와 볼테르 같은 이름을 따라 자기들의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2) 영적 각성 부흥 운동(The Revival)
미국의 1차 영적 각성 부흥 운동은 1740~1750년대에 일어났었다. 그 때 영적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장로교에서는 윌리암 테넨트(William Tannent),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 사무엘 블레어(Samuel Blair), 사무엘 데이비즈(Samuel Davies) 등 이었으며. 화란 개혁파의 데오도를 프롤링하이젠, 회중교회의 죠나단 에드워즈, 엘리에젤 휠로크와 침례교회의 슈빌 스티언스, 다니엘 마샬 과 루터교회에선 헨리 멜콰이어 뮬렌베르크,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죠지 휫필드 등을 들 수있다.
1798년부터 1801년 사이에 다른 부홍 운동이 일어나서 곧 전국에 퍼졌는데 이는 제2차 영적 각성 부흥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 운동은 켄터키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공상과 위험과 고된 노동과 저질의 육체적 만족과 싸움과 다툼이 가득 차 있었다.
1799년 제임스 맥그레디(James McGready) 목사는 켄터키의 호간 마을의(Hogan Country) 그의 교회의 교인들을 설득하여서 불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일주일에 한 시간, 한 달에 하루를 기도하도록 하였다. 몇 달 안 지나서 한 여인이 회개하였는데 이 여인이 열심으로 전도하여 곧 1O명 가량을 회개케 했다. 그 다음 2년 동안에는 이 부흥운동이 다른 교구에 퍼졌는데 이번에는 죄를 깨닫는 자들이 애통하고 울부짖으며 바닥에 버둥거리는 등의 이상한 가시적 결과를 수반했다.
 1800년까지 이 운동은 켄터키 전역에 퍼졌고 이 운동과 관련하여“야외 집회”(Camp meetings.)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종교 집회가 열리는 거룩한 장소 주위에 마련된 텐트나 마차에서 잠을 잤다. 이 영적 각성 부흥운동은 켄터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전국에 걸친 것이 되어 독립 전쟁 후에 있었던 “자유 사상”과 불신을 타파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가정 전도, 해외 선교, 목사의 교육이 이후 1O년 간 매우 발전했다.
이 활약한 지도자들은 장로교회에서는 제임스 멕그레이디,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바턴 스톤(Barton Stone), 라이만 비쳐(Liman Beecher), 알렉산더 켐벨(Alexander Campbell),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 등이었다.
 이 시기에 “컴벌랜드 장로교희”(Cumberland Prcsbyterian church)가 세워졌다. 트란실바니아 노회와 이것에서 성장한 컴벌랜드노회는 교육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일부를 숙명론(宿命論)으로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공공연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목사로 임명했다. 켄터키 대회와 총회의 결의로 인하여 1810년 컴벌랜드 노회의 대다수가 후에는 컴벌랜드 장로교회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분리된 교파를 만들었다.
 
 3) 선교와 팽창
1800년대에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일한 교파였다. 학식 많은 목사를 가졌고 한결같지는 않았을지라도 전 미국에 골고루 퍼진 막대한 회원들. 새로운 총회에 의해 제공된 유효한 중앙헌법. 의심할 바 없는 애국주의로 얻은 명성, 근래의 부흥에 의해 새로워진 영적인 활기를 지녔으므로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1800년에는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16개의 노회였던 것이 26개의 노회가 되었고, 1789년 첫 번째 총회가 열렸을 당시는 419개 교회였던 것이, 1803년에는 511개 교회가 되었다. 그 후에 많은 세월에 걸쳐 교회가 당면케 된 가장 큰 과업은 변경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었다.
1788년 구 대회(Old Synod)는 교회에게 “변경의 목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권면했다. 새로운 총회는 곧 모든 회중들에게 가정 전도를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모금하여 그것을 총회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미국 역사상 초기의 민족주의 시기였던 1789년에서 1830년 사이 교회의 특성을 나타내는 각 교파간의 상호 협동에 대한 관대한 정신의 본보기는 드디어 1810년 해외 선교를 위한 위원회를 형성케 했다.
1806년 사무엘 제이 니일스(Samuel J. Nills)는 로오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있는 회중교회의 목사에 의해 해외 선교의 열정으로 불타게되어 윌리암 대학에 들어갔다. 니일스와 함께 영감을 가진 대학의 동료들이 한적한 건초더미에 모여 선교사업을 하기로 엄숙히 맹세했다. 후에 이들 대부분이 안도너 신학교(Andoner Seminary)에 들어가 같은 뜻을 가진 자들과 합세했다. 1810년 이 무리들 중 몇 사람들이 매사츄세츠의 회중교회의 총회에 해외 선교를 시작할 것과 자기들을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회는 모임을 열어 일반적으로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로 알려진“해외 선교를 위한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aries for Foreign Missions)를 조직했다.
1812년 2월 제드론, 라이스 니웰, 노틀, 흘이 각기 부인을 동반하고 최초의 미국의 해외 선교사로서 인도를  두 파트로 나뉘어 떠났다.
1879년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6개의 해외 선교 위원회가 각각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1811년 미국 위원회는 장로회 총회(長老會總會)를 청하여 다음 해의 총회 시에 자기들과 협동할 수 있도록 장로회 자체의 미국 위원회와 유사한 위원회를 형성토록 했다. 그러나 장로회 총회는 미국 위원회의 사업에 장로회가 보조해 주기로 하는데 그쳤다.
회중교회 회원들은 이러한 반응을 관대한 정신으로 받아. 미국 위원회에 많은 장로회 목사와 평신도를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1817년 장로회 화란 개혁교회와 스코틀란드 개혁교회는 연합된 해외 선교회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북 아메리카의 인디안들과 멕시코, 남아메리카 그 외의 다른 불신 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공언했다.
1826년 미선교회는 미국 위원회에 의해 성취된 찬란한 해외 선교 업적을 관찰한 결과 만족하여서 자기 선교회의 모든 일과 재산을 미국 위원회로 넘겨주었다.
1837년 “장로회 해외 선교 위원회”(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가 형성되기 전까지 장로회의 대다수는 미국 위원회의 일을 지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4) 신학교(Theological Seminaries)
급속히 팽창되는 교회의 일은 목사의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켰으나 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높은 수준의 목사 교육을 완화시키려는 유혹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키 위해 총회는 뉴져지 주 프린스톤에 하나의 학원을 세워 1812년 8월, 3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박사와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박사가 초대 교수였고 몇 해 후에 찰스 핫지(Charles Hodgc)박사가 교수진으로 들어갔다.
 다른 장로회 신학교들도 이 기간에 세워졌는데 1818년에 아우번, 1824년에 버지니아 유니온, 1827년에 웨스턴, 1828년 콜럼비아, 1829년에 레인, 1830년에 맥코믹, 1836년에 뉴욕의 유니온이 세워졌다. 이들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급속히 늘어가는 일을 위해 요구되는 잘 훈련된 목사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5) 분열된 장로교회
 (1) 새로운 시대
1830년경부터 미국의 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각성되고 1812년 전쟁에 의해 조장된 민족주의의 정신은 지독한 분파주의 정신에 굴복하여 농업을 하며 노예를 갖고 있는 남부와, 산업을 하며 노예의 자유를 주장하는 북부는 서로 점점 더 날카롭게 대치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새로운 정신을 가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나와서 “평범한 사람들”을 새로운 힘을 지닌 뛰어난 인물로 만들었다. 정서적인 불안정과 끝없는 낙천주의가 새로운 민주주의 정신을 나타냈다. 종교 면에 있어서는 청교도 시대에 뒤이은 기독교의 세 번째 시대, 그리고 위대한 각성을 한 “부흥사”(Revivalist) 시대에 뒤이은 “근세”(Modern)가 다 일반적으로 1830년경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근세에 있어서는 교파 상호간의 협동이라는 관대한 정신이 분파주의에 굴복해 버렸다.
 
 (2) 장로교회의 분열
1837년의 장로교회는 아직 미국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파였다.
 1800년부터 1830년까지 3O년 간 장로교회는 20,000명의 회원으로부터 173,000여 명의 회원으로 증가되었는데 이 성장은 국가의 성장과 비교하더라도 더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1837년 전의 몇 해 동안에 교회 내에서 교회 헌법과 교리의 문제로 “올드 스쿨”(Old schoo1) “뉴 스쿨”(New school) 간에 싸움이 일어날 불길한 움직임이 있었다. 올드 스쿨은 회중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 1801년의 유니온 계획(Union plan)에 만족하지 못하여 이 계획에 의해 설립된 교회는 결코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라고 비난하였으며 더군다나 그들을 교회 법정(Church Courts)에 의해 교회가 다스리거나 교회 교인을 훈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올드 스쿨은 또한 장로교회가 자체 교파의 교회 위원회를 가져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위원회는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나 “미국 가정 선교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같은 타교파의 기관을 통한 일을 하기보다는 총회가 직접 일을 관장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뉴 스쿨(New school)은 회중교회적 배경과 훈련을 많이 갖고있는 학교로서 유니온 계획과 타교파의 기관에 대해 만족했다. 그들은 긍지를 갖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즉 뉴욕 주의 “제네씨 대회”(Synod of Genesse)와 여기에 이웃해 있는 두 개의 대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유니온 계획의 덕을 크게 본 것이라는 것과 이 계획은 1800년에 전 교회가 가졌던 수보다 더 많은 위탁 회원들을 1830년에 수용하고 있었다.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은 오늘날의 대다수 평신도들이 보기에는 실제로 모호한 것과 아니면 아주 하찮은 그런 문제에 관해서도 일치를 보지 못했다.
 올드 스쿨은 1837년의 총회에 자기들이 대다수임을 발견하고는 격한 행동을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들은 1801년의 유니온 계획에 의해 조직된 4개의 대회는 더 이상 장로교회에 소속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조처는 명백히 뉴 스쿨을 교회로부터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그 다음 해. 제거된 장로회 회원들은 그들의 신임장을 제출하였으나 좌석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끼리 총회와 같은 조직을 해서 다른 건물로 이전해 갔다. 이렇게 하여 장로교회는 똑같은 공식 명칭을 갖고, 똑같은 교리적 표준을 갖고. 똑같은 교구를 가졌으나 완전히 별개로 분리되어 때로는 적대시하게 되어 두 교파로 갈라지는 이상한 모습을 들어냈다.
 분열의 시기였던 1837년부터 1869년까지 두 교회는 올드 스쿨과 뉴 스쿨로 널리 알려졌다. 올드 사이드는 본래 회원의 5/9를 포함하였고 민사 법원에 의해서 분열전의 교회의 법적 계승자라고 선포되었다. 이 비극적 분열은 국가의 지역적인 광대한 팽창이 막강한 힘으로 교회에 막 도전하는 그때에 일어났다.
 
 (3) 해외 선교 위원회
1837년의 분열 이전, 즉 1831년에 피츠버그 대회는 해외 선교(海外宣敎)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교파적인 통제 하에서 한다는 것이 무력한 것임을 깨닫고 “서부 해외 선교회 (The Western Foreign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했다.
 1837년 분열 이후에 올드 스쿨의 모임은 서부 해외 선교회의 기금과 일을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장로회 해외 선교회”(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를 조직했다. 이때 이 선교회는 4개의 주둔지와 23명의 선교사를 갖추었다가, 1937년 100주년 기념 때에는 1.262명의 선교사와 16개국에 154개의 주둔지를 갖게 되었다.
 
 (4) 1857-1858년의 부흥운동
1857년은 미국이 전례 없이 번성한 때에 뒤이은 매우 침체된 시기였다.
경제적인 쇠퇴는 전국적으로 종교적 관심에도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돌이켰다. 1857년 뉴욕에 있는 옛 화란 교회(Old Dutch Church)에 교회의 문이 정오부터 1시까지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처음엔 적었으나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차고 넘쳐 다른 방들까지 들어찼다. 1858년 봄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2O회의 이러한 모임이 뉴욕에서 열렸다. 종교적 깊은 관심과 유사한 장소가 전국에 걸쳐 목격되었다.
“위대한 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때처럼 이 부흥운동에서도 어떤 지도자들도 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의 편에서 자발적으로 종교적인 갈망을 갖게 했다. 새롭고도 급속히 성장하는 기관이었던 청년 기독교 연합회(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이 일을 촉진시켰고 비종교적인 신문들도 관대하게 선전을 해 주었다. 이때 약 100만 명이 미국 교회에 참가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중에 상당한 수가 장로교회에 가입하였다.
 
 (5) 장로교회와 노예제도
1830년부터 1860년까지의 나라의 정치적인 큰 관심사는 노예제도의 문제였다.
1818년, 총회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강력한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는 어떤 한 종족을 다른 종족이 자발적으로 노예 화 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모순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과 원칙에도 전적으로 대립된다고 생각한다”였다. 1832년 이후에. 노예 제도에 대한 논란은 전국적으로 치열해져서, 1836년 총회는 “이 모든 문제를 무기한 연기할 것”올 결의했다.
 1837년의 분열 이후. 북부 회원의 7/8 이상을 갖고 있는 뉴 스쿨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대해서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반면, 남부 회원의 1/3을 차지하는 올드 스쿨 교회들은 더욱더 보수적 입장을 유지했다. 그 결과 남부에 있던 비교적 작은 뉴 스쿨 교회들은 1857년 “장로교회의 연합 대회”(the United Syond Of the Presbyterian Church)로부터 탈퇴했다. 반면, 올드 스쿨 교회의 남부와 북부 회원들은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친교를 계속 가졌다.
 
 (6) 남북전쟁
남북전쟁 동안에, 남북 양편의 여러 교회들의 목사들로 하여금 군인들의 영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한 긴급함은 매우 분명하게 양 교파의 초교파적인 정신을 촉진시켰는데 그것은 군에 있는 크리스챤 사역자들이 자기 교파 사람들에게만 목회를 제한하여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61년 기독인 위원회(Christian Commission)가 전선에 있는 자들에게 설교자와 간호원과 도서와 기독교 서적 또한 위문품을 보내 주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이 일은 거의 대부분이 교회의 대표들 또는 지원자들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많은 목사들이 이 짧은 기간 동안을 이렇게 봉사했다. 4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에 이 위원회에서 2.500.000달러를 기증 받았는데 이것은 거의 다 교회를 통해 들어온 것이었다.

미국 성서 공회(the American Bible Society)도 역시 매우 적극적이어서 양쪽 군인들에게 성서를 보냈다. 1864년 성서 공회는 총 100만 부의 성서를 보급했는데 이 가운데 반 이상이 남북 군인들에게 보내졌다. 소책자 위원회(Track Society)에서는 또한 수천 부의 소책자를 군인들에게 배포했다. 많은 군인들이 군복무 기간에 처음으로 크리스챤 생활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1863년부터 1864년까지 북부군에서는 거대한 종교적 부홍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양편에 참가한 대부분의 군인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비도덕적이고 야수적이 되어버렸다. 모든 전쟁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도 그 결과 국민의 도덕적 생활과 영적 생활은 큰 손해를 입었다. 이 시기에 교회에 대한 관심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국민을 삼키는 타락의 기간은 실패의 기간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7) 남 장로교회의 설립
1861년 4월 12일, 남부 연합군은 찰스톤 항구에 있는 북부 연방군의 요새인 씹터(Sumtor)를 포격했다. 북부 여론은 급속히 북부 연방 정부(Federal Goverment)를 밀었고 남부 여론은 남부 연방 정부를(Confederate Govermant) 지원하도록 준비했다.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 가운데서 샘터 요새를 포격한 지 5주가 채 안 되어 올드 스쿨총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북 장로회도 여전히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회의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선포는 피하기를 원했다. 이 총회 기간 중의 셋째 날. 뉴욕의 가디너 스프링(Gardiner Spring) 박사는 “우리가 주 연방에 헌신할 수 있게 편의를 도모하도록” 위원회를 임명키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묵살되었다.
며칠 후에, 스프링 박사는 또다시 북부 연방의 대의(大義)에 교회를 위탁할 것을 결의하도록 주도했다. 이 무렵 전국에서 신문을 통하여 총회의 협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과연 이 영향력 많은 교회가 북부 지역에서 급속히 구체화되고 있는 연합 취지에 도덕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인가 아닌가?  이러한 분위기와 대중 여론의 압력 하에 “스프링 결의안”(Spring Resolution)이 5일 간의 논쟁을 거친 후 채택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올드 스쿨 교회의 남 장로회는 총회의 이러한 조처를 탄핵했으며 그 결과 “미주 연방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조직하기 위해 탈퇴했다. 이 교회는 1861년 12월 4일 죠지아 주 어거스타에서 첫 번 모임을 가졌다.
1864년에 이 교회는 장로교회의 연합대회(United Synod)와 병합했다. 이 연합대회는 북부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부에서는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을 연합하는 것이었다. 1865년 전쟁이 끝나자, 이 병합된 남부 교회는(Southern Church) 이것의 이름을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고 하였다.
 1869년 켄터키주의 올드 스쿨 대회 중 일부와 1874년 미주리 주의 올드 스쿨대회 중 일부는 이 남부 교회에 가담했다. 오늘날 미국 남 장로교회(南長老敎會)는 세계의 장로교회 가운데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교리의 보수성과 전도의 열정으로 유명하다.
 
 
5 . 근대 미국 장로교회의 흐름

 

 1) 미합중국 장로교회(P.C. in the U.S.A.)
 남북 전쟁의 참혹한 시기를 통하여 교회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는 전시(戰時)에는 항상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전쟁의 구름이 지나간 뒤에는 밝은 시절이 오기 마련이다. 1870년 북부의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은 대단한 기쁨 가운데 재결합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부의 장로교회들도 이러한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재결합 이후 “미국 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맹렬히 전진했다. 그리하여 서부의 주민과 영역은 급속히 증가됐다.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는 밖으로 가정 선교정책으로 대 서부운동(Great Western Movement)을 시작하였다. 교회는 또한 해외 선교 정책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해외 선교 교회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 신앙고백서의 수정
 1903년 “미 합중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했다. 이 수정은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고 신앙고백의 본문 중에 세 개의 문단이 바뀌었는데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the Decrees of God)라는 장을 해설하기 위해 신앙고백서에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을 첨가하였다.
 신앙고백 가운데 들어있는 칼빈 사상을 이 선언문이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찢어 놓은 것이었다. 수정된 신앙고백에는 또한 두 장이 첨가되었는데 하나는 성령에 관한 장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한 장이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다른 신앙고백서에 없는 장인 것이다.
 
 2) 미국 장로교회(P.C. in the U.S.)
남 장로교회의 1865년까지의 공식 명칭은 “아메리카 주 동맹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 한 적도 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이 명칭은 “미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United States)로 바뀌었다. 이 교회를 우리는 미국 남 장로교회”(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라고 부르나 이것은 공식명칭이 아니다. 1865년 총회 때도 남부의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South)라고 고쳐 부르자는 데 대해 단호히 거부가 되었다.
 
 3) 미 합중국 연합 장로교회(U.P. Church in the U.S.A.)
 신앙고백을 수정한 후 ‘미 합중국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미국외 모든 장로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할 것을 제의했는데 그것은 모든 장로교회를 연합하여 하나의 “대 미국 장로교회”(The Great American Presbyterian Church)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1810년에 갈라져 나간 “컴버랜드 장로교회”는 이러한 초청을 수락하여 1906년에 수정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해서 “미 합중국장로교회”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약 1/3의 컴벌랜드 장로교회 회원들이 연합하기를 거부했기에 이 연합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컴벌랜드교회는 근본적으로 신앙 고백에 반대하여 왔으나 이러한 반대는 1903년에 신앙고백서 수정에 의해 제거하였다고 주장했다.
1920년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회(Welsh Calvinistc Mathodist Church)가 총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 합중국 연합 장로교회(Thc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는 1958년 5월 북부 아메리카 연합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와 미 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가 병합하여 이루어졌다.
연합 총회는 1958년 5월 28일에서 6월 3일까지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어그에서 열렸다. “북부 아메리카 연합장로 교회”는 1858년 “개혁 장로교회 협회”(The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와 장로교회 협회 (The Associate Presbyterian Church)가 병합하여 이루어졌다. 1957년에 미 합중국 장로교회와 스코틀란드 배경을 가진 “선교 교회”(Missionary Church)는 “미 합중국 연합 장로교회”라는 이름 하에 합병하기로 가결했다. 이 연합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서 이 연합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촉진시키는 행복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는 신앙의 깊은 목적” 수행에 착수했다. 그 외의 장로회 단체는 이 연합에 관하여  초청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 연합 장로교회(the U.P.C. in the U.S.A.)는 침체되지 않고 모든 나머지 장로회에 우정 어린 손길을 계속해서 내밀었다.
 1969년의 미 합중국 장로교회의 총원은 8,877개 교회에 3,268,761명이었다.(72년엔 8,732 교회 2,918,958명). 미 합중국에는 1O개의 장로교파가 총 4백 만의 교인을 갖고 있는데 이들 중 최소한 3백만 이상이 연합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4) 성장과 조직
미 합중국 장로교회는 근래에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00년 이 교회는 1,0O8,000명이었고 1956년에는 2,800,000명이었다. 연합 장로교회와 병합으로 250,00O명 이상의 교인이 증가되었다. 1960년 미 합중국연합 장로교회는 나머지 교회들의 병합에 의해서 약 3,500,000명의 교인을 가진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가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는 1970년 현재 38개국에 1,045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97개의 종합 대학교와 단과 대학과 양성소, 221개의 중등학교, 272개의 저학년 학교와 56개의 병원과 196개의 진료소를 유지해 나가거나 후원하고 있다. 1975년 현재에는 장로교회와 관련된 52개의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이 있고 7개의 신학교가 국내에, 21개의 신학교가 국외에 있어 총 1,131명의 목사들이 700개의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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