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요약(구약성서와 역사자료)  

  -박종수-

1. 개관
 팔레스틴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성서와 주변세계의 기록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 창세기는 세상창조와 인류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으며(창 1-11장), 이스라엘 조상들의 삶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창 12-50장).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배경과 광야에서의 생활을 소개하고 있으며,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진입하기 전에 행해진 모세의 고별연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오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기록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역사 이전의 전승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원전 1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가나안에서의 땅점유 사건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학자들 사이에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을 언제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대체로 출애굽 사건을 이스라엘의 형성시기로 간주한다.

2.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1-2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보여준다. 그 동안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여호수아 1-12장)은 무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이면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믿어졌다. 그런데 성서비평학이 확립되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대두되었다. 우선 성서 내부의 불일치에 관한 점이다.

 

사사기 1:1-2:5의 보도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때론 무력에 의해 때로는 평화적인 이주나 가나안 원주민과의 협력 체제하에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평화적인 이주방법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평화적인 이주설은 정복설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평화적인 방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가나안에 이주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은 농업을 영위하는 가나안의 원주민과 계약을 체결하여 공존 공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해 이스라엘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멘덴홀(G. E. Mendenhall)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설명하기 위해 '농민혁명가설'을 세웠다. 가나안의 농민, 몰락한 제사장, 부역꾼, 장인 등의 하층계급 사람들은 당시 이집트의 봉신으로 있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제후들에 의해 강제 부역과 과다한 공물 징수에 시달렸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과 이들의 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결과 세력을 결집하여 가나안의 도시국가 체제에 도전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룩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갓월드(N. K. Gottwald)는 멘덴홀이 제시한 사회학적 연구방법을 한층 발전시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던 하층계급이 연대하여 가나안의 봉건제후에 대항하여 이룩한 기나긴 내부투쟁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대한 이처럼 다양한 견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복잡하고도 기나긴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사사시대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진입하여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 왕 없는 사회를 이룩했다. 왕이 없는 동안 이스라엘은 일종의 전쟁 영웅이었던 사사들(judges)에 의해 공동체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왕은 지상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별도의 왕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13-11세기의 팔레스틴은 이집트와 바빌론으로부터의 대규모 공격이 없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팔레스틴 안에 있는 도시국가들 간에 소규모의 전쟁이 있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은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혼합된 종교형태를 견지했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없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소신대로 살았다(사사기 17:6; 21:25). 지파간의 동맹형태도 느슨하여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그 결과 지파간에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사사기 19-21장). 이런 상황을 볼 때 사사기는 초기 이스라엘의 정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여겨진다. 룻기는 사사시대에 이스라엘과 주변국간에 부담 없는 왕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의 이야기와 최초의 왕인 사울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제사장의 권한이 강대해지고 제사장은 사사의 역할을 겸했다. 제사장이자 예언자이며 사사(판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무엘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지파 중심의 공동체가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서서히 군주제로 전향하는 과정에서 사무엘은 활약한다.

그러나 사사들이 된 사무엘의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하는 등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된다. 이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른다. 사무엘은 왕제도의 폐단을 들어 백성들을 설득하지만, 결국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배경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치안 부재와 부조리가 판을 치게 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으로 블레셋의 침략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들에게 법궤를 빼앗긴 사건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버렸으며, 민족의 장래를 어둡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블레셋은 다른 가나안의 도시국가와는 달리 과두지배체제를 형성하고 있었고 철제 무기를 이용하여 기동성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블레셋의 강력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도 사사 중심의 부족 연합체에서 왕권 중심으로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4. 왕국시대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때가 대략 서기전 1,030년으로 여겨진다. 사울은 왕이라기보다는 전쟁 영웅인 '나기드'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다른 역대 왕들과는 달리 한 번도 이방신을 섬긴다거나 우상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사울은 사무엘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운한 삶을 영위한다. 설상가상으로 왕권이 확립되기도 전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자, 사울은 번민에 쌓이게 되고 급기야는 정신질환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사울은 결국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함으로써 생애를 마감한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치적을 소개한다. 다윗(대략 1006-967 B.C.E)은 사울이 아직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추대된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후에 통일왕국의 제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기 위해 시온 산을 공략하여 그곳을 개인 산성으로 만들었다.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앗긴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였다.

  야훼의 축복을 받은 다윗은 이후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공략한다. 모압이 다윗 왕국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며 멀리 다메섹 역시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고 이스라엘의 종으로 전락한다. 다윗은 이제 명실공히 왕다운 왕이 된다. 더 나아가 제국의 황제(emperor)라고 불릴 만큼 강대한 국가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이집트와 바빌론의 침략이 없는 틈을 타서 영토를 확장한 다윗은 팔레스틴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정치적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실권도 장악한다. 법궤를 성소에 안치하고 아비아달과 사독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예루살렘을 정치·종교의 중심지로 만든 장본인이다. 주변국을 차례차례 정복한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과는 달리 외국으로부터 들어 온 조공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갔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다윗은 말년에 가서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거의 치렀다.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인해 자식들의 죽음을 맛보아야 했고, 급기야는 자식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의 은혜를 독차지하고 영원한 나라를 약속 받은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던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의 남은 과업은 솔로몬에게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열왕기서로 넘어간다.
 

  열왕기서는 솔로몬 시대(966-927 B.C.E)의 상황과 남북 왕조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던 왕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저질렀던 실정(失政)은 그가 현명한 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지혜롭지 못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솔로몬 왕국은 외부의 심각한 침략이 없었던 평화스러운 때에 부와 영화를 누렸다.

 다윗의 확장 정책이 솔로몬에게 와서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처음과는 달리 야훼신앙에 대한 열정과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백성들은 솔로몬의 이중적 압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국내에 남아서 세금을 내야 했으며, 동시에 건축사업을 위한 노역을 제공해야 했다. 부역하자니 세금을 낼 수 없고, 세금을 내자니 부역의 의무를 감당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민심은 극도로 이완되고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었다. 말년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떨어져 나가고 백성들의 반란이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그들을 진압할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로써 솔로몬 시대는 끝나고, 통일왕국은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연합하는 유다 왕국과, 북쪽의 10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할되어 200년 동안 대치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야훼종교의 혼합을 초래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 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역성혁명 과정이 반복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앗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 가면서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그러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음을 증언한다. 앗시리아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사회적 혼란은 결국 앗시리아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거나 강제 이주를 당했다. 앗시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앗시리아의 산헤립 궁전에서 발견된 이 조각품은 앗시리아가 라기쉬를 파괴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고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장 서가는 여인들과 아이들은 머리까지 덮는 간단한 구조의 긴 옷을 걸치고 있다. 황소가 이끄는 전차가 뒤따르고 있다(BR 89-5-26).
 

  반면에 남왕국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 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의 왕으로 계승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유다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달리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역성혁명은 거의 없었다. 또한 유다에는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 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유다는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왕국 유다의 안전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앗시리아로부터 유다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던 히스기야 왕(727-699 B.C.)의 죽음은 유다의 정치적인 힘을 상실하게 했다. 그후 출현한 유다의 성군 요시야(641-610 B.C.)는 앗시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요시야는 야훼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서를 발견하고 이를 준수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의 느고에게 목숨을 잃는다(609 B.C.). 요시야가 죽음으로써 그의 종교개혁과 정치적인 독립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다의 장래는 암울해진다.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722 B.C.) 유다 백성과 예언자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야기되는데, 그것은 다윗계약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유다 사람들은 북쪽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야훼를 섬기지 않은 당연한 결과이며, 남왕국 유다는 다윗계약에 의해 영속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항하여 예언자들은 유다 백성들이 허황한 꿈에서 깨어나길 촉구했다. 그들은 다윗계약을 무조건적인 계약에서, 하나님께 신실한 경우에 구원이 임한다는 조건부 계약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언자는 이사야(1-39장), 미가, 예레미야 등이었다. 예언자들의 지적대로 유다는 결국 패망하고(586 B.C.)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5. 바빌론포로기
 역대기서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재해석하거나 보충한 자료로서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역사서이다. 역대기서와 더불어 에스라, 느헤미야서는 포로 이후의 유대 공동체를 소개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유다의 지도층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민중들은 여전히 그 땅에서 서러움을 받고 살고 있는 동안, 유다의 지도층들은 바빌론에서 포로 아닌 포로생활을 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포로민들은 자치적인 유대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으며, 바빌론이 망하자 페르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유다 땅으로 귀환한다(539 B.C.). 신명기사가나 역대기사가 모두는 바빌론 포로기의 상황을 역사로 남겨 두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포로기의 상황을 예언서(에스겔, 이사야 40-55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바빌론이나 페르시아가 남긴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적할 수밖에 없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서기전 538년에 유대인을 포함한 이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한다. "제2이사야서"로 알려진 이사야 40-55장은 고레스 칙령으로 인한 유대인의 귀향을 묘사하고 있다. 유다의 왕손이었던 세스바살은 예루살렘으로 귀향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학개와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이 바로 이때 활약하면서 백성들에게 성전재건을 촉구하였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1세의 허가를 얻어 유대인은 토착민의 방해를 극복하고 결국 성전재건에 성공한다(515 B.C.)

6. 포로기 이후시대
 페르시아의 정치적·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유다 성들의 재건에 착수한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정책에 반발하는 원주민들의 방해가 있었다. 그들의 지도층들이 느헤미야의 출현으로 자기들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채를 탕감하여 경제적인 부담을 완화시켰으며, 느헤미야 자신도 한 동안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 근검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느 5:14). 종교가인 에스라 또한 느헤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의 잡혼을 철저히 금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향과 더불어 유대 공동체는 제사장 중심의 새로운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시대에 활약한 유대인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니엘서와 함께 에스더서는 모두 헬라제국시대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알렉산더 사후 헬라의 안티오커스 4세(175-164 B.C.)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탄압은 묵시적 종말론 사상을 낳게 했다. 극심한 박해에 시달리는 유대인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이야기가 다니엘서와 에스더서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는 서기전 2세기 중엽까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예수 시대가 전개되기까지의 역사는 외경(Apocrypha)들이 소개하고 있다(박종수, 1998: 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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